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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문학
    중세문학에 관한 발표.1. 중세문학의 배경.2. 중세문학의 흐름.3. 중세문학속의 중세인의 삶.4. 중세문학을 통해 우리가 고찰해볼 문제.-중세문학 속의 여성상...1. 중세문학의 배경.중세문학의 배경을 말하기 위해서 우선은 게르만족에 의한 중세유럽 형성과정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그 세력이 약해졌을 무렵 북유럽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은 남유럽을 향해서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미 쇠퇴한 로마제국은 힘없이 게르만민족에 의해서 침입을 허용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중세문화의 뿌리가 형성된다.게르만민족은 로마제국을 비롯한 유럽을 침략하고 그곳에 거주하게 되지만 이미 우수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유럽세계에 동화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버린 것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를 융화시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게르만족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중시하며 여성숭배사상을 갖는 문화적 특색을 띠고 있었는데 이러한 게르만 특유의 문화에 유럽의 기독교적인 문화가 융합이 되면서 중세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중세문화의 흐름 속에서 게르만족의 유럽정착과정에서 보이는 전투와 영웅들의 무훈을 다룬 작품이 중세문학의 전반적인 소재로써 정착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세후반으로 넘어오며 게르만의 여성존중사상에 기독교 사상이 결합되면서 기독교의 마리아 숭배사상으로 나타나고 또, 여성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고 있는 중세 후기 기사도 문학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2.중세문학의 흐름.중세의 문학은 크게 ‘연가’라 불리는 서정시와 궁정서사시, 민중서사시로 나뉘는 ‘서사시’로 나누어서 그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데 특히 유럽전역에 걸친 문학인 게르만문학(독일문학)을 통해서 중세문학을 말할 수 있다. 우선 중세 전기에는 주로 영웅서사시로도 불리는 궁정서사시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궁정서사시의 주된 내용은 게르만이 유럽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칼 대제’의 영웅적인 이야기들과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아서왕에 관한 전설, 그리고 최후의 만천에 사용되었다던 ‘성배’에 관한 전설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세 전기의 문학에서는 위에서 말했던 내용들을 소재로 ‘군주와 기사간의 의로운 충성심’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문학에 많이 나타났으며 중세인들은 이러한 문학을 통해서 영웅적인 기사상을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니벨룽겐의 노래], [파르찌팔], [가련한 하인리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등이 있다.중세 후기로 넘어오면서 중세문학은 영웅들의 얘기가 주류이던 서사시적인 문학에 ‘여성숭배 정신의 기사도’가 가미되어 서정적이고 교훈적인 연가의 형식을 보인다.서정시한 원래 우아한 여성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한 ‘연가’의 형식인데 게르만문학에서는 서정시가 좀더 정신적인 사랑인 플라토닉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많이 알고 있는 기사문학은 게르만문학의 색채가 강한 내용들인 것이다. 게르만문학에서의 기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연모하고 그러한 여인들을 보호해 자신의 인격도야에 힘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게르만문학에서 ‘연가’라 하는 것이다. 게르만문학에서의 연가는 전통적인 기사의 부인을 숭배하는 것보다는 민중의 남녀간의 사랑이 순수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연가로써는 [보리수나무 밑에서는]이 있다.3. 중세문학속의 중세인의 삶.중세문학은 중세인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그들의 모습과 생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중세문학을 읽으면서 그들이 어떠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고 무엇을 숭상했는지 등을 추측해볼 수 있다.중세문학에 나타난 중세인들의 모습은 우선 그들이 게르만민족의 특징인 충성심과 잔인한 복수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인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잔인한 복수는 문학에 전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고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가장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는 가 있다. 이 서사시에서는 자신을 모욕한 자를 죽이고 죽임을 당한자의 부인이 또 잔인한 복수를 하다 결국에는 자신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죽게 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 서사시는 전반적으로 ‘복수’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5.04.05| 3페이지| 1,0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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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Ⅰ.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19세기로 접어들자 그전부터 성장해오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각 분야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를 지탱해주던 중심적 고리들의 이완, 붕괴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다.당시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는 봉건지배 계급에 대한 저항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조직적으로 투쟁을 벌였는데 불시에 관료와 지주들을 습격하여 봉건지배계급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19세기로 접어들자 이러한 투쟁은 보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도 최고의 형태를 보인 것으로는 이른바 홍경래란(洪景來亂)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면서 당시 성장하고 있던 사상인(私商人)층과 몰락양반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것은 농민투쟁사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한편 같은 시기인 1833년(순조 33)에는 쌀값폭등에 대한 도시빈민들의 저항이 서울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상품화폐경제가 도시에서 어떠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19세기 중엽을 지나자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은 더욱 빈번하고 강력해졌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주들의 지나친 지대착취와 봉건 말기적 조세수탈에 저항하여 일어난 소 빈농층의 봉기였다.빈농 유계춘(柳繼春)이 이회(里會)를 열고 통문을 만들어 돌림으로써 시작된 농민봉기는 악질지주와 탐관오리의 집을 부수고 진주로 공격해 들어갔다. 1876년(고종 13)에 강요된 개항을 맞이하자 농촌경제는 더욱 무너져 내렸고 농민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79년에는 울산에서 농민들이 관아로 쳐들어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방면시켰다. 1880년 황해도 장련에서도 같은 성격의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1883년 동래에서도 비슷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이러는 사이에 농민봉기와는 달리 명화적 이데올로기로서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이는 동학(東學)으로 연결되고, 또 갑오농민전쟁 당시 일반 농민군의 정서와 상당히 일치된 변혁론이었다는 점에서 19세기 조선사회의 특질을 발견하게 된다.19세기는 조선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앙을 주던 사상들 사이에 서서히 내적 교류가 이루어져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한 시대였고, 동시에 그런 사상들이 반봉건운동에 강력한 이념적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려는 여명기였다.3. 동학의 등장과 의미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과 동학을 결부시켜 그 명칭을 동학농민전쟁 , 동학농민혁명 , 동학민중운동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깊은 관련성과 농민전쟁에 끼친 동학의 기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동학사상이 어디로부터 근거하여 형성되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1)동학의 사상적 뿌리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던 1860년 농촌사회는 봉건사회의 모순과 농민층분화로 그 안정적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최제우에게도 이런 농촌현실이 그대로 보였고, 자신도 급속히 몰락해가는 양반집의 서자로서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켠으로 밀려가는 데 예외일 수 없었다.혼란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고, 사회일각에서는 서학(西學)이 기민층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서학을 하나의 사상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구도에 들어간다. 최제우는 당시 기층민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여러 사상들을 정리한 후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주역』의 선후천 순환논리를 받아들이고 당시 기층민 상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도참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장생불사 신선사상도 흡수하였다. 이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는 가운데 동학이 완성되었고, 서학에 대응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2)동학의 기본골격과 사회적 위상동학은 크게 두 가지의 사상적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첫째, 기일원론적 우주관 속에서 하날었지만 이 또한 조선봉건체제 속에서는 불온한 것이었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Ⅱ. 척왜양운동의 전개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1893년은 반외세의식을 기본으로 하는 척왜양운동이 조선의 각지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척왜양의 반외세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주도세력도 동학교단과는 거리가 있는 별개의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운동을 척왜양운동으로 규정하고자 하며 이러한 척왜양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1.공주와 삼례에서1890년대에 들어와 호서, 호남지역에서는 동학의 신도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지방수령들은 동학은 사술(邪術)이다 라는 이름 아래 교도들의 돈을 빼앗거나 관아에 잡아가곤 하였다.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동학의 남접게 서인주(徐仁周)는 1892년 10월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수운(水雲) 최제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휘하의 교도를 공주에 모이게 하고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글을 올렸다. 이것이 이름바 공주집회였다. 감사 조병식은 앞으로는 동학을 해치지 않을 터이니 해산하기를 바란다는 글을 내걸고 다른 제재조치는 내리지 않았다. 서인주 등은 감영(監營)이 고식적이고 비타협적인 반응만을 보이자 재차 교도들을 모아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이들의 교조신원운동은 단순히 신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농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대사회운동의 실마리를 추어가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벌어지자 최시형의 북접계는 미온적인 관의 태도를 보고 뒤늦게나마 교조신원운도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하여 11월에 전라고 삼례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이때도 전락감사의 해산 종용과 회유적인 글이 있었다. 그러자 북접교단은 이번 호소가 뜻과 절차에 합당했다고 밝히고 모인 교도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교도 아닌 수천명의 군중은 곧장 전주로 몰려가 감사에게 관리와 토호들의 불법탐학을 호소하였다.이것을 보면 동학교단 안에는 크게 두 세력 즉, 온건노선을 펴는쪽과 강경노선을 펴는 쪽이 존재하였는데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건노와 시기는 따로 정한다는 타협안이었다.1893년 1월 말, 봉소도소를 청주 손천민(孫天民)의 집으로 정하고, 거기서 복합상소의 제반절차를 정하였다. 소수(疏首)는 박광호(朴光浩)로 정하고, 서병학은 먼저 상경하여 한양에서 준비를 마치게 하였다. 서병학 등은 사실 복합상소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교인들에게 군복을 입혀 대병{ 이 때 대병은 임오군란을 주도했던 구식군인으로 보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주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9년 겨울호, 208쪽.과 협동하여 민씨집단을 타도학 정부간당을 멸하는 정치운동에 더 뜻을 두고 있었다. 한양에 도착한 손병희(孫秉熙), 김연국(金演局), 손천민, 박인호(朴寅浩) 등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2월 11일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그러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 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면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 는 전교가 내렸고, 북접계는 보갑상소를 중단하고 각자 고향으로 내려갔다.북접계의 복합상소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서인주, 서병학 등의 남접계는 척왜양의 괘서를 한양 거리에 내걸고 반외세(반봉건)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 괘서는 교조신원을 간청하는 북접계의 온건한 어조와는 전혀 달랐다.2월 14일 밤 미국인 학당에 벽보를 붙인 것을 선두로 하여 2월 18일에는 미국인 교회당에 괘서가 나붙었다. 다음은 프랑스공사관, 일본영사관에도 각각 괘서가 붙었다. 이중에서 미국인 교회당과 프랑스공사관에 나붙은 개서는 반외세적인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냈는데, 한양주재 다른 외교관들은 이러한 상황을 본국에 알리면서 비상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태가 발발하면 곧장 군대를 한양으로 보낼 준비를 완료하였다.척왜양운동의 주도세력으로는 대체로 서인주, 서병학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삼례에 있으면서 전라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조건{ 첫째는 동학당을 사도로 칭하지 말 것. 둘째,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 셋째, 탐학하는 지방관리 재차 서울공격을 유도하면서 새로운 계획에 들어갔다. 남접계는 북접계를 끌어내고 전봉준은 다른 지역에 사람들을 모아 교단 쪽의 운동을 반외세(반봉건)의 정치운동으로 유도하려 했다. 이리하여 충청도는 보은, 전라도는 원평, 경상도는 밀양에서 집회가 동시에 열리게 되었다.북접의 최시형은 다시 교조신원과 포교허락을 얻어내기로 결정하여 3월 11일 교도들은 보은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남접계는 보은관아 통고문을 보은 삼문 밖에 내걸었다. 군중들은 통고문의 척왜양 노선에 공감했다. 이에 따라 북접계의 통유문(通諭文)이 왜놈과 양적과는 같이 지낼 수 없는 원수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북접계로서는 사세를 따르면서 노골적인 민씨정권 타도나 현실 개혁적 표어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따른 것이기도 했다.군중들은 성채를 쌓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라는 큰 기를 내세우고 전투대형을 갖추기도 했다. 이때 모인 이들은 각기 당시 조선사회 해체과정에서 자신의 사회, 경제적 기반에 따라 재편된 여러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외국의 경우를 들어 정당함을 주장할 만큼 상당한 수준의 정치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듣건대 외국의 여러 나라에도 민회(民會)가 있어 조정의 정령이 민국(民國)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의론(議論)하여 정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어찌 비류로 취급하느냐."하여 서구의 대의제 개념, 민회를 이해하고 있었고, 거기에 따라 모임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다.지뵈의 해산을 책임맡은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은 상황을 정탐한 후 3월 26일 장내리에 가서 왕의 칙유문(勅諭文)을 반포하고, 그들의 뜻을 왕에게 전하겠다고 회유하였다. 북접계와 타협을 맺은 어윤중은 4월 1일 청주영장, 보은군수 등을 대동하고 장내리로 가서 왕의 윤음(綸音)을 읽었다. 북접지도부는 3일 안에 모임을 해산하겠다고 하였고 투항적 태도에 분개한 집회자들이 최시형 등 북접 지도부를 타도하려 하자 최시형은 손병희 등과 함께 수많은 교도를 뒤에 남긴다.
    인문/어학| 2005.04.05| 7페이지| 1,000원| 조회(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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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 역사, 산업혁명] 산업혁명기의 면공업
    {1. 머리말우리는 산업혁명을 얘기할 때 앞서 배웠던 교통의 발달, 인구의 증가 등이 산업혁명보다 선행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경제활동의 전통적 체제 안에서의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여러 혁명이 모여 이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선행조건인 것이다. 그 중 영국을 세계의 공장 으로 만든 기술과 경제적 조직의 혁명적 변화를 일찍이 경험한 산업의 하나가 면공업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면공업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다른 산업이 아닌 면공업이 왜 산업혁명의 길을 주도해야 했으며, 어찌하여 단 하나의 산업이 국가의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2. 방적기 이전의 면공업과 방적기의 발명.직물제조는 수세기 동안 영국의 국민생산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었다. 특히 영국이 뛰어났던 부분은 모직물이었는데 잉글랜드 목장에서 번성한 양떼로 좋은 질의 양모가 생산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제조업자들은 훌륭한 모직물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반대로 면공업은 뒤져 있었고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질이나 가격에 있어서 인도의 옥양목이나 머슬린과 경쟁할 수 없었다. 수요 측에서는 거친 면직물에 대한 시장이 제한되었고, 공급 측에서는 물레에 의존하는 방직공의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에 그 제품의 확장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작업은 가내수공업으로 이루어졌는데 많은 가정에서는 이것을 농업에 대한 부업으로 다루었고 농한기에 임시적인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값은 잉글랜드의 가장 좋은 양모의 값보다도 비쌌으며 생산된 면직물의 총조가치(總粗價値)는 매우 작았다.직물에 관한 일련의 주요 발명의 최초의 것은 면직물과 모직물 모두에 적용되었다. 케이(kay)의 비사(飛梭)와 포올(paul)의 소선기(梳線機)가 있었는데 두 발명은 면공업의 방적분야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던 애로를 더욱 가중시켰다. 나르는 북이 베짜는 사람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함으로써 실의 부족은 심각하였던 것이다.한편 수요 측에서도 압력이 있었는데 면직물에 대한 해외시장의 형편이 크게 좋아졌고 대륙의 시장이 개발됨에 따라 계속되었다. 동시에 영국의 인구와 국내소득 증가도 한 요인일 것이다. 1764년경에 발명된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spinning jenny는 구식의 물레에 대한 최초의 완전히 성공적인 개량이었다. 그 발명의 결과로 한 사람이 자을 수 있는 실의 양은 몇 배로 증가하였다. 노동을 절약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질도 향상되면서 그것은 급속도로 보급되고 개량되었다. 그러나 면공업의 기초를 놓아준 것은 아크라이트(Arkwright)의 수력방적기였다. 이것은 질긴 면사를 생산하였으며 혼성직물이 아닌 영국의 면직물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창조해냈다. 수력방적기는 처음부터 공장용 방적기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가내공업으로부터의 이탈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수년 후 크롬프턴(Crompton)의 뮤울(mule) 방적기는 더욱 부드럽고 고운 실을 생산해냈고 이로써 영국의 생산자는 면초의 질에 있어서 최초로 인도의 생산자를 능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보울톤(Boulton)과 왓트(Watt)의 증기기관이 최초로 방적공장에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수년 내에 면공업의 생산에서 가장 치명적인 애로는 제거되었다. 대규모 공장공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개량되었는데, 방적은 공장에 집중되었다. 방직공은 끊임없이 실을 공급받을 수 있었으며 소득도 농사를 버리고 방직에만 쏟아도 좋을만했다. 면공업은 가내 공업체제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그러나 면공업의 방직분야가 근대화에서 뒤지게 되었다. 18세기말 이전까지도 거친 면직물을 짜는 사람들은 곤궁하였다. 그들의 시장은 쉽게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역직기(力織機)의 도입은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고 1840년대 방직기가 큰 규모로 도입될 때 임금의 무자비한 저하압력에도 불구하고 자립성을 잃지 않고 있던 손베틀로 베를 짜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일은 많은 사회적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야 성취되었다.{3. 면공업의 발전과 성장 배경1/4세기가 약간 넘는 시간 안에 면직물 제조업은 보잘 것 없는 제조업들 중의 하나에서 졸업하고 가장 중요한 공업중의 하나가 되었다. 1802년 영국의 국민소득에서 면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4~5%사이였으며 1812년 그것의 비율이 7~8%사이일 때 그것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모직물산업을 능가하였다. 1815년에는 면직물 수출이 영국의 국산품 수출액의 40%를 차지하였고 1830년에는 영국의 국산품 수출액의 반 이상이 면직물이었다. 이러한 성장은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질이 좋아지면서 가격이 빠른 속도로 떨어진 예는 제조업의 역사상 그 유례가 없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이 방적분야에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가격저하가 촉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수요는 탄력적이어서 가격이 떨어짐에 따라 판매량은 그 비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공장의 포화상태를 돌릴 해외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780년대 수출량은 제니방적기 이전 양의 3~4배에 달했으며 19세기 최초의 10년에는 1780년대의 10배였으며 나폴레옹 전쟁의 말기에는 다시 3배가 되었다.면공업의 성장에 대해 공통적으로 주장되는 것은 전환기의 초기에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산업이었다는 것이 면공업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모직물 공업이 강력한 기존세력의 저항으로 변혁에서 좌절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면공업이 기술적으로 낯이 설 만큼 다른 직물공업들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영국 가정은 어떤 직물생산의 한 과정에 종사함으로써 수입을 보충하여왔고 새로운 공장제도가 낡은 가내수공업을 즉각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적인 기회와 시장수요에 응해서 설치능력의 즉각적 확장 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요인이었다.면공업을 보는 다른 관점은 면공업의 성공은 그것이 영국 경제가 충족시킬 힘이 있는 생산요소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크게 의존했다고 하는 것이다. 즉 노동집약적이었다. 숙련된 기능의 필요는 비교적 풍부한 공급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 노동자와 어린이의 노동을 이용함으로써 충분한 노동의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자본/산출비가 낮은 산업이었으며 더욱이 최종제품은 기호를 변경시킴으로써 그 자체의 수요를 창조해야 하는 그러한 새로운 제품이 아니었다. 이미 인도산 옥양목과 머슬린은 활발한 수요를 갖고 있었으며 질이 똑같이 좋은 상품이 생산될 때에는 그에 대한 시장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다른 공업에서는 거의 얻을 수 없는 큰 힘이 되었다.세 번째로 18세기 면공업이 제공된 기회에 급속하게 반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산업이 고도로 국지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면공업은 주로 랭카셔에 집중되었는데 전통적인 설명은 지리적 제조건으로 보아 랭카셔를 본거지로 하기에 유리했다고 한다. 기후와 물이 세탁과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이 상대적으로 풍부함에 따라 값이 쌌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아마사를 필요로 하던 때에 아마사(亞麻絲)를 제조하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면공업이 자리 잡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공업의 집중은 규모의 경제를 증가시키고 기술혁신의 과정을 가속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끝으로 면공업의 확장이 지속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 국민경제에 미친 영향의 강도를 설명해 주는 이유를 찾는 데 있어서는 물론 영국이 그 분야에서 새로운 기계를 만든 최초의 국가였고, 값싸고 고운 면직물을 생산한 것도 최초였으며, 그리하여 혁신가의 이윤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4. 면공업 확장의 지속요인지금까지를 돌이켜 보면 면공업의 진보는 눈부시게 빨랐으나 어떻게 보면 면공업의 변혁은 점진적이었다. 그리고 산출량의 증가가 전쟁과 불황 중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 확장은 기존의 낮게 이용되던 자원의 잉여를 이용함으로써 달성된 것이었으며 다른 용도의 자원을 돌려서 이용함으로써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니기는 노동의 생산성을 크게 증가시킴으로써 방직공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수력방적기와 뮬기는 인간의 기술에 대한 대체 물질이었다.그러나 공장은 면공업을 영국의 제조업의 맨 위에다 올려놓는 거대한 산출량의 증가 중에서 오직 일부분만 생산했을 뿐이다. 대부분은 자본가적 공장 소유자에게서 원면을 공급받는 가내 방적공과 자본가적 공장소유자에게서 알맞은 실을 공급받아서 집에서 수동식 기계로 짜는 방직공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불황의 영향을 정면에서 받는 것은 가내방직공과 가내방직공이었다. 따라서 자본가적 고용주는 호황의 이익을 대부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불황의 최악의 영향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내면공업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독립적인 가장이 공장의 피용자로 끌려 들어가는 것에 대한 끈덕진 저항이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적 고용주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의존해서 호황기의 수요에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황기에 이윤을 감소시킬 건물과 공자에다 자본을 매몰시키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1850년에 면공업 기계화의 전 기간을 통하여 자본가적 제조업자는 매우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기술변화의 조정에 따르는 부담의 대부분을 가내생산자에게 전가시킬 수 있었으며 주로 여자와 어린이 또는 젊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커다란 비조직 노동력과 쉽게 계약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다른 공업에서도 추진되고 경공업에서 여자와 어린이의 추가적 직장이 생기기까지는 노동력에 관해서는 경쟁이 없었고 이는 기술변화가 다른 직물공업과 다른 나라로 보급되는 시간을 가질 때까지는 경쟁을 받지 않는 가격으로 대량시장을 가지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1780~1850년의 기간 중에 면공업이 지속적인 진보와 산업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자본가적 제조업자가 누렸던 유리한 위치에 크게 힘입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즉 면공업이 이 기간 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은 발명가들의 재능 때문이 아니라 면공업의 기업가들의 추진력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05.04.05| 4페이지| 1,500원| 조회(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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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서양사] 마녀사냥에 대하여
    1. 마녀사냥의 배경과 원인밤의 마녀는 중세에 와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중세 이전인 기원후 1,2세기 로마인들의 저술에서도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기성을 지르고, 불쌍하게 걸려든 인간들의 피와 살을 즐겨 먹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중세의 밤/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이학사/1999/P.79그리고 중세에 와서도 마녀와 ‘야성의 남녀’“중세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인용함.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이야기되었으며 사람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관용을 누렸다. 사람들에게 그들은 격리되었고 무해했으며 접촉하기 어려운 외부인들 이었기 때문에 묵인되었던 것이다.중세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차용구 옮김/까치글방/2000하지만 가톨릭교회가 세속적 권련에 맛을 들이고 속세의 모든 것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전설로 인식되었던 마녀는 중세 사회에서 현실화 되었다. 또한 중세를 어둠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 등은 사람들에게 악마와 마녀의 소행이라는 인식을 갖게 했으며 이는 가톨릭교회의 의도와 맞물려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 결과가 생겨난 것이다. 13-16세기의 유럽은 혼란기였다. 세속을 관장하던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사건과 성직자들의 각종 부패와 타락이 드러나자 12세기 남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교황청은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자 종교개혁자의 움직임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이단을 처벌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특별수사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단의 하나로 마녀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즉 가톨릭계는 관심을 돌릴 계기가 필요했고 여기에 부합된 것이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악마와 마녀, 그리고 힘없는 여성들이었던 것이다.http://home.postech.ac.kr/~anchovy/story/witch_hunt.htm현실의 마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 있어서 철저하게 마녀사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되었던 것이다.밑줄 긋고 다시 읽는 서양이야기/유현민 편역/문예마당/19992. 마녀사냥 이전의 마녀 VS 이후의 마녀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세 이전에도 마녀에 관한 이야기는 민중들 사이에 존재했다. 마녀사냥이 있기 전인 중세 초기까지는 다이아나 숭배사상이 남아 있었는데 10세기 초 레지농이라는 수도원장이 지은 이라는 책을 보면 “이교의 여신인 다이아나와 다른 여자들의 무리와 함께 적막한 심야에 동물의 등에 올라타 먼 거리를 돌아다니고 아이아나가 그들의 주인인 양 그녀의 명령에 따라 정해진 밤에 다이아나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중세의 밤/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이학사/1999/P.81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마녀에 대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밤에 무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집회를 갖는 모습을 갖게 된 것은 가톨릭계에서 나온 책들과 사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여 진다. 한편 마녀에 대한 다른 민간 신앙도 있었는데 마녀들이 밤에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몰래 들어올 때 이들에게 음식을 차려주면 재물을 듬뿍 얻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중세의 밤/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이학사/1999/P.83이렇게 중세 초기 사람들에게 마녀는 물론 이교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였지만 사람들에게 해롭지 않은 신비한 존재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마녀사냥이 행해지던 13세기 이후로 넘어오면서 마녀는 마녀 사냥의 근거가 되었던 어린 아이를 구워 먹으며 인간의 피를 먹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는 악성 전염병의 유행과 혼란한 사회의 분위기가 맞물려 만들어진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써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3. 마녀사냥의 실상.가톨릭계의 주도하에 행해진 마녀사냥은 그 교본서가 있을 정도였으며 마녀사냥꾼을 만들어 내어 중세사회를 미치게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던 이단특별수사대의 두 신학자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는 오랫동안 이단자 색출에 힘쓰며 그 과정에서 마녀 또한 색출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을 ‘마녀의 망치’라는 책으로 출판하는데 이는 교황 이노센티우스 8세의 추천사가 붙어 각국에 배포, 마녀재판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8)http://home.postech.ac.kr/~anchovy/story/witch_hunt.htm이 책은 마녀를 색출하고 유죄의 증거로써 ‘고발’과 ‘자백’이 중시되었다. 즉 마녀로 낙인찍히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로 인식, ‘자백’을 위해 끔찍한 고문들이 행해졌다. 그리고 마녀로 낙인찍히는 것은 세상의 소문만으로 가능했다. 이는 중세에서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킨다. 한번 마녀로 고발되면 무죄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유죄가 인정되면 바로 화형되었다. 이는 원한 관계에서 많이 악용되었는데 꾸며진 이야기로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발당한 사람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아는 마녀를 지명하는 경우도 있어 마녀 사냥 당시에 화형으로 죽어간 인구가 3만명 정도라고 하니 유럽 인구를 빗대보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마녀사냥 초기에 대상은 ‘현명한 여성들’이었다. 신비적 직관에다가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거나 여성의 다산과 낙태를 돕는 일을 하던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요구되어왔던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지식과 능력이 그녀들을 마녀로 죽게 한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마녀 재판과정에서 자백을 위해 고문이 사용되었는데 잔인하고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그 예로 바늘로 특정 부위를 찔러 출혈이 없거나 물에 빠뜨려 가라앉는다거나 뜨거운 쇠뭉치를 잡았을 때 화상을 입은 사람이 마녀라는 등의 판별법이 횡횡했다고 한다.http://home.postech.ac.kr/~anchovy/story/witch_hunt.htm
    인문/어학| 2004.02.18| 3페이지| 1,000원| 조회(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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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사] 20세기 우리역사 서평 평가A좋아요
    1. 머리말우리가 현대를 살면서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역사를 쉽게 접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현대와 가장 가까운 개화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비롯한 한국의 근대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를 따져본다면 아직 규명되지 못한 일이 많다보니 다루기 어려운 것이 하나일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근대사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만큼 근대사는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 소견일 수 있으나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대사라하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치열한 권력다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근대사를 세밀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근대사에서 우리가 모르던 사실들을 통해 잃어가고 있던 우리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잃어버리고 잊혀져가는 우리 역사를 되새김으로 해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고 우리가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20세기 우리 역사』를 통해 한국 근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2. 20세기 우리 역사우리 역사에서 근대사의 시작을 개화기정도로 설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조선 후기 이전까지 우리 민족사회가 알고 있던 '세계'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이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중국은 문화적으로 선진지역이었고 한반도는 여기에 버금가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진지역으로 인식되던 중국이 일본에 의해 침탈을 당하고 서구 열강이 몰려오면서 조선 후기 사회는 혼란기를 맞고 문호개방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 문물 도입이 늦은 조선은 서양 문호를 빨리 흡수한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게 된다. 즉 능동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자본주의를 배우고 자율적으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이루어내 국민국가를 수립하지 못하였고, 부국강병을 이루어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는 안되지만, 자력으로 구가를 보위하고 독립을 유지했어야 식민지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를 행하지 못해 한반도는 일본에 강점되게 된 것이다.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제여론 앞에 대개 두 가지 점을 크게 선전했다. 하나는 조선인들도 일본의 지배기구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달게 받고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이 한반도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시책의 본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와 그 역사적 의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조선의 공업을 발전시키기보다 공업화에 희생된 자국의 농촌 대신 조선을 식량공급지로 만들려는 저액을 세웠으며 조선의 값싼 쌀을 수입하여 저곡가정책을 유지함으로써 초기 자본주의체제의 저임금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강점 직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근대적 토지소유제의 확립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해도, 식민지배 아래서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 토지의 조선총독부 소유지화가 크게 이루어짐으로써 농민적 토지소유에 역행하는 '조사사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유지로 인정된 경우도 상당한 부분이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이러한 역사 속에서 3.1운동은 거족적인 운동으로 일제강점 시대에 가장 빛나는 민족해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을 통해 조선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달게 받는다고 한 일제의 선전이 허위였음을 일시에 폭로한 운동인 것이다. 3.1운동은 민족사회의 바깥으로 보면 물론 항일독립운동이었지만 안으로 보면 공화주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3.1운동 후 일제의 지배정책은 '문화정치'라는 이름의 민족분열정책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일부 우익이 타협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적극적 독립운동 노선에서 한걸음 물러선 일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나아갈 길은 타협주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친일적 노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친일파가 생겨나게 된다. '민족개조론'이나 '민족의 경륜'은 식민지배 아래에 있는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한 건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한 인물이 가진, 자기 민족사회의 역사발전과 문화 창조력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문화정치' 시기 일본의 조선민족 분열정책에 호응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일제에 의해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식민지 지주제 아래서 자본주의적 이윤추구를 하는 지주경영 때문에 조선 농민들은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농촌에 남았다 해도 농업노동자 내지 빈농층으로 전락해갔다. 일제강점기간 동안 조선에는 이른바 3대 빈민층이 양산되었는데 농촌빈민과 화전민, 토막민이 그것이다. 그 중 토막민은 전적으로 일제시대에 양산된 빈민층이었다. 따라서 이들이야 말로 일제강점의 정직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일제강점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을 통일전선적 시각에서 볼 때, 이는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우익도 있고 좌익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연구되어진 민족해방운동사는 우익운동사뿐이었고, 좌익운동사는 공산주의운동사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다. 이는 분단시대 역사학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좌익 운동사를 빼버린 민족해방운동사는 민족해방운동의 절반이 빠짐으로써 빈약한 운동사가 될 수밖에 없고,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이 좌우익 통일전선의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았는데 좌익운동을 민족해방운도의 일환으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인식은 통일전선운동 자체도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좌익운동사에 대해 제대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1930년대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1920년대 초기 유격부대 활동과 그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속의 조선인부대의 투쟁, 그리고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조선 의용군의 활용을 빼면 193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 특히 그 무장투쟁은 미처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 한국광복군 활동에 한정되어 대단히 빈약한 역사가 되고 만다. 간략히 보면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유격대가 조직되어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계속하였고, 동북인민혁명군 안에서 조선인의 활동 역시 컸다. 또한 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속에서도 조선인 부대는 큰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파쇼체제화했고 그 지배 아래 있던 우리 민족은 갖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압정책이 절정에 다다랐던 1930년대 이후에도 민족해방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독후감/창작| 2004.02.18| 3페이지| 1,000원| 조회(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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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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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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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