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포스트모던 예술5장 관례들을 희롱하며 : 예술과 퍼포먼스. 서문:: 예술은 추상적인 철학을 구체적 형태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예술을 알면 포스트모던 사고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예술세계의 고급문화를 깨고 집단정신에서 나온 대중예술을 추구한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종종 현대 사상과 문화의 구조에 대항해 투쟁한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과거 양식을 되살리고 재현예술로 복귀하며 미와 인간적 가치들을 회복시킨다.. 예술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예술 예술가 수용자)♧ 모더니즘:: 과거의 것에 대해 심하게 반항했지만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예술을 통해 절대적인 것들 순수형상 현실에서 벗어난 아름다움 인간경험의 진리들을 추구했다.:: 가치는 독특함 영속성 초월 예술작품은 그 홀로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모더니스트 학자들은 신비평을 전개해서 작품을 자기충족적인 예술품으로 보고 내적 구조의 차원에서만 분석했다.:: 예술가가 작품에 대해 창조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가의 의도를 중시한다.:: 예술가를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통일성 영속성을 강조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절대적인 것들을 모두 거부하면서 모더니즘 실패에 응답했다.:: 예술을 희롱하고 노골적일 만큼 상업적이다.:: 허구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다양성, 일시성, 익명성, 복합문화주의 다원주의를 강조한다.:: 예술의 외적 지시성들을 복구시키려한다.:: 사회 자연 인간의 삶과 작품의 관계를 강조한다.:: 리얼리티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은 도덕적, 철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예술작품의 특권을 거부한다.::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없앤다.:: 예술가를 경시하고 역할을 축소시켜 예술 수용자의 위상을 부각시킨다.(독자반응비평):: 고급문화의 제도적 엘리트주의를 거부한다.:: 대중문화 상업주의를 수용한다.:: 과거로 열리는 현상 역사는 하나의 양식이 된다.:: 시간적 흐름 속에서 유지출처성을 축소하는 것은 대중의 참여와문화적 가치관의 민주적 결정을 위한 기회를 창출한다.:: 문화 생산자, 즉 예술가나 작가가 줄어들고 대중이 늘어나야 한다는 이론에 따를 때 예술가의 역할은 소비자들에게 원료를 공급하여 이들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재결합하고 해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더니즘의 신비평은 작품의 통합성을 전제로 했고, 어떻게 모든 부분이 전체 속에서 결합되는지를 보여주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은 불일치를 가정한다.6장 바벨의 탑들 : 건축의 예. 서문:: 건축은 순수예술보다 더 정확하게 대중적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modern)건축:: 새로운 건축물들은 초기의 고층 빌딩인 바벨탑을 연상시킨다.:: 지시성 거부 -> 건물은 자기 충족적으로써 오직 자신만을 지시해야 한다.:: 기초 원리 : 형식이 기능을 따른다.:: 물리학의 법칙 수학적 정확성 기술적 요구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건축가들은 아름다움이 자연 질서에 대한 과학적 충실성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합과 단순함에 대한 모범.ex) 고층빌딩 대량 생산된 주택:: 그러나 모더니즘적 도시 계획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철저한 현대적인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건축:: 기능에서 형식으로 복귀한다.(책이 잘못.):: 현재가 늘 최상이라는 모더니즘의 독단에 환멸을 느낌.:: 과거의 가치와 그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역사적 양식들을 재발견한다.:: 오로지 미학적인 특성만 존중한다.::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건물이 아니라 그들이 즐기는 건물을 짓는다.:: 대중주의, 인간중심주의, 상업건물.. 해체적 건축:: 통합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거부하고 불일치에 기초한 새로운 미학을 고안했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다양한 역사적 양식들을 훔쳐서 일관성이나 의미가 결여된 혼성모방작을 만든다.:: 모순된 양식들을 역사에서 끌어오고 그것들을 함께 고정시킨 결과 양식은 그 의미를 잃었다.:: 역사는 양식의 잡동사니로 바뀌고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제 세계이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 신조와 일치된 텔레비전 문화는 다양한 양식과 뒤범벅된 역사를 낳는다. -> 연결되지 않는 단편적 이미지.:: 모든 진리는 일종의 허구라 주장한다.ex) 다큐드라마는 실제를 카메라로 허구화:: 뉴스에 나오면 중요시 나오기만 하면 큰 사건이 된다.:: 뉴스 감의 기준은 시청자가 흥미로운 것으로 보느냐 아니냐이다.:: 궁극적으로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겉모양만을 보여준다.:: 관례를 갖고 노는 것이 허구성의 차원을 창조하는 것 실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를 의미하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양식의 특징이다.. 영화:: 모더니즘은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복수의 시각을 사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들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다른 세계들을 만들어 내고 인물들은 그들이 어떤 세계에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들의 공통점은 영화 제작과 영화 관람의 관례들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허구화된 세계를 만들어 낸 후 우리가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과 날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혼란시킴으로써 우리가 둘 사이에 세우는 벽을 의심하게 만든다.. 메타소설:: 대중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의 ->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작업 자체와 함께 소설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을 이울러 탐색하고자 한다.:: 소설 속의 소설이다.:: 자의식적인 경향이 짙은 소설이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마술적 사실주의란 공상과 사실성의 혼합물이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경험상의 진실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포스트모더니스들은 이러한 모더니즘적 집착을 의문시 한다.ex) 존 스타인벡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설명할 수 없는 공상에 의존하고 무표정한 사실주의로 끝난다.ex) 그라운드호그데이:: 마술적 사실주의는 전통적인 공상이 아니다.:: 외부세계에 개방적이기 때문에 역사소설이 다시 유행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은 불행히도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허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대체물로서 허구를 사용하고 있다.:: 뉴 저널리스트들은 실레 사건에 대해 쓰지만 소설 기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기법은 역사적 사건들을 생생하게 만들지만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진리를 왜곡하게 마련이다.:: 진리는 허구화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상력의 산물 어떤 종류의 허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왜곡을 정당화한다.:: 진리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는 사실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객관성을 거부하고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원래의 입장을 고수한다.. 극 사실주의(super realism)♧모더니즘:: 모더니즘은 추상예술을 장려했다.:: 전통예술은 구상적이다.:: 겉모습의 초월에 관심을 갖는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은 자기충족적, 미학적 예술품으로 작품 외부의 사항들이나 이미에 오염되지 않아야 했다.:: 재현미술이 살아난다.:: 미술들은 정형적이며, 생기와 존엄성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모더니즘 예술은 외부세계와 관계없는 의미를 장려한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의미와 동 떨어진 외부 세계를 고양한다.제 3부 포스트모던 사회8장 신 종족주의(The New Tribalism). 도입:: 포스트모더니즘은 양식적 다양성을 장려하면서 또한 양식을 표면으로 환원한다.:: 복합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문화 상대주의가 우세하게 되고 모든 문화를 긍정하지만 동시에 모든 문화를 파괴하기도 한다.. 분할:: 사회는 수백 개의 하위문화와 이자이너 숭배집단들로 분할되고 각각은 고유한 언어의 기호와 삶의 양식을 갖춘다.:: 사회변화 기술발전 포스트모더니즘 이데올로기의 조합은 통합된 우너리를 무너뜨리고 각 개인이 하위문화에서 정체성을 찾도록 내몬다.:: 지배적인 문화 정체성의 상실 가정의 붕괴되고 지역공동체의 붕중심에 놓는다.::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문화의 차이를 왜곡하고 과장한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무시하고 집단 속에서의 인간만을 강조한다.:: 현대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것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란 원시적인 것에 부흥에 불과하다.:: 복합문화주의 속에 자기의 고유한 문화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적 접근방식은 다른 문화의 표면 아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각 집단으로 추려 내려는 사로 방식은 사회를 분할하고 양극화하는 것을 조장한다.:: 관용을 증진시킨다고 하지만, 인류를 상호 배타적인 문화권으로 분류하는 태도는 배척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나쁜 복합문화주의는 이 세상의 야비함의 주요 뿌리인 종족주의를 촉진한다. 좋은 복합문화 주의는 존경과 이해의 발판인 공통성을 강조한다.9장 힘의 정치. 도입:: 개인의 자유에서부터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거의 모든 가정을 공격받고 있다.:: 자유롭고 자치적인 사회라는 개념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함축성1.사회 구성주의의미, 도덕성,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2.문화 결정주의각 개인은 전적으로 문화 세력들에 의해 형성된다. 특히 언어는 우리를 언어의 감옥에 가두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3.개인 정체성의 거부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집단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미국의 개인주의 현상은 독립성과 자기반성이라는 중산층의 가치관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집단적인 것이다.4.휴머니즘의 거부창조성, 자율, 인류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가치관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문화는 고유한 현실을 형성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간성은 없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가치관은 배제의 규범이며 억압이며 자연 환경에 대한 범죄이다. 각 집단은 자신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자기 고유의 가치관을 주장하고 다른 종들과 함께 자기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5.초월적인 것의 부정절대적인이다.
호출을 읽고...우리는 보통 갈망하는 상황이나 대상이 있으면 소망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흐믓해 하곤 한다. 그런데 사람의 상상이란 끝이 없다. 이 말은 한사람이 어떤 사물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또 한 사물을 봤을 때 떠오르는 생각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게는 상상하는 것이 비슷하다. 예를 들면 한려수도를 배를 타고 건너면서 상상하는 것은 이순신이다. 또 예쁜 여자 사진을 본다면 자신과 사귀는 상상을 한다. 또 대게 상상은 뒤죽박죽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거나 스토리 전개에 문제가 있다.호출은 ‘김영하’라는 작가가 달력에 있는 여자 사진을 보고 상상한 내용을 썼다. 상상한 내용을 썼다고 해서 이 소설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스토리도 짜임새 있고 나중에 그것이 상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반전의 효과도 주었다. 그러나 나같이 글쓰기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달력에 있는 여자 사진을 봤을 때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적었을 때 이 소설처럼 짜임새 있고 남들이 읽을 만 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차이가 바로 인정받는 소설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점인 것이다. 상상만으로 이런 짜임새 있는 글을 썼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글에 무외한은 내가 느낀 첫 번째 느낌이다.호출에서 주인공은 절실히 원하는 것이 없다. 가령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노력은 하지만, 그 노력이 부족하고 결국은 실패한다. 그 예로 주인공은 여자친구랑 헤어질 위기에 놓인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의 탓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깨질만 하니까 깨진 것이라고 결론짓고 여자 친구를 놓아 준다. 참고로 나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깨지지 않을 때에는 서로가 어떠한 행동은 한다고 해도 용서가 되지만, 깨질 만 할 때에는 사소한 일에도 서로의 감정이 상한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만약 그 여자 친구가 계속 자신의 옆에 남아 주기를 절실히 원했더라면 대책을 세웠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를 그냥 보내버렸다. 그는 또 결혼식장에 참석해서 여자에게 복수를 할까 생각했지만 그는 결국 상상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그는 또 이성에 대한 갈망을 머리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래서 수지라는 캐릭터를 하나 설정하고 그녀와 알가는 상황을 그려가며 가슴 졸인다.내 생각에는 작가가 호출이라는 단편을 쓰면서 주려고 했던 메시지가 이런게 아닌가 싶다. 요즘 우리는 컴퓨터라는 도구의 힘으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이버 세상을 접한다. 사이버 세상에서 ID라는 이름과 아바타라는 얼굴로 현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식상한 소재가 되었겠지만, 가상현실이라는 소재는 이 소설이 발간된 97년 이전에는 새로운 소재였을 것이다. 그 시대에 게임방이 우우죽순처럼 생겨나고 일반인도 인터넷을 손 쉽게 다룰 수 있는 시대가 오면서 가상현실의 폐해에 대하여 생각해 본 것은 아닐까? 또 주인공은 현실과 상상세계를 혼돈하고 있다. 자신이 여자에게 실제로 호출기를 줬는지 아니면 상상으로만 그런건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 한다. 작가가 이런 모습이 나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인 것만은 확실하다. 작가는 과학 기술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인공과 같은 삶은 나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이 생각이 맞다면 작가의 미래를 보는 눈은 정확한 것이다. 책이 발간된지 5년도 체 안됐는데, 요즘 인터넷에서는 폐인들의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dcinside라는 싸이트를 꼽을 수 있다. 밥을 먹으면서 컴퓨터를 하는 자신이나. 그것도 귀찮아서 이불에 누워서 컴퓨터를 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휴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런 목적없이 컴퓨터를 하는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서 보다 가상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쉽다. 우선 걸어다니면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외모에 신경을 안 써도 된다. 또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만 만나면 되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접속을 끊어 버리도 된다. 또한 원하는 것을 현실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만약 실패 한다면 reset이 가능하다. 이런 점은 상상세계에서도 나타는 특징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점점 가상세계에 접속을 더욱 많이 한다. 때문에 주인공도 상상세계에 접속을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호출의 주인공은 왠지 우리와 닮았다.
RICHARD DAWKINS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무수히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종류로만 따져도 무수히 많지만 개체수로 따지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동식물이라고 하면 아메바나 바이러스 등의 단세포 동물들과 인간을 제외시키기 쉽지만, 사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동식물 에 모두 포함된다.이 수 많은 동식물들은 지구에 탄생한 순간부터 모두 하나의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동식물의 모든 생명 활동이 번식을 위해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방법의 차이는 있었다. 식물들은 광합성을 하고, 초식동물은 풀을 뜯어 먹고, 육식 동물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이 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목적은 모두 동일하다. 모두 번식을 위해서 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을 예외라고 믿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예외일 수도 있지만......) 문화라든지 예술이라든지 고귀해 보이는 활동을 배제하면 인간도 궁극적으로는 번식을 위해 행동하는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동식물들이 하나의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우리(동식물)가 생명 활동을 하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하면 대답이 도출된다. 여태껏 우리는 동식물들을 바라볼 때 그 개체 하나하나를 의지가 있는 주체로 봐왔다. 이러한 관점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러한 관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결론부터 말하면 동식물의 주체는 각 개체가 아닌, 그들의 몸 안에 있는 유전자 들이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생각해 보며 이러한 결론은 사실 당연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존재해 왔던 것이 개체가 아닌 바로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그럼 각 개체는 무엇일까? 개체는 유전자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기 위한 하나의 도구, 즉 로봇이다.우리는 자연을 냉정하다고 한다. 부상을 당한 초식동물은 육식 동물에게 더 잘 잡아먹히고, 어린 새끼들은 육식 동물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럼 유전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냉정한 자연에서 살아남았는가??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유전자의 본성은 아주 이기적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여기서 이기적인 유전자의 범주는 한 개체에 소속된 동일 유전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타 개체에 포함되었을 지라도 동일한 기원과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역시 같은 범주로 포괄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유전자들은 분명히 다른 유전자들과 경쟁하면서 살아 왔다. 작가는 가장 성가신 경쟁자를 타 종이 아는 동종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동종끼리는 필요로 하는 자원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기적이 아닐 수 있지만, 만약 무리 중에 하나의 이기적 유전자가 나타났다면, 그 이기적 유전자가 생존에 더 유리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무리 안에는 이기적 유전자의 복제자들이 판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존한 유전자들은 같은 맥락에서 이타적 유전자이기 보다는 이기적 유전자일 확률이 더 높다.그러면 동족끼리 또는 상리공생 관계에 있는 동물들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실제로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이 무리를 지어서 사는 것은 이타적 행동이 아닌 이기적 행동이다. 무리지어 살면 포식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고 먹이도 더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무리 중에 하나가 포식자를 발견했으면 자기 혼자 도망쳐야 이기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경계음을 내서 동료들과 함께 도망친다. 경계음을 낸다는 것은 포식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행위 이므로 그 개체의 유전자에게는 불리해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유전자 입장으로는 혼자 도망치는 것이 더 불리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포식자는 무리에서 이탈한 사냥감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계음을 내지 않아서 다같이 도망을 안 가는 것이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신이 포식자에게 잡힐 확률을 높일 뿐이다. 자신의 행동에 도움이 되는 것은 경계음을 내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작가는 동식물에서 인간도 제외되지 않는다고 하며 인간이 인간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역시 작가 자신도 인간이고, 또 실제로 인간이 약간은 특이한 점이 있어서 그런지, 인간을 별도로 다룬 부분을 책에 삽입 시켰다. 이 부분(chapter11. 밈-새로운 자기 복제자)을 읽어보면 여태껏 가지고 있던 생각-작가가 너무 끼워 맞추는 듯하다-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유전의 영역을 생명의 본질적인 면에서 인간 문화로까지 확장한 이른바 밈(Meme)이론, 즉 문화 유전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의 핵심적 개념인 밈은 저자가 만든 새로운 용어로서 모방을 의미한다. 유전적 진화의 단위가 유전자라면, 문화적 진화의 단위는 밈이 되는 것이다. 유전자는 하나의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복제되지만, 밈은 모방을 통해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복제된다. 결과적으로 밈은 유전적인 전달이 아니라 모방이라는 매개물로 전해지는 문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생명체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자신의 형질을 후세에 전달하는 것처럼 밈도 자기복제를 하여 널리 전파하고 진화한다. 그리하여 밈은 좁게는 한 사회의 유행이나 문화 전승을 가능하게 하고, 넓게는 인류의 다양하면서도 매우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너무나 그럴듯하나 왠지 모르게 믿음이 안가고 끼워 맞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상황적인 정황만이 있을 뿐 명쾌히 증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예를 들면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너의 부모가 너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누군가가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신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첫째.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사실, 둘째. 그것이 편의상 유전자의 의지라고 하지만 실제는 의지가 아니라 자연 선택이라는 사실(이기적이면 이타적일 때 보다 생존 확률이 커진다), 셋째. 집단 내 각 개체의 행동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ESS) 으로 귀결된다는 사실 등을 꼽을 수 있다. (밈의 의미도 중요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이 책의 제목은 아마 모든 사람이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나도 어렴풋한 내용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 책의 내용이 왜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인가?그 이유를 위의 세 가지와 접목해서 본다면 이기적이라는 것이 유전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로봇인 개체에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저장시킨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므로 그의 프로그램으로 행동하는 우리 인간들은 당연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옛날부터 논쟁이 되어온 선악설과 선성설이 균형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이기적인 유전자의 의지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또한 악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므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 를 보면 컴퓨터가 인간을 규정할 때 포유류가 아닌 바이러스로 분류했다. 다른 동식물들은 자연을 깨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데 인간만이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면서, 바이러스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너무도 유명하다. 아마 서양의 문화가 유입된 나라의 국민들은 아마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철학의 대가로 알려 졌고, 글쓰기 수업을 받아본 학생이라면 한번쯤은 그의 관한 책을 읽어 봤을 것이다. 나도 중,고등학교 때 논술 수업을 들으면서 그에 관한 프린트는 읽어 봤었다. 그러나 요약본이 아닌 책으로 읽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옛 동화처럼 줄거리와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예상대로 책으로 읽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대화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아침에 감방에서 그의 친구 크리톤과 이루어진다. 크리톤은 친구인 소크라테스가 감방에 갇혀 있으므로 그를 구해 주려고 감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잘못된 형벌을 살고 있어서 구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말만 그런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크리톤는 다른 사람들이 “친구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부자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비단을 받기 싫어서 소크라테스를 탈출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한다. 아니 거절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설득해서 데리고 나가라고 한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크리톤은 그를 설득하려했고 그들의 대화는 시작된다.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탈출을 하라고 권하다. 그리고 자신이나 탈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소크라테스 친구들한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이 탈출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못한 일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려했다. 그리고 크리톤에게 조목조목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우선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크리톤에게 무지한 대중의 소리는 신경쓸 필요 없고 전문가 한 사람의 말만 듣는 것이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방법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상황에 연관해서 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좋은 예로써 그가 애인을 동반하고 평가전에서 패하자 그를 물러나라고 떠들었지만 그의 능력을 대중이 모르고 했던 소리였다. 이렇듯 대중이 전문적인 지식도 없이 단지 표면적인 상황과 직감에만 의존하면서 국가 정책이나 중요인사에 간섭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자신에게 탈출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속삭인다고 말한다. 우선 국가는 소크라테스에게 부모님들이 국가 안에서 결혼하셔서 너를 낳았고 국가에서 교육을 시켜줄 기반을 마련해 줬는데, 그런 국가를 자신의 맘에 안 드는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떠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에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대답을 못한다. 둘째로 국가는 70년 동안 국가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아테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 나라의 법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를 옮기겠다고 했으면 절대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인데 70년 동안 한번도 그러지 않았고, 또 사형을 선고 받았을 때고 자신이 원하면 사형대신 추방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테네 법률을 인정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했다. 여기에도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 셋째로 만약 법이 잘못되었고 국가가 잘못된 명령을 했으면 악법을 바꾸고 국가를 설득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의무였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그리고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평등한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 같은 존재인데, 아버지가 내리신 명령이 잘못됐다면 정중하게 설득을 하고 설득을 못시키면 기꺼히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소크라테스의 말은 오류가 없다. 앞뒤가 딱딱 맞고 반론을 제시할 틈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도 사람이고 당연히 완벽한 인간일리 없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적접적인 언변대신 소크라테스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소크라테스는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조금 자세하게 탐구한다인 사람들하고 약간 다른데, 소크라테스는 표면적인 옳고 그름보다는 근본적인 옳고 그름을 더 따진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정치인들을 얘기할 때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어떻게 하면 더욱 정치를 잘할 수 있는지 그런 얘기를 하는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아야 하고, 개개인들 모두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현실적인 것보다는 이상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있고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실에서는 무지를 깨닫는 것보다 전문 지식을 쌓아서 성공을 하고, 부정은 언제나 존재하니까 저질러진 부정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습을 할 것인지 이러한 것이 더 중요한데 이런 현실 문제보다는 이상적인 논의들만 하니 그 당시 정치인들 탐탁치 못하게 여긴 것은 너무 당연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이성에 호소했다는 의미와 이상적인 논의를 했다는 의미는 다른 것 임을 밝힌다.)만약 소크라테스가 현실문제보다 이상적인 논의를 했다는 전제가 옳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소크라테스는 진정으로 완벽하고 바람직한 사람은 아니다.그 이유로는 3~4가지를 들을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가는 죽음을 택한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우선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해서는 다른 신념이 더 좋다는 이유를 듣지 못하는 이상 믿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크리톤이 탈출을 하자고 해도 반대했고 자신을 설득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사형 시간이 다가왔어도 둘은 태연하게 대화를 했고 그 대화를 모은 것이 크리톤이라는 대화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잡혀 들어온 죄목을 떠올려 보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나쁜 길로 빠뜨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악행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를 고발한 사람의 의견이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을 아테네를 위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아테네 시민을 위 그 결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말의 몸집이 너무 거대한 나머지 운동을 안 하면 죽음으로 갈 수 있는데 등에가 있어서 말이 열심히 운동을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자신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아테네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역할은 ‘등에’지만 아테네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니까... 그럼 소크라테스가 도망쳐 살 수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도망치는 것은 국가의 법을 어기는 일이고 범법행위는 소크라테스가 한 시민으로써 아테네 법을 인정했기 때문에 어길 수 없다는 주장어었지만 나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말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친구한테 술 사달라고 하면 친구는 내 건강을 위해서 그럴 수 없다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단지 돈을 쓰기 싫은 것뿐이다.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이때 나이가 70이었다. 어차피 살아도 얼마 못사는데 굳이 탈출해서 다시 아테네를 위해 살기가 싫어진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도망치면 아테네를 떠나야 되는데 도망자에 몸으로 아테네로 몰래 돌아와 그가 옳다고 생각한 ‘등에’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일이었고 설사 도망을 쳤다 해도 불가능 했을 것이니 그래서 그냥 죽음은 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도 역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두 번째 이유는 크리톤이 자신의 명성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도와 줬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도 현세와 후세에 자신의 명성이 나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이 도시로부터 탈출 하므로써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마라”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싫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옳다고 믿은 “아테네를 위해서 ‘등에’의 역할”을 실천하려면 자신의 명성 정도는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이다. 무지한 대중 보다는 현명한 한 한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옳은 일을 위해 탈출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얼핏 든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말하는 올바른 삶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주장한 “해를 입더라도 보복을 하면 안 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오류가 있어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한 일은 악행이 아닌 등에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그럼 등에가 무엇인가? 말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이다. 분명히 등에는 말에게는 피해를 주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피해로 인해 말은 건강해 진다고 하면서 ‘등에’의 존재를 옹호한다. 그럼 마찬가지로 보복을 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지만, ‘등에’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피해를 줬던 사람도 개선이 되고 사회도 안정되는 것이 아닐까? 피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을 안 한다면 그는 계속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고 사회에 해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라면 보복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보복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 되기 위해선 보복을 하는 다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비슷한 경우를 들면 신과 악마를 들 수가 있다.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면 악마도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은 추앙하고 악마는 경멸한다. 그런데 사실 신은 악마 때문에 추앙 받을 수 있다. 악한 악마가 없다면 선한 신도 없다. 악마가 악역을 맡지 않는다면 주인공인 신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다. 마찬가리로 보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바람직한 것이 되려면 보복을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 ‘등에’ 같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말대로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