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 황제 중심의 관료 제도의 기반”1. 서론2. 본론1) 과거제도 이전의 관리임용방식과 귀족세력2) 과거제도의 시작과 형태3) 황제 중심의 관료제도의 변화3. 결론1. 서론중국은 하늘에서 위임을 받은 천자, 즉 황제의 지배체제 아래에 있는 사회였다. 하지만 하나의 집단을 단 한 사람이 모두 관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특히 넓은 중국 대륙 전체를 황제 혼자서 통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여러 방면의 일을 맡아서 할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고, 관료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일을 맡아서 하는 관료를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관료를 선발하는 일정한 기준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료 선발의 방법이 되었던 것이 ‘과거(科擧) 제도’ 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제도는 실시가 되었으며, 과거제도에서 나온 ‘장원급제’라는 말이 아직도 이용이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관리임용방식으로 이용되었던 제도라면 그것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거’라는 제도가 어떤 방식의 제도였으며 이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중국의 관료를 선발하는 모습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따른 관료와 황제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려한다.2. 본론1) 귀족사회과거제도가 시작이 된 수(隋)나라 이전 시대의 관리 임용제도는 어떤 형태를 띄고 있었을까? 먼저 고대중국의 관리임용방식의 기본은 薦擧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요순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尙書』「舜典」을 보면 홍수가 범람하자 사방 부락의 수령이 舜임금에게 ?을 천거하여 치수토록 하였는데, 순은 곤을 전혀 신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령들의 천거를 존중하여 곤을 임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렇게 고대부터 시작된 천거제도는 황제가 세습이 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게 된다. 周나라를거쳐 춘추전국시대에도 관리의 임용의 주된 방법은 천거의 방식을 이용하였다.이후 漢나라에서는 察擧制度라는 관리임용방식을 시행했다. 그리고 魏나라는 九品中正制라는 임용방식을 시행했으며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동안 약간의 변화를 거치며 계속 사용되었다.이러한 관리의 임용 방식은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천거제도, 즉 추천에 의한 임용이라는 것에서는 모두 비슷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추천을 기반으로 하는 관리임용방식은 이상적인 모습으로 실행이 되면 능력 있고 덕망 있는 인재들을 쉽게 모을 수 있고, 그에 따라 뛰어난 관리들이 임용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의한 추천이라는 것은 추천을 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특정 개인의 편의를 위한 천거가 될 수도 있고,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천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기에 좋은 제도이지만 반면에 원래의 의도가 변질될 가능성 또한 매우 높은 제도인 것이다.문벌 귀족 사회가 성립되어있던 상황에서 지방, 혹은 중앙 관료들에 의한 천거는 능력 있는 인재를 뽑는 것 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기에 좋은 방향으로 이용되었다. 천거제도는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추천방식의 관리 임용은 귀족의 세력과 기반을 강화하고, 황제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2) 과거제도의 시작과 형태隋왕조를 세운 文帝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전에 사용되던 구품중정법을 폐지했다. 그는 지방 정부에 대한 귀족의 세습적인 권리를 일절 인정치 아니하고 지방 관서의 고급 관료를 모두 중앙 정부에서 임명했다.) 이는 관리의 임명에 대한 권리를 중앙 정부가 모두 가져왔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앙에서 모든 관리를 임명하기 위해서는 항상 관리가 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수나라 이전에도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이 치러지긴 했지만, 이전의 시험들은 추천 받은 사람들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반면 구품중정제가 폐지된 이후의 수나라의 시험은 이전과 달리 추천이 없이 희망자가 시험을 치르게 하는 방식이었다. 전자가 추천 이후 시험이라는 닫힌 제도였다면 후자는 모든 국민에게 열린 제도인 것이다.이렇게 시작된 과거제도는 唐대를 거쳐, 宋대에서 완성되고 元, 明을 거쳐 淸말까지 1300년간 이어졌다. 이렇게 이어져온 과거제도는 조금씩 변화를 가지며 청대에는 매우 복잡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청대에는 학교시라 할 수 있는 현시, 부시, 원시, (세시)를 거쳐 과시, 향시, 회시, 전시를 거쳐야 관료로 임용이 될 수 있었다. 이 중 앞의 학교시라 말하는 시험들은 학교라는 제도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다. 하지만 명대부터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자는 반드시 국립학교의 학생 즉 생원(生員)이어야만 한다고 규정되었으므로), 결국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야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는 과거 시험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과거제도의 채점 방법은 매우 복잡하면서, 공정함을 갖추려는 모습이었다. 과거 시험의 과정 중 하나인 ‘향시’의 채점 방법은 아래와 같다.수험생의 묵권은 우선 표지에 씌어진 성명, 연령 등의 부분에 풀을 칠해 봉하고 좌석 번호만을 남겨둔다. 다음에는 답안을 옮겨 적는 사람들에게 보내 다른 종이에 옮긴다. (중략) 이 때 옮겨 적는 사람이나 교정하는 사람 모두 자기 이름을 기록하여 책임을 명확히 한다. (중략) 외렴관과 내렴관 사이의 전달은 단지 한 지점의 좁은 문에서 이루어지는데, 엄중한 감독 아래 주권이 전해진다.)이와 같은 예에서 공정한 채점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여러 가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시란 이름의 시험은 원대 이후 시행된 시험으로 당?송 시기의 발해시에 해당되는 과거제도였다.) 과거시험의 채점 방식이 처음부터 위와 같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국가의 관리를 뽑는 시험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정한 심사를 위한 제도적 변화를 거쳐 온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공정한 심사를 중요시 했던 만큼 부정에 대한 처벌 또한 강력했는데, 1858년에 있었던 향시 부정 사건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이들 배임죄에 대한 판결을 극히 엄중했다. 정고관 백수는 사형, 동고관 포안도 사형, 부정합격한 나홍역과 그를 위해 청탁을 했던 친구인 관리, 동고관 정정계의 아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중략)사형에 처해진 사람 가운데 정고관 백수는 1품(品)의 대관,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급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후략))시험의 부정에 따른 처벌이 사형이란 것은 그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학능력시험 등의 시험에서 부정이 일어났을 경우, 결과 박탁, 자격 제한 등의 처벌이 이루어지지만, 시험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부분까지 처벌의 정도가 넘어오지 않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처벌은 시험의 부정을 매우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과거 시험의 절차 중 ‘전시’라는 시험은 매우 특정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험관이 ‘천자’라는 것이다. 과거시험의 제도가 귀족사회를 무너뜨렸지만, 시험으로 만들어지는 관료제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붕당의 대립과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시험관과 시험 합격자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사적인 관계가 맺어지고, 그 결과 정치가 전체의 이익보다 집단의 사적인 이해에 좌우되는 폐단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송태조는 마지막에 천자 스스로가 시험관이 되는 시험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시의 기원이다.당대에는 이부(吏部)에서 최종 시험을 담당했는데, 이 시험은 앞의 시험들과 달리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주관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시험이었다.) 앞선 시험에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이 과정에서 이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은 관직을 얻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전시의 실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게 된다. 즉, 천자가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부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고, 이부의 시험은 형식적인 시험이 되었다.3) 귀족사회에서 황제 중심의 관료사회로과거제도는 황제와 관료 사이의 관계를 과거제도 이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귀족의 입김이 작용하던 관리 선발이 황제 중심으로 옮겨오게 되고, 이러한 관리의 성격의 변화는 황권의 강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천자의 권위까지도 위협할 만큼 성장했던 귀족사회는 무너지게 된다. 귀족들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혹은 그 자신들이 고위 관료의 자리를 차지해야한다. 과거제도 이전의 천거 방식의 관료임용 시기에는 그 추천 자체에 귀족들의 힘이 개입되기가 매우 쉽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을 관직에 진출시키기가 매우 쉬웠다. 이는 귀족 세력의 강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모두에게 열려있는 과거제도가 시행된 이후에는 관리 임용에 이전과 같은 귀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세력의 기반이 사라지게 되어 귀족세력은 약해지게 된 것이다.앞서 말한 복잡하고 공정한 채점방식과 부정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황제 중심의 관료 임용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과거 시험의 채점이 공정하지 않게 이루어진다면 관리임용시험이라는 의미 자체가 퇴색될 뿐 아니라, 선발 과정에 다른 세력들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즉, 천거제도에서의 폐단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부정에 대한 처벌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엄격한 처벌이 관리 임용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천자가 중심이 되는 관료 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전시’라는 시험이 황권 강화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황제 자신이 시험관이 되는 전시의 가장 큰 의미는 합격자들을 황제가 직접 선발했다는데 있다. 과거가 치러진 이후 시험관을 스승으로 받드는 사제관계의 모습)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모습이 관리들 사이에 당파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어 황권에서 볼 때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천자가 직접 시험관이 되는 전시가 시행되면서, 황제 자신이 합격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최종 관리직의 선발에서 다른 외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선발 사람들이 중요 관리가 되어 황권의 강화로 돌아왔다.
명 태조 주원장-명의 건국과 제도적 기틀1. 서론2. 원 말의 혼란과 명의 건국3. 개국과 중앙집권4. 정권이 기둥과 사회의 발전5. 결론1. 서론원나라 말 20여 년간은 정부 내에서는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고, 홍건적의 난 등으로 농민은 봉기하였으며,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세력이 지방에서 일어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 빈농의 아들이었던 주원장은 중국 전체를 통일하고 명나라를 세웠다. 기반세력 하나 없었던 주원장이 넓은 영토를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으며,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어떻게 안정시켰는지 알아보자.2. 원(元) 말의 혼란과 명(明)의 건국원나라 순제 지정 4년의 상반기에 회하 유역의 백성들은 가뭄과 메뚜기 떼 피해 그리고 전염병의 창궐로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회하 유역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상황이었다. 지주들은 악독하게 소작인들을 부렸으며, 관리는 부패했고, 정부는 여전히 백성의 등급을 나누어 차별했다.) 주원장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염병에 가족들이 죽어나가고 먹고 살 길조차 없어질 때 절에 들어가 있다가 명왕을 받드는 미륵교를 중심으로 한 홍군의 봉기 때 홍군으로 들어왔다. 체격이 좋은데다 기억력도 뛰어났으므로, 겨우 10여일 만에 부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부대에서 높은 자리로 올랐으며, 점점 더 많은 군사를 이끌게 되고, 좋은 부하들을 많이 얻어 점점 더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난세에 일어난 세력들을 모두 정리하고, 원나라 순제를 몰아내며 중국을 통일하고, 大明이란 이름 아래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주원장이 이렇게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첫째 기반은 그 자신의 능력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체적인 조건이 뛰어났으며, 일 처리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원장은 부지런하면서도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며, 또한 과감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나갔다. 명령을 받으면 처리가 아주 빨랐으며 마무리 또한 깔끔하였다. 전투할 때는 다른 병졸보다 앞장을 섰 양식을 가리지 않고 원수에게 바쳤으며, (중략) 몇 달이 지나자 부대 안에서는 용감하고 능력 있고 대범하며 식견이 있고 의리를 지키며 인간관계도 좋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심지어 곽원수도 그를 심복으로 삼아 수시로 일을 의논하며 그의 말과 계책을 듣고 따르게 되었다.)이러한 주원장의 모습은 큰 세력을 가진 후에도 지위에 따른 변화는 있었지만 그대로 유지 되었고, 큰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통일을 얼마 앞두고 ‘소명왕’에게서 등을 돌리기 이전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을 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관련되지 않은 백성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통일을 하게 되었다.3. 개국(開國)과 중앙집권세력이 아무리 커진다고 해도 전체를 통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주원장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농민 봉기로 시작된 홍군의 위치에서 시작했고, 그 자신 또한 빈농 출신이었으므로 일반 민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서달이 진강을 공파하였을 때 호령은 엄하였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보통 때와 같이 장사를 하였으며, 마치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다른 성의 사람들도 주원장의 군대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군기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마음을 놓게 되었다.)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행동이 주원장의 본래 심성이든, 민심을 얻기 위한 행동이든, 민심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민심은 곧 여론이 되고 주원장의 세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또 다른 이유는 세력이 커지면서 주원장이 가진 성격의 변화이다. 미륵교를 중심으로 한 계급투쟁으로 시작된 홍건의 봉기에서 시작된 주원장의 세력은 기존의 지주를 받아들이고, 농민의 입장에서 시작된 자신과 부하들이 신흥 지주화 되면서 봉건지주 계급질서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주원장의 일생 가운데서 한 시대를 구획하는 큰 변화로서, 농민 봉기의 영수로부터 지주계급의 영수로 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면서 소명왕을 배반하고 스스로가 세력의 최고 위치에 서게 되었 않고, 끝까지 농민 봉기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기존 지주 세력들을 없앨 수는 있었어도 결코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통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훨씬 힘들고,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주 세력으로 흡수된 유기, 송렴 등은 주원장 옆에서 명이 건국된 이후까지도 큰 힘이 되었다.모든 논의를 마치고 준비가 갖추어지자, 중서성좌승상 선국공 이선장이 문무백관을 이끌고 표를 올려 원장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중략) 이 제고문은 원나라 몽환지주계급 연합정권의 전복과 자신의 황조 건립을 모두 상제에게 미루고 있다. (중략) 이 날의 날씨는 당연히 아주 좋아 해가 밝게 내려 쪼이고 바람은 잔잔하였다. 세찬 바람과 이상한 광경은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으니, 상제가 허락한 것이었다.)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 왕조의 황제들처럼 천명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홍무 원년(1368) 정월 4일, 주원장은 천하의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하였으며, 응천(?天)을 수도로 삼았다.) 대명이란 이름으로 개국을 한 것에서 주원장은 기존 농민 세력과 나중에 받아들인 지주 세력 모두를 만족시켰다. 농민봉기에서 시작된 대부분의 농민들은 미륵교를 믿었으며, 미륵교는 명왕(明王)을 받드는 종교였다.) 지주 출신의 유생집단의 관점에서도 明이라는 제국의 명칭에 대해서는 오히려 유가의 시작으로 이해하였다.) 결국 大明이라는 국호는 주원장의 아래에 있던 전혀 다른 입장의 두 집단을 모두 만족시켰다.건국 후 주원장은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했다. 우선 지방기구를 원대의 행중서성을 포정사사로 바꾸었다. 행중서성은 군정, 민정, 재정을 관장하여 직권이 지나치게 컸다.) 이러한 행중서성은 주원장 자신이 소명왕 아래에서 그러했듯 실제 독립왕국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다. 포정사사의 지리적 분포는 대체로 원나라 행중서성을 이어받았으나 포정사는 오직 재정과 민정만을 관장했다.) 즉, 행중서성 제도다시 찾아온 것이다.조정의 통치기구의 개혁은 중서성을 없앤 것이다. 중서성은 지방의 민정, 재정, 법정, 감옥, 상비군의 통제 지휘권을 모조리 가지고 있어서 직권이 날로 커졌으며 심지어 황제 자신과의 충돌까지 일어났다. 결국 주원장은 중서성을 없애고, 중서성 아래에 있던 육부의 지위를 높였는데 육부 모두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이는 결국 승상이 없어지고 황제가 승상집권을 겸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로써 주원장은 역사상 권력이 가장 강한 군주가 되었다.)군사기관은 장수에게 고정된 직속 군대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 추밀원을 대도독부로 바꾸고, 후에 다시 오군도독부로 나누었다.) 병부와 직권을 조화시켜 서로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감찰기관은 원나라 어사대를 홍무 15년 도찰원으로 바꾸었다. 장관은 좌우도어사가 맡고, 좌우부도어사와 좌우첨도아사가 있었다. 아래에는 감찰어사가 110명이 있어 포정사사의 설치에 따라 한 포정사사가 다스리는 지구를 1도로 하여 13도로 나누어 맡았다.) 이들은 권력이 매우 컸으며, 황제를 대신해 관료기관과 관료를 감찰하며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이처럼 주원장은 행정기관과 군사기관 감찰기관을 서로 독립시켰으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어 세력이 집중되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이것은 황제의 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또 주원장은 환관과 외척이 득세할 경우의 폐단을 과거 왕조의 교훈으로부터 배워 잊지 않고 환관이 명실상부하게 궁정이 일꾼이 되도록 했으며) 궁정과 외조를 단절시키며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밖에 공문을 간소화하고 궁정에서 쓰이는 문장 격식과 관습을 없애고 조정과 민간이 소통할 수 있게 하였다.)4. 정권의 기둥과 사회의 발전구 지주계급의 잔존세력과 신흥지주계급은 주원장 통치집단의 기본적인 힘과 기초가 되었다.) 주원장은 농민봉기의 우두머리에서 나아가 차츰 지주계급의 정치 이익을 대표하는 대표자로 바뀌었으므로, 그는 당연히 지주계급의 이익을 존중하고 옹호하였다.) 하지만 대지주들은 주원장의 통치를 옹호 미치므로 대지주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대지주재는 가난한 농민의 가난을 더욱 심화시키고 부세와 요역을 회피하며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주원장은 법을 어긴 대지주를 중심으로 대지주를 없애기 시작했다. 이는 생산에 대한 농민의 적극성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농민에게 얼마쯤의 양보 조치를 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은 역시 전체 지주계급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대지주를 타격한 주원장의 정권은 폭넓은 중소지주와 부농에 지탱하고 있었다. 주원장 정권의 관료기구 가운데 관원의 원천은 주로 이 계층으로부터 나왔다.) 천거와 학교, 과거의 관리임용제도가 있었는데 학교와 과거는 사실상 단계적인 제도가 되어 하나로 볼 수 있다. 천거에 의한 관리 임용은 자연스럽게 지주층에서 밖에 나올 수가 없었고, 과거 또한 지주층의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훨씬 쉽게 가졌기에 관리들이 주원장의 지지기반인 지주층에서 대부분 나올 수밖에 없었다.상비군은 농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를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주원장이 만든 상비군은 농업생산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와 유기는 고대 군사제도를 연구하여 역사 경험을 종합하였으며 유기가 실제 상황을 근거로 하여 위소제도를 만들어 상비군을 유지했다.) 그리고 검교와 금의위를 중심으로 한 특무조직도 이루어졌는데 검교의 직무는 “경사에 있는 각 아문 관리들의 불법행위와 풍문을 모조리 보고하는 것” 이었다.) 이러한 상비군과 특무기관들을 통해 주원장은 통치기구의 힘을 더욱 강화하고 완비된 모습으로 만들었다.주원장은 원 말 20여 년간의 전쟁에 피폐화 된 농업생산력을 회복시켰다.홍무 3년, 제도를 정하기를 북방 군현의 황전은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민을 옮겨 개간시켰는데 호마다 15무의 전지와 채소를 재배할 2무의 땅을 지급하였고, 여력이 있으면 토지 면적을 제한하지 않고 3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중략) 왕국이 있는 곳은 성곽에서부터 5리를 남겨 두어 훈련과 목마(牧馬)에 대비하도록 다.)
70일간의 음악여행30초의 예술 이라는 CF는 물론이고영화, 연극, 무용 등 모든 분야에서 접할 수 있는 음악…당신은 음악에 대해서 얼마나 아고 계십니까?고전음악에서부터 현재의 컴퓨터 음악에 이르기까지음악의 모든 것을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음악 여행을 떠나 보십시오.알면 알수록 더 감동적인 것이 음악입니다.책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음악에 둘러 싸여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을 많이 들으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음악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작 음악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대중가요들 역시 음악의 한 종류이고 그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잘 아는 편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한 대중음악들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해온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음악을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70일간의 음악여행 이라는 제목만큼이나 이 책의 구성도 흥미롭다. 70일간의 음악 여행이라는 제목 그대로 첫째 주부터 마지막 열째 주까지 크게 10부분으로 나눈 후 각 주마다 일주일의 날짜와 같은 7개씩의 소주제로 나누어 놓았다. 제목처럼 하나씩 읽으면 70일이 되는 것이다. 각각의 주에는 유명한 명곡에 대한 이야기와 음악과 관련된 예술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악기와 음악가에 대한 일화에 대한 이야기, 음악과 관련된 도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대한 일화, 음악 명언을 비롯해서 국악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과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음악까지의 이야기들을 개괄적으로 제시해 놓고 있다.첫째 주는 명곡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다. 사실 명곡 산책이란 제목이었지만 아는 음악은 별로 없었다. 사계절을 노래한 음악,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음악 등을 테마로 유명한 클래식 명곡들의 유래와 일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흔히 알고 있는 비발디의 사계 이외에도 계절을 주제로 한 음악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계절의 순환과 각 계절의 변화는 예술적인 감상을 많이 하게 해주고 또, 순환이 바로 삶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음악 역시 이와 같은 삶의 연속에서 이뤄지는 예술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에 관한 음악 다음에 나오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유명 작곡가들의 명곡들 역시 흥미로운 주제였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이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은 널리 알려져 있고 나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 안타까운 곡들이 많음을 알았다. 그 중에서도 푸치니의 투란도트 가 미완성곡이었다는 것은 내가 정말 많이 모르고 있었구나 란 생각이 들게 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까지도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음악가들의 모습에 작은 감동을 받았다. 미완성곡은 비록 곡 자체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와 같은 미완성된 곡들을 완성하기 위해 후진들이 그의 음악을 더 갈고 다듬으며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오페라나 편곡으로 유명해진 음악, 그리고 별명이 붙은 음악들도 모두 재미있는 주제들이었고, 음악과 에로티시즘이라는 테마는 조금 더 흥미를 끌었다.둘째 주는 음악회의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 그대로 실제로 공연되어 올려지는 음악회의 종류와 음악회에서의 기본적인 예절을 이야기한 내용이다. 음악회는 그 성격에 따라 가정음악회, 음악제, 신년음악회, 독주회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회의 종류보다도 여기서 가장 주의 깊게 본 부분은 예절 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음악회를 간 경험은 세 번 뿐이지만 처음에는 박수를 어디서 쳐야 할 지 조차도 잘 몰랐었다. 음악회란 곳을 별로 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보고서 때문에라도 몇 번 다녀오고 나서 기회가 되면 자주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기에 예절 또한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연주회 에티켓은 까다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예절은 음악이 과거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단 음악회에서는 정장을 해야 하며 공연 시작 전에 좌석에 앉아야 한다. 연주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박수를 치기 시작하여 인사가 끝날 때까지 박수를 친다. 공연 도중에는 기침 소리도 내면 안 되고 프로그램 넘기는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 박수 쳐야할 때를 잘 알아야 하며, 무료입장을 바라지 않고 프로그램 팜플렛 사는데도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음악이 신나더라도 결코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을 굴러서는 안 되고, 연주 도중 실수가 있더라도 조용히 계속 들어야 한다. 연주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박수를 쳐서는 안 되고 박수는 연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앙코르를 요구하는데도 용감해야 한다. 위의 예절들 중에서 음악이 신나더라도 결코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을 굴러서는 안 된다는 부분은 음악회에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다. 스탠딩 콘서트 같은 함께 즐기는 공연을 좋아하는 나를 현대의 젊은이들에겐 쉽지만은 않은 예절들이다. 물론 격식도 좋긴 하지만 그런 것들 또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예절과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만 클래식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셋째 주는 음악과 자매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음악은 물론 혼자서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만 다른 예술들과 결합되어 함께 나타날 때 그 힘은 훨씬 더 커진다고 생각된다. 특히 요즘같이 영상이 중요시 되는 시대에 음악과의 결합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한편의 CF에서의 음악이 가지는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 그리고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 게임 까지도 OST가 나올 정도로 음악과의 연계가 더 강화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노동과 식사와 음악과의 관계까지 이야기 해놓은 것을 보니 음악과 자매예술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음악과 생활 이라는 주제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다. 그만큼 음악은 바로 우리 옆에 같이 있는 것이다.넷째 주는 악기에 관한 설명들을 다루고 있다. 주로 백과사전 식으로 설명을 해 놓아서 여기에 대해 쓸 말은 별로 없지만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악기들과 잊혀진 악기들 부분에서는 변할 것 같지 않은 악기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몇 백 년 후면 바이올린이란 악기가 잊혀진 악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다섯 째 주의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테마는 제목을 봤을 때는 어떤 내용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으나 곧 매우 흥미 있는 주제란 걸 알았다. 사랑과 결혼 이야기 등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작곡가들의 장례식 음악이라는 소주제였다. 평생을 음악을 만들며 살아온 그들은 죽어서 떠날 때도 음악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영혼이 있다면 그들은 지금도 음악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음악사 100장면(1). 고대의 음악에서 바로크 음악까지 .음악을 모르거나 감미로운 소리의 화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반역이나 모략 약탈에 어울릴 것이다. - 셰익스피어이 책의 머리말 첫 부분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글귀이다. 음악을 매우 좋아한다고 말하는 편도 아니고, 찾아서 듣는 편도 아니지만 좋은 음악을 들으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다.오늘 날 음악이란 것은 대중가요, 영화 음악, CF, 라디오, 심지어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 까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런 음악에 대해서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음악에서 중세음악,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음악까지의 서양음악사가 나와 있는 이 책은 거의 처음 보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였다.책의 제목이 서양음악사 가 아니라 서양음악사 100장면 이듯이 음악사를 연대를 따라서 혹은 음악사에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나와 있지 않고 많은 작은 소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음악사에 대한 자세한 이해나 정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시대 순으로 배열된 작은 주제들은 적어도 그 주제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또 흥미롭게 쓰여 져있었다. 기원전부터 해서 2000년이 넘는 음악의 변천사를 읽고서 서평을 쓸려니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 전체의 41개의 주제 중 가장 흥미로웠던 몇 가지의 주제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1. 음악학의 시조 : 피타고라스피타고라스 중학교 수학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특히 자연대를 다니는 나로서는 수학, 과학의 분야에서 수없이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들었고, 또 그가 만든 정리 들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한번도 피타고라스와 음악을 대응시켜 보진 않았다. 그렇기에 피타고라스가 음악학의 시조란 말은 목차에서부터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글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피타고라스가 음악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한 것인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피타고라스는 어디까지나 수학의 한 부분으로써 음악을 연구한 것이었다. 멀리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조화롭게 들려서 그 곳(대장간) 으로 가서 망치의 무게를 달아 봤고, 그 무게의 비율을 알고 또 거기서 옥타브와 완전4도, 완전5도를 찾아냈다는 전설{ p.45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음악학은 음악을 위한 연구라기보다도 수의 연구에 음악을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말한 협화음(옥타브, 완전 4,5도)도 그들의 수적 비례인 단순성(2:1, 3:2, 4:3)에 맞는 것이고, 그 나머지를 불협화음이라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는 음악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피타고라스부터 시작해서 유클리드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해 온 이들의 음악관은 서양 음악학의 원류가 되었고, 당시 음악의 다양한 측면들을 면면히 반영하고 있다.2. 그레고리오 성가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서양음악의 이해 란 수업에서 처음 접해 본 것이 Gregorian chant , 즉 성가라는 음악이었다. 중세 음악의 시작이고 또 악보에의 기록 등 음악이 이제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가는 단성음악이었고 화성과 반주도 없고, 강약도 없는 음악이어서 매우 지루하게 느껴졌었다.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라고 불리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와 매우 관련이 깊다.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던 그였기에 모든 서방 교회들이 로마 교회의 전례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전례의식을 재정비하고 통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가 또한 서방 각 지역에서 사용되던 갖가지 성가들을 수집해 집대성했다.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으로부터 선율을 전해 듣고 성가들을 직접 작곡했다는 전설{ p.36은 로마교회의 성가의 우월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그레고리우스 1세가 성가들을 수집하고 집대성 하려는 노력을 했기에 이야기가 퍼지고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이 당시 교회에서의 음악은 음악을 위한 음악이라기보다 가사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의 가르침 등을 음악에 실음으로써 분위기와 의미를 강화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건 가사였고, 악기의 연주는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사용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p.36~p.37중세 교회에서 음악을 그 자체로 좀 더 크게 간주하고 또 악기 또한 사용 했었다면 음악과 악기는 지금 알고 있는 음악사의 발전 보다 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요즘 성가는 전 세계에서 매우 소수의 교회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고 그 음악적 특성상 잘 찾아 듣지도 않는다. 하지만 음악의 발전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기에 그 가치는 정말 크다고 생각된다.3. 중세의 기악음악중세의 기악음악은 악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악기 또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악보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의 기악 음악이 즉흥음악이었고 또 앞에서 말한 주제에서도 나오듯이 당시의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교회에서 악기와 그 음악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현존하는 최초의 기악음악은 에스탕피estampie'라는 13세기의 춤음악이다.{ p.130그 정도로 기악음악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소수의 사료나 다른 분야의 사료에서 유추해 내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4. 음악가로서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첫 번째로 이야기 했던 주제와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도 소제목이 일단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다 빈치의 경우에는 예술적으로 오히려 더 많이 유명하고 또 워낙 만능인이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다 빈치와 음악 은 쉽게 함께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 빈치의 음악 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다. 실제로 음악가로서의 다 빈치는 제대로 연구되지도 않고 평가받지도 못하고 있다. 일단 중세 음악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그 시대의 음악적 상황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중세와 마찬가지로 즉흥 음악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남아있는 악보들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빈치의 스케치북을 통해 그의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자전거, 잠수함, 헬리콥터 등의 설계 아이디어처럼 새로운 악기들과 기존 악기의 개량등의 스케치가 그것을 말해준다.그런데 이 부분의 내용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음악가로서의 다 빈치를 설명하기 보다도 그냥 다 빈치에 대해서 적어놓은 듯이 이야기가 흘러갔다. 이것은 앞서의 피타고라스를 다룬 주제에서도 약간 그런 면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음악적인 부분의 내용이 부족하게 느꼈졌다.4. 카스트라토와 파리넬리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재미있게 본 영화가 둘 있다. 아마데우스 와 파리넬리 . 그 중 파리넬리의 경우 파리넬리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었는데 책을 보면서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카스트라토(castrato) 란 카스트라토는 변성기가 되기전에 거세하여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남자 가수를 말한다.{ 야후 백과사전. http://kr.encycl.yahoo.com카스트라토가 생기게 된 원인은 잘못된 성경 해석 때문이라고 한다. 고린도 전서 14장 34절 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라는 구절을 말 그대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p.225다성 음악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모든 성부를 남자가 부르게 하기 위해선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들을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변성기가 오기 때문에 수명이 길지도 못하고 또 새로운 아이들을 훈련시켜야 했기 때문에 카스트라토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이렇게 만들어진 카스트라토들은 오페라에서도 주역과 조역들을 맡게 되었고, 몇몇 스타급 카스트라토들은 엄청난 대우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었다.1796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이 카스트라토의 생산을 엄격히 단속했지만 1815년 다시 시작되었다가 1903년에 교황 피우스 10세가 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p.227~p.229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거세 라는 방법은 분명히 비인도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고, 또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닐지라도),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 요즘 만약에 카스트라토가 나온다면 분명 그 특이함, 혹은 신비함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프라노, 알토를 여성이 담당할 성부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어이없는 이유에 의해서 카스트라토가 만들어진 것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5. 바로크 음악의 최절정 :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 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소제목에서도 최절정이라 칭하듯이,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듯이 대단한 음악가이다.바흐는 중부 독일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바로크 음악 을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인류 최대의 작곡가 중 한사람으로 또, 음악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음악사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음악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그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독특한 음악을 만들었다. 유전학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인 바흐의 가문은 200년 동안 50여명의 음악가를 배출할 정도로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이다. 실제 유전학적으로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음악가가 많은 집에서 태어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은 어렸을 때 대부분 한번쯤은 읽어보았거나, 읽어보지 못했더라도 들어본 소설일 것이다. 하지만 동화로 나온 걸리버 여행기만을 보고 그것이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원작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가 아니라 작가가 살던 시대의 영국의 부정부패한 현실을 풍자한 내용의 소설이다. 나도 어렸을 때, 동화로 만들어진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었고 기억에 단지 동화로만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걸리버 여행기가 원래는 동화가 아니라 풍자소설이고 내용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았지만 책을 읽어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걸리버 여행기의 원작을 읽을 기회가 생겼고, 단순한 동화가 아닌 진짜 걸리버 여행기를 읽게 되었다. 보통 동화에는 소인국과 대인국 두 가지만이 나와 있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2부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와 큰 사람들의 나라, 3부는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4부는 말들의 나라를 걸리버가 여행한 여행기이다.1부에서 걸리버는 배가 난파되면서 릴리퍼트라는 소인국에 도착하게 된다. 걸리버는 이 소인국에서 말을 배우고 국왕과도 가까워 졌다. 그리고 릴리퍼트의 상대국인 블레훠스크란 나라의 군함을 혼자서 빼앗아 오는 공도 세웠다. 하지만 걸리버는 블레훠스크의 모든 군함과 군대를 전멸 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걸리버를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모함이 생겨난다. 그때 왕비의 궁에 불이 나는데 걸리버가 소변으로 그 불을 끈다. 릴리퍼트의 법에서 궁전 근처에서 소변을 보는 행위는 사형이라고 되어 있지만 걸리버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왕비는 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비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그 궁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결국 걸리버는 이런 저런 모함으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친했던 대신의 도움으로 미리 그 사실을 알고 블레훠스크로 가고 거기서 보트를 발견해서 소인국을 떠나게 된다. 걸리버는 소인국에서 큰 공을 세웠음이 분명한데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달갑게 보지 않고 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소인국 사람들 줄타기를 잘 하거나 막대기 아래로 멋진 통과를 하는 사람들이 신임을 얻게 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계란을 먹을 때 국왕(당시 국왕의 할아버지)이 계란을 넓은 부분으로 깨 먹다가 손가락을 다쳤다는 이유로 계란을 먹을 때는 누구나 좁은 쪽으로 깨 먹어야 한다고 명령했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키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들은 신발의 굽이 높고 낮은 것으로 파가 나뉘어져 있다. 이토록 사소한 문제로 싸움을 하는 소인국 사람들을 보며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실제 우리 사회와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로 인한 싸움이 정말 많았다.2부는 브롭딩낵이라는 대인국에 가게 된 이야기인데 걸리버는 거기서 농부에게 잡혀서 광대 노릇을 하다가 국왕에게 팔린다. 걸리버는 국왕에게 간 후로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하지만 자기가 소인국에서 단지 몸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느꼈던 우월감을 생각하게 되고 매우 작은 자기자신을 생각해 본다. 대인국에서는 소인국과의 대조를 통해 사람이 인식하는 것의 상대성을 나타내고 있다.3부는 걸리버가 자력을 이용하여 하늘을 날게 되어 있는 섬인 라퓨타로 간 내용이다. 라퓨타의 사람들은 앞의 내용들과 달리 몸의 크기는 걸리버와 같다. 하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매우 과학적이다. 그들은 수학, 천문학, 기하학, 음악 등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지만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색만을 한다. 이것들은 현실에 거의 무익한 공상들로 당시대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별로 필요가 없는 그러한 공상에만 매달려서 연구하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라퓨타에서 관심을 끌던 것들을 모두 보고난 걸리버는 그 사람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섬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걸리버는 라퓨타의 왕이 통치하는 발니바르비라는 곳의 수도인 래가도로 가게 된다. 무노디란 사람의 집에서 거처를 정하고 대접을 잘 받는다. 하지만 거리를 구경할 때 거리의 사람들은 누더기를 입고 있고 집들고 주위도 대부분이 손질도 안 된 황폐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정말 비참하고 가난하게 보인 것이다. 그 이유는 40년 전에 라퓨타에 방문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지식을 조금 배워 와서 래가도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새로운 농업, 건축법, 제조업등을 고안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되는 내용들이었고 그 고안한 계획들도 아직 하나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나라는 아주 비참하게 황폐화되었지만 그들은 더욱 열심히 연구를 하였다. 무노디는 이전의 방식에 만족하고 살았기 때문에 황폐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글럽덥드립의 여행에서는 역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볼 수 있다. 총독은 과거의 사람을 불러 낼 수 있는 마법을 가졌는데 과거의 왕들과 귀족들을 불러냈을 때 깡패, 아첨꾼 들이 나왔다. 역사는 기록된 그대로가 아니라 쓰여진 것이고 당시에 힘이 있는 사람들의 생각대로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도 그 이면에 있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때 당시의 권력자의 생각에 따라 그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들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걸리버는 럭낵으로 가는데 거기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스트럴드블럭이란 사람을 만난다. 아주 드물게 태어나는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걸리버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그들의 모습은 죽은 송장과도 같은 엉망인 모습이었다. 영생이란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이긴 하지만 영원한 삶에서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삶은 삶이 아닌 것이다. 즉 영생이란 것은 인간이 가지는 헛된 꿈이자 탐욕일 뿐인 것이다. 4부는 말들의 나라인 휴이넘 기행이다. 거기서는 휴이넘이란 이성을 가진 말들이 야후라는 야만인들을 부리고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말들을 부리는 모습과 같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하지만 인간이 말들을 부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잔인하고 악하다. 인간들은 그런 인간들의 잔인함을 이성이란 말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1,2,3부에서의 이야기들은 인간들의 비판받을 만한 생활모습을 풍자하고 있지만 4부는 인간들의 본질에 대해서 풍자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