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명 : 교육심리학소속 : 교육학과학번 : 0210495제출자 : 나유진제출일 : 2004. 10. 12.《위기에 처한 유아들》-David Elkind의 ‘잘못된 교육’을 읽고올바른 유아 교육이란 어떤 것일까? 평소 벌써부터 미래의 내 아이들을 상상하면서 어떤 교육이 그 아이들에게 가장 올바르고 유익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오던 나에게 이 책은 처음부터 그 흥미를 끌기에 적당했다.『잘못된 교육』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유아 조기 교육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담고 있으며 저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유아교육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 교육열이 급증하는 가운데 정규교육 이전의 조기교육은 이제 누구에게나 관심이 있고, 누구나 자신의 자녀에게 실시하고 있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 영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한때 그리고 여전히 조기 영어 교육의 붐이 일고 있으며, 영재아동으로 기르기 위하여 다양한 교과 지식과 예능 교육을 너도나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닌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는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너무나도 성행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이 책에서는 유아들을 교육함에 있어 본질을 왜곡시키고 퇴색되어버린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개선책을 제시해 주고 있다. 유아교육에 있어 주체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단지 부모의 영향 속에서 부모에 의한 교육이 되고 있다. 이러한 부모의 스타일은 총 8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들의 유형은 ①미식가형 부모(성공한 젊은 부부들로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려 함), ②대학 출신 부모(완벽한 교양교육과 학자학위가 성공적인 삶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 스타일), ③금메달형 부모(경쟁하고 대회에 참가하는 등으로 아이들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고 인성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함), ④자립형 부모(자녀양육에 대해 느긋하며 아이는 스스로 속도와 시간에 맞게 발달한다고 생각함. 그러나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 자녀가 어떤 기준을 넘어서게 하려는 욕구는 충분히 가짐), ⑤개척형 부모(어린이에게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 ⑥자수성가한 부모(평범한 교육을 통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경우로 교육을 개인의 능력을 둔화시키고 무디게 하는 것으로 봄), ⑦부모교육프로그램을 쫓아다니는 부모(최근의 치료요법에, 심리학적 유행사조에 얽매임), ⑧달콤한 부모(유아기 경험을 중요시하며 자식들에 대해 여유 있고 편한 태도를 보이며 잘못된 교육에 빠져들지 않음)유형으로 구분시켰다.8가지로 묘사한 부모의 형태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며 건강한 자녀교육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이라 볼 수 있으나 지나친 영재심리는 아이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는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린이에 대한 교육은 어린이에게 맞는 교육이었다기 보다는 그 시대의 팽배했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 원죄적 어린이로 보았던 옛날의 이미지는 1930, 1940년대에 와서 민감한 어린이라는 개념으로 변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면서 어린이의 지적 능력에는 관심이 거의 없고 여유로운 상황에서 억압 없이 최적의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도시 환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산층의 개념으로 민감한 어린이에게 호화스런 여유를 제공할 수도 없고 아이의 경험을 만족시키기 위해 직장을 포기할 수 없고 저소득층에게는 상당부분 어긋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감한 어린이라는 개념은 60년대 이후 문화적 결손아동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유능한 어린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사회적 책임성이라는 맥락에서 재발견되었고 이것은 중산층 부모에게까지 받아들여졌는데 이것이 중산층의 가정과 학교에 적용되면서 잘못 확산되고 왜곡되었다. 유능한 어린이란 어린이는 어느 연령시기이든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지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에 교육에 있어 우리는 종종 아이는 무엇이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의 차이는 중요하다. 우리는 어린이를 교육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내용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어린이가 학습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유아는 어른과는 다른 방법으로 학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아의 수준에 맞게 학습법과 내용을 조정하여야 하며 수준에 맞지 않는 잘못된 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그렇다면 건강한 유아교육방법은 무엇이며 현재의 유아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유아의 전인적, 균형적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유아교육이 보다 충실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아교육기관과 가정과의 긴밀한 협조와 의견교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가정교육과 유아교육이 조화를 이룰 때 유아를 위한 교육은 성공할 수 있다. 유아가 유아교육기관에 다니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하고 도와주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유아가 지니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교육에 의해 계발하여 그것이 생애 전체 교육의 기초가 됨으로써 미래 생활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하면 흔히 학교교육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유아교육하면 유치원 교육과 함께 가정교육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유아기는 보호와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새롭게 시작된 세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다양성과 창의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유아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심하고 그에 따른 적합한 대응이 신속하게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유아교육의 최근 동향을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영역의 사회현상에 대한 동향, 즉 유아교육의 동향은 부모, 가족, 교사 및 아동에게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안내 지침이 될 것이다. 국민의 태도의 변화와 국가의 정책에 대한 변화는 대게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듯 유아교육의 발달도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유아교육 관련자들이 그 동안 노력한 결과가 오늘날의 유아교육과 앞으로의 유아교육 발전을 결정짓게 된다.
과목명 :소속 :학번 :제출자 :제출일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준 작은 나무》-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을 읽고어느덧 9월도 점점 지나가고 중간고사가 다가오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처음과는 달리, 책을 다 읽고 나니 아직도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이 울리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한참동안 소리내어 엉엉 울었고 작은 나무가 나에게 남겨준 이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 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인디언의 피를 이어받은 저자가 쓴 자전적 소설인 이 책은 작은 나무 라는 5살짜리 인디언 소년이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산 속으로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두 분이 돌아가시기까지 함께 했던 만 3년간의 유년시절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던 백인들로부터 핍박받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겨 이주 당하던 시대의 인디언들이었으며 사회라는 곳에서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주위의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그 세상이 인정하는 목사나 부자들로부터 멸시 당하고 소외되어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디언 가족인 작은 나무 들에게는 그들은 모두 마음과 영혼이 따스한 사람들이다. 사회라는 잣대가 아닌 사랑과 이해로서 서로를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백인들처럼 유식하지는 않았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웠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을 모르는 삶을 행복하게 여겼다.작은 나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자연 속에서 자연을 배우고 지혜와 함께 삶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들도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저절로 깨우쳐주고 있다.책속에서 감동받았던 것 중 하나는 인디언들은 어린아이를 어른과 똑같은 인격체로 대해주고 자연에게 허리를 굽힌다는 평범하고도 어려운 일을 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어리다고 무조건 보호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그 나이에 맞는 일을 직접 경험 할 수 있도록 하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 이는 어른의 지혜며, 이해였다. 산으로 데려가는 조건으로 혼자 일어나는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할머니를 큰소리로 부르고 벽에 부딪히는 소동을 벌인다. 작은 나무에게 성취감을 주기 위한 할아버지의 작은 배려다. 할아버지는 자연에 감사하고 그런 자연에게 최소한의 받을 것만을 받고 돌려주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자연에 순종하는 인디언이다. 즉 자연이 존재하여야 인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를 도우면서 작은 나무는 성취감과 함께 겸손함을 함께 배운다. 할머니 또한 이해로서 가족을 돕는다. 작은 나무의 비밀장소를 알고도 모른 척 해주는 배려와 책을 읽어줌으로써 사회로부터 단절될 수도 있는 작은 나무를 사회와 연결시켜준다. 소년이 죽어 가는 송아지를 사려고 할 때에도 할아버지는 말리지도 부추기지도 않고 지켜보면서 작은 나무에게 선택과 경험을 가르친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 인디언 선조에게서부터 내려온 삶의 방식이자, 진정한 지혜였던 것이다.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나무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환경, 인종문제와 더불어 가정, 인간관계,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와 질문을 안겨준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가 자연과 교감할 수 없다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교감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내어놓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지지 못한 자들을 향해 따뜻하게 열려있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마음과 그들의 생활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읽고 있는 나에게 따스한 감동을 주었다.
아무런 위험에도 뛰어들지 않는 사람,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그는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하지만 그는 배울 수 없고,느낄 수 없고,달라질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다.자신의 두려움에 갇힌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그의 자유는 '갇힌 자유'다.위험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중에서 - 김혜남 -학기 초에 이번 학기 읽을 책들을 고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사귄지 3년이 다 되어가는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중 ? 고등학교 때에 한 남자친구를 3년 정도 사귄 적이 있고 그 외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던 경험 때문에 나는 스스로 ‘사랑에는 자신 있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만난 지금의 남자친구와 진지한 만남을 계속 가져오면서 점점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남자친구를 정말로 사랑하고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인데, 거의 동일한 문제들로 2년 넘게 싸우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고 좀처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나는 조금씩 지치면서 점점 사랑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읽게 된 이 책은 사랑받고 있지 못함에 절망해서 점점 움츠려 들고 있던 나를 그 속에서 건져주었다.사랑은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하다. 사랑에 씌워져 있는 신화, 오해, 미신을 그것이 신화인지 오해인지 미신인지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채 그저 그렇게 사랑의 본질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책 속에서는 사랑이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감정이 아니라 출생 이후부터 형성된 자신의 무의식과 의식, 성장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로부터 받은 내적 상처나 좌절된 욕망에 의해 드러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사람이 가지는 폭발적인 에너지, 원초적이고 숨김없고 친밀함이 내면의 상처와 좌절을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사랑이라 말하는지, 어떤 것이 사랑일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이에서의 접근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에 걸쳐 나온다.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뭔가 자꾸만 뒤통수를 당기는 느낌 같은, 우리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 없는 친밀한 관계는 없다. 그리고 ‘의심’의 과정을 거쳐 사랑은 확인된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느끼는 것이 과연 사랑인지? 또는 상대방이 내가 모르는 결점을 갖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환상이 깨지고 이상이 깨질까봐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나 역시 정말로 그랬다. 받은 상처들을 내 마음 깊은곳에서 부터 차곡차곡 쌓아놓고,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그 때 이래서 그랬던 거야’ 라고 생각하며 점점 더 깊은 상처 가운데로 빠져들고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은 깨어지고 두려움 속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친밀감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은 가면을 쓰고 역할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합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합치를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고 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진 권력에 내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에게 예속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사랑이라는 힘이 가지는 권력에 자신을 내어주는 모양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의 힘은 당신의 마음을 열어 주게 될 것이고, 당신이 상대를 받아들여 더욱 성숙하고 큰 자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만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를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재발견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분노를 담아 두지 말아야 한다. 상대에게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달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아닌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분노를 적절하게 터뜨릴 줄 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이 책을 통해 나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나름대로는 상대를 많이 알고, 많이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상대를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 책에서 말한 대로 재발견할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사랑한다고 상대방에게 너무 바라지도 말고, 자신을 억압하지도 마세요. 남들이 어떻게 볼까 눈치 보지 마세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쁠 땐 기뻐하면서 내 감정에 충실하게 자유롭게 사세요.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혹 사랑의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내가 잘못해서,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만큼 성숙해져 있고,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요.’나는 내가 상대에게 제 1순위이길 바라고 완벽한 하나가 되기를 기대해왔다. 그런데 나의 생각, 나의 방식대로 그것들을 바래왔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가운데에 ‘슬픔, 외로움, 미움’의 감정들은 조금도 생겨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외롭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더욱 외롭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 아니다.’ 라는 구절에서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렇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참 자아로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랑은 상처투성이인 사람끼리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우리 생애 몇 안 되는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남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는「애도할 줄 알기, 신뢰할 줄 알기, 과거를 재구성하기,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기, ‘all good, all bad’에서 벗어나기, ‘so it's me’」등으로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 신뢰는 그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 인격의 핵심,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의 변하지 않는 감정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뢰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친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공감하는 대신 동정을 한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은 상처받은 과거로 돌아가되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의외로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어쩌면 과거 상처의 많은 부분이 상대방의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탓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한 사람만 참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문제없이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를 참고 있으면 싸우지도 않을뿐더러 조용히 넘어 갈 수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런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면 내부에 쌓이고 쌓여서 어느 순간 곪아터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그대로 솔직하게 상대에게 표현했을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모든 면에서 완벽할 것이라고 상상하면 안 된다. 상대도 사람인만큼 단점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할 때 실망하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담담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so it's me' 이다. 나답게 내가 선택한 사랑에 최선을 다하며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천문학계의 별 - 이원철 박사에 대하여...들어가며..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인 우남(羽南) 이원철은 우리대학 제1회 졸업생으로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업적은 그 당시의 해외과학학술지에도 실렸을 만큼 뛰어날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원철성’(源喆星) 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신 분이다. 그의 주요경력과 업적을 통하여 이원철 박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본문1. 주요경력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1920년미국에 건너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1926년 《항성분광분석(恒星分光分析)》이라는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 수여.1927년 연희전문 교수·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역임.8·15광복 후 중앙관상대장으로 6년간재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국천문학회장을 역임.여러 차례 천문 기상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원철스타’ 라 명명하는 등 한국 천문학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2. 주요업적연구활동이원철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수리 자리 에타별에 대한 정교한 분광학적 관찰과 계산을 통해 그 별이 맥동변광성(脈動變光星)임을 밝힌 것이다. 맥동변광성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의 하나로, 별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변광성은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이 식(蝕)을 일으켜 밝기가 변하는 식쌍성(蝕雙星)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식쌍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변광성들이 존재했다. 이에 대해 1914년 미국의 섀플리(H. Shapley)가 항성이 수축·팽창하며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맥동설(pulsation theory)을 정립하게 되었고, 이후 이 학설을 확인하기 위한 연구들이 앞다투어 이루어졌는데, 이원철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로서 당시 매우 앞서가는 연구주제였다.이원철은 1924년 12월 미국천문학회(American Astronomical Society) 33회 학술회의에서 “사자자리 로별의 시선속도변화”(Changes in the Velocity of ρ Leonis)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 발표문의 초록은 『Popular Astronomy』 33권 5호(1925)에 수록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23년 미시간 대학 천문대에서 관측한 분광사진(spectrogram)을 분석해서 사자자리 로별의 시선속도가 그동안 알려진 평균값보다 16km/s 이상 큰 50.5-63.3km/s에 달하며, 이는 그 별의 시선속도가 실제로 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밝혔다.이원철은 1926년 9월의 미국천문학회 36회 학술회의에서 박사학위 논문에서 얻어진 연구결과의 일부를 발표했는데, 이 논문의 초록은 『Popular Astronomy』 34권 10호(1926)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전체박사학위 논문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대기의 운동”(Motions in the Atmosphere of η Aquilae)이라는 제목으로 『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 4권 8호 (1932)에 수록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시간 대학 천문대에서 31.5인치 카세그레인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71회의 분광학적 관측결과를 얻고 이를 세밀하게 분석·계산하여 시선속도를 비롯하여 항성대기의 운동 등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다양한 결과들을 구해 세페이드변광성(Cepheid variable)에 대한 맥동설을 뒷받침 하였다.교수활동이원철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하여 모교인 연희전문의 교수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서 거둔 학문적 성과는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대상이었던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잡지 등에 ‘원철성’으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원철의 전문적인 천문학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원철성’을 단순히 처음 발견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으나, 서구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민족의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원철성 및 이원철에 대한 당시 자료: “「원철」星까지 발견한 세계적 천문학자 이원철박사” 『삼천리』 3호(1929년 12월) 18-19쪽“...미국 미시간대학의 學窓에 파묻쳤을 때에도 뛰어난 그의 才分은 수리문제를 向함에 釋然히 풀리지아니하는 것이 없고 또 천재라하리만치 독창력에 富하여 끝끝내 天文을 연구함에 있어서 數十年來로 精銳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力學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음으로 천문학자들은 놀래기를 말지 않아서 그 별 이름을 씨의 이름을 따서 「원철」星이라고 公稱한다고 합니다. 일즉 미시간대학 총장은 「이원철군은 지금까지 동양각국의 미국유학생중 처음보는 수재일뿐더러 구미에도 드문 놀라운 학자라」고 절찬하였다는 말이 있거니와...”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이원철은 서울YMCA가 일반인을 위한 교양강좌를 개설할 때 과학 강좌를 맡았다. 원철성의 발견자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이 강연은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또한 그는 연희전문 재학중 학생강사라는 신분으로 수학을 강의하였으며, 졸업후 2년 동안 모교의 수학강사로 활동하였다. 그 후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하여 모교의 교수가 되어 12년 동안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면서 수물과장과 학감을 역임했다. 당시의 국내 여건에서는 미국에서 수행했던 연구활동을 계속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연구 대신 교육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 우리나라 천문학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천문학을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기에는 중등학교에서 태양계에 관한 극히 간단한 내용이 지리교사에 의해 교육되었을 뿐 제대로 된 천문학 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희전문만은 예외여서, 루퍼스에서 벡커, 그리고 이원철로 이어지는 연희전문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첫 번째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원철의 천문학 강의는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연희전문 건물 옥상의 임시천문대에는 15cm짜리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원철은 이 망원경을 이용해서 실제적인 천문학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928년 연희전문 졸업앨범에는 이원철이 이 망원경 앞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하지만 이 망원경은 1942년 일제가 전시물자로 징발해가고 말았다는 후문이 있다.해방이후의 활동연희전문을 떠나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이원철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방이 되자 일제에 빼았겼던 연희전문은 연희대학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원철은 최규남 교수와 함께 기상학과를 독립된 학과로 신설하고 자신이 이학부장과 기상과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원철이 관상대 대장 업무에 힘을 쏟으면서 연희대학의 전임교수로 일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4학년 학생들에게 천문학을 강의하는 정도의 활동만 할 수 있었고, 다음해에 기상학과는 물리기상학과로 개편되고 말았다.이원철은 해방을 맞이하자 연희전문의 재건에 참여하는 한편, 관상감을 부활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관상감(觀象監)은 조선시대 천문, 지리, 기상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고 역서(曆書)를 펴내던 관청이었는데, 1894년의 갑오경장을 통해 관상감은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관상소(觀象所)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1907년을 전후하여 인천, 서울, 평양, 대구에 신식의 기상관측을 위해 측후소(測候所)가 설립되었고, 서울측후소가 편력과 일기예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측후소들은 일제시대에 들어와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넘어갔고, 1940년에 조선총독부 기상대가 되었다.
Ⅰ. 들어가기우리는 대개 ‘관상’ 또는 ‘관상학’ 하면 학문적인 의미로서 생각하기 보다는 종로 탑골공원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관상을 보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이런 미신적으로 보이는 요소는 우리나라 6~70년대에나 유행하던 것, 또는 동양에서나 있음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우리나라의 관상학’ 이나 ‘동양 관상학의 역사’ 등등의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서양의 관상학?』이었다. 나 또한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는 ‘서양에도 그런 것이 있었나? 아님 제목을 비유적으로 사용한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관상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다음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Ⅱ. 내용보기관상학의 역사는 문명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곳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것은 인류의 세계관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고, 각 시기의 과학적 패러다임과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때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며 살아남아 왔는지를 살펴보게 해준다. 또한 이 책에서는 관상학의 탄생과 지속이 과거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당대 사람들의 시각에서 추적하면서 서양 역사에서도 다른 문명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널리 팽배하였고 그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서는 각 시기별로 그 모습이 어떻게 규정되고 사용되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 관상학의 탄생관상학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보고 어떠한 관상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문명의 발생과 더불어 관상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는데 그 근거는 이집트, 인디아, 중국 등의 고대문명권 대부분에서 사람의 생김새에 관한 이야기와 우화들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는데 에 있다.)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의 관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예측하는 예언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고대문명들에서도 관상학은 주로 점을 치고 예언을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관상학은 그 사회에서 지식의 한 형태로 인정되기도 하였는데 사물을 이해하는 과학적인 방식을 사용한다고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관상학- 고대 그리스 시대 : 이 시대의 관상은 상당히 널리 유행하였던 관행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과 같은 이들의 저서에도 관상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관상이 학문의 형태로 거듭났다는 것인데 예전에는 예언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였지만 그와 달리 주로 인간의 성격을 추론하고 인간형을 구분하는 분석적 관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과학의 토대 위에 탄생한 새로운 관상학은 그 중요성 또한 관상의 대상으로부터 관상을 보는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의 관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크게 세 가지 방법에 기초하여 관상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첫째 다양한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여 신체의 특성과 성품을 추론하는 것, 둘째 인종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각 인종별로 특색을 찾는 것, 셋째 다양한 표정을 통하여 표정이 의미하는 감정이나 감성을 찾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 : 이 시대에 들어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고대 문명에서 볼 수 있었던 예언적 관상학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문화가 실용성을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론에 치중한 자연과학 대신에 실용과학이 대접을 받으면서 많은 점성가들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점성학의 보급이 이루어졌다. 서기 1세기부터는 로마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전속 점성가를 구해 조언을 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지배자를 보좌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천문학자들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예언적 관상학이 가장 크나큰 발전을 이룬 때는 서기 2세기였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폴레몬을 들 수 있다. 그는 수사학을 섭렵하고 웅변가로 이름을 떨치며 황제의 측근으로서 외교관, 웅변가, 관상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33년에서 136년 사이에 당시의 관상학을 집대성한 저서를 완성하였다.)- 연극, 수사학, 의학에 적용된 관상학 : 연극에서는 정형화된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특정한 성격이나 캐릭터를 나타내기 위해 관상학적 특질들을 이용하여 인간형을 표현하였다. 또한 고대시대에는 웅변술이 아주 중요했다. 모든 일반적인 관심사를 토론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말 자체가 중요한 권력기구가 된 것이다. 앞서 등장했던 관상가 플레몬은 뛰어난 수사학자이기도 하였는데 관상학을 수사학에 응용시키는 방법론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대 관상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수용한 부분은 의학 분야이다. 의학이 언제부터 관상학을 수용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사람의 겉모습은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건강은 인간사에서 항상 중요하게 논의되어 오던 것이기 때문에 의학 분야에서 나타난 관상학은 다른 영향에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조각난 육체와 중세의 관상학이 시대의 학문은 주로 성직자들의 담당이었는데, 그럼에도 고대 문헌들은 중세 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모방해야할 하나의 정형으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쓰여진 대부분의 저서 앞부분에는 고대 현인들의 이름과 저술들이 한없이 나열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중세 유럽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면서 중세의 학문체계에는 고대의 지적 결과물들이 온전히 독립적인 학문으로 위치를 확보할 수는 없었으며 한편으로는 그 의미가 왜곡된 채 기독교 신학을 강화시키는 보충 지식으로 이용되곤 하였다. 12세기 부터는 중세 유럽에 관상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유산이 아라비아 문명권에서 역수입되면서 일어나게 된 현상이었다. 13세기를 지나면서 관상학서에 대한 번역이 금지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중세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신학과 연계하여 다시 발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세만의 독특한 관상학의 특징을 말하자면 인간과 동물과의 비교가 현저히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개념은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동물과는 현저히 다른 존재로 승격시킨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세 이전과 이후 시기 양쪽의 관상학을 모두 비교해볼 때, 중세 관상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체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체의 각 부분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개별적인 상태로 나뉘어져 고찰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중세의 상징주의와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 사람들은 이런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조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타고난 신체의 모양이 바로 별자리이고, 본질이고, 신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각 부분부분의 모양이 담고 있는 상징성이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관상학의 르네상스, 근세이 시기의 인간의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평가되었다. 육체의 재발견은 분명 관상학에도 영향을 끼쳐 누군가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초점이 변화하게 되었다. 이 중 제스처는 관상에서 의사소통이라는 요소를 가장 강하게 내포하는 영역이다. 16세기 이후에는 감정을 다루게 되는 일이 뚜렷해졌다. 특히 표정으로 드러나는 감정에 대하여 예술가들은 매순간 변하는 감정의 표현들을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7세기는 사이비 과학의 전성시대라고 불리는데, 이 시기는 이른바 ‘과학혁명’ 이라 불리는 우주관의 전복이 시작될 조짐을 보이면서 기존의 논리들이 마지막 몸부림과 대유행을 일으켰다. 그 후 지식 엘리트들은 하층계급 사람들이 관상학(점성학)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통제하였지만 이미 널리 퍼져 있던 관행을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수상학은 관상학적 성격분석뿐만 아니라 예언을 통해 사람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알려준다.? 관상학의 암흑기와 새로운 탈바꿈앞서 살펴보았듯이 팽창하던 사회적 관계에 힘입어 르네상스 시기 관상학은 사람의 몸에 대하여 부분보다는 전체를, 고정된 모습보다는 동적인 모습을, 그리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몸짓을 보는 경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인간의 육체는 두터운 화장과 겹겹이 두른 옷 속으로 감추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화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육체를 부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동안 영혼과 이성에 부여하였던 의미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18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고 한세기 동안의 시간은 관상의 역사에서 공백기라고도 불릴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라바터라는 뛰어난 관상학자가 출현하면서 유럽 사회는 다시금 관상학의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라바터의 죽음과 함께 그의 열풍은 사그라들었지만 그가 관상의 주요 대상을 얼굴, 특히 두상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이후 갈의 골상학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관상학의 긴 그림자갈의 골상학은 19세기 말에 이미 죽은 과학으로 치부되는 듯 하였으나 골상학을 비롯한 관상학은 21세기가 시작된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문화적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관상학의 영향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분야는 범죄학으로 외모를 통해 범죄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목적이 강한 분석적 관상학의 전통 위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상학이 유전학과 우생학에 영향을 끼치면서 엄청난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인종말살정책의 희생자가 된 사건이다. 또한 관상학은 고대로부터 생김새를 통해 이방인, 동물, 여성들을 설정하면서 그들에 대한 박해를 외양이 곧 내면을 투영한다는 논리로써 정당화시켜왔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핍박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그려진 생김새의 위계질서를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가공의 우월한 생김새를 숭앙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