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rse: 아프리카 정치와 사회Title: 아프리카에서 서구식 정치제도가 올바르게 이식되지 못한 원인1. 종교적 원인2. 지리적 원인3. 식민지 통치와 결론4. 참고 도서아프리카의 고유의 원시 신앙을 제외한 교구적(체계적 교리를 지닌 종교) 종교의 전파는 이슬람교 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순서상으로 앞서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는 2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를 통하여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3세기 후반 까지 비자케나 와 누미디아까지 전파되었으면 아랍의 침략이 시작되는 7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한다.A.D 632년 예언자 마호메트의 죽음에 이은 아랍의 힘과 이슬람교의 확대는 이후 400년간 세계사의 중심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교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지배적인 신앙이 되었으며,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다분히 아프리카적인 이슬람교의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서구유럽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아프리카가 해방되는 시기사이 이슬람교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지속적인 충돌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종교적 괴리는 서구식 정치제도의 정책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그림과 같이 아프리카의 지리적 위치는 서구유럽과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서구적 정치제도의 근간이 되는 민중의 새로운 정보와의 접촉과 민중들의 각성이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이 서구적 정치제도의 정착을 크게 방해하는 원인이 되었다.19세기에 서서히 진행되던 유럽의 아프리카 침투는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영토 확장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1884~1885 베를린 회의 이후 분할이 본격화 된다. 이에 아프리카 인들은 협상을 할 것인지 투쟁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결론이 필요했고 각 지역별, 부족별 혹은 종교적 신념에 의해 협상과 무장 투쟁을 벌여 갔지만 대부분이 유럽국가의 식민지배를 위협 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초기에는 무력적인 식민국가의 지배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는 특허 회사들의 조직적인 아프리카인과 자원에 대한 약탈, 착취가 있었으며 독립이후에도 계속되게 되는 단일 품목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갖추게 되는 시기가 된다. 20세기 폭발적인 인구성장, 해방운동, 정치적 화합과 결제발전이 아프리카의 독립을 가져왔으나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 정치세력의 무력함과 새로 독립한 국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프리카 국민들이 서구적 정치제도 정착의 문제가 되었다.동아프리카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김윤진아프리카의 역사, 가지않은길, 존 아일리프(이한규, 강인황 옮김) PAGE 1 200202314 이성현
1. 서론1.1 간디의 자서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와톨스토이의 부활을 선택한 이유 ………………………………… 22. 본론2.1 두 작품의 내용의 축약 ………………………………………… 22.2 두 작품을 비교한 결과 ………………………………………… 42.3 비교한 두 작품에 대한 나의 의견과 생각 ………………….. 63. 결론3. 가치와 동서양의 유대 ……………………………………………. 7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도프도예프스키와 함께 레프 톨스토이(L. N Tolstoi, 1828~1910)는 세계적인 문호이면서 동시에 문명비평가 그리고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존재이다. 톨스토이가 쓴 많은 작품들 와 함께 은 3대 장편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이 글을 쓸 때쯤에 벌써 그의 나이 71이었으니 이 작품은 작자의 사상과 종교, 예술의 모든 것이 구현되고 결정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부활은 하나의 뛰어난 예술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른바 톨스토이즘이란 현대의 새로운 믿음을 낳은 위대한 사상의 모든 면을 들여다보는 자료로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이 작품과 더불어 많은 그의 작품들이 간디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간디는 그를 통해 검소한 삶과 비폭력 무저항을 배웠다. 이렇듯 간디와 톨스토이의 사상의 유사점은 간디의 자서전인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간디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그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사상을 비교해보고자 두 작품을 선정해보았다.우선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자 주인공 인 카튜사 마슬로바는 떠돌이 집사와 농노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 번째 사생아로 태어난다. 3살 때 어머니가 죽고, 할머니조차도 외면하자 여지주 자매가 그녀를 맡아 기르게 된다. 그러나 반은 하녀처럼 키워진다. 그녀가 16살 되던 해, 네플류도프 공작은 한때 그의 고모의 하녀였고 자기가 유혹했다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자 네플류도프는 그녀를 버리고 카튜사는 집을 나와 창녀로 전락하를 자신의 곁에서 보내게 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같은 죄수 중 한사람과 결혼을 한다.네플류도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카튜사에게 필요 없는 인간임을 느끼고 복잡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집어든 성서를 읽고는 죄.악.벌.그리고 타락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계율에 따라 살아 갈 것을 결심한다.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이 원고료로 러시아에서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두호보르(성령부정파)신도들의 북미주 캐나다 이주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이었다고 한다. 이는 곧 작가의 거룩한 인도주의 정신과 숭고한 인간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네플류 도프의 정신적 자아가 동물적 자아를 추방하고 소생, 즉 부활하게 됨으로써 동물적 자아에 지배되었던 예전의 생활은 곧 주인공 자신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청년기의 매혹적인 추억이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그는 예전생활과 지금의 생활의 대조를 강하게 의식하게 되면 도덕적으로 갱생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여기서 독자들의 주의를 끄는 것은 정신적으로 거듭난 네플루도프가 자비와 동정을 거의 최고의 도덕적 의무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원래 죄인이나 혁명가에 대해서는 친근감이나 동정심을 가질 수 없었다, 혁명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감마저 갖았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세계에 접근하여, 그들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들의 처지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내적 성향에 대한 깊은 동정과 자비, 그리고 연민의 정이 움직여 그들을 공평하게 관찰하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인생의 목적을 선에 대한 추구로 보고 있다.톨스토이는 부활에서 당시 러시아의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을, 네플류도프와 가튜사와의 상호관계를 통해 지극히 유기적인 형태로 잘 그려 놓았다. 특히 가난한 농민생활에 대해서는 그것이 농노해방 후에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빈곤이 생겨난도를 해방시킨 독립투사이기 떄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르가 그에게 ‘위대한 영혼’ 이라는 의미의 ‘마하뜨마(Mahatma)’라는 존칭을 부여했듯이 고대 인도의 전통에 뿌리를 둔 성자이자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행동가이고 사회 개혁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투쟁 말고도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문제, 불가촉천민과 여성의 인권문제, 여러 가지 악법에 대한 저항운동, 올바른 교육, 농촌경제 등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 등을 개선하기 위해 죽는 날 까지 투쟁했던 행동가였다. 그는 사상과 행동, 곧 지와 행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추상적인 사변이나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상황과 현실적 문제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그의 사상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와 그리고 톨스토이의 사상이었다.톨스토이의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 라는 책에서 진실과 무저항을 어떻게 옹호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 것인지를 배웠다. 그는 증오와 폭력은 약함과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진리파지는 약자의 철학이 아니라 다만 참된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신념이라고 믿었다. 신은 진리이고 도덕적인 법은 곧 사랑 이므로 진리를 구현하려는 모든 행동은 오직 사랑(아함사)과 진리파지의 원리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했다.영국의 인도지배나 인도사회에 깊게 만연된 카스트 차별, 여성에 대한 강압, 빈곤과 무지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리파지와 아함사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비폭력 저항, 비협조 운동, 단식 등 여러 가지 방법은 모두 이 두 원리에 따른 표현이었다.여기서 진리파지란 원리를 행동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기를 각오한 사람을 일컫는다. 진리를 파지한 사람의 목적은 그릇된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마음을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들도 함께 진리와 신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파지한 자에게는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폭력에 의해서가 되기를 희망했고, 또 실증된 참을 현실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진리파지 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이것을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대중과 함께 전개했다는데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개인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려 했던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간디처럼 이런 진리추구를 비폭력운동을 전제로 한 사회적 규모로 일으킨 사람은 많지 않다. 진리가 개인에게 있어서 참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참이어야 하고 결국 사화적인 불의와 대면했을 때 실천을 통해 사회 안에 구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 추구는 개인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고 사회운동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간디의 진리파지 운동의 모습이었다.간디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양을 통해 동양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채식주의 운동을 통해서 이미 톨스토이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의 진리탐구에서 채식주의는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이기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은 결코 인간을 더 높은 진화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꺠닫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타심 뿐 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통해 보면 간디에게 채식주의는 개인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는 채식주의를 힌류가 더 나은 영적, 정신적 합일을 이루기 위한 기초라고 이해했다.또 간디는 메이틀런드를 통해 톨스토이의 검소한 삶과 비폭력 무저항을 배웠다. 그당시 그는 톨스토이가 종교, 자제 ,자발적 빈곤, 공동체, 채식주의 등에 대해 쓴 책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톨스토이는, 현재의 모든 정치제도는 폭력과 강압적 권력을 체화한 것으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에 맞서 싸우는데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의 복지는 박해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박해받는 자들에 의해 얻어지며 결국 선이 악을 이긴다고 말했다. 이런 톨스토이의 영향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실험적 공동체들이 설립되었다. 그가 가르친 대로 농사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들이 러시아에 세워졌다. 1880년대 후반부터,정말 중요한 실험입니다. 뿌리는 깊게 내렸습니다. 이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정착민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리고 말했다.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참회하기 위해 금식을 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 했더라도 자신이 책임을 지고 속죄했다. 그로 인해 공동체는 더욱 밀접하게 간디에게 결속 되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적극적인 희생이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확인했다. 톨스토이 농장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적 관습에 따랐다. 예를들어 이슬람의 금식가간에 사람들은 간디처럼 금식에 동참했다. 간디는“그로인해 모두가 금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공동체 정신이 그들 사이에 싹텄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 몇몇이 이러한 실험에 동참하기를 망설인 것을 회상하면서 자기 절제를 끊임없이 추구하지 않는 이상 금식은 쓸데없는 짓이다”라고 자서전에 썼다.톨스토이 또한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가 되려면 채식주의나 독신 생활, 혹은 자기절제와 같은 금욕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간디는 정부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조합형 공동체를 만들려는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현대문명과 중앙집권화한 국가의 조직적인 폭력에 대한 간디의 비판은 톨스토이의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피닉스 농장을 건설했다. 간디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무저항에 대한 설명이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아힘사교리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간디의 공동체 적이고 금욕적인 사상과 문화 상호간의 종합은 그 자신이 국가주의가 아니라 세계 보편주의자로서 성격이 더 강했음을 보여준다.톨스토이의 사상은 1919년의 3.1 독립운동이 사상적으로 일종의 무저항주의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그것은 곧 무저항주의를 사상적 근본으로 삼아 반영운동을 전개했던 민족운동 지도자 간디와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많은 사람들에게서 크게 공명을 얻고 있던 이른바 톨스토이즘으로 일컬어 졌다. 이런 톨스토이 사 이성현
Course: 한국전통미술의 이해Title: 문화유적 답사 감상문“한국전통 미술의 이해”의 과제를 부여 받은 후 유적지 선정에 고심을 하던 중 집 가까이에 남한산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일요일 아침 가족들과 함께하는 산행은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출발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분당으로 이사를 해서 학교 소풍 때 가본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리 큰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20여분 남짓을 간 후 버스로 갈아탔다. 계곡을 따라 올라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렸을 적 소풍 때 계단을 오르며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내려올 때만 걸어 오자는 생각을 했다. 가을이 오고 있는 산은 꼭 문화 유적지가 아니라도 자연에 일부분으로서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주고 있었다.산성역에서 내린 후 시내 버스로 갈아탔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예전 여름 여행 때 대관령을 넘어가면서 길이 참 많이도 꼬부라져 있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대관령 길보다도 훨씬 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갔었지만 사실 굉장히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남한 산성 남문을 거쳐 짧은 터널을 하나 지나니 남한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전엔 진짜 성문을 거쳐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터널이 생긴 후 직접 성문을 거쳐 들어가는 사람은 도보로 오르는 사람들 밖엔 없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병자 호란으로 인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시 들어온 문도 바로 이 남문 이었다.남한 산성 – 남문버스 정류장에 내리고 나니 주위에 음식점이 꽤 많이 보였고 그 한가운데 남한산성 관광 안내도가 있었다. 가장 오르기도 수월한 편이고 볼 것도 많다는 수어장대를 향해 발길 옮겼다. 남문에서 서쪽으로 성벽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수어장대는 맑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가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꽤 높은 편이다. 가을이라곤 하지만 대낮이 되자 날씨가 따뜻해 지기 시작했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수어장대를 향해가는 길이 수월한 편이라곤 했지만 성벽을 그대로 따라가야 했기 때문에 꽤 힘들 길이었다. 포장된 길은 기대 할 수 없었고, 단지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녀서 평평한 편의 흙길이 있을 뿐이었고 더욱이 힘들었던 것은 성벽을 따라가는 길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성벽길이 가파르면 가파른데로 완만하면 완만한데로 따라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1시간 넘게 걷자 수어장대에 오를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커다란 축조물인 수어장대에 다다르니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와 관련된 많은 안내판들을 볼 수 있었다. 남한산성의 역사, 특히 병자호란과 인종에 대한 얘기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수어장대ㄴ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 하였고,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위협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계속 무시하였고 이에 격분한 청나라 태종은 청, 몽골, 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은 거느리고 9일 압록강을 쳐들어 왔고 14일 개성을 통과 하였다.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당시 병자년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였고 때마침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세자등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 하였다.가장 대표적인 남한산성의 역사인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내용이었다.수어장대를 지나 북문까지 가려고 했지만 이미 체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가족들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어서 유적답사는 남문에서부터 남쪽 성벽을 거쳐서 수어장대에서 끝을 맺고 있었다.돌아오는 길은 남문을 거쳐서 성남시쪽으로 통해 내려오는 등산로를 이용하였다. 역시나 계단을 따라오는 길이 그리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가을산의 정취를 느끼며 집에 돌아오는 길은 남한산성의 역사를 되뇌어 보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PAGE 1 G 200202314 이성현
말을 배우고 글을 이해할 때부터 동화책은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했다.하루하루가 새로운 나에게 동화 속 주인공들은 바로 곁에 있는 친구나 다름 없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비현실적이게도 위기가 금새 행복으로 바뀌는 동화의 내용과 주인공들을 보며, 재미를 느끼고,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동화는 나와 멀어졌던 게 사실이다. 어릴 적 읽었던 것과는 다른 각색하기 전의 내용들을 다시 알게 됨으로써, 그 때는 읽으면서도 느끼거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의문들을 가지고, 동화 ‘두 형제’을 나름대로 재 해석해 보고자 한다.이번에 읽은 동화 『두 형제』는 우리나라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에서처럼 심술 많고 부자인 형과 마음씨 곱고 착하지만 가난한 동생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진부한 인물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형제의 운명은 착하거나 혹은 못된 성격으로 인해 달라진다는 설정을 통해, 우리는 또 한번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동화를 읽는 사람이 4~6살의 어린아이였다면 이런 교훈을 얻음으로써 이 동화를 잘 이해하며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그 당시에는 읽으면서 파악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글의 주된 주인공은 가난한 집의 쌍둥이 형제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인 이 쌍둥이형제는 마음씨 고운 아버지 덕분에 황금새를 보게 된다. 아버지가 부자 형에게 준 이 황금새를 이 두 쌍둥이는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결국 배고픔에 몰래 고기 두 점을 먹는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인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이 이야기의 황금새 또한 황금깃털을 통해 사람들의 물질욕구를 자극하고 결국 과한 욕심 탓에 모든걸 잃고 말게 한다. 이 이야기가 구전되던 당시는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던 시대로 가축을 키우고, 이들을 통해 먹을 것을 얻는 생활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가축에 비해 자주 알을 낳는 조류가 그만큼 귀하고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만큼 동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 게 것이라고 본다.못된 부자 형의 질투심 때문에 비롯된 거짓말로 인해 결국 착한 동생은 두 쌍둥이 아들을 집에서 쫓아낸다. 두 형제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절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동화 속 주인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 두 형제처럼 집에서 쫓겨난 동화 『헨젤과 그레텔』속의 헨젤과 그레텔은 다시 집으로 가는 방법까지 생각해 내고, 숲 속에서 죽을 까봐 걱정을 하는 반면, 이 두 형제는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극한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는가에 따라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아들러(Adler)의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이렇게 집에서 쫓겨난 두 형제는 숲 속에서 한 사냥꾼을 만나게 된다. 『빨간 모자』에서 늑대에게 잡혀 먹힌 빨간 모자를 구한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두 형제 앞에 나타난 사냥꾼도 그들의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사냥꾼에게서 두 형제는 사냥하는 법, 숲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되고, 어느덧 늠름한 남자어른이 된다. 집을 떠나 숲 속으로 가는 부분에서, 남자는 아이에서 늠름한 청년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부모의 보호 하에서 벗어나 숲 속, 즉 거친 세상으로 나가려는 본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번 사냥을 가르쳐준 사냥꾼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모험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들은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고 싶으니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두 형제의 대담성이 드러난 부분이다.청소년 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동화의 앞부분에 나타난 두 형제의 부모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직업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커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 동화의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해봤다.길 떠난 두 형제는 사냥꾼에게서 배운 총 솜씨로 동물을 사냥하려고 하려 한다. 첫 번째 사냥감 토끼는 총을 겨눈 두 형제에게 살려달라고 알게 된다. 그리고 임금님은 그 용을 해치우는 젊은이를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말을 들은 동생은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포상이 이 동화 속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에 용감무쌍한 젊은이가 괴물을 물리친 대가로 한 나라의 공주를 얻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역전이고, 꿈 같은 이야기이다. 이런 상에 혹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공주를 얻고 한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그도 또한 길을 떠난다. 우리가 배운 남자의 성 역할은 용맹성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요즘 와서 남녀의 성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점이 이 동화를 통해 어린 남자아이들에게도 전달되었다고 본다.동화가 늘 그렇듯 기적적으로 용을 물리친 동생은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방심하고 낮잠을 자는 바람에 못된 장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함께 자고 있던 동물들이 일어나 이 광경을 보고 서로 책임을 묻는다. 결국 가장 힘이 약한 토끼가 비난을 받고, 동물들은 토끼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순순히 죽을 토끼가 아니다. 24시간 안에 사람을 살리는 뿌리를 가져오겠다며 목숨을 건진다. 나는 이 부분을 『토끼와 용왕님』 이야기와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토끼의 간이 용왕님의 병을 낫게 해준다는 말은 동화작가의 입에서 그냥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옛 성현들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한다. 벌 쏘였을 때 된장을 바르고, 배가 아플 때 ‘엄마들이 엄마 손이 약손’ 정겨운 노래를 부르며 배를 문질러 주는 것도 다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생활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현명하게 삶을 살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토끼의 간이 병을 낫게 해주는 효험 있는 약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동화에 자주 등장한 소재일 거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두 형제』에서의 토끼는 다른 동물들 중에 가장 힘이 약하고 작은 동물이다. 이 점을 아들러가 ‘인간은번뜩이는 꾀를 내어 자신은 자기집에 간을 놓고 다닌다는 말로 죽음을 면한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토끼의 본능은 이 동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궁지에 몰리자 얼른 꾀를 내어 그 상황을 모면하게 되고, 지혜롭게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뿌리를 찾아온다.내가 이 동화를 읽으면서 은근히 기대한 부분, 즉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원래 동화의 잔인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부분이 『두 형제』에서도 또한 나온다. 토끼가 구해온 마법의 뿌리를 머리가 잘려 죽은 동생의 입에 쑤셔 넣고, 그의 잘려나간 머리를 붙인다. 그러나 서두르다가 사자는 그만 그들의 주인의 머리를 거꾸로 붙이고 만다. 결국 다시 바로잡기 위해 그는 직접 자신의 머리를 뚝 떼어내어 바로 붙인다.노력 끝에 진실을 밝히고 공주와 결혼한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아름다운 하얀 암사슴을. 예쁘고 연약한 여자를 정복하고 싶은 남자의 심리를 그는 공주에 이어 암사슴사냥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누구도 그 숲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한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하얗고 아름다운 암사슴을 사냥하러 가고 만다. 그만큼 남자들은 예쁘고 하얀, 깨끗한 이미지의 여자에 대한 소유본능, 정복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봤다.숲에 간 그는 밤이 되자 숲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늙은 여자가 나무 위에서 내는 신음소리를 듣는다. 신음소리라.. 뭔가 심상치 않다. 그것도 한밤중에 나무 위에서 노파가 내는 소리라니. 그는 노파를 모닥불 주위로 오게 하고 결국 노파는 그뿐만 아니라 같이 온 동물들까지 돌로 변하게 만든다. 숲 속에서 혼자 은둔생활을 하는 노파에게는 사람이 그립다. 그래서 하얗고 예쁜 암사슴을 통해 사람들을 유인하고 걸려든 사람들을 소유하고 영원히 자기 곁에 두기 위해 돌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람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흔히 노파 하면 늙고 못생긴 여자를 떠올린다. 이 늙은 여자를 사랑할 남자는 없다. 그녀는 동화 『라푼젤』에서 찾아 나서고, 결국 동생이 간 숲으로 가서 그 노파를 만나게 된다. 한눈에 그 노파가 자신의 동생을 사라지게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는 총으로 노파를 쏜다. 그러나 노파는 오히려 웃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총알 대신 은 단추를 집어넣고 노파를 쏘려 한다. 노파는 겁을 먹고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읽는 걸 잠시 멈췄다. ‘대체 은 단추가 뭐길래 총알보다 센 것일까? 은 단추가 뭐길래 노파가 벌벌 떠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 끝에 정리된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단추란 옷을 여미는 구실도 하지만 반대로 벗기는데도 쓰인다. 또한 은은 거울과 같이 상(傷)이 비춰지는 금속이다. 즉 은 단추는 겉모습 속의 내면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단추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거울 같은 은 단추로 노파의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그 앞에서 노파는 자신의 치부가 그에게 드러나자 그녀는 수치심 때문에 결국 사실을 털어 놓은 게 아닐까?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파도 못된 사람이기 이전에 한 여자이고 인간이기에 가진 심리를 동생을 구하러 간 형이 잘 간파하지 않았나 싶다.동화 속에 나타나는 악역은 보통 노파나 마녀들의 몫이다. 이들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사람을 받지 못해서 이다. 『백설공주』에서의 마녀가 사람들이 백설공주만 예뻐하고 좋아하자 질투심에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동화 속에서도 어김없이 노파가 그런 역할을 한다.결국 이야기는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들이 결국 예전처럼 함께 흥겹게 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끝난다.동화의 재 해석이 가능한 건 동화의 내용이 변해서가 아니라 변해버린 우리의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상상력으로 동화를 재 해석해 보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의 우리는 왕자도, 공주도, 사냥꾼도, 정의의 기사도 될 수 없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