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准戶口석사과정 200655442 한임선1. 머리말2. 준호구의 서식3. 안정서 준호구(實例)4. 준호구와 호구단자-석대천씨 문서 중심으로5. 맺음말1. 머리말조선이 건국된 이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롭게 문물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호구에 대한 조사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지향하는 조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으로부터 각종 세금과 역을 수취하기 위해서는 인구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구 조사와 관계된 것이 바로 호구자료이다.일반적으로 호구자료라고 하면 대개 호적 내지는 호구단자를 떠올리지만 이러한 문서들이 어디에 이용되었으며,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호적자료는 크게 호구장(戶籍), 준호구, 호구단자로 나눌 수 있다. 호구단자는 戶主가 관에 올리는 것이고, 호적은 이 호구단자를 토대로 작성된 문서이다. 또 준호구는 관에서 발급해 주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내지는 주민등록등본이라고 볼 수 있다.본고에서는 호구자료 중에서도 특히 준호구를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관에서 발급한 준호구의 서식은 조선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준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이러한 준호구가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또한 호구관계사료 중에서 그 개념을 혼동하기 쉬운 준호구와 호구단자를 실제 자료(古文書)를 통해 구별함으로써 호구자료를 통해 당시 사회의 일면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2. 준호구의 서식조선시대에 국가는 정기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 때 각 호에서는 戶口單子를 관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 호구단자에 의해 戶籍이 작성되고 관에서는 이를 통해 호구를 파악했다. 准戶口란 이렇게 작성된 호적에 의거하여 그 등본을 발급한 문서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호적등본 내지는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준호구는 戶主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그 특징이며, 관에서 발급한 문서이기 때문에 일정한 서식에 따라 작성되부가, 지방의 호구는 각 수령이 작성해서 발급해 준다는 것과 각 관에서 발급해 주는 호구의 서식을 규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戶口란 관에서 발급해 주는 문서, 즉 준호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서식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①某年號月日②戶口准府③在某年成籍戶口帳內 ④某部某坊第幾里(外方某面里) ⑤住 某職姓名年甲本貫四祖 妻某氏年甲本貫四祖 率居子息某某 奴婢某某等⑥准給者 ⑦漢城府 外方某州縣 ⑧僉署 ⑨周挾改字數及有無 ⑩橫書踏印호구 격식과 관련하여 태종15년(1415) 戊申條의 기사를 보면 이때까지 호구 격식이 정해지지 않아 前朝의 격식을 따르고 있으니 예조에 호구의 식을 상정해 줄 것을 한성부가 요청하고 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종15년까지 호구부분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려의 법제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추론해 볼 때 조선시대의 전체적인 호구 격식은 태종 15년(1415)년부터 건의되어 의논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준호구의 서식은 세종 10년에 들어서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에 나타나는 고문서가 대체로 이러한 서식에 따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때 정해진 호구 격식은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의 준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준호구에 관한 내용은 『經國大典』 禮典 준호구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①某年月日本②府(外則稱本州本郡) ③考某年成籍戶口帳內④某部某坊第幾里(外則稱某面某里), ⑤住某職姓名年甲本貫四祖, 妻某氏年甲本貫四祖, 率居子女某某年甲 (女?則幷錄本貫) 奴婢某某年甲等⑥准給者⑦漢城府(須備三員) ⑧堂上官押 堂下官押(外則稱某邑某職)⑨周挾改幾字(無則云無) ⑩橫書經印세종실록의 기록과 경국대전의 문서식을 살펴보면 그 서식이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선후관계로 볼 때 경국대전의 준호구식이 세종10년의 서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서식을 바탕으로 하여 준호구의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①은 준호구를 謄給하는 날짜로 연호를 사용하고, ②는 준曾祖 學生 석희, 外祖 學生 권홍, 본관 안동부이고, 모는 권씨로 사망했고, 처 김씨는 35세의 신사년생으로 본적은 안동이다. 父 幼學 용석, 祖 學生 초안, 曾祖 學生 ○명, 外祖 통덕랑 이유오, 본관 진성이다. 節子 조광은 12세의 갑진년생이고, 재종은 유학 주상인데 32세 ○○년생이며, 재종 유학 태상은 본리에서 이사갔다. (노비에 관한 기록은 편의상 표로 작성)奴/婢名나이간지父母비고率奴甘同48무진私奴 매산班婢 애개婢○○37기묘私奴 사훈班婢 사월婢戊良23계사名不知班婢 돈춘婢莫心31을유私奴 사금私婢 기분婢述女37기묘班奴 귀세班婢 천녀婢士月15신축私奴 의현班婢 무옥婢太月17기해私奴 금석私婢 ○牙之奴金伊同23계사私奴 술이班婢 인녀奴建伊25신묘節奴○○35신사名不知名不知婢金德2갑인私奴 험금班婢 설녀外居婢○玉39정축不知私婢 서을단1소생婢丁娘21을미2소생奴龍必16경자3소생婢丁今11을사4소생婢丁德8무신奴亥發55신유私奴 유년班婢 삼진良妻와 혼인1소생奴天守22갑오良女, 名不知2소생婢天○9정유奴己奉52갑자私奴 매산班婢 애○○元47기사私奴 을용班婢 월향*同奴士命45신미奴崇伊35신사〃〃부모상동婢崇女47기사1소생奴二萬21을미私奴 壬先婢戊玉58무오1소생奴岩回29정해2소생婢?女20居西先丹池里奴江牙之47기사奴於屯伊22갑오奴者矣介20병신私奴 해신私婢 ○○奴九眞21을미私奴 정산班婢 기덕婢丙女11을사私奴 마동班婢 설○婢母女10병오班奴 강아지班婢 환녀남매奴毛石乙屎8무신〃〃奴甘石30병술班奴 귀세班婢 천녀婢二月25신묘私奴 기축私婢 병진도망婢今春107기사私奴 기룡班婢 용진婢順今102갑술私奴 강산班婢 남매1소생奴己龍82갑오2소생奴仁今72갑진이미 도망婢永還140병○○奴 年伊班婢 춘덕1소생奴守龍110병인庚辰年에 도망2소생奴戒生102갑술3소생○○還77경자奴小叱介112갑자班奴 기룡良女 사덕1소생婢五分88무자乙卯年 도망2소생婢於屯伊85신묘3소생奴於屯金82갑오4소생奴莫立74임인5소생奴莫奉70병오奴馬同55신유*院奴 건리금私婢 칠금婢允代78무술名不知班婢 용분婢哲女62갑○私奴 사애班婢 천대奴介同53계해私奴 가오리班 外居奴, 班奴婢), 私奴婢, 院奴 등 적어도 5개의 종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한 부분은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노비들의 役이나 소유주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은 틀림없다. 그 밖에 노비의 나이에 있어서 100세가 넘는 노비가 무려 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실제 나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약간이 무리가 있는 듯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준호구에 노비에 관한 사항이 이처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 인구(노비)의 파악이 얼마나 중요시 되었는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관부의 도장과 관원의 압(수결)이 나타나 있다. 이 준호구에서 고친 글자수는 한 글자이며 이를 담당한 관원은 행부사, 권팽걸, 민봉일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준호구는 호구에 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증명서이기 때문에 주로 소송시(訴訟時)의 첨부자료, 노비소유(奴婢所有) 및 추쇄(推刷)의 자료, 가문과 신분 유지를 위한 자료로서 사용되었다.4. 준호구와 호구단자 - 석대 천씨 문서를 중심으로이상에서 준호구를 중심으로 그 서식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주지했듯이 준호구와 호구단자는 그 작성 목적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호구단자는 “單子”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주가 자신의 호구관련 내용을 관에 올리는 것이고, 준호구는 반대로 관에서 일종의 증명서로서 발급하는 문서이다. 이 두 가지 호구자료는 당대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석대천씨의 준호구와 호구단자(부산박물관소장)를 통해 이들이 어떠한 차이점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 두 자료를 통해 천술운의 호구내용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해 보고자 한다.道光八年三月 日 東萊府考戊子成籍戶口帳內東上面石臺里住第七通一戶幼學千述運年六十二丁亥生本安東父學生世慕祖學生聖泰曾祖學生益輝外祖學生朴思德本密陽子幼學逸甲年三十三丙辰生加婦鄭氏年二十三丙寅生乙酉戶口准給者)行府使(押)참조庚午七月 日호구와 호구단자를 연관지어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의 천씨家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자료에는 모두 천술운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나이를 기점으로 하여 두 자료의 선후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천씨의 나이가 호구단자에는 44세, 준호구에는 62세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문서의 작성은 호구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 준호구가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호구단자에는 이 단자가 언제 작성되었는가에 대한 연도가 간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도를 밝혀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준호구를 이용하면 호구단자의 작성연도를 추측할 수 있다. 준호구는 그 謄給日을 연호로 나타내기 때문에 해당연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천술운의 준호구는 도광 8년에 謄給된 것인데, 道光은 청나라 선종의 연호로 1828년(순조28,乙巳)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호구단자는 준호구가 등급된 해로부터 18년 전에 작성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호구단자가 1810년(순조10, 丁亥)에 작성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 진다.호구단자 작성 당시인 1810년에 천술운은 동면 상단 석대리 7통의 제1호에 살았고 기록된 사람은 어머니 박씨와 동생 달손, 제수 이씨, 노비 어인덕과 그 소생 명진이 있었다. 즉, 천술운은 부인이 없이 어머니, 동생 부부, 婢 2명과 살았는데, 어인덕의 딸인 명진이 도망갔으므로 총 5명의 가족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 후인 1828년에 천술운은 이 준호구를 동래부로부터 발급받았다. 첫째줄에 나타나 있듯이 이것은 무자년에 成籍한 호구를 을유년 호적에 준하여 등급한 것이기 때문에 간지를 통해 추측해 본다면 이 준호구는 1828년 작성된 호적의 내용이며, 3년 전인 1825년 을유년 호적에 근거하여 발부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년의 시간 동안 천술운의 가족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식구들 중 천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은 기록에서 모두 없어졌고, 그들을 대신해 아들부부에 관한 기름이다.
히틀러의 도시 뉘른베르크Ⅰ. 머리말Ⅱ. 본론1. 히틀러의 생애2. 제2차 세계대전3. 히틀러와 홀로코스트4. 히틀러와 뉘른베르크5. 뉘른베르크 관광Ⅲ. 결론Ⅰ. 머리말50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주(州)에서 뮌헨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뉘른베르크를 동서로 가르는 페그니츠 강을 중심으로 구 시가지는 남북으로 나뉜다. 페그니츠 강 남쪽과 북쪽은 완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고, 구 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 바깥은 대로로 교통이 붐비는 현대적 거리이다. 이처럼 뉘른베르크는 성벽을 경계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도시이다.뉘른베르크라고 하면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장인 가수」를 들 것이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뒤러를, 또 대다수는 히틀러와 나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범재판소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뉘른베르크는 역사적으로 예술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라 할 수 있다. 뉘른베르크는 2차 세계대전에서 90%에 이상 파괴되었으나 사람들은 이 도시를 옛날의 모습을 따라 복원시켰고,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우리는 옛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뉘른베르크의 성벽 안 舊도시는 중세 시대부터 ‘총통의 도시’까지의 역사가 공존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쾨니히 문, 로렌츠 교회, 성모교회, 카이저 부르크 성 등 건축물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의 뉘른베르크와 히틀러로 대표되는 근대의 역사적 도시 뉘른베르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히틀러의 생애히틀러는 제3의 제국의 총통으로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20세기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886년 오스트리아 세관원이었던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틀러는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1908년 빈에서 미술학교에 2차례에 걸쳐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해 갔다. 경제 공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1930년 9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107의석을 차지하여 일약 제2당의 지위에 올라섰다. 1931년에는 브뤼닝 내각에 반대하여 우파세력과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했다. 1932년 7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당의 지위를 확보했으나 히틀러는 파펜 내각에 입각을 거부하고, 1933년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에 의해 수상에 임명되었다. 이어 의회정치를 배제하고, 정당, 노동조합의 해산을 강행함으로써 나치스에 의한 일당 지배를 확립해 나갔다. 그리고 슐라이허, 스트라서 등 적대자를 숙청했다. 그 해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이며 독일수상으로 그리고 당수, 정부수반, 국가원수의 지위를 겸하고, 또 국방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로 부터의 충성선서도 받았다.이후 독일 민족의 “생존권”수립의 정책을 펴나갔는데 이로부터 유럽 침공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 합방,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그리고 8월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뒤, 9월 폴란드 침공하고 1940년 6월 프랑스를 정복했다. 1941년 소련과의 개전으로 그들의 독일민족의 생존권수립정책은 성공하는 듯이 보였으나, 1943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의 패배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동안 독일의 점령지에서는 히틀러에 의한 민족 억압정책의 실시로 유태인 멸절에 착수하여 많은 유태인이 학살당한다.1944년 7월20일 히틀러 암살 음모가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 총통관저(지하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그 이튿날 함께 자살했다.2. 제2차 세계대전의 발생 - 독일의 움직임을 중심으로독일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군비가 제한되는 등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일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물가의 상승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독일성 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압박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으며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 오자, 1945년 4월 30일 총통관저에서 히틀러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이후 히틀러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되니츠 제독에 의해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하였다.3. 히틀러와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란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미증유의 반인륜적 범죄이다. 나치스는 유럽의 유대인을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멸종시키고자 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단지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해야 했다.그렇다면 나치스가 이러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나치스의 중심이론은 이른바 독일민족지상주의(아리아인 지상주의)에 근거한 인종주의였다. 요컨대 게르만 민족은 인류 중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이 있으며, 이와 반대로 유대인은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으로서 모든 사악함의 근원이라 낙인찍었다.이러한 인종론을 통해 나치는 유대인 학살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까지도 정당화 시켰다. 세계의 적이 근절되지 않는 한 유럽에서 평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은 독일을 중심으로 뭉쳐야 되고 독일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동유럽으로 팽창하여 자기 종족을 위한 사활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의 각국들은 중세시대부터 뿌리 박혀 왔던 반 유대주의적 기독교 전통으로 인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외면하거나 방관했다.나치에 의해 행해진 홀로코스트는 비단 유대인만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집시들도 인종적으로 불순한 집단으로 여겨져 가스실로 보내졌으며, 러시아인, 폴란드인 그리고 다른 독일 동유럽 점령지 주민들도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설사 게르만족이라 해도 정신적?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홀로코스트는 짧은 시간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나치가 정권을 잡고 난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늘어난 유대인들을 처리하기 위한 문제로 기본적으로 일정지역으로의 이주를 표방했다. 1939년에는 정신적?신체적 결함이 있는 독일인 약 9만명이 살해당했다. 1941년 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러시아 유대인의 처리 문제가 결정되었는데, 나치는 여기서 러시아 유대인들을 사살하기로 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나치의 유대인 문제는 이전의 단순한 공간적인 분리로부터 육체적인 처리방식으로의 과격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1941년 가을부터, 서유럽이나 독일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동부로 이송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 중에 소련군 포로 약 2/3 정도를 직접 학살했다.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가 대폭 확장된 것은 사실 소련군 포로를 수용할 목적이었으며 최초의 독가스실 실험도 소련군 포로들을 대상했던 것이었다.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가 개최 되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 처리를 학살을 뜻하는 ‘최종적 해결’로 결정지었다. 이후 나치는 1945년 5월 전쟁 종료시까지 유럽 전역에서 60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하는 비극을 연출했다.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연관되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이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의 도시로, 이곳에 2차 세계대전시에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와 집단학살수용소가 지어졌다. 1940년 4월 7일 H.힘러의 명령 아래 나치스친위대(SS)가 이곳에 첫 번째 수용소 건설했고, 그 해 6월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했다.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건설되었는데 1945년 1월까지 나치스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4. 히틀러와 뉘른베르크1) 전당대회히틀러는 제국의회의 도시 뉘른베르크를 제국 전당대회 장소로 삼고,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제3제국이 시작되기 전에 제국 정당대회는 뮌헨(1923)과 바이마르(1926) 그리고 뉘른베르크(1 ‘콜로세움’나치는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범으로 하여 말굽형의 위압적인 건축물을 지었다. 이곳은 6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40m 높이의 회의 홀이지만 완공되지 못했으며, 이 건물의 북쪽에는 현재 나치 기록관이 위치하고 있다. 기록관 안에는 나치의 역사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다.4) 두첸트타이히(인공호수)두첸트타이히는 히틀러가 만든 거대한 인공 호수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독일은 엄청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이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거대한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콜로세움과 두첸트타이히였으며, 실업자들을 대량으로 구제하는 이 사업을 통해 히틀러는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5) 히틀러 광장(Hitler plazt)히틀러 광장은 1933~1945년 동안 불리워진 중앙광장(Haupmarkt)의 또 다른 이름이다. 히틀러는 이곳에서 나치스 돌격대(SA), 나치스 친위대(SS), 나치스 청년단(Hitler Jugend)과 그 외 다른 그의 추종자들을 사열했다. 또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 뉘른베르크 외곽의 루이폴트 아레나도 히틀러 광장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6) 전범재판소(palace of justice)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독일전범을 소추(訴追)하여 처벌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군사재판소를 세웠다. 1930년대에 나치 전당대회의 장소가 되었고, 1935년에는 유대인 말살을 위한 뉘른베르크법이 발표되는 등 나치의 상징이었던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나치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전범재판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간에 체결된 국제군사재판의 설립에 관한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쟁 범죄인의 공정하고 신속한 심리와 처벌을 위하여 국제군사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재판소는 영국인 판사 로렌스를 재판장으로 하는 4명의 재판관으로 이루어졌으며, 1945년 10월 18일에 기소장이 제출되어 1946년 9월 30일과 10월 1일 양일간 판결이 내려졌다. 전범들의 소송 이유는 침략전쟁을 위한 공동의.
【거울에 비친 유럽】1. 책 소개2. 요약 . 정리3. 긍정적 평가4. 부정적 평가(반대 의견)5. 책을 읽고 나서Ⅰ. 책 소개“ 유럽의 역사는 일그러진 거울들로 이루어진 유령의 집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우월한 문화를 가진 “유럽”이라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러한 역사 인식이 다 조작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왜곡된 거울로 표현하면서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유럽이라는 세계의 본질이 왜곡된 거울에 비추어져 승자(勝者)의 관점에서 역사서술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기존의 지식을 부정하면서 무엇인가 일관된 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금 재인식하자는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은 현재 여러 방면에서 논의가 진행 되고 있다. 역사란 언제나 승자(勝者)의 역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승자들의 정당성을 지지해주기 위해 이용된 것이 바로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던 민중적인, 더 세부적인, 지방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다시금 재고해보아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관념의 틀을 깨고 유럽에 대한 환상이 깨진 오늘날에 이르러 이제 우리의 필요와 보다 일치 되는 다른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여러 가지 왜곡된 거울에서 벗어나 그들을 보다 새로운 눈으로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재인식은 단순히 유럽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근대화 모델이 되었던 서구에 대해 다시금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이 된다.Ⅱ. 요약소위 유럽 ‘문명(文明)’의 기원은 근동에서 출현한 일련의 진보에서 출발한다. 이는 유럽 문명이 혼혈적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에 대한 전통적 관점은 유럽 은폐하는데 기여했다. 로마인들은 자기 자신에 갇혀 세계가 두 부분, 즉 제국과 야만인들의 세계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는 야만의 거울이라고 하는 왜곡된 표면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습관은 그 경계 너머에도 다른 세계가, 다른 문화가, 심지어는 자기네 것보다 더 우수한 과학과 기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전통적 역사관에서 ‘유럽적인 것’을 특징짓고 있는 두 번째 요소는 기독교로써 초기의 순수함이 변하지 않고 그래도 유지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의 기독교는 매우 다양한 목소리와 매우 폭넓은 관점들을 포함했다고 말해져왔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제국의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기독교의 다원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은 사라지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기독교’ 로 바뀌어 공인된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을 안에 포괄하고 모든 행동을 통제하려고 하는 일원화적이고 계서화된 하나의 공동체로 변해갔고 이는 국가에 의해 공인된 유일하고 보편적인 하나의 기독교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의 권위가 확립되자 이에 대한 새로운 신앙체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의 모든 특징을 하나로 묶어 그 외 다른 경향은 개인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만들고 이제 추방되어야 할 것으로 새로 의미가 주어진 ‘이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정통 교리의 얼굴은 이처럼 왜곡된 거울 속에서 완성되었으며, 몇몇 공통적 측면들을 가진 다른 얼굴들을 자신과 대조시켰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위협받고 있는 사회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제국의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전통적인 역사 서술에 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중세는 암흑의 시기로, 정체와 퇴보의 시기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위기는 야만인과 로마인 간의 관계의 종말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관계의 점진적 변화를 의미할 뿐이었다. 이는 거대한 단절이 아니라 지속과 점진, 그리고 적응이 더 많았다. 또한 이 시기는 부동성(不動性)에 갇힌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인구와 농업 생산의 증가로 인한 교역의 증대를 가져왔고 였다. 이 두 이름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이다. 악마의 추종자들에 대한 투쟁을 십자군과 종교재판소를 통해, 그리고 고문의 체계적인 사용과 소수 집단을 격리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범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보다 순수하고 청빈한 교회를 원했던 사제와 수도사들, 교회가 새로 부과한 세금에 저항했던 농민들, 고위 성직자와 도시 과두 귀족간의 동맹을 비난했던 도시민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하여 휩쓸려 갔다. 또한 ‘새로운 이단들’은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니 바로 그때 나타났다. 이들은 교리 내용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단죄받았다. 이와 같이 악마적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던 유대인들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당시 실상을 왜곡시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 이용되었던 것이다.유럽의 중세 후기는 상승과 쇠퇴의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쇠퇴는 기존의 역사에서 페스트에 기인한 것이라고 서술되어왔다. 그러나 페스트를 모든 것의 기원으로 집착하는 대신에 현상들을 중세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 위치시켜 살펴보는 쪽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의 측면에서 나타난 여러 저항들은 우리에게 역사의 일반적 과정에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소개된다. 따라서 만일 모든 경제적 사회적 변화, 심지어 문화적 변화까지도 페스트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혹은 세상을 바꿔보려고 한 사람들을 때려눕힌 승리자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편향된 해석과 같은 신기루에 가리지 않은 시선으로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아마 지금까지 이어져온 발전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었음을, 그리고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관된 프로그램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당시의 소위 ‘민중 문화’를 구성하는 이념들의 복합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의 소요에 대한 대공포는 휴머니즘의 정치적, 종교적 개혁의 이상과 복음주의적 이상에 보다 근접한 사회를 원하는 유럽 민중 계층의 열망을 “통속적이고 멍 우월한 지위에 둔 채 원주민들은 열등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림으로써 그들을 살해하면서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문명과 생활터전을 삼켜버렸다. 또한 미개인들의 자연적 열등함은 18세기 유럽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정당화 되어 갔다. 그들은 인종을 분류하는데 동물들을 분류할 때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미개인에 대한 판단은 이성에 근거한 사고가 아니라 은연중의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가 만들어 내는 얼굴에 다름 아닌 것이다.이성이란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흔히 스콜틀랜드가 진보를 발명했다고 말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후진성을 발명하여 그 거울에 자신들을 비추어보면서 그들 자신이 진보한 것으로 규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유럽인들을 스스로를 진보하다고 생각하면서 덜 진보된 민족들에 대한 착취를 스스로 정당화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기계의 진보일 뿐이었다.이러한 유럽 중심적 관점은 단순히 비유럽 민족들에게서 그들의 역사를 박탈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분명 유럽인 자신들 중 많은 사람들한테 공식적 역사로 성역화된 것과는 다른 과정들이 있었음을 숨김으로써 유럽인들로부터도 역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Ⅲ. 긍정적 평가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유럽의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것은 단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는 측면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중앙사에서 지방사 중심으로, 지배계층에서 피지배계층으로 그리고 문화사 측면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숨겨져 있었던 민중들의 역사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기존의 전통 역사 서술 체계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우리에게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었던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역사서술 체계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유럽 중심주의적 세계사 서술은 하나둘 폐기처분될 운명에 놓여 있나갔고,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무시해 버리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들 또한 스스로가 유럽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인정을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유럽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유럽인들이 하루 빨리 이 유령의 집에서 뛰쳐나와야 한다고 요구한다. 일단 거기에서 벗어나면 '세계'라고 하는 거대한 책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연구 작업을 다시 할 수 있겠지만, 만일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게토'에 갇혀 결국에는 그들 자신들의 파괴를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근래의 역사 연구 방식에 있어서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우리 가치관을 바꾸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사실들 즉, 기독교라는 것이 정치와 결탁되어 있었다, 진화론이라는 것은 유럽인들의 제국주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 이었다 등의 것들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서술해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스스로 비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Ⅳ. 반대 의견저자는 유럽인 스스로가 세계에서 우위라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스스로 파멸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를 비판하고는 있으나 이 사람이 은연중에 유럽사를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는 세계의 중심이 점차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또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유럽인들이 자각하지 않으면 다시금 세계의 중심을 차지할 수 없다는 위협감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반성에 의하지 않고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었다.
< 차세대 바다의 이용 >우리 문명은 급속히 발달되어져 현재 지구의 인구는 61억을 돌파하였고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에너지량은 원시인에 비하여 100배나 많이 소모하고 있다고 한다.향후 지구의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어버린다면 인류는 무엇으로 필요한 에너지 자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정말 풀어 나가야할 문제일 것이다.다행하게도 지구에는 지구 표면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있는데 여기엔 무한하고 거대한 에너지와 자원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부족하고 막대한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여 왔으며 여러 차례 에너지 쇼크를 경험하면서 큰 고통을 겼기도 하였고 최근 이라크전에 의해 더욱더 가속화되었던 고유가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나라의 에너지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우리나라의 지형적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 이 해양의 개발에 거는 기대가 클 것이다.그렇다면 해양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해양을 구성하고 있는 방대한 양의 해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동하고 있다. 이 유동현상이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동반하게 되어 해양 에너지 자원을 형성한다. 해양에너지로는 크게 파력, 조력 및 온도차 등을 들 수 있다.우선 첫 번째로 파력발전(wave-force generation)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자면...파력발전이란 파랑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발전으로서 바다에 장치를 띄우는 방식과 연안에 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이 있다.일본은 Kaimei에 240 ㎾급의 해안 고정식 파력 발전 장치를 설치하여 시험 가동하고 있으며, 해양 과학 기술 센터 주관으로 540 ㎾급의 부유식 파력 발전소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영국도 벨파스트의 Queen's 대학에 75 ㎾급 파력 발전 장치를 설치하여 가동 중이고, 덴마크는 34 ㎾급 발전소에 대한 실증 실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노르웨이도 500 ㎾급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실험용 파력 발전 시스템은 출력 60KW급으로 직경13m 높이 9.5m의 원통형 이며 무게는 415톤에 달한다.이렇게 국내에서는 파랑이 심하다고 생각되는 일부 해역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다음으로 조력발전이 있다.조력발전이란 조석이 발생하는 하구나 만을 방조제로 막아 해수를 가두고 수차발전기를 설치하여 외해와 조지내의 해수를 가두고 수차발전기를 설치하여 외해와 조지내의 수위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방식으로서 해양에너지의 수위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방식이다.이 조력발전의 장점으로는 발전을 하는 지점이 결정되면 그 지점에 있어서 조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으며 청정에너지이다. 반면, 단점으로는 얻어지는 유효낙차가 적고, 또한 조위의 변화가 연간을 통하여 균일하지 않으며, 조위가 일정한 시간대에서는 발전할 수 있다는 문제점들이 있다. 하지만 국내 경기만 일대는 세계적으로 드문 조력발전의 최적지로 부상한 곳이다. 1932년 일제시대 때부터 발전소 설계도를 작성한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1986년 영국의 공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로림만에 조력발전소를 지을 경우 시설용량이 40MW, 연간 발전량은 836GWH까지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최근에는 조석간만의 차가 큰 충남 서산의 가로림만은 조력발전의 유망한 후보지로 선정되어 현재 이의 개발을 위한 연구가 활발히 수행 중이다.마지막으로 해양온도차를 이용한 발전이 있다.해양온도차발전이란 수심에 따른 바닷물의 온도차를 이용한 발전 방식이다. 열대해역에서 해면의 해수 온도는 20 ℃를 넘으나 해면으로 부터 500∼1000 m 정도 깊이의 심해에서는 4 ℃에서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런 표층수와 심층수의 온도차로부터 프레온과 같은 저온 비등 매체(냉매)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기술을 해양 온도차 발전, 줄여서 보통 OTEC)이라 부른다.이 해양온도차발전의 장점으로는 에너지 공급원이 무한하며 청정자연에너지이며 주/야 관계없이 전력생산이 가능하며 특별한 저장시설이 필요없다는 점등이며 반면, 단점으로는 생물 때문에 생기는 오염을 막기 위한 대책을 필요로 하며, 실제 OTEC발전을 통한 전력 생산시 열역학 시스템의 총 효율은 2.5 ~ 3.0%정도인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고................내가 제목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때 수능 준비를 하면서였다. 자습서마다 문제집마다 빠지지않는 부분.... 그때는 소설은 읽어보지도 못한채 그저 이 소설의 주제가 '도시 빈민의 겪는 고통과 좌절' 이라고만 배웠었다. 이 책은 같은 주제를 가진 12편의 연작소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이란 참으로 묘하고 이상했다. 비록 70년대 사회의 노동현실을 나타낸다고는 하나 2001년인 지금도 분명히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또다른 난장이 가족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빈부격차... 어디까지가 잘살고 어디까지가 못사는 것인지 정확한 경계는 없지만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항상 옷사달라고 투정, 용돈 많이 달라고 투정, 반찬 맛있는 것이 없다고 투정하던 나는 이책을 읽고 갑자기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살아가기 조차 힘든 생활에서 보리밥과 쭈그러진 감자를 먹으며 사는 난장이 가족들... 죽어라고 일만 하면서 그에 알맞은 보수도 받지 못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무런 현실 대응도 하지 못한채 꿋꿋이 견뎌 내기만 하는 행복동 사람들과 난장이 가족들... 갑자기 이 사회의 부의 분배를 생각하게 되었다. 며칠전 텔레비전에서 본 내용이 생각이 난다. 한 가정의 잘살고 못사는 것은 그 가족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세습적인 성격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할아버지가 잘살면 아버지도 잘살고 또한 나도 잘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이 가난하다면 내가 커서 잘살게 될 가능성을 그만큼 작다는 말이다. 물론 믿고 싶은 내용은 아니지만 정말로 뼈저리게 그리고 절실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난장이네 가족이 아주 오랜 조상때부터 노비라는 신분에서 힘들게 살아온 것이 대물림 된 것 같이 우리 사회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닐까?은강그룹의 가족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강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을 모른다.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숙부가 죽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형제간은 서로 피로써 연결된 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유산을 어떻게 분배받을 지에 관한 것이 최대 관심사이다. 형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형이 죽기를 간절히 기도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솔직히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매일 싸우고 으르렁거리더라도 하루라도 오빠를 안보면 걱정되고 허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소설가 조세희씨는 이 은강그룹의 사람들이 비록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강자로 보이더라도 실제로 그 보이지 않는 면에서는 이들이 약자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맨 마지막부분에서 내일은 정신병원에 가보아야 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라는 부분을 보면서 현대사회의 가족들 간의 메마른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이 소설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바로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과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의 노동자들의 현실적 패배를 보여주고 있다. 야간조 근무를 하다가 졸면 옷핀으로 살을 찌르고, 구멍뚫는 드릴과 나사를 조으는 기계를 두손에 들고 나사는 입에 물고 입안이 다 터져서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황,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람된 권리, 인권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 이 공원들이 인권을 지켜달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못배워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희의 큰 오빠인 영수역시 매일 책과의 싸움을 하지만 결국은 강자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니 말이다. 이들이 두려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들은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의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설령 그것이 생활비가 아니라 생존비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자본주의 구조의 모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외치고 있는 "평등"은 과연 무엇일까?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강자는 강한자에게는 약하고 약한자에게는 강하게 군림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등이란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평등은 두가지가 있다고 배웠다. 실질적 평등과 무조건적인 평등... 무조건적인 평등을 바란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회주의를 바란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 평등은 무엇인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나라이고 평등한 사회라면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난장이 가족들과 행복동 사람들, 그리고 은강공장의 공원들 모두가 우리사회의 힘없는 약자를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속에서 나타나듯이 난장이 가족과 같은 사람들은 어떠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들이 바라는 것은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것,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대우받을 수 있고, 자기가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을수 있는 것이 평등한 사회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답게 살 권리는 가질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문득 화가 나는 부분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잘사는 사람들과 못사는 사람들을 대조적으로 잘 표현해 놓았던지... 윤호를 A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몇 명의 가정교사를 붙여주는 부자아버지와 세명의 아들, 딸들을 중학교조차 보내 줄 수 없는 난장이 아버지, 독일제 자동차를 몰고다니는 은강그룹회장의 손자와 은강공장주변의 흙을 주워먹고 있는 아이들.... 솔직히 내자신은 부자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안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을 빼서 사회에 환원함으로 인해 자신은 정이 있고 뜻이 있는 사람으로 내세우는 부자들... 물론 우리 사회의 모든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가진 자 들중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노력해서 그 결과를 얻은 이들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보통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진자들의 생활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볼때면 나도 모를 이질감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치 그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사는 사람이 아닌것같은 딴세상 사람들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문득 가끔씩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