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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의 구조와 가람배치 평가B괜찮아요
    절의 구조와 가람배치1. 절의 구조(1) 절의 뜻절이란 중국에서 원래 외교사절을 관장하는 관청을 뜻하는 것이었던는데, 인도의 스님들을 처음에 이 사에 맞이해서 거주케 한데서 차츰 스님이 거주하는 곳을 사로 불렀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사는 불교의 스님들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다른 뜻으로 가람(伽藍)이라고도 불려지는데 원래 인도말 Samgharama 를 중국말로 번역해서 승가람(僧伽藍)이라 했는데 줄여서 흔히 가람이라 부른다. 여하튼 절의 총체적인 뜻은 스님이 살면서 수도하고 예배드리고 교화하는 장소 즉 불교의 사원이라는 뜻이다.(2) 절의 구조{절의 구조물들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점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다. 먼저 절의 영역을 표시하는 당간지주가 보이고 일주문·천왕문·불이문·범종각이 있고 석등과 탑 그리고 그 뒤에 법당이 있으며 그 뒤로 명부전과 독성각·산신각·칠성각등이 자리잡고 있다.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승원(僧院)과 당(堂)이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원의 중심이 되는 불당(佛堂)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금당(金堂) 또는 법당(法堂) 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당이라는 것은 불상을 봉안한 불당이나 법당뿐만 아니라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과 강당(講堂) 등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불당은 불상을 봉안하고 불교의 각종 행사를 봉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강당은 경과 율을 강설하고 연구하는 장소이다.우리나라의 전통적 사찰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건축물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건축물들의 이름은 그곳에 모셔진 부처님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다.1)당간지주절로 가는 길목에는 이제 곧 부처의 세계로 진입하게 됨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그것은 깃발을 거는 막대기와 받치기 위한 돌기둥으로, 찰간지주(刹竿支柱)라고도 한다. 깃발을 거는 막대기라는 의미의 당간과 이 당간을 세우는 기둥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형태는 두 기둥을 반하여 뒷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고 둥글며 옆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해서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아랫부분에는 당간을 세우는 간대(竿臺)나 기단이 마련되어 있다.2) 사찰의 문절 입구에 있는 일주문, 중간에 있는 문을 사천왕문, 법당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불이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삼문(三門)이라 한다.1 일주문(一柱門)절에 들어가는 곳에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일주문으로 산문(山門)이라고도 한다. 대개 어떤 산의 어떤 절이라는 내용의 편액(간판)을 걸어 두는 곳이다.일주문의 기둥은 절대 진리를 상징한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 곳을 기준으로 승(僧)과 속(俗),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생사윤회의 중생계(衆生界)와 열반적정의 불국토(佛國土)가 나누어진다.2 사천왕문(四天王門)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의 주인으로 불국의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사천왕은 33천 중 욕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쪽을 수호하는 데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 벌을 준다. 또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삼지창을,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고 한다.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 그리고 비파를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3 불이문(不二門)절의 중심인 불전 앞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 문을 통해서 불교의 진리가 전개되는 것으로 문 안과 밖의 세계가 별개임을 상징한다.곧, 불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하며 절대 차별 없는 이치를 나타낸다. 불이는 진리로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가 둘이 아니며 있음둘이 아니며, 중생계와 열반계 역시 둘이 아니니, 일체중생이 저마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이 문을 들어서면서 부처님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 하기도 한다.3) 범종각{범종각 불이문으로 들어오는 구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불이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하늘의 주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있는 것으로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일직선상에 놓이다. 이는 불이문을 통과한 구도자의 기쁨이 범종을 비롯한 사물을 통해 울려 퍼진다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다. 보통 범종각 안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이렇게 네가지 타악기가 있는데, 이를 총칭하여 '불전사물'이라 부른다.부처님의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해 깨달음과 해탈을 염원하는 중생구제의 의미로 아침, 저녁 예불(禮佛)과 모든 불교행사 의식 등에서 이용되는 이 네 가지 악기는 각기 고유한 음색을 지니고 있으며 의미 또한 독특하다. 먼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범종, 가축이나 짐승을 제도하기 위한 법고, 물고기들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한 목고, 공중을 떠도는 영혼 특히 새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운판이 있다.{4) 석등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5) 법당법당이란 부처님을 모신 집으로 인도에서는 부처님을 금빛 나는 분이라고 해서 신라 때에는 불전을 금당(金堂)이라고도 했다. 법당의 경우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삼신불(三身佛) 사상에 따라 중앙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왼쪽에 보신(報身) 노사나부처님, 오른쪽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극락전·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신 미륵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관음전 등으로 법당에 모신 부처에 따라 법당의 종류가 북두칠성을, 산신각은 우리 고유의 토속신인 산신을, 독성각은 말세 중생에게 복을 베푸는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이다. 이들 세 분을 함께 모신 전각을 삼성각(三聖閣)이라 한다.각(閣)이라고 한 이유는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닌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용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음양오행에 의한 탑의 층수, 성리학에 뿌리를 둔 태극문양의 사용 등에서도 볼 수 있다.2. 가람배치(1) 삼국의 가람배치{1) 고구려의 가람배치고구려 초기의 불사(佛寺)에는 남북축선상에 주건물과 탑을 배치한 일탑식 가람이 이루어졌는데, 이와 같은 배치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주택건축에서 사용해왔던 사합원(四合院)배치를 그 기본으로 하여 폐쇄적이고 좌우대칭적인 건물의 배치이다. 우리나라의 사찰가람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평양 부근의 청암리 절터와 원오리 만덕사터, 정릉사터인데 그 가람의 형태는 중앙부에 8각 건물터를 중심으로 동,서, 북쪽에 금당이 놓이고 남쪽에 중문을 둔 삼금당일탑식 가람이다. 금강사터로 추정되는 청암리 건축군지는 일본의 최초사찰이었던 비조사와 같은 배치임이 밝혀졌고 이러한 배치는 소위 중국 사기 천관서에 나오는 오성좌의 배치와 같은바 이는 분명 천문오행사상에 입각하여 중심축을 설정, 좌우대칭되는 배치를 이룬 것임을 알 수 있다.2) 백제의 가람배치{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절터임이 밝혀진 곳은 주로 부여지방과 익산지역의 몇 곳만이 있으며, 대표적인 미륵사의 가람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륵사 가람은 삼원병렬식의 가람으로 동, 서 및 중원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각 원(院)에서는 중문과 탑, 금당을 1동씩 두어 일탑식 가람을 동서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또 동, 서원에는 석탑을 두고 중원에는 목탑을 두어 삼탑삼금당을 이룬다. 이외 백제시대의 절터로는 정림사, 금강사, 군수리 절터, 동남리 절터 등이 있다. 이들 사찰지의 모습은 중심축이 설정되고 좌우대칭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남북자오선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 금당을 두고 그 남쪽있는 중문에 연결시키는 배치이다. 이들 건물에 종루, 경루 등을 포함하여 백제식 칠당가람제라고 부른다.3) 신라의 가람배치{신라시대에 가장 먼저 조영된 불사건축은 흥륜사와 영흥사였다. 이들 사찰에 뒤이은 중요한 불사로는 황룡사, 기원사, 실제사, 삼랑사, 분황사, 영묘사 등이 창건되었고,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등이다. 그 중 황룡사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황룡사는 발굴결과, 여러 차례 가람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초기가람은 백제의 일탑식 가람에 동, 서구에 다시 금당을 한 개씩 나란히 놓아 삼금당일탑식을 이룬다. 그후 제 2차, 제 3차의 변화가 있었으나 결국 고려 때 몽고란에 의하여 전부 소실되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남북자오선을 중심축으로 하여 중앙에 금당, 그 좌우에 또 다른 전각, 그 남방에 탑, 북방에 강당, 탑 전방좌우에 또 다른 건물, 그리고 중문과 강당 좌우로 장방형으로 회랑을 두른 이른바 고구려시대 삼금당 형식의 변형된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2) 남북조시대의 가람배치1) 통일신라의 가람배치{통일신라시대의 사찰가람은 신라 초기 백제의 영향을 받은 평지 일탑식 가람에서 차츰 구릉으로 위치를 바꾸어 이탑식으로 변하거나 산지가람으로 바뀐다. 또 탑에 있어서 이탑식으로 변하면서 통일 직후의 사찰인 사천왕사나 망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석탑으로 변모하는데, 이탑식 가람의 특징은 불상을 안치한 금당을 중심으로 이 금당의 전방 좌우대칭되는 위치에 동, 서 양탑을 배치하고 남북축선상의 남쪽으로부터 중문, 금당, 강당을 놓는다. 가람의 예로는 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 화엄사 등이 있으며, 불국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국사는 이탑식 가람으로 동쪽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구역과 서쪽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쪽의 대웅전 전방 동, 서 양측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놓이고, 정면에 석등과 자하문이 있다. 후측에는 강당인 무설전이 놓였으며 다시 그 뒤쪽 높은 지대에
    교육학| 2004.03.18| 8페이지| 1,500원| 조회(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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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료] 삼국사기 궁예 열전 평가B괜찮아요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신라의 제47대 왕(재위 857∼86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의정(誼靖) 혹은 우정(祐靖)이다.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이고, 어머니는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 혹은 昕明夫人) 김씨이며, 할아버지는 예영(禮英)으로 원성왕의 아들이다. 슬하에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다음 왕인 경문왕의 비가 되었다. 그리고 궁예(弓裔)는 왕의 서자로 알려져 있다.母憲安王궁 예 신 라 인 성 김 씨 고 제 사 십 칠 헌 안 왕 의 정 모 헌 안 왕활 후손 나라이름 그물 사람 성 성 성 아버지 차례 넷 열 일곱 법도 편안할 임금 옳을 꾀할 어미 법도 편안할 임금━━━━━━━━━━━━━━━━━━━━━━━━━━━━━━━━━━━━━━━━━━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 신라 제48대왕(재위 : 861∼875)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之子”빈 어 실 기 성 명 혹 운 사 십 팔 경 문 왕 응 렴 지 자궁녀 어거할 일다 그 성 이름 혹은 이르다 넷 열 여덟 빛 글월 임금 가슴 청렴할 어조사 아들※嬪御(빈어) : 천자의 침석에서 시중드는 궁녀·천자의 첩━━━━━━━━━━━━━━━━━━━━━━━━━━━━━━━━━━━━━━━━━━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이 오 월 오 일 생 어 외 가 기 시 옥 상 유 소 광 약 장 홍 상 속 천다섯 달 다섯 날 태어날 어조사 외가 집 그 때 지붕 들━━━━━━━━━━━━━━━━━━━━━━━━━━━━━━━━━━━━━━━━━━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여 불 인 절 양 이 지 금 일 이 자 지 광 여 차 필 위 인 소 지 칙 여 여나 아니 차마 몰래 기를 이를 오늘 날 당신 경망할 같을 이 반드시 이를 사람 바 알 곧 나 더불어못하다 ~하면━━━━━━━━━━━━━━━━━━━━━━━━━━━━━━━━━━━━━━━━━━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자 구 불 면 위 지 내 하 궁 예 읍 왈 약 연 칙 오 서 의 무 위 모당신 함께 아니 면할 할 어찌 어찌 활 후손 울다 말하되 만일 그러할 곧 나 갈 어조사 없을 할 어머니━━━━━━━━━━━━━━━━━━━━━━━━━━━━━━━━━━━━━━━━━━憂”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우 변 거 세 달 사 금 지 흥 교 사 시 야 축 발 위 승 자 호 선 종근심할 곧 갈 인간 통할 마을 오늘 일으킬 가르칠 절 이 ~라 이르다 끊을 머리털 할 중,승려 스스로 이름 착할 근본※祝髮(축발) : 머리를 깎음━━━━━━━━━━━━━━━━━━━━━━━━━━━━━━━━━━━━━━━━━━及壯不拘檢僧律 軒 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급 장 불 구 검 증 률 헌 지 유 담 기 삼 부 재 행 차 유 오 조 함 물미칠 장성할 아니 구애 법식 중 법령 높을 있을 쓸개 기운 일찍 갈 재계 갈 버금 있을 까마귀 새 물다 물건굽힐 (기백,용기)※僧律(승률) : 중이 지켜야 할 계율 ※軒 (헌지) : 올라감과 내려감, 높낮이, 우열※齋(재) : 재계(제사 지내기 전 며칠 동안 심신을 깨끗이 하며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일)━━━━━━━━━━━━━━━━━━━━━━━━━━━━━━━━━━━━━━━━━━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秘而不言 頗自負.낙 소 지 발 중 시 지 아 첨 서 왕 자 칙 비 이 불 언 파 자 부떨어 바 가지다 바리때 안 볼 어조사 상아 제비 글 임금 글자 곧 숨길 아니 말하다 자못 스스로 힘입을,믿을뜨릴 (짐을)지다※籤━━━━━━━━━━━━━━━━━━━━━━━━━━━━━━━━━━━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任以事.우 경 복 원 년 임 자 투 북 원 적 량 길 길 선 우 지 위 임 이 사벗 빛 복 근원 해 아홉째 첫째 의탁할 북쪽 근원 도둑 들보 길할 착할 좋을 대접할 맡길 맡길 일천간 지지※景福(경복) : 당소종 연호 ※壬子(임자) : 진성왕 6년(892년)※北原(북원) : 지금의 원주 ※양길 : 통일 신라 말기의 반란자━━━━━━━━━━━━━━━━━━━━━━━━━━━━━━━━━━━━━━━━━━遂分兵 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수 분 병 사 동 략 지 어 시 출 숙 치 악 산 석 남 사 행 습 주 천 내드디어 나눌 병사 하여금 동쪽 범할 땅 이 나올 숙을 꿩 큰산 뫼 돌 남쪽 절 지날 엄습할 술 샘 어찌갈※石南寺(석남사) : 울산 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의 석남산이라고도 불리는 가지산에 있는 사찰, 824년에 창건※酒泉(주천) :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성 울 오 어 진 등 현 개 항 지내성 막다 까마귀 다스릴 보배 같을 고을 모두 항복받을※奈城(내성) : 지금의 영월 ※鬱烏(울오) : 지금의 평창 ※御珍(어진) : 지금의 울진━━━━━━━━━━━━━━━━━━━━━━━━━━━━━━━━━━━━━━━━━━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건 녕 원 년 입 명 주 유 중 삼 천 오 백 인 분 위 십 사 대하늘 평안할 근원 해 들어갈 바다 고을 있을 무리 석 일천 다섯 일백 사람 나눌 할 열 넉 군대※乾寧(건녕) : 당소종 연호, 진성왕 8년(894년) ※溟洲(명주) : 지금의 강릉━━━━━━━━━━━━━━━━━━━━━━━━━━━━━━━━━━━━━━━━━━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等爲舍上 [舍上謂部長也]금 대 검 모 흔 장 귀 평 장 일 등 위 사 상 사 상 위 부 장 야쇠 큰 검다 털 새벽 길 귀할 평평할 베풀 하나 같을 할 집 윗 집 윗 이를 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영 임 강 양 현 사 년 정 사 인 물 현 항고개 임할 물이름 둘 고을 넉 해 넷째 여섯째 어질 물건 고을 항복받을천간 지지※僧嶺(승영) : 연천군 인목면 ※臨江(임강) : 지금의 장단※四年丁巳(사년정사) : 진성왕 11년 ※仁物(인물) : 지금의 개풍군━━━━━━━━━━━━━━━━━━━━━━━━━━━━━━━━━━━━━━━━━━善宗謂 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선 종 위 송 악 군 한 북 명 군 산 수 기 수 수 정 이 위 도이를 소나무 큰산 고을 큰 북녘 이름 고을 뫼 물 기이할 빼어날 드디어 정할 할 도읍━━━━━━━━━━━━━━━━━━━━━━━━━━━━━━━━━━━━━━━━━━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격 파 공 암 검 포 혈 구 등 성 시 량 길 유 재 북 원 취 국 원 등 삼칠 깨뜨릴 구멍 바위 검을 물가 구멍 입 무엇 내성 때 들보 길할 같을 있을 북녑 고을 취할 나라 고을 같을 석※孔巖(검포) :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黔浦(검포) : 지금의 김포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穴口(혈구) : 지금의 강화 ※國原(국원) : 지금의 충주━━━━━━━━━━━━━━━━━━━━━━━━━━━━━━━━━━━━━━━━━━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십 여 성 유 지 문 선 종 지 광 민 중 대 노 욕 이 삼 십 여 성 경 병 습열 나머지 내성 있을 들을 땅 넓을 백성 많을 클 노할 하고자할 석 열 나머지 내성 굳셀 병사 엄습할※勁兵(경병) : 강한 군사━━━━━━━━━━━━━━━━━━━━━━━━━━━━━━━━━━━━━━━━━━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지 선 종 잠 인 선 격 대 패 지 광 화 원 년 무 오 춘 이 월 즙 송 악몰래 알 먼저 격파할 큰 무너뜨릴 빛 될 근원 해 다섯째 일곱째 봄 둘 달 기울 소나무 큰산천간 지지 (수선함)※光化元年戊午(광화원년무오) : 신라 효공왕 2년(서기 898년)━━━━━━━━━━━━━━━━━━━━━━━━━━━━━━━━어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가 쇠약하여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주현들이 반란세력에 따라 붙는 자가 거의 반에 이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뭇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래 백성이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은 이런 혼란기를 타서 무리를 모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신해년(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이 얕보고 거만하여 예로서 대접하지 않자,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불안해하여 기훤의 휘하에 있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몰래 결합하여 벗으로 삼았다.경복(景福) 원년 임자년(진성왕 6: 892)에 북원(北原)[현재의 강원도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고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땅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종은]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나성(奈城)[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울오(鬱烏)[현재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어진(御珍)[현재의 경북 울진군 울진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건녕(乾寧) 원년(진성왕 8: 894)에 명주(溟州)[현재의 강원도 강릉시]에 들어가 거느린 무리 3천5백 명을 14개 부대로 편성하고 금대(金大), 검모(黔毛), 흔장(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으로 삼아 병졸과 더불어 어려움과 편함을 함께 하였고, 관직을 주고 뺏음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게 하였다. 이로써 뭇 사람의 마음이 [선종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이 되었다.이에 저족(猪足)[현재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성천(川)[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부약(夫若)[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격파하니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현재의 황해도 일대]의 도적들 중 와서 항복하는 다.
    교육학| 2003.05.29| 11페이지| 1,000원| 조회(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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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료] 최충헌 봉사 10조
    高麗事 崔忠獻 封事 10條━━━━━━━━━━━━━━━━━━━━━━━━━━━━━━━━━━━━━━━━━━今一二浮圖 山人也 常徘徊王宮 而入臥內금 일 이 부 도 산 인 야 상 배 회 왕 궁 이 입 와 내지금 한 두 (중) 뫼 사람 항상 노닐 노닐 임금 집 말이을 들 침실 안부도(浮圖) : 부처, 또는 중을 달리 일컫는 말산인(山人) : 깊은 산 속에서 세상을 멀리하고 사는 사람, 산속에 사는 중이나 도사배회(徘徊) : 목적없이 이리저리 거닐━━━━━━━━━━━━━━━━━━━━━━━━━━━━━━━━━━━━━━━━━━陛下惑佛 每優容之 浮圖者 旣冒寵 屢以事 干穢聖폐 하 혹 불 매 우 용 지 부 도 자 기 모 총 누 이 사 간 예 성미혹할 불교 매양 후할 용서할 (중) 이미 덮을,쓸 총애할 자주 ~로써 일 구할 더럽힐성스러울미혹(迷惑) :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德 而陛下 內臣 勾當三寶 以穀取息於民 其弊不細덕 이 폐 하 내 신 구 당 삼 보 이 곡 취 식 어 민 기 폐 불 세덕 말이을 안 신하 굽을 맡을 석 보물 ~로서 곡식 취할 (이식) 백성 그 폐단 아니 작을내신(內臣) : 왕조 때, '대궐에서 임금을 가까이에서 받드는 신하'를 이르는 말삼보(三寶) :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과, 그 가르침을 펴는 중. 곱, 불(彿)·법(法)·승(僧)이식(利息) : 남에게 금전을 꾸어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금전으로 빚돈에 덧붙어 일정한 푼수로 느 는 돈을 말함. 길미. 이자(利子). 변리(邊利)━━━━━━━━━━━━━━━━━━━━━━━━━━━━━━━━━━━━━━━━━━惟陛下 斥群 使不跡于宮 毋得息穀유 폐 하 척 군 사 불 적 우 궁 무 득 식 곡오직 물릴칠 무리 하게할 아니 자취 ~에 집 말라 얻을 (이식) 곡식━━━━━━━━━━━━━━━━━━━━━━━━━━━━━━━━━━━━━━━━━━比聞 郡國吏 多逞貪 廉恥道息 諸道使 置不問焉비 문 군 국 리 다 영 탐 염 치 도 식 제 도 사 치 불 문 언견줄 들을 고을 나라 벼슬아치 많을 즐겁다 탐할 청려할 이치,근원 모든 길 (안찰사) 아니 물을 이에부끄러워할 버려두다제도(諸道) : 행정 구역의 모든 도안찰사(按察使) : [특히 행정 따위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잘잘못을 밝히는 사람設有仁而淸者 亦不之知 使其惡肆 而淸無益 柰戒설 유 인 이 청 자 역 불 지 지 사 기 악 사 이 청 무 익 내 계베풀 있을 어질 탐욕이없다 또한 아니 알 하여금 그 악할 방자할 탐욕이없다 유익 어찌 경계할(설혹) 사람 (청백) 없을━━━━━━━━━━━━━━━━━━━━━━━━━━━━━━━━━━━━━━━━━━勸何 惟陛下 兩界都統 五道按察使 按吏能否 具以권 하 유 폐 하 양 계 도 통 오 도 안 찰 사 안 리 능 부 구 이권장할 어찌 오직 둘 경계 도읍 큰줄기 다섯 길 살필 벼슬아치 잘할 아니 갖출양계(兩界) : 고려 현종 때 정했던 지방 행정 구역인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도통사(都統使) : 고려 때, 각 도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하여 두었던 무관 벼슬━━━━━━━━━━━━━━━━━━━━━━━━━━━━━━━━━━━━━━━━━━狀聞 能者擢之 否者懲之장 문 능 자 탁 지 부 자 징 지(장계) (주문) 잘할 사람 발탁할 아니 사람 징계할장계(狀啓) : 감사나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가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주문(奏聞) : 임금에게 아룀. 주달(奏達). 주어(奏御). 주품(奏稟)━━━━━━━━━━━━━━━━━━━━━━━━━━━━━━━━━━━━━━━━━━今之廷臣 不節儉 修第宅 理服玩 飾以珍寶 而 異금 지 정 신 불 절 검 수 제 택 리 복 완 식 이 진 보 이 이지금 ~의 조정 신하 아니 마디 검소할 고칠 차례 집 다스릴 옷(의복) 장난할 꾸밀 ~로써 진귀할 보물 자랑할 이상할(기이)절검(節儉) : 절약하고 검소하게 함제택(第宅) : 살림과 정사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之 風俗傷敗 亡無日矣지 풍 속 상 패 망 무 일 의바람 풍속 상처 깨뜨릴 망할 없을 날 어조사(과거,단정)풍속(風俗) : 예로부터 지켜 내려오는 생활에 관한 사회적 습관. 풍기(風氣).━━━━━━━━━━━━━━━━━━━━━━━━━━━━━━━━━━━━━━━━━━惟陛下 具訓于百僚 禁華侈 尙儉嗇유 폐 하 구 훈 우 백 료 금 화 치 상 검 색오직 갖출 훈계할 일백 벼슬아치 금할 번성할 사치할 숭상할 검소할 아껴쓸백료(百僚) : 모든 벼슬아치. 백공(百工). 백규(百揆). 백관(百관(官)).在祖聖代 必以山川順逆 創浮圖祠 隨地以安 後代재 조 성 대 필 이 산 천 순 역 창 부 도 사 수 지 이 안 후 대있을 조상 성스러울 대 반드시 ~로써 뫼 하천 순할 거스를 비롯할 (부처) 사당 따를 땅,지리 ~로써 편안할 뒤 대(태조)성대(聖代) :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대. 성세(聖世)순역(順逆) : 순리(順理)와 역리(逆理).순리(順理) : 도리에 순종함역리(逆理) : 도리나 사리에 어그러지는 일━━━━━━━━━━━━━━━━━━━━━━━━━━━━━━━━━━━━━━━━━━將相群臣 無僧尼等 無問山川吉凶 營立佛宇 名爲장 상 군 신 무 승 니 등 무 문 산 천 길 흉 영 립 불 우 명 위장차 서로 많은 신하 없을 승려 여승 무리 없을 물을 뫼 하천 길할 흉할 짓다 세울 부처 집 이름짓다 할(무례)장상(將相) :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장수(將帥) : 군사를 지휘 통솔하는 장군재상(宰相) : 임금을 보필하며 모든 관원을 지휘·감독하는 자리에 있는 이품이상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무례(無禮) : 예의가 없거나 예의에 맞지 않음. 버릇없음승니(僧尼) : 승가(僧伽)와 비구니(比丘尼). 곧,남자 중과 여자 중불우(佛宇) : 부처를 모신 집. 범전(梵殿). 불각(佛閣). 불당(佛堂). 불전(佛 殿)━━━━━━━━━━━━━━━━━━━━━━━━━━━━━━━━━━━━━━━━━━願堂 損傷地 變屢作 惟陛下 使陰陽官檢討 凡裨補원 당 손 상 지 변 루 작 유 폐 하 사 음 양 관 검 토 범 비 보빌 집 상할 다칠 땅(지맥) 재앙 자주 일어날 생각할 하여금 음기 양기 벼슬관직 다스릴 무릇 도울 도울조사할지맥(地脈) : 풍수설에서,정기가 순환한다는 땅속의 줄을 이르는 말━━━━━━━━━━━━━━━━━━━━━━━━━━━━━━━━━━━━━━━━━━外 輒削去勿留 無爲後人觀望외 첩 삭 거 물 류 무 위 후 인 관 망밖 번번이 빼앗을 버릴 말다 머무르다 없을 할 뒤 사람 볼 바라볼━━━━━━━━━━━━━━━━━━━━━━━━━━━━━━━━━━━━━━━━━━省臺之臣 主言事故 上或不逮 則有敢諫 雖干逆鼎성 대 지 신 주 언 사 고 상 혹 불 체 즉 유 감 간 수 간 역 정대궐 성문 ~의 신하 주로하다 섬기다 일 (주상) 혹 아니 미칠 곧 있을 감히 간할 비록 범할 거스를 바야흐로여쭈다역정(逆鼎) : 불유쾌한 충동으로 왈칵 치미는 노여움. 성의 높임말━━━━━━━━━━━━━━━━━━━━━━━━━━━━━━━━━━━━━━━━━━━━━━━━━━━━━━━━━━━━━━━━━━━━━━━━━━━━━━━━━━━━所甘心焉 今皆低昻 以苟合爲心 惟陛下 擇其人而소 감 심 언 금 개 저 앙 이 구 합 위 심 유 폐 하 택 기 인 이~바 달 마음 어찌 지금 모두 낮을 높을 구차할 합할 할 생각 오직 택할 그 사람(적임자)━━━━━━━━━━━━━━━━━━━━━━━━━━━━━━━━━━━━━━━━━━後 使直言在庭 臨事或折후 사 직 언 재 정 임 사 혹 절뒤 하여금 곧을 말씀 있을 조정 임할 일 있을 (면절)면절(面折) : 바로 마주 대하여 잘못이나 결점을 꾸짖음━━━━━━━━━━━━━━━━━━━━━━━━━━━━━━━━━━━━━━━━━━
    교육학| 2003.05.29| 5페이지| 1,000원| 조회(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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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의 특징과 그 활용
    I. 서론한 마을이 내륙 산지에 위치하느냐 혹은 해안 평야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주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또한 마을이 농사를 영위하는 평야 지대에 위치하느냐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 주변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인문적으로 그 마을의 특성과 기능이 달라진다. 이와 같이 한 국가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특성과 역할이 다르게 나타난다.한 나라의 위치는 경·위도 상으로 보는 수리적 위치와 자연 지물과의 관계에서 보는 지리적 위치, 그리고 주변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면에서 본 관계적 위치가 있다. 수리적 위치와 지리적 위치는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 위치이고, 관계적 위치는 주변 정세가 변함에 따라 바뀌어지기 때문에 상대적 위치이다.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활용에 대해 알아보자II. 본론1. 수리적 위치수리적 위치는 경,위도로 표시되는 위치로서 위도는 한 나라의 기후, 식생 분포 등에 영향을 미치며, 경도는 시간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 나라는 위도상으로 북위 33도~43도에 속하며 중위도이므로 열교환이 왕성하여 전선대가 자주 형성되고 고,저기압대의 빈번한 통과로 일기변화가 심하다. 또한 온대기후를 나타내며, 계절의 변화가 뚜렸하다. 경도상으로는 동경 124도~132도에 속하고 표준시로 동경 135도를 사용하므로 그리니치 표준시 보다 9시간이 빠르다.(GMT+9)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의 중앙을 지나는 중앙 경선은 127.5도로서 표준경선(135)과 7.5도의 차이가 나므로 실제로 우리 나라의 중앙 경선에 태양이 남중하는 시간은 12시 39분이 된다.이로써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특히 위도상 북반구의 중위도(30~60)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기후가 우선 온난하다. 헌팅턴과 같은 사람은 기후에너지면, 즉 기후가 안겨주는 정력면에서 볼 때 중위도 지역이 인간활동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평가한 바 있거니와 다량의 기후 에너지와 온난한 기후가 갖다주는 농업, 기타 옥외산업, 정신활동 등에서의 이익은 국부의 증대와 직통한다. 한국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이 위치가 주는 개인적인 부와 국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2. 수륙배치상 위치수륙배치상의 위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국토는 세계 최대 대양인 태평양과 세계 최대 대륙인 아시아에 접해있는, 3면이 바다에 접한 반도의 땅이다, 반도의 해안선의 길이는 8,693km이고 도서까지 합하면 그 길이는 17,269km에 이른다. 반도는 기능상 결합과 분리의 양기능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 물론 어느 기능을 발휘하는 가는 그 땅위에 사는 사람들에 달려 있다., 국력이 강하여 사람들이 진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면 결합-연결의 기능이 잘 발휘될 것이고 그 반대가 되면은 고립되거나 분리되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양 세력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처지가 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오랫동안 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결국에는 민족분단이라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이래 반도적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북방외교를 통해서 북방으로 진출하고 기존의 남방외교 또한 계속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자원의 수입을 통한 제품의 수출이라는 가공무역을 통해서 반도적 위치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다.과거에는 우리 선인들이 당시 선진의 대륙문화들을 반도통로를 통해 들여 왔고, 들여온 문화를 국토내에서 토착화하였으며 일부는 다시 섬나라 일본에 전수해주었다.기후와 관련해서 보면, 이 위치가 겨울에는 인접 대륙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며, 여름에는 인접 해양의 영향을 받아 많은 비가 내리는 등의 계절 변화와 건우기 교대가 국토 위에 전개되어 주민들에게 좋은 자극과 생산력을 제공하고 있다.3. 관계적 위치관계적 위치로 보면 우리의 국토는 북쪽에는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에 인접해 있고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바다로 격리되어 있지만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인접 관계에 있는 나라로 볼 수 있다. 거리상 가까울 뿐 인접국은 아니다는 말이다. 한 나라의 관계적 위치, 즉 인접국각에 관계되어진 위치는 그 나라의 국제정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린관계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의 대외정치 특히 인접국들에 대한 정치는 복잡다기해질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인접국들이 제국주의나 팽창주의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이거나, 이념상 크게 대립적인 나라들이면 자국의 안전이나 보전은 상당히 위협을 받게 된다.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이웃 나라들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인접 국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를 세력 확장의 발판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근세에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청, 러시아 등이 한반도에서 충돌하였고, 20세기 초에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제 합병하고 36년간이나 식민 통치를 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였다.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우리 나라는 일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자유·공산 세력이 한반도에서 38°선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됨으로써 자유주의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후 오랫동안 중국·러시아와는 이념의 차이로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일본과도 상당 기간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65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88 서울 올림픽 이후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을 실시하여 1990년대에는 중국, 러시아와 국교를 수립하면서 우리 나라는 각 방면에 걸쳐 이웃 나라들과의 상호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고 있다.인접국들이 친선적이고 경제-문화상으로도 상호의존적이라면, 자국 발전에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오늘날의 유럽공동체(EC)의 경우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겠다. 장차 우리의 경우에도 이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이 관계적 위치는 이익을 안겨주는 쪽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교육학| 2003.04.07| 3페이지| 1,000원| 조회(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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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학]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평가A+최고예요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이공계 분야로의 진출이 그리 활발한 편이 못 된다. 당장 대학에서도 ‘공대생’하면 일단은 ‘남성’의 이미지를 우선해서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탓에 우리는 여성과 과학 또는 성과 과학의 문제를 동떨어진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 과학기술인력에 비해 너무 소수라는 사실은 여성이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하는 전문직에 부적합하다는 담론을 생산하여 남녀평등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남성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 기능도 담당한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즘과 과학과의 소원했던 관계의 복원을 역설하고 있다.근대 이후 우리는 진리의 근거를 과학에서 찾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성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남녀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자연적' 사실일 것이다. 제1부 과학과 성에서 하정옥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 그 역사와 함의'이라는 논문을 통해 성차별의 근거로 널리 사용되어온 두개골학·사회생물학·성호르몬이라는‘과학적’설명들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성차를 증명한다. 다양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을 남성,여성 혹은 주체,대상이라는 이분법적인 틀에 끼워 다시 우,열로 재해석하는 것, 그리고 자연과학에서 가치중립적 관찰과 실험적 방법의 강조 속에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성차 개념'에 대한 성찰없이 '진리'임을 강변하는 것을 통하여, 성차에 대한 사회·문화적 지식과 자연과학 지식이 상호형성 및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철저히 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또한 20여 년 전 '젠더와 과학'을 처음 얘기했던 에블린 팍스 켈러는 논문 '과학과 성 연구'에서, 과학의 구조에서 성적인 언어·문화·이데올로기 등에 주목하여 이들의 구성적인 역할을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발생학에 주목하여, 남녀의 차이에 의존하는 성의 상징적 담론이나 메타포가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며 작동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로써 새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전망한다. 얼마 전 책에서 가부장제와 관절염의 상관관계에 대한 짧은 글을 읽었다. 가사노동의 고착화된 성차별과 성분업에 따라 우리나라 여성의 류머티스 관절염 발병률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제2부 의료와 기술에서는, 오조영란은 '페미니즘 시각으로 본 의료와 여성의 건강', 그리고 박진희·홍성욱의 '생물학적 기술론과 사회적 결정론을 넘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맥락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제3부 과학과 여성의 현실에서 이은경은 '역사 속의 과학과 여성'이라는 논문으로 서구과학사 속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여성이 과학에서 배제된 것과 여성에 대한‘과학적’편견이 과학에서 여성의 소외를 정당화해온 것 사이의 순환고리를 지적한다. 한편, 윤정로·김명자의 '한국 여성과학자들의 현실과 과제'는 한국 여성 과학기술인력의 현황을 분석하고 그 다양한 개선책을 제시한다. 나와 선후배 및 동료들이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통계 자료로 등장하여, 우리나라 과학 관련 연구소들에서의 여성 문제의 열악한 현실을 드러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또한, 모혜정은 '한 여성 과학자의 회고'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앞서 윤정로·김명자가 제시했던 제도적 차원의 개선책과 더불어, 교편을 잡고 있는 여성 과학기술자들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할 많은 일들을 시사하고 있다.마지막 제4부 14인의 여성 과학자들에서는 한 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14명의 대표적 여성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누누이 지적해 온 과학의 여성 억압적 구조 속에서도 부단히 노력하여 근현대 과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그러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들의 공통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 나와 선후배 및 동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려진다.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왔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성차에 관한 과학적 담론조차 진실을 추구하는 객관적 탐구의 결과이기보다 남성중심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일 때가 더 많았다. 오늘날 여성의 과학 활동의 증가와 남성 고유의 활동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인식의 퇴조는 서로 연관되어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다른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인식에 비해 좀 늦은 감이 들지만, 과학과 여성의 문제도 점점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현대 과학기술이나 의료가 가치중립적이거나, 과학기술이나 의료체계 전부가 성차별주의적이다 혹은 아니다'라는 식의 논의 모두를 비판한다. 그들은 젠더와 과학·기술·의료를 모두 열린 체계로 보며 이들간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형성의 변증법적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문화적 실천이 생리적 차이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이 새로운 인식은 젠더, 섹스 구분 강조에 따른 '자연적 사실' 비판에 한계를 딛고서 1970년대 후반 등장한 페미니즘의 조류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의료와 여성의 문제의 한계와 가능성을 이해한다는 것이야말로 젠더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과학·기술·의료에 대한 이해도 한층 더 깊게 할 것이라는 이 책의 기대에 나 또한 상당히 동의한다. 그러므로 홍성욱 이외에 남성 저자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지만 과학과 여성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이는 물론이고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이에게조차도 좋은 출발 지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끝으로 제3부를 관심있게 읽으며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여성인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가 문득 떠올려진다. 주체적인 여성으로서보다는 인간이라 표방된 남성으로 살아왔다는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아직까지도 과학에는 루스 이리가라이가 주장했던 남성과 결핍된 남성이 있을 뿐, '성차'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엔, 과학은 종종 결핍된 남성에 대한 남성의 호기로 가득 찬 환타지가 존재하는 천국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조차 과학 안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으며, 이 책처럼 이미 과학과 페미니즘의 논의들은 출발되어 다양하고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대성 문제의 최전선, 여성의 문제를 과학도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과학을 넘어서' 민주주의의 시발점이기도 하다.여성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이'여성'임을 자각해서'남성'과학기술자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문 과학기술자로서 자신의 커리어에 별반 유리할 것이 없다는 인식을 알게 모르게 체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학위를 받고 직장을 잡는 과정에서 남성 과학기술자들에 비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도, 직장을 잡은 다음에는 주변의 남성 과학기술자들이 경쟁의 대상이지 배척하거나 극복해야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같은 능력을 보여야 하는, 아니 남성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 여성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여성으로서 남성과는 다르게 겪는 개인적인 경험의 정치적인 성격을 이슈화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페미니즘의 주장이 이들에게는 좀체로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현대라는 문화속에 만들어진 현대과학은 모든 문화와 사회를 무력화하면서 많은 경우 우리사회의 남녀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이런 현대과학기술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자 역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성)과학자들의 실천과 페미니스트 이론이 만났을 때 '과학' 의 이름을 걸고 돌아다니는 담론 중에 어떤것이 과학적으로 더 타당하고 어떤것이 정치적으로 더 남녀평등의 사회에 기여하는지를 판별해낼 수 있다. 여성과학자들은 새로운 언어와 방법론으로 기존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과학적 담론을 해체하고 좀더 평등한 과학으로 재구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과 과학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과학이라는 것은 언제나 남성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과학도 그 당시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규정되었다. 약학은 마녀의 것이 아니었던가. 점성술은 한때 결정 수단이었고, 지금은 미신에 불과하다. 연금술은 한때 서양에서 신이 아닌 주제에 '창조'한다고 설치는 이단자의 소행이었고, 그 이후에는 화학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긴 대부분의 과학은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수를 다루는 것 은 배운자의 몫이었고 여성은 배움에서 소외되었으니 당연한 것인가. 근대에 들어서 더더욱 과학은 남성의 전 유물이 되었다. 과학은 모든 것을 만들어 줄 것 같은 요술 방망이였다. 그 요술 방망이 역시 산업의 수단을 갖고 있던 남성들, 교육받은 남성의 것이 되는 것도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남성의 영역에 그 남성의 과학이 이제 서서히 무너지려한다. 아니 재정의 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사회과학| 2002.06.09| 3페이지| 1,000원| 조회(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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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고분벽화의 이해
    I 서론고분벽화란 그림과 고분의 내부 벽과의 만남으로 해석된다.인간은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림을 그렸다.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을 비롯해서 사하라 사막의 동굴, 남미의 거대한 사막에도 인간들은 그림을 그렸다. 돌만이 아니라, 나무와 천 등에도 그렸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남아서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 내용이 풍부하고 많은 것을 전하는 것이 고분벽화다고분벽화는 이집트 피라밋을 비롯해서 이탈리아 북부 에트르스크 지역의 무덤, 그리고 중국에서는 전한시대에서 북송시대에 걸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에 이르기까지 고분벽화가 만들어졌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는 부족한 사료를 메워주는 자료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 할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고분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장의(葬儀) 미술이라는 것이다. 즉,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장의 미술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생전의 삶과 사후의 삶에 대한 것이다. 특히 생전의 기억할만한 삶,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삶, 죽은 자의 세계에서 재현되기를 바라는 삶, 새로운 세계에서 성취되거나 실현되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이 가장 주요한 주제들로 등장하기 마련이다.고분벽화는 죽은 자에 대한 아쉬움과 바램을 담아 그렸다는 전제를 갖고 이해하여야만 한다.장의미술은 주술(呪術)성과 심미(審美)성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미술행위는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의식만이 아니라, 감응주술(感應呪術)의 한 방편으로도 시작되었다. 고분벽화의 그림들은 다분히 주술성을 담은 회화이며, 제작 당시의 현재성과 초월성이 중첩된 작품이다. 따라서 고분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분벽화의 제작을 의뢰한 사람들이 현실을 어떠한 세계로 인식하였는지, 내세를 어떻나 세계로 상정하였는지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의 인식과 표현의 차이, 의례와 관념의 차이 등에 대한 고려도 필요로 한다.고분벽화는 내부에 공간이 넓은 방을 만들 수 있는 석실(石室), 전실(塼)室)을 만들를 보면 연화문(蓮花)文, 인동문(忍冬文), 당초문(唐草文) 등 불교적인 장식과 일월상(日月像), 성신도운문(星辰圖雲文) 등 천상표현, 그리고 천인(天人), 비천(飛天), 괴수(怪獸) 등 공상적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이러한 말각조정 천정 외에도 벽화고분의 천정구조는 사벽 내부로 받침을 고이고 판석을 덮은 구조, 팔각형으로 쌓아올린 형식, 궁륭형식(穹 形式), 또한 이런 형식들이 복합적으로 축조된 예도 보인다.물론 벽화내용이나 의미는 말각조정 형식의 천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표현되고 있다.고분 내벽에 그려진 벽화는 석면에 회를 바르고 흑, 주선과 채색이 사용된 프레스코 형식이다. 또한 후기 고분인 강서대묘, 중묘, 통구17호분, 사신총 등에는 석면을 잘 다듬어서 그 위에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석면에 채색하는 기법은 백제에도 전해져 7세기 전반경의 부여능산리 벽화고분에도 보이고 있다. 수렵(狩獵), 가무(歌舞), 씨름, 행렬(行列) 등 인물풍속도와 청룡(靑龍)(동), 백호(白虎)(서), 주작(朱雀)(남), 현무(玄武)(북) 등 사신도(四神圖)가 중심이며 이외에 주로 천정에 표현되는 것들로 일·월·성·신·봉황·괴수·신선·비천 그리고 당초문 등 기타 장식문양 등 다양하다.2. 고구려 고분 벽화의 세계관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사상과 정신성을 담고 있어 건국신화 내지 신앙과의 관련성이 깊다.천손민족을 표방하는 고구려인에게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나 지하공간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늘(天)을 재현한 것이다. 때문에 벽화의 곳곳에서 천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서 발견된다. 성수도를 비롯한 천계도가 그려져 있고, 하늘을 나는 새(天鳥), 새를 타고 있는 천왕랑 외에 기린마(麒 麟馬), 천마, 비어(飛漁) 등 하늘(天)과 관련된 성수(聖獸)들이 집요할 정도로 다양하게 많이 표현되어 있다.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우주관·역사관등을 표현하고 있다. 고분 안을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고 축조양식을 활용한 공간분할을 시도하고 있다. 땅(地)의 세계와 하늘(天)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고, 각 세계를 연성이 충만했기 때문이다.3.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역사상1)초기1 계세 사상고구려 사람들은 시신과 무덤을 매우 소중히 하였다. 물에 빠져죽은 아들 여진(如津)의 시신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유리명왕에 대한 기록이나,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선비족에게 조공까지 바쳤던 기록 등을 통해, 그들이 시신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신을 보존하고 부장품을 구비하였던 까닭은, 사후세계에서 이것들이 필요할 것이라는 당시의 생각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영혼을 시신과 연결되어 무덤에서 머문다고 여겼다. 따라서 죽은 이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는 무덤의 축조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형제간인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가 죽어 산상왕과 함께 묻히게 되자, 이를 두고 형 고국천왕과 동생 산상왕이 서로 다투었다. 그 결과 고국천왕이 무당에게 나타나 두 사람을 보기가 민망하니 두 무덤 사이를 가려주기를 부탁하여서 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겹으로 심었다는 내용 역시 무덤이 죽은이의 근거지라고 여긴 고구려인들의 사고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인간 세상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유리명왕이 교사(郊祀)에 쓸 제사용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은 탁리와 사비란 자를 죽였다. 후에 왕이 병에 걸리자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병에 걸리게 하였다고 믿고는, 왕이 무당을 시켜 그들에게 사죄하니 병이 낳았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영혼이 불멸하면서 현세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은, 현세와 내세가 분리되지 않으며, 현세의 모든 것이 내세에도 지속된다는 믿음을 낳게 된다. 이것은 바로 내세는 현세와 동일선상에서 연속되고, 현세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세계라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으로 발전한다.2 문지기상과 씨름도이러한 계세 사상을 바탕으로 축조된 무덤은 현세의 또다른 측면의 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비록 죽은 몸이라 하더라도 영혼만큼은 살아있는 묘주를 지켜주는 역할이 필요하게 된다. 이 역할은 현실 세계에서는 생전의 묘주를 지인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예를 숭상하던 고구려 사람들에게는 사냥만큼이나 씨름이나 수박희가 자신들의 용맹성과 무술의 기량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였다. 힘과 기술을 요하는 이러한 운동 종목들은, 전쟁 준비에서의 유용성이나 오락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서 장례 행사에서 무(武)를 상징하는 의례 의식으로써 행해지게 된 것이다. 장례 의식의 재현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역사상을 무덤 안에 배치함으로써, 역사들의 힘을 무덤 내부를 가득 채워 피장자를 보호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사후 세계를 현실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계세사상의 반영인 것이다.2)중기1 불교 사상소수림왕 2년인 372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보낸 사절단에 의해 처음으로 불상과 불교 경전, 그리고 순도(順道)스님이 함께 고구려에 들어온다. 2년후에 아도(阿道)스님이 건너오며, 이듬해에 처음으로 절을 지어 초문사는 순도스님이 관장하고, 이불란사는 아도스님이 주관하게 한다. 이러한 불교의 수용과 보급은 전진과의 외교 관계 일환으로도 이루어진 것이여서 당연스레 국가의 지원이 따랐다. 그러나 『해동고승전』에 동진의 승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려도인에게 남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출신의 승려에 관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이미 372년 이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새로운 외래 종교인 불교가 기존의 전래 신앙과 아무런 대립이나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소수림왕 이전에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삼국 가운데 가장 불교를 먼저 수용했던 고구려이지만, 이러한 외래 종교를 문화적으로 완전히 수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가운데 지배층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불교가 즉각적으로 백성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이것이 문화 일반으로 투영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기존의 사상과 문화와 무리없는 공존상태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팔로 위를 받치고 있다. 5세기 후반 대안리 1호분 현실의 각 벽 구석에도 목조기둥을 대신하여 천정을 보완했던 받침을 들고 있는 역사상이 배치되어 있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손바닥에 받침을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한다. 이들의 신체의 모습은 전기의 씨름도에 나타난 역사의 이미지가 내용만 변형되어 반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지기를 표현할 때에는 의관을 정제한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에, 신체의 강렬한 묘사는 없는 편이다. 반면에 하늘을 받치고 있는 이들 역사상은 반라의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씨름도나 수박도에서처럼 신체의 근육이 매우 구체적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눈이 크고 코가 높으며, 짙은 눈썹의 인상은 역시 씨름도에서처럼 서역인의 모습으로 추정된다.장천 1호분과 대안리 1호분 등에 나타나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역사상은 동서남북 사방의 천정 모서리에 위치한다. 불교적 내용을 강하게 담고 있는 예불도 등의 중심 주제의 네 방위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수미산 중턱에서 네 방위를 지키며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역할을 연상시킨다. 사천왕은 네 명이 각각 개성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하여, 고구려의 역사상은 서로 유사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점이 다르기는 하다.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과 치켜올라간 눈썹으로 두려움을 주는 인상에 무기 등을 커다란 손에 들고 있는 사천왕의 역할이 고구려 나름대로 번안되어 새로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방(四方)'이란 용어를 고구려를 포함한 온 세상을 지칭하는 '천하(天下)'와 같은 의미로 간주했던 고구려의 언어 사용을 고려할 때, 사방(四方)에 각각 위치하는 역사의 모습은 이승의 온 세상 뿐만 아니라 저승까지도 지배하는, 불법을 수호하는 보호자의 역할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5세기 삼실총에서는 상의와 하의를 모두 걸친 하늘을 받드는 역사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삼실총에 나타나는 역사들은 적극적으로 불상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뱀과 연꽃다.
    교육학| 2002.06.09| 11페이지| 1,000원| 조회(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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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종교] 불교 소설 평가B괜찮아요
    불교 소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Ⅰ많은 문학 연구가들이 문학과 종교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여 그 친연성과 변별적 자질을 해명하려 노력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문학과 종교가 기본적으로 언어의 비유적 표현에 의존하여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고 궁극적으로는 실존적 가치를 체험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 때문에 양자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 경전들이 문학적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 텍스트로 읽히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종교와 문학의 경계를 엄격히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닭과 달걀의 우선 순위를 따지는 일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과 종교가 똑같이 언어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전자가 언어 자체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는 데 반해 후자는 언어를 종교적 진리의 설파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또한 종교가 초월적 존재를 대상으로 하여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적 행위 규범을 강조한다면, 문학은 '있(을 수 있)는' 현실을 문제삼아 그것을 보다 새롭게 제시하는 방법론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다르다.이처럼 문학과 종교 사이에는 도저히 합치되기 곤란한 기능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훌륭한 문학이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다루고 종교 또한 문학적 형식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문학과 종교의 기능적 차이를 간명하게 요약한 다음 진술은 우리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문학과 종교의 구별은 각기 다른 기능에 근거한다. 종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진술이며 그 진술이 담긴 진리에 따라 인간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제시한다. 따라서 종교적 진술의 진/위를 거론할 수 있고, 종교적 규범의 논리적 타당성/비타당성을 따질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문학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 특히 삶의 양식에 대한 상상의 제품이며 그 제품의 제시이다.따라서 문학적 상상의 제품에 대한 진위가 거론될 수 없고 오직 그것의 고 이 작품을 불교적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까지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세계관의 수용 양상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표면구조에만 지나치게 매달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불교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앞으로도 더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작품의 철저한 분석을 통해 그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인식의 공감대의 형성이다. 구체적 작품의 분석이 생략된 이론적 논의가 감당해야 할 저항은 만만치 않으며 실제로 그러한 논의가 공소한 것으로 귀결되는 예는 종종 있어 왔기 때문이다.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불교문학에 관한 위 연구가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몇몇 소설의 실제적 분석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의 문학적 수용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등신불》(김동리)과 《만다라》(김성동)는 불교 소설로 분류되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불교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려는 작중 인물의 의식은 판이한 양상을 드러낸다. 《천지간》(윤대녕)은, 앞의 작품들과 달리 승려를 등장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작품의 골간을 형성하는 것이 불교적 세계관이라는 필자 나름의 판단에서 선택한 것이다.Ⅱ잘 알려진 것처럼 《등신불》(1959)은 만적 선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에 관한 이야기를 작중 화자가 보고하는 형식의, 이른바 액자소설의 구성방식으로 짜여진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작중 화자인 '나'는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나갔다가 중국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만적 선사의 성불 과정에 관한 감동적인 전설을 전해 듣는다. 특히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은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不立文字 敎外別傳 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비의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에 힘입어 일반에게도 널리 기억되고 있다. 실제로 만적 선사의 소신공양에 관한 행적을 소상히 알려 준 원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을 콱 움켜잡는 듯한' 상호에 큰 충격을 받고 괴로워한다. 이러한 화자에게 청운이 들려 준 얘기는 만적 선사가 소신공양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의 축약이고, 《만적 선사 소신성불기》의 기록 역시 만적의 세속적 인연을 보충하여 설명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청운의 전언과 《만적 선사 소신성불기》의 기록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화자에게 원혜 대사가 들려 준 내력은 보다 소상할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핵심 서사의 기능을 담당한다. 원혜 대사에 의해 보완된 내용은 문둥병에 걸린 사신(謝信)을 만난 뒤 만적이 화식(火食)을 끊고 소신공양 준비에 들어간 과정과 소신공양 당시의 장엄한 이적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그러므로 원혜 대사의 이야기는 만적 선사의 소신성불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다음 몇 가지 사항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첫째, 만적의 소신 동기가 다소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원혜 대사에 따르면, 만적이 처음 소신을 결심한 것은 은사 취뢰 스님이 입적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5년 뒤 나환자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사신(謝信)을 만나고 소신공양의 결심을 굳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사건 사이의 상관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전자는 자신을 부모처럼 돌보아 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소승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자는 불쌍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대승적 결단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면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적이 취뢰 대사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사신을 불쌍히 여겼다는 전언은 강조되고 있어도 정작 그가 누구보다 먼저 제도해야 할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만적의 소신 동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불교설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목련구모(目連救母)' 설화와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따끔하게 질타하고 올바른 깨우침에 인도하려는 선적(禪的) 행위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동리의 《등신불》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불교 소설로 읽히고 있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보존하려는 화자의 행동은 현세의 삶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중생들의 죄업을 자기 한몸을 희생함으로써 소멸시키려는 만적의 소신공양과 날카롭게 대조되면서 '인간의 구경적(究境的) 삶의 추구'로 요약되는 김동리 문학의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그리고 모든 부처와 조사의 상호가 원만구족한 모습으로 조상(彫像)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일반적 상식을 배반하고 인간의 온갖 고뇌와 비원을 뭉뚱그려 놓은 듯한 등신불을 등장시킨 것은 불교에 대한 피상적 관찰과 이해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타성을 충격하기에 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불교에 대한 안이한 시각과 이해, 만적 선사의 자기 희생적 구도행위에 대한 감상적 접근 태도, 불교의 비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이적(異跡)과 신이(神異)에 대한 과장된 서술 등은 지양되어야 할 요소라 생각된다.Ⅲ김성동의 《만다라》(1979)는 원래 200매 정도의 짧은 분량[원제:목탁조(木⊇鳥)]으로 씌어졌던 것을 장편으로 개작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목탁조》는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승려를 모독한 소설이라는 불교계 내부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작가의 승적을 박탈하는 사건으로까지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단행본 《만다라》가 출간되자 불교계 안팎은 말 그대로 물끓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작가는 삽시간에 7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다. 이 작품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노골적인 불만은 작가 김성동이 지산과 법운이라는 두 수도자의 대조적인 수행 방식을 첨예하게 대립시켜 불교계의 환부를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만다라》가 출판되던 당시 불교계 내·외부의 흥분은 상당히 완화되거나 받을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이러한 논리는 '집착을 버리고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한 구절이나 혹은 '만약 보살이 비도(非道)를 행하면 이를 불도에 통달했다고 할 만하다(若菩薩行於非道 是爲通達佛道)'는 유마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것처럼 보인다.실제로 소설 《만다라》에서 지산과 법운의 행위를 통해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경계에 매이지 말라는 교훈인데, 이와 같은 경계 허물기의 가르침은 역대 고승들의 일화를 통해 일반에게도 널리 유포된 것이기도 하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성우 경허(惺牛 鏡虛)의 파천황적 무애행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감동과 충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도승의 용맹정진이 결국 '불이(不二)'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험난한 도정이라는 사실을 흔쾌히 수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지산의 만행과 법운의 하산을 분별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적 파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하산》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진실로 진인이 진인이랄 것 같으면 세상에 할 일이 태산 같은 터수에 산간에서 이나 잡고 있겠는가.순간, 나는 명치께를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쑥 내려가면서 갑자기 천지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나는 서둘러 하산(下山)을 재촉하였다. 늙은이의 한 마디에 몰록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깨달음이라고 하지만 실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을 내려가서 천하고 추한 저잣 거리의 중생들과 함께 살을 섞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리와 번뇌가 본래 둘이 아니며 예토(藩土)와 정토(淨土)가 본래 둘로 나누어진 별세계가 아니라는 여래(如來)의 말씀이 진실로 진언(眞言)인 것일진대, 팔풍오욕(八風五慾) 속에 끝없이 윤회(輪廻)하는 이 예토를 여의고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정토를 구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8)번뇌가 곧 보리이며, 파계와 지계가 둘이 아니라는 이러한 믿음은 불교를 소재로 한 김성동 소설의 근간을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모티프라 할 수
    인문/어학| 2002.06.09| 13페이지| 1,000원| 조회(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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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서원 평가B괜찮아요
    조선시대의 서원은 무엇이었는가?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진 용도의 건축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림대학이라고 우선 대답할 수는 있다. 서원에는 학생과 선생이 있고 유학의 경전이라는 전문 분야를 공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원에는 항상 사당이 있다. 조선 서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주세붕(周世鵬)은 사묘(祠廟)가 없으면 서원이 될 수가 없다 고 서원의 자격 요건을 못 박았다. 사당 또는 사묘는 돌아가신 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성전이다. 그렇다면 서원의 교육 시설과 종교 시설이 결합된 건축이라 할 수 있다.서원의 사당에는 아무나 봉안될 수 없었다. 유학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대유학자이거나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친 선현들만이 봉안될 수 있었다. 그것도 특정한 한 사람이었고 많아야 10인을 넘지 않았다. 왜 학교 안에 특정 선현을 모셔야 할까? 선현의 학덕과 위대한 유훈을 하나의 모범으로 받들면 후학들을 계도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서원이라는 용어는 이미 신라시대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서원이란 일종의 관직이거나 도서관 또는 개인 사숙과 같은 한문 연수처의 명칭이었을 뿐, 조선시대에 등장한 교육 기관으로서의 서원은 아니었다.정통적인 의미를 갖는 서원의 시작은 중종 37년(1542)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현재의 영주시 순흥면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소수서원)이었다. 중국 송대에 세워진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예를 좇아서 백운동서원을 세웠다고 한다.백록동서원은 성리학을 체계화한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봉향한 서원이다. 주자(朱子)로 받들어지는 주희는 유학 사상의 공자에 버금가는 대성현이었는데 주자가 세운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할 정도였다. 명칭까지도 백록동서원을 따라 창건한 백운동서원에는 중국의 성리학을 이 땅에 최초로 수입한 회헌 안향(晦軒 安珦)을 모시고 있다. 최초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바로 한국 성리학의 태두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심이기 때문이다.안향은 조선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만년에 주희의 초상화를 늘 걸어두고 경모하였으며 주자의 호인 회암을 좇아 자신의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안향은 조선 사림의 태두로서도 기록된다. 안향의 학맥은 이색(李索)과 정몽주(鄭夢周)를 거쳐 김종직(金宗直) 등 조선의 사림파로 이어졌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서 완성을 이룬다. 사림파의 존재 목표는 다른 아닌 성리학의 발전과 사회적 실현이었다. 백운동 창립자인 주세붕이나 이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약 승격시킨 이황 모두 전형적인 사림파요, 성리학자였다.백운동서원과 그곳에 봉안된 안향의 성향에서 우리는 서원 건축을 이해하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하나는 성리학적 명분론 또는 사림파의 역사와 서원의 역할 사이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백록동서원과 같은 서원 건축의 이상형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은 이론과 행동, 관념과 현실, 마음과 몸을 일치화하려는 특유의 형이상학으로 발전하였다. 인간 중심의 자연관은 서원의 입지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서원 건축의 지리적인 입지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원 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적 대상 곧 안대(案對)였다. 예를 들어 동도서원은 북향을 하면 햇빛을 받아들이기도, 바람을 피하기도 매우 불리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안대를 향해 구성축을 정하고 건물들을 배열한다. 그러면서도 중심은 원장이 앉아 있는 강당 건물이 된다. 강당의 왼쪽 곧 서쪽에 있는 재실을 동재(東齎) 라 부른다. 원장이 바라보는 곳이 무조건 남쪽이 되는데, 자연 방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장으로 대표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방위 체계를 재조직하기 때문이다.서원의 외향적 경관 구조 역시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여실히 보여 주는 예이다. 외부에서 서원 건축의 형태를 감상하는 것보다 서원 안에서 보여지는 외부의 경관이 중요하게 된다. 건축적으로 말한다면 내향적 경관(off site view)보다는 중자연은 인간의 관념으로 재조직할 때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원 건축은 바깥에서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무엇이 보이는가가 중요하다.서원 건축이 이른바 인간적인 스케일로 구성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이용자들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그들의 선민 의식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선택된 소수만이 사용하는 유교적 공간은 대중들에게는 폐쇄적인 동시에 내부의 거주자들에게는 모든 곳이 개방되는 양면성을 갖는다. 서원 건축에 공존하는 외부적 근엄함과 내부적 개방성은 선택된 공간만이 취할 수 있는 성질들이다.서원의 마당과 불교 사찰의 마당을 비교해 보면, 서원 공간의 인위성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불교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서면 주건물 뒤로 뒷산이 배경을 이루어 건물과 자연이 일체화된 형태를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반면 서원의 강당 앞에서는 뒷산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조건의 경사지에 입지하더라도 불교 사찰과는 달리 주변 자연을 인지할 수 없도록 건물들의 위치를 정하고 거리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원의 마당은 철저하게 인위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인 인공적인 장소가 된다. 자연 속에 있되 자연을 격리시키고 오로지 학문과 수련만을 목적으로 하는 추상적인 공간이 된다.서원 건축의 유형은 선택 가능한 범례가 아니라 꼭 준수해야 할 규범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집착과 원형에 대한 향수는 유교 건축물들을 획일적이고 보수적으로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유 재산이어서 비교적 변화가 자유로웠던 서원 건축마자도 몇몇 창조적인 예들을 제외하고는 천편인률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서원의 전성기였던 17세기 곧 예학의 시대에 유형이 보수적 질서를 유지하는 거대한 건축의 예(禮)로 인식되었던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여러 가지 목적을 고려할 때, 서원이 자리잡을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어디였을까? 교육과 연구를 위해서는 번화한 곳에서 격리된 한적한 곳이어야 하지만 사림들의 정치적 기지가 되기 위해서는 향촌 사회와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 또 사립기관이라어야 하였다. 읍내에 있거나 읍에 근접하여 위치하는 향교와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가급적 지방 수령의 간섭을 피하고, 관학인 향교와도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명 서원의 대부분은 인적이 드물고 경치가 뛰어난 곳에 위치하게 된다.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하는 글인 상심방백서「 沈方伯書)」에서 퇴계는 이렇게 서원의 입지를 설명하고 있다.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을 강명하고 업을 익히는 무리는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합니다. 많은 책을 싸 짊어지고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로도피하여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한 중에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그 덕을 쌓고 인을 익혀 이것으로 낙을 삼습니다. 그 때문에 서원에 나아가기를 즐기는 것입니다.국학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 안에 있으며 학령에 구애됨에 많습니다.한편으로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어찌 그 공효를 서원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조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할 이상에 가득한 입지관이었다. 또한 과거 급제나 세속적 출세를 멀리하고 순수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초기 서원 교육의 건강한 이상도 엿볼 수 있는 글이다.실제로 초창기 서원에는 과거에 입격한 자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미급제자가 입학하게 되면 서원이 고시 준비 학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단순히 경치만 좋다고 서원의 입지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서원 성립의 제일 요건은 특정 선현을 봉향하는 것이고, 봉향된 선현과 연고가 있는 곳에 입지해야만 서원의 정통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향자의 출생지나 거주지, 아니면 유배지였거나 묘소가 있는 곳 등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있어야 한다.백운동서원 곧 소수서원은 안향의 고향이고, 심곡서원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며,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晦齎 李彦迪)의 은거지에, 순천의 옥천서원은 환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유배지에, 흥암서원은 동춘 생전에 손수 정사나 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서원으로 확대 중창된 곳도 많다. 봉향자와의 연고가 가장 확실한 이런 서원들 가운데 명문 서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전신은 이황의 도산서당이고,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의 풍악서당이 전신이었다. 이 밖에도 돈암서원, 노강서원, 필암서원, 덕천서원 등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팔송 윤황(八松 尹煌), 김인후(金麟厚), 조식(趙植)등 당대의 큰 성리학자들이 서당을 세워 강학을 하던 곳에 세워진 명문 서원이었다.여러 가지 형태의 연고가 있는 지역 가운데 가장 경관이 뛰어나고 지리적 이점을 가진 땅을 골라 서원을 서원을 세웠다. 대개의 서원은 흐르는 강이나 내를 앞으로 면하고 나머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장소에 입지한다. 특히 앞쪽으로 면하는 경치는 뛰어난 절승의 경관이 많아 최고의 휴양처가 되기도 한다.서원의 교육이란 스승의 지도 아래 밤낮을 정해진 규율에 맞추어야 하는 매우 엄격한 체제였다. 유생들은 항상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그런 긴장을 때때로 풀어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해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해 주는 것은 서원을 둘러싼 자연의 빼어난 자태였을 것이다. 좋은 자연 환경은 인간의 심성을 맑게 해주고, 영기에 충만한 산세의 기운은 인재를 배출할 것으로 믿었다. 자연과 인간, 환경과 심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이른바 천인합일 의 사상은 성리학의 기본 신념이기도 하였다. 훌륭한 서원의 입지는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런 장소였다.주자의 예와 백록동서원을 이상형으로 삼아 태동한 한국의 서원 건축은 하나의 전형적인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강당을 중심으로 한강학 공간과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이 결합한 기능적인 형식을 기본으로, 강학 공간을 앞에 놓고 제향 공간을 뒤에 놓는 건축 형식이 성립되었다. 하나의 중심축선을 설정하고 그 위에 주요 건물인 강당과 사당을 앞뒤로 일렬로 놓고 좌우에 부속 건물들을 대칭으로 배열하는 건축 유형 이 일반화되었다. 물론 서원에 따라되었다.
    교육학| 2002.06.09| 5페이지| 1,000원| 조회(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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