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예술의 문학적 분석 교육학과 9825004 김상영1. 싱클레어의 자기구현 단계(헤세가 말하는 인간형성의 세 과정)제 1 단계(1∼3장) : 실락원모범생이던 싱클레어가 크로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악의 세계를 경험하고 데미안의 도움으로 거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데미안은 그에게 이 된다.제 2 단계(4∼6장) : 파멸그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데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마음속에서 원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것을 금지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피스토리우스를 통해서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 갖게 되지만, 얼마 후에는 피스토리우스의 잡다한 지식이 아무런 행동력도 가기지 못한 것을 깨닫고 그와 결별하게 된다.제 3 단계(7∼8장) : 구원데미안의 집과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로 중요한 사건은 싱클레어와 에바부인과의 만남, 그리고 전쟁이다. 제3의 단계에서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의 지도를 받는데, 그 중요한 내용은 독자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부인을 만나기 전에 완성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던 싱클레어는 그녀를 만나는 순간 을 느낀다. 그 부인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일종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싱클레어는 이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전쟁이 나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함께 전선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지만 데미안으로부터 에바부인의 키스를 전해 받고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실감하게 된다.2. 내용 분석「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새의 그림을 받은 데미안의 쪽지로부터 시작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은 이름은 압락사스." 우연히 역사 시간에 이 이름을 듣게 되어 그것이 이라는 것 정도만 알게 된 싱클레어는 압락사스는 낯선 신을 찾아 헛되이 도서관을 뒤지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에 집착한다.그러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절실한 귀길울임과 배화를 경험한다. 또 하나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데미안의 쪽지 : 편협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라!.압락사스에 대한 신앙 : 주체성 있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대한 믿음.어머니를 포옹하는 꿈사랑이 동물적인 어두운 본능만도 정신적인 숭배만도 아니며, 이 두 세계가 섞인 것이라는 것을 이해.피스토리우스의 가르침내면에 있는 것은 하나도 부인할 필요가 없으며, 내면의 길을 충실히 가는 것만이 인간의 참다운 길이다..하늘을 날아다니는 꿈하늘을 나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주인이 된 사람, 인식한 사람으로 이 꿈은 싱클레어가 그러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 하게 된 것을 의미.알 껍질을 깨기세계와 인간 일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뜻하며, 기존의 규범과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의미하고, 기성의 종교 와 이데올로기의 편협성에 대한 예리한 지적을 의미하며,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자아의 다른 면들을 새롭게 인 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과거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인 비판을 나타내며, 인 간과 사물에 대한 달리보기를 의미한다.「야곱의 싸움」나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며 천사와 씨름한 야곱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피스토리우스는 라고 말한다.싱클레어는 결판이 나도록 싸워야 하는 정신/신 앞에 선 듯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친구이자 스승과도 파국이 와 결별이 이루어지고, 한때 자신이 데미안을 따랐듯 자기 자신을 따르는 친구와의 만남도 거치며 싱클레어는 더 나아간다. 자신의 내면에서는 인도자의 모습을 본다. 다시 데미안이 보인다. .사랑에 관한 꿈에바부인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꿈으로, 싱클레어의 성적인 욕구는 이중적인 구조, 즉 데미안과의 관계를 원하는 동 시에 에바부인과의 관계를 원하고 있다. 싱클레어가 꿈속에서 열렬히 포응하는 대상이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이유는 그의 이중적인 성적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데미안이 싱클레어로 하여금 악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하여 크로머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면, 피스토리우스는 싱클 레어로 하여금 자신에게 정직하도록 요구한다..크나우어와의 사건점차 자신감을 가진 청년으로 되어 가는 계기.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도 내면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된 다. 그리고 대답을 보내주는 것이 데미안도, 피스토리우스도 아니고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된다..피스토리우스와의 결별피스토리우스라는 존재는 싱클레어가 자기구현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 혹은 과정 이상은 아니었음을 알고, 목 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여 그것을 완벽하게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의 임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에바부인」만남과 공동체에 대한 성찰에 대한 내용으로, 데미안은 마침내 자신이 그런 꿈의 영상의 현실의 모습을 찾아낸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으로 에바부인 주변의 뛰어난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행복에는 그늘이 드리워진다. 허약한 사람들은 어디서나 를 만드는데 그런 공동체는 패거리짓기일 뿐이며, 내부가 상해 있고, 곧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사람들은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싱클레어는 지금의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나면 공간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의 예감 속에서 싱클레어는 푸른 혼돈을 떨치고 큰 날갯짓으로 짙게 구름 낀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새의 영상을 본다. 낡은 한 세계의 와해를 피부로 느낀다.이 대목에서 보이는 인 뛰어난 개인들과 인 사회의 간극은, 자신의 길을 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무리짓기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작품이 씌어진 시기의 전쟁에 임박한 혼돈기 사회에서 속출한 단체들, 이합집산하는 동맹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실제로 작가는 전쟁이 터지자 곧 자원했으며 부적격 판정으로 실전에는 참전하기 못했지만, 스위스에서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온갖 신문 잡지에의 기고, 호소문의 작성은 물론, 스스로 출판사를 만들어 를 22권이나 냈다..에바부인인류의 어머니인 EVE가 아담을 평화스런 원시상태로부터 고통스런 각성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면, 에바부인은 거기 서 한 걸은 더 나아가 고통스런 각성의 상태에서 더 높은 곳으로, 모든 대립이 지양된 행복의 상태로 싱클레어를 이 끌어 간다. 인 에바부인은 싱클레어의 모든 소망의 상(像)일 뿐만 아니라 싱클레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거쳐가야만 하는 상징적 대상이기도 한다.
언어예술의 문학적 분석 교육학과 9825004 김상영, 9925001 강소영1. 헤세의 연대기1887독일 남부의 뷔르템베르크 주의 작은 도시 칼브에서 개신교 선교사인 요하네스 헤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사헤스 헤세는 선교사 임무를 마치고 출판 사업을 했으며, 저명한 인도어 학자인 헤르만 군데르크의 딸인 마리아 군데르테아와 결혼하고 헤르만을 첫 아들로 두었다.1881집안이 스위스 바젤로 이주. 그곳에서 부친은 바젤선교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1883부친이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였다.1886집안이 다시 칼브로 돌아갔고, 헤르만은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1890괴핑겐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여 뷔르템베르크 지방 시험에 대비. 시험 자격 취득을 위해 헤르만의 부모들은 스위스 시민권으로 경신하고, 1890년 11월에 뷔르템 베르크주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취득케 했다.1891뷔르템베르크 지방 시험에 합격, 그 해 9월에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18927개월만에 신학교를 자퇴. 작가가 되기 위해 혹은 전혀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 자유로운 생할을 시도. 자살을 하려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슈테텐에서 신경질환 병원에 입원. 칸스타드 고등학교에 취학1894칼브에 있는 페로트 시계공장에 견습공으로 일했다.1895튀빙겐에 있는 헤켄하우어 서점에 취직했다.1899소설쓰기를 시작. 습작소설를 썼으나 원고를 분실했다. 시집을 출간했다. 가을에 바젤에 있는 서점으로 직장을 옮겼다.1901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 플로렌스, 제노아, 피사, 베니스 등지를 돌아봄. 출간.지방지신문에 기사와 평론을 기고. 이 일로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켜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1902시모음집 출간. 이 시집은 출간직전에 죽은 그의 어머니에게 헌정되었다.1903서적관계 일로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서점 점원 생활을 청산하고 집필에만 몰두하였다.그 후 베를린 피셔 출판사로부터 작품 집필을 의뢰받고 소설를 탈고1904소설를 피셔 출판사에서 출판. 일약 신진작가의 지위를 확보. 8월에 아홉살 연상인 마리아 베르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 헤세가 자신과 어머니를 괴롭히고, 나아가서 선생님에게까지 충돌을 일으킨 것도 천성적인 그의 맘속에 내재한 충동 때문인지도 모른다.10살 때에 라틴어 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 바올브론 신학교에 목사 지망생으로 입학했지만 이 중세적인 수도원 학교는 감수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소년에게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신학교 특유의 엄한 규율과 분위기에 절망한 나머지 1년만에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공부에 열중했으며, 동급생가운데서 시를 낭독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단지, 그 마음속의 폭풍을 이기지 못해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나서 그는 방황의 길로 들어선다.15살 때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고전 과목에서는 뛰어났지만 수학·물리학과 같은 과목은 따라갈 수 없어 교사들의 눈총을 받곤 했다. 학업에 흥미를 잃은 그는 밤늦게까지 놀아나기가 일쑤였고, 그 결과 빚을 지기도 했다. 이때 하이네와 투르게네프를 탐독하며, 시작을 유일한 구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1개월만에 여기서도 퇴학을 당했다. 그는 광자나 다름없었다. 교과서를 팔아 권총을 사는 등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하는 한 편 자살 소동까지 일으켰다. 결국 그는 퇴학을 당했으며 방황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당시 헤세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겪는 고뇌로 희망을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오직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만이 그를 지켜주고, 파멸에서 구해 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17세 떠 철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 나이또래의 애들이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국비 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땀흘려 일해야하는 가련한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1895년 10월, 18세 때 대학촌 튀벵겐의 헤겐하우어 서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매일 10∼12시간, 진종일 서서 책을 팔고 짐을 꾸리고 발송을 하는 하면 고서를 정리해야 했다. 그의 진지한 문학 수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누이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있는 세계명작을 읽트와 융의 정신 분석에 관한 책에 몰두했으며, 이해 단편집 를 출판했다.1919년 42세의 나이에 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익명으로 발표해 '폰타네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헤세가 실제 작자임이 밝혀지자 상은 회수되고 은 헤세의 작품으로서 정식 간행되게 되었다. 수상집, 동화집, 평론를 출판했다. 이 해 가족과 헤어져 남스위스의 몬타뇨라로 옮겨 이후 그 곳에서 안주하면서 갑자기 화필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그는 그 후 자신의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1922년 45세의 나이에 를 출판하면서 동양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게 된다. 그 이듬해 별거중인 마리아 부인과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 봄부터 정기적으로 취리히 근교에 있는 바덴 온천에 갔다.1923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시민이요, 조국을 배반한 작가로 낙인찍혀 나치들의 집요한 박해와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는 독일국적을 포기하고 영원한 스위스 국민이 된다.1924년 47세의 나이에 스위스 여류 작가의 딸인 루트 벵거와 결혼을 한다. 그 후 그는 토마스 만을 방문하거나 겨울엔 취리히에서 거처하면서 왕성한 창작을 한다.1933년 독일이 나치스 시대로 접어들기 전까지 그는 장편 소설 , 을 출판했으며 단편집와 시집, 평론집를 출판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헤세는 40세가 되면서 매일 그림을 그리다시피 했다. 주로 그린 것은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스위스의 평온한 시골풍경과 몬테뇰라 근교의 자연풍경이었다. 헤세의 그림에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 그가 그런 대상을 그릴 줄 모른다기보다는 인간에 지치고 인간세계에 염증을 느낀 그가 인간을 화면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묵묵히 다정히 서있는 나무며, 떠가는 구름이며, 파랗게 빛나는 호수를 그렸다.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독일 미술계를 풍미할 무렵 헤세는 당신의 시대상황과는 달리 동화나 유토피아적 꿈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다. 헤세는 그림을 통해 현실을 잊었으준 것은 최초의 장편소설 였다. 그는 이 해에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였고, 이어 스위스의 보덴 호반(湖畔)의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주(移住)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하였으며,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였다.그 후 그가 걸어온 긴 생애에는, 인도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일,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문단과 출판계로부터 지식계급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한 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身病) 등 가정적 위기를 당하자 정신분석 연구로 이 위기를 타개하고 작풍(作風)이 뚜렷하게 달라진 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나치스의 광신적인 폭정에 저항한 일 등 많은 파란 을 겪었지만,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로지 자기 실현의 길만을 걸었다.주요작품으로 제2의 장편소설 , 음악가소설 , 화가소설 ,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 진 서정적인 , 정신분석 연구로 자기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 , 주인공이 불교적인 절대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돈시대를 살아온 탐구의 서 , 신학자로서 지성(知性)의 세계에 사는 나르치스와, 여성을 알고 애 욕에 눈이 어두워진 골트문트와의 우정의 역사를 다룬 ,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 등이 있다. 또 이 밖에 단편집·시집·우화집·여행기·평론·수상(隨想)·서한집 등 다수의 간행물이 있다.헤세는 나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며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글을 쓰는 작가이다. 누구보다도 많은 방황을 하며 수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웠던 그였기에 자신이 청춘시절에 겪었던 온갖 슬픔과 갈등을 회상하며 나를 발견하기 위해 외로이 투쟁하는 인간들을 위해 너무나도 위안적인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부조리 투성이인 현대문명의 아웃사이더들인 히피와 비트족은 헤세를 그들의 사도(使徒)로 숭배하고, 그들의 성서가 된 와 는 스크린에 담겨져 영화화되는 동시에 그의 작 그리는 동안은 일체의 것을 잊고 대상과 일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병에 걸린 아내, 막내아들의 중병, 부친의 사망, 아내와의 결혼의 위기, 더구나 전쟁 중에 겪었던 조국 독일과의 마찰과 같은 고뇌와 위기가 그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이런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두 가지 였는데, 그 하나는 프로이트의 제자 랑 박사로부터 심리치료를 받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림 그리기였다. 1927년의 한 편지에 헤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내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현상세계에 푹 빠져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은 것은 한 귀중한 체험입니다. 내가 여러 날 동안 내 자신과 세계와 전쟁과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1924년 이래로 처음입니다.'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를 든다고 한다면 그 당시 헤세의 입장으로 보아 작가로 생활할 수는 없게 되었고(독일로부터 배척받고 독자를 잃었으므로)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려고 하였다. 그는 실제로 1921년에는 그가 그린 그림과 함께 곁들여서 펴낸 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헤세의 화풍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나 연구가 아직 되어있지 못하다. 헤세 자신은 그 저 간단히 그의 화풍이 '약간 표현주의적'경향을 띤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여튼 헤세의 그림을 표현주의의 틀에 맞춰 이해하는 데는 그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그의 문학 세계와 그 시대의 회화의 흐름과 그 밖의 다른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표현주의 작가들은 예술을 개인과 사회적 요구의 표출도구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시대의 위기를 표현하고자 아름다움보다는 시대의 불안과 고뇌를 피를 토해내듯 강력하게 내뱉고 있다.헤세의 수채화에는 그러나 원초적인 순수함과 내면성이 깃 들어 있다. 쥬르캄프 출판사의 헤세 편집장인 폴커 미헬스는 헤세의.
직업교육의 철학적 기초Ⅰ. 서 론인간의 삶의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복을 성취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직업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직업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직업교육을 통해서 계발한다. 직업교육이란 어떤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형식 또는 비형식적 교육 또는 학사학위 미만의 학력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청소년 및 성인들을 교육시키는 형식, 비형식적 교육의 일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이 학사학위 미만의 학력을 요구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일의 세계를 탐색하고 자기의 적성, 흥미, 능력, 신체적 특성, 가치관 등에 알맞은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 이해, 판단력, 일에 대한 습관 등을 개발하거나 또 이미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근로자가 자신의 일을 개선 유지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 사회 교육, 그리고 일의 현장을 통해서 능력을 개발하는 전체교육의 일부이다.이러한 직업교육은 직업에 관한 교양 교육적 기초능력을 길러 일상생활, 특히 의식주 생활에 기초가 되는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과 태도를 기르고 여러 교과에 대한 학습동기를 유발시키며 개인의 직업선택기회를 확대시키고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직업교육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철학의 역사적 변천과 가치관을 통해 직업교육을 지식론, 존재론, 가치론 면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Ⅱ. 직업교육의 철학·역사적 고찰1. 직업교육의 개념직업교육은 국가나 학자에 따라, 그리고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정의될 수도 있고, 광의적 의미와 협의적 의미로 정의되기도 한다.광의적 의미는 직업과 관련되어 행해지는 모든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교육의 직업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개인이 일의 세계를 탐색하여 자기의 적성, 흥미, 성격, 능력 및 신체적 조건에 맞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 태도 및 일에 대한 습관과 가치관 등한 지식·기능·태도·이해·판단력·일에 대한 습관 등을 개발하거나, 또 이미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근로자가 자신의 일을 개선·유지할 수 있도록 학교교육, 사회교육, 그리고 일의 현장을 통해서 능력을 개발하는 전체교육의 일부이다"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것은 직업교육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력개발에 앞서 개인의 적성과 흥미에 알맞은 일의 세계를 탐색하고 선정하여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함과 동시에 그것이 국가 인력계발계획과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뜻한다.'학사학위 미만의 학력'이란 직업교육을 학력면에서 주로 전문대학 수준까지를 강조함에 있다.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종사하고 있는 일'이란 미취업자의 취업을 위한 직업교육과 이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직업인들의 능력 향상을 위한 계속교육으로서의 직업교육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이다. 또한 '전체교육의 일부'란 직업교육과 교양교육은 별개의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직업교육도 평생 교육 차원에서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교육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 직업교육의 목적 - 직업 교육은 왜 하는가?(1) 지식론 중심의 교육 내적 문제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직업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지식론이다. 이것은 어떤 지식이 가장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는 일반적으 로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어떤 기본개념과 기능을 가르쳐야 하는가?. 가장 효과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의 유형. 공통문화(common culture)의 공존 여부. 일반개념과 특수개념의 정도. 환경에 대한 통제, 이해 및 자신교양교육과 전문교육직업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개인적 발전을 기하는 데에는 교양교육과 전문교육의 양 자가 모두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교양교육적 요소와 직업 교육적 요소를 상호 교합함으로써 가교육 외적 문제가. 일, 직업교육, 직업교육 기관의 존재 의의대체적인 일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1) 일의 대가에 경제적 보수가 수반되어 생계유지의 수단이 된다.2) 생활을 규칙화한다.3) 소속과 안정감을 준다.4)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5) 인간의 최고 수준의 요구인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한다.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잠재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모두 일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개발시키는 교육이 직업교육이 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다양한 직업교육 기관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다.나. 교육 효과와 환류(feedback)직업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1) 사회의 인력수요를 충족시킨다.2) 학생의 진로 선택 폭을 확장시켜 의미있는 실존적 삶으로 인도한다.3) 다른 학습 효과를 향상시키는 동기 요인으로 작용한다.4) 인간주의적 사회의 건설에 중요한 기초적 기능을 제공한다.직업교육은 단순한 기술이나 기능을 획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 되어가는 과정적 교육을제공하는데 그 근본의의가 있다.(3) 가치론 중심의 직업교육 의의첫째, 보수지향적 직업관이 있다. 이것은 직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많은 보수를 얻는데 가치를 부여하는 직업 의식이다. 즉, 이것은 직업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는 직업관이다. 이것은 가장 통속적인 직업관으로서, 생업으로서의 직업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나타난 직업관이라 할 수 있다. 직업을 입신 출세를 하기 위한 활동 내지는 수단으로 보는 것으로, 자기의 필요한 이익을 가장 우선적인 목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본위의 직업관이다.둘째, 기여지향적 직업관이 있다. 이것은 직업을 통해서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과 발전에의 기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직업적인 태도이다. 개인의 필요나 이익을 주 목적으로 삼기 보다는 개인이 속하고 있는 집단이나 사회 전체의 목적과 이익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즉 개인의 이익이나 욕망 대신에 개인의 의무와 희생이 다.다. 여러 가지 기능의 획득과 그의 실제적 적용을 통해 현상적 자아를 초월하여 최고선을 향한 노력 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총체적 과정을 부여한다.3. 직업교육의 역사적 발달.인간의 욕구 충족의 수단 → 일고 대 사 회인간의 의식주에 관한 기본욕구 충족현 대 사 회인간의 욕구 증대 (좀 더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방법 창안)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일은 분화가 되었고 분화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그 분야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의 성질에 따라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적성·흥미·능력에 따라 일의 능률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을 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좀 더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직업교육이 실시되었다.(1) 초기의 직업교육도제제도일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계획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고안된 최초의 직업교육의 형태길드제도.계속 발전되지 못하고 감퇴 현상을 보이던 도제 제도 부흥의 역할을 함..기계와 도구 사용의 급증, 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붕괴공장훈련산업혁명으로 농업경제가 공업경제로 이행 현장에서 지도를 받으며 작업을 하며 동시에어느 정도 전문적 기능·기술을 습득해 가는 훈련제도초창기 직업학교 교육많은 나라들이 공장제도의 훈련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취업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과기술,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교양에 관한 교육을 학교를 통하여 실시하였다.(2) 이조 말기의 직업교육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직업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 이다. 이 때는 우리나라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시기였으므로 제도는 갖추었다 하여도 실천은 계획대로 되지 못하였고 더욱이 새로 도입된 제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자주 바뀌게 되어 일관성을 가지 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에 치우치고 실학을 하던 당시 사상에서 벗어나 실학을 권장하여 나라를 부강케 하려고 했던 정부의 의도는 충분히 엿볼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 근대적 직업교육의 출발 점을 이룩 수행을 돕는 형태에서 실시되었다.(4) 해방 후 중등교육에서의 직업교육수공업시대의 중등교육에서의직 업 교 육(1945∼1960).미 군정기에는 이레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복선형 학제를 재편하여 단선형 학제로바꾸었으며, 정부수립 이후부터 1950년대에는 6-3-3-4제의 기본학제를 확정하고 3년 제 실업계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고등학교 수준에서의 직업 교육을 실시하였다..실업교육진흥을 위해 강한 의욕을 보였으나 교육재정 확보의 미흡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노동집약시대의 중등교육에서의직 업 교 육(1961∼1970년대초)정치적인 요인이 경제정책과 사회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였고, 경제 사회적 환경은 직업교육 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기술집약시대의 중등교육에서의직 업 교 육(1970년대중반∼1980년대)1970년대에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을 기반으로 제3,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실업교육은 공업화를 근간으로 하는 조국근대화추구에 발맞추어 우수한 기능인력의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우리나라의 실업계고등학교 교육은 해방 이후 계속 강조되어 왔으나 시기별로 강조의 대상과 내 용 및 정도가 변화하여 지원과 방임이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요인은 학부모나 학생의 교육적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교육 외적인 필요에 따라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즉,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과 산업 및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산업구조와 고용구조의 변화에 따 른 산업인력의 공급과 정권의 정치적 필요 및 고등교육기관의 교육 기회 등에 따라서 실업계고등 학교의 교육정책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보화시대의 중등교육에서의 직업교육동향(1990년 이후∼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에서 해결해야 할 사장 큰 과제의 하나는 과열된 대학입시 경쟁을 완화해서 전인적이며 창의적인 인간을 길러내도록 고교 교육을 정상화하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업사회 가 필요로 하는 우수한 기능 인력을 양성할 수 있도록 고교 직업교육을 활성화하는 일이다.다.
{조선시대의 교육Ⅰ: 교육제도의 개관교육학과 9825002 권태형, 9825003 권혁진, 9825004 김상영백정원, 홍주연Ⅰ. 서 론1. 조선시대의 시대적 배경14세기 공민왕이 성리학(주자학)으로 무장된 신흥사대부들과 힘을 합하여 원과 결탁해 있던 구귀족들과 대결을 하였고,원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공민왕은 관학과 과거제도를 통해 신진 세력을 양성함으로써 구귀족들을 견제하였다.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게된 신흥사대부들은 그들의 신봉하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숭유억불정책을 표방하여 모든 문물제도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정비하였으며 학교제도역시 이런 맥락이었다.조선시대의 교육은 과거제도 중심이고 출세기반으로 교육의 수요층은 주로 양반들이었다.2. 조선시대 교육의 특징교육목적 : 유학이념보급, 유학이념 실천(修身齊家治國平天下)교육방법 : 재양(재심양성에 힘씀 : 인격도야), 궁리(학문탐구), 성현들의 행실을 모방(공자의 교육관과 동일)특 징 : 훈민정음의 제정공포로 서민교육이 확대되었다.교육행정은 중앙과 지방으로 분리하여 실시하였다.교육기관은 오늘날과 달리 독립적이었다.성리학은 인격의 향상과 실천·도덕적인 면에서는 긍정적이나 경험적·실험적인 측면에서는 취약하여, 실용성을 강조하는 실학이 조선후기 대두했다.{성 균 관 (고등교육 , 관학)유 학학 당 (중등교육 , 관학)서 울종 학 (관 학)잡 학십 학 (관 학)향 교 (관 학)지 방유 학서 원 (사 학)서 당 (사 학)과거제도{문 과소과(생원과, 진사과), 대과(초시, 복시, 전시)무 과대과(단층제)잡 과필요기관에서 주관하여 실기(기술직 관리임용)취 재특별시험, 면담으로 과거대체(=고구려의 음서제도)3. 성리학과 교육성리학의 등장배경과 국가적 기반으로써 기능고려말 성장하기 시작한 사대부들에 의해서 중국의 원으로부터 도입된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와서 국가의 제도적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체계로 작용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국왕에서 천민층에 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교육목적 : 교화-유교적 지식이나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이 제분수대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하 는 것을 의미한다.-조선시대에도 부수적으로 인재양성을 하긴 했지만, 학교교육목적이 인재양성이었던 고려시대와 다른 점은 교화 이다.이 외에 교화라는 목적으로서 과거실시인데, 이것은 학생들에게 경학을 권장하기 위한 것으로, 경학 즉 경서의 학습이 예 의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알게 하는 것으로, 강경법을 실시하면 학생들이 경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위해서 교사 에게 수업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성균관에 유능한 교사를 배치하면 모여들게 될 것이라는 유인정책이었다.이처럼 당시 학생들이 성균관에 입학하여 입학하려 했던 이유는 단지 과거응시 자격을 얻기 위한 것이지 성균관의 수학 자체가 중요한 경력이 되기 때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녔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과거시험에 합격했느냐의 여부였다.성균관의 건물구조{문 묘공자의 넋을 모시고 절하는 곳. 대성전, 서무, 동무가 있다.명 륜 당유교학생들이 공부하는 곳. 좌우에 동재, 서재가 있다.동·서재학생들의 기숙사존 경 각명륜당 동북쪽에 있는 도서관비 천 당명륜당 서쪽에 있는 과거시험 장소양 현 고물자 공급하는 곳정원과 입학자격조선 건국 초에는 150명이었는데, 세종 11년에 50명을 증원하여 200명이 되었다. 주로 양반의 자체들에게 입학 자격을 주 었다.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로 하는데, 정원을 못 채울 경우, 사학 생도 중 소학 과 4서와 5경 중 1경에 통한 자, 그 외 에 공훈이 있는 집, 적자 손으로 소학을 마친 자, 문과나 생원, 진의 향시나 한성시에 급제한 자, 조정의 신하로 입학을 스스로 원하는 자를 입학시켰다.교육내용유학 경전인 4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와 5경(시경, 서경, 예기, 춘추), 역사서(성리학관련 교재만 허용)이 사서오경을 각 과목에 따라 구재(九齋)를 만들어 교육했다.교육방법 : 강의 토론 반복·연습 등 재생들의 자치활동-학생이 잘못을 범한 것은 유생의 합의로 처리하고 우량자 추천을 유해의 합의하여 학생에게 자치정신을 실천시킴-왕이 정치를 잘못하는 경우나 논란이 될 만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상소를 올리고 이 유소에 대해 국가에서 보복을 하면 학교식당에 들어가지 않거나(권당), 기숙사에서 나오거나(공재), 성균관을 나온다(공관).이 유소는 국왕도 함부로 물리치지 못하였다.성균관의 의의조선초기를 지나면서 성균관이 관학으로서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 원인으로는 국가는 국학이라는 명분아래 성균관을 늘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과 기원이 미약했 다. 이에 따라 학교로서의 교육여건의 그다지 좋지 않아서 양반사족의 자제들이 거관을 기피하였고, 후에 원점제도가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성균관의 부진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또한, 성균관 교관의 자질부족과 성균관의 엄격한 생활의 규제로 인한 취학 기피 등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유생의 수 가 정원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이다.(2) 향교 (鄕校){기 원조선시대 향교의 기원은 문묘를 처음 세운 고려 말인 충렬왕 때라고 할 수 있다.설 립목 적통치체제에 필요한 관리 자원의 확보새로운 통치체제의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교화하려는 것이었다.건 물구 조성균관의 건물 구조와 동일하며 크기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이는, 묘학제(문묘+학교)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성균관의 모방이 아니다.특 징중등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 기관이었다.유학교육기관이다. 유교이념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지방민을 교화시키는 기관이다.향교는 공교육 기관으로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되었다.교육과 교화를 수행하였다. 유교 중심의 교화 기관으로 지방 문화의 중심지였다.정 원 /입 학자 격「경국대전」에 학생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는 90명, 군 50명, 현 30명이었고 16세 이하는 이 제한에 들지 않았다. 입학 자격은 양반·평민의 자제를 가리지 아니하고 나이 8, 9세로부터 성격을 지닌다. 송의 외학제를 모방하였다..오부학당의 교육은 성균관의 교관이 담당.10세 이상 취학, 15세때 소학의 공을 이루면 성균관에 진학.성균관 유생 미달시 충원.성균관에서 학당을 총괄하며, 학당의 학력은 성균관의 학식에 따른다.즉, 사학은 부속적인 학교의 성격을 가졌다.교 육내 용.교육내용으로서는 소학을 필수로 하였고 효경, 사서, 오경, 문공가례집, 제사 둥과 초사, 문선, 역대제가시 등을 공부하였다..소학은 ㄱ 유교 사회의 도덕 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초록-사학 유생들의 필수과목)ㄴ 유생들의 생활 규칙(학령)ㄷ 승보시 (성균관 진학 시험)의 중요시험과목 중의 하나이다..교육목표로는 성균관 진학과 생원, 진사시에 합격을 목표로 한다. 시험은 6월 도회(매해 6월 국가시험으로 서 사학에서 각각 20명씩 선발하여 그 중 우등생 10명을 뽑아 생원, 진사 시험 응시자격을 부여하였다 알 성시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예조에서 월강을 실시하고, 5일마다 시험치는 일강제도가 있었다.사학의구 성교 관.교관의 겸임체 : 교육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성균관의 교관이 겸임.교관의 근속법 시행 : 성종 때, 30개월 근속, 다른 벼슬을 겸직한 교수로서 교관을 둠.侍從(시종)을 임명하였다. 이는 명망 있고 학식 있는 자로 교수를 겸하게 하 여 학교풍기를 교종, 장려하는 의도였다.학 생학생의 정원은 100명이었다가 조선중기에 각 학교에 10명, 또 인조 때는 각 5명으로 줄어 들었다.이는 사학이 발전과 쇠퇴를 엿볼 수 있게 한다.사학의재 정태종 때에 이르러 독립된 학사를 갖추고 성균관의 양현고에서 운영 경비를 지급하고 그 후 운영난으로 정부의 풍저창에서 조달하게 된다. 조선중기에는 전답과 어장을 내려 독립된 재정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그리고 노비가 사학의 노력을 담당하도록 배치시키기도 했다.사학의상 황정비된 제도와 형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운영의 불철저로 폐단과 나쁜 풍습이 많아 성과는 적었다. 시설이 빈약하여 서적이 부족하고 직원과 양식과 노비가 부 것이다.{융 성봉건제도 사회는 어떠한 훌륭한 제도를 창설한다해도 특권의 남용으로 생기는 폐해가 더 많다. 서원제도는일종의 봉건적 구성이었다. 훌륭한 현인을 추대하는데서 자기일신의 사회적 지휘와 명성을 유지하려는 수단과 파당적 태세를 형성하려는 불순한 야망이 앞섰다. 그리하여 개인의 사당과 서원이 날로 늘어서 목민심서에는 백리의 마을에 개인의 사당이 수십 개가되는 데가 있다 하였고, 숙종 8년에 대사성 김만중의 상소에는한 도의 서원수가 80∼90개나 된다고 하였다. 특별히 추대할 현인과 철인의 덕행도 없이 혹은 효행 혹은 전사들의 해적으로도 개인사당을 세웠고, 목민심서를 보면 건국 초의 명신으로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이를 먼지방의 미천한 친족이 이를 추대하여 개인사당을 세우고 포상을 받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폐 해.항교의 학생이 서원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향교가 쇠퇴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적당한 사장이 없기 때문에 모여서 놀고먹기를 일삼는 일이 많았다..균역을 피하려는 자의 도피처가 되었다..어리석은 백성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부려먹는 악당의 양성소가 된 곳이 많았다..서원소유 토지는 조세를 면하였는데 그 수익을 유생의 음식으로 낭비하였다..사색 파쟁이 정권을 다툴 때에 서원유생도 대립하여 가세하였다.서원의말 로서원은 출발 초에 가졌던‘선현존중과 후진장학’이라는 좋은 정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무분별한 건립과이용으로 온갖 폐단의 소굴이 되어 역대조정이 혹은 교정하며 제재하며 혹은 금지하여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r종 8년에 대원군 이하응의 용단으로 678개나 되는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다 헐어 버렸다. 그리하여 봉건제도 하에서 양반의 이데올로기가 형식화하여 놀이도구로 건물모형을 쌓아 놓고 의기양양해하며 어떠한성공적 자랑의 느낌에 더러 위하여 노는 어린이의 놀이와 같은 일은 폐물처치의 종말을 짓고 말았다. 이것이 중국제도의 모방인 점과 유학자 거두인 이황 등의 선전 확장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아 유학의 본질을 이제 우리가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받음
{한국 교육문화의 병폐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교육학과 9825004 김상영{목 차서 론.한국 교육의 현실본 론.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조선시대의 교육과 현재의 교육문화 비교.대안 모색결 론.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서 론매년 그렇듯이 지난달에는 수학능력 시험이 있었고, 점수가 발표되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점수에 맞는 대학의 문을 두드렸으며, 남은 것은 발표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 과정에 있어서 학생의 적성이나 흥미를 고려하는지는 문제가 되질 않는다. 수능 이라는 큰 시험에 대한 해방감을 맛본 것도 잠시, 수험생들은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든, 부모에 의해서든 대학에서 요구하는 논술, 면접 등에 대한 준비를 하고, 이미 재수라는 길을 결심하고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매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해져버린 광경이 되어버렸다.어느 대학 을 입학했고 졸업했느냐가 인생의 가늠자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험이란 제도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을 외면해 버린지 오래되었고, 학령전의 아이들에게도 조기교육이라는 명분에 교육 이 아닌 갖가지 훈련 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학부모의 심리를 이용하는 일부 업자들 때문에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사교육시장은 커져가고 있다. 매스컴에 발표되는 자료를 통해 보더라도 그 금액은 실로 엄청나다.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시험과 그 결과에 집착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교사를 단지 교과 지식의 전달자 로 여기고 있는 것도 커다란 문제이다. 교실붕괴 니 학교붕괴 라는 말을 각종 매스컴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또한,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번 후보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교육에 관한 공약사항이다. 그 후보들 입장에서는 교육이라는 공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교육 이란 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 있는 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러하듯이, 교육개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새로운 제도의 허점을 노리고, 그것을 악용하는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일단은 대학에 들어가고 보자 라는 사고방식이 뿌리를 내린지 오래되었고, 이러한 한국의 교육열병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다. 그 때문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학교공부에 실증을 느끼고, 방황하기도 하며, 심한 경우는 시험에 실패한 고등학생들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근래에는 그 시기가 더욱 낮아져 부모의 잘못된 교육열 때문에 초등학생이 자살한 사고도 있었다.과연 이러한 잘못된 학력중심주의 또는 학력지상주의 는 과연 어디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 그 원인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과거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비추어보고, 해결책은 없는지, 앞으로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마지막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과거의 교육 제도나 기관 같은 외적인 모습에 관해서는 이미 수업시간을 통해 다루었고, 교재를 봐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여기서는 수업시간을 통해 논의가 되었던 교육열병에 관해서 주로 다루기로 하겠다.본 론.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한국인의 과도한 교육열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수업을 통해 알고있는 관계로 그것과 관련한 다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조선시대 교육의 목적과 교육기관 및 각 기관의 특성을 살펴보면,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교육의 내면을 들추어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던 과거 옛 선비의 모습이 아닌 마치 지금의 우리 중·고등학생과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1)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를 하였다.양반들이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는 그들의 부(富)를 위한 것도, 관직을 얻기 위함도 아닌, 가문과 신분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관직을 얻지 못하면 중인을 거쳐 양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즉, 이들에게 교육 이란 주로 과거 합격의 수단이었으며, 합격 후에는 학업을 등한시했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생원, 진사시 즉, 소과라도 합격을 못한 채 죽으면 묘에는 학생부군신위라는 말이 넣어졌는데 이는 개인에게 인간적인 수치로 여겨졌다. 이는 조선시대의 인간성이나 덕성 등은 과거 합격의 여부로 함께 결정지어졌기 때문이다.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합격만이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과거합격만을 위한 학업 풍토를 낳게 하였다.이것은 현대의 입시위주의 교육문화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2) 공부 방법 및 시험 문화과거 우리의 선비들은 과거 합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가 어떠한 종류의 교육을 선택할 지의 기준이었다. 교육을 목적 아닌 수단으로 인식하였고,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그 효율성에 집착을 하였다.그러한 인식덕분에 성균관이나 사부학당은 정원을 채우기 힘들었고, 향교의 경우 양인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학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관학(官學)은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그 공통적인 이유로는 첫째가 교관의 자질부족, 숙식조건의 열악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가장 커다란 이유는 과거의 합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과거 합격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였는데, 이는 교사에게 지도를 받는, 오늘날의 사교육 즉, 과외와 같은 형태와 독학 두 가지 경우로 볼 수 있다. 또한 일종의 예상문제집과 같은 초집(抄集) 이 있었는데 분량이 많지 않아 장기간에 걸쳐 준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관학 기피와 학업태만 풍조를 가져왔다. 교육의 질적(質的)하락을 초래한 것이다.초집의 성행이유로는 일종의 부정기 시험인 별시(別試)로 인한 대비책으로서의 역할과 종이 부족으로 인한 서적의 품귀를 들 수 있다. 별시는 과거제도의 모태인 중국에도 없는 것으로 식년시가 없는 해마다 1회 이상 수시로 치뤄진 것으로 이는 학생들에게 단기완성적인 학업 풍조를 보이게 하였고, 이는 단순히 조선 유생들의 나태함이 아닌, 경제적 여건이나 종이 품귀 현상 등 환경적 여건의 영향이었다 볼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은 암기 위주인 경학(4서3경)을 외면하여 당시 교육의 기본이 되는 경서의 학습에 소홀했었고 이러한 경학의 기피풍조는 학생들의 현저한 학력저하를 초래하였다.과거제도의 숨겨져 있는 의도는 학생들이 과거공부를 하며 경서내용이 그들의 도덕률로서 내면화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수험생의 교화(敎化) 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학생 들은 과거시험을 위한 암기위주의 방법에만 치중했기에 본래의 목적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공부는 과거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과 현재의 교육문화 비교과거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 있다면, 시험(試驗) 이라는 필요악(必要惡) 의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나 과거에나 시험 이라는 제도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제도가 다른 어떠한 방법보다 가장 공정하다는 국민적인 합의아래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시험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부작용이 커져가고 있지만, 그 자체를 나쁘게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과거합격의 여부를 통해 한 인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조선시대나, 유명 대학의 합격 여부에 따라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지금이나 다른 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맹목적 교육열 과 학력집착 현상 이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조선시대와 지금을 살펴봄으로써,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우리 교육의 미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험 이란 제도가 존재하는 이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지금 겪고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는 말이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과거·과거시험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안 모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육이 가지고 있는 왜 그토록 교육이란 것에 집착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학식과 인격을 가늠해 등급을 매기고, 할 수 있는 직업도 달라지고, 대우나 보수 역시 달라지는 사회의 현실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만큼은 꼭 일류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의 문제 역시 이러한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