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뎐을 보고춘향전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누구 나가 다 알고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이야기 이다. 책으로도 보아 왔고 이야기로도 들으며 영상매체로도 매년 명절 때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것이 춘향전이다. 춘향전이 요즘 같은 시대에 여전히 사람들의 도마에 올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남자들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싶다. 춘향전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여자, 즉 한 남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들은 그것을 보면서 '여자는 저래야지' 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면 그 드라마를 매년 틀어 주면서 저런 것을 본 받으라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인 내가 볼 때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상 받을 만하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를 택한다는 설정은 너무 극단적이다. 내가 춘향이를 친구라 생각하고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해서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이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쓰겠다.춘향이에게.요즘 이 더운 날씨에 감옥 생활은 어떠니? 잘 지내고 있는건지...너의 어머니는 니 생각에 밥도 잘 못드시고 계셔. 제발 너나 니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마음을 바꾸렴. 자기 출세를 위해 여자를 버리고 떠난 남자 때문에 고생을 하는 널 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거니. 이 도령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아님 니가 죽어서 너의 절개를 세상에 알리려고? 그까지 절개가 뭐가 중요하다고 니 몸까지 생각지 않으며 그런 고생을 하니. 변학도의 수청을 든다고 해서 널 탓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수청을 들었다고 이도령에 대한 너의 사랑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이제 그만 변학도의 청을 들어주렴. 변학도가 너의 몸을 가질 수는 있어도 너의 마음은 이 도령에게 있으니 그도 얼마후면 너를 보내줄거야. 그러면 그 후에 이 도령을 기다려도 늦지 않아. 이 도령도 자신을 잊지 않아준 너에게 감사할거야. 요즘 세상에서 절개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한 사람을 너처럼 깊게 사랑하기도 힘든일인걸.춘향아. 내가 한말 흘려 듣지 말고 너의 미래를 위해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니가 나올 때 까지 너의 어머니는 내가 잘 보살필게.-너의 친구 미선이가춘향이가 이런 친구의 편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예전의 춘향이라면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절개를 지킨다고 감옥 살이를 하겠지만, 지금의 춘향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미선이에게미선아. 안녕! 잘 지내고 있지? 난 감옥에서 힘든 날을 보내고 있어. 감옥 밥이 입에 맞지도 않고 어찌나 더운지...힘들게 생활하던 시기에 너의 편지를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어.우선 니가 날 많이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이 도령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이유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느껴서야. 그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로서 쉽게 다른 남자에게 나의 몸을 준다면 이 도령이 생각할 때 자신에 대한 내 감정을 의심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너무 헤픈 여자로 보일까봐 그런 결정을 했었던 거야. 하지만 계속 생각해 본 끝에 내가 너무 한 쪽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로 인해 엄마가 고통을 받고 나 또한 고통을 겪고 너무 많은 사람이 나로 인해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제는 너무 하나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에 대해 따를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행동해야 겠어. 너의 편지가 결정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 정말 고마워. 너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이제 곧 변학도의 수청을 들테니까 그 동안 엄마 잘 부탁해. -감옥에서 춘향이위의 편지는 춘향이가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 갔을지를 써 본 것이다. 물론 요즘이라고 해서 무조건 절개를 쉽게 생각해서 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에 대해서 좀더 개방적으로 생각하는 것 뿐이지 절개란 단어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절개라는 개념을 달리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단순히 성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절개가 되어야 한다.이쯤에서 춘향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보면 우선 춘향이는 자기 자신뿐이 아닌 여러 사람들을 모두 고려해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면 한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춘향이가 이 도령을 기다리며 절개를 지킴으로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춘향의 엄마 월매이다. 자식이 힘들 때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이 부모라는 것을 춘향은 왜 몰랐을까. 월매는 자식을 위해 자신도 고통을 당하며 힘든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변학도 또한 춘향이 고집을 피움으로써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여러 번 청하다가 결국은 죽이기로 맘을 먹었을 것이다. 변학도 옆에 있는 이방 또한 춘향이가 수청을 거절할 때마다 변학도의 성질을 받아 내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살아 가는데 나 하나만 잘살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세상은 절대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춘향이는 결정을 하기 전에 또한 자신의 미래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앞을 내다 보지 못한 너무나도 짧은 생각이다. 자신이 얼마든지 성공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춘향이는 생명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즘에 만연하고 있는 생명경시 풍조가 그 당시에도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변학도가 죽인다고 까지 했을시에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하거늘 춘향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수청을 거절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와 저 여자 소신있네 하겠지만 나는 다르다. 생명은 함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한번 생각도 안해 보고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처럼 춘향이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했어야 한다.만약 춘향이가 이 도령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변학도의 수청을 받아 들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춘향이는 여러번 수청을 거절해 옥에 갇혀 있었다. 어느날 밤에 이방이 찾아 와서 내일이 변학도의 생일이니 죽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준다. 춘향은 죽을 생각에 눈물로 밤을 지샌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변학도는 춘향을 끌고 오라고 이방에게 소리를 친다. 이방이 춘향을 데려 오자 변학도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 내며 망나니를 불러 들인다. 그러나 변학도도 남자이기에 춘향의 아름다움 앞에 다시 한번 무너진다. 변학도는 마지막으로 묻겠다며 수청을 들겠느냐고 물어본다. 춘향은 튕긴다. 변학도는 버럭 화를 내며 죽이라고 망나니에게 명을 한다. 이때 춘향이가 작은 소리로 수청을 들겠다고 말한다. 변학도는 믿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춘향이에게 묻는다. "나의 수청을 들겠느냐?"춘향은 부끄러운 듯 작게 "네."하고 대답한다. 이때 이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다. 춘향은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이 도령은 변학도를 잡아 목을 치고 그간에 빼앗은 물건들을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 날밤 이 도령은 춘향이를 부른다. 춘향이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 도령 또한 춘향이가 자신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것에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춘향이는 말 없이 조용히 눈물을 떨군다. 이 모습을 본 이 도령은 가슴이 아팠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른 뒤 이 도령이 말을 꺼낸다. "춘향아, 그간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느냐?"춘향인 계속 눈물만을 흘린다. 이 도령이 가서 춘향일 살포시 안아주면서 "그 동안 너의 고생을 모두 들었다. 너무 미안해 하지 말거라." 춘향이는 눈물을 닦으며 이 도령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이 도령은 니가 죽었으면 어쩔뻔 했느냐며 춘향이에게 웃어준다. 춘향은 그제서야 이 도령에게 안기며 둘은 함께 밤을 보낸다. 이 날 이후로 춘향이는 이 도령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이백@이백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은 전부터 술 마실 줄 모르고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부질없이 흉내만 내는구나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한동안 달과 그림자 벗해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행락은 모름지기 봄에 맞추었다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니 달은 거닐고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 어지러워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깨어서는 모두 같이 즐기고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影結無情遊 (영결무정유) 길이 무정한 놀음 저들과 맺어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將進酒 장진주 - 李 白 이 백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奔流到海不復廻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로 가 다시 못 옴을又不見 (우불견)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고당명경에 비친 백발의 슬픔朝如靑絲暮如雪 (조여청사모여설)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었다네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기쁨이 있으면 마음껏 즐겨야지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려나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재능은 쓰여질 날 있을 테고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부래) 재물은 다 써져도 다시 돌아올 것을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양은 삶고 소는 저며 즐겁게 놀아보세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술을 마시려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岑夫子,丹丘生 (잠부자,단구생) 잠부자, 그리고 단구생이여將進酒,君莫停 (장진주,군막정) 술을 마시게, 잔을 쉬지 마시게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하리니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모쪼록 내 노래를 들어주시게鍾鼎玉帛不足貴 (종정옥백부족귀) 보배니 부귀가 무어 귀한가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그저 마냥 취해 깨고 싶지 않을 뿐古來賢達皆寂莫 (고래현달개적막) 옛부터 현자 달인이 杜審言)은 조부이다.*생애: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20대 전반은 장쑤〔江蘇〕·저장〔浙江〕에서,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허난〔河南〕·산둥〔山東〕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李白)·고적(高適)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玄宗)에게 부(賦)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755년 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적군(賊軍)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펑샹〔鳳翔;장안 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저우〔華州;장안 서쪽〕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간쑤〔甘肅〕의 친저우〔秦州:天水市〕로 갔다. 친저우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고 다시 남쪽의 퉁쿠〔同谷:成縣〕로 옮기고, 그 해 말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외의 환화시〔浣花溪〕 언저리에 환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살았다. 지방 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쓰촨의 재주(梓州)·낭주(낭州)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 엄무(嚴武)의 막부(幕府)에 절도사 참모로 출사해, 그의 추천으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쓰촨 동쪽 끝의 쿠이저우〔夔州;奉節縣〕에 이르러 강 연안의 서각(西閣)에 거주했는데, 얼마 뒤 도독(都督) 백무림(栢茂林)의 도움으로 교외의 양서(양西)·동둔(東屯)에서 관전(官田)을 빌려 농원을 경영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쓰강에 배를 선의(善意)로 향한다. 제 4 기는 죽기 전인 59세까지의 시기로서, 특히 쿠이저우에 머문 2년 동안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많이 썼다. 《추흥팔수(秋興八首)》 《영회고적오수(詠懷古跡五首)》 등 칠언율시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많은 모순을 포함하면서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새로운 철학을 확립한 진지함과 따스함이 스며 있다.*두시(杜詩)의 특색: 두보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실성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성실해야만 한다는 중국문학정신은, 두보의 시 속에서도 아주 활발히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실이 만들어 낸 우수를 근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재를 취해, 인간의 생활상과 심리, 자연풍경 속에서 그 때까지 다른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널리 발굴하여 자유자재로 읊었으며, 표현에 정성을 기울였다. 《경(京)에서 봉선현(奉先縣)으로 부임할 때의 영회(詠懷), 오백자》 《북정(北征)》의 2대 걸작을 포함한 장편 고체(古體)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해 시로 지은 역사라는 의미에서 라 일컬어지며, 단시(短詩)가 정형(定型)인 금체(今體)에서는 특히 율시를 잘 지었으며, 엄격한 형식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읊어 이 시형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육조(六朝), 당 초기의 시가 정신을 상실한 장식으로 떨어지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데 비해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되찾으면서도 그것을 성숙한 기교로 표현해 중국 시사 상 한 획을 그었다.*후대의 영향: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9세기 당나라 사람 원진(元진)으로, 그는 두보를 위해 묘지명을 썼다. 백거이(白居易)도 두보의 숭배자로, 그의 사회비판적 시는 두보에게 배운 것이다. 두보에 대한 평가가 시단에서 확정된 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의 칭송에 의해서이다. 시성(詩聖)이란 말도 이즈음 생긴 듯하며, 그 뒤 계속해서 중국시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祖述)은 사라졌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