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교리아우구스티누스가 힙포의 주교가 된 후 그의 35년 여생은 향후 서방교회 발전에 큰 의미를 지니는 수많은 논쟁으로 점철된다. 그 중 420년대에 불거져 나온 펠라기우스 논쟁은 인간의 본성, 죄, 은총 등의 난제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브리타니아의 수도승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선하고 자율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구원을 얻으려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지시하는 존재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을 완전히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오도한다고 비판했다.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 위에 죄라는 관계를 설정, 강조하여 인간의 완전하고 선한 자유의지를 주장한 펠라기우스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은 흠 없이 창조되었으나 아담으로 인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본성은 인간에게 내재하여 자유의지를 제약하고 죄악을 향한 내재적 경향을 띤 존재로 만든다. 타락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펠라기우스나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존재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죄악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자유의지로 자행된 것이기 때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죄에 묶여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을 이러한 ‘죄의 사슬’에 묶인 채로 내버려두면 결코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해결책은 외부로부터 와야 한다. 이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들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딜레마에 개입하신다.이러한 구원의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인간의 칭의의 근거는 하나님이 베푼 은총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공적 때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은 구원을 베푸시고 받아 마땅한 정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인간 본성은 구원 받는다. 즉,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gratis) 주어진 것이며 때문에 은총(gratia)라 부르는 것이다.
장준하의 언론운동1. 들어가는 말시대가 혼란할수록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그것을 체재 내에서 사용하는 지식인 뿐 아니라 체제 자체를 통찰하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장준하는 1950년대에서 70년대 중반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 충실하게 이런 역할을 감당한 언론인이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에서 그가 보이는 일련의 언론 투쟁은 꽤 일관성을 가지는데 이는 그가 확고한 내적 잣대에 의해 체제를 비판해 왔음을 암시한다.장준하의 경우 생전의 행적이 비교적 뚜렷하여 그 객관성이 인정되기 어렵지 않을 뿐 아니라 사후 10년만인 1985년에 그의 행적과 글들을 비교적 잘 정리한 문집이 출간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업적이나 생각을 객관성 있게 조명할 수 있는 조건들이 상당히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들에 따르면 장준하의 생애를 독립운동 시기, 해방 공간에서의 처신, 사상계를 통한 언론활동 시기, 사상계 폐간 이후 정치 운동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고에서는 독립운동시기부터 박정희 군부 독재시절에 걸친 장준하의 언론 활동을 살펴보되 1967년 사상계 폐간 이후의 정치활동 역시 언론활동의 연장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독립운동시기, 해방공간과 이승만 자유당 정권 시기, 박정희 정권하 언론활동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또한 각 정권의 정책과 현안들에 대한 『사상계』의 반응을 통해 장준하의 구체적인 언론 투쟁 행적을 고찰하며 체제 외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 장준하를 조명 해보려 한다.2.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등불』,『제단』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목사 아버지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신성 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안소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일본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장준하는 일본군 제 42부대에 배속되며 얼마 후 중국 서주로 전속된다. 여기에서 탈출하여 6천리를 이속이 이 때 생겨나게 된다. )또한 함석헌이 『사상계』58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글은 필화 사건을 일으키면서 사상계의 인기가 더욱 치솟게 되고 이 8월호는 반품이 단 한 권도 없는 진귀본이 된다.)3.2.2 장준하의 백지 권두언사상계의 명성이 높아 가는데는 장준하가 쓴 ‘권두언’(卷頭言)의 역할도 컸다. 권두언은 『사상계』의 사시(社是)가 배어있는 명문으로 유명했으며 주간이나 혹은 편집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쓰기도 했으나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는 발행인 장존하가 직접 챙겨서 쓰고 그떄는 말미에 ‘장준하’ 석자가 기명되어 나갔다.『사상계』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권운동의 본격 정론지가 되고부터는 권두언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 나간 1958년 8월호의 권두언은 장준하의 기명으로 된 ‘거족적인 각성을 촉구한다’였으며 수사관은 두 글이 유사함을 들어 장준하도 함석헌과 같이 구속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결국 구속되지 않는다.같은 해 12월 24일 자유당 정권이 무술 경위 3백명을 국회의사당에 돌입시켜 야당 의원을 끌어내 5시간 동안 감금한 후 국가보안법을 개악(改惡)하여 통과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장준하는 이 ‘보안법 파동’을 보고 1959년 2월호를 내면서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달린 무언의 권두언이었으며 이는 백언(百言)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해주었다. 그 반향은 국외까지 전파되어 엄청난 상징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 쯤 이르자 자유당 정부는 『사상계』의 엄청난 소구력과 파급력으로 인해 ‘대정부 포격용 포탄’쯤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며 이것은 오히려 『사상계』에 더 큰 힘을 실어주게 된다.3.3 자유당 권력 말기 증상과『사상계』3.3.1 자유당의 권력 말기 증상50년대 말 자유당 정권은 소위 권력 말기 증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문단의 어S)에 근무하던 곽소진을 통하여 미 공보원의 지원을 받아 『사상계』 발간 경비를 보완했고 또 사상문고 100권을 완간했다. 사상문고는 거의가 번역물로 세계사상 철학의 수입 통로가 되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것과 반공 이념을 구가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결국 반공 친미적인 내용의 것들이었다. 또 『사상계』는 미국 주간지 『타임』과 『라이프』의 총판을 맡고 있었다. ‘타임 보이’ ‘타임 걸’의 유행어에서 상징되듯이 최고의 지식인 행세를 하려면 『사상계』는 물론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를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 미국 정기간행물에는 선진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미국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사상계 그룹은 『사상계』와 사상계가 총판하는 『타임』지를 통해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상계』는 민주의식을 신장시키고 저항을 충동하며 4?19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기여했으나 한편 자유민주주의적 단계에 그치게 하고, 또 반미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이 외에 사상계는 57년 12월호를 친일파였던 최남선의 사망을 애도하며 ‘선생의 영전에 드리고자’ 최남선 특집호를 꾸민다. 광복군 출신의 장준하가 후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를 그토록 심하게 배척한 것에 비해 육당에 대한 인식은 지나치리만큼 관대하다. 이 특집호에 장준하는 「권두언: 육당 최남선 선생님을 애도함」을 쓰는데 이 역시 사상계의 친미?반공 노선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분명 장준하와 사상계의 대미 인식에는 한계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한 『사상계』의 동조 부분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를 언론인 장준하의 ‘옥의 티’ 쯤으로 보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3.4.2 1950년대 신생국가 한국의 지식사회위에서 언급하였듯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우리 사회는 지식인 계층이 진공 상태로 있던 시기다. 6?25로 희생된 지식인들이 있었고, 휴전과 함께던 기간은 매우 짧았으며 일을 막 추진하려 하는 1961년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로 인해 국토건설본부는 고스란히 ‘군사혁명위원회’에 접수된다.4.2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의 언론정책4.2.1 5?16에 대한 『사상계』의 반응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장준하는 『사상계』1961년 6월호 권두언)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를 통해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 혁명이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는 주장을 펴면서 사실상 쿠데타를 지지했다. 또한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 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라면서 군사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일단 인정하면서 조속한 민정이양 공약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이는 5?16 이후 제일 먼저 된서리를 맞은 것이 언론사들이 재빨리 대세를 파악한 후 드러내놓고 5?16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발언을 쏟아놓았던 것)에 비하면 그 표현의 완곡함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용기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그러나 장준하는 쿠데타의 주역들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파티를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이 대부분 군대 내 소회된 비주류 세력이어서 미국 현지 관계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통인 장준하가 사상계사의 이름으로 7월 2일 창경원 파티를 통해 양측 관계 인사들을 초대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이러한 장준하의 쿠데타 지지는 그의 박정희에 대한 뿌리깊은 경멸)을 감안할 때 의외의 태도였음에 틀림없다. 임대식은 “장준하의 쿠데타 인정은 5?16 군사 쿠데타가 친미 반공 체제에 배치되16 세력은 장준하를 부정축재 처리위원회로 연행한다. 민주당 정부 시절 장준하가 국토건설사업본부에 기획부장으로 참여하기 전 재무부장관 김영선으로부터 『사상계』가 안고 있던 빚 3천만환의 정리를 위한 보조금 명목으로 받은 1천만환 때문이다. 장준하는 민주당 정권 몰락 후 이 1천만환을 갚기 위해 신촌 자택을 김영선에게 내 주고 자신은 전셋집으로 나앉았는데 군부측은 이를 알고도 그를 부패 언론인으로 낙인하고 이 때문에 ‘정치정화법’에 걸려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한다.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이 없었던 장준하로서는 이 법에 걸리 것은 별 상관이 없었겠으나 부패 언론인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정치정화법에 묶였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사상계』 독자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잡지의 판매부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부패언론인’ 이것이야말로 언론인 장준하에게 가장 치욕적인 멍에였을 것이며 『사상계』 편집 방향이 정치적 성향으로 급선회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1962년 7월호에 「군정의 영원한 종말을 위하여」라는 권두언을 싣고 게다가 특집을 꾸며져 나갔다. 이에 대한 군사 정부의 대응은 음성적으로 서점 판매를 방해하는 ‘반품작전’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고차원적인 수법으로, 지방의 서적상들로 하여금 계속 본사에 주문하게 하여 책을 도매상 창고에 쌓아놓고 풀지 않았다가 다음 호가 나오면 반품하여 본사를 일거에 고사시키려는 기발한 수법이었다. 『사상계』에 가한 군사정부의 이런 식의 비열하고 조용한 탄압은 1965년까지 만 3년간 계속되고 사상계사는 경영난에 빠지게 된다.이 기상천외한 반품작전과 싸운 1962년을 두고 장준하는 ‘무원의 고군(孤軍)이 대적을 상대로 피투성이의 혈전을 한 해였다’고 표현했다. 이 해에 그는 전혀 뜻밖의 원군을 맞게 되는데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화 부문’을 한국인 최초로 받게 된 것이다. 장준하가 이 상을 받게 되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군사정부로부터 받았던 부패언론인이라는 오명을 씻고 그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사상계』 독자들의
(정서 심리학)「자식 살해 충동을 가진 정신질환자들의 성별에 따른 임상적 특징」1.들어가기지난 20일 5살 아이가 영양실조로 숨진 사건이 각 방송사의 뉴스마다 크게 보도되었다. 30대 영세민 부부의 5살 난 아들이 사회의 무관심에 굶주려 영양실조 등으로 숨지고, 2살 난 딸은 아사 직전에 구조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유아의 사체가 장롱 안에서 발견된 것인데 아이가 앓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장롱 안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것을 사회의 무관심과 행정기관의 책임소홀로 몰고 가는 분위기이지만, 모든 30대 영세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장롱 안에 넣어두고 방치하지는 않는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부인의 경우 정신질환자이고 남편은 가정적, 경제적 상황에 의한 스트레스가 매우 컸던 것으로 사료된다.여기서는 한국 정신병리진단 분류학회에서 발간된 『정신병리학 』제 6권 2호에 실린 「자식살해 충동을 가진 정신 질환자들의 성별에 따른 임상적 특징」(이현정, 조성연, 이세종, 박희석, 1997) 을 요약하면서 자식을 살해하는 부모들의 심리적, 임상적 특징에 대해 개괄하고자 한다.2.비속살해범들의 임상적 특징- 일반론자식 살해란 살인자가 희생자의 부모일 경우를 일컫는다. 국내에서 자식 살해범이 정신감정을 받게 된 경우는 전체 살인범의 25%를 차지하며 이들의 1/3은 후에 정신분열병으로 판명되었다. 신화, 인류학 그리고 문학 속의 자식 살해에 관한 고찰에서 보면 어머니가 자신의 자식에 대해 공격 감정을 갖는 것은 Media Complex라 하고, Stern은 이를 남편에 대한 복수로서 자기 자식에 대해 살해 충동을 느끼는 것이라 재정의 하였다. 거의 모든 어머니에게서 어느 정도의 자식 살해 충동이 있으며, 강박적인 자식 살해 충동 때문에 정신과를 찾는 어머니도 적지 않다고 한다.Resnick은 자식 살해를 동기에 따라 분류하였는데 이타적 살해, 사고에 의한 자식 살해, 배우자에 대한 자식 살해로 분류하였고 이타적 자식 살해는 다시 자신의 자살과 연관되어 자식이 혼자 남아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저지르는 경우와 진실 혹은 가상의 고통을 받는 있는 자식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경우로 분류하였다. 자식살해의 동기에 있어서 특이한 점을 이타적 살해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Scott은 자식 살해를 살해 충동의 근원에 따라 학대자, 정신 이상자, 신생아 살해자, 복수 살해자, 원치 않는 아이 살해자, 자비적 살해자로 나누기도 했다.Bender에 따르면 자식 살해란, 자식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살 충동을 가진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일부로 여겨 자신과 자식을 동일시한 결과이므로 자살 행위의 연장이며, 처음에는 자신만 자살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나 차차 자기와 아이를 함께 죽이는 것으로 발전해서 종국에는 자살은 실패하고 아이만 죽이는 경우도 많다.자식 살해는 자식 학대의 극단적인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식 학대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주정의존, 성적 문란, 불안정한 결혼 생활, 소소한 범죄 행각 등이 자주 발견되며 자식 학대는 사회 경제적 지위에 무관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Kempe, Silverman 등에 따르면 학대받고 자란 부모들은 자식을 양육하며 어려움을 느낄 때 자신의 유아기 경험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다시 떠오르게 되어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갈등이 재현된다. 즉, 그들은 냉담하고, 거부적이고, 적개심에 가득 찬 그들의 부모와는 다르려는 강렬한 소망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모들과 동일시가 일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식을 학대한다.자식을 살해한 어머니의 경우 남편, 애인과의 불화가 잦고 비좁거나 곧 쫓겨나게 될 주거 환경, 경제적 고통에 처한 경우가 많으며 어린 나이에 출산한 경우 또한 많다. 이 여성들은 자연히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d'Orban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41%가 과거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고, 20%는 범법 경력이 있으며 이들의 가족력에서 정신질환 발현율이 20%, 범법자 존재율은 9%나 된다고 한다.Meyerson은 자식을 살해한 후 범행에 대한 기억은 불완전한 경우가 많아 기억을 되살리려면 최면적 기법이 필요하고, 그들의 해리 에피소드는 과거 거부적이던 부모에 대한 적개심, 격노의 느낌, 부모와 자식과의 동일시, 자식살해 행의 등을 방어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정신작용이라고 하였다.정신분열병 환자의 자식 살해를 보면 피살자와 살인자는 동성인 경우가 많다고 하고 피살자와 그 형제, 자매들은 피살 전 오랫동안 심신 양면으로 학대를 받아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신분열병 환자라고 해서 자식 살해율이 높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과거력에 괴벽, 알코올 중독, 마약상습, 범법 행위가 많고 정신병이나 자살 미수는 적다.Harder는 「The Psychopathology of infanticide」에서 남성 비속살해범들은 어린 시절에 신체적, 성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거나 부모와의 이별, 부모의 사망과 같은 발달력상의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인기에 이르러서는 가난, 사회적 고립, 가족 혹은 사회적 지지망의 결핍, 물질남용을 포함한 충동적 행동 등의 사회적 요소를 가지며, 정신질환자이든 아니든 물질 남용이 비속 살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보았다. 즉, 남성 비속살해범의 경우 주정 의존, 충동성이 주된 요소이며 이러한 사람들은 충동적이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낮아 아이의 우연한 행동을 위협이나 거부로 오인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우울증에 걸린 살해범의 경우 정신과적 질환이 없는 대조군에 비해 더 나이가 많으며 대다수는 법적으로 기혼이고, 자살 기도 전력이 많으며 살해를 기도한 후에는 스스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우울증을 적절하게 치료받은 후에는 자신의 질병에 대한 병식을 갖게 되어 이후에 우울 에피소드가 오면 조기에 치료 받는 경향이 있어 또다른 자식 살해의 위험은 오히려 낮다는 보고도 있다.Resnick은 「Child Murder by Parents :A Psychiatric review of filicide」에서 자식 살해자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현저하게 많고 살해자의 대부분이 결혼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르며 생후 6개월까지의 아이들이 가장 많은 피해 연령대임을 보고하였다. 이 시기는 어머니의 산후 우울증이 잘 발병하는 시기와 일치하며 아이가 어릴수록 자살하고자 하는 어머니는 아이를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소유물로 인식하여 아이를 살해하는 경향이 높다. 희생자의 성별은 여아가 조금 더 많으나 통계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하며 두부 외상, 질식, 익사 등이 살인의 가장 흔한 방법이다. 아버지가 살해하는 경우 더 치명적인 방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칼로 찌른다거나, 구타 등의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이에 비해 어머니는 익사시킨다든지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방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에는 정신증 진단을 받은 경우가 많으나 아버지의 경우에는 정신증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살인범의 60%는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2배가량 많다고 한다. 자식을 살해한 어머니의 40%가 근친상간의 기왕력이 있으며 살해의 원인이 이타적인 이유, 혹은 급성 정신병적 증상에 의한 것이면 은폐시도를 거의 하지 않으나 피살자가 원치 않는 아이였거나, 사고에 의한 살해의 경우에는 은폐시도를 한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자식을 살해하는 아버지의 44%는 정신증 환자라고 했다.Kaplun과 Reich는 희생자는 남아가 여아보다 15% 더 많고 10세 이상이 되면 남아가 여아의 2배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살해범 중 10%를 차지하는 생부에 비해 생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생모가 죽이는 경우 정부와 살해를 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을 살해한 생부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는데 자식을 살해한 6명의 복역수에 대해 조사하니 그들 중 4명은 어려서 자주 매질하는 한쪽 부모와 이를 잠자코 보기만 하는 다른 부모밑에서 성장했다는 보고도 있다.국내에 자식 학대에 대한 논문은 많이 나와 있으나 자식 살해에 관한 논문은 거의 없고 범죄통계 상에서도 존속 살인(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은 따로 구분하나 비속 살인(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경우)은 일반 살인과 함께 취급하므로 전체적인 통계조차 나와 있지 않다.3.「자식살해 충동을 가진 정신 질환자들의 성별에 따른 임상적 특징」-논문 요약3.1 연구방법1990년 1월 일 이후 국립 감호 정신병원에 비속 살해, 비속 살인 미수로 입소하게 된 남, 녀 환자 52명(남자 23명, 여자 29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대상 환자들의 인구사회학적 특징 및 개인력을 설문지, 입원기록, 정신 감정서, 판결문 등을 참조하여 조사하였고 미비한 사항은 정신과 의사 1이이 면담을 하여 내용을 보충하였다. 그 외 정신 감정시 시행한 간이 정신 진단 검사 결과로 두 집단을 비교하였다.
에도시대의 도시 문화와 우키요에-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중심으로-1. 들어가기1603년 도쿠가와 쇼군의 대본영(大本營)으로서의 에도 형성은 일본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제 1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선택했을 때만 해도 에도의 규모는 성을 둘러싼 요새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8세기가 시작될 무렵 과거의 낙후 지역이었던 이곳은 백만 인구의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으며, 전통적으로 천황의 거주지이자 문화적인 심장부였던 교토와 경쟁하는 단계에 이른다.에도 시대 일본 전역은 ‘팍스 도쿠가와(Pax Tokugawa))’로 인해 어느 때보다 평화와 안정을 구가한다. 도쿠가와 쇼군들은 자신들의 지배 정당성을 주장하고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많은 수단들을 고안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사무라이를 정점으로 그 아래 농민, 직인, 상인을 두는 공식적인 계급 제도의 확립이다. 이 제도 안에서 상인은 사회에 대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했으나 조닌이라 불리는 이들은 에도의 도시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에도 시대의 도시 성장은 부유한 조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에도라는 도시는 막대한 부의 축적과 함께 다양하고 독창적인 도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에도는 18세기 중엽 다색 목판화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여 괄목할만한 문화의 자율성을 갖추게 되며 문화적인 면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교토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에도의 문화를 이루어 낸다. 판화가 에도에서 생산된 유일한 미술 형태는 아니었으나 역시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판화였다. 계절에 따른 에도 명소의 매력과 유녀(游女), 가부키 배우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한 판화는 일반적으로 ‘우키요에(浮世繪)’로 알려졌으며 에도 미술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우키요에에는 도시민들의 정서와 관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역동적인 에도의 도시문화와 관련하여 우키요에를 살펴보고, 특히 풍경을 소재로 한 목판화로 대중의 인기를 끈 히로시게의 작품에 대해 개인적인 감에게만 제한되어 있던 지식과 물자, 여가 활동들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들은 도시가 제공하는 경제적인 기회를 이유로 도시로 몰려들었다.에도를 바쿠후의 행정적, 정치적 중심지로 선택한 쇼군은 자신들의 지배 이념을 지지하는 미술을 허용하고 후원함으로써 거대하고 다양한 인구에 대한 문화적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신분에 따른 차별성을 유지하려 했던 쇼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제도의 신분을 초월한 활동들이 번성했다. 이런 사회적인 융합에 의해 형성된 창조적인 에너지는 목판화를 통해 가장 생생하게 표현된다. 소득과 여가의 증가, 그리고 교육의 진전은 대부분의 도시민들로 하여금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 문화적 활동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도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오락거리 가운데 가부키 극장과 유곽이 가장 인기를 모았다. 봉건적 권력에 의해 보호되었던 유교적 논리는 도덕성을 고양하지 못하거나 교훈적인 가치가 없는 오락에 참여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였다. 쇼군도 대중들이 오락에 탐닉하는 것을 정기적으로 훈계했으며 특히 실없는 상상이나 성적인 욕구를 촉발하는 활동은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해 다양한 정도의 경중을 두어 엄격히 처벌했다.바쿠후는 유녀들과 배우들을 특별한 주의와 감독이 필요한 사회의 필요악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으나 두 부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미술가들에게 유곽과 가까이에 있던 가부키 극장은 많은 영감의 원천이자 미술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대도시들은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명성을 지닌 유곽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도의 요시와라(吉原)가 가장 유명했다. 매력적이고 유능한 유녀들은 당시 일반인들의 교양과 의상, 그리고 머리 모양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때로는 유곽 밖의 일반 미인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특히 에도는 1634 쇼군에 의해 실시된 산킨코타이(參勤交代)로 인해 유곽이 발달한다. 이는 나라의 모든 다이묘들로 하여금 에도에 거하며 쇼군 보좌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가부키는 유곽과 마찬가지로 극장 건립에 바쿠후의 허가가 필요했으며 세세하게 규제되었다. 에도의 극장 수는 각각 네 개로 제한되었으며 교토와 오사카는 비극적인 가부키극을 주로 하는데 반해, 에도는 용맹한 무사들의 위업을 가공적으로 극화한 가부키가 전문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현대 영화 팬들처럼 가부키 배우들에게 열광했다.2.2 우키요에판화가들은 유곽의 미인들과 가부키 배우들의 매력을 판화로 제작했다. 처음에 ‘우키요’라는 말은 최신 유행을 뜻하다가 수십년이 지나면서 이 외에 성적이거나 외설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우키요에와 관련해 형성된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사회, 문화적 가치는 바쿠후에 의해 보호되고 고착되었던 신분제도적 사회제도를 위협하였다. 부유한 상인들와 조닌들은 특히 우키요에의 미적인 측면에 매료되었는데 이는 우키요에가 이들의 정치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전략적인 대응이 되었기 때문이다.에도미술의 중심축은 삽화가 들어간 서적들과 목판화였는데 발행부수와 다양성 인기도 그리고 사회 경제적인 중요성에서 다른 매체들을 능가했다. 다른 어떤 매체들보다 에도 문화의 특징적인 모습, 즉 화려함과 새로움, 재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1657년 에도 대화재 이후 도시민들은 일상의 실재적인 필요성에 맞추어 자신들의 생활환경을 재건한다. 미술가들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재건에 참여하는데 목판으로 인쇄된 서적과 낱장 판화는 주요한 도구였다. 이는 에도의 문화 정체성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문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성장에 적절히 대응해갔다. 판화는 신속하고 저렴하며 대량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최신 유행이나 정치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도록 했다.목판화는 다색 판화의 등장으로 최고의 성숙기에 도달하게 된다. 1765년부터 1801년까지 우키요에의 주요 테마는 유곽의 미녀들과 가부키 배우들이었다. 간세이 연간(1789-1801)의 개혁으로 출판업계는 일시적인 타격을 받는다. 주로 무사와 조닌 계급의 사치를 억제하고 연속된 기근과 자연 재해의 발생에 따른 쌀값 폭으나 어떤 사람들은 정부의 법령을 빠져 나가는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 낸다. 또한 이러한 규제는 다색판화의 주제면에서 새로우면서도 위험하지 않은 영역-대표적으로 풍경-의 표현을 촉진시켰다.2.3 19세기의 다색판화18세기 말에 판화업계에 가해진 압력과 더불어 19세기가 열리는 초창 10년에는 사업과 여가를 목적으로 한 여행이 모든 계층 사이에서 일반화 되었다. 산야의 사찰과 신사와 경승지를 순례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으나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는 동부 지역의 거대한 도시 에도였다. 원래 에도의 출판가들은 가부키 극장이 밀집한 니혼바시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에도로 관광객이 몰림에 따라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에도를 떠나 에도와 교토를 잇는2대 도로이던 도카이도(東海道)와 기소카이도(木會街道)를 따라 외곽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에도의 독특한 상품으로 여겨져 왔던 목판화는 이 시대에 들어 에도 방문에 대한 비싸지 않은 기념품으로서 점점 시장을 넓혀갔다).에도의 출판가들은 이러한 고객들을 위해 가부키 극장과 요시와라 유곽에 관해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판화들을 찍어내었다. 또한 먼 지역의 경승지 뿐 아니라 도시의 주요 명소를 낱장 판화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유녀와 배우들을 묘사한 기존의 판화들은 대중들에게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지만, 이와 같이 새로운 소재의 판화들도 융성하게 된다.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은 그를 살아있는 동안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었으며 이 연작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다른 미술가들로 하여금 풍경화 영역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자극했다. 이 시대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풍경목판가로는 단연 히로시게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호쿠사이와는 다른 정서를 촉발하는 그림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3.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그의 작품3.1 우타가와 히로시게우타가와 히로시게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미술가였다. 에도에서 세습적인 직업이었던 일종의 소방수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하급무사 계급의 가문 출신이었던 히로시게는 가노파 그림을 공게는 유명한 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1802년과 1822년 사이에 매년 연재물로 발행되던 소설인 『도카이도추히자쿠리게』와 1825년 처음으로 도카이도에서 시작된 한 가부키를 배경으로 한다. 히로시게의 이 연작은 큰 성공을 거두고 세 개의 번안으로 다시 제작된다.히로시게는 말년에 야심찬 과 같은 지형적인 성격이 강화된 판화를 제작했다. 일본이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하는 초창기였던 1856년에서 1859년까지 연작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뛰어난 구성 효과와 색채의 표현을 통해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미술가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히로시게는 자신의 연작에서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맥락으로 표현하며 신사와 사찬, 식당, 극장과 가게, 강과 운하 같은 일상의 모습을 담아낸다. 또한 히로시게는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뛰어난 색채를 이용하여 각 화면마다 신선함과 함께 서정성을 부여했다. 호쿠사이가 후지산 연작을 통해 끼친 영향력과 같이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했던 히로시게는 에도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3.2 히로시게의 작품그림 .‘불꽃놀이’야시로 유키오는 『일본미술의 특질』2편 2장 「국토의 자연」에서 일본의 자연과 미술을 관련시켜 말하며 우키요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야시로는 미술과 관련된 일본 자연의 특색을 태양의 은총으로 파악한다. 그는 ‘태양이 항상 쾌적한 광선을 내며 빛나고 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즐겁게 살아간다. 일본은 더할 수 없이 밝고 투명한 국토이며 일본문화는 바로 일조 日照의 문화이다’ 라고 주장한다. 우키요에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것인데, 일본 미술은 특히 서양인의 눈에는 환한 밝음으로 가득 차 있고 본질적으로 그림자조차 없는 세계로 보이며 그 곳에는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낙천적인 자연애의 감정과 기분이 넘쳐 있다는 것이다.히로시게의 작품은 평면성(우키요에의 전반적인 특징인)과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 대담한 디자인 등이 특징적이라고 평이다)
아담의 죄는 인류에게 영향력을 가지는가?-원죄의 교리에 대한 고찰-Ⅰ. 들어가기420년대에 불거져 나온 펠라기우스 논쟁은 인간의 본성, 죄, 은총 등의 난제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브리타니아의 수도승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선하고 자율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구원을 얻으려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지시하는 존재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을 완전히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오도한다고 비판했다.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 위에 죄라는 관계를 설정, 강조하여 인간의 완전하고 선한 자유의지를 주장한 펠라기우스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은 흠 없이 창조되었으나 아담으로 인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본성은 인간에게 내재하여 자유의지를 제약하고 죄악을 향한 내재적 경향을 띤 존재로 만든다. 타락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존재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죄악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자유의지로 자행된 것이기 때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죄에 묶여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현재 주류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기본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나로서는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고 하는 근거가 내심 미심쩍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모든 인간 안에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사망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니 부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 아담의 죄가 인류와 연루된 방식, 각 개인에게 원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한다.Ⅱ.본론1. 죄란 무엇인가?일상적으로 말하는 죄는 흔히 ‘도덕’이라고 부르는 인류의 축척된 경험에 위배되는 것을 일컫는 듯 하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은 이와 명백히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중심에는 반사회성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포한 율법의 엄위성에 도전하는 자에게 진노한다. 소요리 문답 제 24문항에 따르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부족하거나 혹 어기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비록 성경의 말씀은 아니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충실한 것이라 여겨진다.죄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이르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육신과 영의 싸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악하다고 한 ‘육신’은 인간의 실제적인 육체 혹은 육체적 본성이나 동물적 본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 전체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는 우리 속에 있는 야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사람이며 전존재와 결부된 문제이다.창세기에는 인간 최초의 범죄에 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넘어 상당히 지적이며 영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그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2.죄는 인간 본성의 필수적 부분인가?예수는 그의 가르침에서 인간이 죄 가운데서 잃어버린바 되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은 인간 본성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우선 그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인간이신 예수 자신이 인간의 본성은 가지나 죄가 없음을 보이신다. 죄는 인간 분성에 필연적으로 속한 것이 아니다.3.인간은 왜 죄인이 되었는가?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선포한다. 만일 죄가 인간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인간 속에 들어와서 한결같이 지배하는가?성경은 아담의 후손이 보편적인 죄성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 연루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담의 행동이 우리 한 사람의 한 사람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행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행한 것이라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나는 일생에 많은 일들을 행했지만 에덴 동산의 선악과는 먹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명백히 다른 존재인 아담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각 개인이 아담의 죄와 연루되는 방식에 대하여 소요리 문답 제 16문항에는 “그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후손을 위하여 아담과 맺은 언약이므로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그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그 안에서 범죄하였으며,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혈통의 대표자인 아담과 생명의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로마서 5장에도 잘 나타나 있다.(“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듯 하다.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책을 질 수 있는가. 누군가가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 전에 아담이 먼 옛날 행한 일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해 보인다. 하나님은 죄를 부과하는 분이신가.그러나 이 원리는 선한 사람들이 먼 옛날 누군가가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 악자로 취급 받아 자신들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벌 자체에는 필연적으로 악함이 포함되어 있다. 아담의 죄에 대한 형벌은 받는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이 또한 악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의 대가로 ‘죽음’을 언급하셨다. 이는 육체적인 죽음 훨씬 이상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안에는 선한 것들에 대한 영혼의 죽음이 포함된다. 우리의 온 성품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맞는 것이다. 이 상태 자체가 죄이다.또 한 가지,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책을 지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은 없으며 복음은 기만과 사기가 된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책을 지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책을 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4.인간은 자신의 부패한 본성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 원죄의 교리.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모든 개개의 범죄들을 야기하는 본성의 부패함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이것이 원죄의 교리이다. 펠라기우스는 이 교리에 반박하여 인간은 결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만일 사람에게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면 (펠라기우스는 이와 반대로 주장했다)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만일 사람들이 부패함을 본성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 부패함은 죄가 아니다. 죄란 결정의 능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담의 죄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아담에 의해 전가된 죄는 인간의 선택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며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