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명-≫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학과- x年-학번- -이름-여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현대 사회와 기독교' 수업을 통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이란 발표 논문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같은 부분을 몇 번씩 읽기도 하고 꽤 긴 시간동안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직도 막연하고 어렵게만 다가오는걸 보면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기엔 내가 너무 부족한 모양이다. 혹은 그 '죽음'이란 것이 아직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거나...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적 죽음을 접했던 기억은 있는 듯하다. 바로 할머니의 죽음. 내가 8살이 되던 해에 참으로 자상하셨던, 또 나를 참 예뻐하셨던 할머니께서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지금에서야 그 때 할머니께선 어떤 기분이셨을까 생각해본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미소를 짓고 계신다.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실 수 있었을까..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버리고 가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으셨을까? 아무튼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죽음'이다. 이렇게 그 날을 떠올리다보니 어렴풋이 목이 쉬도록 울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죽음'에 대해 알기나 하고 울었는지.. 더 이상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던 것 같다.논문 중에 "우리 인간은 어느 때나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는 내용과,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의미있는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들임에 틀림없다. 우리 삶의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우린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 위험들은 때때로 죽음을 가져오므로 우리는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이 주는 행복을 찾게 되고, 죽음 이전의 삶을 충실하게 채우고자 노력한다.하지만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현실적인 측면이 조금만 더해져도 그 견해는 달라진다. 나 역시,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느낌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가 당장 죽는다고 생각해보면 그리 담담해질 수는 없을 것 같다.또 논문 중에 "삶에 있어서 돈이나 사회적 지위 등 중요한 것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과 종교적 신앙 내지는 신념체계의 확보가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말이 있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종교에 의지하려 하셨던 것과 결부시켜 어느 정도 공감한다. 살아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위안이 되어 주지만 죽어서는 그들의 역할을 대신해 줄 무언가가 필요할테니 말이다.종교적 위안을 필요로만 하는 '죽음'이란 것은 참으로 쓸쓸한 것임에는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역시 쓸쓸하게 가셨을 할머니도 떠올려보니 가슴이 쓰라려온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4525624 이수정이 책은 농민계몽에의 차원에서 쓰여진 민화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글들은 민중 언어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고, 작가의 시각이 농민과 유사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발'이라는 신체 중에서 가장 하찮은 부위를 위한 구두, 그 구두를 만드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모두 인간애와 도덕적 삶에 대한 글들이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성서를 단순화하여 감동을 도모하고 있어 도덕적이면서도 상당히 기독교적으로 이루어져있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와 천사의 교제를 통해 참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참다운 삶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에서 성실한 구두장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어려운 이웃에게 베푼 사랑을 기독교적으로 풀어내었다. 또『사람에게 과연 땅이 많이 필요한가』역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닌 '사랑'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하게 되리라』에서 작은 다툼이 큰 범죄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웃에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머슴 예멜리얀과 빈 북』은 사랑하는 아내를 권위주의의 왕으로부터 지키려 노력하는 머슴이 결국 왕의 선한 모습을 끌어내는 내용을 통해 꽤 함축적으로 사랑의 의미를 전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멜리얀의 이야기는 완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토론을 위해 조사한 인터넷 자료 중에 책의 종교적으로 길들여져 온 '아가페적 사랑'과 사회적으로 훈련되어온 '도덕적 선행'을 지적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정'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조화의 영원성보다 들꽃의 순수성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내용은 책의 주제를 살리면서 현실에 대판 비판과 책의 아쉬운 점을 날카롭게 집어낸 내용이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이 많았다.하지만 이 책은 쉽고도 어려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바로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담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지금까지 나는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또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손자병법과 전략경영4525624 이수정오래된 책이라 따분할 것이라는 『손자병법』에 대한 선입견은 책의 첫 장을 넘김과 동시에 잊었다. 모르는 한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료되어, 읽을수록 점점 더 깊이 책에 빠져들었다. 여태 잘 몰랐던 '손자'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면서…『손자병법』은 본래 병법서라 표면적으로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전술들이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부터 비롯된 그 전략들은 모든 인간관계에 걸쳐 응용할 수 있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최상의 전법은 사전에 적의 의도를 간파하여 막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동맹 관계를 깨뜨려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교전,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선택하는 최후의 방책이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덧붙여, 승산없는 전쟁은 말 것이며, 백전백승을 하느니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더 좋다. 또 상대방의 장점은 살리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의 장점은 충분히 발휘하여 싸울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손자병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 없는 유연한 전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돌파나 병력을 무시한 무리한 공격, 또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전법은 더없이 어리석은 짓이라 이야기하면서, 승산없는 강적과의 싸울 수 없을 경우의 전략까지 자세히 나와있다. 그러나 전쟁이란 본래 원칙대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기응변의 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원리원칙을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승리의 열쇠는 그것을 얼마나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이 유연한 전법은 전쟁 때 뿐 아니라,인생을 사는 지혜로도 크게 참고가 된다. 인생을 사는 지혜라 하니 또 손자의 '우직의 계'가 생각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의미로, 어떤 중요한 일의 진행이나 교섭에 있어서 오히려 시간을 두고 먼 발치에서 차분히 기다리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의 대구,대구사람들어문학부 4525624이수정《20》'1946년 대구 10·1사건'은 '폭동'인가, '항쟁'인가?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에 대구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하고 해방의 기쁨을 맞볼 시간도 없이 건국 준비에 돌입한다. 일제 식민지 지배구조와 낡은 봉건적 유산을 타파하고 자주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당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건국준비위원회'와 '경북치안유지회'로 분열되어 대립되었던 좌·우익 세력들은 협의 끝에 통합을 결정하고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하여 건국을 위한 기초 준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그러나 그 해 10월, 남한 유일정부임을 내세운 미군정 당국이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친일 관료들을 군정관리로 임명함과 동시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군정의 힘을 등에 업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악행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에,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달랐으나 타지역과 달리 타협하는 유연성을 갖고 있던 대구의 좌·우 세력은 협력하여 '대구공동위원회'라는 공동조직을 구성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과는 달리 나라 상황은 점점 더 민족국가 수립에의 희망과는 멀어져갔다.일제시대에 다른 나라로 떠났던 동포들이 해방 소식에 하나같이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동포들은 이국 땅에서의 멸시와 천대를 뒤로하고 감격 어린 맘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 세력의 횡포와 더불어 수용 시설의 부족, 실업난, 식량난까지 갖은 어려움을 맞이해야 했다. 1946년 국가 식량사정이 나빠지자 미군정은 식량 공출을 강행했고, 일제 하에서도 없었던 하곡 수집을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시행하여 시민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신문에서「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란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콜레라와 수해까지 발생해 인명피해도 엄청났으며, 그로 인한 교통 두절로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시민들은 시위를 전개하였라, 분단체제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의 편견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다시 볼 때, 이 사건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21》'닫힌 마음'에서 다시 '열린 마음'으로우리나라 가장 보수적인 도시가 어디냐고 하면 아마 대구를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다른 어떤 곳보다 '열린 도시'였으며, 대구시민은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일제시기 끊임없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후에도 자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도시가 대구였다.부정이 난무했던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자유당의 이승만의 선전 전단과 벽보는 산 속 절에서도 볼 수 있었고 그에 비해 진보당의 조봉암의 선전 활동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이승만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국의 득표수 중 이승만은 70%, 조봉암은 30%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대구·경북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조봉암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는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염증의 표현인 동시에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반공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반대하고, '민중의 이익 옹호와 진보세력의 전위'임을 자처하며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조봉암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처럼 대구는 어둠만이 깔려 있는 당시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빛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그 해 4월 혁명의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대구였고, 4월 혁명 후의 민주화 공간에서도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대구였다. 전국 최초로 교원노조가 설립되었으며, 한국전쟁 전후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유가족으로 구성된 '피학살자 유가족회'도 결성되어 활동할 정도로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도시였다.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지역감정'이 선거 득표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면서 대구사람들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유세가 있던 날 "낙동강의 정기를 이어받은 우리의 박정희"를 시작으로 하여, 어려워진 것을 정권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지역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대구시민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현실인식에 기초한 일종의 피해의식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내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정치적 사건·인물 조사》①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좌익-사회주의적·급진주의적·공산주의적인 과격한 혁신 사상 또는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우익 -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개인이나 집단.*****************************************************************************일반적으로 우익은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키고, 좌익은 급진적·계급적·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그러나 우익과 좌익은 그 구별이 명확한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예컨대 노동운동은 좌익에 속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세력을 우익 또는 우파라고 부른다. 우익·중도·좌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1789∼1799) 당시 국민공회(國民公會)에서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석을 기준으로 오른쪽 자리에, 중간파인 마레당이 가운데에,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왼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흔히 우익은 파시즘을 가리킨다. 파시즘의 맹아는 프랑스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티슴에서 찾을 수 있으나, 뚜렷한 형태를 취한 것은 러시아혁명(1917)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이탈리아의 파시즘이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우익운동은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였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모두 붕괴되었다.그러나 전후에도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즘운동인 '이탈리아 사회운동', 독일의 네오나치당인 '국가민주당' 등이 남아 있다. 프랑스의 '드골주의'도 일종의 우익으로서 보나파르티슴적 성향이 강하다. 한국의 경우 우익은 보수·반공주의를 표방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그러나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진보세력으로 조직되자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였으며, 부위원장 안재홍도 탈퇴하여 9월 1일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정백·고경흠 등의 간부들은 위원회의 승인 없이 경성지부를 결성하였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집행위원회 개편을 단행하였고 9월 6일에는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경기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된 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조각을 단행하였다.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김구,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이강국, 신익희, 조만식 등 55명의 대표위원과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이시영 등 12명의 고문위원을 선발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총리에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고 밝혔다.그러나 처음부터 건준을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던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진영은 이들 조직을 벽상조각(壁上組閣)이라고 비난하였다. 그 후 해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귀국하고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한편 미군정청에서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자연 해체되었다.*****************************************************************************④ 조병옥(趙炳玉)[1894.2.15~1960.2.10] : 독립운동가, 정치가(조사하면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물이 맞는지에 대해 계속 의문을 가졌을 정도로 내용이 달랐다. 책에는 "친일경찰의 기용에 앞장섰던 경무부장 조병옥은 대구를 방문하여-소위 민족반역자, 친일파 운운하나 과거 36년 동안 눈물겨운 팔자를 생각할 때 오십 보 백 보가 아니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1950년 6·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였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反獨裁)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고, 이듬해 민주당(民主黨)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야당을 지도하였다.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가료 중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⑤ 대구 10·1사건 : (→컴퓨터로 10월1일의 그 사건을 찾기 위한 검색어는 '10월 사건'도, '10월 항쟁'도 아닌 '10.1폭동'이었다. 관련자료는 1946년 9월 총파업을 주도했던 서울 소재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노동단체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1945년 11월 5일 결성한 조선공산당 산하의 서울 소재 노동운동단체.*설립목적 : 노동자 권익 옹호와 경제적 이익 실현*주요활동 : 총파업 주도, 행정강령 채택, 찬탁운동 참여*규모 : 지부 수 총 1,194개, 조합원 수 총 50만 명약칭으로 '전평'이라고도 한다. 좌우대립의 사상적 혼란기에 노동자·농민을 선동하여 결성한 좌익계의 노동단체로 조선민주청년동맹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양대세력이었다. 결성 당시 국내정세는 8·15광복을 계기로 무산계급의 해방을 부르짖던 공산주의운동으로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도 노동자 조직을 창립하였다.1945년 11월 1일 전평의 지도하에 조선광산노동조합을 비롯하여 금속·철도·교통·토건·어업·전기·통신·섬유·광업 등의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