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론 결 과제 8 조. 주제생명윤리기본법에 대한 생명과학적 입장과 생명윤리적 입장의 대한 토론.생명과학적 입장에 대한 지지자 : 이태규, 정구호.생명윤리적 입장에 대한 지지자 : 김영희, 박근성. 주제선정 이유사회의 전체적인 반향을 일으킨 생명복제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기위해서이다.. 조장으로서 방향제시서로의 주장만을 제시하여 첨예한 대립만이 나올 수 있기에 중간에서 사회자의입장으로 의견조율을 하였다.. 전체적인 느낌조장으로서 우리조의 인원이 모두 참여하지 못한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조장을 제외한 인원은 모두 세명으로 각 입장으로 나누어 논쟁을 벌이려 해도 한사람이 모자라서 제3자의 입장을 취해야 할 조장인 나도 의견을 제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으로도 서로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제시하여 상대편을 이해 시키려 노력하고, 논리적인 의견을 뒷받침하여서 앞뒤가 맞는 제대로 된 주장을 볼 수 있는 우리 조원의 적극성에 감탄했다.또 온라인 상에서(다음카페, 엠에스엔 메신저) 열심히 토론하고, 글로써는 부족한 점들은 다시 모인 토론수업 시간에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아쉬운 점들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온오프라인을 동시에 활용한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토 론 일 지. 1차 모임(수업시간)- 2003년 12월 26일처음으로 조편성을 하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 간단한 인사를 했다. 조장인 나를 비롯하여 이날은 무용학과의 윤여정 학생도 왔었지만, 이 사람은 처음 모일때만 왔었고 그후 수업시간후에 따로 모이라고 할때도 참석치 않고, 온라인 모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토론에 첫 시간을 제외하고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조원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아무튼 일지라는 것은 그날의 있었던 일을 바로 그날 써야 하지만 이 보고서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토론이 끝나고 난뒤에 쓴다. 그렇기에 첫날의 일지에 모임 출석결과를 쓸 수 있었다.본론으로 돌아와서 처음에 만난 어색함을 뒤로하고 조장을 뽑기로 했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하기로 하고, 토론의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계선을 정하고 법률로써 가치관의 혼란 같은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박근성 : 인간 복제는 사회적 모순의 결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복제를 과학자들이 서두른다고 하더라도 자연적 순리에 의해서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을 복제한다고 해도 그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그도 지적 능력과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불합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우선 오늘은 간략적인 서로의 주장만을 말했고 다음시간에 만날 때 구체적 자료를 가져오기로 했다.. 2차모임(수업시간 후)- 2003년 12월 30일오늘은 모두가 모여 토론 주제에 관한 자료수집의 진척도를 체크했다. 인터넷상에는 우리가 선택한 주제가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를 남기고 있는 것이기에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생명윤리적 입장과 생명과학적 입장의 첨예한 대립이 맞서고 있는 자료를 봄으로써 이주제가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라고 느꼈고 좀더 상세한 자료 참고를 하기로 모두들 다짐했다. 그리고 온라인상으로 만날 약속을 하였다. 우선 조장인 내가 다음 에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서 만나 채팅을 통해 오프라인 상으로는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자료참고 내용을 복사하며 논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카페는 모임이 끝나고 전자계산소에서 바로 만들었고 주소는 CAFE.DAUM.NET/SARANG337 으로 했다.- 참석여부{참석여부 확인자료조사한재구X불참석(확인불가)이태규O진행중정구호O진행중박근성O진행중김영희O진행중조여정X불참석(확인불가). 3차모임(수업시간)- 2004년 1월 2일- 자료 준비현황 및 출석{준비 여부비고(출석)한재구X불참석(확인불가)이태규O정구호O박근성O김영희O윤여정X불참석(확인불가)한재구 학생은 오늘도 참석하지 않았고, 윤여정 학생은 저번 수업시간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오늘은 자료를 준비하여 만나기로 한날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대략 일인당 준비해 온 것은 10장 정도 되었다. 하지있잖습니까? 시험관아기도 6-70년대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일반적이 잖아요.윤리도 이와 같이 바뀌는 것입니다.김 : 하지만 굳이 그런식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미국은 난자를 파는 경우도 있다고하는데 돈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들은 옳지 않습니다. 돈으로 사고 파는것들을 인간생명의 문제에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이 : 우리학교에서 돼지복제에 성공한 걸 알고 있습니까?부작용이 있을까요?김 : 네 물론이죠, 복제양 돌리도 빨리 노화가 되는 부작용이 왔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복제는 부작용이 많이 존재할 것이라는 걸 암시할 수 있죠.이 : 생영연구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국가의 정책적인 것입니다. 생명경시는 제도적장치만 마련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김 : 그럼 어디 까지 허용하는 걸 말하는 건지요.(조장 주 : 여기서부터 두가지 논점에서 타협을 하려는 시도가 나왔다.)이 : 인간복제는 아니고 특정부위의 복제나 열성인자를 없애는 것등을 말합니다.김 : 그러면 열성인자를 가지면 태어나서는 안된다는 건가요? 태어났을 때 열등하다고그걸 조작하는 것은 흐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정 : 생명체는 선천적으로 30%를 갖고 나오고 나머지는 후천적인 것입니다. 저도 기본적인복제는 하며 허용을 하자는 측면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한만 한다면 이미 시작한연구의 방향제시가 안되며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서 분명 이걸 시도 하려 할 것입니다.그에 대한 부작용은 불을 보듯 뻔한 거구요. 정부의 관리가 필요합니다.김 : 그러면 그에따른 부작용은 어떡하지요? 예를들어서 콩을 얘기해 보자구요.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생산된 콩 때문에 몇 년전에 수입 금지 조치도 취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컸었잖아요?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을 조작한다는 건 좋지 않습니다.정 :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한 거지요. 쌍둥이를 보더라도 얼굴만 같지 생각이나 행동은다르지 않습니까?김 : 부모가 조작한건 아니잖습니까?정 : 결국에 똑같은 사람은 아닙니다.(조장 주 : 약간은 논점을 벗어난 것 같았다)김 :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 복제는 이미 시작된 일이고 흐름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개체복사는 연구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것은 다른 결과를 위한 과정이니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정구호 : 인간복제는 해야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습니다. 연구는 분명 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이상의 상업적 목적등으로 연구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악용시키는 문제는 우리 인간 스스로가분명히 통제할 수 있을것입니다.김영희 : 치료의 목적까지만 허용되어야 합니다. 분명 이로운 면이 있을테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소극적인 입장입니다.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세계적인 흐름이 그러하다면 분명 연구에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기술이지배하는 현대사회입니다. 기술이 없으면 다른나라에 종속되고 맙니다.토론의 방향 및 결론- 처음 시간과는 다르게 합의점을 찾아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여 합리적인 돌파구를 찾으려 하는 조원들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전문가가 아니었어도 그에 대변하는 사람처럼 상당히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되었다.생명 과학적인 측면을 중요시 하면서도 윤리적인 사상 교육을 병행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기술진보의 차원에서 경쟁적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다른 나라에 기술적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핵무기를 보더라도 세계의 강대국들이 북한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기술력이라는 걸 알 수 있듯이 우리도 흐름에 뒤지지 않게 열심히 투자를 지원하며 그에 따른 부작용 예방과 윤리적 교육도 병행하는 것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다.. 4차모임(인터넷 온라인 모임)- 2004년 1월 2일 10:30우선 오후수업 시간에 모자랐던 부분에 대하여 인터넷 정보검색을 통해 지식을 보충하여 전문적인 부분을 첨가할 수 있도록 카페상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오프라인과는 다르게 온라인상에서각합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인간복제는 반대합니다 제생각은 여기까지..근성 : 배아간세포 연구, 치료용 배아복제, 동물장기를 이용한 인공장기 생산이 모두 불법이되니깐요영달 : 네근성 : 저도 영희씨 생각에 동조하는 입장이니까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그다지 생명윤리적입장에 가깝기는했지만 그보다는 합리적 측면을 강조하여 보려고 했습니다.이것은 윤리적입장은 우리가 도덕적인 측면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좀더 인류에게 이익이 되돌아 갈수 있는 쪽을 부각시켜서 이에대한 발전을 시켜야 한다는것인데요. 다른 종교 단체등에서 주장하고 있는 어떤 목적의 배아 연구도 해선 안된다하는 것이 아닌 장기 복제나 질병치료에 한해서만 인정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측면이나 과학적 측면에서도 둘의 손을 모두 들어줄수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근성 : 이제 과학적 입장에서 논리를 펼쳐 주시기 바랍니다. 근데 제가 중간에 잠깐 한말 씀드리자면 토론이 처음엔 약간은 격렬하다정도 느껴지게 서로의 주장이 강했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절충하며 합리적인 측면으로 나아가는 것 같군요.[태규]: 예~근성 : 이제 계속 말씀하십시오.영달 : 청자의 입장에서 들으셔서 그러셨나? 저는 그냥 대화 한건데..ㅋㅋ근성 : 좋은 결론을 한번 내 봅시다.^^[태규]: 그럼 이제 제 말할차례인가요? 예...저 과학적입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에대해 찬성의 입장입니다. 윤리적인 을 배제하고 생 하 건 아니고 윤리적인 면이 우리의 삶을질의 향상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치면 윤리적인 면도 어느정도 배제될수 있다고생각 합니다 이런 인간 복제도 요즘 세상에 만연하는 인간 수명연장의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근디 이런 발견을 인간개체의 복제 우려 때문에 시작부터 막고 선다는건잘못 된 생각입니다영달 : 인간 복제로 생명연장을 할수 있다는 건가요?[태규]: 인간복제 자체 인간수명연장을 할수 있다 건아니고 인간복제기술이 인간 유전자연구를 통한 특정부위 아니 특정장기의 생산으로 선상에 놓인 과정이라고 봐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근성 : 좋은 데요
-목 차-1. 개요2. 서론- 프랑스 군대와 우리와의 첫 만남3. 프랑스 군대의 참전 역사- 나폴레옹- 부당한 알제리 침략- 우리 나라와의 관계- 6.25의 참전4. 현재의 프랑스의 특수부대- 수중 폭파부대 DINOPS- 대테러부대 GIGN- 외인부대 Raison Etrange5. 우리나라가 인식하는 프랑스 외인부대6. 결론7. 맺음말1. 개요우리가 프랑스의 군대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흔히 듣던 외인부대이다. 우리나라처럼 자국의 청년들을 군대에 징집시켜 일정기간 의무 복무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전세계에서 모집을 받아 용병으로써 자국의 보위와 안전에 관련된 각종 전투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는 자국의 청년들을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게하여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재력으로 이국민을 사들여서 전장터로 내보내 국민들의 비판을 피하려고 했던 프랑스 정치인들의 생각이 숨어있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올해로 1백68년째를 맞은 다국적 전투요원으로 구성 한 부대이다. 당시 국왕 루이 필립이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조직했다. 군대 시절에 꼬레앙 이라는 책을 화장실에 숨어가면서 열심히 읽어 왔기 때문인지 그 때에도 이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이후 일상생활에 젖어가면서 그러한 생각을 잊고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실태와 대학생 실업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프랑스 테마기행의 과제의 하나로서 또다시 외인부대를 찾아본 결과 또다시 그러한 나지막한 기대감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곳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나드는 남자들만의 세계가 다시 눈앞에 그려졌던 것이다. 제대이후 잊으면서 살았던 규율과 수칙, 그리고 강인한 체력 등 군생활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 3년이 지난 지금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전역할 날까지만 참고 견디자, 얼른 군대라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하나의 추억이라고 남자의 로망 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오.3. 프랑스 군대의 참전 역사- 나폴레옹나폴레옹(17691821)은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던 20세때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다. 그는 군사적인 천재였으며 타고난 노력가였고 폭력을 사랑했으며 명예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지 못 하고 있다가 1793년에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진압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테르미돌 반란 후에 투옥이 되기도 했는데 1795년에 재차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 하는 과정에서 재등용되어 1796-7년에는 이탈리아쪽에서 침공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셋으로 나누어 1군과 2군은 명망이 있는 장군들이 사령관을 맡았던 것에 비해 약관의 나이인 나폴레옹이 3군 사령관을 맡게 되어 노장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그는 1.2군 사령관이 모두 패배한데 반해 그만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이처럼 나폴레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테르미돌 도독 정부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국외로 돌리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영국의 오리엔트 식민지를 점령하려는 두 가지 목적하에 이집트 원정을 명령한다. 이 원정은 1798년 5월에서 1799년 1월까지 있었는데 원정군은 보 기병이 합해서 40000명 그리고, 학자가 200명 이 원정을 수행했으며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함대도 360척에 달하였다. 당시 영국의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던 넬슨은 지중해를 순회하며 프랑스 함대를 기다렸으나 우연히 나폴레옹은 넬슨의 예봉을 피하고 알렉산드리아에 무사히 상륙하였고, '피라밋 전쟁'을 통해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오리엔트를 프랑스의 세력하에 두게 된다. 그리고, 이 정복 활동을 수행했던 학자들을 통해 'Rosetta Stone'과 같은 많은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특히, 로제타 스톤은 A.D 1세기에 있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알려지지 않았다.30여년이 더 지난 과거의 문제를 ‘통과하지 못한 과거’의 문제로 만든 것은 프랑스 언론이었다. 르몽드가 지난 6월20일자 신문에 알제리의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루이제트 이힐라리즈(Louisette Lghilahriz)의 고문경험을 보도하면서 프랑스 군대의 잔혹행위를 일반독자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그녀는 20세이던 1957년 말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체포돼 자크 마수(Jacques Massu) 장군 휘하의 10공수부대에서 고문을 당했고 죽음 직전에 한 프랑스 군의관에 의해 치료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며 지금까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 군의관을 찾고 있다고 증언했다. 10월 말부터는 다른 신문들도 르몽드가 불붙인 알제리 전쟁의 잔혹행위 문제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공산당이 발행하는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는 10월30일자에 지식인 10여명의 서명과 함께 프랑스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정부의 공식 인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11월부터는 보수적 성향의 일간지들까지 이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각종 매체들에 전쟁 당시의 고문 현장 사진들이 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11월23일자 르몽드엔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군의 핵심 지휘자였던 92세의 자크 마수 장군과 82세의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 퇴역장군이 전쟁 당시 고문행위와 즉결처형 등을 인정하는 인터뷰가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두 장군은 스스로가 즉결처형을 행했다고 고백 했다. 통계에 따르면 알제리 독립전쟁 기간에 집에서 체포된 2만4000명 가운데 3024명이 실종됐고 이들은 대부분 즉결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알제리 수도 알제의 경찰 책임자였던 폴 테트정(Paul Teitgen)은 스스로가 24명의 죄수를 즉결처형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잔혹행위가 전혀 즐거운 것이 아니었지만 당시 이미 일반화된 관행이었다”고 증언했다.- 6.25의 참전지평리 전투는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대대와 함께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는 비상 대기조로 언제 어디로든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GIGN은 인질 구출작전이 주된 임무이지만, VIP에 대한 경호,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방어, 극악범 호송 임무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프랑스는 서방 국가들과의 대테러 국제 협력에서 비교적 소극적 입장을 취해 왔으나, 최근 프랑스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제 테러분자의 상호 연계 및 음모의 온상지가 되면서 서방 국가의 비판이 높아지고 1978년 모로 수상이 피살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강경책으로 전환하였다. GIGN 대원의 선발은 헌병대에서 5년 이상 근무자중 지원자를 대상으로 1차 서류 심사와 GIGN 대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100명을 선발한 후 일주일 동안 체력, 담력, 사격능력 검사를 받게 되는데, 체력검사는 완전군장 8 km 달리기, 암벽타기, 레펠 훈련 등이며, 담력 검사는 훈련된 사나운 군견과 무술 유단자와의 연속대결 등이고, 사격은 권총 및 소총 사격 능력 평가가 포함된다. 2차 관문을 통과한 지원자들은 8개월간의 각종 대테러리즘 전술과 전기를 연마하게 되고,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료하면 정식으로 GIGN의 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마지막관문까지 통과한 인원은 불과 10%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든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다른나라의 특공대와는 달리 GIGN은 전투 수영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해상에서 선박납치 사건이 발생하거나, 해안에 있는 호텔과 같은 위락 시설의 점거와 인질 억류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GIGN의 특징중의 하나는 대원 개개인들이 맞서게 될 테러리스트들을 심리적으로 압도하기 위해 정신수양 훈련을 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 단체에 대한 공격 유형과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작전에 투입될 경우 테러리스트 및 단체에 대해 세밀한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음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강점중의 하나이다.GIGN은 정부의 전폭적새로운 외인부대가 창설된다. 그 후 1961년 군부 쿠테타에 의하여 불명예스럽게 외인부대가 해제되었으나 1963년 다시 부활하였다.·외인부대의 구성 및 훈련.외인부대는 프랑스인과 외국인으로 혼성되어 있다. 실제는 과반수 이상이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인의 자격으로는 입대할 수 없어 명분상 벨기에인, 스위스인,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라고 신고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부대는 대원들의 출신국이 40여개국 이상이어서 명칭에 걸맞는 외인부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훈련은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면 즉각 별명이 주어지고 그후 3년간은 주어지 별명으로 상호 통하도록 되어있다. 먼저 코르시카섬 남단의 보니파쵸에서 1년간 훈련을 받는데 절대복종을 중히 여기며 다음으로 체력이 중요시 된다. 외인부대원으로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누구든 한번은 양말이 피로 물드는 맹훈련을 받는다. 장시간의 행군훈련으 다반사이고 73주간에 걸쳐 주2일씩 엄격한 실탄 사격훈련이 실시된다. 신병의 기초훈련이 종료되면 대부분 카스테루노디리의 각종 특기학교로 파송되어 특기훈련과 선발된 일부는 8주간의 고급훈련을 받게 된다. 이어서 14주간의 하사관 양성과정을 거치면 하사관으로 임관한다.현재 외인부대의 병력은 약 8,000명이며, 군 복무기간은 5년이다.·외인부대의 참전史.*수많은 식민지 전쟁에 참전 : 1854년 북아프리카 크리미아, 1895년 이탈리아, 1863~67년 멕시코, 1870년 보불 전쟁에 참전하였다.*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2차대전에서는 약 4만명의 전사자를 내기도 하였다.*1954년 인도지나 반도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패배를 당함.*1955년 6개 보병연대, 2개 기병대, 2개 공정연대와 외인부대의 4개 사하라 중대가 참전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다.*1963년 이후 아프리카의 차드, 소말리아, 자이레, 지부티, 마라카스가르 등 여러나라에서 방어진 전투에 투입되어 왔다.·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바라보자’외인부대의 모병 포스터에는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바라보자’라는 문구가 있다..
천양원 을 다녀와서아침부터 겨울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햇빛도 따사로이 내리 쬐는 일요일 아침이다. 인터넷검색을 통해 천양원이라는 아동사회 복지시설을 알아낸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천양원입니다. 하는 목사님인듯한 중년 아저씨의 종교적 특유의 느낌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유성구 장대동에 있다는데 그위치를 알려달라고 하자 친절한 목소리로 장대 파출소에서 동학사 쪽으로 300미터 쯤 가다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면서 어디에서 올꺼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는 구암동이고 9시30분쯤에 도착할 거라고 말씀드리자 어떻게 옆동네 살면서 여길 모르냐며 원장님께서 조금은 못마땅한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하기는 지리는 제대로는 몰라도 대충 얼짐작으로 따져보니 택시 기본요금 밖에 안나오는 가까운거리 인데 그런곳에 복지시설이 있는것도 모르는 무심한 내가 약간은 부끄러워졌다.전화를 끊은뒤 30분후 여자 친구인 연아와 함께 기숙사 앞을 나와서 택시를 잡은뒤 자리에 앉아서 나는 어제일을 되돌이켜 보았다. 오늘이 봉사활동을 가기위해서 두 번 째 시도한 것이다. 어제도 산성동에있는 장애인 복지회관을 찾았으나 그곳은 토요일 오후1시가 지나면 봉사활동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또 버스를 타고 뿌리공원 옆에있는 장수마을이라고 찾아갔지만 그곳도 할게 없다고 했다. 장수마을은 불우한 우리 이웃이 살기 보다는 어르신들을 위한 편의 시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에 찾아간 장애인 복지회관도 왠지 장애우들이 살기 보다는 그들이 여가 활동을 즐길수있도록 각종 스포츠 편의 시설을 제공하고 그밖에 레크레이션 활동이나 교육강좌등을 여는 곳으로 보였다. 만약에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했더라면 아마도 청소나 하루종일 했으리라 여겨지고 정작 사람들은 만나보지도 못하여 교수님이 주신 과제 내용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했으리라 여겨졌다.택시로 약5분여쯤 가니 장대파출소를 지나 오른편으로 사회복지법인 천양원 이라는 곳이보여 기사님께 얼른 내려달라고 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정문 오른편 운동장과 왼편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몇 발자국 들어서자 건물안쪽에서 차가한대 나오더니 창문을 열고 운전석쪽의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분이 어떻게 왔냐고 물어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봉사활동을 지시해줄 직원들이 없으니 다음에 오게나. 그런데 혹시 아침에 전화한 친군가? 하고 물으셔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럼 전화까지 하고 왔는데 헛걸음 하게 할 순없지. 오늘은 일요일이니 나두 교회를 가야한다네! 참 나는 이곳 원장이고 유성교회로 지금 예배를 드리러 갈텐데.. 어디보자. 그래! 저기 저쪽 보이는 가운데 건물이 식당이네., 거기가 지저분하니 우선 거기먼저 청소를 해주게나! 하고 친절하게 말씀하시고 차를 몰고 정문쪽으로 나가셨다. 여자친구와 서로 마주보며 싱긋 웃으며 이제 우리 일좀 해볼까? 하는 눈짓으로 식당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전혀 청소할 게 없어보이고 깨끗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대걸레를 빨아와서 바닥을 열심히 훔치고 먼지가 안나게 물도 뿌리고 비질도 했다. 우리가 쿵닥거리며 청소를 하자 주방쪽에서 음식을 만드시는 아저씨께서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시며 청소 마치면 도와줄게 있으니 주방쪽으로 오라고 하셨다. 일을 마치고 주방에가자 음식만든걸 옮겨 배식판으로 옮겨달라고 하셨다. 몇 개 안 옮기자 아저씨는 이제 됐다며 나가서 아이들하고 놀아주라고 하셨다. 1시간동안의 긴 식당청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해는 중천으로 떠서 꽤 따뜻해져 있었다. 아이들도 이제 운동장이며 놀이터로 나와서 뛰어놀기 시작했다. 먼저 다가가서 이름이 뭐야 하자 처음엔 대답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꺼번에 말을 걸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한명한명 물어보라고 하자 대여섯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아 달라며 어리과을 부렸다. 내 조카도 이제 세 살이라 그애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번쩍안아 올렸다. 귀엽기만 했다. 조카가 생기기전까지는 애들이라면 질색을 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아이이지만 전에 느끼는 감정은 없었다. 아이들이 티없이 맑았고, 일반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우울하고 쳐진 아이들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정에 굶주려 있어 보였다. 아이를 번쩍 안아들어 이름을 물어보니 성민이라했다. 강성민 내가 원래 이름을 잘 못 외우는 성격인데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까지 도 성민이라는 아이의 이름과 그 외 몇 아이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걸 봐서는 아이들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성민이를 안아주자 오른쪽에서 한아이가 내 손목을 붙잡고 저쪽 놀이터로 가서 놀자고 끌었고 왼쪽에서는 또 다른 아이가 식당옆의 자기네 집에들어가서 드래곤볼을 보자면 연신 칭얼 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쪽도 가야겠고 저기도 가야겠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 었다. 또 한녀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가더니 게임을 찾아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아이들이 얄밉지 않았다. 왜냐면 그또래 아이들은 다그런걸 아니까. 대여섯살이 되면 말도 잘하고 호기심도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는것도 많고 하고 싶은것도 많은 나이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난 고아에대한 선입견은 없다. 동정심도 물론 없다. 세상에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거지들이다. 불우한 이웃에게는 사랑 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다만 환경이 다를뿐이다. 그런이들에게는 가진 것이 조금 더있는 우리가 사랑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어야 한다. 고아라고 해서 불쌍하다 후견인이 되어줘야 겠다하는 순간의 그런생각을 나는 싫어한다. 그들에게는 희망이라는 삶의 불씨가 필요하다. 기회라는 말을 써도 다름없을 것같다. 기회를 좀더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점심시간에 아이들 밥을 먹여주고 설거지도 하고 운동장으로 나와 축구를 했다. 평소에 활달하고 과감한 성격의 나는 형은 연예인이야 또는 형 축구하는거 볼래. 박지성 저리가라야 내가 한때는 국가대표였다니까!. 하는 약장수식의 약간은 거짓말 섞인듯한 능청스런 말투에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으며 주위로 몰려와 또 다시 어지럽게 했다. 놀이터에서 제군들 나를 따르라 하며 아이들을 이끌며 전쟁놀이도 하고, 건물 여기저기를 휘저으며 술래잡기도 했다. 그때 내게 잊혀지지 않는 한아이가 살며시 다가왔다. 그저 내손을 잡고 그냥 눈웃음만 짓던아이. 이름이 뭐냐고 묻자 박도령이요 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한 말투로 건내던 열두살 아이에게서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은 다른 봉사하러온 형들과는 다른 것 같아요. 형 좋아해요. 말을 건내던 도령이가 눈에 아른거린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대여섯살의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대해주며 때로는 엄하게 하는 도령이에게 나는 갖고 있지못한 진지함이 있었다. 그나이때 그저 뛰어놀기만 하던 나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TV드라마에서 불우한 이웃으로만 보여졌던 고아원을 처음 찾은 나로서는 생각의 편견이 나를 가로 막고 있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부도 못하고 나쁜길로만 빠지게 보여주는 드라마가 갑자기 증오스러워졌다. 이렇게 맑고 착한 아이들을 그렇게 묘사하다니. PD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다. 도령이는 나와 비디오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꿈이 뭐냐고 묻자 그냥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서 뭔가 희망을 줄 수 있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도 너만할때가 있었다고, 그렇지만 나는 그때 행복했다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골목대장도 하고 밤늦도록 놀았다고, 너도 공부도 중요하지만 어린이는 무조건 열심히 노는게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녀석이 새겨들었는지는 모르고, 나같은 봉사활동을 오는 수많은 학생들이 해주는 그렇고 그런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 눈빛에서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뭐랄까 남자로서 통하는 그런거라고 해야될까?,,, 그런게 있었다. 아무튼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까지 도령이는 내옆에서 있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1월 3일 토요일 오후,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어 나른함 마저 몰고오는 오후에 잡혀있던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을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산성동에 있는 장애우 복지시설로 가기로 했다. 222번 버스를 타고 서부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갈아 탄 후 장애우 복지관에 도착했다. 왠지 이곳은 장애우들이 살기보다는 체육관이라는 느낌이 왔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하자 오늘은 토요일이라 직원들이 퇴근을 해서 오늘은 하기 힘들꺼 같다며 평일에 다시 오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헛걸음 한 것 같아 실망을 금치 못하고 터벅터벅 건물 밖으로 힘없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이왕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어서 이곳을 소개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걸어 다른 곳을 여쭤보았다. 그러자 거기서 택시를 타고 몇 분만 더가면 불우한 노인들이 살고 계시는 장수마을 이라는 곳이 있다고하셨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은 또 어떠한 곳일까?' 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과연 오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10분정도 달리자 경치가 정말 좋은 곳에 도착했다. 입구를 보니 뿌리공원이라고 써있었고 갈래길 왼편에 장수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산능선이 길게 뻗어 있는 곳에 위치한 장수마을..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해 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로비에서 노인 분들이 삼삼오오 몰려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계셨고, 입구에는 레크레이션 소개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 일정이 붙어 있었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스쳤다. '혹시 이곳도 편의시설 같은곳이 아닐까?' 사무실에 들러서 직원에게 물어보자 그게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 곳은 오갈데 없는 노인분들이 상주해 계신 곳이 아닌 콘도와 같이 며칠 씩 묵어 갈수 있는 휴양소 같은 곳이 었다. 직원은 오늘은 봉사활동 할 게 없으니 내일 오라고 했다. 그리고 혹시 내일도 없을지 모르니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또 이곳도 교수님께서 가보라고 한 불우한 이웃이 사는 곳이 아닐 것이다. 관청이나 경찰서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과 같이 기껏해야 청소를 시킬 것 같았다. 그러면 교수님께서 의도하신 과제를 충분히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며 나름 대로 느낌을 갖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라는 뜻으로 과제를 내주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직원들하고 같이 다니며 청소를 하거나 일을 한다면 그건 일반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하는 봉사활동과 같지 않을게 뭐가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앞으로 기한도 얼마 남지 않아서 불안했다. 돌아가면 인터넷검색을 통해 다른 곳을 찾아 보리라 마음 먹었다. 편의 시설이 아닌 정말로 우리가 사랑을 주어야 할 이웃들이 살고 있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우 주거지를 찾기로 했다.다음날 아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유성, 그러니까 우리 기숙사 바로 옆동네에 있는 고아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버스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어제 택시타고 버스 타고 교통비로 만원을 날린 걸 생각하니 돈이 아까웠다. 우리가 듣는 이 수업도 경제학으로 분류된 학문인데 그걸 배우는 학생으로서 비경제적인 지출을 했다는 게 약간 마음이 찜찜했다. 하지만 후회하면 무엇하랴? 일단 소비한 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런 저런 마음을 접어두고 기숙사를 나왔다. 오늘은 꼭 봉사활동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발했다. 날씨도 어제보다 풀려 햇살이 따사로왔다. 친구가 버스 노선을 모른다며 그정도 거리는 택시를 타도 버스비와 비등할 꺼라는 얘기를 해서 택시에 올라탔다. 공주방면으로 장대 파출소를 500미터 정도 지나자 큰길 오른쪽에 천양원 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우리가 원하던 곳을 찾았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그래도 바로 옆동네에 있는 이곳을 몰랐다는게 내 마음을 약간은 무겁게 했다. 주위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 의무인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곳도 오늘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아이들의 놀이터가 보였다. 아침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네 개의 건물이 나란히 위치해 있었는데 그중 본관으로 보이는 가운데 건물쪽에서 차 한 대가 내려오다가 우리들 앞에 멈춰 섰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운전하시던 분이 이 곳 천양원의 원장님이라고 소개하시며 어떻게 왔냐고 물으셨다. 친구가 오늘아침에 전화하고 왔다고 얘기하자 오늘은 일이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다가 기왕에 온거니 그냥 갈순 없잖느냐며 본관 옆 건물에 있는 식당 청소를 우선 하라고 하셨다. 원장님은 그말씀을 남기시고 유성에 있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야된다며 차를 몰고 나가셨다. '오늘은 허탕치지 않는구나..' 원장님께서 처음에 오늘은 직원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오늘도 역시 그냥 가는걸까?' 하는 무거운 마음이 내리 눌렀는데 청소라도 시켜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봉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청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5-6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빼꼼히 얼굴을 빼들고 씩 웃으며 '어! 누구지?' 말했다. 낯선 사람을 모른척하고 피할 줄 알았던 나에게 반기는 듯한 그 아이의 웃음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우울할 줄 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느꼈다. 연말에는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찾아왔지만 새해를 맞은 지금은 철새 한 철 지나가듯, 썰물 빠져나가 듯 사람들의 방문도 영 뜸한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탄 아이 몇몇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 또 한 명의 아이가 내 옆으로 왔다. 처음 본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도 보였지만 이내 다가와선 안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집에 있는 막내동생 종은이가 생각나서 힘 껏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따가 같이 놀고 지금은 청소부터 한다고 하자 막무가내로 우겼다. 억지 부리는 게 일반 가정의 대여섯 살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한시간 동안 식당청소를 열심히 한 후 앞뜰로 나왔다. 정오가 되어 날씨가 풀리자 아이들이 하나 둘씩 운동장으로 나왔다. 요즘은 마침 찾는 사람들이 없는 터라 아이들은 우리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핸드폰을 달라는 아이, 안아달라는 아이, 술래잡기를 하자는 아이 등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떠들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핸드폰을 주고, 안아주고, 술래잡기도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30분 정도 놀아주자 스피커에서 방송(그냥 멜로디)이 나왔다. 아이들은 미리 알고 있는 듯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식당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 때 선생님들이 나오고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주면서 나에게도 다른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주라며 방법을 알려주셨다. 우선 나이가 어린 상준, 성민이를 옆에 앉히고 밥을 타러 배식대에 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세지하고 오징어 국을 갖고 왔는데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없었다. 그들은 밖에 나가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다. 양손으로 아이들을 거의 끌다(?) 시피 해서 자리에 데려왔다. 국에 밥을 말아 한숟갈 씩 떠 먹이자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그 나이 정도의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엄마의 사랑일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내가 비록 오늘 하루지만,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얼마나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을까? 엄마 앞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과자도 많이 먹고 싶고, 갖고 싶은 장난감도 많을 텐데...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밥을 다 먹이고 나서 상준, 성민, 아연, 현준이와 술래잡기를 했다. 서로 자기랑 놀자며 잡아 끄는 통에 팔이 아팠지만 아이들이 밉지는 않았다. 놀이터에서 어렸을 때 해보던 얼음 땡도 하고 내가 모르던 '앉았다 일어났다 가위바위보'란 새로운 놀이도 해보자 나도 지난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 돌려가며 게임을 하고 전화도 걸며 신기한 듯 갖고 노는 것이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두시쯤이 되자 아이들은 춥다며 자기네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식당 오른편 건물인 아이들의 집 내부는 선생님 방과 아이들 방, 거실 등의 구조로 일반 집과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점은 아이들이 사는 곳답지 않게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하며 잘 정돈된 책꽂이 등 아이들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은 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 나이 때에는 어지르고 싶으면 집안을 다 헤집고 다닐 때인데 단체생활에 길들여져 있는 모습이 약간은 측은하게 보였다. 단체생활이란, 여자들은 고교시절 생활관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수학여행, 극기훈련을 하러 갔을 때 겪고, 남자들은 군대에 갔을 때 제대로 경험하는 것인데 어린 나이부터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아이들로서의 천진함을 잃게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비디오도 보고 함께 얘기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저녁 때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 언제 나갔는지 친구가 얼굴이 빨개져서 밖에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털어 놓았다. 봉사활동 확인서를 받으러가는 자기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과제를 위해서 확인을 받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이렇게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좋지 않냐며 괜히 사족을 단 것 같다며 그 얘기를 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나도 그 말을 듣자 '그래 우리가 아이들하고 이렇게 재밌게 놀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천진함도 볼 수 있었고 크지는 않지만 우리의 사랑을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게 좋을 뿐이지 무얼 더 바래야 겠어?' 라고 말하며 나 역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과 몇 분 얘기를 나누고 난 뒤 기숙사로 돌아오며 '부모님이 안 계서도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했다. 현실을 비판하고 나는 참 가진게 없다며 한숨을 쉬었던 내모습이 .
빰빠바바밤~빰바바밤 빰바바밤 빰바바 띠로링~~따라~ 하는 오프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야말로 70년대 태어난 사람이라면 아직은 케이블 티브이에 익숙해지기 전인, 오전 10시에 정규방송이 모두 끝나고 기껏 유선방송이라고 해봤자 그것은 정규방송을 질좋은 화면으로 보기위한 방편이라 (어렸을 적 삼남매중 막내인 본인은 티브이 안테나가 높이 솟아 있는 집 모퉁이에서 그 쇠봉을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 쪽으로 돌렸다 하며 누나 보여? , 아직도 안나와?하는 질문을 고래고래 지르며 되풀이 하며 그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당대 최고의 티브이 외화시리즈 V[브이]를 보기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교수님께서도 잘 알아시리라 믿는다.여자 주인공 다이애나가 새하얀 생쥐를 꿀떡 꿀떡 삼키던 그모습.. 항간에 그 배우가 그렇게 연기하다가 실제로 쥐가 목에 걸려서 죽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었다.-) 동네 유선방송아저씨가 제발 달아달라고 사정해서 설치했었던 것이 전부였다. 정규방송이 끝나면 재탕에 삼탕을 거듭한 질 안좋은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한물간 영화(티브이 방영분)를 틀어주거나 일본만화(정말 좋아했었다.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가 파하면 집에오자마자 네시부터 티브이 앞에 앉곤 했다.)를 방송해줬던 것이 전부였다. 서론이 길었는데 앞서 말한 빰빠바바밤~ 은 토요명화의 오프닝 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잡지 씨네 21에서 모작가가 그린 만화에서도 나오듯 본인이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VTR은 그래도 조금은 살만한 집에서 갖고 있는 정도였고 본인의 집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아 토요일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신문을 뒤집으면 맨 뒤 1면에 나와있는 오늘의 볼만한 TV프로그램 을 보며 오늘은 KBS의 토요명화를 봐야하나, MBC의 주말의 영화를 봐야하나 고민에 빠지곤 했다. 어린시절이었지만 영화를 즐겨보던 본인이 교수님께서 첫시간에 장미의 이름 이란 영화를 일주일 후에 시청한다고 말씀하시던 순간에 머릿속을 휙 하며 스쳐 지나가는 어렴풋한 장면들이 있었다. 수도사, 손코너리, 어두침침한 배경, 안개, 책, 침, 독약...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뒤엉켜서 손을 들어 본인이 알고 있는 영화와 같은 것인지 교수님께 묻고 싶어 목까지 말문이 올라왔지만 원래 한국사람이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그날이 첫시간인 지라 여러사람의 시선을 끌기 싫어서 꾹 참았다. 수업을 계속들으며 그 궁금증은 사라져갔고, 일주일 동안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영화를 보게되는 당일 VTR을 틀으려는 순간 궁금증은 다시 생겨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마음속에 계속되었다. 과연 이 영화가 내가 알고있는 그 것일까? ,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있었지만 주인공인 숀코너리가 등장하는 순간(겉으론 표현할 수 없었고 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아직은 기억력이 죽지 않았구나.. 이봐! 자네 머리 아직 쓸만한 걸? 하고 내심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이야기의 전개, 사건의 전말등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오직 독 , 침 , 책 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본인은 강의실 맨앞쪽 오른편 출입문옆에 앉았기에 영화관에서처럼 한대 쥐어박고 싶은 앞사람의 머리통의 방해공작 없이 집중하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26살), 고등교육까지 어느정도 받은 지성인으로서 문학과 영화에 관심이 있던 본인은 장자끄 아노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시청 주안점을 두었고 곳곳에 숨겨놓은 영화적 장치 전개를 결말로 이끌어 주는 복선 은 무엇인가 두눈에 불을 켜고 보았다. 출입할 수 없는 금지되 탑, 그 웅장하지만 밖에서는 들어갈 수 없는 그 곳은 바로 그 당시의 기독교의 권력 을 보여 주는 듯 다시 해석할 수 있었다. 그곳 안에 펼쳐진 미로와 같은 계단은 당시 종교계의 복잡성, 끝을 알 수 없는 폐단, 복잡함을 보여주고 그 끝에 감춰진 수많은 고서들은 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부끄러운 치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렇듯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 감독이 담아놓은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을 했다. 오래전에 자기가 몸담고 그렇게 믿어왔던 기독교에, 정의라는 명분하에 다른 무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윌리엄 신부...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자신도 굴복할 수 밖에 없다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자책하는 그에게서 그 시대의 힘없는 대중의 무력함을 알 수 있었다. 먹을 것을 위해 몸을 허락하다가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에 처하게 될 여자, 그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하게 되어버린 풋내기 수도승, 추리영화에서 멜로영화로 또 여기서 에로틱한 영화에 까지도 도달할 뻔 했지만 교수님의 빨리감기 전략으로 본인은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