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맛우리맛이란 무엇인가?지구가 좁아지면서 생활의 뿌리인 의식주가 일체화하고 있다. 경제 수준이 개발도상선만 넘으면 어디서나 누구나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서 지낸다. 그러나 식생활만은 그렇지 않다. 지역마다 풍토에 따라 다른 먹거리와 민족마다 흥망에 따른 역사와 오랜 세월을 두고 빚어낸 고유의 맛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양복을 입고 양옥에서 살고있지만 식생활만은 우리맛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아직도 전통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추세로 보면 음식도 ‘의’와 ‘주’처럼 일체화 될 날이 멀지 않을 것만 같다.간과 밑맛의 신토불이우리나라는 아시아대륙 동북부에서 바다로 돌출한 반도이다. 온대지방에 속하므로 천후,기온, 습도의 양극차가 적어서 4계절이 뚜렷한 쾌적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내륙은 산악지대가 많으나 지방마다 수량이 넉넉한 하천이 흐르고 있어 작은 평지나마 고루 농작이 가능하다. 특히 일조시간, 기온, 용수 등 여건이 쌀농사에 적합하며 미작 외에도 잡곡, 채소, 과일 등 농산물이 풍요하고 다양하다. 그리고 필요한 육용가축을 사육할 만한 잡곡의 여유도 있다. 널리 동서남 3면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에는 해류와 수온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어패류와 해조류가 풍부하다. 이러한 풍토가 우리 맛을 내는 먹거리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맛의 기초 소재가 되는 우리 먹거리는 쌀을 비롯한 곡식류와 무, 배추, 상추, 파, 마늘, 고추 등 채소류, 돼지, 닭, 소 같은 육류, 조기, 민어, 굴과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산물 그리고 배, 감과 밤, 잣 따위 과실류이다.우리 먹거리는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 토질, 기온, 습도 등 풍토의 덕으로 맛이 보다 짙고 감칠맛이 더하다고 한다. 곡식류에는 특히 콩과 참깨가 메주를 쑤거나 참기름을 짤 때마다 우리 토종은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무, 배추에서 파, 마늘, 고추 등 김칫거리와 양념감은 품질이 뛰어나서 김치는 한국에서 먹어야 진짜 김치라는 말이 이미 일본에 정착하고 있을 정도이다.배, 사과와 밤 넘길 때 입안의 코를 통해 고소하고도 아련하면서 달짝지근한 미각을 느끼게 된다. 또한 콩을 삭혀서 만든 간장, 된장, 고추장은 모든 먹을거리에 알맞은 간기와 밑맛을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콩과 소금으로 창조한 발효 걸작품이 바로 간장과 된장이며 이것이 우리 맛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속이 찬 무와 배추에 파, 마늘, 고추를 양념하고 젓갈 그리고 계절과 지방 따라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김치의 맛난 맛은 이제 온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 맛으로 부상했다.채마밭과 산야에 나는 나물거리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풋내와 억센 기운을 죽인 후 간장이나 고추장으로 간을 하고 양념을 쳐서 손끝으로 가볍게 무쳐내는 부드럽고 향미 깊은 나물도 독특한 우리 맛을 풍기고 있다.쇠고기의 안심이나 등심 또는 갈비를 간장과 갖은 양념에 재었다가 구워내는 너비아니와갈비구이 그리고 양지머리와 업진을 고아 만드는 곰국에 듬뿍 들어 있는 쇠고기의 맛난 맛이 또한 우리맛이다.닭볶이와 백숙 그리고 삶은 제육과 삼겹살구이의 특유한 맛난 맛도 독특힌 우리 맛이다.철따라 선을 뵈는 어패류는 회, 구이, 저냐(전), 찜, 조림, 국, 찌개 등 온갖 솜씨로 다양한 진미를 제공한다. 더구나 어패류는 굴비나 젓갈처럼 보존용으로 건작이나 염장한 것이 특미를 내는 종류가 적지 않다. 이모든 것이 어패류의 자랑할 만한 우리 맛이다.우리맛이 굳어지기까지우리 풍토가 낳아 주는 좋은 먹거리를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솜씨로 마련한 맛이 우리맛이다. 이제 우리맛을 결정하는 조리 솜씨를 살필 차례이다조리의 기본인 가열처리에 있어 우리는 물을 이용하는 간접가열 방식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을 가지고 음식을 찌고 끓이는 방식이 태반이지 굽고 지지는 일은 가끔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목지대와 맥작지대에서는 직화가열 방식이 일반적이어서 주식인 빵은 화덕이나 오븐에서 굽고 고기도 통째 아니면 커다란 덩어리로 불 처리를 한다.우리 먹을거리는 물을 쓰는 가열 방식 때문에 물기가 많고 따끈한 것이 특징이라 밥, 국, 조림, 찌개르게 씹히면서도 탄력이 있고 고소한 기름기가 감도는 쌀밥의 맛난 맛이 우리맛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우리와 기호가 같은 일본을 빼놓고 기타 미작지대에서는 찰기와 기름기가 적은 인디아종을 선호하고 있으며 쌀을 시루로 찌거나 솥으로 지어도 밥물을 버리고 쌀알만 익힌 것이라서 우리와는 다른 흐트러진 밥을 먹고 있다.쌀밥 외의 먹을거리는 거의가 쌀밥의 맛을 도와 밥을 맛있게 배불러 막도록 하는 조연자이고 반주를 즐기는 가장의 반상에 놓이는 어육류는 안주감이라 불리는 특별한 반찬이었다.물론 경조사에 따르는 의례 음식과 잔치 음식, 빈객을 대접하는 주안상 차림 등 반찬이 아닌 요즘 말로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먹거리도 고루 갖추고 있었다.이러한 다양한 먹을거리는 세월과 더불어 독특한 소재와 솜씨가 이루어낸 성과이다. 오랜 과거는 덮어 두고 조선시대부터의 발전 과정은 궁중요리, 반가(班家) 음식, 중인음식, 향토 음식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가 있다.소재와 솜씨가 질량면에서 최고 수준이었던 궁중요리, 궁내 출입이 잦고 수시로 하사 음식을 받아 이것을 본뜬 반가 음식, 권세는 없어도 재력은 있어 집안에서 은밀하게 호사를 누리던 중인 음식, 토반(土班)들이 지방마다 개발한 향토 음식 등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그리고 우리 먹을거리가 전국적으로 비슷한 골격을 가지게 된 것은 서울에서 각지로 부임하는 관원이 오랜 세월을 두고 전파한 서울 음식 때문이라는 사실은 딴 나라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점이다. 좌우간 우리는 지금 웬만한 가정의 먹을거리가 궁중요리나 반가 음식과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조리 소재로써 우리맛의 핵을 이루고 있는 양념과 고명을 가지고 마무리를 짓겠다. 소금, 간장, 된장, 젓국, 식초 등 기초 양념을 비롯해서 파,마늘,고추,생강,겨자,후추,참기름,깨소금 그리고 설탕, 조청, 꿀 같은 감미료가 우리맛의 방향을 결정하는 양념으로 쓰이고 있다.젓국 말고는 모두가 식물성 발효제품 아니면 채소이지 버터, 크림,걀을 입혀 경단처럼 지진 고기완자는 미각과 시각을 함께 만족시키는 고명이 다. 철에 따라 쓰이는 미나리, 쑥갓, 실파 같은 채소, 표고, 석이 등 색깔이 영롱한 버섯, 잣, 은행, 호도, 생률 등 견과류도 한몫하는 고명이다.요즘 복고풍조를 타고 한과와 신선로가 재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꿀, 조청, 참기름 같은 양념을 쓰지 않는 한과와 밑에 까는 고기 고명이 없는 신선로에는 우리맛이 있을 수가 없다. 겉치레만인 우리 음식이 전통 음식의 성가를 훼손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안타깝기만하다.풍류에 깃든 식문화1.술우리 생활에서 술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지나친 음주문화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래도 술이 인간관계를 윤활하게 만들고, 예술과 동급일 수는 없지만 유색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고대부터 제천의식에는 술이 따랐다. 신라시대 부녀자들은 한가위에 편을 갈라 길쌈을 한 후 진편이 술과 음식을 장만하러 음주가무를 즐겼다.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을 즐기다 나라를 잃기도 했으니, 이 포석정은 전복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가장자리에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어서 흐르는 물 위에 잔대와 함께 술잔을 띄우면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오는 술잔을 차례로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시냇가에 선비들이 모여 사회를 베풀 때 강 상류에서 시동이 술잔에 술을 담아 띄우면 시내가 굽어지는 곳곳에 앉아 술잔이 당도하기 전에 시를 한 수 짓고 그 술을 마시며 즐겼다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이 외에도 달밤에 술자리를 마련하여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자연을 즐기기도 했다.*국화와 대작했던 신용개짚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앉으랴솔불 혀지마라 어제진달 돋아온다아희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말고 내어라유유자적하는 시인이 자연과 더불어 술을 즐기는 풍류가 절로 흥겹다. 술과 멋의 어우러짐을 극대화시켜 즐긴 선조들의 이러한 풍류는 신용개(申用漑)의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조선 성종 때의 명재상 신용개는 성품이 호방하고 술을 매우 즐겼다. 화와 대작하여 취하도록 마셨던 것이다.*향토의 술옛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장 담그기와 술 빚기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각종 조리서에는 술 제법이 큰 비중을 차치하고 있다. 대갓집 종부에게는 그 집안 특유의 술 제법이 대대로 전 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일제시대 주세법이 생기고 각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이 금지되면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지게 되었고 우리 고유의 다양한 술 제법은 당연히 맥이 끊기게 되었다. 다행히 최근, 서울의 문배주와 면천 두견주, 경주 교동법주를 정부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고, 향토주의 제법을 보존하고자 각 지방마다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조선말기 지방특산주로는 평양의 김홍로, 담양의 죽력고, 전북 여산의 호산춘, 강원도 홍천의 백주, 충청도의 노산춘, 김포의 특주, 전주의 이강주, 충남 당진의 두견주, 진도의 홓주 등을 들 수 있다.각 지역마다의 특징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면 세계 속의 우리 문화가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관광산업의 번성에 의해 국가경쟁력도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잊혀져가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노력이 정책적으로 요구되는 시기이다.2. 차*차의 역사동양에서 차(茶)의 역사는 매우 깊다. 그 최초의 기록으로는 기원전 200~300년경 중국의 촉(蜀)나라에서 발견된다. 특히 차는 졸음을 쫓고 눈을 밝게 하며 몸을 가볍게 한다 하여 애용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것은 선덕여왕 때 중국으로부터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도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라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매일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문수불에 공양했다고 전해진다.신라의 화랑들은 산천을 유람하며 경치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시는 풍류를 즐겼다. ‘동유기’ 에는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이 이들 화랑들이 차 마시며 놀던 유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고 소나무가 울창하며, 정자 곁에 다천(茶泉)과 돌화덕, 돌절구가 있었다고 한다. 술과 더불어 차가 풍류의 음식으로 자리 잡은
새로운 사상의 등장1660년에서 1789년에 이르는 시기. 유럽의 지성사 및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가 발생. 옛 권위에 대한 어떠한 복종도 거부하고 자신의 지성에 의존하려는 결단을 보여줌. 과학의 자율성을 강조. 우주를 둘러싼 신비주의의 파괴. 자연은 인간의 이해할 수 있는 시계처럼 움직인다고 생각.지적 변화의 원인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존 관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도전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신대륙 발견 지동설 인식 이러한 사실들은 성서나 고대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 체계를 요구할 수 밖에 없었다.계몽사상의 정의 및 개념“계몽주의는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한 미성숙 상태와의 결별이다. 미성숙 상태란 인간이 다른 어떤 것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미성숙 상태의 원인은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사고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을 때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이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 민중의 몽매함을 이성에 의해 깨우친다는 뜻. 본질적인 성격은 비판적 정신, 회의와 부정의 정신에서 나타남. - 신학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 이 경우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 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냄. 계몽사상 = 어떻게 살 것인가 +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세 가지 기본 전제에서 도출 우주 전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있으며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적 방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모든 연구 분야에 근본적인 의문에 답할 수 있다. 인류는 거의 무한정하게 진보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될 수 있다.전제 1, '우주 전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있으며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신의 개입이나 변덕이 아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보편 법칙들이라는 주장. 계시 종교가 과학 연구에 철저히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 그렇다고 계몽주의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은 아님.전제 2, '과학적 방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모든 연구 분야에 근본적인 의문에 답할 수 있다.' 모든 탐구 분야에 적용되는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이라는 확신. 일반법칙에 도달하기 위해 개별 현상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를 의미.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자연적 현상뿐 아니라 인간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가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전제 3, '인류는 거의 무한정하게 진보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될 수 있다.'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본성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완성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 즉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봄. 인간은 교육을 통해 귀족들과 동등자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이 보편적으로 진보할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결론에 도달.- 영국의 계몽철학 : 로크와 D. 흄 에서 시작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계약에 의한 것.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이르지 않는다고 주장.- 프랑스의 계몽철학 볼테르의 「철학서간」에서 시작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삼권 분립의 원칙. 절대 왕정의 쐐기를 박음 D. 디드로, 뷔퐁, 콩디야크 등에 의해서 「백과전서」발간 종교나 관습, 제도의 주술에 묶여있는 인간을 감성적 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자신의 주체성의 위에서 서서 새로운 세계관 처세술 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볼테르, 디드로는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간의 깊은 상관관계를 알아내고자 함.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로 완성되고 18세기 뿐만이 아닌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침. 루소 뒤에 M.콩도르세 G.B.마블리 J.르나르등은 진보사상을 주창,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 공격을 계속함.일반적 특징 : 대다수 계몽사상가들은 현실지향적인 문필가들로서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설명을 널리 전파하고 그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함.볼테르 : 누구나 공인하는 계몽사상의 제 1인자. 데카르트 주의가 팽배해 있는 프랑스에서 영국 경험론의 대의명분을 대표. 경험으로 입증된 뉴턴의 과학체계를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성격을 감소시키고 일상생활의 문제해결에 더욱 관심을 자극함. 시민적 자유의 강력한 대변자. “파렴치한을 분쇄하라!” 종교적 편협성을 가장 혐오, 세속가가 행사하는 압제적 권력을 비판. 이상적인 종교형태는 계몽군주가 통치하는 계몽군주가 통치하는 정부였다.몽테스키외 정치사상가 「법의 정신」 다양한 환경과 역사, 종교적 전통이 정치체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이 분리되고 견제와 균형이 조화를 이루는 영국의 정치체제를 선호.루소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론을 전개. 인민주권과 사회적 평등의 원리를 강조. 직접민주주의야말로 인민의 주권과 일반의지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 낭만주의의 선구자. 하부의 인민으로부터의 개혁을 역설. 현실적인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배척하고 자연상태를 찬미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침. 「사회 계약론」에서 루소의 정치 사상이 가장 명확하게 서술.“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져 있다.” 루소, 「사회계약론」 계약에 의해 국가를 건설하여 이러한 상태에서 구제하고자 하였다.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제도를 융합시키려 함. 국가 성립의 근거를 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일반의지와 인민총체에 의한 사회 변화에서 구함. 사회 계약설과 인민 주권론은 프랑스 혁명에 혁명가들을 고무시켜 혁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줌 프랑스 혁명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도 그의 사회 계약설에서 발췌한 것이다.디드로 실용적 경향의 계몽사상가. 「백과전서」를 계획하고 기고. 과학과 기술분야에서 이룩한 최신 성과를 전파함으로써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싸우고 과학의 진보를 더욱 촉진시키며 결국 인간이 처해있는 온갖 유형의 비참한 상태를 줄이고자 함.백과전서파 프랑스에서 「백과전서 :Encyclopdie」의 지필과 간행에 참여한 계몽사상가의 집단. A.투르고, 볼테르, J.루소, 몽테스키외, F.케네 등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들이 핵심.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 직업층이 총 규합한 인민전선이 백과전서파에서 형성. 이들의 작업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자본주의의 총괄적 반영이었으며 당시 진보적 사상을 총동원한 결과로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무기인 동시에 사상적 기반을 굳히는 구실을 한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들은 대체로 급진적 민주주의보다 계몽군주 체제를 옹호콩도르세. 「백과전서」의 기고가. 프랑스 혁명의 극단화 경향으로 인해 계몽사상가들의 전반적인 활동이 갑자기 막을 내렸기 때문에 최후의 계몽사상가라 불리는 인물.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의 승리를 계기로 무한하고 부단한 미래를 향한 진보가 확보되었다고 보았다.흄 상대주의적 윤리학을 옹호.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 회의주의적 입장을 전개하여 확실하게 안다고 믿는 확실성을 잠식. 종교에 대한 공격하는 운동에 가담.애덤 스미스 가장 현실지향적인 인물. 중상주의에 반대. 자유방임 경제 이론에 대한 옹호는 계몽주의의 자연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이상화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 보이지 않는 손이 부의 분배를 균등하게 균형잡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인간이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을 통하여 오류와 편견을 계속적으로 제거하는 것, 개인적 관심보다는 보편적 인간 이성에 점진적 해방을 근본에 두는 것, 이 두 가지가 계몽주의 시대의 공통적인 근본사상이라고 말함. 칸트의 계몽주의는 모든 독단적 철학의 비판과 이성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탐구로 나타난다. 칸트에게서 철학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은 철학의 이론으로서 학문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관한 이론으로서 시작한다.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 교의 지적, 정치적 체계는 인간 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치열한 비판을 받게 됨. 특히 뉴턴의 기계적 우주관으로 인해 기독교 중심의 우주관에 큰 영향을 끼치며 이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보는 움직임은 종교에도 적용,즉 합리적 종교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이신론의 출현. 이성을 종교에 적용한 결과 회의론, 무신론, 유물론 등 이신론자들의 자연종교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의 출현.인간의 실제상황이 사회를 사회계약으로 보는 견해와는 너무 달랐으므로 계몽주의는 비판과 개혁, 그리고 마침내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비판하면서 자연권의 기초를 두고 정치적 민주주의 기능을 하는 좀 더 높은 형태의 사회 조직이라는 국가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런 강력한 사상은 영국에서 개혁을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계몽주의의 한계와 비판첫째 의문은 계몽사상가들이 대중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엘리트주의자들에 불과한가 하는것. 두번째 의문은 계몽사상가들이 행동가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비현실적 몽상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 인간의 완전 가능성에 대해 훨씬 낙관적인 입장을 보였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역사사실과 함께 작용하는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지 못하였다. 원인과 특성을 자연과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나타내었기 때문.{nameOfApplication=Show}
유교철학의 이해 발표문신유학은 왜 탄생했는가...1. 들어가며...- 논의의 시작.‘신유학은 왜 태어났는가’라는 주제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제 탐구의 목적과 범위 등에 대해 미리 밝혀 둔다. 우리는 우선 신유학의 개념 정의를 통해 개괄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그러한 신유학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학문적 배경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유학의 탄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 볼 것이다.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단, 논의에 있어서 개별적인 사상가들의 철학 개념은 개괄적으로 짚고 넘어갈 뿐, 따로 장을 만들어 논의하지는 않기로 한다.- 신유학이란...중국 송대(宋代)에 일어난 학술?사상의 총칭. 신유학(新儒學)?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특히 그 시대에 발전한 형이상학을 가리킬 때가 많다.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周敦燎)?정호(程顥)?정이(程燎)?장재(張載), 12세기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등의 성(姓)을 따서 주정장주학(周程張朱學), 또는 그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염락관민학(濂洛關툼學)이라고도 하나, 단적으로 말해서 주희의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된다.송대는 태종(太宗) 이래 문치정책(文治政策)을 국시(國是)로 하여 널리 서민에 문호를 개방한 과거제도를 확립하고, 그 시험에 합격한 진사(進士)에 의한 관료정치, 그 위에 군림하는 군주절대의 독재정치 체제를 택하였다. 따라서 숱한 진사 관료를 배출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는 자도 많았다. 이 등용문인 과거의 시험과목 가운데 경(經)?의(義)가 중시되었는데, 그것이 이미 고정되어 있던 《오경정의(五經正義)》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고주(古注)를 사용하였다.경(經)과 주(注)에 한정되어 있다 해도 그 문자수가 워낙 방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암송을 강요하는 이른바 기송(記誦) 학문이 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어야 할 것이 본래의 목적과 생명을 잃기에 이르렀다. 신유학은 이 과거(科擧) 학문에 대한 비역사 속에서 그 위상과 역할이 많이 약화되어 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춘추전국 시대의 한 시기가 어떤 점에서 유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시기의 유학이 지식과 생활, 행위와 이념을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도 한ㆍ당 시대에 이르러서는 많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유학은 점점 지식과 생활의 일부, 특히 기예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범주를 한정시켜 갔고, 행위와 이념의 주체로서 하던 기능과 역할도 다른 종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교나 불교, 특히 위진 시대 이후 그 세력을 급신장시켜 간 불교에 내주게 된다. 그러므로 한ㆍ당 시대의 유학은 문학적 유학이라는 면모를 띠며, 그 실천적 측면, 즉 생활과 시대를 장악하던 사상적 유학으로서의 모습은 상실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한ㆍ당 시대가 유학의 암흑기라고 할 수는 없다. 한ㆍ당 시대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활동했으며, 그들의 학문적 업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의 유학이 그 장점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불구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학의 본령은 행위와 실천의 영역 속에 놓여 있다.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장악력이야말로 유학이 갖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한ㆍ당 시대의 유학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ㆍ당 시대의 유학은 지식의 모습을 띨 뿐, 행위와 실천, 생활을 총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상적 유학이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유학이 생활에 대한 총체적인 장악력을 가지는 시대의 중심 사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송ㆍ명 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송ㆍ명 시대가 되면 유학은 지식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행위와 생활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으며 생활과 시대에 대한 장악력도 회복하여, 시대의 중심 사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송ㆍ명 시대의 유학은 춘추전국 시대의 유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특징들을 회복하는 것이다.송ㆍ명 시대의 유학은 어떤 점에서는 복고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공자와 맹자로 대표서 한ㆍ당 시대에 문학적 지식을 펼쳤던 주인공들이었으며, 수당 시대 불교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후원자들이었다.그러나 여러 대를 거듭하면서 독점적으로 상속시켜 나갔던 이러한 계층적 구도는, 당대 중ㆍ후기에 이르면서 서서히 와해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강성했던 당 왕조는 그 왕조를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방 이민족과 투쟁을 벌여야 했으며, 왕조의 독점적인 권력과 상층 귀족 계층의 배타적인 이익에 저항하는 하층민들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 왕조는 변방에 절도사를 두고, 그 절도사에게 힘을 나누어주는 분권적 체계를 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절도사들은 임지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점차로 독자적인 힘을 쌓아 소규모의 무인 독점적 권력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을 번진(藩鎭)이라고 한다.절도사들은 초기에는 주로 변방에 임명되었으나, 중기 이후로는 내지에도 임명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안녹산의 난 이후로 더욱 가속되었다. 당의 멸망은 이 절도사 체제로부터 야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층 귀족 세력의 번영을 위해 마련된 이 절도사 체제가 소규모의 무인 국가 체제로 발전되면서 거꾸로 왕조를 허약하게 만들과 상층 귀족 세력의 이익을 침탈하는 위협 요소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무인 독점 체제는 상층 귀족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무인 독점 체제 속에서 상층 귀족 세력이 세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특권이나 이익이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층 귀족 세력은 점차적으로 몰락해 갔다. 이와 같은 당대 후기의 번진 체계는 결국 당의 멸망을 가져 왔다. 이와 함께 외부적으로 변방 세력의 발호 또한 당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번진 체계이든 변방 세력이든 문벌 세족의 특권과 이익을 보호해 주는 데는 아무 관심도 없는 세력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당이 멸망한 후 송이 등장하기까지 50여 년은 실제로는 변방 세력들의 시대였다. 변방 세력들은 새로운 왕조를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이들에게 최상층 권력으로 뛰어들 수 잇는 통로가 봉쇄되어 있었다. 최상층 권력은 번진 체계의 절도사들과 이민족 정권의 수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작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바로 하층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의 향시를 통하여 하층 관리로 등장하기도 하고, 번진 체계나 이민족 정권에 진출하여 하급 무관이나 막료 등이 됨으로써 조금씩 자신들의 입지를 확장해 나갔다. 과거 제도는 특히 이들에게 매력 있는 것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단숨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식들을 유학적 지식인으로 교육하는 데에 온 열정을 기울였다.유학적 지식을 습득해서 과거에 통과, 입신하고자 했던 이들 재지 신진 사대부 계층은 송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힘을 결속해 나갔다. 송은 당의 멸망 원인을 절도사 체제에서 찾았고, 그런 까닭에 무력보다는 문치를 표방하였다. 아울러 당의 과거 제도가 지니고 있던 부정적 측면을 보완하여 좀더 공정한 과거 제도의 틀을 갖추었다.한편 신진 사대부 계층이 유학적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학습한 유학은 송대 초기 얼마 동안은 신유학적 특징을 갖춘 유학이 아니었다. 이들이 받아들인 것은 한ㆍ당 시대의 유학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 속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이 선택한 유학도 현실과의 연계 속에서 훨씬 더 기능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띠는 쪽으로 변모될 것임을 암시한다.- 신유학의 형성-유학의 새로운 변용물론 유학이 변모하도록 만든 요인을 설명하기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이 유학을 변모하게 한 현실적 요건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또 다른 요인은 그 이념적 요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과 연계된 것이다. 당대 말기부터 5대 시대를 거쳐 세력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이들의 사상적 도구로서 유학이 선택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유학에 부여된 책무, 즉 유학이 총체적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의식이 커 가면서 서서히 한ㆍ당 시대의 유학으로부터 송ㆍ명 시대에 걸맞는 유학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북송 시대 초기의 고문(古文)운동에서 단초가 발견되다가 정학(正學)운동에 이르러 본격화한다. 범중엄(范仲淹)이 주도했던 정학 운동은 한ㆍ당 유학과는 다른 송ㆍ명 유학의 특성이 구체화되는 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송대를 통틀어 전개되는 유학의 새로운 양상은 학파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는 데 있다. 이 시대의 유학은 학파들 사이의 대립과 논쟁을 통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세밀히 갖추어 나간다. 이 때 등장하는 학파들은 크게는 세상을 어떻게 경영해 나갈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로 분화와 대립을 보이기도 하고, 작게는 신유학의 철학적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서로 갈라져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앞의 특성이 나타나다가, 후기에 들어서는 주로 뒤의 특성이 나타난다.- 송학의 형성에 작용한 사상송학 전대의 유학은 ?한ㆍ당 훈고의 학?으로 불리우며, 번쇄하고 공허한 자구주석의 학문으로, 사상으로서는 유학 보다 불교나 도교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이로부터 종래 훈고학을 부정하고, 경서의 참된 정신을 밝힌다는 목표를 세우고 또 불교와 도교에 대항하여, 종래의 유학에는 없었던 이론적인 면을 보강한다는 목적 하에 새로운 유학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송학은 불, 도에 대항하여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은 그들을 자신의 학설 속으로 받아들여서 이론체계를 내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송학은 삼교를 융합것으로 보여진다.- 송학 형성에 작용한 역사적 사회적 요인첫째로, 후한 이래의 귀족정치가 당 중기로부터 붕괴되고, 그후 당 말로부터 오대에 걸친 군벌정치의 기간을 거쳐서, 송대에 이르면 새로운 관료제도에 지지된 군주독재정치가 성립하였다.
한국유학사상 개괄적 조망앞 선 레포트에서 우리는 한국역사와 함께 한 유학의 발자취를 고대에서부터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서보면 고조선,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전기까지 미력하나마 그 시기별의 유학의 특성과 시대상황을 살펴보았다. 삼국시대의 유학은 문명화된 중국의 한자문화를 수입함과 동시에 제도적으로 앞선 그들을 모방함으로써 보다 정비되고 정열된 중앙집권적 국가체계의 방편으로 활용된 것이고(율령과 태학), 즉 사회기강확립과 동시에 위계질서 조율 및 확립, 지배계층의 후진 양성의 든든한 사상적 후원자로서의 의미가 강했었고, 남북국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사이 육두품세력의 언로를 대변하는 그리고 당시 유행하는 선종과 교합하여 새로운 사상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 이바지 했으며 또한 고려시대 내내 숭문정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무신정변을 야기하게되기도 한다. 여말 선초 신흥사대부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줬으며 이에 훈구와 사림의 커다란 두 학맥이 나뉘기도 한다. 조선 초 여러 사화를 겪으며 상호 투쟁해온 결과 결국 향촌세력과 튼실한 학문에 그 지지기반을 확고히 뿌리박고 있던 사림세력의 승리로 돌아가 조선전기말엽부터는 더 이상 사림의 아성에 도전할 세력이 없었다. 이들 사림 역시 학문적 차이와 권력 나눠먹기의 문제로 인해 붕당으로 갈리고 이는 조선의 역사가 끝나는 때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사림은 결국 성리학자들로서 조선 성리학의 커다란 두 맥은 이이와 이황을 양대 주축으로 하는 주기와 주리이며 이는 곳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분별을 낳고 훗날 주기는 실학의 흐름으로 주리는 위정척사의 흐름으로 나타나게 된다.(왜란과 호란 양란으로 인해 그 내적 반성이 가속화되었다)먼저 조선의 성립은 신진사대부의 성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무신정권 이후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학자가 대부분이며 출신은 지방의 향리출신, 중소지주로서 향촌사회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농민층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한 계층이다. 진취적 성향이 강하고 성리학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경사림의 대두여말 온건파 사대부(정몽주, 길재)의 후예로 영남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해 기호지방으로 확대된 것으로 경학에 치중하여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다. 향촌자치를 주장하였으며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며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정계진출은 15세기 후반에 훈구파가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훈구 대신들의 비행이 늘어나자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리하여 성종 때 영남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삼사에서 언론, 문필직을 담당) 사림세력의 기반은 성리학과 중소지주로서 경제적 기반을 굳힌데 있었고 훈구세력의 일방적 비대화와 정권독점의 방지를 목적으로 사람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사림의 정치적 성장이에 등용된 사림세력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자신들의 경제적 입지확보를 위해 훈구세력의 대토지 소유를 비판하였다. 이쯤해서 성리학의 굵직한 두 흐름을 짚어봐야할 거 같다. 먼저 관학파가 있는데 이는 곧 훈구파로 성리학의 정치지도를 이념화하였다.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정신으로 삼아 부국강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에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불교의 폐단이 시정된 이후에도 성리학 외의 사상에도 관대했으며 성균관, 집현전을 통해 배출되어 수준높은 근세 문화를 창조하였다. 다음으로 사학파 즉 사림파인데 오넌파 사대부의 후예로 유교적 명분과 의리에 의거해 왕조교체를 비판하고 향촌에서 교육과 향촌 건설에 주력하였다. 향촌자치를 추구했으며 성리학 외의 타 학문을 배척하였다. 성종때 삼사언관직으로 진출해 훈구세력의 비행을 공격하여 사화를 발생시키게 된다. 결국 사화의 원인은 주자학의 폐단과 사회, 경제제도의 모순, 연산군의 실정, 사림과 훈구세력의 정치, 학문적 대립에서 기인한 것으로 연산군 대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과 관학파의 비행을 사초에 올린 문제로 훈구파가 사림을 제거한 무오사화 그리고 같은 연산군 대에 윤비폐위사건의 훈구파의 관여사실을 트집잡아 궁중파가 무중파를 제거한 갑자사화 다여기서 싹트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조광조의 개혁정치인데 후세 유학자의 칭송을 받은 그의 개혁정치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그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현량과를 설치하고 위한삭제 즉 중종반정에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세력의 훈작을 삭제해 훈구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도학정치와 균전제를 주장했으며 공납제의 폐단 시정을 주장했고 불교, 도교(소격서)와 관련된 종교행사를 폐지함과 동시에 언문청을 실시해 한그를 보급하였다. 또한 향약의 보급과 실시 소학교육의 강조가 그의 특기할 점이다. 이러한 훌륭한 정견에도 불구하고 훈구의 모략으로 주초위왕이라는 암계에 휘말려 결국 죽고 말았다.서원과 향약조선유학의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바로 서원과 향약인데 한번 살펴보자 서원의 기원은 중종때 주세붕이 풍기의 죽계에 백운동서원을 세움으로서 비롯된다. 그 기능은 선현의 제사와 후진교육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연구가 핵심인데 국가에서 사액서원을 지정하여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는 등 국가가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사림의 지방조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로 인해 성리학연구가 심화되었고 학문의 지방조직으로 발전이 이뤄졌다. 한편으로는 붕당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고 국가재정을 약화시키는 폐단도 있었다.다음으로 향약은 전통적 공동체 조직을 계승하고 유교주의에 입각한 삼강오륜의 윤리를 가미한 향촌의 교화규약으로서 태조때 풍패향에 대한 향헌41조를 제정해 실시했고 중종때 조광조가 증손여씨향약을 본따 실시했으나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으며 명종때 예안향약(이황), 서원향약, 해주향약(이이)가 등장했고 선조때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향청과 서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도약정, 약정, 간사 등의 임원을 두고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도덕을 상민과 노비까지 지도하게끔 하였다. 덕업상권, 과실 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은 대표적 향약의 덕목이다. 이 영향으로 국가의 지방관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성리학의 융성사화로 인한 많은 학자들이 정계진출을 단념하고 학문연화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주리파가 있는데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의 확립에 기여했는데 학자로는 이언적이 선구자이며 이황이 이를 대서했으며 영남학파를 형성하게 된다.(유성룡, 김성일) 훗날 위정척사사상에 영향을 준다. 사단칠정론을 언급하자면 맹자가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사단이며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을 말하는데 이황은 사단은 이에서 나오는 마음이며 칠정은 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겸하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즉 사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고 칠정은 기의 발동에 속하는데 이것은 인성에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해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이기공발설을 주장했으며 이를 다시 이이가 뒷받침해 이기일원적 이원론을 강조하였다. 이황의 성리학은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주리철학을 집대성 했으며 이이는 이기일원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주기철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러한 성리철학의 공통점은 우주자연의 질서와 인간사회의 질서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천인합일론이며 인간의 본성은 착하나 수양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기에 있어서 이를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주리적 이기론이 특징이며 모든 사물을 대립투쟁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통일관계 생각한 것이 특징이다. 이 성리학의 영향으로 심오한 이기철학이 성립되고 지나친 도덕주의로 부국강병을 소홀이 했으며 상공업과 예술을 천대시 했으며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발전과 왕도적 정치철학을 확립해 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한면이 있고 존화사상과 외침에 저항한는 의식조장, 이단배척, 배타의식 조장 등의 양면적 특성도 지니게 된다. 임진 왜란 연후에 국민의 자각이 등장하고 일부지배층에서 존화사상이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일어난다. 자아반성의 풍조로 차후 실학 발생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병자호란을 계기로 발전된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는동시에 종가와 방계의 위계질서의 확립이 이뤄졌고 양반 문벌제도의 강화에 기여한 바가 있었다.연후 사회변화에 따라 실학에 대한 필요성과 관심이 제고되었으며 성리학파에서도 주기설적 입장인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북학파에게는 물론 훗날 개화사상가들의 철학적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주리적 입장의 영남학파는 왜란, 호란, 서학의 전래로 기정진이 이일원론으로 정립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실학의 발생근대적 실학이 본격화하게 되는 시기는 매우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로 세도정치로 인한 수령과 향리의 부패, 빈번한 재난과 질병, 도적집단의 횡행, 서양세력 즉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여러모로 국가존립에 대한 위기의식이 드높았던 때이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지주제의 변동, 상품화폐경제의 진전, 수공업 및 광업의 발달, 신분제의 붕괴 따위로 서구 근대화과정의 사회적 특질과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이러한 조선 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종래의 신분적 지배, 예속 관계와 사농공상의 직분적 사회구성 위에서 기능하고 있었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서학의 전래와 고증학의 영향, 영정조의 학문장려 등도 그 발생배격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재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주자학설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사문난적이라 하여 죽음을 다하게 된다. 이러한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동향은 더 나아가 양명학의 도입으로 나타난다. 명의 왕양명이 주관적, 실천적 유학체계의 주기론적 입장을 기치로 세운 학통인데 이런 유연한 사상체계는 당시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주로 정권에서 배제된 경기지방 소론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처음에는 주자학을 완전히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해 양자의 조화를 이루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점차 주자학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하고 것이다.
荀子의 禮治主義서론.오늘의 삶이 한없이 각박해져 가면서 儒學의 정신이 부활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난맥화 된 오늘의 가치관을 두고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말의 회환을 금할 수 없다. 오랜 전통과 사상이 무너져가고 인의와 예절이 땅에 떨어지고 있는 이러한 세태 속에서 총체적 위난의 징후들을 몸으로 느끼자니 불현듯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대체 오늘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겠는가? 하는 극히 당연한 질문 앞에 당황하는 우리들에게 ‘荀子’의 사상은 어쩌면 명쾌한 해답을 던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그 사상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자세히 고찰해보고 그가 가지는 역사상의 위치를 재평가 해보고자 한다.1. 荀子의 생애荀子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는 사마천(B.C 145 ~ B.C 86?)의 열전이 가장 대표적이다. 荀子는 B.C 312년경 趙나라 (지금의 산서성)에서 태어났다. 荀子는 고향에서 공부를 해 열다섯 살에는 수재라 일컬어졌다. 이때 제나라 직하에는 위선왕(威宣王)때부터 임금의 보호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며 연마하고 있었으므로, 齊나라 민왕 말년에 荀子도 그곳으로 가 학문을 닦았다. 직하에는 儒家를 비롯해 墨家, 道家, 法家, 名家 등에 속하는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자유로이 자기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한 때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荀子는 이곳에서 폭넓은 학문의 기틀을 잡았을 것이다. 민왕이 죽어 직하의 여러 학자들이 흩어졌으나 양왕(襄王)이 다시 학자들을 모아 문화의 부흥을 꾀했다. 열전에 의하면 荀子는 이 무렵 가장 연장자로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제주(祭酒)라는 존경받는 벼슬을 세 번이나 지냈다 한다. 그러나 荀子는 모함을 받아 齊나라를 떠나 楚나라로 갔다. 楚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은 荀子를 맞아 난릉 땅의 수령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모함되고 있었고 이와 같은 난세에서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도덕심에 호소하는 정치의 성공은 절망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강제력을 가진 정치의 원리가 필요했고 그리하여 그는 보다 강제적 제도적 법적인 체계성을 띤 예치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다.3. 儒家에서의 순자의 위치周나라는 크게 서주(西周 B.C 1050~ B.C 771)와 동주(東周 B.C 770~ B.C 256)의 시대로 나뉜다. 春秋時代에 孔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仁과 德을 바탕으로 한 사상의 체계를 세워 儒敎를 창설하고 그 가르침을 세상에 폈다. 이러한 孔子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戰國時代라 불리는 더욱 어지러운 세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할수록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강렬해, 孔子의 가르침은 여러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고, 그밖에도 자기 나름대로의 경륜으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수많은 사상가들, 이른바 제자백가가 앞을 다투어 나타났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혼란을 극한 기원전 350년을 전후해 유가에는 孟子에 뒤이어 荀子(B.C323?~ B.C 238?)라는 사상가가 나타났다. 孔子의 사상은 孟子와 荀子에 의해 더욱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다른 학파들을 압도하고 오랫동안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본디 孔子의 가르침에는 仁과 義, 또는 忠과 信 같은 德을 숭상하는 내면적인 정신주의와 실행과 예의를 존중하는 외면적인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정신주의적인 면은 曾子를 거쳐 孟子에게서 발전하였는데 비해, 형식주의적인 면은 자유, 자하를 거쳐 荀子에게로 계승되었다. 孟子가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荀子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荀子는 틀림없이 孔子의 사상을 이어받은 儒家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학자들 자체에서 이단자로 취급되어 왔다. 그것은 荀子가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고 주장하며 예의와 함께 형벌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해 法家에 가까운 견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荀子의 사상은 儒家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므로 행위의 규범이 될 수는 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따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선택과 판단에 의해 실질적 행위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자질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순자는 이미 “자질과 지능은 군자나 소인이나 한결같다”(材性知能. 君子小人一也. 「榮辱」) 고 하였다. 본성은 모든 사람들이 가진 바가 같고 재능과 인지능력 또한 모두 같다. 본성, 인지능력, 재능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성기위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악한 본성을 바꿔갈 수 있는 능력 또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4. 이심치성(以心治性)마음으로 본성을 다스리는 것에서 나아가 예의를 통해 본성을 다스리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마음의 인지 능력이 도를 인지할 수 있고, 인지한 후에야 도를 긍정할 수 있다. 예의를 인지함으로써 예의를 행위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행위를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음이 긍정하는 것을 따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악한 본성이 마음이 긍정하는 바를 따라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부족하다. 본성을 다스릴 수 있는 필연성을 인간 내부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순자의 심론인간이 어떻게 도를 인지하는가? 심이다. (“人何以知道? 曰, 心.” 『荀子』「解蔽」)순자가 말하는 心은 사고하고 분별하는 심으로서 지식심, 認知心이고 인지주체이다. 이는 정통유가(공자-맹자로 이어지는)에서 말하는 심이 仁으로 인식하는 심으로 덕성층의 仁心이며 실체로써의 도덕본심인 것과 다르다.순자는 인간은 날 때부터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이것은 心의 기능으로 여겨 心이 도를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도를 인지할 수 있는 이유는 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의 선택, 판단, 사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심의 ‘主宰性’을 도출할 수 있다.순자가 말하는 理를 보는 인지심은 인지할 수 있고 사고할 수 있으며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인지심의於是就也. -예론“성인의 덕이 두터운 것은 바로 예를 닦아 거듭 쌓았기 때문이요, 성인의 덕이 큰 것은 바로 예를 넓혔기 때문이요, 성인의 덕이 높은 것은 바로 예를 존중했기 때문이며, 성인의 덕이 밝은 것은 바로 예의 실천을 극진히 했기 때문이다.”厚者禮之積也, 大者禮之廣也, 高者禮之隆也, 明者禮之盡也. 예론2-1. 그렇다면 예는 어디서 그 뿌리를 둘 것인가?“예에는 세가지 근본이 있다. 첫째로, 천지(天地)는 생명의 근본이다. 둘째로, 선조(先祖)는 종족(種族)의 근본이다. 셋째로, 인민의 스승인 군주는 사회의 안정(安定)의 근본이다.천지가 없다면 결코 인간이 생겨나지 않는다. 선조가 없다면 결코 자손이 출현하지 않는다. 스승인 군주가 없다면 결코 사회가 안정될수 없다.따라서 셋 중의 하나라도 빠진다면 사람은 누구라도 안태(安泰)할 수가 없다.“禮有三本. 天地者, 生之本也. 先祖者, 類之本也, 君師者, 治之本也.無天地惡生. 無先祖惡出. 無君師惡治. 三者偏亡焉, 無安人.위의 글은 「사기」의 예서(禮書)에 수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지는 변하지 않는 규범성을나타내고, 선조(先祖)는 예가 혈연적 원리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수 있다. 군사(君師)는예를 사회에 자리 잡게 하고 인민에게 예를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세가지를예의 근본으로 보는 것이다.3. 예의 구체적인 형태◎예의 규정“예의 규정은 위로는 규범을 하늘에 구하고, 아래로는 규범을 땅에 구하고, 그 중간에서는 규범을 사람에 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평화롭고 통일된 집단생활을 이루기 위한 근거로 삼는 법칙은 모두 그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上取象於天, 下取象於地, 中取則於人. 人所以?居和一之理盡矣. 예론◎예를 나태내는 법“수식(修飾), 곧 형식적인 면이 크게 드러나고, 성정(性情), 곧 내용적인 면이 간략한 것은 예가 융성한 것이요, 반대로 형식적인 수식이 간략하고 내용적인 성정면(性情面)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것은 예가 융성하지 못하고 박한 것이요, 수식과 성정 이 두 가지가 서하고, 사광(師曠)의 밝은 청각으로도 6률(六律)을 쓰지 않으면 5음(五音)을 바르게 탈 수 없으며, 요·순의 도(道)로도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으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없다." 하였다.『孟子』 「梁惠王章句」 孟子曰, 「離婁之明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圓, 師曠之聰, 不以六律, 不能正五音, 堯舜之道, 不以仁政, 不能平治天下.순자의 법후왕(法後王)선왕이 남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학문의 위대함을 모른다.선왕의 도는 충신 효자의 법도이다.선왕은 예의를 분명하게 하여서 백성들을 하나로 통일한다.『荀子』 「勸學」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禮論」 先王之道, 忠臣孝子之極也.「富國」 先王明禮義而壹之.이 말들은 순자가 선왕의 도에 대한 그의 기술 들이다.하지만 그는 선왕의 도는 너무 멀고 오래되어 미혹되고 유실됨이 있을수 있으니 가까운 후왕의 도를 따를 것을 주장했다. 또한 후왕의 예법으로 미루어 선왕의 예법도 알 수 있으므로 후왕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령된 사람은 문과 뜰 사이에서도 오히려 속이려고 드는데, 하물며 천 년 전의 먼일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 오제(五帝) 이전의 사람으로 전해 오는 이가 없는 것은 현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오제 이전의 정처가 전하지 않은 것은 좋은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우왕과 탕왕의 정치는 비록 전해지기는 하였지만 주나라 때의 정치처럼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좋은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전하는 것이 오래되면 간략하게 되고,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전해진다. 간략하면 대강만 열거하고, 자세하면 세세하게 열거한다... 그러므로 예법이 오래되면 전하지 않고, 예악 전장 제도가 오래되면 단절된다.”『荀子』 「非相」 妄人者, 門庭之間猶可誣欺也, 而況於千世之上乎?... 五帝之外無傳人, 非無賢人也, 久故也, 五帝之中無傳政, 非無善政也, 久故也. 禹湯有傳政而不若周之察也, 非無善政也, 久故也. 傳者久則論略, 近則論詳. 略則擧大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