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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고대사
    서론중국의 고대사회는 하, 은(상), 주에서 춘추와 전국시대를 지나 진나라와 한나라인 진한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대사회는 그 나름의 사회, 경제,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한 왕조가 무너지고 다음 왕조가 이어질 때 이전의 것이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또한 왕조를 거치면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물론 사회가 발전해가면서 이전의 방식과 나름의 차이를 가지고 있겠지만 더욱 보완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옛 문화를 이어가려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대사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이 가지는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그런 의미에서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진나라가 최초의 통일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 또한 진나라가 멸하고 나서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라로써 또 하나의 통일제국이다. 이러한 나라들이 생기기까지 많은 노력들이 필요했으며, 또한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었던 진나라는 시황제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고 한나라는 무제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훨씬 더 빛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진나라의 성립과 한나라의 성립, 그리고 진한제국의 사회경제가 고대사회의 사회경제에서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는지 알아보자.본론Ⅰ 중국 고대사회1. 농업의 발전농업의 발달은 여러 면에서 종족사회를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도록 촉진시켰다.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옥한 토지와 따뜻한 지역, 그리고 곡식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물 등을 얻기 위해 어떤 형태의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힘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침략이나 약탈로부터 노동의 결실을 보호하는 데도 필요하였다. 또 물의 공급도 농업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효율적으로 수원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강우량의 부족에 대비하여 수로를 파야 했고, 수로를 정비하고 물을 공급 중국인의 주된 생활방식이었다. 초기의 농경방식은 나무를 태워 땅을 정지하고 나무재를 비료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초지를 개간하는 방법을 몰랐으며, 농토에 대해서도 소유의 경계를 정하지 않았다. 농경발생의 초기에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한 곳에 씨를 뿌리고는 다른 곳으로 사냥을 떠났다가 추수할 때가 되면 다시 수확을 하기 위해 돌아오곤 하였다. 후에 사람들은 일정기간 버려졌던 땅들은 다시 비옥해져 경작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몇 군데의 농토를 번갈아가며 경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더욱 정착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자연적 인위적 요인들은 농작물의 수확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관개?비료?능률적인 농기구 이외에 우경도 농작물의 생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경을 하면 고랑을 깊게 팔 수 있으며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고 인력을 줄일 수도 있다. 상 이전부터 소는 수레를 끄는 데 쓰였고, 상나라 사람들은 수레뿐 아니라 쟁기를 끄는 데도 소를 이용했을 것이다. 경작을 위해 땅을 개간하는 일 가운데 흙을 부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끄는 쟁기에 있어 술바닥의 부착은 특수한 장치였다. 더구나 미개간지는 소로 쟁기를 끌게 하지 않으면 땅을 갈기가 매우 어려웠다.그러나 서주시대의 문헌에는 대규모로 우경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에 인력이 풍부하여 인력을 줄일 기술의 개발이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소에게는 식량을 생산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는 쟁기를 끄는 데 그다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르러 각 나라간의 싸움이 빈번해지자 군사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어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마침 이시기는 철기가 널리 사용되었고, 이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므로, 인력을 줄이고 농업의 생산효과를 증개시키기 위해 우경을 행했을 것이다.)2. 제사고대문화에서 종교는 군사와 더불어 통치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종교는 고대문화 가력은 최고신인 제가 부여한 것으로 믿었다. 상왕조에서 제를 최고신으로 하고 상왕국에 복속된 여러 종족의 수호신들을 그 밑에 배치시켜 신의 계보를 만들었다. 각 신들의 권능과 계보상의 서열은 그 신을 받드는 종족이 상왕국 내에서 갖는 지위가 반영된 것이었다. 상왕조에서는 이러한 신들에 대한 제사를 총괄함으로써 종교를 통하여 종족들간의 유대를 강화하였다.주왕조의 최고신은 하늘, 즉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은 주족의 수호신이었는데 주족이 상왕조를 멸망시키고 주왕국을 건립하여 최고 지배족이 되자 주왕조의 최고신이 되었다. 상왕조의 최고신은 유독 상족만을 보호하는 신이었지만 주왕조의 최고신은 주족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과 왕조를 초월한 존재라고 인식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것은 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킨 것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상나라 때와 그 이후의 사람들은 신들이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지 않고 행복과 축복을 내려달라는 바람에서, 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효율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점을 쳐서 그 신이 재앙을 내릴 것인가 복을 줄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제물을 바쳐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갑골복사로부터 조상신과 자연신에 바쳐지는 제물로는 술?음식?음악?춤과 패옥 등의 귀중한 물건들,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희생물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Ⅱ 진한제국1. 진한제국의 성립진족은 고대 영성의 부족 가운데 하나였으며, 직계 시조는 비자이다. 비자는 주 효왕 때 양마에 공을 세워 진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주가 기원전 770년에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진 양공이 주 평왕을 도운 공이 커서 제후에 봉해져 진을 세웠다. 이렇게 세워진 진은 전국시대 중기 효공 때 상앙이 제안한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 개혁인 변법을 단행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246년에 정이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황제이다. 진 진왕 정을 보필하면서 많은 중대 정책을 제정하였다. 진왕은 그의 계책을 채용하여 기원전 230년 한을 멸한 것을 시작으로 이어서 조, 연, 위, 초를 멸하고 남은 제를 기원전 230년에 평정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시황제가 일으킨 흉노정벌이나 만리장성의 축성을 비롯한 여러 사업들은 모두 농민들의 크나큰 희생 안에 완수되었다. 이런 사업들은 이루기 위해 노동 가능한 남자들을 노역노동이나 병력에 차출되어 갔는데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을 잃어 생산은 위축되었고 더욱이 무거운 세부담으로 끼니도 어려워 이산이나 기아에 쫓았다. 이런 삶이 계속 되다 보니 농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고 진에 대한 반항의 불을 지핀 것은 진승과 오광이라는 두 농민이었다. 진승 등은 대택향 주변의 현성을 공략해 불만을 품은 농민을 규합하면서 진로를 서쪽으로 향했다. 이전 전국시대 한때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을 점령하고 이를 본거지로 정하고 진승은 추대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장초라 이름 짓고 진왕조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진승은 주장을 장군으로 한 수십만의 주력군을 진의 수도 함양으로 향해 공격시켰다. 하지만 주장의 군은 패하였다. 이리하여 진승과 오광은 봉기 후 겨우 반년 만에 살해되고 그들이 세웠던 농민정권은 붕괴해 버렸다. 진승, 오광의 패배의 뒤를 이어 반란군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항우와 유방이었다. 진을 타도한 후의 모든 일의 처리는 항우의 지휘봉에서 이루어졌다. 항우는 공적이 있던 장군 등 18명을 왕으로 삼아 전국에 분봉했다. 그러나 시세에 역행한 항우의 이러한 조치는 동시에 새로운 전란의 씨앗을 뿌렸다. 불만을 품은 유방이 항우와 대결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항우는 유방에게 지고 한왕조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엄청난 희생 위에 세워진 이 신정권은 결코 농민정권이 아니고 봉건적 지배왕조로서 농민 위에 군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방 자신이 농민 출신이고 또 진의 압정에 반항하여 일어난 농민의 활력을 몸으로 체험한 것만으로 농민에게 휴식을 주고 농민의 생활을선제의 현손인 두 살의 어린 영을 황태자로 세우고 자신은 ‘가황제’라고 했다. 그리고 참위설로 하늘의 의지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부명에 따라 한의 수명은 끝났다고 하여 스스로 진천자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이라하여 한의 천하를 탈취했다. 기원후 8년 12월의 일이다. 왕망정권에 대한 반란은 그가 섭정하던 기원후 6년에 일어났고 이후 해를 거듭함에 따라 전국에 걸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농민이 들고 일어나자 각지의 호족이나 지주들은 각기 자위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중에 강력한 것은 남양의 호족으로 한왕조와 혈연관계가 있는 유인과 유수의 형제에게 모인 집단이었다. 신왕조는 23년 10월로 왕망 일대로 겨우 15년만에 멸망해 버렸다. 그때 유수는 하북일대를 진압해 독립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25년 6월에는 장수들에 의해 추대받아 호에서 황제의 위에 올라 연호를 건무라 정하고 10월에는 낙양을 공격하여 그곳을 수도로 삼아 한제국을 재흥시켰다. 왕망에게 찬탈되기 이전의 한을 전한이라하고 유수가 재흥한 한을 후한이라 하여 구별하는데 유수는 후한 초대 황제로 광무제라 불린다.2. 진한제국의 경제진?한시대의 사회생산력은 크게 발전했다. 농업에서의 생산도구와 생산기술 면에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우선 철제의 농구와 소에 의한 밭갈이가 널리 보급되고 개선되었고 쟁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신형 농기구가 많이 개발됨과 아울러 여러 용도에 따른 농기구의 종류도 점차 완비되어 갔다.한 중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철제농기구는 더욱 많아졌다. 또한 농업생산 및 축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수상운수에 도움을 주는 수리시설들이 건설되었다. 제염과 제철 및 방직은 진과 한시기의 삼대 수공업이었다. 소금은 해염, 지염 및 정염이 있었다. 제철의 규모와 기술은 한 중기 이후에 특히 큰 발전을 가져왔다. 한 중기에는 백색 주철보다 질이 좋은 회색 주철이 나타났다.방직수공업은 진?한시대의 민간가정에서의 주된 수공업이었으며 각지에서 생산되는 원료가 각각 달랐으므로 견.
    인문/어학| 2008.07.06| 6페이지| 1,000원| 조회(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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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14세
    < 영상 >태양왕 루이14세는 미의 제왕이었으며 호화로움의 제왕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국가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랑스 16세기 말 정치 및 종교전쟁으로 국가가 황폐해 졌으나 앙리4세가 왕위에 오르고 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의 암살로 루이13세가 왕위에 오르나 일찍 죽게 되고 루이14세는 5살에 왕이 될 수 있었으나 프랑스가 혼란 상태여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어머니 모흐안느가 섭정을 하였다. 모흐안느는 루이에게 절대군주가 되어야 하지만 신 앞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상을 항상 주입시켰다.루이는 16세에 즉위하게 되고 그의 왕권에 도전했던 귀족을 처벌함으로써 귀족세력을 약화시켰다. 1650년대 말 프랑스는 활기를 되찾게 되나 고문관회의에서 귀족을 몰아내고 직접 통치를 나서게 된다. 그는 왕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베르사유궁전을 짓는데, 이로 인해 나라전체가 빈곤해지게 되었다. 베르사유궁전은 프랑스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과시를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루이14세는 프랑스의 잠재력을 간파하여 상업, 예술, 과학, 병력이 발달하면서 국가가 발전하게 되었다. 1960~70년 이 시기가 프랑스의 유래 없는 번성의 시기였다. 그러나 1660년대 전쟁을 시작하여 1년에 한번은 꼭 전쟁을 일으켰다. 1672년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공격하여 6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승리했지만 경제는 붕괴되었고, 왕실의 사치는 줄어들지 않았다.1685년 앙리4세의 랑트칙령을 폐지하면서 신교도들이 박해를 받게 되자 국외로 이주해ㅏ가면서 국민의 사기가 침체되었다. 그리고 1701년 스페인 기승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영국,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독일 연방국가가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루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비용이 너무 커 국가가 피폐해졌고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민들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712년 개전이후 오스트리아군대를 무너뜨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나 프랑스 국력은 하락하게 되었다.루이14세 그는 제위기간이 제일 길었으며 그의 치세 때 프랑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789년 혁명이 프랑스를 뒤덮게 되고, 군주제는 붕괴되었지만 루이14세가 세운 근대국가 프랑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감상 >루이14세는 절대군주이며 태양왕이라고 불린다. 이 때 태양왕이라는 뜻이 태양처럼 뜨겁게 프랑스를 번성시켰다는 의미에서 불리는 것인지, 태양처럼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지 아님 둘 다인지 둘 다 아닌 것인지. 내가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뜻대로 행하였다는 의미에서, 프랑스를 한 때 최고로 번성시켰다는 점에서 절대군주는 맞으나 태양왕이라는 호칭의 의미를 좋게 해석하지 못하겠다.루이14세는 호화로움의 제왕이었지만 그 호화로움이 가져다준 것은 국민들의 가난이었다. 왕으로 태어나 왕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고 왕으로 죽어야했던 그의 삶에서 국민들의 삶을 생각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그의 삶에서 남은 것은 호화로운 베르사유궁전과 전쟁으로 힘겨운 국민들의 삶이었다. 어느 나라의 왕이든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나라는 결국 한가지 길로 갈 수 밖에 없다.항상 자신이 최고여야 했고 2등을 인정하지 못했던 루이. 그는 자연 또한 자신의 발 아래에 있어야 했다. 자신에게 신성함이 있다고 믿었고 신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연을 마음대로 사용해 정원을 꾸몄고 사치하였다.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져 갈 때조차 그는 베르사유궁전에서 정원을 산책하였으니 그의 삶은 나라와 동떨어진 동화속의 삶이었을까?
    인문/어학| 2008.07.06| 2페이지| 1,0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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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
    Ⅰ 서론Ⅱ 본론1. 등소평의 개혁1) 경제체제개혁2) 정치체제개혁2. 등소평의 개방1) 사상해방2) 현대화를 향한 추세Ⅲ 결론Ⅰ 서론오늘날 중국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에 이르기까지 대국으로서 당당히 국제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사실 중국은 모택동의 혁명사상을 이어 등소평체제가 성립되면서 경제발전에 있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이러한 안정 속에서 모두가 ‘언젠가는’이라는 단어로 예상하고 있었던 일일 것이다.모두가 아는 것과 같이 중국은 13억이라는 거대한 인구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인구가 중국의 미래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금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인구가 많은 일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좋을지나 국민소득이 세계 선진국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지는 확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중국은 1949년 공산체제로 출발하여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이룬 발전을 지금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자.Ⅱ 본론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1기 3중전회에서 시작하여 당 제12차 대표회의 이후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개혁?개방은 농촌개혁으로부터 도시개혁, 경제체제 개혁으로부터 여러 방면의 체제개혁, 대내적 활성화로부터 대외적 개방으로 꾸준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은 등소평이 제시한 실사구시, 사상해방 이론에 근거하여 중국의 현실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이룩하기 위한 필요에서 실시되어 왔다.)등소평은 개혁을 진행하자면 지속적인 대내적?대외적 개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제12기 6중전회에서 중국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은 경제건설이 중심이 되어 경제체제 개혁, 정치체제 개혁, 정신문명 건설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1. 등소평의 개혁1) 경제체제개혁개혁?개방을 통한 중국의 경제개혁은 생산력을 발전시켜 사개혁시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의 제1단계(1979~1984)는 농촌에서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84년부터는 제2단계로 경제개혁은 도시지역의 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농촌개혁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이후 경제개혁운동은 집단농업부문에서 생산대의 자율성 증대와 농민들에게 자신의 소규모 농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농촌 자유시장에서 팔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 것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공식적으로 가계 차원의 농업의 분사화는 금지되었지만, 안휘성에서는 당 서기인 만리에 의해 생산대가 각 가구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임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각 가구는 생산대에게 일정량의 생산물을 책임지게 하는 농가생산책임제가 실시됐다. 이러한 제도는 농가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983년에는 중국의 전 농가에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농민들은 전민소유인 토지를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사용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동시에 정부는 농산물가격을 3배 인상함으로써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더욱 고취시켰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인상과 할당량 이상의 농산물에 대한 정부구매의 확대로 농가의 수입은 증대되었으나 그만큼 정부의 부담도 늘어났다. 정부는 이러한 재정 부담을 계속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서 정부는 1985년 2차 농업구조 개혁안을 실시하여 곡물, 면화 및 식용유에 대한 정부의 의무구입제를 농민과 정부의 수매계약제로 전환했다. 이렇게 하여 기본 농산물의 시장점유율은 증가하게 되었다. 동시에 과일과 채소, 생선, 육류, 계란 등의 판매가격은 정부의 토제를 받지 않게 되었고, 농촌의 유휴노동력 중 상당 부분이 향진기업에 취업할 수 있게 되었고, 농민들은 그들이 분양받은 토지를 판매하거나 임대하고 소도시에 이사하여 공장에 취직하거나 상업에 종사하거나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러한 토대 위에서 농촌의 산업구조가 조정되고 농촌의 공업?건축업?운수업?상업?요식업 등 비농업분야의 생산이 농촌사회의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되게업?목축업?어업 등 온갖 업종이 왕성하게 되고 농촌의 산업구조와 농업 자체의 구조도 풍부하고 합리적인 추세로 나가게 되었다.)농촌개혁이 추진되는 동안 도시에서는 제조업분야에서 시험적으로 개혁이 시도되었다. 1979년부터 몇몇 기업에 자주권을 주어 노동효율에 따른 분배의 원칙을 시도했다. 이후 1984년 10월 중공당 제12기 3중전회에서 이후 경제개혁의 중점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져 본격적인 도시개혁이 시작되었다. 또한 중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고 기업의 자주권을 강화하며 사회주의 상품경제의 적극 추진 및 불합리한 가격체계를 시정해야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그러나 중국경제가 과잉 및 중복투자가 이뤄지고 경기과열로 인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1988년 9월 중공당 제13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중국정부는 강력한 긴축정책인 치리정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으나 개혁?개방의 퇴조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1992년 봄 등소평이 중국 남부의 경제특구를 방문하면서 「남순강화」를 발표하여, 개혁?개방을 둘러싼 갈등을 정리하고 그 동안의 개혁?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개혁?개방을 보다 가속화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냈고, 1993년 3월에 개최된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을 수정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 실시를 헌법상으로 명문화했다.)2) 정치체제개혁정치체제 개혁이란 중국공산당이 혁명적인 대중정당에서 실용주의적 체제유지 지배정당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경제개혁 전개와 심화에 따라 당이 복잡한 경제문제와 행정적 정책결정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등소평은 1980년 8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행한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이라는 연설을 통해 당?정 미준리 및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문제를 비판했다.) 이는 권력이 당에 집중되어 당의 업무와 국가기구 업무의 한계가 불분명하여, 당이 국가기구의 업무에 일일이 간섭함으로써 행정능률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법제화를 통해 국가기관의 권한과 직먼저 이당대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다음으로 당의 직능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당조직과 국가정권의 직능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다. 또한 정부기구와 중복되는 당위원회 사무기구는 폐지하되 그것에 의해 관리되어 온 행정사무는 정부의 관련부서로 이관시키고, 정부 활동의 통일과 능률 향상에 불리한 당그룹은 철폐하여 당?정분리를 보다 철저하게 실행하려 하였다.그러나 보수파의 반기로 분열되어 당?정분리는 제한적으로 실시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천안문사태 이후에 개혁정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정치?사회?경제방면에 대한 당의 강력한 통제는 경제개혁에 유해했다.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추진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정치개혁도 다시 무대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지방정부와 기업에 보다 많은 자율성이 주어지고 당그룹 지도체제도 1995년 초에 철폐되었다. )1980년데 추진된 정치체제 개혁의 중점은 지나치게 방대한 정부기구를 간소화하고 권력을 분산시켜 관리의 효율화를 재고시키는 데 두어졌다. 등소평은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기구개혁의 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방대하고 중첩되는 기구는 철폐해야 하며, 간부 대열을 혁명화?연소화?지식화?전문화해야 한다. 둘째, 인원감축 셋째, 중앙 국가기관의 간소화방안은 원칙적으로 정치국에서 비준한다. 넷째, 간소화는 인원을 감축함과 동시에 정치적 품성이 높고 전문성과 실천 경험이 있는 젊은 인재를 간부로 충원해야 한다고 하였다.이러한 원칙에 의거, 당기구를 개편했다. 그러나 정부기구는 간소화되었지만 과도한 인원을 감원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기구 개혁은 경기과열,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 심각한 경제부작용을 처리하는 데는 무력했다. 또한 지나친 직원 수의 증가는 기능 중첩, 효울 저하, 관료주의 현상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기업경영 기제의 벌전을 저해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 추진해 온 정치제제 개혁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도 걸림돌 역할을 했다.사구시와 아울러 ‘사상해방’을 강조했다. ‘사상해방’이야말로 그들이 당면한 중대한 정치문제라는 대전제하에 사상을 해방하고 두뇌를 움직여 사실에 입각해서 옳은 것을 추구하여 모든 당원이 일치단결,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또한 ‘사상해방’을 실사구시와 연결하여, 이론에 집착하고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 출발하고 이론은 언제나 실제와 결부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결국 4개현대화, 그리고 나아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실현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등소평 자신이 그가 말하는 사상의 해방, 민주화가 결코 그들 스스로 내세운 4개 기본원칙의 견지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는 ‘사상해방’이 중대한 정치문제라는 전제를 민주화와 결부시키는 입장을 한 발짝 더 전진시켜서 경제체제 개혁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정치의 민주화를 위한 개혁조치를 들고 나왔다. 그는 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권력의 지나친 집중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지적하고, 대담하게 계획의 수립과 관리를 지방으로 이양하여 중앙과 지방, 기업과 노동자 개인의 4자가 경제관리상의 자주권을 가짐으로써 보다 적극성을 띠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며 현대화를 순조롭게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현대화를 향한 추세마오쩌둥 시대의 우선순위와 대조적으로, 등소평은 현대화를 중국의 지상목표로 생각했다. 그는 중국의 우선순위가 ‘혁명’으로부터 ‘현대화’로 전환되어야 할 요성을 지속적으로 역설했다. 등소평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이 수행해야 할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였다.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세계평화유지, 대만과의 통일실현, 중국의 4개현대화 정책촉진이었다. 등소평 현대화가 세 개의 주요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최고 우선순위를 밝혔다. 이는 현대화가 중국의 국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등소평 정권하에서 중국은, 국제사회에 더욱 개방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커다란 국내 정치 및 경제적 개혁을 경험한다. 국.
    인문/어학| 2007.11.16| 5페이지| 1,000원| 조회(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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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신분제도
    < 목차 >Ⅰ 서론신분과 신분제도Ⅱ 본론1. 신분1) 관인계층2) 향리3) 군인4) 양인 농민5) 향?소?부곡인6) 노비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3. 반제와 양천제Ⅲ 결론나가는 말서론신분과 신분제도사회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은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질 수가 있다. 주로 경제적인 지위의 차이를 기준으로 해서 집단을 나눌 때는 흔히 나누는 단위로서 ‘계급’이란 용어를 쓰고,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를 가지고 집단을 나눌 때는 구분의 단위로서 ‘계층’이란 용어를 쓴다. 계급이나 계층의 용어를 가지고 사회구성원을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기는 현대사회이건 전근대사회이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전근대사회는 신분사회로서 근대사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전근대사회에 있어서의 신분도 계급이나 계층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원을 집단으로 구분하는 단위였다. 구분의 기준은 신분상의 지위의 차이였다. 그리고 서로 다른 신분상의 지위는 각기 혈통에 따라서 세습되는 사회적 권리와 의무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여기서의 사회적 권리나 의무는 법률이나 관습으로서 또는 불문율로서 정하여졌다. 신분은 계급과는 일단 구분되며 계층에 포괄될 수 있는 개념이다.전근대 신분문제는 여러 연구자에게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분개념에 대한 정의는 그 분류기준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신분구분의 기준은 혈연?직업?거주지 ?토지소유관계가 된다. 그 가운데 혈연은 전근대사회의 세습적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기준이 된다. 고려사회 역시 개인의 능력보다는 가문과 같은 혈통적인 요소가 당사자의 신분을 규정하는 일차적 요건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토지소유관계나 거주지는 신분판별 기준으로 꼭 맞는다고 보기 어렵다. 거주지는 신분구분의 기준이 아닌 다만 신분의 상징이나 결과이기 때문에 부적절 하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신분구조를 논의할 때 신분과 계급의 상관관계가 구분되어야 한다. 신분과 계급에 대한 개념규정을 분명히 해야 혼동을 피할 수 있다. 계급은 행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는 후자에 비하여 전자가 보편적이었다.음서가 혈연에 기초하였다면, 과거는 능력에 바탕을 두 관리채용 방식이었다. 전자가 관인층의 귀족적 특권을 상징하였다면, 후자는 그들의 귀족적 특권을 파탄시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로도 과거의 문을 열어 놓기는 했지만, 그 제도의 운용이 관인계층에 유리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가 없다.) 광종대의 과거급제자가 모두 지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자제였다고 하며, 또 성종대의 과거 급제자들로서 출신을 알 수 있는 한 모두가 중앙관리이거나 지방향리의 자제였다고 한다. 과거제도는 신분제도의 규정 안에서 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제도가 귀족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전통적인 사회에 있어서 사회구성원 가운데 누구는 사회적으로 권위가 인정되어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천시되거나 멸시받는 수가 있었다. 또 누구는 경제적으로 혜택을 받는데 다른 사람은 불이익을 받는 수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누구는 관리가 되는 일이 당연하였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은 관리가 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특권이나 제약은 사실에 있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다만 사람마다 정도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그리고 사회적 특권과 제약이 대를 이어 세습되고 이러한 사실이 법이나 관습 또는 불문율로서 정해져 있을 때 그것이 규정하는 사회적 지위는 신분적 지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분적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들이 귀족인 것이었고 신분적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들이 소속된 신분계층이 귀족신분계층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누가 여기에 포함되는가 하는 점이다. 누구를 넣고 빼고 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당연히 신분적 특권이나 제약의 많고 적음에 두어야 할 것이다.따라서 문무 양반은 물로 남반까지도 귀족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같은 고 군역을 부담하였다. 이 역은 세습되었다. 군역이 세습적으로 지워졌다는 점에서 군인은 전문적 군인이었으며, 군인 신분층을 이루었다. 일정한 씨족을 단위로 군호가 형성되었으며 이 군호들이 군반으로 편성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군인들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평상시에 군인들은 국왕의 시위나 개경의 수비를 맡았다. 국경지대에서의 방수도 그들의 임무였다. 유사시에 그들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군인들이 해야 하는 이러한 일들이 그들의 군역의 내용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지고 있는 군역은 이들에 의하여 세습되었다. 군역의 세습은 군인 신분의 세습을 말하는 것이다. 군역이 사회적인 권리로 이해되건 의무로 생각되건, 그들은 원칙적으로 군역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그 자손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군인의 아들이라고 해서 꼭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점은 향리나 악공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아들들이 반드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군인에게는 군역에 대한 대가로 군인전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 지급의 내용은 수조권이었다. 그리고 그 지급의 규정을 담은 것이 전시과였다. 전시과의 규정에 의거하여 일정한 크기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인정받은 대포적인 계층은 문반?무반?남반의 관인계층이었다. 군인들도 군역을 이루면서 관인층과 나란히 전시과의 규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고 군인들이 신분상 지위를 관인계층과 견주자는 것은 아니다. 군인들이 전시과의 규정 속에 있었지만, 그들은 품관이 아니고 말단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4) 양인 농민농민은 토지를 갈아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진 이도 있었고, 그러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대체로 말하면 전자는 자영농이었고, 후자는 소작농이었다. 자영농은 국가에 전시를 물었지만, 전작농은 그러하지 않았다. 전작농은 그가 빌려서 농사짓는 토지의 소유주에게 전조를 냈을 뿐이다. 자영농이 전세를 문 것은 그가 농민이어서가다수 양인 농민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양인 농민들의 신분 변동이나 이와 관련한 그들의 신분상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들이 군인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 유의하는 일이 더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성공하기보다는 군인이 되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가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5) 향?소?부곡인향?소?부곡은 주?부?군?현과 같은 행정단위였다. 같은 행정단위였지만, 그것들은 저마다 높고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향?소?부곡인은 군?현인에 비하여 낮은 신분을 누리고 있었으며 향?소?부곡인은 오랫동안 천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천인이 반드시 노비였다고 못박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노비가 대표적인 천인임은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노비는 남에게 소유되어 재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그들은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도기도 한 신분층이었다. 부곡인과 군?현인 사이에 신분상 격차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또 부곡인이 안고 있는 신분상 제약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부곡인을 노비의 경우와 견줄 수는 도저히 없다. 노비가 천인인 한 부곡인은 천인일 수가 없다.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국가에 일정한 부담을 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향?소?부곡인은 일반 군?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일반 군?현인과의 결혼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 부곡인이 군?현인과 교혼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향?소민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가하여 낳은 소생들의 귀속에 있어서는 부곡인이 군?현인에 비하여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이것은 부곡인의 신분상 지의가 군?현인의 그것도 똑같지 않았음을 말하여 준다. 부곡인은 군?현인이 아니라 진?역?잡척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그리고 부곡인은 교육을 받을 기회에 있어서도 군?현인에 비하여 불리하였고, 관직에 나아가 승진하는 데 있어서도 군?현인과 달리 제약이 뒤따랐다. 또한 형사처벌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군?현인에 비하여 어느 정도 불리한 입장었다. 그리고 사노비는 주인이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도되는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법의 보호도 받았다.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배반은 용납되지 않았다 사노비의 도망, 주인에 대한 경멸?모욕?반항?모함?무고 따위가 주인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복종이 거의 절대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주인의 범죄조차도 사노비는 고발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주인이 반역 같은 중대한 범죄를 모의하였을 때에는 반대로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노비의 의무였다. 이것은 국왕의 통치를 받는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사노비들에게 최소한도나마 인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공노비는 전쟁 포로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다수는 반역?적진투항?이적행위와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의 가족 및 사노비가 관몰됨으로써 발생하였다. 범죄행위가 계기가 되어 귀족층에서 공노비가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는 점은 주목이 된다. 이것은 사노비가 대체로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양인계층에서 주로 보충되었다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공노비는 누구나 독자적인 경리를 가지고 독립된 가계를 꾸려 나갈 수가 있었다. 사노비의 대표적인 존재인 솔거노비에게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리가 엇었다. 이 점에서 공노비는 전반적으로 보아서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한편 공노비는 갑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 실제로 매매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은 사노비의 경우와 크게 다른 점이다. 이 점에서 말한다면 공노비는 같은 노비이기는 했지만 사노비에 비하여 보다 높은 신분상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양인 가운데에서 일반 농민이나 그보다 낮은 소?부곡인들과 공사노비들에 의한 반란이 꼬리를 물고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이나 천인의 반란은 제각기 성격이 다른 것이고, 그들이 바라던 바도 한결같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가 농민들의 반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하고 나선 경제적 수탈도 그
    인문/어학| 2007.11.16| 13페이지| 2,000원| 조회(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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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려라 아비 감상문
    언제였을까. 내가 작가라는 꿈을 가졌던 것이. 너무 오래전 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안일한 꿈이겠지. 그렇지만 사실 정확이 몇 살이라고 단정 짓는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냥 그렇게 막연히 작가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 나는 드라마가 좋았다. 책이 좋았다고 하면 더 멋있어 보이겠지만 나는 드라마가 좋았다. 아니 미쳐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8살쯤이던 그 어린애가 연인의 사랑이나 고부간의 갈등에 대해서 이해하기 아니 알지도 못했지만 재미있었다. 어쩌면 ‘나도 저런 거 만들고 싶다’에서 ‘나는 더 잘 만들 수 있는데.’로 생각이 옮겨 가기도 했을 테지만 사실 그때의 심정은 그러했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어렸으니깐.그 꿈은 실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미래를 결정하여야 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 꿈의 끈을 잘라버리지는 못했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먼 나라 우주에서 꾸는 꿈이라 생각하는 현실 앞에 늘상 하는 변명은 부모님의 “현실을 생각해라”는 말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왜! 내 인생이고 내 꿈인데!”라며 밀고나갈 배짱과 확신이 없었다. 지금 나에게 작가란 것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내가 글 쓰면 대박 날꺼야’라는 조금은 어이없는 생각은 여전하다.김애란 작가를 만났다. 사실 아직도 ‘우와~ 어.. 정말?’이라는 생각이 먼저지만 정말 만났다. 하지만 여기서 만났다라는 것이 개인적이 만남이 아니라, 나와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우리와 만났다. 작가는 편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므로 편견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외양적으로 그저 그럴 것이라는 나의 편견은 지금 생각해보면 순간적으로 아니면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내내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질투라는 마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아직도 ‘내가 글을 쓰지 시작하면 누구보다 잘 쓴다’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김애란 작가의 강의를 듣는 학생일 뿐이었다.나는 손을 몇 번이나 매만지면서 들까 말까하며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들기를 반복하였다. 김애란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소극적인 나의 용기를 탓하면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저도 작가를 꿈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요. 그런데 지금은 포기한 꿈이 되어가고 있지만 지금 다시 그 꿈을 시작해도 늦지 않았을 까요?”라고 말이다.그녀의 “책보다 사람에게서 배웠던 것이 많다”라는 말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소설들은 모두 우리의 일상과 같이 친숙하고 친근하였으며 그래서 더 공감이 갔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와 같고 내 이웃의 이야기 같았다. 이것이 그녀가 쓰는 소설의 기법이자 소설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특히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와 같이 말이다.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 이건 나인데..라는 생각이 들자 깜짝 놀라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려 갔다. 점점 어..어.. 하면서 읽은 글이자 나의 일기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 전에 하는 수많은 생각들. 공상들. 그것들 때문에 내가 잠 못 이루던 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입이 아플 정도이다.[오늘 내가 멀 먹었더라. 아 그건 참으로 맛있었지. 내일 점심에는 멀 먹지. 아 돈이 얼마나 남아있더라. 내일 추우려나. 멀 업고 가지. 집에 전화해야 되는데. 과제가 많이 남았는데 언제하지. 하기 싫다. 맛있는거 먹고 싶은데 돈이 없네. 내일 9시 수업이라 빨리 자야 되는데. 아 생각하지 말자. 그만그만. 내일 안춥겠지...]거의 매일 이런 생각에 뒤척거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일어난다. 김애란 작가도 이런 경험이 있는 것일까. 그럼 그녀도 힘들겠다.‘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도 우리가 흔히 이름만 들으면 아는 편의점들을 대상으로 하여서 내 이웃의 이야기와 같다고 느꼈다. 소설속의 그녀가 가지는 생각. 나도 한번은 해보았을 생각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특히 슈퍼나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구매할 때 나는 아직도 창피함을 느낀다. 계산대에 있는 사람이 아주머니였음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이다. 어쩌다가 남자 점원이 있기라도 하면 혼자 왜 그렇게 부끄러운지. 소설 속에서처럼 점원은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내가 사가는 생리대로 마치 점원이 내 생리주기를 알게 되기라고 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이 소설에서 여고생이 사고가 나고 파란 모자를 쓴 남자가 여고생의 올라간 치마를 내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김애란 작가의 대답처럼 진정한 이유는 그 남자만이 알고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속죄’와 비슷한 감정으로 인한 행동이었을 것 같다. 남자는 사고가 나는 순간 어수선해진 편의점 안의 분위기를 틈타서 복권을 훔치면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남자가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편의점으로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행동이었다면 자신의 행동을 타인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사고가난 여고생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차에 치이게 되고 속이 훤히 보이도록 올라간 치마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여고생은 비록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남자와 마찬가지로 부끄럽다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받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고생의 치마를 내려준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소설의 포인트가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에게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자주 가던 편의점을 계속해서 바꾸게 되는 이유가 점원이 그녀의 사생활을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서 파란 모자를 쓴 남자를 보게 되고 그 남자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여고생의 치마를 내려주기 때문이다.‘영원한 화자’속에서의 그녀는 어두워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말들은 아름답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화자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과 죽은 사람, 그리고 변화하는 모든 것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화자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죽은 사람과도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슬퍼 보인다.‘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그녀는 평범하지 않는 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조용함 속에서 서로 의논하지 않았지만 이루어지고 있는 규칙 속에서 평범하게 살지만 같은 집에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평범하지 않는 삶을 그녀는 동시에 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다른 4명의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다.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미스테리 수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의 방이 다른 4명의 방과 사진처럼 똑같을 수가 있을까.어쩌면 그 집에는 그녀 혼자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4명의 여자란 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인물인 것이 아닐까. 아마도..아마도..에서 점점 확신이 되어가고 있다. 내 머릿속에서. 김애란 작가는 상상이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노크하지 않는 집에 사는 그녀의 고통은. 그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야말로 상상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아마도 노크하지 않는 집에 그녀는 혼자서 살고 있을 것이다.‘달려라 아비’소설 집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소설이 두 작품 있는데 첫 번째는 ‘스카이 콩콩’이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귀여우면서도 기분 좋게 들리는 콩콩 소리처럼 소설은 기분 좋은 글의 울림과도 같았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는 스카이 콩콩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소년은 말한다. 사실 스카이 콩콩은 말 그대로 콩콩거리는 것으로 스카이 콩콩을 타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콩콩콩콩 거려야 하며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버둥대는 몸짓은 경박하고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가족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 가족은 살아가기 위해 정신없이 발을 구른다. 그 속에서 눈물도 웃음도 있지만 그 과정이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스카이 콩콩을 타는 것을 좋아했듯이 아버지와 형과 나로 이루어진 가족은 행복한 가족이다.
    독후감/창작| 2007.11.06| 3페이지| 1,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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