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2
검색어 입력폼
  • [한국교육사] 지눌의 선사상 평가B괜찮아요
    1. 지눌에 있어서 깨달음의 세 전기지눌은 그가 주도했던 정혜결사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개경을 떠나 창평 청원사에 머물게 된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에 깊이 실망하였지만 속세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대신 지눌은 궁극적 실재인 진여를 깨닫기 위한 수행을 한다. 이 시기에 지눌은 진여가 현세와는 구분되는 제 3의 존재로서 어딘가에 실재하는 진리의 섬으로 판단하며, 망심을 벗어나 진여에 이르기를 원한다. 지눌의 이러한 객관주의적 세계관은 의 한 구절을 만나게 되면서 깨달음의 첫 번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지눌이 얻은 깨달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생겨나는 생각과 행동들은 진여자성이라는 궁극적 실재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그것과 따로 떨어져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속불이의 진리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지눌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찾아 헤매던 진여는 일상적 활동을 떠나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얻어진다는 소중한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깨달음은 문자를 통해 얻어진 것이지만, 단순히 언어적 이해가 아닌 진리 자체에 대한 깨달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지눌의 두 번째 깨달음 역시 경전을 통해 얻어진다. 첫 번째 깨달음 이후에 지눌은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의 진리를 확신을 갖는다. 그리하여 자기의 마음을 관하는 것보다 화엄의 사사무애관이 더 낫다는 어느 강사의 말에 지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진리를 자기 자신 속에서 주체적으로 깨닫는 경험 없이 단지 사물에 대한 추상적 진리를 관하는 것은 참된 길이 아님을 지눌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 진리가 선종만의 독점물인가 하는 의문이 지눌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선의 진리가 불교인 이상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확신과 당위가 지눌에게는 있었던 것이며, 그것을 자신이 체험적으로 깨닫고자 했던 것이다. 지눌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삼 년이나 불교의 경전에 매달렸으며 을 통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중생의 마음은 부처이나 중생이 무지로 인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내용은 선종의 즉심즉불과 조금도 다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눌은 을 통해 부처의 말씀인 교에도 선의 진리가 있다는 두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두 번의 깨달음을 통해 얻은 높은 경지에도 불구하고 지눌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에 무언가 원수처럼 남아 지눌을 괴롭혔던 것이다. 지눌의 두 번의 깨달음은 모두 경전을 매개로 하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지눌의 깨달음에 지적 성격을 띠게 하였다. 이러한 지적 성격은 잘못하면 깨달음의 완벽한 자연스러움을 망치게 될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파악한 것에 대한 집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지눌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의 한 구절이었다.에서는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다고 했다. 이는 선을 깨닫기 위해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던 지눌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어 선은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고요한 곳도 시끄러운 곳도 버리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 한다. 의 이 구절은 논리와 지적 분별을 철저히 깨뜨린다. 이러한 논리적 불가해성이 지적인 지눌의 선 이해에서 지눌을 해방시키는 강력한 촉매로 작용한 것이다. 이 세 번째 깨달음을 통해 지눌은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자유롭게 되는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선을 연마하는 사람에서 선을 완전히 내면화한 사람이 되었다. 지눌에게 선은 이제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이다.2. 진심으로 들어가는 돈오점수1) 진심은 깨달아 알고 이를 믿는 믿음에서 얻어진다.돈오의 시작은 신해이다. 신이란 자신의 부처라는 믿음이요, 해는 그러한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과 해의 구분은 개념적인 것일 뿐, 신 없는 해 또는 해 없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해란 자기가 곧 부처라는 자기이해이다. 그러나 이 자기이해는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인식 혹은 확인을 넘어서 자기를 긍정하는 용기, 즉 일종의 의지적 행위를 수반한다. 중생으로서 자기 자신의 실존적 모습과 부처 사이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을 뛰어넘는 용기를 신해는 요구하는 것이다. 지눌에게 신해는 각자 자기 존재로 향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자기 밖의 어떤 것에 관한 객관적 인식이나 그것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향한 행위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진리를 주체적으로 깨닫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신해를 통해서 우리는 공적영지를 얻을 수 있다.2) 깨달아 앎은 공의 이치에 얻어진다.돈오점수가 깨달음의 원리이고, 신해가 깨달음의 시작이며, 정혜쌍수가 깨달음의 구체적 방법이라면 진심은 깨달음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돈오는 자신의 참 자아, 즉 꿈과 같은 미혹에서 벗어나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참 마음을 홀연히 발견하게 됨을 의미한다. 진심은 본질과 현상의 대립을 극복하고, 본질과 현상이 본래 하나의 다른 두 측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진심을 마니구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마니구슬은 맑고 투명한 구슬이기 때문에 주위 사물의 색을 비춰 낼 수 있다. 그래서 마니구슬은 푸르거나 붉거나 검은 색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니구슬의 본질은 맑고 투명함이며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다른 사물을 형형색색으로 비춰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니구슬이 투명한 것도, 색깔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니 구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니 구슬의 투명함을 진심의 체, 마니구슬의 색을 진심의 용이라 할 수 있다. 진심은 체는 한결같지만 진심의 용으로 인해 그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이 진심의 체와 용을 각각 공적영지와 수연용이라 한다.진심의 본래 모습은 고요하고 밝은 앎이 있는 것이다. 공적영지는 비어 있지만 신령한 지혜가 있어 허무한 무정의 상태와는 다르다. 이러한 공적영지가 수연용으로 인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공적영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생멸의 세계의 본질이 공적영지의 또 다른 모습임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따라서 깨닫게 되면 나와 부처가 다르지 않고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3) 깨달았으면 닦아야 한다. -돈오점수돈오란 내 안의 부처를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이 모두 공이며 진심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에 더 닦을 것이 있다는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지눌은 돈오를 해오와 증오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으로 답을 한다.인간은 돈오의 순간을 통해 내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해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모순적 존재이다. 깨달음 후에도 성인과 범부,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 사이에는 여전히 건너뛰기 어려운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미망에서 깨어남은 돈오이지만 범부로부터 성인이 되는 것은 점수이다.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이나, 일상생활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열반은 열반이고 생사는 생사일 뿐이다. 우리는 이치상으로는 이미 부처임이 틀림없지만, 사실상으로는 아직 번뇌로 괴로워하는 중생 그대로인 것이다. 이는 지눌의 깨달음의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눌은 과 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수행은 멈추지 않았다.지눌은 수행의 첫 단계에서 신해를 말하며 자신이 곧 부처라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즉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곧 해오이다. 그러나 중생은 해오라는 정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식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기 어려우며,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점수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계속적인 수행으로 인하여 번뇌가 사라지고 공적영지를 깨닫게 되어 우리의 인식과 실체가 모두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점수 후에 얻게 되는 돈오를 증오라 하며,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한다면 돈오란 증오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3. 마음 닦음에 있어서 정혜쌍수지눌은 점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성적등지문 혹은 정혜쌍수를 이야기하였다. 정과 혜는 공적영지심의 두 측면인 고요함과 앎을 아울러 닦는다는 의미로, 정은 곧 고요함을 말하고 혜는 앎을 의미한다. 정혜를 닦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심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므로 수행이 아닌 수행이 된다. 지눌은 이러한 정혜쌍수를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정혜를 다시 자성문정혜와 수상문정혜로 구분하였다.자성문정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본래적 의미의 정혜로, 자성정혜는 점수를 통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돈오에 의해 이미 자신의 현실로서 자각된 정혜이다. 자성정혜는 곧 공적영지심이며, 결국 이러한 자성정혜의 수행은 결코 깨달음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수행, 바로 깨달음 안에 포섭되는 수행 아닌 수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깨닫기 위해 어떤 노력도 경주할 필요가 없다. 단지 정혜가 나에게 있음을 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자성정혜에서는 닦음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정과 혜, 적과 지는 닦음의 대상이자 동시에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지눌에 따르면 수행 아닌 수행으로서의 자성정혜의 자유로운 수행은 가장 바람직한 수행이다. 그러나 실제로 깨달음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번뇌의 장애가 두터운 사람이 많이 있으며, 지눌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수상정혜를 방편적으로 빌려 닦기를 권하고 있다. 수상정혜에서는 적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하게 만든 이후에 성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여 알게 하기를 권한다. 자성정혜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던 정과 혜 사이의 순서가 생겨나며, 산란과 혼침을 조절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상정혜가 이러한 방편적인 수행에 불과할 지라도 돈오 이전의 수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수행이다. 돈오 이전의 수행은 낭비적은 수고로운 방황에 불과하지만, 돈오 이후의 수고로움은 번뇌를 모두 닦아 공적영지심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5.05.23| 4페이지| 1,000원| 조회(494)
    미리보기
  • [고전문학사] 시조의 발생과 발달 평가A좋아요
    1. 시조의 개념시조와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어진 시형에는 한시, 경기체가, 악장, 가사 등이 있다. 위의 것들과 시조의 차이점을 밝히는 작업에서 시조의 개념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표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 한시는 한자로 지어졌으며, 시조, 경기체가, 악장, 가사의 경우는 한자어구 사용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국문으로 지어졌다. 갈래로 살펴본다면 한시와 시조는 서정이나 경기체가, 악장, 가사는 교술이다. 이상의 두 가지 사항을 비교해 보았을 때 시조는 국문으로 씌어진 서정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갈래 표기한문국문서정한시시조교술경기체가악장가사시조는 공식적인 기능은 없으며 개인적이기만 한 노래이다. 고려말에서부터 정치적인 변동과 관련되더라도 작가의 감회만을 읊는 것을 관례로 삼았으며, 조선 왕조가 들어선 다음에도 그 점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왕조창업의 칭송은 시조와 무관하다. 이미 알려진 한자어의 경우라도 작가의 느낌을 드러내기 위하여 썼을 따름이며, 왕조 교체기의 혼란을 넘어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은 시기에 이르러서도 사실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불 때 시조는 깊이 있는 서정시임을 확인할 수 있다.2. 시조의 발생시조의 발생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시조가 언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조는 어디서 혹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시조의 발생시기는 정확하게 언제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문학의 모든 양식이 그러하듯이 문학의 갈래도 어느 날 일시에 창안되어 사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말에 생존했던 여러 사람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러한 창작이 가능하려면 그 기반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시조의 태동은 고려 중엽에 시작되었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시조라는 새로운 갈래가 고려 중엽 이후의 새로운 세력인 신흥사대부에 의해 새로이 양식화되었으리라는 추론의 결과이며 실제로 시조 작품고 의 주제다.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격변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두 태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데 특히 정도전 같은 이는 신왕조의 개국공신이요, ,등의 악장 작품으로 새로운 왕조에 적극적인 찬가를 바치면서도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시조를 남긴 점에서 이중적인 심리상태를 엿보게 한다.이어서 단종의 유폐와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사건을 통해 정치적으로 불어닥친 사육신사건은 새로운 국가의 지표였던 유교적 덕목의 표방과 정치적 권력과의 충돌에서 빚어진 갈등이었으며 이 시기에 성삼문(1418-1456), 이개(1417-1456)등의 시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절의의 주제가 강조되었다.이런 정치적 사건을 거치면서 왕조의 정치적 안정이 이룩되고 조선 왕조가 표방했던 유교적 경건성이 생활의 태도로 자리 잡음에 따라 시조의 작자였던 상층인의 의식은 이념 지향적 경향을 강하게 보이게 된다. 그것은 인간된 도리를 윤리적 생활로 구체화하려는 유교적 생활 태도의 표방,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라는 동양적 전통의 강조였다.이 시기의 사대부들은 새로운 왕조가 흥성하는 기운에 동참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작품에서 내보이는 자연과의 조화에는 넉넉함이 깃들여있었다. 황희(1361-1452)의 가 평화롭고 넉넉한 가을의 전원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나 이현보(1467-1555)가 등의 작품에서 어부의 즐거움에 비길만한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그린 데서 조화의 넉넉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넉넉한 태도는 그 후 자연에 몰입하되 자신의 좌절을 자연과의 친화로 치환하려는 갈등해소 방식으로서의 시조가 보여주는 은일(隱逸)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궁극적인 이상은 대립이나 갈등보다는 조화를 추구하려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을 노래한 시조의 변치 않는 전통이었다.당시 사회가 표방하는 윤리적 인간으로서 떳떳해야 한다는 의식의 표현은 16수로 된 주세붕(1495-1554)의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조는 윤리적 나라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명나라에서 원군이 오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란을 평정한지 한 세대쯤 지나자, 이번에는 북쪽에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1627년의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굴욕을 안겨주었다. 열등한 야만족이라고 생각했던 일본과 여진이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조선을 마구 유린한 사태에 대해서 당시의 지배층은 적절히 대처할 능력을 지니지 못 했다.위기를 적극적으로 타개하자면 역사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세력이 밑으로부터 올라와 왕조교체를 이룩해야 했을 듯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이미 200년이나 지속되었고 이미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는 상처에 무너지지 않고 재건되어 이후에도 300년을 지속한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를 극복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어떻게 해서 극복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의견은 달라질 수 있다. 왕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가진 쪽에서는 국왕이 국경을 넘지 않고 왕통이 이어진 것은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왕조의 한계가 안팎으로 드러났어도 민족의 역량을 외침을 극복하고 문화공동체를 수호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조의 지배체제가 수세에 몰려 집권층이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보다 하층에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세력이 대두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전란 중의 의병이 우선 그런 움직임의 단서였고, 실학의 대두, 하층예술의 발흥, 민란의 속출이 크게 보아 서로 연결된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다른 사회의 변화는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후기 성리학이 등장한 이후로 문학은 유학의 경전을 모범으로 삼고 중국 전래의 규범을 존중하면서 심성의 바른 도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기본 명제였다.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단적인 문학관은 드러내놓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문학 담당층이 확대되고 문학의 실상이 크게 달라지는데 따라서 문학에 역할에 대한 기존의 논의의 정치사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 이러한 당쟁시대의 정계에 진출했다가 밀려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지위 회복을 염원하거나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조존성(1553-1627)은 에는 전원으로 돌아가서 전원생활의 흥취를 되찾았다는 내용을 다뤘고, 김득연(1555-1637)은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에 가담, 병자호란을 겪고 탄식만 했고,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산중잡곡에서 자심의 삶의 의미를 시조를 지으면서 뒤돌아보았고, 강호가도의 즐거움을 표현하면서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난이나 씹으며 늙어만 가는 처지를 서글프게 읊조렸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 치유 후 태평스러운 시절인 것 같아서 벼슬하다가 산수 사이에 묻혀 세상일을 잊고 흥취를 자랑하는 사대부의 시조가 나타나기도 하고, 벼슬길에 나갈길이 막혀서 자연에서 쓴 시조가 있기도 하다.박인로(1561-1642)는 이덕일처럼 임진왜란 때에 무장으로 나섰으며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우국의 충정을 가사인 와 에 토로한바 있지만, 전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가서는 누항사를 지어 스스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처지에서 선비의 행실을 닦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유학의 도리를 굳게 믿고 따르는 것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삼자는 내용의 시조를 썼다. 특히 윤선도(1587-1671)는 선조 20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종 12년 85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긴 시조의 대가로서 물·돌·솔·대·달을 벗으로 삼아 읊은 와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윤선도는 강호에서 노니는 흥취를 자랑하는 사대부 시조의 가장 세련된 경지를 보여준다. 원래 예송문제로 노론과 맞선 남인 강경파로 귀양을 다니는 수난을 겪고 청나라에 잡혀간 두 대군을 가르친 관계가 있어서 병자호란 때 충격을 받았겠지만, 관심을 현실에서 강호로 돌렸다. 사대부로서 바랄 수 없는 풍류를 마음껏 즐기면서 흥취를 존중하는 작품세계를 펼쳤다. 경치를 그리고 이치를 찾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고 흥취를 녀의 환심을 사고자 하지만, 사실 쾌락을 탐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곧 떠나버리고 다시는 소식도 없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분을 깊이 준 기녀는 그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심정을 시조에다 하소연하곤 했다.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시조의 작가가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은 작품들이 증가하게 된다. 무명씨가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기녀 중에서 한동안 기억되다가 작품은 계속 구전되었으나 기녀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작품은 남았지만, 이름이 남지 않은 사대부 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체가 낮은데다가 특별한 행적마저 없는 사람이라면 시조를 짓자 바로 무명씨가 될 것이다. 즉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미천한 백성에 속하는 증거이기도하다. 아마도 중인 이하의 신분이면서 직업적인 가객은 아닌 사람들이 무명씨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싶다.이 무명씨들의 시조는 대체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시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태풍자의 시조와 더 나아가 복잡하게 따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나서서 행동을 해야 결판을 낼 수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시조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에 가능한 행동을 제시했을 뿐이지 행동을 개시 한 것은 아니었다. 민란이 일어날 때면 많은 노래를 불렀겠지만, 시조가 그 구실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중세 지배질서로 다져진 표면문화를 거부하는 시조는 성행위를 노출하고 사랑과 이별의 애절한 사연을 절실하게 다루고, 삶의 지혜를 바꾸어 놓으면서 세태를 비판하다가 민란을 선동하는 듯한 외침을 들려주고는 멈추었다. 극도로 집약된 시조의 형식으로 사회의 저층에서 분출해오는 힘을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조선 후기에 들어서 나타난 시조 작가층의 하나는 전문가객이다. 시조는 처음 생겨났을 때 음악이면서 문학이기도 했다. 노래는 작자 자신이 직접 부르는 것보다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맡겨서 부르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동안은 기녀들이 그 일을 맡았다가 차차 가객 이라고 하는 기능인이 그 몫을 하게 되었다.
    인문/어학| 2004.06.03| 10페이지| 1,000원| 조회(915)
    미리보기
  • [환경윤리] 환경윤리의 유형 평가A좋아요
    .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보는 입장과 평등한 시민으로 보는 입장도 아닌 그 중간 입장 은 없는가?환경윤리는 다양한 흐름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그 흐름에는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보는 입장도 있으며,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구분은 자연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구분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자연에 대한 개념규정을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자연을 가장 협소하게 개념화한다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환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실제적으로 지구상에 사람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환경은 매우 적을뿐더러 논의의 진행을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연으로 생각하는 산, 바다, 강 등을 자연이라고 규정할 경우에는 최근의 환경윤리의 논의를 다루기에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개념을 가장 최대한 확장시켜 유정물과 무정물, 인위적인 것과 인위적이지 않은 것을 모두 포함하며 그것들의 관계와 변화 과정까지 포괄하여 자연이라 개념화한다.{ 자연의 개념을 최대로 확장할 경우, 질문 자체와 모순이 생긴다. 질문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경우 와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시민인 경우 로 구분한다. 하지만 확장된 자연의 개념에서는 이러한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환경윤리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의 자연개념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광의의 자연 개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이 후의 논의에서는 지금까지의 나타난 환경윤리에 관한 이론들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과 윤리적 원칙의 초점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살펴본 다음, 분류 결과를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보는 입장과 평등한 시민으로 보는 입장, 그 중간 입장으로 나눠보도록 한다.환경윤리 논의는 환경의 구성요소들에 대하여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어디까지 확장하느냐,또 자연적 대상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어떤 근거에 의거하여 도출하느냐에 따라 그 접의, 생명중심주의, 생태중심주의로 나눌 수 있다(김완구, 2001).인간중심주의는 탈인간중심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였다. 윤리학자들이 환경과 관련하여 던진 질문들은 대부분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으며 자연 환경에 대한 의무는 직접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자연환경, 식물, 동물의 가치는 인간이 고려하는 가치와 관련하여서만 논의되었으며 동물과 식물이 가지는 가치란 기껏해야 인간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다는 도구적 가치가 고작이었다. 인간중심주의자들은 인간만이 가치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본래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인간 이외의 존재도 본래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됨에 따라 자연에 대한 도구적 관점은 본래적 관점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유정주의, 생명중심주의, 생태중심주의로 나눠볼 수 있다.{윤리적 고려의 대상윤리적 원칙의 초점인간중심적탈인간중심적개인적표층생태주의유정주의생명중심주의공공적공공주의마르크스주의심층생태주의생태중심주의(김재덕, 2000, 재인용)개인에 윤리의 초점을 맞추고 인간만이 특별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표층생태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표층생태주의(shallow ecology)에 토대한 환경윤리는 환경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표층생태주의은 자연환경의 보존을 이야기하지만 주로 광물이나 에너지자원 같은 인간의 경제적 이익에 집중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특별히 환경에 관심이 없고, 있더라도 인간이 중심이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공공주의(communalism)는 기독교 전통에 기반하여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지만 인간만이 고려의 대상이다.윤리의 초점을 개인에 맞추고 있지만 인간 이외의 대상으로 윤리적 고려의 대상을 확대시키면 유정주의나 생명중심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정주의에 따르면, 인간뿐만 아니라 감정을 가지는 모든 존재들은 본래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고려의 대상이 된다. 감정을 식물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권리도 없으며, 우리에게 식물의 권리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공리주의자인 싱거는 동물 개체의 권리와 종 전체의 권리를 구분한다. 싱거는 쾌락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동물 개체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같이 고려되어야 하며,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싱거에 따르면 어떤 동물의 종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므로 인간은 동물 전체 종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지는 않는다(데자르뎅, 1999).생명중심주의는 유정주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생명중심주의는 본래적 가치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로까지 확대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도덕적 권리를 인정한다. 살아있는 것들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 식물, 조류(藻類), 단세포 유기체, 바이러스 등까지 포함되는 매우 넓은 개념이다.생명중심윤리의 초기 주창자인 쉬바이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우리가 존경할만한 본래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쉬바이처는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하며,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선(善)으로 생각했다. 이와 반대로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며, 생명을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보았다. 이것이 쉬바이처의 가장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도덕의 원칙이다(변순용, 2002).쉬바이처의 생명중심윤리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테일러는 자연에의 존중을 주장했다. 테일러는 인간과 다른 살아있는 것들간에 존재하는 도덕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테일러의 자연에 관한 생명중심적 괌점은 네 가지 신념에 기초한다.1 인간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동등한 지구상의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이다.2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들은 상호의존하는 체계의 한 부분이다.3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선을 추구한다.4 인간은 다른 살아있는 것들보다 본래적으로 우월하지 않다.테일러는 자연에의 존중 태도로부터 네 가지 규칙을 도출해냈다. 불가해(nonmaleficencs), 불간섭(no에게 요구되는 규칙으로 우리가 야생동물을 속이거나 배반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보상의 정의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해할 경우 그들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최문기, 1998).생명중심주의는 인간 이외의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 자체를 중시하고, 그들을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의 도덕적 위계를 벗어났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생명중심주의는 인간은 자연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라는 명제에서 보여주듯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개체이기 때문에 종, 생태계, 살아있지 않은 대상은 도덕적으로 고려되지 못한다.탈인간중심주의이면서 공동체를 강조하는 입장에는 심층생태주의과 생태중심주의가 있다. 심층생태주의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은 생태계로까지 확장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안정과 조화를 위한 윤리적 의무를 강조한다. 심층생태주의의 입장은 두 주장에 근거한다.1 윤리적 원칙: 우리는 전체로서의 세계를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고려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2 윤리적 고려의 대상: 윤리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그러한 체계들이 구성하고 있는 개체 들의 속성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들과 사회들의 전체 속성들을 포함하는 전 체 체계들을 고려한다. (최문기, 1998)그래서 대부분의 심층생태주의자들은 전통적인 환경윤리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또 유정주의에 대해서는 개체주의를 비판한다. 심층생태주의는 기본적으로 모든 생물체의 평등을 주장하며, 이것은 곧 인간이 다른 자연을 이용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심층생태주의 논리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에 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과 같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심층생태주의에서 인간은 독립된 하나의 개체가 아니며 자연 안에서 존재하며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의 인간이다.카프라는 물리학자로서 현대의 물리학적 성과에 기반을 두고 심층생태주의를 발전시켰다. 카프라는 인간이 전일적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영적 또는 종교적인 깨달음이 있어부라는 심층생태주의적 인식 또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자발적으로(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베기지 못 할 것이다. (카프라, 1998)카프라의 심층생태주의를 특징은 생물권적 평등 과 자아의 확대 라는 두 가지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 생물권적 평등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 나아가 무정물 사이의 어떠한 차별적인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자연 생태계는 곧 나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전일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태주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이해와 통찰이다.생태중심주의는 살아있지 않은 자연 대상들, 생태계, 관계들, 과정들까지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체뿐만 아니라 종, 생태학적 전체들까지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가장 전일적이다. 생태중심주의는 각 개체보다 오히려 생태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켈리코트는 생태학적 전체론만이 자연 환경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보호할 수 있는 환경윤리라고 주장한다. 식물, 바위, 분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체계 유지에 기여하는 한에 있어서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종의 소멸을 걱정하는 이유는 그 종의 개체나, 그 종 자체의 소멸 때문이 아니라, 그 소멸이 생태계의 유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데자르뎅, 1999). 라즐로는 전체론적으로 통합된 모든 체계들에 똑같이 본래적 가치를 부여한다. 생태중심주의는 지구상에 진화해 온 생명의 복합적 관계망에 본래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관계망 안에서 출현하고 현재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조류(藻類)에서부터 생태계, 인간과 사회에 이르는 것들까지 본래적 가치를 가진다. 이는 인간의 삶의 영위와 활동까지 생태계의 일부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전일적이다(최문기, 1998). 따라서 현재 인간이 보이는 생활양태들은 인간이.
    사회과학| 2004.06.03| 5페이지| 1,000원| 조회(696)
    미리보기
  • [국문학과사회] 순례자의 노래
    정절은 여성의 성을 가정과 가족 내적으로 통제하는 기제로서 현대사회에서도 완고하게 기능하고 있다.{ 성리학은 조선시대를 추동하는 내적역량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적 이념 아래에서 여성이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은 정서적으로 칭송 받았으며 또한 경제적, 법적, 제도적으로 강화 유지되었다. 이것은 근대에 들어와 가정에서 생산을 거세시킨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여성의 경제적인 권한을 박탈하고 여성을 가정에 구속시켰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눈에 보이는 억압은 사라졌지만 억압의 매카니즘은 더욱 정교해졌다. 과거에는 강제를 통해 여성들을 통제했다면 현재는 여성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통제를 지속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심양희, 1998)이러한 정절의 요구는 여성이 정절을 잃었을 경우 여성의 결혼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미혼의 경우 정절의 상실은 결혼으로의 유입을 차단하고 있으며, 기혼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혼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명선, 1989)어떠한 상황에서 정절을 잃었든 그것은 여성의 잘못으로 간주된다. 설혹 강간이라는 폭력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강제된 성관계 로 취급되어 여성은 정절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어진다.{강간의 요소 중의 하나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육체적, 심리적, 언어적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의미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극심한 신체적 상해를 주려는 시도 라는 폭력행위의 정의에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간이 폭력행동보다는 성교행위로 더 강하게 인식되는 것은 강간이 성기의 경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간에서 수행되는 성기결합은 남성만의 일방적인 행위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성관계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강간은 명실상부한 폭력행동이거나, 최소한 폭력행동에 의해 구성된 행위이다. (김선영, 1989)정절상실은 곧 여성의 총체적 삶의 상실과 동의어이며, 과거처럼 정절 상실이 육체적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정교한 사회적 매카니즘에 의해 정신적으로는 사형을 당하게 된다. 오정희의 는 정절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여성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의 주인공 혜자는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혜자는 인형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취미를 위해 다로 작업장을 가질 정도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혜자의 가정은 파괴되고 이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친구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결국, 행복한 가정주부에서 폐인 으로 전락하고 만다.사실 혜자가 당한 사건은 강간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었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혜자는 찜통 같은 지하실에서 속치마 바람으로 인형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낮털이 도둑이 기척도 없이 들어선 건 혜자가 잠자는 공주의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그 때 그녀가 본 것은 사내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거의 벗은 몸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사내의 두 눈에 한껏 달구어진 전기인두를 들이댄 것은 오직 공포심 때문이었다.혜자의 살인은 본능적인 공포로부터 나온 정당방위였기에 범죄로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는 죄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살인 때문이 아니라 강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녀가 속치마 바람이었고 사내가 흉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끝내 석연치 않은 의혹으로 작용하여 남들의 얘기 속에서 죽은 것은 언제나 도둑이 아닌 남자였다.남자는 죽고 그 앤 풀려 낫지만 그럼 뭘하니, 폐인이 다된 걸.강간은 피해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는 몇 안 되는 범죄의 하나이다. 강간은 분명히 범죄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강간이 발생했을 때에는 범죄자에 못지 않은 비난이 피해자에게 쏟아진다. 이러한 강간 피해자들의 수치심은 강간에 대한 뿌리깊은 사회적 통념에 의한 것이다. (김선영, 1989)강간에 대한 통념 중 강간 피해자에게 가장 큰 수치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강간은 피해자에 의해 유발된 것 이라는 피해자 유발의 강간 개념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은 평소 그 여성의 행실이 좋지 않아서이며, 강간은 그 부주의함과 방정치 못 한 품행으로 인한 것이므로 피해자의 자업자득이 된다. 에서 혜자의 남편은 혜자에게 범인을 아느냐고 묻는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는 사이일 경우 피해자 유발의 강간 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며, 즉 혜자의 남편은 혜자의 평소 행실에 대한 불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김선영, 1989)남편도 그랬었다. 뭣인가 자꾸 알아내고 싶어했다. 그가 단순히 낮털이 도둑인가 전부터 알던 사이가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나치게 낯이 익은 사내는 아닌가를 교묘히 우회하며, 그러나 집요하게 캐물었다.혜자는, 비록 공포심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이기는 했지만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단죄받는다. 즉 어떠한 경우이든 여성의 정절훼손 혹 정절의 상실은 여성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혜자는 행복한 가정주부로 살면서 그처럼 낯익고 발랄하게 보이던 세계가 강간 의혹으로 인하여 낯설고 적막한 세계로 바 뀌는 것을 경험한다. 이제까지 애써 쌓아왔다고 생각한 삶의 부피가 한낱 껍데기뿐이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여성이 강도에 의해 단순히 뺨을 맞았거나 흉기에 찔렸다면 가족들은 이 여성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애정으로 감싸며 위로해준다. 가족은 여성을 중심으로 모여들며 가족의 유대감은 더욱 공고해 질 것이다. 그러나 강간은 그 폭행이 성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강간에 의한 사회적인 통념들은 강간의 책임을 가해자에서 피해자인 여성에게로 전가시킨다. 이러한 통념에는 강간은 피해자에 의해 유발된 성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저지르는 범죄 , 여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 강간은 피할 수 있다.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사회의 정절 이데올로기는 피해자 여성의 불이익을 가중시킨다. (김선영, 1989)여성은 몸을 더럽힌 여자 라고 도덕적으로 단죄되고 만다. 이러한 단죄는 타인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 스스로 내면화한 정조관념에 의해 스스로를 죄인시 하며 미혼일 경우 정상적인 연애관계를 지속하지 못하며, 기혼일 경우 이혼당하거나 이혼함으로써 가정은 파괴되고 만다.{한 강간 피해 여성 사례연구에 따르면 어려서 강간을 당한 피해여성은 성관계를 가지고 나면 처녀막이 없음을 알고 실망할까봐 남자친구가 키스만 하려고 해도 피해여성이 먼저 헤어지자고 요구한다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여성의전화의 상담사례를 보면 배우자가 강간당한 사실을 알 경우 90%이상의 사람들이 이혼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명선, 1989)강간에 의해 가정이 파괴되는 이면에는, 정절을 잃은 여성은 가정을 가질 수 없다는 완고한 정절관이 흐르고 있다. 여성이 소유했었다고 생각해 온 행복한 가정은 결국 여성의 정절을 기반으로 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으며, 여성의 정절이 손상되었을 경우, 여성은 가정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다. (심영희, 1998)이미 예정된 대로 혜자의 가정은 파괴된다. 강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표면상으로는 혜자가 원한 이혼이었지만 남편 역시 역시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 다. 이는 남편 역시 아내의 성적 의혹을 떨쳐버리기 힘들고, 또한 주변의 의혹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단지 잊혀지려는 염원으로 기다려 온 이태동안의 입원생활이 끝난 후 혜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빈집에서 혼자 허기증과 나태함에 시달려온 혜자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 상실을 매꾸려는 듯 친구들과의 사교생활을 열망하게 되었고 인형제작일을 다시 시작함으로써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자 했다.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존, 독립이 될 것이다. 다시금 인형제작을 시작하겠다는 결의가 그녀에게 갑작스런 생기와 활력을 주었고, 그것은 또한 이제껏의 생활이 단순히 기생적인 삶으로 굴욕적인 것이었다고 자신을 준열하게 비판하게끔 만들었다.
    인문/어학| 2004.06.03| 4페이지| 1,000원| 조회(440)
    미리보기
  • [교육과정] 잠재적교육과정 평가A좋아요
    잠재적 교육과정의 개념1). 잠재적 교육과정의 연구배경과 개념잠재적 교육과정은 최근에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이의 개념정립은 아직 탐구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는 Merton이 사회제도의 적응에 관련된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잠재적 기능이라고 부른데서 기인하고 있다. Merton은 미국남서부의 원주민인 호피인디언의 기우제에 대한 풍습을 연구하여 사회적 제도와 행동의 표면적 기능과 잠재적 기능을 구분하였다. 표면적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기우제는 비를 내리게 하는 기능으로 이것은 근대적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미신이나 전통적인 타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잠재적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기우제는 가뭄으로 인하여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고 부족간의 집단의식과 단결을 강화해 주는 기능을 한다. 표면적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이고 미신에 불과한 기우제가 잠재적 기능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관찰되고 해석된다.Merton의 사회제도와 관련된 잠재적 기능이라는 생각은 교육학 분야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전문화되면서 학교의 교과활동에서 의도한 바와 관련이 없는 또는 상반되는 학습결과에 주목하게 되었다. 교과의 범위를 벗어난 일상의 학교생활에서 학교에서는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학생들이 갖게 되는 경험이 허다하며 이러한 경험들은 학교교육의 역기능과 순기능에 모두 관련되어 있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의 전 사태에 관련된다. 학교의 물리적 조건과 제도 및 행정조직뿐만 아니라 사회 심리적 상황 등을 포함하여 잠재적 교육과정의 요소를 담고 있지 않은 학교 사태는 거의 없다.이와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김종서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정의를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의 물리적 조건, 제도 및 행정적 조직, 사회적, 심리적 상황을 통하여 학교에서는 계획한바 없으나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 학생들이 은연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라고 제시하고 있다.여기에서 학교에서 의도한 바와 관련되지 않은 경험이란 학교에정의 명시성에 의해 정의하고 있다.(2) 갈등론적 관점둘째, 의도성을 강조한 갈등론적 관점을 들 수 있다. Vallance(1983)는 학교교육의 맥락, 학교교육의 과정, 연구자가 지각한 잠재성의 깊이와 의도성의 정도라는 준거를 토대로 잠재적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일어나지만 교육의 공적인 수준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비학문적이지만 교육적으로는 중요한 학교교육의 결과 로 정의하였다. 또한 Apple(1979)은 잠재적 교육과정에 내포된 의도성이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Giroux(1983)는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방식을 제시하면서 잠재적 교육과정이 기초 질서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한 저항이나 변화가능성까지도 기대하였다.이외에도 잠재적 교육과정의 원천을 사회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교 무용론, 학교 철폐론을 주장한 Illich(1971)와 Reimer, 대응이론에 입각하여 잠재적 교육과정을 본 Bowles와 Gintis(1976)가 있다.최근에 와서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이론화는 기능론과 갈등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저항이론의 관점에서 논의됨으로써 더욱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 예로서 저항이론의 시각에 입각한 Willis(1977)의 문화기술지적 관찰연구,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학생들이 배우는 것간의 질적인 차이를 논의한 오욱한(1990), 제도교육의 예기치 않은 결과를 다룬 김기석(1986), 이들보다 직접적으로 비판 `````이론적 관점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을 변증법적으로 다루려는 한준상(1986)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특히 한준상은 잠재적 교육과정을 학교 교실 활동을 통해, 학습자들에게 그들의 일상 생활과 사회관계를 구조화시키는 규칙들을 이해하고 내면화하게 하는 비명시적인 규범, 가치, 신념체계로 보았다.(3) 해석학적 관점셋째, 해석학점 관점을 들 수 있다. Gordon(1988)은 잠재적 교육과정을 학교의 물리적, 사회적말해서, 잠재적 교육과정은 사회, 정치, 문화적 권력, 과학주의 합리성, 객관적·가치중립적 지식체계라는 이름하에 암묵적으로 구조화되어 교실현장에서 재생산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학교 교실참여자들에게 구속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적 해방을 도모하기 위한 집단적 행동을 촉진하게 만드는 학교 교육과정의 모든 이념적 부문으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한준상, 1986)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 학생들이 실제로 배우는 것과의 질적인 차이를 전제로 할 때,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 교육과정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울러 이러한 정의는 학습자들의 일상적인 의미체계를 의도적으로 관장하고자 하는 문화부문으로 정의 되는 표면적 교육과정보다 학교교육의 실제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이 교육과정의 중요한 한 국면으로서 존립되어야만 한다는 당위론적 입장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2 해석학적 입장교육사회학적 시각과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시각에서도 잠재적 교육과정이 교육과정의 중요한 한 측면으로 부각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Gordon의 주장을 통해서 살펴 본 것처럼 잠재적 교육과정은 일단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며, 텍스트 와 해석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것이 갖는 교육적 잠재성의 다양함을 보다 심층적으로 설명, 이해되고 있다.해석학적 시각에서 교육은 우리 자신에게 어떤 것을 말해주고,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게 하는 일종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텍스트의 본질은 명시적 의미와 잠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바로 잠재적 교육과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텍스트로서의 교육이라는 아이디어는 교육적 잠재성의 다양한 유형을 인식함으로써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해석학적 사고방식은 학교 교육과정의 이원성을 전제함으로서 명시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연관짓게 되며, 나아가 잠재적 교육과정의 존립가능성에 대해 당위론적 입장을 취할 수 있게 한다.해석학적 입장내포된 의도와 학교교육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의 애매모호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 결국 이들은 의도와 결과를 모두 교육과정이라 보고 표면적 교육과정은 의도에 관계되는 것으로, 의도와 관련되지 않은 결과는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이홍우, 1977). 이와 유사한 시각에서 Chiang은 물론 잠재적 교육과정의 존립가능성을 주장하면서도 지금까지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의 실패에 대한 교육적 수사학에 있어서의 희생양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합리적 교육과정론자들이 의도와 무관한 학습 결과 를 과소평가 하거나 학습결과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주장은 의도와 무관한 학습 결과 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칭한다고 해서 교육과정이 표면적 교육과정과 함께 두 개의 동등한 범주의 교육과정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이홍우, 1977)이렇게 보면 교육사회학적 관점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을 논의한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다. 즉 그들은 학교교육의 잠재적 기능이 지닌 모순점을 강조한 나머지 그것이 지닌 표면적 기능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내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주의적 교육과정론자들이 보기에 학교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내용은 학교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고 또한 배우고 싶어할 만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배움으로써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내용이며, 이 내용의 가치를 인식시키는데는 Illich와 같은 학자들이 문제시하는 획일적 교육과정과 교사의 권위적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이홍우, 1977)2 Lakomski의 비판Lakomski는 지난 20여 년 간의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교육과정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잠재적 교육과정 이론은 이미 산소 연소이론에 의해 허구라고 밝혀진 가공의 연소 물질인 플로지스톤(phlogiston)과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Lakomsi, 1988) 그녀는 인식론적 시각에서는 의도/비의도라는 이원론은 명시적/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이원론과 마찬가지로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의미의 개념에 있어서 해석학적 사회과학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현상과 행위의 유의미성에 대한 가정이다. 즉 사회적 행동은 행위자의 동기, 이유, 의도, 목적의 측면에서 해명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Lakomski는 의미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애매모호하다고 주장한다. 즉 해석학에 있어서의 의미의 개념은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의미보다 복잡하며, 그 이유는 언어의 액면적 의미를 능가하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해석하게 있어서의 의미는 평가적인 의도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경험적 참조대상이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 규명되어야 하지만 의도의 관찰불가능성을 감안할 때 어떻게 의도가 신뢰롭게 규명될 수 있는 지가 문제이며, 관찰자가 다양한 의도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의도와 행동의 부합여부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관찰은 의도에 관한 지식을 파악하기에 불충분하다. 요컨대 의도의 해석에 입각한 잠재적 교육과정에 관한 주장은 그것을 지지하는 이론적 근거를 앞지르는 셈이며, 뿐만 아니라 Gordon의 교육적 잠재성의 다양성 추구에 중요한 Ricoeur의 텍스트 개념도 이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4). 잠재적 교육과정의 사례{1234공식적으로 의도한 것. 비공식적인 것, 명시하지 않았던 것.명시한 것. 학생들이 얻은 경험(경험의 결과로서의 교육과정)여기서 B 부분에 대한 정의가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사실 B속에는 1 명시하지 않았지만 결과(관행적으로 기대하는 결과) 2 명시한 것으로 인해 생긴 예기치 않은 결과 3 의도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 4 학교의 일반적 환경에서 얻어진 결과 등 네 가지 각각 다른 부분이 있다. 위에 제시한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불리는 네 가지 요소들의 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교육학| 2003.05.29| 15페이지| 1,000원| 조회(1,236)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9
19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4
  • A좋아요
    6
  • B괜찮아요
    9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30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