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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속] 처용무 평가A좋아요
    1. 처용무의 역사1) 우리나라의 나례(儺禮)조선의 나례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기월령(禮記月令)에 의하면 춘, 추, 동 에 행해졌는데 음력 12월 제야에 악귀를 쫓아내는 행사로 궁중에서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고려 단종 6년(1040)에 나례가 행해졌음이 『고려사』계동대나 의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례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나례는 궁중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즐겁게 신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12월 제야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구나(驅儺)를 하는 연희였을 것이며, 민간에서는 연중 안녕을 위하여 천신, 지신, 조상신에게 제사하며 세시풍속의 관습에 의하여 연중행사로 행하여진 가무백희는 음주가무를 하며 관중을 즐겁게 하는 우희, 잡희, 나희 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적 가무백희를 연희하면서 귀신도 몰아내고 화합과 즐거움을 동반한 연희였을 것이며 이러한 제천 행사로서는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진한의 속희가무가 있고, 마한에서는 5월 파종을 끝내고 귀신에게 제사하고 주야 음주가무를 하였으며, 변한에서도 10월 농공을 마치고 제천 사신께 제사하는 행사를 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민간 사회의 세시풍속과 더불어 행해진 민간 나례로 추정된다.『시용향악보』의 나례가 와 성황반 에 전하는 나례가 의 내용을 보면 그 절차가 중국의 대나를 본따서 연희되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상고시대의 수렵 가면, 벽사 가면, 영귀 가면 등은 방상씨 가면과 더불어 악귀를 쫓아내는 영술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신라의 처용과 오기, 또 고려의 산대잡극과 연등회, 팔관회도 모두 온 민족이 명절로서뿐만 아니라 귀신을 몰아내고 국가와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했으며 민간 사회에서도 성황신제, 산신제를 올렸다. 이는 모두 민간사회에서 전말된 세시풍속에 의한 나례의 일종이라고 하겠다.2) 나례와 처용무와의 관계나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제 1구에서 제 14구까지 종교적 의식 행사로 12신과 진자들이 역귀 두 번 추는데 처음에는 악사가 동발을 가지고 가서 오방처용과 여기를 지도하고 집박악사와 향악공들은 처용만기 즉, 봉황음 1기를 연주하면 여기들이 신라성대 소성대 천하태평라후덕 이라는 처용가를 부르고 초입배열도에 따라 차례로 배립한다. 이와같이 나례와 처용무와의 관계는 벽사진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3) 처용무의 역사처용무의 연원은 처용무의 발생을 기록한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 망해사(望海寺): 울산지방에 있는 절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신라 제 48대 헌강왕이 서울로부터 해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이어지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다. 풍우는 사철 순조로웠고 이에 대왕이 개운포{)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 출두하였다. 정차 돌아올 때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볼 수가 없었다. 좌우에 물으며 일관이 아뢰길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야 풀릴 것이라 하였다. 이에 관원에게 명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을 내리니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로부터 개운포라 하였다. 동해 용왕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여 춤과 음악을 하였다. 그중 한 아들은 임금을 따라 입경하여 정사를 보좌하였다.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고, 왕이 미녀를 처로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였다. 급간이란 벼슬을 주었는데 그의 처가 매우 아름다워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집에 들어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나갔다.『동경잡기』에 의하면 처용무는 가면희임을 알 수 있다. 즉, 동경명기월량 에서 동경은 신라시대의 경주를 말하며 처용은 달 밝은 밤이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놀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연산군 때의 『대동운부군옥』권8에의 기록에서는 오방처용으로 개찬된 것이 세종대 아니면 영조대, 이 양대 사이에 개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면, 고려초기에 팔관회를 열어 결채봉양소하고 백희가무를 했는데 백세 중에는 처용무가 들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상의 시 중에 산대결철사봉래 라고 한 구절 등으로 보아 산대와 처용무가 같이 연희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이와 같이 전래한 처용무는 조선조에 와서는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상고하면, 태조 7년에 중국 사신 영접연에 결붕잡기를 했으며 태종실록에 보면 나희와 백희를 여러 번 거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희와 백희를 했다람은 시용향악보에 나례가 잡처용 이라 한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동국문헌비고』악고 학연화대의 기록으로 보면 처용무가 얼마 동안은 단절되었던 것 같다. 『악학궤범』권5에 학연화대 처용무합설 이라 하여 섣달 그믐날 제야의 나례 때 추던 장엄한 의식 절차이던 것으로 학무와 연화대무와 처용무의 세 가지 춤이 종합된 호화스런 춤으로 변천되었다. 이 처용무에 쓰이는 음악을 봉황음이라고 이르는데 이는 조선 세종 때 윤회의 개찬으로 인하여 전하는 곡이다.처용무를 대개 3단으로 나누어 서무의 음악은 봉황음(궁중연례악의 하나) 1기라 하고, 중간부는 봉황음 중기 그리고 말기가 되는 후부는 급기라고 하였으나 시용의 처용무는 반드시 이에 준거하지 않고 순종, 고종 때의 홀기보다도 많이 축약된 춤이다.처용무는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2. 처용무의 형태1) 『악학궤범 홀기』의 처용무 (1610)12월 그믐 하루 전날 오경 초에 악사, 여기, 악공 등이 대궐에 나간다. 이날 나례 때 악사가 여기와 악공을 거느리고 음악을 연주한다.구나 뒤에 내정에 지당구를 설치하고 악사가 두 동녀를 거느리고 들어와 연화의 가운데에 앉히고 나와서 절차를 기다린다. 무릇 구느가 끝난 후에 처용무를 두 번 추는데 전도에는 학과 연화대의 회무 등이 없고 악사가 동발을 잡고 청, 홍, 황, 흑, 백의 오방처용 및 여기, 집박악사, 향악공을 인도하면 처용만기(봉황음의 일기이다)를 연주하면 여기는 처용가를 노래하며 차례로 시종회무도와 같이 들어와 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웃옥과 수건이 보통과 달랐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을 산해의 정령이라 불렀다왕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춘 의 무용 인원에 관해서 말해보면, 신라 시대의 가무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삼국 사기의 악지는 689년(신문왕 9년)에 있은 일대 주악 가무의 광경을 그린 신라 고기를 인용하고 있다. 고기는 신라초 즉 1세기 전반에 제작된 신열무로부터 6새기 전반(법흥왕 시대)에 제작된 미지무에 이르는 일곱 종류 가무의 악공, 무용인 및 가수 등의 인원수를 들고 있는데 여기에 보인 은 5종이 2명, 2종이 1명으로 되어있다. 고기는 또 807년에 비로소 연주한 사내금의 무척이 4명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 이전 신라 가무(주로 왕실에 채용된 궁정 가무)에 등장하는 무용인의 기본 인원은 2명이었고 4명의 군무는 신라 통일 이후에 채용된 한층 더 발전된 형식임을 알 수 있게 한다.3. 처용무의 음악1) 처용무의 반주 음악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처용무는 독무로 추어졌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음악을 사용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조 세종 때 오방처용으로 개찬되면서부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 사용했던 음악과 궁중 연향에서 추어졌던 『정재무도홀기』의 처용무 음악과 이왕직 아악부 때의 처용무 음악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악학궤범』의 학연화대 처용무합설에서는 전도에 봉황음이기, 중기, 급기의 연주에 제기가 부르는 처용가에서 처용무를 추었다. 물론 영산회상을 연주하면 제기들은 영산회상사를 노래하고 지당 뒤편에 진설되었던 동발을 든 악사를 선도하여 시종회무도와 같이 돌면서 초입배열도와 같이 와서 선다. 후도에는 불교 음악인 미타찬, 본사찬, 관음찬을 여기(女妓) 두 사람이 부르면 제기들은 화답하며 노래를 부르고, 또 시종회무도와 같이 회선하여 초입배열도로 들어오면 끝난다.다음으로 궁중 연향에 추어졌던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때의 『정재무도홀기』에서는 전도에 영산회상이 연주되면 제기들은 영산회상사를 노래한다. 후도에 이르면 미타며 퇴한다.한편 현행 처용무의 음악은 1931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성경린, 이병성, 김기수 등이 처용무를 배울 때 사용된 음악으로서 현재에도 실연되고 있다. 수제천 음악이 연주되면 오방처용이 일렬로 전내로 나와 북쪽을 향하여 돌아서서 가곡 언락에 맞추어 처용가 신라성대 소성대 를 부르고 향당교주 음악이 연주되면 전배, 상배, 북향하여 삼진으로 전내 중앙으로 나와 사방을 짜고 동,서가 상대하면 영산회상곡 중 세령산을 연주한다.이 곡에 맞추어 동서상배, 남북상대, 남북상배, 좌선회무, 제행이무, 오방작대를 하면 음악이 삼현영산회상 중 삼현도드리를 연주하며 오방수양수무일, 수양수무이, 우선회무, 제생이무, 무퇴하면 가곡 농악에 맞추어 처용가 산하천리국 을 부른다.반주 음악이 세환입을 연주하면 낙화유수로 진퇴하여 회선하여 퇴장하면 끝난다.2) 처용무의 악기 편성궁중 나례의 악기 편성은 『악학궤범』에서 비롯된다. 학연화대 처용무학설에는 지당 앞에 오방처용과 지당 뒤편에 화무동 4인, 가여기 16인, 아쟁 1인, 대쟁, 1인, 당비파 4일, 향비파 2인, 거문고 2인, 가야금 2인, 월금 2인, 해금 2인, 집박 1인, 동발 1인, 방향 1인, 퉁소 1인, 당적 2인, 피리 3인, 장고 2인, 교방고 1인, 대금 5인, 대고 1인이 진설되어 있고, 인인장 2인, 개 2인이 각각 좌우로 분립하여 모두 67인이 진설되어 있다.궁중 연향의 악기 편성은 『정재무도홀기』에 의해 처용무를 출 때의 악기편성이다. 그에 따르면 전상악공, 내취악공, 헌가악공으로 편성되고 또한 연향의 대, 소에 따라 다소 증감되었을 것이다.이렇게 조선시대까지 베풀어진 궁중 연향 때의 악기 편성을 예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상악공은 집사악사 2인, 집박악사 1인, 대오악공 2인, 권수전악 2인, 피리 10인, 대금 10인, 당적 2인, 퉁소 2인, 해금 4일, 방향 2인, 장고 3인, 생황 1인, 거문고 2인, 교방고 2인, 가야금 2인, 아쟁 2인, 양금 1인, 가 1인, 서기 2인, 답된다.
    인문/어학| 2004.05.18| 7페이지| 1,000원| 조회(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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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일본문화입문> 책 감상문
    이 책은 일본에 관한 도서를 도서관에서 찾다가 꺼냈는데 목차를 봤을 때 뭔가 새로우면서도 일본에 대해 알아가기에 좋은 내용들이 담긴 것 같아서 고르게 되었다. 특히 아직 배우지 않은 부분, 현대에 대한 내용들이 있어서 더 흥미를 끌었다.#. 일본을 이해하는 기초지식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일본의 기본적인 기후 특성 같은 것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일본은 우리와 같이,(당연한 거겠지만) 온대지방에 속하고 있고, 여름과 겨울의 기후차가 매우 크다고 한다. 또 놀라운 것은 한 나라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남과 북, 또 지역에 따라 기후차가 나긴 하지만 일본은 훗카이도는 겨울 월평균 기온 10도 이하로,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도 많지만, 오까나와나 오가사라 방면은 평균 15도 이상이라고 한다. 꽃피는 시기도 차이가 많고...이 나라는 같은 나라에서도 여행을 갈 때 옷을 다양하게 챙겨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기온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일본 역시, 이것은 우리나라의 자부심이기도 한 것인데 1국 1언어국가 라고 한다. 즉 일언어.일민족 국가는 일본과 한국 정도, 그 외에는 모나코나 바티칸 같은 소국가들이라고 하는데 어깨를 으쓱할 일이다. 그치만 일본 역시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니 다시 한번 강대국 일본을 낮춰볼 수 없게 하는 부분이다. 일본의 가나 문자를 봤을 때 그것이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가나 문자가 두 가지로 나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이것이 중국의 한자인 마나, 즉 진짜 글자에 대해 자기 비하적인 명칭으로 붙여졌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렇게 일본인은 스스로 고유의 문자를 창조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문자인 한자를, 그 기능과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일본어를 표기하는 음표문자로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참 일본답다 는 생각이 들었다.일본에 야마토 시대 이전에 죠오몽 시대, 또 야요이 시대가 있었고, 특히 야요이 시대의 동탁과 야요이식 토기는 이 시대를 추측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띈 부분 중에 나라 시대의 견당사 파견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지난 학기 일본사 수업을 들었을 때 처음 들어봤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일본 문화의 발달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이 견당사 파견은 그만큼 일본인의 문화적인 발전에의 미래를 바라본 노력 들을 볼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나 예나, 아니면 우리 생활 속에서도 자신보다 발전한, 또 받아들였을 때 자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화나 사상은 빨리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아내는 것은 참 현명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의 견당사 파견은 이런 면에서 일본인의 현명함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헤이안 시대 9,10 세기에 당풍문화에서 국풍 문화로 발전함에 그 면모를 볼 수가 있는데 국풍문화란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라고 한 설명에서 그것이 내가 생각한, 받아들일 땐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소화해 낸 문화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무사정권 이후 약 140년 간을 카마쿠라 막부라 하고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 기간이라고 한다. 무사 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는 예전에는 막연히 칼을 차고 검은 색 치마 같은 긴 복장을 한 그저 싸움만을 잘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장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일본에 대해 조금 알아가면서 알게된 것은 무사는 결코 싸움만 잘하는 존재가 아닌 정치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결탁하기도 하여 막부나 일본의 체제에 큰 영향력을 지닌 정치적 존재가 되기도 했던 사람들이 무사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서문화교류사 수업에서 배웠던 유럽 세력의 동양 진출 과정...일본은 모모야마시대가 그 처음이었는데 1543년 2명의 포르투갈인이 큐우슈우 남방 타네가시마에 표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유럽인의 내항과 함께 총의 전래, 기독교의 전파는 일본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한 선두 주자는 오다 노부나가, 천하통일에 전념하였던 그는 상업, 수공업과 기독교를 장려하였고 남만무역을 시작하였다. 그가 결국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의 꿈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완성하였다. 이를 보면서 무엇이든 처음 시도하고 개혁하는 자는 뒷 사람보다 몇 배 힘들다는 말이 맞단 생각을 했고 그렇게 힘들게 키웠던 통일의 목표가 심복이었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후임자인 히데요시의 통일 달성에 결국 좋은일 을 하고 물러난 것이 되진 않았나...그렇다면 노부나가의 삶과 죽음은 좀 허무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에도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개혁과 멸망 과정 중에서도 에도 시대의 학문 부분에서는 국학이나 양학 등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내가 잘못 봤나 해서 다시 읽었던 단어에는 국학이 존황양이 운동의 추진력이 되기도 했다는 대목에서 존왕양이 라는 단어만을 들어왔기 때문에 순간 오타가 아닌가 생각했던 게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서양 학문이나 지식은 난학으로서 발전하였다. 또 의학의 연구는 해체신서 라는 해부학책을 번역함으로서 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학에 의해 서양의 사정을 알게됨에 따라 막부의 쇄국정책이나 양이사상에 반대하고, 일본의 개국을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나 이런 사고방식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운동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다. 타이쇼오, 쇼오와 시대에는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거친후 전쟁 후의 재출발을 시작했고, 경제, 교육, 사상 면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그리고 일본의 문학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일본인의 정서 중에 특징적인 점은 관념적이고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이라 볼 수 있고 그래서 장편 서사문학이 빈약하고 자연을 노래한 단시형 문학이 발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구성력 면에서 떨어지는 일본 문학의 특징은 서정적이며 비구축적인 문학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일본 문학을 읽은 것이 몇 편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소설 같은 경우에 주로 수식이나 장식하는 말들이 많기보다는 짤막한 문장들과 어투로 되어있어 재밌지만 좀 딱딱하단 느낌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게 바로 일본인의 문학의 특성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의 종교의식에서는 이번 수업을 들으면서도 공부해왔던 부분이지만 일본의 국민성에 있어서 그 특징이 무종교성 이라고 한다. 일본에 1981년 조사에 의하면 신앙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3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우리나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조사하면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내 주위에서 보아도 종교를 물었을 때 무교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고 따라서 일본이 종교적으로는 수가 참 적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배운 것으로 봤을 때 각 집을 절에 속하게 하여 마치 호적제처럼 사용하는 제도가 있었음에도, 즉 국가적인 장려가 있었음에도 불교 신자의 수가 이렇게 적다는 것에 다시 놀랐다.그리고 일본의 교육제도에 있어서 일본의 식자율은 99%를 상회하고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에도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시행되어온 서민교육의 결과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문맹율이 적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일본은 99%라면 거의 그 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지매(약한 학생 괴롭히기)-(일본은 참무섭도록 심한 것 같다), 교내 폭력이나 등교거부, 중도 퇴학, 과도한 경쟁 등 어느 나라에건 이러한 사회 문제는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그리고 일본인의 성의식에서는 고대 일본인들은 성을 일간과 자연의 번영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성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즉, 성이란 신과 연결되어 신성하다는 사상이었다. 일본인의 성의식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보다 많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개방적인 성표현은, 지난 번 일본사의 이해 과제 때문에 일본공보문화원에서 봤던 영화를 떠올려도 그거침없음과 개방성은 참 같이 봤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부분이 있었다. 성을 신성시하는 이러한 성문화는 받아들일 점이 있지만 이것이 잘못 전달되어 무분별한 성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면 이것은 일본 성문화의 잘못된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될 것 같다.
    독후감/창작| 2004.04.27| 4페이지| 1,000원| 조회(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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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이탈리아 통일까지의 배경 평가D별로예요
    #. 이탈리아 통일 이전의 시대배경19c 초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후진 국가에 속해 있었다. 르네상스로 근대화에 있어 선진적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절대주의에 의한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있을 때 아직도 중세적 분권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나라들이 통과하는 절대주의적 통일국가 시대를 거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아야 했으며, 비엔나 체제 하에서는 수많은 군소(群小) 공국(公國)들과 도시국가들이 분립되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부는 부르봉가의 왕이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하고 중부는 교황이 교황령을, 북부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지방을 각각 다스리고 있었다. 그 외에 토스카나 공국, 파르마, 모데나는 오스트리아에게 예속된 귀족들이 다스렸고 사르데냐 섬은 이탈리아계 왕조인 사부아 왕조(the House of Savoie)가 다스렸다.이러한 정치적 분립상보다 이탈리아가 더욱 심각하게 겪는 어려움은 문화적 경제적인 분열상이었다. 이탈리아 전지역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열정보다는 지방적인 전통을 중히여기는 정신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북쪽 도시인들은 남쪽 시칠리아인들에 대하여 동족으로서의 애정이나 친밀감이 없었고 경제적인 유대관계도 매우 미약하였다.중산층(도시거주상인, 지식인, 관리의 일부)을 제외하고 이탈리아인들은 사회가 신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되었으므로 왕이나 교황의 지배는 정당하다고 믿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이념, 계몽주의적 세계관, 의회 정부, 평등, 사상의 자유 등을 낯설은 것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즉 구제도(Ancien Regime)의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탈리아의 통일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증오하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된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이 쫓겨나서 성직자의 권위가 소멸될 것이며, 정통 국왕들 또한 없어진다는 것을 마치 하늘이 내리는 재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이탈리아 중산층은 외국인 지배자의 축출과 통일의 성취로 경제적 성장이 증대되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분열된 상태에서는 상품의 이동, 상인의 여행시 각 나라에서 요구하는 물품세나 통행의 제약으로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고, 나아가 나라마다 다른 화폐단위나 도량형의 기준은 경제활동의 결정적인 제약요인으로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나폴레옹 점령 하에서 관리생활을 한 중산계층도 성직 및 귀족의 특권사회로 복귀하여서는 자신들의 경력과 출세가 불가능하므로 구질서로의 복귀보다는 통일된 이탈리아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이러한 노력의 일부는 과거 로마제국을 세웠던 민족으로서의 이탈리아 자부심을 확대시키는 일에 집중되었다. 민족영광의 내용을 담은 소설, 희곡, 시, 역사 등을 널리 보급시키는 이러한 일은 문자 해독, 지적 능력의 향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대학생과 교육받은 중산층은 이러한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맹이던 농촌의 대다수 농민들은 계속되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민족 통일이라는 문제와는 무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카르보나리당 운동1815년, 즉 나폴레옹 몰락 후 이러한 이탈리아의 분립과 통일에의 무관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은 카르보나리(Carbonari, 1820)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비엔나체제의 반동정책에 대항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 결사에서는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낭만주의자들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에서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여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로마제국을 부활시키는 길이라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운동은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전이탈리아에 파급되었다.1820년 카르보나리는 중산층과 군인으로 조직되어 시칠리아 왕국에서 얼마동안 자유주의적 개혁을 이루기도 하였다. 민병과 일부 군인들의 동조에 힘입어 카르보나리는 국왕 페르디난트로부터 헌법제정과 의회수립의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가 이 일에 간섭을 함으로써 카르보나리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1820년대 메테르니히는 보수반동의 최고권력을 가지고 어디에서나 자유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는 압제의 철퇴를 휘두르며 자유주의 운동을 박해하였기 때문에 카르보나리의 계획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1831~1832년에는 프랑스 7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북이탈리아의 모데나, 파르마 두 공국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자유주의 운동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에도 이들은 지나친 비밀결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대중적인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농민들은 카르보나리 운동에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전통지배계층을 옹호하고 있었다. 결국 메테르니히가 보낸 오스트리아군에 의하여 모두 진압되었다.청년 이탈리아당카르보나리당의 좌절 속에 이탈리아 독립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뛰어난 투사, 카르보나리당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 마치니(Mazzini): 제노바에서 출생하여 제노바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낭 만주의와 고전로마 공화국에 대한 동경의 일념으로 오스틀아의 압정으로부터의 해방과 조국 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처음에는 그는 문학운동만을 하였으나 1830 년 카르보나리당에 가입하여 중요한 지위를 맡았다. 1830년 반란 기도죄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후에 마르세유에 망명하여 카르보나리당 운동의 결점을 반성하고 신에 대한 신앙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기조로 하는 일반 민중에 의한 혁명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청년 이탈리아당을 결성하고 그 기관지를 통해 애국심을 고무하는 한편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가 있었다. 낭만적 자유주의자였던 마치니는 공화제의 형태로 조국 이탈리아가 통일되기를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의 영광을 나타내고, 중세 로마가 기독교의 영광을 밝히듯 제3의 로마는 자유로운 민족, 개인의 자유, 평등의 성지로서 새로운 유럽의 중심이 되기를 희구하였다. 신의 섭리가 독립된 민족국가, 공화제, 민주주의라는 형태로서 이루어진다는 마치니의 신비적 신앙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공감한 바는 아니었으나 마치니는 인간성의 진보를 신뢰하였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그는 1831년 사건의 관련자로 추방당하였는데 이 기간 그는 프랑스 7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카르보나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청년 이탈리아 조직, 민족운동을 시작하였다. 마치니는 이탈리아의 해방과 공화제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북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대규모화하고 선전선동을 통하여 그 세력을 넓혔다. 청년 이탈리아 조직은 대학생들이 중심세력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혁명의 이상을 위하여 자신의 젊음을 불사르는 한편 이탈리아인들의 각성과 자유로운 민족들이 형제애로 뭉쳐서 새로운 유럽을 만들어 나가자는 마치니의 이상 실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마치니는 참된 혁명은 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었고 이것은 동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마치니는 카르보나리가 실패한 까닭은 그들이 기반을 전이탈리아에서 얻고 전국민의 참여를 유도할 미래상의 제시가 부족하고 제약적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었다. 대중동원과 그들의 참여 없이는 어떠한 혁명도 마치니가 제시한 미래상과 양립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대중을 움직일 수단의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치니의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832년에는 대규모의 폭동을 계획하고 1834년 마치니를 따르는 소규모 집단이 스위스에서 사부아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고, 다른 곳에서 반복된 시도들도 1837년, 1841년, 1843~1844년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마치니는 그 뒤 영국에 망명하여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여 이탈리아 통일의 정신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인문/어학| 2004.04.27| 3페이지| 1,000원|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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