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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와교통]자전거도로의 종류 및 적용사례 및 개선방향 평가A좋아요
    목 차1.자전거도로의 종류1.1 자전거 전용도로의 정비모형1.2 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1.3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2.자전거도로 설치위치2.1 도로개설시의 자전거도 계획 방법3.자전거도로 구조?시설기준 및 특징3.1 자전거도로의 폭 및 갓길3.2 자전거도로의 턱3.3 자전거도로의 종단 구배3.4 자전거도로의 분리4. 국내 ? 외 자전거 적용사례4.1 네델란드(Netherlands)4.2 덴마크(Denmark)4.3 독일(Germany)4.4 일본(Japan)4.5 한국(Korea)5.자건거 도로의 단점 및 개선방안5.1 자전거 도로의 단점5.2 개선방안6. 참고문헌앞으로 다가올 21세기 초반에는 사회전체의 생활기조가 양으로부터 질로 변화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으로 예견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안락하고, 더 접근하기 쉽고 더 환경친화적인 교통수단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바꿀 것이다. 이처럼 장래 예견되는 사회적인 경향을 바라볼 때 앞으로의 교통정책은 그간의 자동차 위주의 정책기조로부터 대중교통, 보행, 자전거와 같이 환경친화적인 녹색교통(green modes)체계의 정책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1.자전거도로의 종류자전거도로에는 자전거 전용도로, 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가 있다. 자치단체의 토지이용시설과 도로망/교통량을 고려하여 교통여건에 따라타당하도록 자전거도로 형태를 계획하되 각각의 특성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유형설치방법비고자전거전용도로?공원,하천, 고수부지 등에 설치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자전거와 보행자가 부분적으로 혼용?하천, 공원 등에 설치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주로 자전거 통행에 이용?자전거만의 통행에 이용1.1 자전거 전용도로의 정비모형자전거 전용도로의 경우에는 하천변에 조성하는 하천형과 공원에 조성하는 공원형이 있다. 하천형을 조성되는 위치에 따라 수변형(BWW)과 제방형(BWE)으로 나눌수 있다. 수변형은 하천에 인접하여 조성하는 형태이고 제방형은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분리형?자전거 보행자 겸용도로형식설치방법특성경계석형(HDS)?자전거공간과 보행자공간을 경계석으로분리고압블록형(HDK)?자전거공간과 보행자공간을 고압블럭의색상으로 자연스럽게구분/분리노면표시형(HDM)?자전거공간과 보행자공간을 흰색노면표시로 분리1.3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는 자전거의 통행이 차도에서 일어나는 형태이다. 자전거와 자동차를 분리/비분리에 따라 분리형과 비분리형으로 구분된다.분리형은 연석/가드레일등 공작물로 자전거와 자동차를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공작물형(CDG)이 있고 단순히 노면표시로 분리하는 노면표시형(CDM)이 있다.비분리형은 차도상에 공작물/노면표시로 자전거와 자동차의 통행로를 구분하지 않고 자전거와 자동차가 동일한 공간을 공용하는 형태로써 자동차가 자전거와 안전한 이격거리로 주행이 가능할 때는 병행주행이 가능하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동차는 자전거의 뒤를 쫓아 주행해야 된다.분리형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형식설치방법특성공작물형(CDG)?자전거와 자동차를 차도상에서 연석/가드레일로 분리노면표시형(CDM)?자전거와 자동차를 차도상에서 청색노면표시로 분리양보형(CNY)병행?자전거와 자동차가 분리없이 병행주행추종?자전거와 자동차가 분리없이 자동차가 자전거를 추종주행? 한편, 국지자전거 도로망 계획시 대상도로인 이면도로에 대한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의 유효폭이 부족한 경우에는 주차시설을 제거하거나 일방통행으로 전환하여 자전거?자동차 겸용도로를 설치할 수 있다.? 또한, 자전거와 자동차를 분리하기 위하여 연석을 설치하는 경우에는 배수를 고려하여 연석구간과 비연석 구간을 1:1로 하며 교차로가 있는 경우에는 교통의 유출입을 위하여 20~30m 전/후방은 연석/가드레일을 설치하지 않고 표지병으로 설치한다.표지병 설치 예2. 자전거도로 설치위치주변의 토지이용행태 및 버스 및 택시 정류장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 형태를 제시할 수 있으며 자전거도로 주변의 상황에 따라 이들 세가지 형태를 복합하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1) 횡단면 15m (중로2류)(2) 횡단면 20m (중로1류) : 식수대를 설치하지 않는 경우(3) 횡단면 25m (대로 3류)(4) 횡단면 30m (대로 2류)(5) 횡단면 35m (대로 1류)3.자전거도로 구조?시설기준 및 특징우리나라의 자전거 이용시설의 구조시설 기준에 관한 규칙은 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공동 부령으로 제정되어 있다.3.1 자전거도로의 폭 및 갓길3m이상의 자전거 도로는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 차도에서 3m이상을 자전거도로에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보도에 설치시에는 식수대폭 1m, 건축물측 무효공간 0.5m, 2인기준 보행자 폭 1.5m를 고려시 원칙적으로 6m이상의 보도에만 설치 가능하여 사실상 보도에는 자전거도로를 설치할 수 없다.? 자전거도로를 3m 이상으로 설치시에는 차도와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경우 주차공간으로 쉽게 변형 이용된다.? 시?종점에는 차량의 진입을 예방할 수 있는 진입 장애물 시설을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등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일본의 경우에는 1차선 자전거도로의 폭은 1m로 하되 지형의 상황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해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0.75m까지 축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자전거도로는 2차선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차도에 자전거도로를 공작물의 분리없이 설치하는 경우에는 자전거의 안전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관계로 보도에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방향에서 자전거 도로의 최소폭이 재검토되었다.우리나라에서는 최근의 실험결과에 따라 자전거 이용시설의 구조?시설기준에 관한 규칙(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1995.7.)에서 자전거도로의 최소폭은 자전거 핸들의 폭 0.7m에 좌?우 양측의 측방여유폭 0.4m를 합하여 편도 1.1m로 하되 연장 100m 미만의 터널?교량 등의 경우에는 0.9m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차선수는 자전거 교통량과 도로의 여건을 고려하여 결정한다.일본의 경우에는 1차선 자전거도로의 폭은 1m로 하되 지형의 상황이 턱일부 자전거 도로는 보행자가 빗물이 보도에 넘치지 않도록 연석의 턱을 2cm 또는 그 이상의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연석의 턱이 2cm인 경우에는 자전거의 연속주행이 불가하여 내려서 다시 끌고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계속 진행할 경우에는 자전거 튜브나 바퀴, 본체에 손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자전거 도로의 턱은 0cm로 하여 자전거 이용자에게 편리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연속주행이 가능하도록 조치하여야 한다.3.3 자전거도로의 종단 구배자전거도로 설계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구배이다. 오르막구배의 경우에는 자전거의 오르막 능력에 영향을 주며 과도한 상향구배를 갖는 자전거도로는 이용자로 하여금 많은 운동에너지의 소모를 요구함으로 인해 이용율의 저하를 초래한다. 급격한 하향구배에서는 주행속도의 증가로 제동장치가 미비한 자전거의 안전상의 문제로 사고유발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이러한 지형에서의 자전거도로의 설치는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다.따라서 자전거 운전자들은 구배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일반적으로 자전거도로의 구배는 3%보다 작은 구배로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 독일, 일본, 영국의 오르막 종단구배별 자전거도로 제한길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각국의 구배별 오르막 길이(단위: %, m)구 분구 배한국미국독일일본영국3360--300-*************-5*************06120-65--790---30자료: 송창용, 장명순, 하동익, 자전거도로의 구배 설계기준에 관한 연구, 대한교통학회지 제12권 제4호, 1994.12.자전거도로상에서 종단구배가 계속될 경우에는 제한 길이에 이를 때마다 3%미만의 종단구배를 갖는 구간을 100m이상 설치하도록 한다.3.4 자전거도로의 분리자전거와 보행자 또는 자전거와 자동차의 분리는 일반적으로 자전거 교통량, 보행자 교통량, 자동차 교통량의 규모를 기준으로 한다. 다만, 자전거와 자동차의 분리시에는 교통량외에 주행속도 및 대형차량의 비율이 추가로 고려되고 있다.우리나라를 포함하여차와 소수의 자전거? 400~700대/일의 자동차와 50대 이상의 자전거? 소수의 자동차와 500대/일 이상의 자전거노르웨이? 500대/일의 자전거와 300대/일의 자동차가 있는 경우미 국? 자동차 교통량이 1000대/일 이상인 경우? 자동차 누적 주행속도의 85%가 65km/h 이상인 경우? 대형차 혼입율이 5% 이상인 경우독 일? 500대/일의 자전거 또는 100대/시의 자전거자료 : 전개서, 1994, 서울시정개발연구원4. 국내 ? 외 자전거 적용사례4.1 네델란드(Netherlands)세계 제일의 자전거왕국으로 자전거 보유율은 1.0, 즉 국민 1인당 1대의 자전거를 가지고 있으며 자전거왕국답게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여왕도 평상시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이 나라가 자전거왕국으로 자리잡게 된 요인은 국토의5분의 3이 해발 5m이하의 저지대로 산악지대가 없이 거의 평평한 지형으로 자전거 이용에 아주 적당할 뿐만 아니라 회사, 학교, 관공서 등 주민들의 생활권이 집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어 자전거이용 여건을 더욱 좋게하고 있으며 정부 또한 이러한 지리적, 사회적 입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자전거도로와 자전거 주차장 등 이용시설을 완벽하게 마련해 주고 있다.4.2 덴마크(Denmark)세게 제2의 자전거 국가로 자전거 보유율은 1.1이며 시의회, CFC(자전거교통정책을 추진하는 유럽의 도시들로 구성된 단체),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교통을 중심으로 한 생활편의와 여가 중심의 자전거문화가 발달되어 있다.60대 도시 변두리지역 및 주도를 따라 건설되기 시작한 자전거전용도로가 1991년 오렌스자전거도로의 기본계획에 따라 교통중심노선(Traffic path) 300Km, 여가활용노선(Recreation path) 150Km를 건설하는 등 자전거이용자를 위한 환경개선에 계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4.3 독일(Germany)자전거의 대표적인 국가로 자전거 보유율 1.3으로 세계 3위이다.정부의 종합도시교통계획 수립시 자전거 분야를 독립교통수단다.
    공학/기술| 2006.07.07| 15페이지| 1,500원| 조회(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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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한국 장애인 스포츠 발전 및 현황
    한국 장애인 스포츠 발전 및 현황장애인 스포츠 현황우리나라는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 개최 이후 우리나라의 장애인스포츠는 외형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지속적으로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국제대회의 참가 기회가 점진적으로 늘고 있으며, 우수선수에 대한 연금지급, 이에 따른 재정지원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1948년 척수장애인경기대회를 제창하여 오늘날 장애인스포츠를 활성화시킨 Ludwig Guttmann박사는 ‘신체장애인을 위한 스포츠’라는 저서에서 장애인이 스포츠 활동을 실시하는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들었다.첫째는 치료수단으로써의 가치이다. 신체활동은 가장 자연스러운 치료방법이며 통상적인 물리요법으로 채택되고 있다.둘째, 레크리에이션 및 심리학적 가치이다. 치료요법으로써 스포츠가 갖는 커다란 장점과 가치는 레크리에이션적인 성격에 있으며 장애인에게 생활의 활력과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되찾아 주는 동기를 부여하는데 있다.셋째, 사회통합 수단으로써의 가치이다. ‘스포츠의 목적은 자기극복, 자존, 동료간의 우애 등 장애인들의 사회통합에 필요한 정신자세를 고양시키는데 있다’고 하였다.최근 들어 정부는 생활체육의 활성화를 위한 사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체육과 엘리트스포츠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생활체육이 활성화되면 장애인스포츠 인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우수선수도 자연스럽게 육성될 것이다.그러나 장애인 생활체육에 대한 예산투자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장애인스포츠의 진흥을 바라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스포츠를 진흥시켜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장애인스포츠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자연히 증가하게 되어 생활체육의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될 것이다.따라서 장애인스포츠가 발전하기 위한 방안의 모색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장애인을 위한 스포츠의 발전과정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 장애인스포츠 활동이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이애인체육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장애인체육이 의학적 접근으로부터 탈피하는 기회를 마련했다.과거의 의학적 접근으로서의 장애인체육은 신체적 이상을 교정하고 운동기능에 보이는 장애를 치료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나 장애인스포츠의 움직임은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잔존능력에 중점을 두어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을 찾고 개발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최초의 전국적인 규모의 장애인체육대회는 국토 방위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척수에 장애를 입은 상이군경들의 재활을 위하여 1967년 4월 25일 당시 국립원호병원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상이군경체육대회이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의 각종 장애인체육대회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회이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1975년 10월에는 소아마비 청소년들을 위한 정립회관이 준공되었다.이 정립회관은 체육관, 수영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장애청소년을 위한 각종 체육활동을 펼쳐 나갔으며, 마침내 1976년 10월 10일부터 30일까지 전국의 초,중,고,대학 및 일반 지체부자유 청소년을 대상으로 제1회 전국지체부자유청소년체육대회를 개최하였다. 정립회관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는 6개 시·도 1,11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수영, 사격, 양궁, 탁구, 축구, 농구, 소프트볼 등 7개 종목의 경기를 치렀다.이 대회는 매년 규모가 커지면서 한때는 전국에서 2,000명이 넘는 선수·임원이 참가, 장애인체육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90년대 들어 대회개최가 중단되었다.정립회관은 이밖에도 수영은 1975년, 사격은 1977년, 양궁은 1980년부터 종목별 선수권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등 장애인체육을 활성화시키고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양성하여 '88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상위 입상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1981년 유엔이 제정한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이하여 장애인스포츠는 발전 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전국장애인체육대회가 마침내 열리게 된 것이다.그 이전까지는 정립회관이 주최하는 전국지체부자유청소년체육대회, 상이군경회가 주최 몇몇 대회가 있었으나, 전장애(척수장애, 뇌성마비, 절단 및 기타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정신지체)가 참여하는 종합체육행사는 이 대회가 최초였다.그리하여 제1회 대회는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주최로 1981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정립회관, 현대건설운동장, YMCA체육관 등에서 1,011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열려 육상, 수영 등 5개 종목의 경기를 실시하였다.한국장애인재활협회는 4회까지 이 대회를 여의도 체육공원 등에서 개최하였다. 반면,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됨에 따라 관례에 의해 장애인올림픽대회의 서울 개최를 국제스토크맨드빌경기연맹(ISMGF)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요청받았다. 우리나라는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서울 개최를 국제조정위원회(ICC)로부터 승인받았다.이에 따라 발족된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는 대회 준비의 일환으로 전국장애인체육대회 개최를 주관하게 되었다.조직위원회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를 장애인올림픽대회에 대비한 사전경험 축적의 좋은 기회로 보고 대한체육회 및 가맹경기단체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대회 규모를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주최로 제5회 대회가 1985년 10월 19일과 10월 20일 양일간 성남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대회규모도 매년 신장하여 제5회 대회에는 7개 종목 1,62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제6회 대회는 9개 종목, 선수단 1,733명, 그리고 장애인올림픽대회 예행연습으로 열린 제7회 대회는 모두 1,932명(선수 1,500명, 임원 432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장애인올림픽대회 종목인 16개 전종목이 모두 치러졌다.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후 장애인체육을 관장할 전문적인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시기구인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를 승계한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가 1989년 4월 28일 설립되었다.우리나라의 장애인스포츠는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의 개최에 따라 1988년을 전후로 정부나 국민의 관심 속에서 장애인경기종목의 개발과 아울러 급격한알리고 뒤떨어진 장애인 복지수준과 국민의식을 높이는 새 전기로 삼기 위해 유치된 제8회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는 ‘도전과 극복’, ‘평화와 우정’,‘참여와 평등' 을 대회 이념으로 서울올림픽대회와 동반 개최됨으로써 명실공히 복지올림픽으로 자리잡았으며 장애인올림픽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한 세계장애인의 대축제였다.국민의 관심과 성원뿐만 아니라 참가 규모 역시 역대 대회와 견주어 볼 때 최고 수준이었다. 61개국에서 선수, 임원 4,220명과 심판 554명, 보도진 2,368명, 국제기구요원 100명, 자원봉사요원 6,431명, 지원요원 4,971명과 행사출연요원 12,156명이 참가되었다.1988년 10월 15일부터 10월 24일까지 10일간 열린 이 대회는 16개종목(육상, 수영, 농구, 골볼, 탁구, 역도, 사이클, 축구, 배구, 유도, 양궁, 사격, 펜싱, 론볼링, 보치아, 당구)의 정식종목과 휠체어 테니스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세부종목 729개가 치러졌다.경기장으로는 서울종합운동장을 비롯 올림픽공원 내의 각 경기장과 상무종합운동장, 정립회관 등이 사용되었고, 선수촌으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건립한 아파트 3개동 476세대가 10월10일부터 10월27일까지 활용되었다.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장애인체육분야만이 아니라 장애인복지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동안 선언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었던 장애인복지법이 1989년 12월 개정되었고, 또 장애인의 소망이었던 장애인고용촉진법도 제정되어 199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국내 장애인 스포츠의 발전오늘날에는 국가가 솔선하여 레크리에이션 및 체육 활동에 장애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그 실적이 미흡한 상태이다. 장애인에게 있어 체육 활동의 의의는 치료 행위로서의 가치, 레크리에이션 및 심리학적 가치, 사회 복귀 수단으로서의 가치로 요약될 수 있다.장애인 스포츠에 있어 최초의 전국 규모의 대회는 1967년 4월25일 당시 국립 원호 병원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정립 회관 준공을 계기로 1976년 제1회 전국지체부자유청소년체육대회가 지체 부자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1981년 세계장애인의해를 맞이하여 제1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가 개최되었고, 1989년부터는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가 설립되어 이 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1988년 제8회 서울장애인올림픽 대회가 서울올림픽대회와 동반 개최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장애인 체육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최초의 국제 대회 참가는 1965년 세계스토크맨드빌휠체어경기대회에 상이군경3명이 참가한 것이 효시이며, 이후 상이군경은 이 대회뿐만 아니라 장애인올림픽대회에 지속적으로 참가 많은 메달을 획득하게 된다.1984년 6월 상이군경 외의 장애인들이 제7회 뉴욕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 처음 참가했고, 이후 1985년에는 세계 농아 체육대회, 1987년에는 정신지체인을 위한 특수올림픽에 장애영역별로 참가하게 된다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는 우리 나라가 금메달 40개를 획득 종합7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였고, 1992년 바르셀로나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11개로 12위를 차지하여 장애인 스포츠의 중상위권 국가로 완전히 진입하게 되었다.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 이후 우리 나라 장애인 체육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특수학교 체육 활동, 생활 체육, 연구 분야에서도 점차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따라서 앞으로 장애인 체육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첫째, 장애인 체육에 대한 의식이 선진화둘째, 학교 체육의 정상화셋째, 생활 체육의 활성화이루저 져야함넷째, 장애인 체육에 대한 경기력의 활성화와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장애인 체육의 과학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체육활동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를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수천년간 부정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부랑아들만큼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족들은 장애인들이다.
    예체능| 2006.05.24| 4페이지| 1,000원| 조회(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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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감상문] 전태일평전 평가A좋아요
    전태일평전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공이었던 아버지 전상수(69년 작고)씨는 나이가 들면서 가내업을 차리기도 했지만 몇차례 실패를 하는 동안 폭음과 술주정이 버릇이 되어 버렸고 살림을 팔아 빚을 갚고 나면 빈털터리 가족들을 길바닥에 버려둔 채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또 미싱 한 대라도 차릴 형편이 되면 다시 가족들에게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도산과 실직, 떠돌이 노동 사이를 오가는 동안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다시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다녔고. 이런 형편 속에서 대부분의 불우한 가장들이 그랬듯이 부친은 폭음 후에 가족들에게 욕설과 매질 등 학대를 통해 고통을 주었다. 1954년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 제품업을 하다가 장마로 원단이 상해 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받자 태일의 가족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게 된다., 어머니 이소선 씨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 다리 밑에서 노숙하면서 동냥으로 연명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쥐어준 3천원 쯤 되는 돈으로 장사밑천을 하여 채소행상, 팥죽장사, 찹살떡 장사, 광주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한 2년 동안 생활하다가 때때로 남편이 번 돈을 합하여 천막집 한 채에 재봉틀 한 대를 살 만큼 되었다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태일의 아버지는 어떤 중개업자를 통해 어떤 고등학교의 체육복 수천 벌을 단체주문 받게 되었고 자금을 마련해 납품까지 했는데 4.19혁명이 일어나자 브로커는 학교에서 받은 옷값을 떼어먹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결국 채권자들의 독촉에 못 견디고 살고 있던 판자집마저 다 팔아 빚을 청산하고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다행히 원단 가게 주인이 그를 동정하여이태원 외인 주택 근처의 산마루턱에 판잣집 셋방을 얻어 주었으나, 그는 낙담한 나머지 한 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폭음하면서 허송세월을 하였고 태일의 어머니조차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자가 되다시피 하였다.한 가족의 생계를 어린 어깨에 떠맡게 된 태일은 어린 동생을 데두닦이를 하였고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어느 식당에서일하는 어머니를 찾았고 그해 꼬박 일을 해서 그들 모자는 작은 삭월세 판자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생 순덕이를 찾아왔고 여동생 순옥과 아버지또한 그들과 만나 다시 한 가족이 서울에 모여 살게 되었다.태일은 1965년 그가 17세 되는 해에 처음으로 직장이라는 것을 구하게 되었다. 시다로 들어간 그는 비록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기술만 익히면 편해진다는 생각과 또한 그 돈으로 배고파 해도 되지 않을 가족을 생각하며 열심히 하였다. 재봉틀에 익숙 해져 있던 그는 금방 기술을 배워 미싱 보조로 들어갔고 월급도 3천원으로 올랐다. 그리고 다시 미싱사가 되었다. 그는원하던 기술도 익히면서 청년노동자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그리고 끊어졌던 배움의 길을 뒤늦게나마 다시 걷겠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저 지옥과 같은 평화시장의 처참한 노동현실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환풍기도 없는먼지구덩이의 닭장같은 다락방 작업장, 끊임없는 재봉틀의 소음 속에서 여공들은 허리도 펴지 못하며 변소 한번 가려고 해도 눈치를 보아야 했다. 기름냄새, 땀냄새, 원단에서 나는 냄새, 옷감을 짜르고 재봉할 때마다 풍기는 먼지 속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노라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온다. 졸지 말고 밤일 잘 하라고 주인아저씨가 사다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한 다음날에는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햇빛도 통하지않는 어두운 작업장에서 어린 여공들은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한다. 한 달에 쉬는 날은 2일. 일요일에 그나마 꼭 지켜지지도 않고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한 달 임금은 평균 3천 원(1970년 당시).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집안 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 사먹을 여유가 없어서 1개에 1원짜리 풀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거 계속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다들의 노동 생활을 보며 그는 항상 분개 하였다. 그것은 그의 일기장 속에 잘 나타나 있다.'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재단사가 된 후 전태일은 시다들의 생활상을 집에서 자주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배움의 꿈을 접고 그 노동조건을 어떻게 하면 바꿀수 있을까하는 고민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활하던 어느날 한 여공이 각혈을 하게 되고 급히 병원으로함께간 태일은 폐병3기라는 여공의 병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여공은 주인에 의해 해고를 당하게 된다. 불행한 가족들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돕기 위하여 혹은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하여, 남들이 한창 까불고 뛰놀고 배우고 할 나이에 잠 한 번 푹 못자고 주린 창자 한 번 양껏 채우지 못하고 지옥같은 작업장에서 연약한 허리가 꺾어지도록 일만 해온 그녀가 제대로사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눈앞에서 보아야만 하는 태일의 가슴은 통곡과 분노로 들끓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비극을 주목하지 않았지만, 아니 모두가 그것을 외면했어도 전태일의 작은 가슴 하나만은, 연민과 분노로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공들의 참상은 전태일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도 그의 기운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일깨우고 쇠잔해가는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그는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 인간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의적인 구속을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하게 만들었다.'죽어 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정되었다. 이것이 바보회의 출발이었다.그는 항상 근로기준법 해설을 들고 다니며 그 책을 해석하기에 여념이 없었고그것을 통해 근로조건 개선으로 향하려는 그의 발길은 평화시장에서 그를 쫓겨나게 하였으며 정부와 기업주간의 결탁이라는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막노동을 하면서 그 힘겨운 투쟁을 혼자서 계속하고 있었다."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1970년 5월경 그는 삼각산의 임마누엘 기도관 신축 공사 현장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매일 일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1970년 9월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다. 한동안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때마침 재단사를 구하는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취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예전의 바보회를 모으기 시작했다.또한정부와 방송국 노동청, 신문사들을 돌아다니며 노동실태를 고발했다.태일은 어느 날 노동청 정문 앞에서 마침 만난 출입기자들을 붙잡고 사정이야기를 하며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되도록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매달려 봤더니 그들이 무척 호의적인반응를 보이며 3만이 되는 직공에 설문지 30매 정도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니 좀더 많은 조사보고서를 받고, 구체적인 자료를 모아서 여러 사람 이름으로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해보라고 권한다. 태일은 실로 암흑 속에서 빛을 보는 것 같은 새로운 전망으로 용기백배하였고, 이제껏 소극적이었던 친구들의 움직임도 생기에 차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1970년 9월 16일 저녁 그들은 그 동안의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고 새 조직을 만들어출발한다. 삼동이라 함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 것이다. 그들은 '바보회'의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대한 '진정'이나 '호소'의 수준을 넘어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투쟁'할 것을 활동지침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노동청 출입기자들이 평화시장의 참상에 대해 몰랐을 리가 잇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평화시장을 찾아가서 그 참혹한 노동실태를 파헤쳐서 보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런 것을 다루면 달가워할 사람도 없고 신문사의 상사들이 색안경을 쓰고 주시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태일이 모든 자료를 갖추어 노동청에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니까 비로소 노동청 출입기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평화시장에 대한 기사를 다룰 용기가 났던 것이다.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뚫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벽의 일각이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이 세대의 무관심, 억압과 침묵의 벽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평화시장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고 그것이 젊은 재단사들의 투쟁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신문보도가 나자 평화시장의 업주들은 진정서를 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삼동친목회 대표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측에 대하여 요구조건을 제출하기로 결의를 하고 사무실을 찾아가 업주 쪽에 11시간 작업, 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노동조합 결성의 지원 등을 합친 8개항을 요구했다. 평화시장 2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녹음된 노동자의 목소리였다.69년 3선 개헌을 강행한 정부는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론에 민감해 있었다. 노동자들의 참상이 매스컴을 통해 계속 보도된다면 그것은 선거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노동청은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 틀림없는 형편이었다. 평화시장 진정서가 신문에 보도되자 노동청은 황급히 실태조사도 하고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는 고발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근로감독관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 전태일 등을 "모범 청년"이라느니, "노동절에 표창하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그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또 노동청의 근로기준국장도 찾
    독후감/창작| 2003.10.24| 8페이지| 1,000원| 조회(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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