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애정관을 주제로 살펴본고대 서사 구조과 목 명한국어문2담 당 교 수 님교수님학 과경영학과학 번003502성 명강 두 원제 출 일2000. 9. 29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서로에게 품는 감정은 이야기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한 남녀의 관계는 당시의 사회적 인식에 부합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식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서사 구조를 찾을 수 있으며, 각 서사 구조에서 우리는 공통첨과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몇몇 이야기의 남녀 관계에 대한 여러 상황들과 구조를 살피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을 찾아보도록 하겠다.본론1. 타의에 의한 결합여러 이야기들을 살피다보면, 여성의 의지가 반영된 경우도 있지만 여성의 의사가 명확히 되지 않은 채 육체적 결합이 이뤄지는 경우도 발견된다. 남녀 사이에서 애정이 전제되지 않아도 화합을 하고, 혼약을 맺는 모습들을 고전의 설화와 문헌에서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혼약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관계조차 발견되는 것이다. 이러한 혼약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관계에 있어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문헌들 중에는 여성의 부친이 권력자에게 자신의 딸을 바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문헌들을 부분적으로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신혜왕후 유씨(柳氏)는 정주(貞州) 사람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 부친 천궁은 큰 부자로 고을에서 장자(長者)라 불렀는데, 궁예(弓裔) 부하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밑에 쉬면서, 길 옆 냇가에 서 있는 천궁 딸을 봤다. 왕건이 그 정숙함을 보고 그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묶었다. 이 때 천궁은 음식을 마련해 함께 온 군사 모두를 크게 대접했고, 그날 밤 딸을 왕건과 동침하게 했다.이후로 왕건이 소식을 끊으니, 천궁 딸은 수절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뒤에 왕건이 이 소식을 듣고 불러서 '부인(夫人:副室을 뜻함)'으로 삼았다. (하략)신혜왕후 유씨성안에 대·소 서원 두 절을 짓고 전답과 백성을 배치해 각각 거처하게 하니, 곧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이다.행파의 두 딸이 이틀 밤동안 차례로 왕건과 동침을 하였다. 신혜왕후 유씨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자신들이 부친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또한 단순한 동침으로 끝났을 뿐, 왕건은 그녀들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여인은 유씨와 마찬가지로 수절을 하였다. 이는 앞의 신혜왕후 유씨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상황의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뒤에 소개할 소지왕의 이야기에서는 파로라는 사람이 벽화라는 자신의 딸을 바친다. 그러나 유씨나 대서원, 소서원 부인과는 차이점이 있으므로 우선 위의 두 얘기를 묶어 구조를 간단히 살핀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는데,천궁, 행파는 자신의 딸들을 권력자(왕)에게 바친다. 세 경우 모두 바쳐진 딸들이 정실로 든 것이 아니며, 후일 그녀들이 절개를 지켜 권력자가 불러들이게 된다. 여성이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 있어서 권력자와 등장하는 여인들 간에 애정 관계가 있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으나, 유씨나 대·소서원부인의 경우에서 보듯, 그녀들을 취한 권력자(왕건)의 태도로 보아 그녀들의 권력자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할지라도 그 것은 양방향이 아닌 단방향의 구도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권력 때문에 절개를 지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권력자는 그 여성들을 신체적 욕구의 충족 대상으로 보았을 뿐 그녀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룻 밤의 동침 후, 권력자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권력자가 그녀들이 절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왕궁으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가 절개와 지조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소지왕이 22년 9월 날이군에 행차했을 때, 고을 사람 파로가 16세인 자기 딸 벽화를 비단옷을 입혀 잘 꾸며, 가마에 태워 비단 장막으로 덮어 진상했다. 왕이 음식인 줄 알고 열어 보니 여자이기에, 그대로 음에는 제자들의 간섭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훈장의 아들과 최풍헌의 여식이 서로에게 연정을 품게되었고 이야기는 보다 극적으로 전개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훈장의 아들을 최풍헌의 여식이 구해내기에 이른다. 『한국문헌설화』(건국대학교 출판부, 1999)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최풍헌 딸 설화는 서당 젊은이들이 혼인을 돕는다는 내용이지만, 처녀 자신의 의지 또한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다보면 처녀가 "부친의 허락을 받아 양반에게 시집가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훈장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앞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처녀가 단순한 동정이나 애정뿐만 아니라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 역시 작용되었을 수 있으리라는 여운을 남긴다. - 그러나 처녀의 적극적인 태도에서 그녀의 혼인에 대한 승낙이 신분 상승 욕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앞서 얘기한 세 고사에서처럼 권력 지향적인 목적의 결합만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또, 개인의 의지가 있기는 했으나 설씨녀의 설화에서도 타의적인 남녀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설씨녀의 설화에서는 최풍헌녀의 설화에서 애정적 요소가 부각되었던 것에 비해 다소 가라앉아 있다. 거울을 쪼개어 나누어 가지고 6년여 동안 가실을 기다렸다는 부분에 있어서 둘 사이의 애정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설씨녀의 설화에서 강조되어지고 있는 것은 애정이 아닌 약혼에 따른 여성의 절개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실과 설씨녀의 혼인이 가실이 설씨의 군역을 대신한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이고, 설씨녀의 의견은 언급되지 않아 정확히 설씨녀가 가실에게 어떠한 감정을 갖고있는가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지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타의에 의한 결합 가운데 마지막 유형은 바로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설화이다.(大武神王 15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에 유랑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보고 고구려 왕자임을 알고 데리고 가서 공주와 결혼시켰다.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가 낙랑있다. 애정의 또다른 형태는 아닐까.2. 자의에 의한 결합여기서부터는 여성의 의지가 보다 강렬하게 반영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확연한 애정 관계와 그러한 관계로 인한 갈등 상황들을 통해 구조를 살피고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온달 처 평강공주 溫達妻 平岡公主평강공주는 어릴 때 울음이 많아, 평강왕이 '너는 잘 울어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야하겠다.'라고 늘 말하였다. 평강왕은 별다른 의미없이 평강공주의 울음을 그치도록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평강공주는 성장하여 고씨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되자 "대왕께서는 항상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해놓고, 지금 와서 왜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려 하십니까? 보잘것없는 사나이도 식언을 안하는데 임금이 식언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옛부터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왕의 말씀이 틀렸으니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그러나 온달을 단순한 바보로 볼 수는 없다. '고구려 평강왕 때, 겉은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만 마음속은 명석한 온달이란 노총각이 있었다.'라는 첫 구절로 보아 온달의 총명함이 이미 전제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강공주는 아버지의 말씀과 자신의 연민의 정에 따라 온달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애정 관계에 대한 첫 번째 난관은 평강공주의 부친인 평강왕이었다. 평강왕은 끝내 공주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으나, 애초 온달과의 혼사를 반대하였었고 끝내는 의절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는 온달의 모친이 공주를 거절하였다. "지극히 가난하고 누추한 나의 아들에게는 귀인이 배필로 될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이미 마음에 온달을 두었고, 정성을 다해 결국 온달의 배필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평강공주의 온달에 대한 애정만이 점쳐지지만, 이야기의 말미에서는 온달이 전사를 하였는데 관이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평강공주가 온달의 관이 있는 곳으로 와 "사생이 결정났으니 돌아가십시오."라며 관을 어루만지자 관이 움직여 장례를 마쳤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온달의 평강공주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평대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는 곧 당시 사회의 권위와 윤리적 틀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와 윤리적 틀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정을 억압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김생과 운영의 그러한 행각은 일종의 자각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궁궐에 갇혀 정을 억제하고 살아가야하는 궁녀들의 신세를 '비인륜'으로 정의한바, 정욕을 인륜이라 칭한 것임을 감안할 때, 김생과 운영의 비극적 결말은 경고라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자각을 원하였다 할 수 있을 듯 싶다.운영전에서는 자연스런 욕구의 발로를 당연스러운 일이고 인륜으로 여겼다. 김생과 운영의 애정이야말로 그 인륜을 다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평대군과의 갈등 구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생과 운영의 애정을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와 윤리야말로 실은 인륜적이지 못한 폐단임을 알리는데 운영전의 목적이 있느니만큼 안평대군이 갈등의 표상화된 모습임을 감안하여 안평대군은 비록 김생과 운영에게 비극적 결말은 안겨다주긴 하지만 불완전한 - 혹은 잘못되어진 - 절대적 권위가 되어버리고 만다.춘향전춘향전은 다분히 자의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애정 관계는 춘향과 이몽룡으로 이뤄지고, 대립되는 인물로 신관사또 변학도가 등장하게된다.우선 춘향전의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찾아보면, 춘향전의 주 대립구도는 역시 춘향과 변학도이다. 그 이전에 춘향과 하룻밤을 동침한바, 부친에게 꾸중을 받으며 잠시 그 부친이 대립 구도로 떠오르기는 하지만, 부친과의 대립구도는 변학도와의 대립구도에 비하면 그 무게가 덜하다.춘향의 신분은 사실상 천민에 가깝다. 기녀 취급을 받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변학도의 요구는 그릇된 것이 아닌 당연스런 요구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은 왜 정절을 지키려했으며, 그러한 춘향의 정절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었는가?춘향이 정절을 지키고자 했던 데에는 이몽룡에 대한 연모의 정이 그 첫 번째 이유가 된다.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이몽룡은 관의 기생을 건드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과목 : 한국어문시인 이상화와 유치환제 출 일 : 2000년 5월 25일담당교수 : 정구향 교수님성 명 : 강두원학 번 : 003502학 과 : 경영?경영정보이상화와 유치환은 비슷한 시기에 등단을 하였으며, 작품의 어조에 있어서도 굵고 강렬한 남성적 어조의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다만, 이상화는 주로 민족과 식민지 압제에 대한 저항을 저변에 깔고있었고, 유치환은 보다 사색적이교 자연과의 교감에 중심을 두었던 것 같다. 두 시인이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한 두 시인의 생애와 그 작품의 특징 및 경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1) 이상화 시인의 연보1901 대구 출생1918 경성 중앙학교 3년 수료. 출가하여 강원도 일대 방랑.1919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학생운동 배후 조종1921 「백조」 동인1925 박영희·김기진과 함께 카프 조직에 참여192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발표1934 조선일보 경북 총국 경영1936 대구 교남학교에서 4년여 동안 영어 및 작문 강사1943 사망(2) 이상화 작품의 특징이상화 작품의 특징은 '민족 정신', '저항'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김학동씨의 글에서는 '「백조」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상화의 경우, 그 초기시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영향을 받아 그 거친 호흡과 굵은 선, 짙은 채색, 그리고 병적 관능 같은 것이 그의 시적 특색이 되고 있는가 하면, (중략) 그러나 상화의 이런 저항정신도 시대적 제약으로 그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상화는 국토 대 자연에 대한 예찬으로 기울게 되는데 (후략)' 이라하여 이상화 시인의 시적 특색과 작품적 경향의 흐름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김병택씨는 자신의 저서 '한국 현대 시인론'에서 이러한 모든 변화는 현실인식과 정서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뤄졌으며 그러한 현실인식과 정서가 처음에는 낭만의식과 감상으로, 그 다음에는 저항의식과 현실대응으로 마지막에는 자연의식과 조국애로 나타난 것이라 말했다.(3) 이상화 시인의 작품적 경향이상화 시에 대한 논의는 낭만주의와 관련한 측면, 저항의식과 관련한 측면, 자연의식과 관련한 측면으로 이뤄질 수 있다. 192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유교적인 전통문화와 새로이 유입되는 서구문화의 상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게다가 1919년의 3·1 운동의 실패는 당시 많은 식자층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특히, 3·1 운동에 깊이 참여했던 이상화 시인이 그러한 좌절을 뼈아프게 겪었음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 시인들은 낭만주의에 젖어들게된다.이상화 시의 전체적인 경향을 얘기하자면 '민족'과 '저항'을 빼놓을 수 없다. 이상화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이상화 시인은 아름다운 봄 날을 기리며 우리의 국토를 대변하는 '빼앗긴 들'을 노래했다. 이상화 시의 '민족'과 '저항'을 전제로 한 작품들은 크게 세 개의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상화 시의 낭만주의적 측면은 그 첫 번째 단계인 민족적 비애의 노래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 「이중의 사망」(부제 : 가서 못오는 박태원의 애특한 영혼에게 바침) 을 보자면 '장식의 애곡을 듣는 호상객처럼'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인생의 쓴 향연에, 불림받은 나는, 젊은 환몽의 속에서 청상의 마음 위와 같이' 라는 구절에서 지적되어진 현실에 대한 환멸감이 죽음에 대한 생각까지 이어져 허무로 발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이 '허무'는 이상화 시「허무교도의 찬송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저항의식과 관련한 논의는 앞서 얘기했던 세 단계 구분에 있어 그 두 번째 단계인 저항적 주제의 시작(詩作)에 맞추어 얘기해볼 수 있다. 김병택씨의 이상화론에서는 이상화 시인의 그러한 변화의 기점을 1925년으로 잡고 있다. 실제 연보를 보아도 1925년에 이상화 시인은 카프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그가 저항적인 시를 쓰기 시작했음은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물론, 앞서 얘기한 「이중의 사망」등의 작품에서도 현실 고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1925년 이후 이상화 시인의 시에서 풍기는 저항의 냄새는 매우 짙어지고 있다. 1925년 1월에 쓰여진 「가장 비통한 기욕」은 그 부제가 '간도이민을 보고' 였는데 국권을 강탈당한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시 「통곡」에서는 자신이 처한 울분의 상황을 하늘을 우러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으로 묘사해내었으며 해와 달에 대한 역정을 통해 사회 상황에 대한 불만감과 강한 저항감을 표출하고 있다. '두 발을 못뻗는 이 땅'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땅이라는 것이 당시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국을 일컫고 있음을 유추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러한 현실에 시중의 화자는 울음을 터뜨린다.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역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소재, 내용에 있어서 농민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당시 현실에 대한 불만감의 토로를 그리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5년 이후의 작품이다. 이 시에서는 민족적인 저항 정신이 내포되어있다. 화자가 예찬한 '봄'은 다름아닌 국권 회복을 의미한다. 「통곡」에서 보여줬던 절망감을 극복하고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의 그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는 것이 바로 '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간 그가 가져왔던 낭만주의가 반영된 민족적 저항시이며 산문체 시형과 언어구사로 표현된 이상화 시의 모든 시적 특징이 집약된 작품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이상화의 후기시에는 자연의식과 연관하여 조국의 국토를 예찬하는 조국애로까지 발전되어진다. 이에 대해 김학동씨는 "이상화의 시세계"에서 "자신의 영달과 안일을 추구하는 무리들만이 들끓는 도회와 결별하고 그의 시의 소재를 향토의 자연으로 옮기게 된다."라고 말했다. 「금강송가」에서는 국토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강은 의인화되어 시적 화자와 매우 친밀하고 진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4) 유치환 연보1908 경남 충무 출생1927 동래고보 졸업1928 연희전문 1년 중퇴1939 첫시집 「청마시초」 간행1945 통영여자 중학교 교사 부임. 이후 교직 종사1946 청년문학가협회 회장1947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1957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에 피선1958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1962 예술원상 수상1967 사망(5) 유치환 작품의 특징과 경향유치환 작품의 특징은 명상과 진술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주안점이 두어진다. 다만 그의 대표작인 「깃발」에서는 '소리없는 아우성',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애달픈 마음' 등의 은유적 이미지와 '순정'과 '애수'라는 깃발의 정서적 의미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부각되어있다. 김종길씨의 글에 따르자면「깃발」은 그의 진술 위주의 시작에서 다소 예외적인 작품이지만 그런 예외적인 작품 속에서조차 구문의 조절 내지 변화 (명사로 끝나는 첫 두 문장 다음에 동사로 끝나는 통상적인 서술문이 오고 짧은 의문문 다음에 그 의문문의 주어가 길게 부연되는 구문의 변화)를 통해 힘찬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가 부각된 깃발이지만 그 진술의 힘은 여전히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치환의 작품은 남성적인 어조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역시 그의 시가 진술에 의존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남성적 어조를 가진 작품으로 「깃발」, 「일월」등의 작품이 있으며, 여성적인 어조의 작품으로는 「그리움」과 「춘신」등의 작품이 있다. 이 중에 「그리움」을 살펴본다면 '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중략) /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등의 구절이 있는데 이러한 구절들은 서정적이며 명상적이다. 「깃발」에서 역시 그러한 시적 이미지의 전개들은 깃발이 갖고있는 의미에 대해 유치환이 가졌던 명상에 기인하고 있다.
일본 무도와 한국 무예의 비교를 통한일본 문화의 이해과 목 명일본문화의 이해담 당 교 수 님교수님학 과경영학과학 번003502성 명강 두 원제 출 일2005. 5. 29서론1. 주제의 선정이유사무라이는 일본에 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표제어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전통은 한반도에서 오랜기간 행해진 문치(文治)와 대비되는 일본의 독특한 문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 와 같은 이종 격투기가 일본이라는 곳에서 창설되고 크게 인기를 끌게 된 배경에는 폭력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갈망도 그렇겠거니와, 일본인들의 무(武)에 관한 뿌리 깊은 관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일본은 사무라이의 전통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진 다양한 무술들이 존재하며, 오늘 날에도 유지 발전되며 때로는 기존의 전통에 덧대어 새로이 창안되기도 하는 역동적이고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주제자체가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므로 최대한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선으로 접근하면서 일본의 대표적 무술들의 기원과 원리, 철학 등을 살펴보는 한편, 국내의 무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짚어보고 그 가운데 전통성을 갖고 있는 무예를 선정 비교함으로써, 일본에서 무(武)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일본 문화의 특성은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다.2. 가정일본의 일부 대표적인 무술들이 근대 혹은 현대에 이르러 스포츠화되며, 기존의 무武에 관한 패러다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래되고 있는 무술들이 그 전승 과정에 있어 엄격한 서열과 도장이라는 독특한 문화체계를 통해 이뤄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도장 문화가 일본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분석함으로써 - 일본인들의 형식을 중시하며 상대적으로 경직되고 복잡하며 견고한 사회적 구조와 그러한 구조에 충실하려하는 심리를 가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 덧대어 한국의 전통 무예를 자처하는 일부 무술의 뿌리를 살 다케다 소오가쿠는 이러한 무사 수행 과정에서 큰 명성을 쌓았고 그러한 명성을 토대로 대동류 합기유술을 정리하고 전수시켜 중흥시켰다.유도 역시 고류 유술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발생 시기는 1882년의 근대이다. 강도관의 저명한 유술가 가노 지고로는 기존 유술들을 집대성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에 치명적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술들을 제외시키고 효과적인 기술들을 모아 경기화시켰다.아이키도의 경우에는 1920년도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라는 인물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기도류 유술, 신 카게류 검술 등을 익혔고, 후에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였다. 그는 후일 한 종교인과의 만남을 통해 대동류 합기유술을 잇지 않고 새로운 원리와 철학을 정립하여 아이키도라는 새로운 무도를 창조했다.③ 원리기본적으로 위의 세 무도는 일본 전통의 유술 혹은 유술에 근원을 둔 정통 무도이기 때문에 다함께 포괄하고 있는 원리가 있다. 그 것은 기본적으로 류(流)와 유(柔)라고 할 수 있는데, 류는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것을 의미하고, 유는 적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같은 유술이라 해도 원리와 철학에 차이는 존재한다. 고류 유술은 기본적으로 오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대동류 합기유술은 유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타격기가 제한적으로 존재하며 상대의 힘과 주의를 분산시키고 유술의 효과적 사용을 돕는 성격상 발차기가 허리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상대의 관절을 꺾어 부러뜨려 제압하는 기술들을 포함하고 있다.반면, 아이키도와 유도는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데 목적을 둔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각기 다르다. 아이키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종교인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과 원리를 구상하고 만들어진 연유로 ‘상대를 구하고 자신도 구한다’라는 기본 이념이 기술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상대에게 큰 위해를 가하지 않고 제압하는데 목적을 두고 유파들이 죽도의 수련체계를 도입하였다. 이에따라 상대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가격을 할 수 있는 기술들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현대의 스포츠화된 검도의 밑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좌막파와의 전쟁 과정에서 검술의 필요성을 느낀 메이지 정부 경시청을 중심으로 유명한 검술가들을 초빙하였고, 북진 일도류, 소야파 일도류, 입신류 등의 다양한 검술이 정리되어 오늘날의 일본 검도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 검도와 기존의 고류 검술에는 기본적인 원리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③ 원리검이라는 무기의 기본적인 특질상 검도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상대를 살상하는데 있다.그러나 현대 검도는 상당부분 스포츠화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련 과정은 신속한 보행과 빠르고 정확한 타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의 목숨을 취할 필요가 없이 승리만 거두면 되는 까닭이다. 이를 위해 공격과 회피를 위한 전후좌우의 빠른 스텝을 위해 무게의 중심을 높여 이동하는 11자 보법과 스리아시라 불리우는 이어걷기가 중요시 되었고 빠르게 휘두르고 회수하기 위해 수건을 쥐듯 검을 쥐는 쓰메루의 방법이 중요시 되었고, 실제 수련에 있어서도 반복적인 11자 보법 및 스리아시와 함께 쓰메루의 방법으로 쥔 검을 역시 반복적으로 내리 긋는 방식을 취한다.그러나 이런 스포츠화 된 죽도 검도와는 달리, 진검을 수련하는 체계는 현대 검도에 있어서도 죽도 검도와 차이를 보인다. 죽도 검도가 스냅의 힘을 이용해 목표 지점에 빠르고 정확한 타격을 가하고 재빨리 회수하여 다음 공격을 준비할 수 있는 원리의 동작들로 구성되어있어 치기와 찌르기가 주를 이루지만, 진검과 목검 등을 이용하는 수련 체계에서는 고류 검술과 동일하게 상대의 목숨을 취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들을 사용하기 위해 치기, 찌르기 외에도 베기, 칼자루 치기 등의 기술들을 포함하게 된다.공수도① 기원공수도는 우리가 흔히 가라데로 알고 있는 무술을 지칭한다. 가라데는 일본의 오랜 무예이긴 하나 실제 발생지는 인도이다.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여 체계로 정리하여 극진공수도라는 새로운 유파를 창시하였다. 실제 오오야마 마쓰다쓰의 극진공수도를 통해 가라데가 세계에 보급될 수 있었고, 일본 무도에서의 공수도의 입지 또한 향상되었다.③ 원리공수도는 타격 중심의 무도로 타격이 상당부분 제약받는 유술이나 무기를 사용하는 검도와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이로 인해 태권도, 무에타이 등 여타 타격 무술과 유사한 동작 원리를 갖는데, 대개 주먹, 팔꿈치, 발, 무릎, 이마 등을 이용하여 상대의 몸과 부딪혀 상해를 입히는 동작들로 구성된다.공수도의 철학적 원리는 근대에 오키나와데를 정리하여 공수도로 정립한 기친 후나코시에 의해 형성되었다. 공수도라는 이름은 불교 경전의 ‘공즉시색 색즉시공 (空卽是色 色卽是空)’과 일본의 부시도(武士道), 유교 철학이 결합되어 탄생한 이름이다. 공수도는 기본적으로 맨손으로 펼치는 무술이라는 점에서 ‘평화의 원리’를 내재하고 있지만, 무기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폭력의 원리’ 역시 내재하고 있으며, 그 발생 배경을 통해서는 무기 휴대를 금지당하는 상황에서 무술을 수련한다는 상무 정신과 진취성의 원리 역시 포함하고 있다.유술검도공수도발생 시기대동류 : 헤이안 이전유도 : 1882년아이키도: 1920년전국 시대(죽도 검도:에도 시대)당수도 : 헤이안 시대공수도 : 1900년대원리상대의 관절 꺾거나 중심을 무너뜨려 제압상대를 검이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살상손과 발을 이용한 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림공통점전쟁을 통해 발생하여 정리되어 체계화되었고,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목적을 함께한다. 오늘 날에는 일부가 철학적 배경에 의해 혹은 스포츠화에 의해 상대에 대한 상해가 최소화되기도 함.일본의 도장 문화과거 잠시 검도를 배우던 시절, 도장에서는 스승, 도장, 상호간에 대한 예절을 지켜야 했다. 우선 자신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춰야했고, 자신이 심신을 수련하는 장소인 도장에 대한 예를 갖춰야했고, 함께 수련하는 이에 대해 예절을 갖춰야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도장에서의 엄격한 예절 문화는 일본 않았다.한국의 전통 무예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무예들로 우리는 태권도, 합기도, 택견, 검도 등을 상정하고 그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했던대로 조사 과정에서 실제 전통성이 입증된 무예는 택견 뿐이었고, 나머지 무술들은 정통성은 입증될 수 있었지만, 전통성은 입증될 수 없었다.태권도의 경우 광복 초기의 공수도 도장들이 통합되어 형성된 것이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많은 기술의 정리와 규칙의 발전에 의해 공수도와는 전혀 다른 시합 형태를 갖추게 되었지만, 품세 등에 있어서는 공수도의 영향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기본 원리와 특질에 있어 일본 무예와의 뚜렷한 비교를 도출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또, 합기도의 경우에는 고 최용술 옹에 의해 뿌리를 내린 무술로, 그 뿌리가 일본의 대동류 합기유술에 닿아있었다. 다케다 소오가쿠에게서 전수를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무술 연구가들의 연구를 통해 대동류 합기유술과 최용술 옹의 합기도가 비교된 바 있는데, 기술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또한, 합기도는 회축 등과 같은 다양한 타격 기술이 추가됨에 따라 일본의 대동류 합기유술과는 다소 차이를 갖게 되었다. 일본 대동류 합기유술의 원류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몇가지 증언도 있지만 현대의 증언이므로 객관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못했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검도로는 대한 검도와 해동 검도가 있는데, 대한 검도는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 유입된 일본 검도를 모태로 하고 있고, 실제 조선총독부의 경시청을 통해 보급되었다. 해동 검도는 한국 고유의 무술이긴 하나, 역사가 길지 못한데 해동 검도의 나한일 총재와 김정호 총재의 두 단체가 모두 김창식 총재가 창시한 심검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법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또 십팔기라는 정조 시대에 출간된 를 해석하여 완성시키고 전수활동을 펼치고 있는 무예가 있는데, 라는 문헌을 통해 신빙성을 갖추고 있는 무술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법 하나다.
과목 : 동양사상‘혜능과 셰익스피어’제 출 일 : 2000년담당교수 : 교수님성 명 : 강두원학 번 : 003502학 과 : 경영?경영정보禪. 이 글자 하나에는 불교의 무궁무진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추구한다. 모든 속세의 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해탈이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를 ‘신조차 초월하는 것’이라 얘기했다. 그가 게하르트 브라이덴슈타인과 나눴던 진지한 얘기들을 살펴보면 그 禪이라는 것과 불교의 중국적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부처상이 기독교의 십자가처럼 절대적인 성물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 중심적인 사고 - 즉, 인문주의 - 가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양나라 무제와 달마조사의 그 상징적인 대화에서도 불교의 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는 ‘비어있는 성스럼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여러 公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한 채 헤매이기가 쉽다. 불교의 禪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니와, 그들의 대화가 다분히 암시적이고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남전과 조주가 등장하는 공안을 보자면, “선생님, 도가 무엇입니까?” “平常心이지.” “平常心에는 어떻게 이르지요?” “이를려는 생각에 이르면 곧 삐뚜로 가나니라.” “근본적으로 생각이 없어지면 도는 어떻게 알지요?” “도라는 건, 아는 것도 아니요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는 것은 妄覺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마비상태요 혼란이다. 의심할 바 없는 大道를 증득한다는 것은 우주의 텅 빈 확연한 공간과 같다. 이렇쿵 저렇쿵 관념으로 그를 속박할려 들지말라!” 라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에서 설명되는 道는 노장사상에서 얘기되어지는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실체가 잡혀지지 않는 - 말로는 얘기되어질 수 없는 체험적 소산인 것이다. 원래 道라는 것의 그 근본적 의미가 반드시 도가사상에만 국한 되어지는 것이 아닌, 다른 여러 사상에서도 일컫어지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불가의 도와 도가의 도는 상통하는바가 크다. 마조와 회양의 공안에 있어서도 ‘진리란 본시 고착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무엇에 머물러있질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라 하였는데, 노자의 을 살피자면 ‘도는 텅 비었으나 그 씀에 있어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으니 깊고 그윽하여 만물의 근원 같도다’ 라는 구절이 있다. 달마의 ‘텅비었는데 뭐가 성스러워?’ 라는 구절까지 상기해보자면 그 상통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유가의 경우에는 에서 ‘天이 명령한 것을 性이라 하고, 그 性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하고 그 道를 닦는 것을 敎라고 한다.’라 하였으니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므로 불교와 도가의 그것과는 조금 의미하는바가 다르다. 어찌되었든 남전과 조주의 이 공안은 그래도 이해가 쉬운 편이다. 도에 대해 무언가 풀어서 서술되어졌기 때문이다. 한 공안의 대화를 추려보자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결국 어디로 가야하지요?” “저 아랫 동네에 내려가 밭가는 소가 되거라.” “가르쳐 주신 것 정말 감사하옵니다.” “긴 밤 깊은 삼경 창가에 달이 드리웠지.” 처음 그 공안을 읽었을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저 아랫 동네에 내려가 밭가는 소가 되거라.’라는 답에 깨달음을 얻었다하는데 그 답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가르침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공안들이 대개 그러하듯 선승들의 대화는 단순해보이지만 매우 많은 사실과 실마리들이 내포되어있고, 그런 사실과 실마리들을 찾아내기가 쉽지않다.도올 선생은 그러한 해석 어려운 공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셰익스피어 고전조차도 공안으로 삼고 이야기를 꺼낸다. 존재에 대한 선택으로도 해결되어질 수 없는 그 문제를 그는 초월이라하였고, 해탈이라 하였다. 셰익스피어가 정말로 그러한 논제를 가지고 작품의 대사들을 적어나갔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도올 선생의 논리나 근거는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해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니,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것 조차 초월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 이는 곧 책 전반에 걸쳐 긍정과 부정등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초월은 암두와 설봉, 흠산이 등장하는 공안에서 나타난다. 흠산이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난다.’라 하였고, 설봉은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라 하였다. 도올 선생이 해석을 붙여두었지만 흠산은 긍정했고 설봉은 부정했다. 그러자 암두는 대야를 발로 콱 차 엎어버린다. 일순 의미없는 장난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흠산의 긍정과 설봉의 부정을 정의한 다음에는 그 의미없는 장난은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깨달음을 의미하게되는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그 진리로 도달하기위한 禪이란 무엇인가? 회양과 마조의 대화는 선에 대한 인식을 조금 넓혀준다. 일반적으로 장자가 얘기했던 ‘좌망’과 ‘심재’를 떠올리기 쉬운 (실제 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선이라는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마조의 이러한 것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회양이다. 그는 마조가 ‘부처가 되려고’ 좌선을 한다하자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노라 말한다. 禪과 佛은 모두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가 그러하다. 회양은 마조가 형식에 집착하여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을 꾸짖은 것이다. 선은 교조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분히 실제적인 것으로 앞서 얘기했듯 禪은 인도 불교가 중국화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최고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도올 선생께서는 ‘禪은 宗이 아니다. 禪은 삶이다. 禪은 경전이 아니다. 禪은 삶의 이야기인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앞서 배웠던 중국의 인문주의적 경향으로도 그 맥락을 짚어볼 수 있을 듯 싶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인문주의의 초석을 마련하고 있었다. 표현을 빌리자면 여타 국가의 종교처럼 의타적이지 않고 의자적인 것이 바로 중국의 인문주의이다. 불교의 경우에는 좀더 종교적 색채가 짙다고는 하지만, 유?불?도가 모두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알라나 하느님처럼 절대적 존재로의 귀의가 전제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단하천연은 추위 앞에서 불상을 장작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임제는 부처와 달마조사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聖이 아니라 人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도올 선생은 우선 인도 불교의 중국화 과정에 있어서 인도와 중국의 언어적 차이를 얘기한다. 언어라는 것에는 그 문화와 풍습, 사상이 함축되어있기 마련이다. 중국인의 그 인문주의적, 실용주의적 사고는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굴절어, 비굴절어, 논리 문법, 비형식, 산문적, 운문적이라는 비교를 떠나 인도 불교의 중국화에 있어 이미 중국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사고는 유입되어진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같은 느낌으로 한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30년대 조상에 대한 경의에서라면 절을 인정할 수 있다고 얘기한 한국의 천주교가 그러했듯 중국의 불교는 중국인의 것으로 재구성되어진 것이다. 禪. 그것은 바로 인문주의와 실용주의의 결정체라는 것인데,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인간적 사고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언어의 해탈, 불심의 직지. 모든 근원적 사유의 저변에 내재. 선뜻 중국 불교의 禪을 그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인도의 고행과 유사하게 보인다. 그렇게보자면 도올 선생이 선을 단순히 중국적인 문화의 소산만으로 보는 것에는 수긍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도올 선생이 깔아놓은 멍석대로라면 마조의 실수와도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국 불교의 禪이라는 것은 그 선의 본질에서 얘기하듯 형식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고착된 것이 아니니 그것으로 다가가는 방법 또한 형식적일 수 없다는 얘기일까?
과목 : 대학철학동?서양의 존재론에 관하여제 출 일 : 2000년 5월 25일담당교수 : 교수님성 명 : 강두원학 번 : 003502학 과 : 경영?경영정보존재에 관한 문제는 가장 처음 철학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였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그 논의는 이어져오고 있다. 그 것은 세상과 개인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 문제의 열쇠이기도 하며,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지적 욕구가 원해오던 답이다. 여기에서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존재(유와 무)에 관한 관점들을 서양과 동양의 시각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1. 서양의 존재론고대의 서양 철학에서 논의된 존재의 문제는 고대 희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존재에 대한 관점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맞춰져있었던 듯,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모두 세계의 근원적 물질을 밝히고 그것으로 실체와 존재를 설명코자 하였다. 탈레스는 세상의 근원적 물질인 아르케(arche)를 물이라 하였는데, 그 것은 물이 생명에게 갖는 중요성과 그 부정형의 특징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경우 불의 존재를 말하며 물이 세상의 근원적 물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는 세계의 근원적 물질을 추상적인 개념인 무한자를 통해 설명하려하였다. 아낙시메네스는 이 둘의 의견을 절충하여 공기를 근본 물질로 설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고대 철학의 소위 이오니아 학파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존재와 실체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 물질을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여 설명하려 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자연물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보는 물활론을 제시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실체에 대해 근원적 물질을 말하지 않고, 내재해있는 규칙을 얘기하였다. 수와 음악의 일정한 관계성에서 그는 이 세계에는 규칙과 질서가 주어져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한정되어있지 않은 것에 한정을 주어 한정된 것으로 만든다는 원리를 통해 불규칙한 우주 세계에서 규칙을 찾아내려한 듯 싶다.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우주의 근원적 물질을 찾고 표명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앞서 이오니아 학파의 그 것과는 거리가 있다. 우선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본인은 생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이 유와 무가 일치함으로써 가능해지며 그러한 일치를 ‘반대의 일치’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속에서 자연의 근원 물질로 불을 지적한 것은 이오니아 학파처럼 그 자체로 세계의 구성 물질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그 불의 상징성을 통해 존재와 실체를 설명하고자 하였던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불태우며 지속되는 불은, 끊임없는 투쟁과 부단한 변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파르메니테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얘기한 변화무상과는 달리 자연을 단일하고 불변하며 부동한 것으로 말하였고, 유(有)에서 실재의 본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비존재(無)를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으로 정의 내렸다.다소 관점을 달리하여, 세상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하나가 아닌 여럿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한 엠페도클레스는 네 개의 원소 물, 바람, 흙, 불로 세상을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네 개의 원소가 다양하게 화합하여 수많은 현상을 자아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러한 화합의 힘을 사랑과 미움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양적으로만 다른 원자를 세상의 구성 물질로 정의하였다.소피스트의 시대로 넘어오면, 실체에 대한 관점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 하여 모든 현상에 대해 개인의 주관적인 척도가 주어짐을 얘기하였다. 반면 플라톤은 프로트고라스와는 달리 상대적 개념이 아닌 추상적 개념에서의 이데아를 실체로 보았고, 그 이데아에 따라 이원론적 입장에서 설명하였다. - 이후, 플로더노스는 이러한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정리하고, 존재를 초월한 ‘한 사람’으로 설명하여 인간 중심의 관점을 신 중심의 관점으로 옮겨왔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입장에 반대하고, 세계는 이데아와 같이 충실한 개념에 의해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본성은 그 사물에 내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초현실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존재의 제 1원인을 탐구하였다. 또한, 질료와 형상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주자의 존재론과 함께 설명하겠다. 이후, 스토아 학파에서는 자연과 보편적 이성을 신과 동일시하였고, 그와 대립 되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을 통해 창조설을 부인하고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원자와 공간으로 정의했다.앞서 얘기한 바이지만, 인간 중심의 관점은 서서히 신으로 옮겨오기 시작한다. 필론은 희랍의 철학과 유대교의 관점들을 합쳐 완전한 존재인 초월자를 얘기하고, 사람은 신의 실체는 알지 못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였다. 특히, 플로티노스의 경우 그의 관점은 스토아 철학의 금욕주의와 맞물려 중세의 교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주의 유일신이 운동의 원인이며 진리라고 얘기하였고, 그러한 인식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즉, 우주의 실체와 존재의 원인을 절대적 초월자인 신에게로 전가한 것이다.근세에 들어서며, 대체적인 관점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부정과 함께 현세 중심적으로 돌아온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며 존재한다.’라는 명제 아래 정신의 존재를 설명하였고, 그러한 정신의 존재를 통해 필연적으로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로서의 신을 설명하였다. 정신과 물체와 같은 유한 실체에 대비되어 이 절대자는 무한의 실체로 정의되어진다. 스피노자는 존재 그 자체로 존재이며, 실체는 곧 자기 원인이라 하였다. 이는 곧 한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개념을 필요치 않음을 뜻하는데, 한 존재는 곧 신의 범주에 들어가며, 크리스트의 교리와는 달리 신을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 이 것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으로 설명된다. 절대자의 개념에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존재와 실체의 원인을 절대자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경험론에서는 달랐다. 로크는 인간과 신을 분리시켰다. 그가 인간 현상에 관심을 두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로크의 경우에는 인간의 관념으로 실체를 파악코자 하였다. 버클리는 실재하는 것만을 지각할 수 있으며, 관념을 인정하였지만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가 존재를 인정한 것은 영혼과 마음과 정신이었다.하이데거는 존재의 이해를 갖고 있는 인간의 존재를 현존재라 하였고, 이러한 현존재는 어떠한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는 한 현존재가 우연히 다른 현존재들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구조에서 다른 존재들과 엮어져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의미를 달리하여 선험적 결의와 유한성의 자각으로서 실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로 파악하였다. 야스퍼스는 실존은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직 한계 상황에서만 그러한 실존을 자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존재에 대한 답을 초월자로부터 찾고자 하였다.이상이 서양에서 다루어진 몇몇 존재론에 대해 조사를 하여 나름의 개념으로 정리를 해본 것이다. 본인이 이해하기에 서양의 존재론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신에서 다시 인간으로 그 중심을 옮겨오고 있다. 그들은 무와 유를 대립체로 혹은 조화적인 두 개념으로 생각하였으며, 존재와 실체에 대해 세상의 근원 물질로부터 밝혀내려하거나, 인간의 존재를 통해 규명하려하거나, 혹은 절대적인 초월자의 존재로부터 그 원인을 찾고자 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보다 자세한 문제들을 뒤로 미뤄두고, 동양의 존재론을 살피도록 한다.2. 동양의 존재론노자는 도를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를 않으며, 만지려 해도 만져지지를 아니한다.’라 하였다. 즉, 도는 형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무의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도는 비록 형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사물이 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실체를 이루는 도는 결과적으로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무이자 유인 것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반대의 일치’와 비교할 때, 유와 무의 일치에서 일어나는 생성의 과정 (도로부터 비롯되는 사물)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노자는 제와 상제라는 통치자를 이야기하였는데, 그러한 통치자는 신과 유사한 초월자로 생각할 수 있을 성 싶다. 또한 무와 유의 일치로 생각되는 도라는 것은 피타고라스가 얘기한 일종의 규칙과도 유사하다. 또한 그 도의 상위에 있다할 수 있는 자연은 호칭할 수 없는 말이며 궁극적 개념으로 설명하였는데, 자연에 대한 개념은 범신론을 넘어서서 만유재신론의 범위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