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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또르 뻴레빈의 오몬라(Омон Ра)를 읽고...
    모든 경계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오몬 라’는 냉전시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오몬(Омон)’, 즉 소련시대 경찰특수부대(Отряд милиции особого назначения)의 약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계속 해서 읽다 보니 그렇게 만은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흐름은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여 하나의 동그란 원으로 뭉쳐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 현실과 신화,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공간을 지배하는 모든 추상적인 것들의 경계가 그것을 관통하는 동그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무너지는 듯 하다. 소설 속에서도 나오듯이, 마치 모래시계의 운동과 같이 모든 것의 흐름이 데칼코마니의 구조(?)로 진행되는 것이다.이에 대한 힌트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 등장한다. 오몬의 아버지의 영혼에 기묘할 정도로 심오한 영향을 미친 ‘미껠란젤로의 ’의 복제화. 의 그림 안에는 밑에 있는 인간과 위에 있는 신이 손가락 하나를 걸고(?) 서로를 바라보며 누워있다. 땅과 하늘, 삶과 죽음, 현실과 신화, 진실과 거짓의 묘한 대칭과 같이 말이다. 또한, 유년시절 오몬의 모든 기억이 이래저래 관련되어 있는 여러 가지 ‘하늘에 관한 꿈’, 즉 우주여행에 관한 모티브들은 나중에 실제 비행에서 반복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작은 놀이터에서 본 목제비행기, 준 경주용 자전거인 (→루노호뜨), 몸체에 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형 우주선, 그리고 그 문이 없는 우주선 안에 앉아 있는 붉은 점토인형, 긴 복도와 창백하게 흐려져 각이 없이 합쳐져 보이는 띠의 이미지, 눈물과 땀에 젖어 김이 잔뜩 서린 유리 너머로 보이는 달의 이미지, 토사물과 빈 병들과 담배 연기의 악취가 나는 작고 허접한 벽장 같은 곳(열네 살 겨울에 미쪽이 데려갔던 어느 주차장 → 깨어난 오몬이 도망쳐 기어들어간 스튜디오 안, 우주선 아래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쓰레기들...)의 이미지까지, 모든 것이 나중의 우주비행장면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과 대칭의 구조는, 마치 모래시계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뒤집히면, 다시 그 이전의 운동을 다른 방향에서 똑같이 반복하듯이,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느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완전히 알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이러한 대칭적 데칼코마니의 구조는 심지어, 인물이나 이야기모티프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우주항공학교에 있는 서로를 꼭 닮은 정치장교인 우르차긴과 부르차긴 대령에게는 전기모터가 달린 휠체어가 한 대밖에 없었기에, 그들 중 한 사람이 교육 업무에 바쁘면, 나머지 한 사람은 작은 방에 있는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을 수 밖에 없다. 한 쌍의 한 부분만이 번갈아 살아 움직이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반과 마라뜨 뽀빠지야부자의 이야기도 기묘하다. 실체인 ‘인간’이 거짓으로 ‘곰’의 복장을 하고 연극을 하듯이 뛰어다녔는데, 때문에 ‘곰’을 죽였다던 키신저가 살해한 것은 실은 ‘인간’이었다는 점과, 조약이 성사되고 받은 금색 쏘베뜨 영웅 금성 훈장이 달빛을 받아 반짝일 때, 마라뜨는 어두운 탁자 안에서 웅크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는 점은, 마치 ‘가려져 살해당하는 진실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거짓’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거짓으로 진실을 지탱한다는 역설”과 같이 말이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 자체도 재미있다. ‘오몬 라’, 즉 소련의 ‘오몬’과 상상 속 이집트 신화 속의 매의 머리를 한 신, ‘라’의 합성어인데, 이것은 마치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져 합쳐져 있는 듯한,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의 경계라는 것 따윈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한 이름인 것이다.
    인문/어학| 2013.12.16| 2페이지| 1,000원| 조회(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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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결혼, 여성
    1. 서론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관계로,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다른 이들과 더블어사는 과정 속에서 겪는 모든 인생의 제반사가 바로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랑’이란 넓은 의미에서, 가장 따뜻하며 바람직한 인간관계로서, 그러한 관계를 맺고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 등을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들 ‘사랑’하면, 유독 ‘남녀간의 사랑’을 떠올리곤 한다. 아마도, ‘남녀간의 사랑’은 다른 사랑의 양태들과는 달리, 서로에 대한 소유욕과 육체적인 결합 욕구를 동반한 것으로서 ‘생식’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만큼 인류의 삶의 전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남녀간의 사랑’은, 보살핌이나 돌봄 등과 같은 어떤 보편적인 인류애적 마음씨를 넘어, ‘낭만성’이라는 독특한 성질을 동반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바로 이 ‘남녀간의 사랑’은 지금까지 그 어떤 다른 사랑의 유형보다도 훨씬 더 많이, 수 많은 예술과 문학작품의 단골소재로 등장해왔다.특히, 중세시대에는 상대방을 찬양함으로써, 사랑의 낭만성과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다만 이때의 중세궁정식 사랑이란, 육체적인 쾌락이 엄격히 배제되어 있는 종교화된 사랑이자, 집단의 규범과 풍속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의 언술행위로서의 낭만적 사랑’이었다. 때문에 사랑의 순수함과 육체적인 쾌락이 양분화되면서, ‘연인들의 사랑’과 ‘결혼한 사람들의 애정’ 또한 서로 다른 것들로 구분되어졌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와서 ‘개인’이라는 개념과 함께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는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가정’이라는 것이 더욱 중요시되게 되었다. 근대산업화와 더불어 일터와 가정이라는 공간이 분리되면서,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과 가정에서의 가사노동과 정서적인 안정을 담당하는 여성의 성별분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개인 남성과 개인 여성이 결합한 이성간의 성애적(性愛的)사랑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사랑과 성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이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게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 불리한 위치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세기 러시아문학 중에서도 특별히, 체홉과 톨스토이의 몇몇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성성 혹은 여성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과 결혼’이 여성의 삶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2. 본론① 여성성이라는 것과 여성다운 것.체홉은 ‘귀여운 여인’에서 올가 세묘노브나(올렌카)의 모습을 통해, ‘여성다운 형상과 매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주 의미심장한 답을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올렌카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착하고 인자스러운 여자로, 부드러운 눈길과 통통하고 불그레한 뺨, 보드랍고 흰 살결에 까만 점이 찍힌 목덜미며, 티없이 상냥한 웃음을 지닌 매력적이고 귀여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언제나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 때가 없고, 또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성질의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녀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이 열렬하다 못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망각할 정도로 다소 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성의 생활이나 직업에 따라, 자신의 모든 생각과 생활방식을 변경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곤 한다. 함께 있던 사람이 죽거나 사라지면 어제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의 대상도, 또 자신의 관심사나 의견까지도 모두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그녀에게서 여성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 복스러운 얼굴이 여위고 귀여운 육체적 매력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곁에 있던 남성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이미 그 어떤 일에도 자기의 의견을 가질 수 없는 공허한 상태로서 형상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진 ‘여성성’이라는 것은스체판 클로치코프와 함께 살고 있는데, 클로치코프는 그녀를 마치 해부용 시체처럼 눕혀놓고, 자신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자신의 방을 청소해주는 노예와 같이 대한다. 이웃에 사는 화가인 페치소프 역시, 그녀와 같은 하층계급의 여성은 언제든지 마네킹처럼 공짜로 빌려 쓸 수 있는 물건처럼 대하곤 한다. 반면, 이들과는 달리, 아뉴타는 비록 별 볼일 없고 소외된 밑바닥 인생을 사는 여인이지만, 이들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는 여인이다. 예를 들어, 클로치코프가 타진공부에 정신이 팔려 아뉴타의 몸이 추위로 새파랗게 되어가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아뉴타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학생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타진공부를 중단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도 언젠가는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린 다른 다섯 명의 남자들과 같이, 공부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그의 빛나는 미래 뒤에 숨은 그늘의 역할을 자처하는 희생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의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들창 가의 의자에 앉아서 수를 놓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아뉴타’와 ‘온 방을 헤집고 다니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해부학을 암송하고 있는 클로치코프의 동적이고 지배적인 모습’이라는 상징적인 형상으로도 나타난다.이와 같이 체홉이 다소 희극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방법으로 ‘규정된 여성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톨스토이는 훨씬 직설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화자인 뽀즈드늬이셰프의 입을 빌어, 현 시대의 여성관과 여성교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관련된 내용을 대략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사람들은 새로운 여성 교육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하죠. 다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여성교육은 기존의 위선을 배제하고 참된 여성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중략...) 옛날에는 기사들이 여자를 숭배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때문에 결혼이란 성스러운 것이 아닌 ‘권태로운 사기극’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혼이란 ‘성스러운 결합’이라기보다는 부유한 바람둥이에게 순진한 처녀를 팔아 넘기면서 시작되는 일종의 ‘계약’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때문에 아내를 합법적인 쾌락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남편들과 가사일을 비롯, 임신과 출산, 양육에만 종사하기를 강요 받는 아내들 사이에 끊임없는 언쟁이 벌어지는 불행의 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뽀즈드늬이셰프의 사랑과 결혼관은 작가인 톨스토이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톨스토이도 처음부터 이렇게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이 작품에서 결혼 전 뽀즈드늬이셰프가, 모든 위험하고 부정적인 것이 씻겨지고, 순결함을 되찾는 순간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듯이,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도 모든 불안정한 상태가 안정적인 행복으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안나까레니나’이전의 작품에서는 결혼한 주인공이 어떤 유혹이나 성욕 때문에 파멸하는 경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정의 행복’에서의 마샤의 방황은, 사회의 그릇된 관습과 잘못된 낭만 추구에 따른 순간적인 흔들림일 뿐이다. 또한, ‘전쟁과 평화’에서도 나타샤가 바람둥이 방탕아 아나톨리의 유혹에 표명하는 관심은 순간적인 충동에 따른 성장 통에 불과하다. 오히려, 얼핏 보기엔 도덕적인 견고함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만큼, 나타샤가 안드레이 공작에서 아나톨리로, 다시 피에르로 몇 차례나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옮겨 다니는 것은, 결국에는 여성으로서의 위대한 의무, 즉,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빨리 다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의지에 따른 초조함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때문에 피에르와 결혼한 뒤의 나타샤의 모습은, ‘이전의 시적이고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사라진 튼튼하고 다산(多産)한 암컷’으로 묘사되고 있다.그러던 톨스토이가, ‘안나까레니나’이후, ‘안나’라는 여성을 중심비난이 집중되는 장면이 더욱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뻬쩨르부르크로 돌아온 안나가 오페라에 참석한 자리에서 카르타소프 부인으로부터 모욕당하는 장면은 더 이상 사회에서 그녀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이것은 ‘그녀에게 보이는 브론스키의 달라진 태도’와 함께, 그녀의 실질적인 죽음에 선행하는 정신적 종말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S시의 오페라극장으로 찾아온 구로프에게 당장 떠나라면서, 차라리 자신이 그가 사는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하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태도도 역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행동인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구로프에게 점점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만큼, 모스크바로 찾아와 그와 제대로 된 재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울기 시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그렇다면, 왜 이렇게 문학 속에서도 ‘불륜’이라는 테마가 남성보다 여성의 입장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드러내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첫째, 결혼이란, 단순히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남성보다도 여성에게 있어서, ‘경제적인 부양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있어 결혼이란, 이념적으로는 1:1의 관계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기반한 덫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성과 강하게 연결된 결혼생활 속에서, 여성은 남성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에 대한 기대를 받는다. 여성은 오로지 부부의 사랑과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유지할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권력관계에 기반한 계약’과 ‘사회적인 요구’를 벗어난 ‘한 여자’로서의 여성의 일탈은, 그것이 아무리 용기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남성의 일탈보다도 훨씬 더 힘들고 슬프며, 비극적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3. 결론인간의 성은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부모를 비롯한 주변과 상호작용을 하고 동화되는 등있다.
    인문/어학| 2013.12.16| 6페이지| 2,000원| 조회(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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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구덩이'를 읽고
    목소리를 구현하는 자, 누구인가?지금까지 있었던 수업에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의 유효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근거이자 전제조건이 바로 ‘언어’임을 반복하여 확인하여 왔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인간이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목소리를 통해 확신을 가지고 뱉어진 개념이 구현된 ‘살아있는 text’라는 것이 바로 ‘소설’이며, 때문에 소설은 필연적으로 대화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 까지도 말이다...따라서 등장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개념이 바로 이 ‘소설의 대화성’이라는 측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의 텍스트로서 완성된 소설에 담겨있는 ‘대화를 하고 있는 목소리’가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할 것인데, 여기에서 ‘과연 소크라테스가 작가인 플라톤이 창조해낸 등장인물일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나름대로 그 문제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고려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첫째, 만약 와 에서 ‘덕과 지혜’라는 것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목소리가 플라톤의 확신과 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목소리라면, 이들 텍스트는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그리고 메논 외 여러 다른 인물들 간의 대화’라고 보기보다는 ‘작가인 플라톤 안에 들어온 여러 타자 간의 대화’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소설의 탄생’이라는 것의 기원을 ‘작가’에서 찾을 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목소리는 철저하게 작가의 의식의 범위 밖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그것은 작가의 의식인 동시에 ‘작가 안에 들어온 타자’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한 인간 안의 의식이 단일하게 한 가지로만 통일된 것이 아닌, 수 많은 차원의 여러 가지 목소리가 함께 공존하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화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차원들의 목소리들이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 항상 서로 완전히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 그 사람의 의식을 대변한다고 할 수도 있는 가장 우월한 힘을 가진 ‘대표적인 목소리’가 있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 대표적인 목소리로서 플라톤의 의식을 넘어선 어떤 확신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문에 어찌되었건,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소설 속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플라톤은 ‘작가’로서 어느정도의 전지전능한 권리와 힘을 갖는 것이다.둘째, 만약 와 에서 말하는 ‘덕과 지혜’에 관한 논쟁에 ‘독자’를 참여시킨다면, 이들 텍스트는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그리고 메논 외 여러 다른 인물들과 독자들 간의 대화’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작가’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작가’라는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의식적 세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그들을 통해서 독자에게 어떤 화두를 던져준 것이라고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작가’라는 존재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결국 등장인물과 독자들 만이 그 텍스트 안에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한 참여자로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13.12.16| 2페이지| 1,000원| 조회(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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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작품분석 평가A좋아요
    1. “하루(운명)”의 의미수용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단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나타난 이반 데니소비치의 생활은 매우 단면적이고 특수한 경우와 같이 보인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과의 생존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몰래 죽 2그릇을 빼돌리거나, 다른 사람(체자리)의 소포를 대신 받아주거나 맡아주는 등의 갖가지 노동으로 약간의 댓가를 받는 등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채우기 위한 투쟁을 하면서도, 남의 죽 그릇을 핥거나, 권력이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며 비굴하게 살거나 밀정노릇을 하면서 동료들을 배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위엄은 갖추고 살려는 그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즉, ‘이반 데니소비치’의 모습과 그의 ‘하루’에는 모든 보편적인 인간의 평범한 존재양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간 누구나의 삶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2. character.① 페츄코프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 - 부이놉스키 전 해군 중령페츄코프와 슈호프를 비롯한 여러 죄수들은 항상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따라서 그들은 한 그릇이라도 죽을 더 먹을 궁리를 하는 등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가장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감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감시와 명령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약삭빠를 만큼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존욕구를 채우기 위한 행동을 하는 슈호프(ex. 배식 때 몰래 몇 그릇 더 죽 그릇을 빼돌리거나, 체자리의 소포를 대신 받아주거나 신발을 만들어 다른 죄수들에게 파는 등 부업을 통해 돈을 벌어먹을 것을 구하는 등의 행동)와는 달리, 페츄코프는 수용소의 죄수들 사이에 ‘게걸쟁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만큼, 오로지 먹는 것, 즉 생존에만 급급한 나머지 버려진 담배꽁초를 모아서 말된 후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중영창에 10일 동안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슈호프(104반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는 중영창의 독방에서의 10일 후 그의 건강이 평생을 두고도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동정한다. 하지만, 그가 했던 것과 같은 무모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만 손해 보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절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즉, 페추코프와 부이놉스키 중령은, 비록 서로 완전히 다른 측면이지만, 무기력한 생존능력과 현실적응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인 슈호프와 대비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② 64반 소속의 키가 큰 노인 U-81호.슈호프네 104반의 반장인 추린이 간수들에게 돼지기름을 갖다 바친 덕에 면한 ‘사회주의 단지’에서의 혹독한 노동을 견디고 돌아온 64반에 소속된 죄수들 중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있다.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U-81호라는 죄수번호를 단 키가 큰 노인인데, 이 노인은 수용소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횟수를 셀 수 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제나 등을 쭉 펴고 있으며, 훌렁 까진 머리에 볼품없어진 외모에도 불구하고 끝이 닮아 떨어진 나무 숟가락으로 건더기가 없는 국물을 떠서 마실 때도 몸가짐을 매우 단정히 한다. 그 때문인지 얼굴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지만 폐인처럼 연약해 보이지도 않으며, 산에서 파낸 바위처럼 거뭇거뭇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인상을 준다. 쩍쩍 금이 간 그의 크고 검은 손은, 그가 수십 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통해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어떤 종류의 타협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00그램의 빵이라도, 깨끗한 천 조각을 까고 그 위에 올려놓고 먹는 그의 모습은 감시와 통제, 그리고 지나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갖춘 최소한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는 결연한 의지와 정신력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체자리와 인텔리 안경쟁이 면서, 믿음이 있다면 ‘눈앞에 가로막힌 산이라도 능히 옆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를 드러내거나, 침례교신자인 자신과 다른 러시아 정교회를 ‘성경에서 이탈한 교회’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비록 소비에트 정권이 행사하는 권력처럼 직접적이고 폭력적이진 않지만,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에 반하거나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가둔 소비에트 정권의 배타적인 성격과는 어느 정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즉, 그는 일정한 가치나 믿음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신만의 삶을 능동적으로 영위해나간다는 점에서 분명 자존적인 특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치나 믿음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일정한 한계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3. Motif- 우스치 이지마 수용소시절의 작업 이던 쿠조민의 원칙과 슈호프가 방한화에 꽃아 다니는 숟가락 ‘우스치 이지마, 1944’와 영창10일(=슈호프가 몰래 수용소로 숨겨가지고 온 줄칼로 만든 주머니 칼)슈호프가 전선에서 압송되어와 처음 수용소 생활을 시작할 때의 작업반장이었던 쿠조민(수용소의 늙은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나이)은 언젠가 밀림 속 빈터에 피운 모닥불 옆에서 그에게 “수용소에서 죽는 놈이 있다면, 그건 남의 죽그릇을 핥으려는 녀석들, 뻔질나게 의무실에 드나들며 편히 누워 있을 궁리만 하는 녀석들, 그리고 쓸데없이 간수장을 찾아다니는 녀석들, 바로 그런 친구들이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슈호프는 8년간의 오랜 수용소 생활 동안 그가 한 이 말을 항상 깊이 명심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아무리 굶주리고 열악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동료들을 희생시켜 제 몸의 안전만을 꾀하는 밀정노릇을 하거나 남의 것을 강탈하는 등의 배신행위는 절대 하지 않으며, 동시에 아무리 화가 나도 자기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나서는 등의 무의미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즉, 슈호프는 동료들에 해를 끼치지 않고 열심사로 돌아가는 작업반들 사이에 달리기 시합과 같은 장면이 벌어지는 것[p.170~p.171]), 간수장이 있고, 간수가 있고, 작업반 반장이 있는 등 사회적 지위관계가 명확하고 경제력에 따른 사회적인 차별이나 생활의 차이가 보인다는 점(특히, 체자리와 페추코프의 경우는 아주 대조적이다), 필요할 때 마다 뇌물을 줘야 하거나(이반데니소비치의 작업반인 104반은 ‘사회주의 단지’라는 혹독한 곳으로 노동배치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반장인 추린이 돼지기름을 뇌물로 갖다 바친 덕에 좀 더 나은 곳인 난방 발전 센터 건물인 ‘테츠’로 돌려짐) 항상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등 부패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점, 다양한 능력과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점 등은 비단 이반 데니소비치가 있는 수용소만의 현실이 아니라 수용소 바깥 어느 곳의 ‘속세’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게다가 우리가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항상 100%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일정한 규칙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틀에 얽매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수용소에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우리의 일상, 혹은 우리의 존재양상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용소 안과 밖의 일상은 약 2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슈호프의 고향마을인 춤게네보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물론 소비에트 사회의 체제적인 문제점 때문에 온전하게 노동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노동에 대한 일정한 대가가 있었으며(생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콜호스의 일을 강제로 거들어야 했지만, 적어도 그 노동의 대가로 콜호스에서 신분증을 발급받아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그것으로 생계를 위해 또 다른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춤게네보 마을사람들은 그 증명서를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이불보 따위를 염색해주고 많은 액수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p.54~p.55]). 하지만, 수용소 안 죄수들에게는 그러한 노동의 대가나 여행의 자유가 절대로 주어지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이 제한적인 반면에,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수용소’는 ‘행복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allegory라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에서의 하루가 ‘러시아’와 ‘러시아 민중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통, 소비에트 정권치하 러시아의 ‘수용소’를 생각하면, 작품 내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계속되는 감시와 인간이하의 대우, 가혹한 강제노동 등과 같은 암울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붙잡혀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살고 있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역시 추위와 궁색한 생활, 대가없는 노동, 그리고 소비에트 정권에 의한 정신적인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슈호프가 가족과 주고받는 편지에 나타나는 고향마을 춤게네보와 가족의 처지에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수용소’에서의 슈호프의 하루가 암울하고 힘든 하루가 아닌 재수좋은 날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매우 유머러스한 필치에 의해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더욱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수용소에서 그 날 같이 재수 좋지 못한 다른 날’에 슈호프와 그 동료들이 겪었을 법한 혹독한 운명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슈호프가 그러한 수많은 날들을 견디어 오면서 특별히 크게 낙담하거나 불평하지도 않고 견디어오고 있고, 다른 죄수동료들을 밀고하여 팔아넘기는 등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벽돌쌓기를 할 때와 같이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오히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순간을 기뻐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육체적 정신적인 억압 속에 있는 한 평범한 러시아인의 하루 속에 그러한 억압마저도 무너뜨릴 수 없는 ‘정신적인 자유’와 그것이 만들다.
    인문/어학| 2013.12.06| 7페이지| 2,000원| 조회(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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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반부닌의 '수호돌'에 관한 작품감상보고서
    1. 서론부닌의 ‘수호돌(메마른 골짜기)’은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우선, 전체적으로 작품을 휘감는 수호돌의 Grotesque한 분위기가 서정적인 자연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면묘사와 함께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하면서도 독자적인 심미성을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이나 공간의 전환이 각각 서로 다른 화자의 시점(나딸리야와 흐루쉐프 가문의 남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그런데, 부닌에게 있어 이렇게 서로 상반적인 분위기나 시점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것처럼 되어있는 것은 모두 ‘사라짐과 존속의 문제’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사라짐과 존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진실로 존재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몰두일 것인데, 그 존재함이란 표면적이고 물리적인 상태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함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아마도 스스로에게 내면화된 어떤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전자의 존재함은 일종의 ‘상태’일 뿐 진실로 존재함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어떤 존재 스스로에게 내면화된 가치란 그의 영혼의 존재와 직접적으로 맞물리는 것인데, 이것은 부닌에게 있어 특별히 ‘기억’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때의 ‘기억’이란 과거의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공간과 가치에 대한 동경이나 지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과거를 넘어서 현재와 미래로까지 이어지는 지속성과 역동성을 창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공간을 벗어나 영원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간과 역사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그렇다면 무엇이 살아있는 시간과 역사일까?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에 나타나는 ‘기억’이라는 테마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2. 본론① 보편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시간.일반적으로 우리는 시간을 흘러가는 물에 비유하곤 한다. 이러한 시간은 물리학적인 것과 유사한 것으로, 양적인 특성을 지닌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 있어서, 자신의 시간 외에 나머지는 오로지 숫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시간을 물리적인 측면에서 말하지 않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말하며, 그 시간 안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시간은 이미 물리적인 숫자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고통과 기쁨 가운데 있는 의식이나 감정의 흐름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딸리야가 수호돌에서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는데 있어서, 뾰뜨르 삐뜨로비치를 몰래 사랑하면서 간직하고 있었던 비밀스러운 설레임과 행복감은 물론, 정든 고향을 뒤로 한 채 낯설고 두려운 쏘쉬까의 후또르로 쫓겨 가면서 느꼈던 치욕스러움과 괴로움, 유쉬까로 인해 겪은 공포와 역겨움, 채찍이나 천둥번개에서 느껴지는 수호돌의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분위기와 결부된 자신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운명에 대한 것까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하려는 것은 수호돌에서의 시간자체가 나딸리야의 영혼이나 존재의 의미 자체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화자인 흐루쉐프가문의 남매가 처음으로 수호돌을 방문했을 때, “나딸리야의 내면에서, 땅을 일구는 여인다운 그녀의 단순함과 수호돌이 낳은 그녀의 아름답고 가련한 영혼 속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매력은 수호돌의 황페한 대저택에도 숨어 있었다.”라는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절대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유동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동작도 없이 존재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침잠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서 부여되는 리듬감에 따라 일정한 변화를 겪어온 시간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타샤가 뾰뜨르 삐뜨로비치에 대한 사랑으로 느낀 짧은 행복감과 설레임이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괴로움으로 뒤 바뀐 것을, 수호돌과 다른 매력을 가진 쏘쉬까에 감탄하면서 마음의수 있는 기록에 머무는 반면, 후자는 여전히 ‘느껴지는 것이며 믿어지는 것’인 것이다. 따라서 전자가 객관적인 사실관계의 규명에만 관심이 있는 것에 비해 후자는 주관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기억되는 것이며, 자아들의 가치와 연관되는 것 ‘집단기억과 역사 - 崔豪根’ 중 ‘3. 기억과 역사의 관계 (p.168)’이기 때문에 지속되고 살아있는 역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물론, 외적으로 기록된 역사나 내적으로 기억된 역사나 기본적으로는 특정한 인물이나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는 주로 지배자나 승리자들이 그들 자신의 권력이나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힘의 논리’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데 반해, 내적인 역사에 있어서는 특정한 인물이나 시공간에 대한 인간내면의 내밀한 기억이나 이미지를 재생할 수 있게 하는 자연발생적이고 사실적인 힘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다를 것 이다.역사가 힐베르크(Raul Hillberg)는 기억되는 내적인 역사와 기록되는 외적인 역사와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경우를 예를 들며 객관적으로 판단되고 선별, 기록되는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우슈비츠의 관한 한 각주를 다는 행위 자체가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가 역사가의 비판적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사람들이 학살 현장에서 겪었던 절대적 공포감과 무력감은 증발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생존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곳의 참상은 기억될 수 있을 뿐, 외적인 역사의 형태로는 절대로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집단기억과 역사 - 崔豪根’ 중 ‘3. 기억과 역사의 관계 (p.169)’.이 작품에 나타나는 수호돌과 흐루쉐프 가문의 역사도 힐베르크가 말하는 아우슈비츠와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수호돌에서의 흐루쉐프 가문의 연대기가 귀족인 흐루쉐프 가문의 직계 손들에 의해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주로 농노였던 나딸리야에 수호돌의 역사는 더욱 선명한 기억의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화자에게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수호돌의 초원에서 나는 오래된 촌마을 냄새, 수호돌의 대저택 위로 들리는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음산하게 번쩍이는 번개의 눈부신 섬광, 대저택의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부엉이의 기괴한 울음소리 등’은 메르꾸리이 성자 그림에서 느껴지는 괴기스럽고도 성스러우며, 비극적이면서도 영광스러워 보이는 수호돌과 흐루쉐프 가문의 역사에 나타나는 부조리한 이미지와 맞물려 묘한 생동감을 창출하며 독특한 기억을 가진 역사적 이미지가 탄생될 수 있게 하고 있다.즉, 수호돌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역사라기보다는 기쁨과 행복, 좌절과 고통, 참회와 극복을 통한 순응으로 점철되는 등장인물들의 삶이 ‘프랑스인들이 함께 살았을 때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던 수호돌과 뾰뜨르 끼릴르이치가 혼자 그곳을 다스릴 때 느껴졌던 불안정하고 활기가 없는 검푸른 색 이미지가 풍기던 수호돌, 농노해방을 전후로 구성원들 간에 짜증 섞인 삐걱거림과 함께 궁핍하고 쇠약해져가는 수호돌, 낡고 허물어져가는 집과 함께 황폐해져 점점 과거의 전설처럼 되어간 수호돌, 그러나 기억과 상상 속에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수호돌의 다양한 이미지적인 변화’와 함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창출해나가는 일정한 순환적인 구조를 갖는 톤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게다가 ‘수호돌’에 나타나는 역사적인 흐름은 일반적인 외적인 역사에서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때로는 현재에서 과거로, 때로는 과거에서 현재로 각각 서로 다른 시점을 가진 화자에 의해서 서술되는 혼란한 구조로 되어 있다 1장 - 루네보에서 나딸리야와 살았던 때와 수호돌로 그녀가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을 떠올리는 ‘현재’시점의 화자(흐루쉐프남매 중 오빠) / 2장 - 나딸리야가 수호돌로 돌아간 뒤 그곳을 방문한 흐루쉐프 남매 / 3장 - 수호돌에서 만남 어린남매와 나딸리야의 대화, 나딸리야의 기억에 의한 과거본문, p.63’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게르바시까는 농노임에도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조롱하고 위협 하는 행동을 일삼는다. 그는 자신을 친구처럼 대하는 아르까지 삐뜨로비치에게 도리어 자기 손에 입을 맞추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수호돌로 돌아온 뾰뜨르 삐뜨로비치가 친구인 보이뜨게비치를 대접하기 위해 마데이라 포도주를 내오라고 하자, 수호돌의 저택에는 그런 것을 둘 곳이 없어서 하인들이 그것을 끌어내어 전부 다 마셔버렸다며 빈정대곤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하인에 불과한 그를 걸맞지 않게 ‘게르바시 아파나시예비치’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곤 한다. 특히, 참다못한 뾰뜨르 끼릴르이치가 성모제 축일에 귀족단장에게 게르바시까를 벌하여 달라고 읍소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의식중에도 두려움에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게르바시 아파나시예비치 꿀리꼬프’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이미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흐루쉐프 가문과 그의 관계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두려움에도 어떻게든 다시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해 보려는 뾰뜨르 끼릴르이치를 게르바시까가 살해하는 장면에서 계급적인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 절정을 이루게 되며, 작품의 초반에서부터 게르바시까가 사실은 흐루쉐프 가문의 피를 이은 후손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었던 것을 “아버지 살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다시 한 번 폭로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나딸리야와 흐르쉐프가문의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역시 계층에 따른 구분은 의미가 없다. 나딸리야도 역시 흐루쉐프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작품 초반에서부터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그러한 사실이 게르바시까의 경우처럼 반항적이거나 충격적인 방식이 아니라, 박애주의적인 방식으로 부드럽게 전달되고 있다. 그녀는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어린 흐루쉐프 남매에게 “...애기씨들 고모가 제 신랑감을 물색해 보긴 했었지요. 그래서 저를, 이 하찮은 계집을 양갓집 아가씨라고 부
    인문/어학| 2013.12.06| 10페이지| 2,500원| 조회(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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