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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학]바다의 신비
    1.서론바다는 오래전부터 인간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양식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또한 수많은 재앙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렇게 장단점이 많은 바다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 인간들은 바다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어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다. 어업은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를 나눌 수 있는데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수산업과 동의어로 어로·양식·수산 제조를 포괄하며,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어로 및 양식만을 지칭한다. 어업은 수계의 유용 수산동식물을 생산의 대상으로 하는 제1차 산업으로 이것을 생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천연적으로 번무 하는 유용 수산동식물을 채포하거나 길러서 포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어업은 자율적 재생산법칙을 가지고 있는 수산자원을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노동의 장소 또한 기상·조류·수온 등에 따라 이변이 큰 수계라는 데 그 특질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어업과 양식업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에 대해 어업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2.본론과거부터 어류는 그 분포가 넓고 부존 량이 풍부하며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획득할 수 있는 식품이기 때문에 곡물이나 수렵 산물보다도 오히려 앞서 식용되었다. 따라서 수계의 개발·이용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하천이나 해안에서 많이 나는 어개류 를 잡아 식용하였고, 따라서 어업은 그들의 주요한 생업의 하나가 되어왔다. 이 시기에는 나무막대와 돌멩이 등을 이용하여 어로활동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지형에 따라 어업의 발전방향이 달라졌는데 고구려는 큰 산 심곡이 많고 넓은 못이 적다는, 그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에서 어업이 가장 뒤떨어졌으나 국토의 확장과 더불어 점차 내수면어업에서 해면어업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백제는 반도의 서남해안에 좋은 어장을 차지한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국가를 완성한 4세기 중엽부터는 특히 어업의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그 산물이 비단과 함께 중국는데 이는 장보고의 해상활동상이나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라구’ 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양을 무대로 한 활동이 활발했다면 역시 해양을 기반으로 하는 어업 생산 활동도 성했으리라는 사실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나잠업을 포함하는 해면어업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되었고, 다시마를 비롯한 해조류의 채취도 활발했다. 한편, 어류의 양식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세기 초에는 잉어의 양식이 이루어졌던 것 같으며, 식품(특히 어류)을 저장하기 위해 겨울에 언 천연빙을 채취,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철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경주의 석빙고(石氷庫)가 보여주는 바와 같다. 10세기 초 신라의 옛 영토를 다시 통일한 고려는 좋은 어장을 대부분 차지하여 어업 발전에 알맞은 자연 지리적 조건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숭불사상에 의한 어업의 억제, 권문세가에 의한 가혹한 수탈, 빈번한 왜구의 침범과 같은 저해요인이 끊임없이 작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업은 농업 다음가는 중요 산업으로서 이미 중기 이후에는 그 뒤에 보이는 각종 수산물을 볼 수 있었으며, 방법 또한 상당히 진보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어업은 숭불사상의 쇠퇴, 면업의 발달에 의한 면망의 도입, 인구 증가로 인한 수산물에 대한 수요 증가 등에 의해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 조성되었으나, 문헌이 전해 주는 바를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에 비해 단순한 양적인 확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우리의 어업은 한결같이 어로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수계에 적극적으로 노동을 가해 생육과 번식 보호를 촉진시켜 그것을 채포하는 양식업은 없었던 것일까. 이미 1세기경에 잉어를 못에서 길렀다는 점을 지적하였거니와, 조선시대에도 태종 때부터 연못에서 잉어를 기르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다에서 어류와 패류를 양식한 것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말에 광양만 내의 섬진강 하구에서 굴써 양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태양식은 일찍부터 개발되어 상당히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다. 한말에 이르면 우리의 어업은 외부, 특히 일본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새로운 어법과 어선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황금어장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침탈당하면서 한편에서는 여전히 재래식 어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우리의 재래식 어업은 연안에 고정시설을 설치해 두고 회유해 오는 고기를 포획하는 정치망어업, 포안의 암벽에 천연적으로 번무 하는 미역 등 해조류의 채취어업, 극히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해태를 중심으로 하는 양식업, 중선을 주축으로 어선을 이용하여 회유하는 고기를 적극적으로 포획하는 어선어업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정치망어업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어장과 어전으로, 그것은 권문세가들에 의해 사점화 되었거나, 수영이나 감영에 의해서 경영되었고, 채취어업은 포안을 공동으로 점취하고 있는 어촌공동체에 의해 공동 경영되고 있었으며, 양식업은 몇몇 선구적인 어민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경영되고 있었다. 어선어업은 명태어업·조기어업·대구어업·청어어업·멸치어업·새우어업 등 이른바 6대 어업을 어선을 이용하여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영형태는 거친 바다에 나가 조업할 만한 노동력과 어선·어구 등을 어느 정도 출자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몇 사람의 어가들이 어업계 등을 조직하여 영위하는 조합 식 공동경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재래식 어업이 언제까지나 온존될 수는 없었다. 근대식 장비를 갖춘 일본 어선이 물밀 듯이 내침해 왔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까지는 주로 통어와 이주라는 형태로 우리의 바다를 침범하던 일본 어선은 1883년(고종 20)의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과 1889년의 ‘한일통어장정’에 의하여 합법적인 어업권을 얻게 되자, 침탈은 바다에 그치지 않고 연안의 풍도 높은 정치망어장과 유통과정까지 점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우리 어업도 수동적이나마 개량된 어법·어구들할 수 있다. 그 뒤 잠시 중단된 듯하다가 1919년에 일본인들이 10척의 동력선을 도입하면서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어업관계회사인 해산회사가 설립되고 이 회사는 1888년 10월 어업을 목적으로 일본에서 어채 기구를 구입해 와 새로운 어법을 시험한 뒤에 동 남해 연안에서 조업을 시작하였다. 해산회사는 다시 1890년 정월에는 포경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회사에 고용되어 있던 일본 어부는 256명, 임차된 어선은 22척이었으며, 우리나라 주요 포구에는 모두 지사를 설치한 대수산회사로서 자본금이 수 백 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어업에서 회사형태의 출현은 생산과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때까지 객주나 여각에 의해서 주로 유통되던 어물이 출고선)에 의해 바다에서 직접 소비지 항구에까지 운반되자 어시장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경영하기 위하여 1903년 1월 자본금 60만 원으로 부산수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뒤 마산·군산·인천에도 수산회사가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1905년에는 소비지인 경성에도 주식회사 경성수산시장이 설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산업의 일반적 침체, 국토의 남북 분단 등으로 말미암아 어업은 정체의 늪에 빠졌고, 이어 6·25전쟁, 사라호 태풍 등의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져 어업은 20년에 가까운 장기적 정체현상을 보였다.1962년부터 착수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동물성 단백질 식량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또 외화가득률이 높은 유리한 수출산업으로서 어업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의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중기 경부터 우리나라 어업은 세계 어업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급속한 발달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수산업 개발정책의 효과가 발휘됨에 따라 어획고는 급증세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어업의 급신장은 연근해어업의 발달에도 힘입은 바 컸으나,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어업의 활발한 원양 진출에 의한 원양 어획고의 경이적인 남태평양 다랑어 연승어업이 개발되었고, 그것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기세로 발달하였다. 1966년에는 북태평양 트롤어업 시험 조업을 실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명태가 주요 어획대상인 북태평양어장이 개척되고, 이 어장에서의 대규모 트롤어업도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에는 북태평양에서 어획한 명태 어획량이 약 45만M/T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7년에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고 주권적 권한이 미치는 관할 수역을 대폭 확장하는 바람에 북태평양 트롤어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한때 원양어업이 위축되고 총 어획량이 감소되는 경향까지 보였으나 새로운 어장의 개척, 원양어업의 다각화 등을 통하여 원양어업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1980년대에 들어서는 신흥 어업인 오징어채낚기어업을 비롯하여 다랑어선망어업·유자망어업 등의 발달로 원양어업 생산량이 다시 크게 증가하였다. 국제농업식량기구(FAO)의 수산통계에 의하면, 1966년의 우리나라 어획량은 수산양식업 생산량을 포함하여 약 310만M/T으로 세계 제7위를 차지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원양어업과 천해양식업, 특히 원양어업의 급격한 발달이었다. 당시 수산청에서는 4분법에 의해 어업을 연안어업·근해어업·원양어업·내수면어업으로 분류하고, 그 구체적인 종류를 행정적으로 정하고 있다. 연안어업의 종류는 아주 많으나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중요한 것만 그 명칭을 밝히고 나머지 잡다한 소규모 어업은 기타 어업에 포함시키고 있다. 연안어업과 근해어업을 합한 연근해어업의 경영체 수는 1987년에는 증가 추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원양어업 어선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연근해어업도 그 생산량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1960년대 초에 비해 3배 내외로 증가하였다. 이를 연안어업과 근해어업으로 분리해 보면 근해어업이 보다 빠른 속도로 발달했던 사실이 다른 통계에 밝혀져 있다. 연안 어장은 개발의 역사가 길어 노후 된 반면 근해어장은 보다 진출 여지가 많.
    자연과학| 2006.12.01| 5페이지| 1,000원| 조회(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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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소련의 대외정책과 얄타체제
    소련의 대외정책과얄타체제의 붕괴Ⅰ. 서론, 들어가며Ⅱ. 본론(1) 소련의 외교정책1) 얄타회담에서의 소련2) 스탈린의 정책3) 고르바초프의 정책(2) 얄타체제의 붕괴1) 독일의 통일2) 소련의 붕괴① 소련의 국내상황② 소련의 국외상황③ 지도자의 정책Ⅲ. 결론Ⅰ.서론소련이라는 냉전체제의 한 극이 붕괴되면서, 그 지위를 승계한 러시아가 온갖 혼란을 겪으며 민주주의 체제로 편입한지가 불과 10년여가 지났다. 현재 러시아는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푸틴 행정부에 의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가 냉전체제 하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소련의 위치만큼은 아니지만, 국제관계에 있어서 그 위상만큼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1917년 11월8일 소비에트 정권은 발족 다음날 “평화의 포고”를 발표하고 신 정권의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을 밝혔다. 동 포고는 먼저 당시 계속되고 있던 제 1차 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의 국민과 정부에 대해 공정하고 민주적인 강화 즉 무 병합 무 배상금의 강화를 제안하였다. 또 소비에트 정권은 비밀외교를 폐지하고 모든 교섭을 전 국민의 면전에서 완전히 행할 것을 표명하는 동시에 동년 3월 이후에 임시정부가 확인 또는 체결한 모든 비밀조약을 전부 공표하는 일에 곧 착수하고 그 내용이 러시아의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과 특권을 주어 대러시아의 병합지를 멈추게 하고 또 증가하기 위한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즉시 무효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더욱이 소비에트 정권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자각한 노동자에게 호소하여 이들 국가의 노동자가 전쟁의 공포와 그 결과에서 인류를 해방한다고 하는 임무를 이해하고 그 전면적이고 단호한 현실적인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들이 평화의 대업 즉 근로 피착취 주민대중을 모든 예속과 여러 가지 착취에서 해방한다고 하는 대업을 성공리에 최후까지 수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이것은 매우 이념적이고 혁명적인 외교의 선언이었으며 소비에트 정권이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의 타협을 택한 역사적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서방측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이 “연기의 정책”은 최선의 정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정책은 당시의 불리한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유리한 시기를 기다리려는, 즉 후일을 기약하려는 매우 현실주의 적인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Roosevelt와 Churchill의 정책, 얄타회담 자체는 결코 비판을 받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된다. 한마디로 그 당시의 서방측의 “연기의 정책”은 서방측 정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얄타회담의 결과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강력한 위치와 극동에서의 소련의 잠재적인 함을 반영한 것으로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방측으로서는 “연기의 정책”이외에는 보다 나은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얄타 회담(1945.2)에서 맺어진 협정소련, 미국, 영국의 3대국 지도자는, 독일이 항복하고 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2∼3개월 뒤에, 소련이 다음의 조건으로 연합국 편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기로협정하였다.㉠ 외몽고[몽고 인민 공화국]의 현재 상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1904년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다음과 같이 회복 되어야 한다.⒜ 사할린 남부 및 그 주변의 모든 섬은 소련에 반환된다.⒝ )다롄항은 국제화되고, 이 항구에서 소련의 우선적 이익은 옹호된다.소련의 해군 기지로서 뤼순 의 조차권은 회복된다.⒞ 동청(東淸) 철도 및 다롄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는 중·소 합병 회사의 설립에 따라 공동으로 운영된다. 단 이것은 소련의 우선적 이익이 보장되고, 중국은 만주에 대해 완 전한 주권을 갖는다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준다.3대국 수반은 소련의 이러한 요구를 일본의 패배 후에 확실히 들어 주기로 협정하였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소련의 얄타에서 만나, 전쟁 후 독일의 처리, 국 기구의 설립 등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몇 개의 비밀대 초반기에 히틀러에 대항하여 서방의 반 나치 세력과 연합한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소련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억압을 위한 부르지아지의 동맹’이라고 까지 비난했던 국제연맹에 1934년 9월 18일에 가입한 것에서 그 의도가 명백해진다. 또한 1935년 6월 2일에는 프랑스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기도 했으며, 1936년 12월 5일에 열린 소비에트 제 8차 특별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전환하여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들과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동의 노력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소련의 일련의 대외정책들이 국제연맹의 무능력, 프랑스와의 상호원조조약이 프랑스의회에서 비준 동의가 되지 않으면서, 스탈린은 국가안보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탄생시킨다. 이 조약은 절대적으로 소련의 국가이익이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행해진 정책도 있었다. 1947년 그리스 문제에 있어서 소련은 미국 측에 대항하여 미국 측의 계열이 그리스에 등장한다면 그것에 따른 연쇄반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계열과 미국 측의 계열의 투쟁 양상이었던 그리스 내전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유럽재건이라는 필요성에 따라 제기된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코민포름을, 나토의 결성에 대항한 바르바샤 조약기구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스탈린 정권의 초반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후반기에는 히틀러를 물리친 여파로 소련의 위상이 가일층 됨에 따라 대외정책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이 초반기보다는 강조되었기도 하였다.?스탈린주의I.V.스탈린의 집권기인 1920년대부터 30년간을 통하여 소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해 온 스탈린의 정치노선.3)고르바초프의 정책ⓛ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마지막 정치 지도자로 오늘의 세계 역사를 바꾼 사람이라고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계속된 냉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출해 내는 데 결정적인 미국 다음가는 GNP 규모의 산업국가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1985년 권력을 잡았을 때는 소련은 20년 이상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었다. 소련 사회에 수 십 년 동안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계속되면서 일반 국민사이에서는 책임의식이 없는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졌고, 상부의 명령과 지시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생활이 계속되어 개인의 창의력과 모험정신 등이 발휘될 기회 자체가 없었고, 또한 결과의 평등만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어, 실제로 생산에 기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같은 양을 분배받음으로써 업무에 태만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분배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는 결국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생산이 줄어들고 기술개발이 낙후되었고, 물자가 부족하게 되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적 투자기회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고갈되었거나, 서구의 산업이 발전되어 경쟁적인 생산력이 될 수가 없었다.소련경제체제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전통적으로, 즉 스탈린 때부터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할당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비자상품생산에 매우 낮은 투자 순위을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군사우선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중공업이 군사력건설에 기초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브래즈네프 집권기인 1970년대부터 경제는 둔화현상을 보이고 가속화되어 1991년에 GNP 상으로 17%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주민들의 생필품 생산에 대한 낮은 투자는 점차적으로 만연한 생필품 부족현상을 일으켜 체제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되었다.또한 대외정책 목표달성 수단으로 군사력에 상당히 의존하였으므로 서구와 군비경쟁, 해외동맹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은 소련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미국과 동등한 군사력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국내경제의 침체를 가져왔고, 과도한 군사비지출이 소련경제위기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베트남 원조에서 오는 경제적 피로도와 평균 GNP 20%에 육제 중에 또 하나는 종교였다. 소련의 정신적 공허함과 공식적으로 물질에 가치를 둔 체제적 기반과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냉소주의가 대립, 소련의 도덕적 상황은 타락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종교 부활에까지 갔다. 종교의 부활은 '유물론'과의 전면적인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곧 유물론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었다.정부는 교회가 공산당의 중대한 경쟁자로 출현할 가능성도 염두해 두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를 성공시키기 위해 정신적인 측면을 담당할 이데올로기가 부재하였고 교회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가 교회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어 교회에 손을 내민 것이다.물론 위의 사안들은 러시아 정교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종교적 자유는 중앙아시아와 소수민족의 고유종교,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 역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이는 더 나아가 '민족주의'로 발전되고 민족문제와 소수민족 독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② 소련의 국외상황ⓐ소련 붕괴의 외부적요인연방의 독립, 미국의 봉쇄정책, 마셜플랜으로 인한 냉전시발과 )NATO의 창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등으로 인한 군비경쟁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무리한 군비경쟁이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합으로 소련은 붕괴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제정러시아 체제에서부터 비롯된 소수민족의 소연방 내의 강압적인 종속은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이 소연방에 의해 희생을 당하였다고 인식하게 하였고,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으로 촉발된 소수민족들의 정치적 원심력의 작용에 의한 분리-독립의 요구는 소연방 해체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8월 쿠테타 이후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하며 소련해체와 함께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주도한 우크라이나는 공산당의 중앙위원회로부터 탈퇴를 선언하며, 내부적으로 공산당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러시아 공화국에선 엘친 대통령의 명령으로 모든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고 공산당 기관지와 당 대변지를 폐간하는가 하면 공산당본부를 봉쇄하였고 타지크 있다.
    사회과학| 2006.12.01| 17페이지| 1,500원| 조회(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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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의 대외정책과 얄타체제의 붕괴 [국제관계사]
    소련의 대외정책과얄타체제의 붕괴- 목차 -Ⅰ. 서론Ⅱ. 본론1. 소련의 외교정책1) 얄타회담에서의 소련2)스탈린의 정책3)고르바초프의정책2. 얄타체제의 붕괴1)독일의 통일2)소련의 붕괴(1)소련의 국내 상황(2) 소련의 국외 상황(3)지도자의 외교정책Ⅲ. 결론Ⅰ. 서론소련이라는 냉전체제의 한 극이 붕괴되면서, 그 지위를 승계한 러시아가 온갖 혼란을 겪으며 민주주의 체제로 편입한지가 불과 10년여가 지났다. 현재 러시아는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푸틴 행정부에 의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가 냉전체제 하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소련의 위치만큼은 아니지만, 국제관계에 있어서 그 위상만큼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1917년 11월8일 소비에트 정권은 발족 다음날 “평화의 포고”를 발표하고 신 정권의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을 밝혔다. 동 포고는 먼저 당시 계속되고 있던 제 1차 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의 국민과 정부에 대해 공정하고 민주적인 강화 즉 무병합 무배상금의 강화를 제안하였다. 또 소비에트 정권은 비밀외교를 폐지하고 모든 교섭을 전 국민의 면전에서 완전히 행할 것을 표명하는 동시에 동년 3월 이후에 임시정부가 확인 또는 체결한 모든 비밀조약을 전부 공표하는 일에 곧 착수하고 그 내용이 러시아의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과 특권을 주어 대러시아의 병합지를 멈추게 하고 또 증가하기 위한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즉시 무효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더욱이 소비에트 정권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자각한 노동자에게 호소하여 이들 국가의 노동자가 전쟁의 공포와 그 결과에서 인류를 해방한다고 하는 임무를 이해하고 그 전면적이고 단호한 현실적인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들이 평화의 대업 즉 근로 피착취 주민대중을 모든 예속과 여러 가지 착취에서 해방한다고 하는 대업을 성공리에 최후까지 수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이것은 매우 이념적이고 혁명적인 외교의 선언이었으며 소비에트 정권이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의 타협을 택한 리한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유리한 시기를 기다리려는, 즉 후일을 기약하려는 매우 현실주의 적인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주벨트와 처칠의 정책, 얄타회담 자체는 결코 비판을 받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된다. 한마디로 그 당시의 서방측의 “연기의 정책”은 서방측 정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얄타회담의 결과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강력한 위치와 극동에서의 소련의 잠재적인 함을 반영한 것으로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방측으로서는 “연기의 정책”이외에는 보다 나은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얄타 회담(1945.2)에서 맺어진 협정소련, 미국, 영국의 3대국 지도자는, 독일이 항복하고 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 2∼3개월 뒤에, 소련이 다음의 조건으로 연합국 편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기로 협정하였다.1. 외몽고[몽고 인민 공화국]의 현재 상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2. 1904년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다음과 같이 회복되어야 한다.⒜ 사할린 남부 및 그 주변의 모든 섬은 소련에 반환된다.⒝ )다롄항은 국제화되고, 이 항구에서 소련의 우선적 이익은 옹호된다.소련의 해군 기지로서 뤼순의 조차권은 회복된다.⒞ 동청(東淸) 철도 및 다롄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는 중·소 합병 회사의 설립에 따라 공동으로 운영된다. 단 이것은 소련의 우선적 이익이 보장되고, 중국은 만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갖는다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3.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준다.3대국 수반은 소련의 이러한 요구를 일본의 패배 후에 확실히 들어 주기로 협정하였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소련의 얄타에서 만나, 전쟁 후 독일의 처리, 국 기구의 설립 등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몇 개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위는 그 중 하나이다. 이것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2월 11일 미국 국무성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회담에 따라 1945년 8월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였으며 동에서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전환하여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들과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동의 노력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소련의 일련의 대외정책들이 국제연맹의 무능력, 프랑스와의 상호원조조약이 프랑스의회에서 비준 동의가 되지 않으면서, 스탈린은 국가안보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탄생시킨다. 이 조약은 절대적으로 소련의 국가이익이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행해진 정책도 있었다. 1947년 그리스 문제에 있어서 소련은 미국 측에 대항하여 미국 측의 계열이 그리스에 등장한다면 그것에 따른 연쇄반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계열과 미국 측의 계열의 투쟁 양상이었던 그리스 내전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의 유럽재건이라는 필요성에 따라 제기된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코민포름을, 나토의 결성에 대항한 바르바샤 조약기구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스탈린 정권의 초반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후반기에는 히틀러를 물리친 여파로 소련의 위상이 가일층 됨에 따라 대외정책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이 초반기보다는 강조되었기도 하였다.※ 스탈린주의I.V.스탈린의 집권기인 1920년대부터 30년간을 통하여 소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해 온 스탈린의 정치노선.3)고르바초프의 정책1.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마지막 정치 지도자로 오늘의 세계 역사를 바꾼 사람이라고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계속된 냉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출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소련의 1인자가 된 고르바초프는 그 유명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 Pewestroika)와 글라스노스트(개방 : Glasnost)의 기치를 들고, 폐쇄적이고 정체된 소련 사회를 개방적이고 동적인 사회로 바꾸려고 했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의 정치적 상황은 새로운게 유리하도록 분배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는 결국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생산이 줄어들고 기술개발이 낙후되었고, 물자가 부족하게 되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적 투자기회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고갈되었거나, 서구의 산업이 발전되어 경쟁적인 생산력이 될 수가 없었다.소련경제체제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전통적으로, 즉 스탈린 때부터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할당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비자상품생산에 매우 낮은 투자순위을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군사우선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중공업이 군사력건설에 기초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브래즈네프 집권기인 1970년대부터 경제는 둔화현상을 보이고 가속화되어 1991년에 GNP상으로 17%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주민들의 생필품 생산에 대한 낮은 투자는 점차적으로 만연한 생필품 부족현상을 일으켜 체제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되었다.또한 대외정책 목표달성 수단으로 군사력에 상당히 의존하였으므로 서구와 군비경쟁, 해외동맹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은 소련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미국과 동등한 군사력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국내경제의 침체를 가져왔고, 과도한 군사비지출이 소련경제위기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베트남 원조에서 오는 경제적 피로도와 평균 GNP 20%에 육박하는 국방비 지출은 소련경제를 빠져 나올 수 없는 구렁을 스스로 파게 하였고 레이건이 SDI프로그램을 발표하게 되자 그 동안 안간힘을 써 따라온 소련의 군사력은 더 이상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민족문제고르바초프는 집권 후 개방·개혁 정책을 전개하면서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민주개혁이 진전될 수 없다." 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뜻밖에도 소수민족의 격렬한 독립운동을 유발시켰다. 비앨러(Bialer)가 소련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민족문제라고 말한 것처럼 이 문제는 모든 국내적 딜레마 가운데서도 가장 유를 획득하고 이는 더 나아가 '민족주의'로 발전되고 민족문제와 소수민족 독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2)소련의 국외상황◎소련 붕괴의 외부적요인연방의 독립, 미국의 봉쇄정책, 마셜플랜으로 인한 냉전시발과 )NATO의 창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등으로 인한 군비경쟁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무리한 군비경쟁이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합으로 소련은 붕괴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제정러시아 체제에서부터 비롯된 소수민족의 소연방 내의 강압적인 종속은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이 소연방에 의해 희생을 당하였다고 인식하게 하였고,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으로 촉발된 소수민족들의 정치적 원심력의 작용에 의한 분리-독립의 요구는 소연방 해체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8월 쿠테타 이후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하며 소련해체와 함께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주도한 우크라이나는 공산당의 중앙위원회로부터 탈퇴를 선언하며, 내부적으로 공산당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러시아 공화국에선 엘친 대통령의 명령으로 모든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고 공산당 기관지와 당 대변지를 폐간하는가 하면 공산당본부를 봉쇄하였고 타지크 공화국에선 법무부와 검찰내에서 공산당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우즈벡 공화국은 카리모프 대통령이 중앙당 정치국원직을 사임하였다 이외에도 키르키즈 공화국이나 아르메니아 공화국 등에서도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각 공화국에서 역시 공산당의 몰락은 더 이상 공산당이 설 곳이 없게 했으며, 이는 해체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미국의 대소 봉쇄정책미국 국무부 소련 문제 담당고문인 조지 F.케넌은 소련의 팽창정책의 경향에 대하여 장기간에 걸쳐서 참을성 있게 그리고 단호한 감시와 봉쇄로 대처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림. 미국은 소련과 정치적으로 친구가 아닌 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함. 주된 내용은 소련이 혁명과 전쟁이라는 폭력을 통해 세계적으로 팽창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를 봉쇄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봉쇄하지 않
    사회과학| 2006.11.24| 18페이지| 1,500원| 조회(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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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교육] 적성검사상담사례
    대학생이지만 아직도 내가 뭘 잘하며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길수도 있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졸업 후 나의 진로 선택으로 인해 지근 나는 머리가 복잡하다. 이 수업을 받으면서 레포트 제출을 목적으로 하긴 했지만 직업선호도검사라는 테스트를 통해 나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먼저 직업선호도 검사란 흥미검사, 성격검사, 생활사검사를 큰 범주로 하여 검사를 하는데 각각의 사항에 맞는 성격과 선호되는 직업을 알려주는 테스트다. 흥미검사는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알려주는 심리검사로 사람들을 직업과 관련된 여섯가지 흥미유형인 현실형, 탐구형, 예술형, 사회형, 진취형, 관습형으로 분류 했다. 이것은 육각모양의 방사형 그래프로 나타나는데 정육각형에 가깝고 크기가 클수록 관심 분야가 넓다고 했다. 하지만 성인을 대상으로 검사 했을 경우 육각모형보다 한쪽으로 찌그러진 모형이 특정한 자신의 흥미 발달에 좋다고 했다. 나는 현실형과 사회형인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으며 기타 진취형과 관습형에도 절반 정도의 수치가 나타났지만 탐구형과 예술형에는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의 수치가 나타났다. 현실형은 분명하고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것을 좋아하고 연장이나 기계를 조작하는 활동 내지 기술에 흥미가 있다. 또 사교적 재능보다는 손재능 및 기계적 소질이 있다고 평가했으며 겸손하고 솔직하지만 독단적이고 고집이 센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성취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회피해야 할 활동으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제시했다. 두 번째로 사회형은 타인의 문제를 듣고, 이해하고, 도와주고, 치료해주고, 봉사하는 활동에 흥미가 있고 기계적 능력보다는 대인관계적 소질이 있다고 평가 했다. 타인평가로 이해심이 많고 사교적이고 동정적이며 이타적인 사람으로 나타났으며 상담, 교육, 봉사활동등이 선호되는 직업이라 했다. 현실형과는 반대로 회피활동에 기계기술적 활동이 나타나는데 나와 같은 사람은 현실형과 사회형인 같이 공존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과 어울려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장에서 묵묵히 혼자 작업을 하거나 기술을 펼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어떤게 진정으로 나에게 어울리는지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여럿이 모인자리에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혼자 있게 되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이중성을 보이기 때문에 고생한다고 했다. 현재까지 나를 돌아보며 검사 결과와 비교해보니 지금까지 내가 모르던 사실을 문서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밖에 탐구형, 예술형 진취형 관습형등에 관련된 사항은 마지막에 첨부될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흥미도 검사를 통해 나에게 선호되는 직업의 형태가 나왔는데, 건축도장, 내선공사, 도배, 저자기기관련, 지하철역무, 선박통신사, 초음파검사기사, 항공무선통신사등 대부분 현장 활동직업이며 기술을 요하는 직업이였다. 물론 이것은 가장 높게 나타난 현실형 코드에 맞게 나타난 직업이기 때문에 그쪽 분야에 맞는 직업에 편중된건 사실이다. 하지만 제시된 직업을 보며 한번쯤 해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참고사항으로 노동부에가면 2만에서 2만5천가지의 직업이 제시되어 있어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거나 새로운 영역의 직업을 찾는 사람이라면 찾아보라고 했다.두 번째로 성격검사는 자신의 성격특성이 어떤 경향을 보이는 지 알려주는 심리검사이다. 사람들의 성격을 크게 5가지 차원인 외향성, 호감성, 성실성, 정서적 불안정성, 경험에 대한 개방성으로 구분하고 세부적으로는 28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다. 이 결과표는 검사자의 성격특성을 안내하고 직업선택과 관련된 성격의 장단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나는 외향성과 정서적 불안정성이 가장 높게 나왔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은 사교적일 뿐 아니라 활달하고 말을 많이 하며 자기주장을 잘한다. 흥분과 자극을 좋아하고 명랑하며 힘이 넘치고 선천적으로 낙천적이다. 정서적 불안정성이 높은사람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으며 욕구통제에 어려움을 느낀다. 정신병리적 문제들을 경험하기 쉽다. 하지만 이내용은 전체적인 성향으로 그 세부 사항으로 나눠서 생각할 때는 그 측정 지수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맞다고는 할 수 없다. 외향성에는 온정성 사교성 리더쉽 적극성 긍정성 이렇게 5가지로 세부 사항으로 나눠진다. 외향성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원하고 타인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정도이다. 나는 5가지 세부사항 중 적극성이 가장 높게 나와 힘이 넘치고 항상 적극적이며 바쁘게 생활한다고 한다. 두 번째 호감성에서는 타인에 대한믿음, 도덕성, 타인에 대한 배려, 수용성, 겸손, 휴머니즘으로 나뉘는데 이는 타인과 편안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나는 수용성이 가장 높게 나와 남의 의견을 잘 따르고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며 남의 잘못을 쉽게 용서한다고 한다. 반면 도덕성은 가장 낮게 나타남으로서 아첨, 속임수 등으로 타인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정확히 맞는건 아니지만 조금은 수긍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 반성 할 기회가 생기긴 했지만 내가 그런 면이 있다느게 내 자신에 실망하게 됐다. 성실성은 사회적 규칙, 규범, 원칙들을 기꺼이 지키려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유능성, 조직화능력, 책임감, 목표지향, 자기통제력, 완벽성 으로 나눠지는데 평균적으로 6가지 사항 모두 낮은 점수를 받았고 그중 자기 통제능력과 책임감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책임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이나 윤리적 의무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통제력이 낮은 사람은 일의 시작을 계속 미루며, 시작한 일을 중도에서 쉽게 포기한다고 한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관심, 호기심, 다양한 경험에 대한 추구 및 포용력 정도를 나타내준다. 이것은 상상력, 문화, 정서, 경험추구, 지적호기심으로 나뉘는데 나는 문화와 지적 호기심이 가장 낮게 나왔다. 문화가 낮은 사람은 예술과 미에 둔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적호기심이 낮은 사람은 지적 호기심이 적고 제한된 분야에만 관심을 잦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종합해본 결과 나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적극성과 수용성 충동성이 강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함에 있어 항상 적극적이며 바쁘게 살고 남들과의 의견에 잘 따라주며 남의 잘못을 쉽게 용서하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충동적이기 때문에 행동한후 후회 하는 경우가 많으며 욕구가 너무 강해 본능적인 행동을 잘 한다고 한다.
    교육학| 2004.12.09| 3페이지| 1,000원| 조회(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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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관리] 황우석 박사를 만나고...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주위에서 찾아 보려 했다. 성공이란 단어에 익숙치 못한 나로서 성공한 사람을 찾는건 그리 쉬운일만은 아니였다. 흔히들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며 그일에 최고가 된다면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칭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것만 같지 않아 직접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지만 기타 기관의 인터뷰 사례들을 통해 성공이라는 단어와 알맞은 사람을 찾아 보았다. 황우석교수. 그는 우리나라 수의학계에서는 최고로 불리기도 하며 세계속에서도 생명공학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황우석교수의 연구는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시험관송아지 생산에 성공하여 축산생명공학분야를 선진외국과 견주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어 동물 복제연구를 시작하여 1999년과 2000년에 국내 최초로 체세포 복제 젖소 및 한우를 만듬으로써 세계 생명공학 선진국과 치열한 기술 경쟁에 동참하였다. 이후에는 인류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고 부가가치 생물공학 신기술을 개발에 집중하여 최근에는 면역조절된 무균돼지를 복제 생산함으로써 바이오 장기생산에 더욱 근접하게 되었다. 또한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송아지개발 기술을 확보하였다.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환자의 세포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 확립기술을 개발, 세포치료의 장애물인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함으로써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바이오 혁명을 바로 한국에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황우석교수의 간단한 연구 업적과 주요 프로필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1952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임공임신학을 전공, 수의학 석사(1979)·박사(1982) 학위를 받았다.1984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가축 번식기술을 익힌 뒤, 동물의 유전자 조작과 인공번식 연구에 전념하였다. 1986년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동물복제 연구에 전념하여 1999년 2월 한국 최초로 체세포 복제젖소(송아지) '영롱이'를 탄생시켰는데, 동물 체세포 복제로는 세계에서 5번째이며, 젖소 복제로는 세계 최초이다.같은 해 3월 복제한우 '진이'를 탄생시키면서 동물복제 연구의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았고, 2000년에는 소 난자에 호랑이의 체세포 핵을 이식해 사자를 대리모로 쓴 백두산호랑이 복제에 도전해 이종(異種) 동물의 핵 이식에 이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임신까지 성공하였으나, 출산에는 실패하였다.2004년 2월에는 사람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胚芽)를 사람의 난자에 주입해 핵이식 난자를 만든 다음, 전기자극을 통해 세포융합을 유도함으로써 배반포 단계까지 발육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 이 연구로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해 뇌질환·당뇨병·심장병 등 각종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는 세계 각국의 언론으로부터 복제양 '돌리'에 버금가는 위대한 생물학적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로 평가받았다.2004년 현재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수의학회 학술위원장, 한국발생생물학회 부회장, 한국수정란이식학회 학술위원장,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부학장 등을 지냈다.저서에는 《수의산과학》(1995), 《소 수정란 이식》(1995), 《동물 유전공학》(1997) 등이 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우수과학기술논문상(1997), 대한민국과학기술상·홍조근정훈장(2000), 세종문화상 대통령상(2001), 과학기술훈장 창조장(2004) 등을 받았다.화려한 경력과 많은 연구발표 세계가 놀랄만한 성과등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인간이 아직 범하지 못한 부분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그의 과업을 남기고 있다.중앙일보의 인터뷰를 스크랩해 보았다.[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이번 연구 결과로 줄기세포 치료가 차세대 의학의 주역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어떤 질환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일문일답 형태로 정리했다.◆ 어떤 질환에 도움을 주나=세포 손상이나 파괴로 생긴 질환의 치료에 획기적 도움을 준다. 어린이에게 흔한 1형 당뇨나 파킨슨병.신경손상.뇌졸중과 심장병.발바닥 괴사나 관절염 등 대부분의 난치병 치료에 응용될 전망이다. 특히 세포 재생이 불가능한 신경질환의 경우 도움이 된다. 교통사고 등으로 신경이 끊어져 사지마비에 빠진 경우 지금까지 치료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줄기세포로 신경세포를 만들어 주입해 주는 방식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치매의 경우 치료보다 예방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줄기세포를 통해 신경세포란 칩은 재생할 수 있지만 과거 신경세포에 담긴 기억의 내용은 되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세포 치료는 수년 내 실용화될 전망이다.그러나 장기에 생긴 질환엔 당장 응용이 어렵다. 세포를 장기 형태로 만드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이나 콩팥 등 이식용 장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왜 인간 난자로 배아 줄기세포를 얻지 못했나=줄기세포는 시행착오의 학문이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성공 확률은 커진다. 대량으로 난자를 얻을 수 있는 동물과 달리 사람의 경우 한달에 한번 난자가 만들어진다.실험 재료인 난자를 연구자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이번 실험에선 16명의 여성이 2백42개의 건강한 난자를 기증했다. 사람 체세포 핵과 사람 난자 간 융합을 통한 줄기세포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2003년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진은 원숭이 실험에서 4개 세포로 쪼개진 이후부터는 중심체 이상이란 질환이 나타나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의 배아 줄기세포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이번 기술의 핵심은 무엇인가=크게 두 가지다. 쉽게 파열되는 인간 난자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난자의 껍질에 해당하는 투명대에 작은 구멍을 만든 뒤 압력을 가해 핵이 쉽게 빠져나오는 독특한 기법을 활용했다. 줄기세포 배양을 위해 영양물질에 해당하는 배양액도 한몫 했다. 연구진이 자체 개발해 세계 최초로 사용한 hmSOFaa란 배양액이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핵심 기술은 모두 국제특허 출원을 마친 상태다.
    사회과학| 2004.12.08| 3페이지| 1,500원| 조회(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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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3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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