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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장수, 황제를 꿈꾸다, 황소 충성은 없다, 다시 분열의 시대로, 朱全忠.
    소금장수, 황제를 꿈꾸다, 黃巢.충성은 없다, 다시 분열의 시대로, 朱全忠.- 목 차 -들어가는 말1. 소금장수의 불만이 썩은 뿌리를 뽑다① 난을 일으키고② 황제가 되었으나③ 소금장수는 황제가 될 수 없다※ 황소의 난은 왜 당 멸망의 결정타인가 - 안록산의 난과의 차이는?※ 최치원과 황소, 당과의 관계2. 분열이 시작되다① 황제를 빼앗고 나라를 바꾸고② 황제를 죽이고 나라를 또 바꾸고※ 당말, 오대의 사회적 변혁 - 당송 변혁기나오는 말들어가는 말황소와 주전충이 활약했던 당말, 오대는 당송 변혁기와 관련된 중요한 시점이다. 또한 이 때는 신라의 도당 유학생이었던 최치원이 황소를 비롯한 중국 문제와 관련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글들이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관련 영상물을 잠깐 시청할 것이다.본 발표는 정치?제도 등은 배경으로만 깔고, 인물의 살아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 속에서 인물 자체의 모습을 살리고, 황소와 주전충이 느꼈던 감정?고민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두려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내용을 읽고 설명하는 방식이 아닌, 발표자들이 극본을 준비해 직접 그 시대 역사 인물의 입장이 되어 보는 감정이입의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모두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어필할 수 있는 발표가 되기를 바라며, 또한 발표 이후 질문과 토론 과정을 통해 황소와 주전충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1. 소금장수의 불만이 썩은 뿌리를 뽑다황소는 안사의 난 이후 무너져 가던 당나라의 체제에 결정타를 날린 장본인이다. 소금밀매업자출신으로서 과거에 낙방하고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소가, 당말의 대농민반란을 이끌고 천하를 휩쓸며 스스로 황제를 칭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또한 황소의 난에 가담하여 당의 멸망을 부채질했던 주온이 황소를 배반하여 난 평정의 일등공신이 되고, 황제로부터 오로지 충성하라는 의미의 전충( 있으니까, 처음부터 준비 를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각지의 동업자와 연락이 긴밀하니까, 거병하면 호응하는 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왕선지 : 우리 사염업자끼리야 그렇다 치고, 병력을 모을 방도는 있소?황 소 : 병력을 모으는 것이 그다지 곤란한 일은 아닙니다. 계속된 한발, 수해, 메뚜기 의 피해 등으로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향에 있으면 세금, 소작료의 징수가 심하여 이것을 납부하지 못하면 체포?투옥되는데, 이를 피하 기 위해서 도망가는 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들을 받아들인 다 면, 순식간에 수만의 무리를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왕선지 : 좋소.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군. 나 왕선지는 이제 천보평균대장 군(天補平均大將軍) 겸 해내제호도통(海內諸豪都統)이 되어 거병을 선언하겠소.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② 황제가 되었으나)880년 12월,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입성하였다. 남아있는 당나라 황족 전원을 죽이고 즉위식을 올린 뒤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전통(全統)이라 하였다. 황소를 황제로 하는 대제는 당나라의 3품관 이상은 배척하되, 관리를 모을 수 없어 4품관 이상은 그대로 유임시키기로 했다.장안에 입성한 황소군은 가난한 사람을 보면 양곡을 베풀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약탈을 시작해 상점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였다. 특히 관리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여 장병들의 관리 살해는 황소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빈민에게는 동정적이었으나 관리와 상점 주인 등에게는 본능적인 증오심을 지니고 있었다.또한 장안 입성 후 전쟁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황소군은 이제까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강한 저항을 받으면 그곳을 그대로 지나쳤다. 하나의 거점을 오랫동안 점거하고 있었던 경험이 없다. 이동하고 있는 군단은 당나라로서는 포착하기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 황소는 겨냥하기 쉬운 표적이 되어 있었다.국가의 행정이라는 것도 방황하는 군단이었던 황소집단으로서는 서투른 일이었다. 당의 4품관 겪은 바 있소. 내게 어찌 이럴 수 있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소.밀 사 : 장군이 황소를 위해서 일한 지가 벌써 여러 해 지났건만, 그들은 전혀 장군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국가에 귀순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고 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것이 어떻습니까?주 온 : 내 예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다만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지금 황소군의 세력이 쇠퇴하고 여러 부족의 수장이 변심한다고 하니 황소는 반드시 패할 것이오. 조만간 계책을 세워 황소의 측근을 죽이고 항복할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밀 사 : 역시 장군은 현명하십니다. 조정에서는 장군이 귀순하실 경우 좌금오위대장군, 하중행영(河中行營)의 부초토사(副招討使) 자리를 주는 한편, 오직 충성하라는 의미의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할 것입니다.주 온 : 조정에서 그렇게 날 생각해준다니,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구려. 이제 황소 토 벌은 시간 문제일 뿐이오.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이름처럼 오로지 충성하겠다 고 잘 전해주시오.※ 황소의 난은 왜 당 멸망의 결정타인가 - 안록산의 난과의 차이는?당 대를 두 개의 시기로 나누는 계기적 사건으로 흔히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난을 이유로 이후 절도사들이 흥기하고 귀족이 몰락하며 균전제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이후로 당은 200여년이 지속되다가 결국 황소의 난에 이르러서야 그 명을 다하였다. 이유는 무엇인가.두 난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범위적 규모이니 안록산, 사사명의 경우는 화북지방에 국한되었을 뿐인데 황소의 난은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즉, 앞의 난 이후에도 당은 강남의 온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200여년을 그 명을 더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당시 신흥 지주세력이었던 형세호들은 당에 협조하는 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그리 행동하였고, 세력을 형성한 절도사들은 서로 간에 교묘한 힘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하였으니 당은 황소 난 이후로 주전충에게 힘이 쏠리기 전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짓는 솜씨를 만방에 과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② 쟁장 사건)발해의 왕자 대봉예는 897년 7월에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갔다. 그는 발해가 대국이고 군사도 강하다고 믿었으나, 당나라에서는 조헌(朝獻)할 때 발해 사신의 순서를 신라 다음으로 정하였다. 이에 서장을 올려 신라보다 앞에 설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는 당이 중심이던 동아시아에서 발해와 신라가 서로 핵심권력으로부터 가까운 거리를 확보하려는 외교전으로서, 발해와 신라의 ‘쟁장사건(爭長事件)’이라 한다.당이 발해의 요구를 거절하고 옛 관습대로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최치원은 감사의 글인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를 당 소종에게 보냈다. 그런데 최치원의 이 글은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한국측은 '구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지파)이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동북공정 논자들은 '신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당시의 기록이 중요한데, 신라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는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 말기 멸망 때 본래 (고구려의) 우취부락에서 나온 것이다.(渤海之源流也 句麗末滅之時 本爲¤贅部落)"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와 대조영이 고구려 우취부에서 기원한 것임을 명백히 밝혀 놓아, 대조영이 고구려 계보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2. 분열이 시작되다주전충은 안사의 난 이전부터 존재하여 당 멸망의 체제적 원인이었던 절도사체제가 극도로 변질되었던 시기에, 선무절도사로서 당 왕조의 마지막 숨통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당의 마지막 황제 애제로부터 선양받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조 후량의 황제가 된다. 이에 당의 고조로부터 20대, 290년간 대륙통일을 이어오던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를 맞는다. 오대의 서막, 황제 주전충을 이야기한다.반란군의 일개 장수에서 출발하여 황제가 된 기쁨도 잠시, 주하가 계신데, 그 무슨 불충한 소리요? 내가 어찌 감히 그 런 일을 할 수 있겠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황 제 : (주전충의 눈치를 보며) 사실 오래전부터 이 자리가 짐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 각해 왔소.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주 장군이 없었다면 짐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오. 경들의 생각이 옳소.측근 2 : 장군께서 아무리 고사하셔도 저희들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황제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시니, 이젠 제위에 오르실 때입니다. 또한 이는 만백성과 국가의 평안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주전충 : 알았소. 경들의 뜻이 그렇다니 할 수 없구려. 당 대신 국호를 대량(大梁)이라 하고, 연호는 개평(開平)으로 하겠소. 대량국이 자손만대에 걸쳐 번성하길 바라 며, 오늘은 큰 잔치를 벌일까 하오. 다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깁시다. 하하.② 황제를 죽이고 나라를 또 바꾸고)후량의 태조 주전충은 빈농 출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호족의 집에서 머슴으로 있다가 뛰쳐나와 황소의 난에 참가했다. 주전충은 황소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붙는 등 전형적인 난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계속된 귀족사회의 체제를 파괴하는 일에 그 이상의 적격자는 없을 것이다.당나라가 그 처리에 고생한 환관을 주전충은 매우 간단하게 전멸시켰다. 구체제에는 전혀 익숙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의 고관들을 죽여 황하에 던져 버렸다. 그들은 환관을 탁류라 비방하고 자기들을 청류라고 자찬했다. 청류라고 자만하는 자들을 탁류 속에 던지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이러한 거친 수법은 주전충의 본성이었다. 주전충은 이렇게 당말의 여러 가지 부패상을 일단 분쇄해 버렸다.황제가 된 당시는 주전충도 세력이 왕성하여 전쟁에도 강했지만, 얼마가 지나자 결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질이 거칠기만 했지, 그 외의 성격은 황제로서는 낙제점이었다. 신상필벌은 좋았으나 패전과 실책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의 측근에는 명참모가 없었다.그와 숙적관계에 있던 였다.
    인문/어학| 2007.12.11| 8페이지| 1,500원| 조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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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조의 정책
    위가 있기까지의 조조(曹操)조조(曹操)는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며 삼국지연의 안에서는 주인공 격인 유비(劉備)에 맞서는 반대 역으로 나온다. 하지만 위가 그렇게 삼국 중에서 강성했었던 이유는 조조의 노력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조가 그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고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고 그걸 앞장서서 정착시킨 데 있다.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생활 안정이었다. 계속된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안전한 삶터와 생업을 바랐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조조가 한 것이 둔전제였다.조조의 정책 첫 번째 - 둔전제둔전제는 전란으로 버려진 농토를 나라에서 모아 백성들에게 농사용으로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을 징수하는 국영 소작제도다.후한 말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통치계급의 진압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대립과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민화(流民化)하여 양전(良田)이 황무지로 바뀌고 인적조차 드문 상태였다고 《진서》 는 서술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의 대부분이 이런 군량을 포함한 재정 문제가 급박했었다. 조조도 예외는 아니였고 조조는 이런 현실적 요청에서 전한 이래 시행했던 둔전을 모델로 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변형된 이른바 ‘조조의 둔전제’라는 정책을 채택, 시행하였다. 조조의 둔전제 설치 연대는 동탁 잔당세력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갈 곳 없는 한의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허창]에 영입한 건안 원년(196)이다. 이때 조기(棗祗)와 한호(韓浩)의 건의에 따라 둔전제를 실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의 군장들은 군량을 확보하고 동시에 전란으로 생긴 유민을 토착화하고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또 그 노동력을 병력으로 전용(轉用)할 수 있는 다목적의 토지경영방법을 창안한 것이다. 후한 말 중원지방에서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서 군량의 병력확보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겸하는 농경조직이 시대적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이 곧 조조의 둔전제이다. 여남 ? 영천의 황건군을 격파하여 이때 항복한 병사와 포로를 노동력으로 하고 이들에게 경우(耕牛)와 농구를 빌려 주기도 하고 또 백성을 모집해서 수도인 허 부근에 처음 둔전을 설치하여 곡(穀) 1백만 곡(斛)을 수확하였다고 한다. 이 1백만 곡이 세수(稅收)인지 총 수확인지 분명하지 않다. 의 기사에 당시 곡(穀) 3천만 곡은 병 10만 명이 5년 동안의 식량이라고 하였으니 1백만 곡은 병 1만 6천여 명의 1년 동안의 식량이 된다. 둔전제의 성과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조조는 그 세력 범위의 확대에 따라서 각지의 둔전을 설치하였다. 건안 9년, 원씨 평정 뒤 업에 수도를 정하였을 때는 각 주군의 전관(田官)을 설치하여 연 수천만 곡을 얻어 군량에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민을 모집하거나 항복한 군사를 귀농시켜 경영하는 민둔을 두어 민둔과 병존하도록 했다. 즉 대오 전선인 회남 양주 방면과 대촉 방위지대인 섬서성 서부에 차전차경(且戰且耕)하는 즉 싸우면서 지키는 군병으로 경작시키는 군둔을 설치해서 경영하였다.조조의 둔전제는 군량문제를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조조에게 군웅을 분쇄하여 북방을 통일케 하였다. 또 그 경제적 역량을 충실케 하면서 토지로부터 이탈한 농민을 다시 농민의 신분으로 환원시켜 토지에 묶어 두고 전란으로 배출된 대량의 유민을 정착케 해서 사회 안정을 가져왔다. 그와 동시에 파괴된 북방의 농업생산 회복에 기여한바 컸다고 말 할 수 있다.조조는 백성들이 뭘 원하는지를 잘 알아 항상 선수를 쳤다. 조조가 최대의 라이벌인 원소를 쳐부수고 기주(冀州) 지방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원소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어 원성이 높았는데 조조는 이것을 대폭 경감하는 조치를 취한다. 특히 세금의 폐해가 심했던 황하 이북의 백성들에겐 1년간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백성들이 좋은 주군을 만났다고 크게 환호했다 한다. 조조는 나라경영에 있어서 법에 의한 치국을 기본으로 삼았다. 법치주의와 부국강병책은 촉나라 제갈공명의 통치방법과 비슷한 점이 많다.조조의 정책 두 번째 -세제의 변화-호조제(戶調制)조조는 관도의 일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건안 7년, 202)에 이어서 원소의 잔당을 평정하여 업을 점거하고서 전조(田租)를 무(畝)당 4승(升), 호견(戶絹) 2필(匹), 면(綿) 2근(斤)을 징수하는 영을 내렸다(건안 9년, 204). 이것이 전조 ? 호조령의 정식 반포이다. 전조는 무당 계산은 한대 당 년의 수확량에 따라서 전 수확량의 1/30의 정률세(定率稅)를 개정해서 수확의 다과(多寡)와 관계없이 경작 면적의 무당 부과(賦課)하는 정액세(定額稅)로 전환한 것이다. 다음 호견면(戶絹綿)이 이른바 호조(戶調)이며 호를 부과 단위로, 견 ? 면을 징수하는 새로운 세목(稅目)이다. 사서에는 이 전조 ? 호조령이 건안 9년에 반포된 것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사실 조조가 기주 평정 이전 즉 건안 5년(200)에 그의 통치 구역이었던 연주와 예주에서 시행하고 있던 것으로 기주 평정 다음에 이곳에까지 확대 시행한 것이다.한대의 조세는 크게 나누어 전조(田租)와 인두세(人頭稅)인 요역(?役) ? 구산(口算) 등 산부(算賦)가 있다. 구산은 산부(算賦)라고도 불리지만 자산세(資産稅)인 산부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다. 7세에서 14세까지 미성년 남녀에서 구산 23전을 징수하여 이 가운데 20전은 제실(帝室) 재정에 귀속시키고 3전은 무제 시기에 추가된 것으로 군마 보충비로 국고 수입으로 하였다. 또 15세에서 56세까지의 성년 남녀는 1산 120전을 부과하고 고인(賈人)과 노비에 대해서는 배(倍)를 징수하였다. 이를 위해서 해마다 8월에 ‘안비(案比)’라고 하는 인구조사를 하였다. 산부는 인두세인 산부와 구별하기 위해서 자산이라고도 한다. 일종의 재산세를 뜻한다. 일반민의 자산은 1만 전에 대해서 1산(120전)을 부과했으나 무제 원수 4년(B.C. 119)에 상공업자에 중과(重課)를 하였는데 이것을 이른 바 산민전이라고 한다. 이밖에 초거(?車) ? 선박(船舶) ? 가축에까지 자산을 부과했으나 이 자산이 양한(兩漢)에 걸쳐 존재했는지 분명치 않다.이상과 같은 한대의 세제를 조조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면 조조의 호조는 구산과 계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자의 차이점은 전자는 인두세이고 화폐납(貨幣納)인데 후자는 호 단위의 현물납인 데 있다. 한 왕조를 인두적(人頭的) 지배체제라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이념이지 그 전제권력이 향촌 구성원인 모든 민중을 개별적이고 인두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고 향촌의 지배층을 매개로 해서 이들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향촌에까지 관철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구산과 같은 인두세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국가 세력은 국가가 민의 개개인을 정확히 파악해서 부과한 것이 아니고 향촌의 공동체적 관계를 매개로 함으로써 비로소 민중에게 부과와 징수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후한 말 농민전쟁으로 말미암아 국가권력은 후퇴하고 향촌의 혈연 지연적인 공동체 관계는 이완되어 향촌 안에 구수(口數) 파악이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여기에서 조세 징수 단위를 호로 하는 호조로 개편하게 된 것이다.호조(戶調)의 징수형태는 한대의 화폐납에서 현물납으로 변경되었다. 이것도 후한 때부터 점차 진행되었던 화폐유통의 쇠퇴, 현물 경제 진정에 대응하는 조치이다. 특히 후한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지면서 상공업이 퇴조하여 자연경제가 우세해지고 화폐도 새로이 주조하지 않아 민간에서는 곡백(穀帛)을 교역의 매개 수단으로 하였다. 호조의 재정은 이런 시대적 실정에 부응해서 한대의 세제를 개편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조가 재정한 호조는 위 일대에 끝나지 않고 남북조시대를 통해서 답습되었다.조조는 처음부터 대단한 사회 경제적 기반이나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거병 초에는 얼마 되지 않는 모병으로 병력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뒤에 수십만의 병력으로 불어났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 많은 군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가?첫 번째로 유적(流賊)을 토벌해서 자기 병력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초평 2년(919), 흑산적의 일부를 동군에서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자주 유적을 토벌하여 약간의 투항한 유적을 얻어서 그 병력을 증가시켰다. 특히 초평 3년, 청주 황건군을 토벌해서 항복한 군사 10만, 남녀 1백만 여구를 획득하였다고 사서에 서술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항복한 군사 수만, 가구 십여 만을 얻어서 이들을 병력으로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문/어학| 2007.12.11| 3페이지| 1,000원| 조회(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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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조선후기 신분구조의 변동
    조선후기 신분구조의 변동1. 조선후기 신분구조 변동의 원인선조 말엽부터 시작하는 17세기 조선사회는 다방면에 걸친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는 시기이다. 재래의 체제, 질서, 사상 등이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으로도 이미 양천제라기 보다는 반상제에 가깝게 변화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굳어진 조선의 신분구조도 변동의 흐름에 휩싸여 조선사회를 뿌리부터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조선후기의 신분제 이완과 사회신분의 변동은 여러 요인에 의해 비롯되었다.우선, 양반인구의 증가를 말할 수 있다. 조선 초기 양반은 전,현임前,現任 문무관과 그의 가족, 과거합격자 등의 소수집단이었지만, 수대에 걸쳐 자손들이 쌓이면서 양반인구가 증가하였고, 경제적으로 유족했기에 자연증가율도 높았다. 증가된 많은 수의 양반들의 군역기피현상이 끝내 면역免役으로 귀결되자, 그들의 국역을 떠맡게 된 다른 신분층의 신분상승운동을 유발시켰다. 양반서얼들은 끊임없는 통청운동通淸運動을 통하여 결국 국역이 면역되고, 평민들은 양반의 직역을 모록冒錄하거나 공명첩空名帖을 수매하여 신분상승을 꾀하였다.여기에 조선후기 서민경제가 성장하여 경제력을 이용한 신분상승이 이루질 수 있었다. 또한, 사회경제적 발전과정에서 농민층의 분화가 이루어져 몰락한 농민들의 노동력이 노비를 대신하게 되고 조역 및 요역의 물납화物納化로 노비의 부담형태가 노동력의 제공에서 신공의 납부형태로 변화되면서 외거노비가 늘어나고 현실적으로 노비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자기경영을 갖게 된 노비들은 납속納粟, 군공軍功, 대구代口 등의 합법적 면천과 도망, 은루隱漏하여 신분을 상승시켰다. 양반인구의 증가와 노비의 존재양태의 변화는 정부정책의 변환을 가져와서, 양인층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공노비 해방조치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조선 후기사회는 이렇듯 다양한 이유에서 신분구조의 변동이 일어나고, 몰락양반이나 몰락농민 등 신분하락인구도 존재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수많은 하층민의 신분상향이동이 심화되었다. 조선후기 양반인구의 급증, 중인인구의 점증, 상민가 총 인구의 절반을 넘게 되었다. 《承政院日記》, 고종 14년 4월 6일. 서얼들을 문지門地와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고 모두 금고禁錮하고 대대로 지색枳塞하여 세월이 오래되자 그 수가 더욱 늘어나서 전 국민의 과반수가 되었다.모계의 상계 중 어느 한사람이라도 흠이 있는 신분이면 그 자손은 모두 서얼로 취급되었고, 한번 서얼이 되면 그 자손은 그 후 아무리 일부일처의 건전한 혼인관계로 대를 내려가더라도 서얼이었다.2) 서얼의 신분적 차대고려시대의 서얼차대는 일천즉천一賤卽賤의 원칙 확립에 목적이 있었는데 반하여, 조선시대의 서얼차대는 그 외에도 유교적인 예무이적禮無二嫡의 원칙으로 부모계가 모두 사족이더라도 처 이외의 자손은 서얼로서 차대를 받았다. 서얼차대를 통해 사족의 지위권한을 고수하려는 지배자 집단으로서의 입장 등 신분질서 유지가 강조됨으로써 성립된 서얼차대정책은 태종 15년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규제가 성문화되고 이후 경국대전에서 확립되었다. 《經國大典》吏典, 限品敍用 조항. 문·무 2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3품, 천첩 자손은 정5품에 한하고, 6품 이상의 양첩자손은 정4품, 천첩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자손은 정5품, 천첩자손은 정7품에, 양첩자손의 천첩자손은 정8품에 각각 한정하여 서용한다고 규정하였다.여기서 여러 처,첩이 모두 사족인 경우, 처와 첩의 분간이 곤란해지면서 자손들이 적통을 다투는 분쟁이 심각하여 성종대에 사족의 딸을 취첩하는 행위를 금지시켰지만 여전하여 적통 투쟁은 지속되었다. 서얼은 문과와 생원, 진사의 응시자격이 없어 청현요淸顯要의 관직이 불가하였고, 무과나 음직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한품限品의 제한을 받았다.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고 재산의 상속도 적자의 1/7~1/10에 불과하는 등 천시받고 차별받았으며, 혼인에 있어서도 처음엔 천첩자녀만이 양반과 혼인할 수 없었지만, 이후 양첩자녀와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개의 서얼이 양반과 혼인하지 못하였다.3)서얼의 지위직 관료로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되었다. 개화당의 형성과 지도에 이바지하였던 역관 오경석과 유홍기나, 또는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던 승려 이동인이 그 실례가 될 것이다. 또한, 갑오개혁 때 내각의 대신 가운데는 과반수가 서자나 중인의 출신배경을 갖고 있었다.중인직에 대한 정치권의 배려로는 정조대의 탕평정국 당시에 청요직 권한의 혁파와 군영의 강화로 왕권 및 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 서얼, 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의 성장을 정치구조 안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한편, 근래에는 넓은 의미에서 중인에 속하고, 17세기 후반부터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경아전의 성장을 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서울의 「우대上村」라고 부르던 삼청동에서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들로, 권세가의 겸인으로 들어가 그 세력을 이용하여 중앙관서의 서리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16세기 후반에 와서 중앙관서의 실무를 완전히 장악하고, 관청에 근무하면서 서리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손쉽게 치부할 수 있었다. 이 때에 경아전의 부의 축적이 큰 제재를 받지 않고 가능하였던 원인은 지배계급과 분배하는 공생구조가 갖추어졌던 데 있었다. 지배관료들은 조세를 통해 할당받는 것보다 중인들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재부의 양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경아전의 중간착취를 묵인하거나 비호해 주면서 막대한 양의 상납을 받았다.② 전문직 중인층의 지방관진출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중인출신 수령은 많은 관직을 차지하였다. 그 중 의관출신이 인원으로는 40%를 넘고, 관직으로는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역관, 주학, 운관, 화원 출신 수령이 있었다. 《雜科榜目》이나 각 과의 《先生案》등을 위주로 뽑은 후 경기도의 《守令案》을 참고한 결과를 바탕으로 함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의관이다. 17세기에 의관에게 수령직을 많이 주었던 원인은 소영하기의 자연재해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의관을 파견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으나 시도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계획이 주도면밀하고, 참가인원이 대규모였으며, 이후 그들이 단합하고 결속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다음 시대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되었다.3)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① 향리층의 분화조선시대에 들어 사족지배체제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고려시대 이래 호장들의 지방지배의 구심점이 되어온 읍사는 위축되고 그 대신 이방 중심의 작청을 기반으로 한 지방행정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작청체제로의 발전은 지방행정 실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전화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각 군현에는 안일방과 같은 형태의 원로들이 결성한 조직을 통하여 읍사에서 종래 수행한 지방사회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경주의 안일방은 17세기 중엽 향리들의 향역기피와 가반들의 번성으로 향리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져 안일방에서 규범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18세기 이후에는 향리사회를 주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주지역의 대표적 이족가계도 17세기 11개에서 18세기에는 9개로,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5개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족 안에 몇몇 특정가계들이 호장이나 이방 등의 중요 직임을 독점한다는 것을 뜻한다.한편 본래 같은 씨족이라 하더라도 이족과 사족이 공존하는 경우도 찾아진다. 이 때의 이족가계는 자신의 고정화되어 가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족계파의 족보와 합치려는 노력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들은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면서 사족의 차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주도적인 향리층 주변 집안의 경우 상당수의 이족집안이 상층부에서 도태되거나 끊임없이 새로 편입되어 여러 집안이 경쟁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지역에 따라 주도하는 집안과 상관없이 새로운 집안이 등장하는 한편 일부 집안은 향리직에서 이탈하기도 한다. 그 양상은 향리직에서 벗어나 유학층 내지 새로운 중간층, 평민층 등 다양한 신분으로 다시 분화되어 가는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결국 혈연에 기초한 신분귀속성이 상당히 산력의 증대와 수공업의 발달 등으로 생산력이 증진되고, 금속화폐의 보급과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세방법이 바뀌고, 상품경제 화폐경제가 발달하는 등 유통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이에 따라 공인 사상 객주 여각 등 새로운 상인층이 대두하면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2) 서민의 신분상승운동조선 후기에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정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서민들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서민들의 신분상승 욕구와 더불어 당시 정부의 사회정책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재정과 흉년 재해 등으로 인한 진휼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가 정책적으로 납속책을 실시하거나 공명첩을 발행하여 신분상승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적을 담당하는 적리籍吏와의 결탁 등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도 면역 내지 신분상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공인 또는 묵인하에 서민들은 신분상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서민의 자제는 향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조선 전기와는 달리 16세기 이후가 되면 군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또는 신분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향교에 입학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인조 22년(1644) 낙강교생충군법落講校生充軍法이 시행되자 양반들은 액내교생으로서의 입학을 회피하고 대신 서얼 평민의 자손들이 입학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 향교의 생도는 동재생과 서재생으로 신분이 구별되었으며 서재생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모속한 평민들로 채워졌다. 「교생」이라는 용어가 서재생만을 지칭하는 말로 고착화될 정도였다. 일정한 양의 돈이나 곡물 등을 납부하고 원납교생이라는 명목으로 이름을 교안에 등록하였는데 그 수가 한 군현에 무려 수백 혹은 수천에까지 달하였다. 全炅穆, 〈朝鮮後期 敎生의 身分에 관한 再檢討〉(《宋俊浩敎授 停年紀念論叢》, 1987)
    인문/어학| 2007.06.21| 10페이지| 3,000원| 조회(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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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회의 특징과 근세로의 시대 규정
    朝鮮社會의 특징과 近世로의 시대규정목차Ⅰ. 서 론Ⅱ. 본 론1. 한국사에서의 근세의 개념2. 고려-조선의 변화의 특징과 근세로의 시대규정3. 고려-조선의 일률적 중세구분에 대한 반론Ⅲ. 결 론Ⅰ. 서 론역사 연구에 있어서 시대를 구분함은 각 시대의 성격과 특징을 차별하여,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제사건들의 관계에 보다 명확성을 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내일은 오늘의 연속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역사의 변화에 어떤 구분된 시간 폭으로 특색이 발견된다. 물리적인 시간은 100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같은 것으로서 파악되지만 역사의 시간은 그 내용에 따라서 질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착안하여 각 시대의 내용을 구분하여 그 특색을 구분하는 것이 시대구분의 실익이며, 장기간의 시간 흐름을 단락을 지어 파악함으로서 역사의 발전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할 수 있음이다. 물론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한 과거나 인간의 제반행위를 탐구함이고, 그 주체는 당연히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좁게는 역사학자)이므로 시대구분의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현재의 사람들이 과거의 특정한 사실을 보는 관점을 담을 수밖에 없다.한국사의 흐름 중에서 조선사회를 근세近世라는 용어 안에 담아 두는 데에 대하여, 그 찬반을 넘어서 중세, 혹은 근대나 다른 독특한 시대로의 규정이 다양한 관점에 따라 존재할 수 있겠으니 여기서 근세라는 개념에 관계하여 조선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Ⅱ. 본 론1. 한국사에서의 근세의 개념역사를 고대 - 중세 - 근대의 개념으로 삼분三分하는, 과거 지배적이었던 서양의 시대구분 방법은 오늘날 다양한 관점의 논지로 모든 곳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특히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서 서양사와의 큰 차이로 인해 다른 개념의 용어를 사용하여 시대를 구분하는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 근세라는 개념은 일본에서 시대 구분을 할 때 제기되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대구분법을 그대로 옮겨와 적용할 수 없고 시대적 특성과 그 흐름이 다른 만큼 자국의 역사적 상황에 맞는 시대구분이 필요함이 당연하다. 한국사에서도 분명 그러한 사실이 적용되고 근세 개념이 도입되어 조선시대를 근세로 규정하고 있다. 중세로 평가하는 고려와의 차이가 분명한 조선을 근세로 평가하여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적 단계로 시대구분함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나 이 부분에 대해서 다양한 이견이 제시되고 있는 상태이고 이는 앞서 언급했던 일본사의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2. 고려-조선의 변화의 특징과 근세로의 시대규정정치적으로 조선은 고려의 문벌귀족사회가 양반관료사회로 변화/발전했음을 시사한다. 문벌귀족-무신-권문세족으로 이어지는 고려의 지배층은 왕조의 말기에 와서 지방의 신흥사대부층의 성장으로 변화의 양상을 띄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으로서 향리층의 성장에 의해 지방에서 중앙으로 관료로서 진출한 신흥사대부들은, 음서蔭敍와 공음전功陰田의 혜택과 폐쇄적 신분유지로 형성된 고려의 귀족지배층과 관료적 성격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크게 차별된다. 특히 고려후기의 지배세력은 권문세족들은 친원적親元的 성격으로서 과거무시의 철저한 음서혜택으로써 귀족성격을 지녔고, 조선으로 왕조가 변하면서 과거중심의 관료적 성격이 강화된 지배층으로의 변화가 명확하였다.고려의 문벌귀족들은 가문의 후광의 영향이 매우 높았고, 비교적 실력을 중시하고 음서보다는 과거를 중시했던 조선의 사대부들과 차이가 있었다. 고려는 소규모의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였던 데 비해 조선은 훨씬 많은 수의 가문에서 관료로 진출하고 있으니 이는 지배층의 확대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조선 역시 음서가 존재했지만 고려시대보다 축소되어 개국초기에 공신이나 3품이상 고관의 자손에게 그 혜택을 주었으며 후기로 오면서 점점 그 범위가 더욱 축소되었다. 또한 양반사회 내에서도 음서출신자보다 과거 경력의 관료를 사회 성격상 높이 평가했음을 살필 수 있다.경제적으로 우선, 조선 과전법은 양반에 대한 토지급여제도로서 고려의 전시과체제를 크게 탈피 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나, 이후 세조대에 직전법으로, 성종대에 관수관급법으로, 왜란 이후 녹봉체제로 변화하면서 수조권에 의한 토지, 농민 지배를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서 작용하였다.또한, 조선시대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고려시대보다 진전되어 양인자작농이 증가하였고, 말미암은 조선 농민 지위의 향상은 그만큼 조선사회가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사회신분면에 있어서 조선사회의 획기적인 변화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사회적으로 조선사회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배신분에 있어서 귀족적 성격의 고려 지배층이 관료적 성격의 조선 양반층으로 변화하였고 이는 분명 이전 사회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회신분에 대하여 조선사회는 양천제良賤制와 반상제班常制로의 성격규정에 대한 논쟁이 있어 관점에 따라 고려사회에 비한 발전적 측면의 양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양천제라 함은 조선사회의 신분구조를 양인집단과 천민집단으로 구분하여 양인이라면 누구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고 양인내에서의 신분이동에 제한이 없어 원칙적으로 일반농민이라 할지라도 관직을 획득하여 지배신분으로 변화할 수 있다. 때문에 고려사회의 신분구조에 비교하여 조선사회의 양천제적 성격은 진일보한 면모가 분명하다. 하지만 반상제로서 조선사회의 신분구조를 평가할 때, 법적으로는 양천제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명확하여 신분사이의 이동은 제한되고 철저한 차별대우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회의 신분구조에 비해 그 발전적 측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부분은 신분사적 측면에서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는 부분이나, 조선 전기와 후기의 성격이 달라 후기의 신분구조 변동과정에서 제신분층의 상향평등화현상이 나타났고, 설령 조선 전체를 통합적으로 살펴봤을때 반상제의 성격이 강하다 할지라도 농민지위의 향상과 천민의 양인화 현상이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는 고려사회에 비한 발전적 측면을 시사함이다.조선사회 농민의 지위는 고려후기 이래로 계속된 생산활분구조의 변동을 야기하였다. 폐쇄적 신분사회의 해체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근대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신분제의 종결을 얘기한다면, 근대의 선행기로서 근세사회의 중요한 변화의 측면인 신분제의 해체과정이 조선사회, 특히 후기에 걸쳐 진행되었음이다. 천민의 양인화 현상이 두드러져 이미 천민집단의 차별을 보여주던 부곡이 소멸하고 천민집단이 축소하며 군현제의 확립이 더욱 성실되어 고려사회의 지방통제에 약했던 측면이 개선되었다.조선시대의 노비의 존재에 대해서 근세 개념의 도입을 부정하고 조선사회의 발전적 측면을 격하시키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옳지 못한 발상이다. 혹여 서양의 고대노예제 사회와 비교한다면, 조선시대의 노비는 전혀 고대노예제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음이다. 조선시대 노비의 존재양태에 대하여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분류가 있으니, 외거노비의 경우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 상전의 토지 이외에도 타인의 토지를 차경하는 등 서양의 고대노예들과 비할 바 되지 않으며 그들의 수가 노비의 다수였다.) 또한 조선후기로 오면서 노비의 수는 점점 급감하였다.문화적으로 사상면에서 고려 후기 유입된 주자학은 조선의 정치이념에 활용되고, 학문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며 일상생활에도 유입되어 생활의 규범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고려의 훈고학적 유교와 불교 신앙이 병립해 있던 양상과의 판이함으로서 사상계의 큰 변동을 보여주며, 문화적으로 조선의 발전적 측면으로 이해 될 수 있겠다.이렇듯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이행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방면에 걸친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였고, 이 변화의 발전적 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고려-조선 1000년에 걸친 오랜 기간을 동일한 시대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적 단계로서 조선사회에 근세라는 개념을 통한 적절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3. 고려-조선의 일률적 중세구분에 대한 반론김당택은 자신의 논문에서 고려는 귀족사회가 아닌 양반사회이며 따라서 고려와 조선은 하나의 양반지배층 사회로서 같은 중세로 시로 분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고려를 역시 과거를 통한 관료 진출의 문,무 양반의 양반사회로 볼 수 있으니, 이는 조선과 동일하게 묶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시대구분을 세분화가 아닌 대분화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며 정치적 지배세력을 기준으로 한국사를 시대구분한다면 고려와 조선은 양반사회로 묶여 같은 중세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 왕조는 향리 출신의 중소지주인 사대부가 권문세가들을 몰아내고 세운 것이 아니라 이성계와 동조하는 문신들의 정권장악으로서 왕조개창으로 지배세력이 완전 변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근대자본제의 성격과는 달리하여, 시기적 구분으로 옛시대, 중간시대, 가까운시대라는 의미의 고대, 중세, 근대 개념은 한국사에 맞출 수 있다하더라도 그 성격에 대해서 지배세력을 기준으로 고대귀족사회, 중세양반사회, 근대시민사회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하였다.반론은 이러하다. 고려는 과거제의 실시에 있어서 조선과 많은 차이를 보여 실제로 무과의 실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라, 소수의 가문의 관직 독점 현상과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이 조선에 비해 월등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고려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의 경우 철저한 비관료적, 귀족적 모습을 보인 측면을 제시할 수 있겠다. 신라와의 차이를 이유로 고려를 신라와 같은 귀족사회로 묶을 수 없다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과의 차이를 무시하면서 고려를 조선과 같은 양반사회로 묶으려 하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로 가면서 신분구조의 엄청난 변화의 측면이 논지에서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조선의 초기와 후기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초기의 변화의 시작에서부터 창출된 결과로서 이해한다면 조선사회를 고려사회와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지배세력의 변화여부 뿐만이 아닌 다양한 제방면의 변화를 논지에 수반 시킨다면 조선사회가 근세로서 중세 고려사회와 시대구분됨은 더욱 명확해 질 것.
    인문/어학| 2007.06.21| 6페이지| 2,000원| 조회(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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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 2학년 사회 수업지도안(세안)
    Ⅰ. 사회과 교육의 성격사회과 교육은 올바른 사회 인식을 통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려는 교과이다. 사회과 교육은 사회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회과학으로의 지식으로 기본 개념과 원리, 탐구방법, 사회적 가치 및 태도, 민족사를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와 방법이 사용된다. 제7차 사회과 교육과정에서는 사회과를 “사회 현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사회 지식 습득과 사회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익히며, 민주 사회 구성원에게 요청되는 가치와 태도를 지님으로써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육성하는 교과”로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이를 사회과의 최종 교과목표 측면에서 다시 살펴보면 사회과는 건전한 시민적 자질 육성과 인간형성을 위한 교과로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사회과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전한 시민적 자질이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하는 시민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궁극적 목적과도 통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과를 본질적인 교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회과 교육과정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시민적 자질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① 폭증하는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를 수집, 처리, 활용하는 능력② 객관적인 정보와 가치 준거에 따른 합리적인 판단과 의사 결정 능력③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도덕성④ 국토와 지역,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공동체에 대해 헌신하는 태도⑤ 다원화, 세계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과 지구촌적 관점에서 세계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개방적인 태도이와 같이 사회과교육은 다른 과와 다른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사회과교육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은 ‘단일 교과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학교교육 전체의 지향’이며 동시에 ‘전체 사회를 위한 기획’이다. 이 점에서 사회과교사는 좁게는 교과 현상에서 넓게는 학교 현상과 사회 현상을 규범적향하는 시민은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특정의 신념을 가진 사람, 어떤 가치에 충실하고, 어떤 활동에 참여하며, 어떤 규범에 따라 행위하는 사람을 뜻한다. 두 번째로 사회과학의 탐구방식 습득을 통한 시민성의 함양이다. 이 목표는 사회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과학적 사고를 신뢰하고 학문적 지식을 강조하는 경향의 반영이다. 세 번째로 일상의 삶에 대한 적용이다. 자기 지배원리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항상 선택을 해야 하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생각할 때 사회과 지식은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핵심적인 자질이 된다. 여기서 사회과는 기존의 사회 체제와 구조를 비판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공동체적 연대를 모색하는 장이 된다.나. 총괄 목표사회과의 총괄목표는 다양한 목표요소와 그에 대한 견해들을 종합하고 있다.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에서 학년 수준에 따라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목표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일차적으로 사회 현상에 관한 기초적 지식과 능력을 비롯하여 기본 개념과 원리의 탐구능력을 기른다. 이를 통해 이차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특징과 세계의 여러 모습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며, 다양한 정보의 활용능력을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육성한다. 또한 사회과에서 요구되는 공동 생활 참여 능력 역시 지속적으로 길러주어야 할 목표로 제시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발전 및 사회, 국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 함양에 그 목표가 있다.다. 영역별 목표(1) 사회의 여러 현상과 특성을 그 사회의 지리적 환경, 역사적 발전, 정치?경제?사회적 제도 등과 관련시켜 이해한다.(2) 인간과 자연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장소에 따른 인간생활의 다양성을 파 악하며, 고장?지방 및 국토 전체와 세계 여러 지역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한다.(3) 각 시대의 특색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우리 문화와 민족사의 발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류 생활의 발달과정 과 각 시대의 시켜, 사회의 여러 현상과 특성을 그 사회의 지리적 환경, 역사적 발전과 관련시켜 이해한다.◇ 태도?가치?사회의 변화를 전망하려는 태도를 기른다.?사회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탐구 능력, 의사 결정 능력을 통하여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태도를 기른다.◇ 기능?조작?다양한 자연 환경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조사하고, 분석할 수 있다.?자연 환경의 요소와 인문환경의 각종 자료를 정리, 분석할 수 있다.?사회 생활에 관한 기본적 지식을 통하여 사회 문화 현상에 대한 기본적 원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중학교 사회과 교육과정의 지향점인식의 대상으로서 사회를 다룬다생활. 활동의 영역으로서 사회를 다룬다.▼▼사회 인식에 토대하여 시회 인식 능력을 형성한다.가치 및 태도, 행동 목표의 달성을 통해 시민적 자질을 육성한다.▼▼시간 의식, 공간 의식, 사회 의식의 총화로써 학습자의 사회 인식 능력을 신장한다.바람직한 시민의 자질을 육성한다.▼▼건전한 민주 시민의 자질 육성3. 중학교 사회과 내용 체계표인간과공간인간과시간인간과사회7학년지역과 사회 탐구, 중부?남부?북부 지방의 생활, 아시아?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오세아니아의 생활지역과 사회 탐구, 인간 사회와 역사, 인류의 기원과 고대 문명의 형성, 아시아 사회의 발전과 변화지역과 사회 탐구8학년현대 세계의 전개유럽 세계의 형성, 서양 근대 사회의 발전과 변화, 아시아 사회의 변화와 근대적 성장, 현대 세계의 전개, 현대 사회와 민주 시민우리나라 역사의 시작, 삼국의 성립과 발전, 통일신라와 발해, 고려의 성립과 발전현대 세계의 전개, 현대 사회와 민주 시민, 개인과 사회의 발전, 사회 생활과 법 규범9학년현대 사회의 변화와 대응, 자원 개발과 공업 발달, 인구 성장과 도시 발달, 지구촌 사회와 한국지구촌 사회와 한국조선의 성립과 발전, 조선 사회의 변동, 개화와 자주 운동,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민족의 독립 운동, 대한민국의 발전민주 정치와 시민 참여, 민주 시민과 경제 생활, 시장 경제의 이해 및 교수?학습 방법가. 지도상의 유의점사회 교과가 설정하고 있는 교육 목표를 제대로 달성사면서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학습할 수 있도록 교수?학습 방법상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1) 구체적 생활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생활에 유용한 기본 개념과 원리를 학생들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이를 다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사회과 수업에서는 사실 자체를 암기시키는 것보다는 사실들 간의 공통적인 속성을 찾 아 개념을 습득하고 그 개념들 간의 관계를 따져 원리나 법칙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험을 쌓도록 해야 한다.(2) 탐구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수업 과정이나 다양한 학습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사회과 수업에서는 사회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학습 동기를 유발하고, 지도 내용에 따라 관찰, 견학, 조사, 자원 인사 초빙, 인물 학습, 문답, 토의 등 다양한 학습 방법을 적용하 여 기초적 탐구 능력이 신장되도록 지도해야 한다.(3) 개방된 학습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사회과 수업에서는 창의적인 사고력을 신장하고 활발한 탐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학생들의 반응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4) 다양한 자료와 시사적인 자료가 활용되어야 한다.사회과는 복잡하고 가변적인 사회 현상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교과서 외에도 사진, 그 림, 지도, 통계, 연표, 문화재, 참고 도서, 실물, 필름 등 다양한 교수.학습 자료를 활용한 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인터넷) 및 국내외의 사회 변동과 사회 문제에 관한 시사 자료 를 학습 내용과 관련시켜 지도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깊게 하고 미래 지 향적인 사고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5) 학습 내용을 지역과 학교의 실정에 알맞게 재구성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학생들이 생활 주변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나. 사회 교과의 기본적인 수업 모형(1) 문화며, 이러한 신문을 교육적으로 효과 있게 사용하는 방법이다.(6) 웹기반 수업인터넷 활용수업으로도 통칭 되며 교과수업에서 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웹(WWW)을 도구로 활용하는 수업 유형이다.사회과 좋은 수업의 유형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교육과정 재구성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 +학습자 중심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 + 수업방법 개선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 + 평가 개선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 + 사회 체험 학습사회과 목표?내용에 대한 이해 + 기타 전문성 제고사회과 좋은 수업의 특징교사 개인 측면-열정(사명감/수어에 대한 열의)-방향성(목표/내용에 대한 이해)-수업준비(수업내용 재구성/적절한 수업방법 모색)사회적 관계 측면-동료와의 협의(교내/교외 동료 교사와의 협의)-학생과의 의사소통(학생에 대한 이해와 배려, 학생들의 의견 청취 및 존중)-학생의 참여유도(동기화 및 격려, 적절한 안내와 보상 및 평가)수업 결과 측면-즐거움(교사/학생 모두가 행복한 수업)-일상/지역사회와의 연관(학생들의 일상/지역사회 생활과의 관련)-일관성(수업 내용/방법/평가의 일관성)7. 사회과 좋은 수업의 유형과 특징Ⅲ. 교재 및 단원연구1. 교재: 중학교 사회 2(중앙교육진흥연구소)2. 단원명가. 대단원 : Ⅰ. 유럽세계의 형성나. 중단원 : 3. 중세 유럽의 변화다. 소단원: 1) 십자군 전쟁3. 단원설정의 배경(단원 개관)가.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충돌한 사건인 동시에 예루살렘의 영유권 분쟁의 성격을 가진다.나. 9?11 테러 이후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유의 십자군’을 언급하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와 전쟁을 치르고 이란과 마찰이 점증되는 등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갈등은 증 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중심부에는 예루살렘이 있다.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학습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문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즉,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일반사회의 문제 해결을 도출이 가능하다. 십자군 전쟁은 통합다.
    교육학| 2007.06.21| 15페이지| 2,500원| 조회(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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