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비평*페미니즘 비평=들어가는 말=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이 여성인 것은 어떤 특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 이러고 단언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자는 불완전한 남자 라고 믿었다. 존 던이 [대기와 천서 Air and Angels]를 썼을 때 그는, 형태는 남성이요 질료는 여성이라는 아퀴나스의 이론, 즉 우월하고 신적인 남성적 지성이 순응적이고 피동적인 여성적 질료에 형태를 새기는 것이라고 시사하였을 뿐 논박하지는 않았다. 아이스킬로스의 삼부작 [오레스티아 Oresteia]를 보면 아폴로가 제기한 논쟁을 놓고 아테나는, 모친은 그 어린아이에게 어버이가 될 수 없다고 하며 남자측의 주장에 승리를 부여한다. 지성의 남성적 원칙 승리는 감각적인 여성 퓨리들의 분노를 동원하여 부 가장적 문화의 자기 만족적 확실성을 교란시키고 여성작가들과 독자들에게 덜 압제적인 분위기를 창조하려 한다. 때로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기지를 사용하여 남성 지배적인 사고 방식을 해체시키려 하였다.=페미니즘 이론의 문제점=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아예 이론(理論) 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존재한다. 학문 세계에서의 이론 이라는 것이 종종 남성적이요. 심지어는 남성의 화신인 듯, 엄격하고 지적인 전위적 문학연구로서 나타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페미니스트들은 종종 남성 학문의 부정직한 객관성을 폭로한 바 있다.그 한 예가 프로이트의 이론인 (페미니스트들이 그 주제넘은 성차별 의식에서 나온다고 믿는이론인) 음경 선망 penis-envy'일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특질이라고 가정하므로 혹평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라캉 Lacan 과 데리다 Derrida 타입의 후기 구조주의 이론에는 매혹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이들이 남성적인 권위나 진실을 주장하기를 실제로 거부해서인지도 모른다. 본능적 충동에 관한 심리분석적 이론들은 몇몇 여성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남성 지배적인 문학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타파적이고 분명히 무정형적 -비록 소수의 페여성들이 본래 열등하다고 남자들이 믿게 됨으로써 가중되었다. 동등 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말로만 인정이 되고 진정한 동등권에 대한 요구는 저지되는 것이 상례이다. 동정적인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 자신이 여성됨의 진정한 실존적 가능성을 평가할 최상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성의 차이에 대한 대부분의 토론에는 다섯가지 주요한 쟁점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생 물 학경 험언 술무 의 식사회 경제적 조건생물학을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사회 생활의 중요도를 낮추는 주장은 여성들을 그들의 위치]에 붙들어 두기 위해 주로 남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여자는 자궁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란 말은 이 태도를 요약하는 것이다.반면에 몇몇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열등의식보다는 우월감의 원천으로 찬양한다. 여성의 특이한 본성에 대한 과도한 주장은 어떤 것이라도 남성 독단론자가 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입장에 도달할 위험을 안고 있다. 더욱이, 여자의 경험은 색다른 인지적, 정서적 삶을 포함한다. 여자들은 남자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으며, 중요하고 중요치 않은 것에 대한 색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다.세 번째 쟁점인 언술은 페미니스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데일 스펜더의 [남자가 만든 언어]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자들은 근본적으로 남성 지배적인 언어에 의해 압박 받아 왔음을 고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 작가들이 남자들의 언어 관장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여성적인 언술로 단순히 후퇴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전형적으로 강한 남자와 연약한 여자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여자들이 세뇌되어 왔다는 입장을 취한다.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심리분석 이론이 네 번째 쟁점 즉 무의식의 과정을 제공했다. 어떤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여성적인 것 을 남성적 언술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과정과 연관시킴으로써 생물학주의와는 완전히 결별을 했다. 자유로운 말장난을 조장하고 유도하는 것과 끝맺음 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고 여자들은 애초부터 종속되어 왔던 상투적 성 역할 체계에 의해 계속 강제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요한 개념 구분인 성별 sex'과 성 gender'을 사회과학에서 빌어 온다. 성별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나, 성 은 사회적 상황에서 얻어진 성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심리학적인 개념이다. 인류학자 마가체트 미드는 남자들이 평화적이고 여자들이 호전적이라는 의견을 보인 바 있다. 또한 작가들이 불의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고 남자들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여자들에게 정치적 인 의미에서 깨닫게 되도록 의식을 높이는 일에 몰두하였다. 또, 피압박 집단으로서의 여자들이 흑인들이나 노동 계급에 비교될 만하고 또 비교되어 왔다. 이런 정치적 페미니즘과 관련한 생각들이 어떻게 문학에 영향을 주는가? 첫째, 문학적 가치체계와 전통은 남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져 왔으며, 여자들은 그들 자신의 관심사를 부적당할지도 모르는 형태로나마 표현하느라 자주 투쟁해 왔다. 두 번째로, 남성 작가들은 독자들이 항상 남자인 걸로 간주하고 있다. 광고는 대중 문화 속에 뚜렷한 비슷한 예로 나타낸다. 전기 샤워기의 텔레비전 광고에는 여자가 나와 수건을 떨어뜨리는데 시청자는 이 여자의 나체를 아슬아슬하게 못 보게 된다. 이런 광고는 여성 시청자들을 공공연히 도외시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독자도 남자로서 읽도록 억압될 수도 있다.배러트는 성 표현의 마르크스적 페미니스트적 분석을 제시한다.첫째, 배러트는 남자와 여자가 문학을 산출하는 조건은 실질적으로 다르며 이것은 그들이 작품을 쓰는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 버지니아 울프의 유물론적 주장을 찬양한다. 이는 곧 해방이란 문화상의 변화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두 번째로, 성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어떻게 수작의 규범이 정해지는가에 영향을 준다. 세 번째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문학 작품의 허구적 본질을 감안하여야 하며, 작품 속에 성차별주의를 모두 찾아내서 모든 남성 작가들을 비난한다거나 성 문제를 일으켰다 하여지고 있다.이러한 전통을 쇼월터는 세국면으로 나눴다. 그 첫째로 여성다움 의 단계는 1840년부터 1880년까지로 엘리자베드 개스켈과 조지 엘리어트를 포함한다.다음 1880년부터 1920년까지는 페미니스트 단계로 엘리자베드 로빈스와 올리브 슈레이너를 포함한다. 이시기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분리주의자적 아마존과 같은 이상향과 부인 참정권론자 여성 동지애를 옹호하였다. 세 번째인 여성의 female'단계는 이전 단계들의 특성을 이어받아 구체적으로 여성의 글과 여성의 경험을 발달시켰다. 쇼월터에 의하면 레베카 웨스트, 캐더린 맨스필드, 도로디 리처슨은 이 단계에 가장 중요한 초기 여성 소설가들이다. 조이스와 프루스트가 주관적 의식의 긴 소설들을 소재로 여성의 의식을 잡았다. 저술에 관한 그의 견해는 최근의 페미니스트 이론들을 예기하고 있다. 그는 일종의 부정적 능력, 즉 확고한 견해와 의견 같은 남성적인 것들 을 거부하는 다양한 감수성 을 선호했다. 쇼월터는 리처슨이 무정형을 여성의 감정 이입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패턴을 남성적 편견의 징표로 보는 이론에 착안하여 그 자신의 무형적 토로 문제를 합리화한다 고 쓰고 있다.버지니아 울프 이후로, 성적인 것에 관한 노골적인 소재가 새로이 여자들의 소설에 특히 진라이스에 등장한다. 여성 특유의 불만을 표할 필요가 없어진 대학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의 여자들은 바이어트, 마가레트 드래블, 크리스틴 브루크로즈, 브리지드 브로피 들이다.버지니아 울프는 여자들의 작품에 대해 많이 썼고, 리처슨과 같이 현대 페미니스트 비평의 중요한 선구자이다. 그는 페미니스트 입장을 표한 적은 없으나 지속적으로 여성 작가들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고찰하였다. 울프는 여자들이 가지는 문학적 야식에 사회 경제적 장애가 항상 끼어 든다고 믿었다. 울프 자신도 그가 받은 제한된 교육 (울프는 예를 들자면 그리스어를 못 배웠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울프는 블룸즈베리의 양성 동체성 성 윤리를 취함으로써 남성 여성간의 투쟁에서 얌전히 빠져 나오는 방법을 철학이 무익하고, 희곡 적품은 재미없고, 시는 대부분 지루하더라도,공작 부인의 방대한 저술은 정통적, 열정적 기질로 발효가 된다. 매 페이지마다굽이치고 반짝이는 그녀의 변덕스럽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는 정신이상이거나 맹추 같은 요소와 함께 고귀하고 돈키호테식의 기개 같은 것이 있다.버지니아 울프는 공작 부인의 지리한 남성적인 작품- 방대한 저술 -이 장난기 어린 여성의 변덕- 변덕스러운, 굽이친다 -으로 밝아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마지막 문장은 특히 암시적이다. 고귀하고 돈키호테 같은 이란 표현은 남성적 속성같이 들리고, 반면에 정신이상이거나 맹추 같은 은 여성적으로 들린다. 대조적인 함축적 의미를 결합시킴으로써, 울프는 일종의 양성 공동체적 중성에 도달한다.여성 작가들에 대해 울프가 쓴 것 중 가장 영향력이 있고 재미있는 에세이는 여자의 직업 이다. 울프는 그의 활동이 두 가지 점에서 방해를 받았다고 보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대부분의 19세기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울프는 여성다움의 이데올로기에 구속을 받았다. 집 안의 천사 라는 이상은 여자들로 하여금 동정적이고 이타적이며 순결할 것을 요구했다. 저술할 시간과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자는 여성다운 계략과 아부를 사용해야 했다.두 번째로 여성의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금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경험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여성의 성적인 매력과 무의식의 부정은 그의 작품에서나 그의 삶에서나 극복되지 못했다.울프는 여자들이 마침내 남자들과의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성취했을 때에는 여자들의 예술적인 재능을 자유롭게 발달시키는 데 방해도리 것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프랑스 페미니즘 비평 이론=프랑스의 페미니즘은 심리분석, 특히 라캉의 프로이트 이론 제작업에 깊이 영향을 받아왔다. 라캉의 이론을 따르면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프로이트에 대한 적의감을 극복했다. 라캉 이전까지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특히 미국에서 조야한 생물었다.
1. 고대사회의 현대 교육 (삼국, 고려, 조선시대)태고시대의 한국사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중국과 문화적 관도를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여러 씨족 혹은 부족의 단위사회들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한국인들은 점차로 무속신앙과 개국신화의 사상적, 규범적 체제로써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단위를 형성하게 되었고, 후에 중국의 고대국가와는 다른 성읍국가를 한반도와 그 북방에 성립시켰다. 대륙의 중국과 문화적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교육부분의 변화는 정치, 종교 등의 형식적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4세기경의 고구려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진 7세기까지는 비형식적 부분이 민간의 교육을 지배하거나 화랑도 교육과 같은 전통적 제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통일신라에 이르러 국가의 제도적 체제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면서 학교제도도 관료체제와 연계되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나,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형식적 교육제도(학교제도)가 지배층이나 일부의 서민층을 위한 제도로서 본격적으로 정학한 것은 10세기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였다.그러나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불교가 정신생활을 주도하던 시기였으므로 유교사상과 더불어 발달한 중국식 학교제도는 (특히 고려시대의 초기에) 관료조직의 양성체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다. 제도적 형식으로는 유교에 의한 학교체제를 유지해왔으나 정신적 생활에서는 불교가 왕실과 민간의 교육적 이념과 생활을 주도하였던 셈이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十訓要)」에 의해 불교는 국교적 위치에서 국가적인 보호와 범국민적인 신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불교제전인 연등회와 팔관회가 고려 사회의 중요한 연중행사가 되었고 승려의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사원과 사탑의 규모도 웅장해졌고 고승(高僧)과 대덕(大德)이 배출되어 교화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또 이 같은 불심은 호국정신에도 발휘되어 16년에 걸친 「팔만대장경」의 간행과 의천(대각국사)의 「속장경」의 출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국리민족을 증진한다는 명분아래 왕실과 귀족계급의 비호를 받던 불교는 승려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국왕 또는 왕자의 승려화 현상에 따라 광대한 사원전을 갖게 되어 국가의 경제질서를 어지럽힘과 동시에 풍수지리설과 결부되어 오히려 국민생활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 은 모화주의(慕華主義)적인 유교관념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에 대항한 역성혁명이 성공한 결과로 건국된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장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던 유교적 관료제 사회였다. 조선왕조는 개국(1392)에서 일제에 의한 강제 합병(1910)에 이르는 500여년 동안 유교적 이념아래 동일한 사회제도적 기반 위에서 동일한 문화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조선왕조의 이러한 이념적 지향이 가장 잘 구현된 사회 제도 부분이 바로 교육이었다. 조선왕조의 교육제도는 그 운영방식에 있어서 현대사회의 공교육제도와 유사한 제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국가에 의한 학교제도의 운영, 정규의 교육과정, 전문적 교사의 지도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념과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신유학으로 알려진 성리학과 반상제도(班常制度)로 알려진 신분제도에 기초한 것이어서, 그런 만큼 교육은 형식적 부문에서나 비형식적 부문에서나 근본적인 한계, 즉 폐쇄적 도그마와 정태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학교제도를 중심으로 볼 때 조선왕조의 교육제도는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구분된다. 관학은 국가가 설립하여 운영하는 공립학교이고, 사학은 지방의 양반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성립된 사립학교이다, 이들은 모두 경학(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과 문학(문예창작에 관한 재능)의 교수와 학습을 통해서 장차 사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즉 유교적 교양인으로서의 선비를 양성하는 사회기구였다. 이 두 유형의 학교는 실제의 운영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설립의 목적과 사회적 기능은 기본으로 동일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성쇠와 사회적 역할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의 비중은 조선사회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계속하였다. 특히 국가의 중견 관료들을 선발하여 채용하는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부분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학제를 운영하는데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하기도 하였다. 국가는 조선왕조 내내 관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버리지 않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관학은 약화되고 사학의 역할과 비중은 증대되어 갔다. 즉, 국가는 관학을 부흥시킴으로써 교육제도의 중앙집권화를 계속적으로 도모하지만 오히려 실제에 있어서의 유교교육은 사학을 거점으로 하여 인문 중심의 개별화 방식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를 포함한 다양한 기회를 통해서 유교적 교양과 생활습속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갔다.교육제도의 형식적 부문만을 두고 말한다면, 구한국(舊韓國)의 말기에 고종황제가 교육입국조서 를 공포하면서 서구식 교육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이전의 전통적 교육제도는 통일신라시대의 신문왕 때에 국학 을 세운 이래 1200여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시대, 즉 고구려의 소수림왕 때(서기 372년)에 이미 중국의 교육기관을 수용하여 태학 을 세운 바 있었으나, 고려조와 조선조까지 연결된 교육제도의 기초가 된 것은 통일신라의 국학 으로부터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학은 고대 중국의 당나라에 있었던 국자감 을 본 따서 세운 교육기관으로서 후대인 고려조와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의 학교제도의 기초를 사실상 정착시킨 셈이었다.한국사회에서의 서구식 공교육제도는 조선조 말기에 소위 갑오경장(甲午更張) 에 의해서 진행된 사회적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기독교의 선교단체들에 의해서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정부도 육영공원 등의 새로운 학교를 설립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학교에 불과한 것으로 현대적 공교육제도의 전면적 출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부는 종래의 학교제도를 관장하던 예조를 없앤 후에 학무아문(學務衙門) 을 두어 국가의 교육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이와 동시에 학교제도와 연결되어 있던 과거제도를 폐지하였다. 학무아문은 고시를 발표하여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세울 것을 예고하고, 위로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평등교육의 실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고종 황제는 교육입국조서 를 내려 새로운 교육제도의 출발을 보게 되었으며. 후속해서 소학교와 사범학교의 설립에 관련된 법규를 포함하여 각급 학교의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였다.일제시대 교육의 운영권이 식민지 통치체제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중앙집권적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조 말기의 정부가 중앙 통제적 힘으로 사회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통적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전면적으로 개편 일을 일시에 단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도 한국인의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그들의 통치 목적에 맞게 운영하기에 매우 용이한 조선을 장악하였다. 어떤 학교를 세울 것이며, 어떤 대상을 교육할 것이며,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이며, 어떤 의식과 사고를 하는 인간을 기를 것이며, 어떤 의식과 사고를 하는 인간을 기를 것이며, 그리고 어떤 교육을 금지할 것인가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제국주의적 관료체제가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2. 해방이후에서 현재까지 한국 교육해방이후에 전통적인 교육의 중앙 통제적 체제는 미군정의 교육담당 고문관들이 교육자치제도를 강력히 권장함으로써 다소 이완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헌법 에 보장된 지방자치 제도를 근거로 하여 교육자치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1949년의 교육법 에서 마련되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6.25 동란에 발생하는 등 사회적,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 그 실시가 지연됨으로 인하여 교육자치제도도 함께 미루어졌다. 그 후 1952년에 교육법 시행령의 공포에 이어 처음으로 교육자치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주로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으로, 시군 단위의 자치제도였으며 중등교육은 자치권의 범위 밖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에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자치구역을 기초적 자치단체만이 아니라 광역적 자치단체에까지 확대하고 단체장을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등의 자치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체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교육행정의 비능률성, 교육재원의 낭비, 민도의 후진성이 그 이유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의 군사혁명정부는 교육행정을 지방행정의 체제에 통합시켰다가 1963년에 교육자치제도를 명목상으로 부활시켰다. 교육위원과 교육감은 사실상으로 임명되었으며, 시도별로 설치된 교육위원회와 그 산하에 있는 교육청은 자치조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앙 통제적 행정체제의 하부구조에 불과하였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권도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으로부터의 교육행정의 자율권도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1991년에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함께 실질적 교육자치제도의 부활을 보게 될 때까지 단지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을 뿐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 교육자치제도의 부활이라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기초 단위와 시도 단위의 교육위원회의 구성과 각급 자치단체의 교육장이 선출된다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자치단체는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실정이고,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원정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법규들은 중앙통제적 체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3. 한국교육의 미래앞으로 한국교육은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우선 앞으로 5년 내지 10년 내에 반드시 나타날 현상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교육현상의 변화이다.첫째로, 외압에 의한 제도교육체제의 변화, 즉 외국으로부터의 교육침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대학입시에 실패할까봐 겁이 나서 중학교 때부터 아이들을 빼돌리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렇게 안 될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올 것이다.
영화 속 video의 확장과 수용I. 서론1. 연구 배경 및 목적2. 연구 범위와 방법II. 본론1. 비디오아트의 출발 백남준2. 새로운 대안매체 TV와 쟝 뤽 고다르3.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Oberhausen4. 독립 영화의 산실 New York Film FestivalIII. 결론참고 문헌영문 초록영화 속 video의 확장과 수용I. 서론1. 연구 배경 및 목적이제 우리는 다양한 영상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한 가정에서는 TV와 컴퓨터를 통해, 거리에서는 광고 이미지들 속에, 각 지방단체들은 전에 없는 영화 페스티벌을 통해,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비디오를 통해 이미지는 우리의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우리의 눈을 붙들어매려는 치열한 이미지사이의 영역은 산업적인 차원에서 서로 교차하고 교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재생산하고 있다. 영국의 TV CF감독인 가이 리치(Guy Ritchie)는 그의 영화 R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에서 영화 속에 TV Commercial Film이 갖는 경쾌함을 유도하고 있고, 영화감독인 쟝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TV의 실시간 생방송을 통해 기존의 영화 틀을 벗어난 참신하고 혁식적 실험을 위한 TV 프로그램을 모잠비크의 TV방송사에서 제작했으며, 제3회 광주 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는 알라의 여인'들이 겪는 비극을 영화적인 작법으로 화랑에서 비디오의 형식으로 발표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미술가 중 가장 흥미로운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는 매튜 바니(Matthew Barney)는 신체의 변형을 통해 개인적인 신화를 표현하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로, 그는 조각·필름·비디오와 같은 미술 형식을 통해 정신과 육체간에 대치되는 강력한 힘을 개별적인 드라마로 제작,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다.한편, 영화계에서 독일의 Oberh과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비디오를 채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현재까지의 멀티미디어 미술은 주로 비디오 카메라, 비디오 프로젝터, TV모니터 등의 매체를 이용해 표현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멀티미디어 아트의 핵심으로 인식되는 비디오 아트는 1958년 볼프 보스텔(Wolf Vostell)이 Television De-Coll/ages'라는 제목의 미국 전시에서 TV와 여타 기계적인 도구들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던 것을 그 시작으로 볼 수 있겠지만, 현재의 멀티미디어 미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진정한 출발은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Wuppertal) 지방의 파르나스(Parnass Gallery) 화랑에서 여러 대의 TV를 기계적으로 조작하여 전시한 바로 그 시점일 것이다.이후 1960년대 동안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 작업을 통해 비디오의 라이브(생방송 또는 실시간 투사) 와 상호작용성(interactivity) 을 기존의 TV체제(기성의 영화이론을 배경으로 한 방송체제가 확립되어 있었고, TV를 통한 국가 규모의 미디어 통합과 지배가 실현되고 있었던)에 저항하는 요소로 보았으며, 이미지의 자유로운 처리를 통해서 비디오를 영상예술의 미디어로서 사용하고자 했다.예를들면, 백남준이 1974년에 제작한 TV-Buddha에서, 부처의 상징인 목조의 불상이 TV 수상기 앞에 앉아서 마치 모니터에 비쳐진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명상을 하고 있다. 목조의 불상과 모니터 속의 이미지는 휴대용 소형 비디오 카메라에 의해 라이브 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두 이미지는 인터랙티브 하게 연결 지워져 있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기도 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교의가 시각화되어 있는 듯 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부처는 자신을 비추이는 TV screen속 허상의 이미지를 거부할 수 없다. 유형의 만물을 상징하는 색(色)은 모두 인연의 소생이고 그 본성은 실제로 존재치 않으며, 공(空) 자체 그대로가 모든 법이iga-Vertov)의 결성과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72년 이후 지금까지 그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내에서 진보적인 작가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며, 꾸준한 극영화의 연출, 공동작업, 비디오매체의 실험과 TV를 통한 관객의 사회참여에 전념해 오고 있다.그의 TV에 관한 견해는 TV를 위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 뉴스나 스포츠 같은 실시간 생방송에 근거한 관객과의 소통의 도구로, 작가의 주장이나 표현의 전달을 위한 미디어로 파악했다. TV의 라이브 와 실시간 투사에 대한 견해는 앞에서 밝혔듯이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주된 주제였다. 예를 들면, 촬영된 후 편집된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드라마나 영화는 현장의 리얼리티보다는 몽타주된 리얼리티가 전해지기 쉬운 법이고, 스포츠나 뉴스의 실황중계인 경우 시간상의 편집이 배제되고 다양한 각도의 실시간 몽타주로 인해 더욱 생생하게 현장의 리얼리티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다르는 몽타주로 왜곡된 현실의 이미지보다는 실시간 방송을 통한 현장감이 훨씬 더 관객의 반응을 유도, 참여시킬 수 있고 또한 관객의 사회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의 이론을 적극 실천했다.예를 들어, 그의 Television에 관한 이론을 원문그대로 옮기자면;Principles of reflectionA.in a cinemapeople are many(together)to be alone in front of the screenB.in an apartment linked to a TV aerialpeople are alone to be many(together)in front of the screenThat's to say:set A: many to be(become)alone(cinema)set B: alone to be (become)many(TV)That's to say:{A= many one(alone){B= one(alone) many{) Colin MacCabe, Godard: Images, Sounds고 싶은 두 세 가지 것들 (서울: 한울, 1991) p. 50분단상황에서의 개인과 체제문제를 다룬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의 어제의 소녀 (Abschied von Gestern)(66), 36세에 요절한 뉴 저먼 시네마 의 대표주자이며, 멜로드라마적인 형식에 현대인의 소외와 절망을 주제로 차가운 영상이 돋보였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의 베로니카 포스의 절망 (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82){) 1982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 오지에서 촬영된 기인적인 연출 방법으로 화제가 된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의 아기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72)와 피치카랄도'(Fitzcarraldo)(82), 로드 무비의 거장이며 영상 시인이라는 평을 받던 빔 벤더스(Wim Wenders)의 도시의 알리스 (Alice in den Stadten)(74){) 1974년 베를린 영화제 비평가상 수상작, 파리/텍사스 (Paris/Texas)(84){) 1984년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황금종려상) 수상작와 베를린 천사의 시 (The Wings of Desire)(87){) 1987년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영화로 뉴 저먼 시네마 의 활동을 전세계에 알린 폴커 쉴렌도르프(Volker Schlondorf)의 양철북 (The Thin Drum)(78){)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주인공 오스카를 통해서 독일의 역사적 아픔인 파시즘의 실체를 우 화적으로 영상화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근 20여년 동안 오버하우젠 그룹이 만든 단편영화, 기록영화, 그리고 대중영화는 독일 영화계를 지배했으며, 이 현상은 파스빈더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뉴 저먼 시네마의 철학이나 스타일은 감독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우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영화 속에서 그에 본인이 직접 부른 노래에 영상을 가미한 이 작품은 마치 뮤직 비디오 같은 친숙한 방법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피필로티 리스트가 영상 예술가로서의 첫 출발은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시작되었다. 1993년 제 39회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그녀의 첫 작품이 대중에게 상영되었는데, 이 해는 영화제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는 시점이기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79년의 함부르크에서의 지나친 영화 작가주의 선언은 파격적이고 난해한 영상으로 인해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이에 영화제 측과 설립자 힐마 호프만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타 영상형식을 차용하거나 수용해서 62년의 'Oberhausen Menifesto'인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신봉 을 다시금 확인 하고자 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컴퓨터로 제작된 애니매이션 작품을 처음으로 허용하였던 1970년의 영화제 의도와 같은 맥락이었으며, 1991년 명칭을 International Short Film/Video Festival Oberhausen"으로 고치고 1993년 처음으로 video로 제작된 일련의 single channel 방식의 작품이 film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단순한 아이디어와 실행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89년부터 이미 비디오 아트에 대한 면밀한 자료수집과 작가 선별, 세미나 등의 5년여에 걸친 기획과 준비의 바탕 위에 video로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심사위원의 선별에 있어서도 뉴욕 근대 미술관(MoMA)의 비디오 부문 큐레이터인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을 포함한 일단의 뉴욕 화랑계의 큐레이터들과 비디오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피필로티 리스트의 작품이 관객에게 소개되었다. 이후 그녀의 작품을 선별한 큐레이터들에 의해서 새로이 떠오른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뉴욕에 소개되어 지는 것이다.1999년에 오버하우젠 영화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뮤직 비디오 경쟁 부문을 신설 다양한 영상매체를 포용함으로써 62년 오버하우젠
한국의 민화(民畵)1.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민화론(朝鮮民畵論)20세기 일본(日本)의 대표적 지성이었으며 미학자였던 유종열[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은 조선시대의 민화(民畵)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미학적인 성찰을 하고, 체계적인 글을 쓴 최초의 학자였다. 유종열전집(柳宗悅全集) 6권에 실려있는 불가사의(可思議) 조선민화(朝鮮民畵) 라는 그의 글을 통하여 유종열(柳宗悅) 조선민화론(造船民畵論)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나(柳宗悅)의 직관(直觀)은 이 그림(朝鮮民畵)이 대단히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무언가 신비로운 아름다움까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짜서 다시 바라보면 이 그림만큼 모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은 이 그림이 근대 적인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불합리성에서 이뤄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첫째, 아름다운 그림은 뛰어난 천재를 만나야 된다고 하는 일반의 상식을 우선 뒤엎는다. 그래서 이러한 화경(畵境)에 들어가면 천재나 범인이나 평등하게 되어버린다. 사실 재능이 있고 없음의 구별이 이 그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불가사 의(不可思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도, 그린 사람은 당시의 이름도 없는 화공(畵工)이 아닐까. 아무리 아름답고 또 진지하게 그려져 있다고 하여도 어디에도 이름 따위가 쓰여져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중략)둘째, 과학이 보급된 오늘날 원근(遠近)이 뒤바뀌거나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거나, 유강 (柔剛)이 같이 어우러지거나, 수평이 바로 수직으로 되거나 하여, 그것이 그대로 그려지고 있 기 때문에 상식은 이런 그림에는 조금도 통용되지 않게 된다. 즉 진위(眞僞)의 구별이 존재 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된다. 허황된 말 정도가 아니라 모두 거짓말 해 버리기 라도 하고 싶을 만큼, 조금도 진실을 상대하고 있지 않다.(중략)셋째, 직업화가였다면 칭찬을 받고 싶기도 할 것이며, 이것저것 있다.(중략)넷째, 이런 그림이 과연 아름다운 것인지, 추한 것인지 하는 판단도 화공(畵工)들에게는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민화(民畵)이니까 본인들도 처음부터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 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주의(主義)나 주장 따위가 있어서 의식적으로 이런 터무니 없는 화법(畵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유파(流派)에 속하는 그림도 아니다. 다 만 저절로 이런 구도가 되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 실정일 것 같다. 그러니까 고맙게도 아름답 다, 추하다는 갈등 따위를 모르고 또한 그 덕분에 그다지 갈피를 못잡거나 두려워 하는 일이 없이 그려버리는 것이리라.(중략)다섯째, 화제(畵題)는 대강 말하고 서재의 한 구석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가(畵架)가 중심이고 거기에 한적(漢籍)이 여러 질 쌓여 있고, 또 거기에 문방구(文房具)를 배열하거나 과일과 채소를 곁들이기도 한다. 필기장에는 글자가 씌어 있고 이것을 읽는 안경 도 있어서 독서인의 생활을 암시하고 있다.(중략)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종류의 그림에서 배우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가 무엇을 그 리더라도 구제받는 길이 있다고 하는 진리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면에 무 심(無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심(無心)은 순진과 가까운 뜻이 되기도 하지만 무심(無心) 이란 결국 아무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혀 있지 않은 것이다. (중략)2. 민화의 시대배경조선시대 5백년간의 나라 다스리는 이념인 국시(國是)는 유교였고, 지배계층은 사대부와 왕족으로 이뤄진 양반계급이었다. 양반계급은 중국적 유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으로 삼는 보수적이고 근엄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 양반계급의 생활은 조선시대 전기(前期)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으나 임진왜란(1592∼1598)이후인 조선시대 후기(後期)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미술발전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대부들도 미술이나 미술감각을 발전시켜 나갈 재력다고 볼 수 있다.즉 양반계급이 미술발전을 위한 후원자가 되어서 어떤 후원단체를 만들거나 도화서(圖畵署) 같은 국립미술기관이나 화원들에게 자극과 영향을 줄만한 입장이 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에 몰입하기도 하고, 문인화(文人畵)에 심취되기도 하였지만 직업화가나 장인(匠人)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이리하여 조선시대의 화공(畵工)이나 장인(匠人)들은 미적(美的) 감각(感覺)에 있어서 양반계급으로부터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조선시대의 미술, 특히 조선후기의 미술이 다른시대에 비해서 보다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민중의 감정도 유교적인 인생관과 도교적인 자연관 및 불교적인 내세관(來世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라 하겠다.그래서 유교적인 금욕주의와 중용사상, 도교적인 불로장생사상, 불교적 인과응보사상 등이 경제적인 생활조건의 빈약함과 함께 특출하고 특이하거나, 과격한 경향이나 수법을 억제 기피하였고, 전통적인 자연주의가 여기에 작용하여 거칠고다듬어지지않은, 즉 조야(粗野)한 장식이 없고(無飾), 화려함이 없는(無華) 조선적인 미술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이런 시대적,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발생하였고, 성장하였고, 발전한 것이 조선시대의 민화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의 민화는 조선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사상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 속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조형물(造形物)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민화는 조선시대의 역사 전통 문화 사상 경제 미술 사회 등과 긴밀한 상관성이 있다고 하겠다.3. 민화의 의미민화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있으며 저마다의 고유한 신앙과 생활풍속 및 민족의 미감(美感)을 보여주는 소박한 그림이다. 따라서 민화에는 피지배계층에 드는 절대다수인 백성들의 꾸밈없는 솔직함과 익살이 들어 있다. 즉 민중의 즐거움 죽음 삶 슬픔 사랑 미움 꿈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 즉 민화(民畵) 민간화(民間畵) 속화(俗畵) 민속화(民俗畵) 제절화(製節畵) 농민화(農民畵) 겨레그림 Folk Painting·Peasant Painting 등 많은 이름이 있다. 그러나 내용은 비슷하다.이름있는 화가나 문인이 그린 그림과는 달리 민화는 작가의 이름으로 활동무대를 알 수 없고, 그려진 때와 장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필요와 실용을 위하여 정통회화의 규범이나 화론(畵論)을 벗어나 독자적인 그림의 세계, 즉 화경(畵境)을 되도록 멋있고 익살스럽게 그렸다.양반계급의 장식화와는 다른 민화의 성격이나 의미는 민화의 형식적 특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말하자면 재료와 기술의 연구, 형식분석 연구, 도상학적 연구, 심리학적 연구, 문화사적 연구, 사회학적 연구 등을 통하여 찾아야 할 것이다.왕족이나 양반계급의 장식화와는 다른 민화의 성격이나 의미는 민화의 형식적 특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재료와 기술의 연구, 형식분석 연구, 도상학적 연구, 심리학적 연구, 문화사적 연구, 사회학적 연구 등을 통하여 찾아야 할 것이다.왕족이나 양반계급의 장식화는 도화서에서 정규적인 회화수업을 받은 화원이나 그에 준하는 화가들에 의하여 제작되었겠지만 민간의 장식화(또는 俗畵)는 대체로 떠돌이 화가나 지방에서 활동한 장인(匠人-지방의 그림쟁이)의 손으로 그려졌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민화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의 미감(美感)을 기준으로 하면 치졸하고 못나 보이지만 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함께 민중의 생활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민화는 민중 스스로의 건강한 생활공간을 창출하려는 자주적 문화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민화는 민중의식의 성장 속에서 떠오른 힘있고 자유분방한 대옹문화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민요나 민담, 탈춤이나 민중문화 예술처럼 솟아오르는 민중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과 같은 형식미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도 하겠다.4. 민화의 변천과 발전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특한 경제사상, 사상계를 지배하게 된 실학사상, 전분야에 걸쳐서 일어나기 시작한 문예부흥운동,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두 임금의 선정(善政), 민중의 권리신장, 예술가들의 자주적인 활동과 장인(匠人)들의 숫적인 증가와 활발한 활동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까닭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중국문화에 기울어져 있던 사대부계층의 외래전통문화보다는 북방문화전통을 고수해 온 민중의 문화(소위 Little Tradition으로 말해지는 소전통)가 비교적 자유롭게 전면(前面)에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궁중건물의 복구와 신축을 비롯하여 많은 건축물의 증가는 상대적으로 장식화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으므로 궁궐과 양반가(兩班家)에서 필요한 장식적인 그림을 더욱 많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현재 고궁(古宮)에 남아 있는 민화(이 경우에는 단순히 民畵라고 말하기 보다는 궁중장식화라고 해야겠지만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특히 십장생도(十長生圖), 일월오암도(日月五巖圖), 모란도(牧丹圖), 화조도(花鳥圖) 등을 보아서도 그렇다.따라서 필자의 의견으로는 조선시대의 말기에 가까워 올수록 조금은 속스러워 보이는 민화와 장식적 기교주의 화법으로 그린 궁중장식화는 서로 모방하고 영향을 주면서 그 저변을 확대하고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그 까닭은 어떤 문화나 어떤 예술행위도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없는 것은 없으니까 말다. 즉 서로 상대와 상관성을 유지하면서 자극도 받고 영향도 받으면서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조선시대 말기에 와서 가장 성장했던 民畵도 왕조의 몰락과 함께 갑자기 쇠퇴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초인 1910년대에 끝났다는 얘기다.그러니까 지금 남아있는 民畵가운데 秀作에 속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7, 80년전부터 2백여년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믿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급속히 변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우리 조상이 창작해 낸 문화유산인 民畵의 특성과 양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