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우리에게 있어 스페인은 축제와 예술의 나라, 한 때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했던 나라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의 문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인 유럽의 문화와는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바탕으로 나름의 문화를 창출해나갔다면, 스페인은 여기에 아랍 문화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동서양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스페인의 문화를 더욱 이국적이고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스페인이 겪은 역사가 긴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랬듯, 스페인 역시 고대시대에는 로마의 지배 하에서 풍요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로마가 멸망한 후에 이베리아 반도로 밀어닥친 서고트 족이 진출하였으나 711년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역점을 둔 것은 공납, 부역, 인두세의 수납이였다. 이슬람 세력은 사회나 정치, 종교 체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억압하지 않아 두 가지의 이질적인 문화 요소가 혼재되는 원인을 낳았다. 한편, 8세기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서고트족들은 국토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되고, 이것은 무려 수백년간 이슬람 세력을 밀어내기 위한 기독교 세력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이로써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던 스페인의 중세는 막을 내렸다. 이 시기의 문화는 스페인 문화를 구성하는 밑바탕이 되었고, 따라서 스페인의 문화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슬람 요소가 유입된 중세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Ⅱ. Reconquista 이전까지의 역사1. 선사시대스페인에서 나타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약 130만 년 전의 것으로, 그라나다의 오르세에서 발견된 가상의 인류화석의 진위성과 연대추정이 인정된다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스페인 선사시대의 첫 모습은 대략 35,000여년 전 아우리냐시엔세 초기 구석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시대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냥에 종사하며 동굴에 거사에 의한 스페인 점령은 1492년까지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어인에게 뺴앗긴 영토는 스페인 북쪽 아스투리아스 지방과 나바라와 아라곤 산간지방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 안에는 두 개의 스페인이 존재하게 되는데 무어인들의 무술만제국의 스페인과 기독교인)들의 스페인제국이 그것이다. 기독교인들의 8세기에 걸친 국토회복 전쟁으로 아랍인들이 반도에서 쫒겨나기까지 8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 두 제국은 어느 누구의 국경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계를 마주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면서 서로의 피와 정열과 지혜를 교환하며 그 당시 유럽에는 없는 문명과 문화 체험을 했고 그 흔적은 스페인과 유럽에 깊이 각인되었다.이베리안 반도로 들어온 무어인들은 다마스커스의 칼리프 지배하에 군주 아밀에 의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었지만 756년부터 후기 우마이야 왕조의 압데라만 1세와 2세의 노력에 힘입은 3세는 스페인의 꼬르도바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을 세움으로써 초기에 있었던 정치적 종속관계를 깨고 동방의 압바스왕조를 능가하는 독립적인 왕국을 세웠다. 이 때의 왕국 이름이 알-안달루시아국으로 유럽대륙 최고의 문화국가를 구축해냈다. 피정복자로서 절대 다수였던 스페인 인은 대체로 기독교도였으며 그 당시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에서 기독교화가 가장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알-안달루시아국에는 이슬람체제에 순응하여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기독교인들인 물라디에스 도 있었고, 이슬람문화는 수용하나 종교는 그대로 기독교를 고수한 모사라베스 도 있었으며 기독교 밑에서 살아가고 있던 무어인인 무데하레스 도 있었다. 물론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인 또르나디소 , 두 종교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사람인 에나시아도 도 있었다. 이렇게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지배자들이 개방성과 포용을 원칙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6. 국토회복전쟁 (Reconquista)의 시작(722년)스페인어로 정복 은 콩끼스따(conquista)이다. 여기의 다시 라는 의미의 접두사 R라곤 왕국으로부터 나왔지만 실현시킨 것은 까스띠야 왕국이었다. 까스띠야 왕국은 점차적으로 부근 왕국들을 흡수해 가면서 반도의 가스띠야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가스띠야가 스페인이란 나라의 요람이나 이상이란 생각이 스페인 역사에서 신화로 인식되어졌고 그것으로 인한 영향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1) 종교재판과 유태인 추방가톨릭 왕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여러 계층의 사상적 통합을 위해서 종족?종교 및 경제적으로 많은 장애요소가 있음을 인식하고 종교적 통일 방안을 모색했다. 가스띠야, 아라곤에서는 이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많은 개종자들이 있었으나 개종자들이 자주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고수하여 문제가 있었다. 아라곤 왕국에는 이슬람 교도가 많았고 까스띠야 지방에는 유태인들이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 기관과 왕실의 요직에 진출해 있었으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태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선조들의 피를 이어 받고 있었고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피의 순수성과 정통신앙을 의무화하기 위해 종교재판이란 미명하에 유태인을 살해하고 고문을 가하여 개종하지 않으면 이슬람교도든 유태인이든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다.1478년에 식스토 4세는 종교재판을 윤허했고 스페인 국왕의 칙령에 따라 강력한 종교재판 기관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서 1482년 사이 1년동안 가스띠야에서 2000명이 화형해 처해졌다. 그 후 1492년 3월 31일에 가톨릭 왕들은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가톨릭왕들에 의해 행해진 순수형통을 고수하기 위한 이 종교 정책으로 얻은 이익은 잃어버린 손해와 비교해 보면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 당시 스페인의 의사는 거의 모두 유태인이나 아랍인이었으며 그들은 재정 능력 또한 뛰어나서 스페인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다시피 했다. 즉 스페인은 앞으로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재능과 서비스를 잃어버린 셈이다.2)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정복가톨릭 왕들의 표현으로, 전쟁을 겪던 이 시기에 떠돌이 가수들이 대중에게 전쟁 소식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장르의 대표적인 『엘 시드의 노래』는, 12세기 중반의 작품으로 스페인 국토회복전쟁 당시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알폰소 6세에 의해 가스띠야에서 추방당한 대목에서부터 적들을 물리치고 두 딸을 나바라와 아라곤 왕자들과 결혼시키는 데까지 노래하고 있다.13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문인은 문학과 과학에 조예가 깊은 알폰소 현왕(1252~1280)으로, 『성모 마리아 송가집』을 엮었다. 14세기에는 알폰소 현왕의 조카인 돈 후안 마누엘(1282~1348)이 등장하여 일종의 인생 교훈서인 『루까노르 백작』을 지었다.이 외에도 비종교적인 문학도 있었는데, 14세기 무렵 이따 지역의 사제인 후안 루이스(1283?~1350)가 지은 『좋은 사랑의 서』가 있다. 이 작품은 자전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낸 문학적 이상과 세상사를 우아하게 조화시킨 일련의 패러디 문학의 표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당시 종교적인 문학이 주도하던 시대에 탁월한 중산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스페인 문학은 지역별로도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스페인의 까딸루냐 지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산층의 윤리적 가치와 사회 양상을 보여주는 문학이 탄생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라이문도 룰과 아우시아스 마치가 있다. 특히 아우시아스 마치의 연애시의 향기는 이후 스페인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스페인의 북서쪽 지역인 갈리시아-포르투갈 지역에는 서정시가 발달하였다. ‘깐띠가스 데 아미고’, 즉 친구의 노래로 번역되는 이 장르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애끓는 감정을 노래한 시이다. 이것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하르차보다 상징적인 요소나 묘사가 뛰어나고, 은근하고 애틋한 감정은 냉소적인 까딸란의 정서와는 다르다.2. 미술1) 선사시대의 미술전반적으로 대중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특징을 가진 스페인의 예술은, 미술에서도 그러한 면이 부각된다.보여주는 듯 하다. 이들의 건축술은 훗날 이슬람 건축 양식에도 가미되었다. 서고트 족의 건축물은 대부분 7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이슬람 교도의 침입 때 파괴되지 않고 남은 중앙 고원의 농촌 지대에 있는 소형의 교회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렌시아의 산 후안 데 바뇨스, 낀따니야 데 라스 비냐스의 산따마리아 교회와 오렌세의 산따 꼼바 데 반데, 사모라의 평면 십자가 형태의 산 뻬드로 데 라 나베 교회가 대표적이다.스페인의 독특한 건축 양식은 칼리프양식), 모사라베 건축양식, 무데하르 양식이다. 칼리프 양식은 아랍풍이 가미된 것으로 스페인에 정착한 무어인들이 창조한 건축 양식이다. 칼리프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꼬르도바에 있는 회교사원과 라 메디나 아사아라 궁전이다. 회교사원은 785년에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원래 이 곳은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교회를 세웠던 곳이다. 후에 여기에 정착한 회교도들은 굳이 메카에서 짓던 사원을 고집하지 않았고, 이민족들이 남긴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 심지어는 건축양식까지 고스란히 이용하여 동서양의 조화로운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건축 양식은 동서양이 혼합되었지만 사원의 기본구조는 전형적인 회교사원의 모습으로, 정원, 기도소, 종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분수가 있는 정원이 있다. 또한 기도소의 내부는 이중아치로 되어 있어서 낮은 천장이 줄 수 있는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기도소의 핵심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키블라는 신도들에게 알라가 있는 방향을 일러주며, 키블라 중앙에 자리한 미흐랍은 알라신이 현존하는 곳이라고 믿는 장소이다.무어인의 영토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무어인 지배 하에서 도망쳐서 무어인 이전에 스페인 땅에 있던 서고트 족의 건축 기술과 칼리프 양식을 결합하여 모사라베 건축양식을 만들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스페인이 무어인의 땅을 재정복한 뒤 기독교인들의 지배 하에 있는 무어인 건축가들이 그들의 건축 양식에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결합한 무데하르 양식을 개발했다. 이것은 주로 있다.
광복군의 창설과 군사활동1. 머리말중일전쟁(中日戰爭)이 점차 격화되어 가고 있을 때인 1939년의 국제정세는 독·이 군사동맹(獨·伊 軍事同盟)에 이어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을 체결하고도 쌍방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등 날로 그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와 주변정세의 변화는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하는 군사조직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였기 때문에 김구를 창설위원장으로 하여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조직되었다. 광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결전을 벌이는 길이 최선이며, 국제 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광복군의 창설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본 문에서는 광복군의 창설배경과 주요 활동, 역사적 의의 등을 알아봄으로써, 광복군의 투쟁정신을 알아보도록 하겠다.2. 광복군 창설 배경임시정부의 무장부대 창설계획은 임시정부 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12월 18일자로 임시정부는 군사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법안을 발표했다. 이중 육군임시군제 는 일종의 군사조직법으로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기초적인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군단을 최고 목표로 한 군대편성을 계획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계획은 당시의 조건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데 그 모태로 작용하였다. 그후 1936년에 광복군 창설계획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36년 11월 임시의 정원에 보고한 정무보고서를 통해 그 계획의 일면의 볼 수 있다. 당시 보고에서 우리의 광복을 완성하는 데는 적과 더불어 최후의 일전을 결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며 또 현하 국제정세는 일본과 더불어 전쟁을 개시할 시기가 임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군사에 대한 시설을 급절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고 募)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군사특파단의 활동을 통해 중국군에서 제대하였거나 군사활동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한인 젊은이들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하였다. 군사특파단은 광복군의 창설과 동시에 해체되지만 광복군 창설의 실질적인 준비작업으로서, 광복군 조직의 모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무장부대의 창설 계획은 임정의 여당인 한국독립당{)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우리는 독립운동 진영의 보다 단결된 역량이 요구되었다. 이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진영 3당이 통합작업을 전개하여 한 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3당 대표들이 1940 년5우러 합당을 합의하고 통합된 단체명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결정하였다.에 의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당책으로 장교 및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광복군을 평성할 것 을 당면목표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40년 초부터 중국정부를 대상으로 무장부대 창설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당시 중국 영토 내에서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는 임시정부로서는 군대편성을 위한 사전 조치로서 중국정부의 승인과 양해를 얻는 것이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편성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지출을 위해서는 중국정부의 지원과 협의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 군사위원회는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이미 1938년 10월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어 활동하고 있던 민족혁명당계의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무장부대의 지원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과의 교섭을 담당한 김구(金九)는 광복군의 편성이 중국의 항일전(抗日戰) 수행에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만약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으로 가서 원조를 요청하겠다 는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전개한 끝에 마침내 중국정부로부터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아냈다. 1940년 5월 임시정부는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 이란 구체적인 계획서를 중국정부에 제출하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0년 2월부터 구체적인 모금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김구의 『백범일지』의 기록에서 보면 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 준 돈 4만원을 다하여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라고 할 정도로 미주교포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한편 광복군 성립 이틀 전인 9월 15일 김구는 한국광복군 선언문 을 발표하여 광복군의 진로와 방향을 내외로 밝혔다. 여기서 김구는 광복군은 1919년의 임시정부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총통 장개석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국과 공동전선을 전개하여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고 그 목적과 임무를 밝혔다. 또한 광복군은 그 정신적 맥락을 1907년 8월 한국군대의 해산에 두고 있으며, 인적 맥락으로는 1910년대∼30년대의 만주에서의 독립군을 계승하였음을 밝혔다. 총사령부 성리식장에서 조소앙이 발표한 총사령부 성립보고 에서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날이 광복군의 창군일이라고 하여 광복군이 기본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계승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또한 총사령부 핵심간부들 대부분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출신들이었다.그러나 이날의 부대창설의 예하부대의 조직이 없는 총사령부의 발족에 불과하였다. 당시 중경에 거주하는 실제 군사력은 빈약하였으며, 총사령부의 인원은 서안(西安)으로 파견된 군사특파단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3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조건에서 출발한 총사령부의 첫째 업무는 부대편성이었다. 창설 당시의 총사령부의 조직과 인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부대편성은 3·3제의 원칙에 따라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의 6단(段)으로 편성하되 2년 안에 3개 사단을 만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실제 인원이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대로 부대를 편성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임시편볍을 사용하였다. 임시로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각 지대를 3개 구대(區隊)로 나누고 구대를 다시 나우어 3개로, 제5지대 대원들을 하급 간부로 하여 조직되었다. 성립 당시 제2지대의 인원은 80여명 정도였는데, 초모활동의 결과 1945년 3월에는 모두 185명으로 증가하였다.제3지대는 징모 제6분처가 발전하여 성립된 지대이다. 오랫동안 초모활동을 전개하던 징모분처가 제3지대로 정식으로 개편된 것은 1945년 6월 30일이었다. 김학규를 지대장, 박영준(朴英俊)을 구대장으로 성립된 제3지대는 1945년 3월 말 예하 인원이 11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4.중국군사위원회와의 관계어려운 조건 속에서 출발한 광복군이었으나 초기부터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창설 승인과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광복군의 활동을 통제하고 간섭하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지원과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제약요인이었다. 따라서 창설 당시부터 중국정부와의 군사협정문제는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되었다.임시정부가 중국정부의 군사원조를 받게 된 것은 광복군을 창설한 지 1년 2개월이 지난 1941년 11월 19일이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와 원조 한국광복군 판법(援助韓國光復軍瓣法)을 체결하기 이 규정에 따라 중국군으로부터 정식으로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중국군의 원조는 무상원조가 아니었다. 중국군은 한국광복군의 작전지휘에 간섭하고, 중·일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광복군을 중국군의 예하에 두려고 시도하였다.이는 중국정부로서는 전쟁 종결 후 한반도 장악시 예상되는 사태에 대비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한반도 진주시 중국공산당 지원 하의 조선의용군과의 예상되는 경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복군을 철저하게 중국정부 에하에 묶어 둘 필요가 있다고 본 국민당 정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이러한 지원조건에 대해서 임정과 광복군의 반발이 거세지자 중국정부는 1945년 4월 4일 새로운 지원법을 제정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광복군의 지휘권을 임정이 중국측으로부터 이양받는 것과 군사원조를 차관으로 바꾼 것이다.5. 제로 징모분처의 설치는 지대가 겸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대와 징모분처는 대체로 중복되거나 일치하였다.초모활동은 적지에 침투하여 추진되는 일종의 비밀 지하공작이었다. 따라서 공작활동은 조직의 안전을 위하여 점조직으로 형태로 이루어졌다. 점조직은 공작대원간의 횡적연대는 떨어지나 체포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 피라밋형의 공작체제를 활용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점조직형태의 공작은 공작원의 숫자가 적을 때, 피라밋형 공작체제는 상대적으로 공작원이 많을 때 조직적 활동에 유리한 공작형태라 할 수 있다. 어떤 조직형태를 취하든 초모활동은 많은 위험이 따랐다. 이러한 끊임없는 초모활동으로 1년 만에 10배 이상의 광복군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고, 해방직전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하는 한인군인과 학도병을 모집하여 대략 700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초모활동 이외에 또 하나 중요한 활동은 선전활동이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주요한 당면공작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광복군 성립 초기부터 나타났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추진하기 위한 담당부서로 총사령부 정훈처 산하에 선전과를 설치하였다. 광복군의 선전활동의 기본방향은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1945년 5월에 발간한 정훈대강 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자는 선전활동의 기본방침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시하였다. 1국내의 대중과 긴밀한 연락으로 지하군의 조직을 촉성한다. 2적구(敵區 )내의 동포와 일본군의 한인사병과 연락하여 탈출, 투항을 진행한다. 3내외 각지의 혁명청년과 한적포로를 광복군의 기치하에 집중한다.광복군의 선전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1941년 2월 광복군의 기관지로 발간된『광복』은 광복군의 활동과 임무를 동지·동포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 일종의 선전지였다. 『광복』은 광복군의 작전지역이 중국임을 감안하여 중국민중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소개하고, 한·중 공동전선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한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방송활동과 선전전단의 살.
Ⅰ. 원세개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허난성[河南省] 샹청현[項城縣] 출생. 청?일전쟁 전에는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수완을 발휘했고 이홍장(李鴻章)의 신임을 얻어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서 서울에 상주하면서 조선의 내치와 외교를 간섭, 속국화하려 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군사제도에 근대적 개혁을 단행, <신건육군(新建陸軍)> 을 조직했다. 이것이 곧 뒤의 북양군벌(北洋軍閥)과 그의 정계진출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이때 그가 양성한 부장(部將)들이 중화민국 이후에도 북양군벌의 수뇌가 되었다.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뒤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隸總督兼北洋大臣)이 되어 자신의 세력을 강화?확대해갔다. 러?일전쟁 뒤 그의 세력확장에 대한 만주인(滿洲人) 관리들의 견제로 한때 물러나야 했지만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다시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11년 11월에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淸)나라 정부의 실권을 잡았다. 12년 2월 난징정부[南京政府]의 양보를 받아내어 청나라 황제의 퇴위와 동시에 임시대총통이 되면서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그 뒤 위안스카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배경으로 혁명의 성과를 무력하게 만들어갔다. 대총통의 권한을 제한시키려는 의회의 움직임을 국민당 수뇌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는 것으로 견제했고, 나아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 2 혁명>을 무력진압했다. 13년 10월에는 정식으로 대총통이 되어 국민당의 해산을 명령하고 동시에 신약법(新約法)을 공포, 독재를 강화했으며 15년에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시작했다. 그의 정부에는 자국의 이권을 위한 많은 외국인 <고문>이 있었는데 이들이 제제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한 데 대한 중국 내셔널리즘의 고양(高揚)과 15년 말의 윈난봉기[雲南蜂起]를 계기로 각지에서 일어난 반원운동(反袁運動)이 확대되자 열강도 제제운동의 취소를 권고하게 되었고 마침내 16년 3월 위안스카이는 제제의 취소를 선언했다. 그 뒤 토원군(討袁軍)이 각처에서 계속 일어나고 <제 3 혁명>이 발발한 가운데 죽었다.Ⅱ. 줄거리원세개, 우리에겐 위안 스카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인물은 어딘가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구석이 잇다. 교과서에도 두 번쯤 나오지만 그 등장은 아주 짧다. 갑신정변 대목에서 한 번 등장하고, 중국사에서는 신해혁명 때 손문에게서 대총통 자리를 가로채는 인물로 등장한다. 위안 스카이라는 이름 때문에 만주족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또 중국의 어느 군벌쯤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하지만 그는 우리와 꽤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스물넷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위세를 떨치면 몇 년 동안이나 고종을 협박했던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화교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많은 중국 음식점과 자장면의 토대가 실은 그가 이끌고 온 중국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개인사만 훑어보아도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과거에도 떨어진 주제에 삼촌 끈에 매달려 벼슬자리를 얻고는 조선을 발판으로 승승장구하여 총독, 군기대신, 대총통, 그리고 중화제국의 황제까지 된 풍운아였다. 거기다 이홍장과 서태후의 곁에서 아첨과 모략을 일삼으며 배신과 결탁을 되풀이한 중국 현대사 최고의 기회주의자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남긴 무시 못할 업적들도 많다. 그는 중국에 현대 적인 군대를 만들어 훈련시킨 군사 전문가였으며, 서구적인 학교 교육을 보급하고, 수많은 기업을 일으켜 개혁의 선봉에 선 인물이기도 했다.원세개는 본래 만주족에 충성한 한족 명문가 출신이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삼촌의 수양아들이 된 서자였지만, 아주 젊은 나이에 출세해 아홉 명의 첩과 17명의 아들, 15명의 딸을 거느린 가부장적 가장이었다.원세개가 태어난 1859년의 중국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와 같은 청의 전성기는 다 지나가고 내부의 모순과 열강의 침략으로 쇠약해진 종이 호랑이 신세였다. 그의 유년기는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던 중국이 자기 반성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는 양무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숙부는 양무운동을 추진한 증국번, 이홍장 밑에서 일하던 관원이었다. 만주족이 장악하던 조정은 한인 관료의 등용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으려 하지만 더욱 거세진 열강의 침략은 막을 재간이 없었다.원세개는 이런 난세를 이용해 출세한 인물이다. 과거를 통하지 않은 유생이 혼란의 틈을 비집고 올라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뜨거운 야심과 정세를 보는 재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무기 삼아 혼란기의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는 개혁성을 가지면서도 음모와 결탁에 능했고, 적절한 인맥 관리를 통해 벼락출세를 했다. 원세개, 증국번, 이홍장과 더불어 중국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보여주는 인물이다.이것말고도 우리가 그에 대해 좀더 알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조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의 벼락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갑신정변을 군대로 짓밟은 장본이자 고종을 핍박한 그를 통해서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재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중국은 조선에 대해서는 다시 열강의 노릇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원군은 집권과 함께 쇄국정책을 내세웠지만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조선 후기의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은 모두 원세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참패함으로 수천 년을 이어온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기까지 그 최후의 고리에 원세개란 인물이 자리잡고 있다.원세개의 활약은 조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청일전쟁 이후 원세개는 북양 신군이라는 군대를 통해 화려하게 재기한다. 군대의 힘은 난세에 가장 큰 배경이 되는 법이다. 원세개는 군대 안에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결국은 이홍장의 자리였던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을 거쳐 청의 최고기구인 군기처까지 진출한다. 입헌유신파인 강유위와 양계초의 편에 서는가 싶더니 재빠른 형세 판단으로 서태후 편으로 돌아서고, 결국은 군대를 배경으로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고 황제까지 되는 극적인 인물이며 20세기 초에 중국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직 제한적이다. 중국사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잇지만 대부분 근대사는 청의 전성기인 당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끝나고 현대사는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이 경합을 벌이는 1920년대부터 시작한다. 백 년 가까운 시간의 역사가 파묻혀 있는 것이다. 이 백 년은 태평천국의 난부터 시작하여 중화민국 초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세 인물을 꼽으면 바로 증국번, 이홍장, 원세개일 것이다.이 시기에 중국이 스스로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오랜 전통을 되살려 새로운 시대를 잉태시킨 힘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 이 시기를 다시 보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변화는 항상 그 전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원세개를 이해하는 것은 그런 과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더구나 원세개는 우리와 아주 잔혹한 고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홍수전 - 유토피아를 꿈꾼 태평천국의 지도자태평천국을 이끈 홍수전은 1815년 1월 1일 아버지 경양의 5남매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씨 일가는 객가로서 당시 객가의 어려운 살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난한 이주민들은 홍수전을 유일하게 공부를 시켜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홍수전은 그런 부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과거 시험을 떨어지게 된다. 과거시험에서의 낙방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결국 세 번째 낙방으로 그는 열병을 앓게 되었고 그 때 꾼 꿈이 그의 이후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 그 꿈은 금발의 천부가 그에게 칼을 쥐어주며 정의를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수험차 광주에 왔을 때 『권세양언』을 손에 얻게 되고 그 책의 내용과 자신의 환몽간의 유사함을 알게된다. 그는 자신에게 천부와 천형이 계시를 내린 것이라 확신하면서 배상제교를 창설하게 된다. 이후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그의 사촌 홍인간과 풍운간, 이경방이 함께 하였다. 그러나 홍수전의 고향에서의 신종교운동으로 마을 안에서 고립당하였고, 그 가장 큰 이유는 우상숭배에 대한 배척이었다. 그들은 타향으로 포교활동을 나섰지만 창교한지 4년이 지났는데도 여비를 원조해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후에 그들이 모은 배상제교이 신도들은 주로 객가들과 같은 극빈농들이었다. 이들은 청말기의 사회경제의 붕괴와 영국과 같은 서방세력의 침투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더 이상 한 곳에 머물 데가 없는 이들이었다. 또한 후에 합세하게 되는 양수청과 소조귀 등에 의해 배상제교가 그리스도교와는 격차가 벌어진 토속적인 정치적 종교로 변질되고 난 후에 그 형세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들은 홍수전을 군주로 삼아 천하를 취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는 1850년에 들어서 거병 준비를 시작하여 마침내 1851년1월에 걸쳐 거병을 일으킨다. 거병 이후 그들은 상당한 세력을 행사한다. 여러 사람에 의하면 그들은 종교적인 기치아래 그 전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청군들은 그들의 기세에 한껏 눌렸다는 진술도 하였다. 극빈자들의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기독교와 같은(물론 나중에는 변질되었지만)사상체계가 그들에게 대단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들은 남경에서 그 근거지를 잡고 ‘천경’이라 칭한 다음 자신들만의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홍수전의 초창기 청교도적인 의지와는 달리 이미 한껏 변질된 그들은 청 정부와 다를 것 없는 정부를 세웠다. 또한 홍수전은 신비주의적 성향이 되어 천경의 궁전 깊숙한 곳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책에서 묘사된 것을 보면 ‘용을 수놓은 황금색의 옷을 걸치고 16명이 메는 장려한 금색의 가마에 단정히 앉아 성밖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징과 태고 소리에 둘러싸여 만 여의 호위대를 이끌고 남경에 입성했다.’ 도대체 왜 홍수전은 초기 자신이 내세웠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도덕관에서 이처럼 사치스럽게 변질된 것일까? 정말로 그들은 지상에서의 천국을 세우려는 것이었을까? 그 처음 목적이 어찌되었든 결국 그들이 세운 국가는 백성들의 천국이 아니라 그들 주도 세력만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그들이 내세우는 사상적 배경이 부실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평등의식과 같은 부분이나 여러 가지 도덕관 등이 언뜻 보면 당시 사상적인 면에서 발전인 듯 보였으나 그들 자신의 태도에서 일관되지 못함을 보인다. 또한 사상적 내용 자체도 뒤섞이여 일관되지 못함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었다.태평천국의 붕괴의 원인 중에는 서양열강들의 청국에 대한 야욕도 포함된다. 당시 서양제국주의 세력들은 청에 대한 이권다툼이 한참이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무역에 대한 이익을 위해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영국은 승리하였고 한껏 자국의 이익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애로호 사건으로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태평천국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읽고전쟁과 평화라는 책을 읽으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솔직히 앞이 까마득하였다. 책의 내용이 어려울 거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한 번 읽어봐야지 했으면서도 게으름 때문에 제대로 한 번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수년간 미루고 미루어 왔던 일을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전쟁과 평화는 1805년 러시아와 프랑스 간에 일어났던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의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은 4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으로는 1권과 2권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러시아 밖에서의 전투를 그리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러시아내에서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그러한 내용들을 서술하면서 역사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1805년의 제1차 나뽈레옹 전쟁 직전부터 1812년의 대 나뽈레옹 조국 전쟁, 1825년의 이른바 제까브리스뜨 들의 혁명 운동을 낳게 한 자유주의적 사회기운이 팽배하기 시작한 1820년까지의 15년 동안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재현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보로지노 벌판에서의 노·불 양군의 대회전, 나뽈레옹의 모스크바 점령, 모스크바의 대화재, 프랑스군의 퇴각 등 러시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대 사건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유주의 그리고 합리주의 개인주의 와 인간주의가 그 바탕이 되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는 특이할 만한 것이다. 그 때까지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독립과 자유에 대한 희망이 불타오르고 이에 대한 요구가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문학 작품 속에서의 자유주의는 국민들의 요구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야기 할 것은 전쟁과 평화라는 책의 줄거리를 쭉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안드레이, 피에르, 나타샤에 관해서 생각해보고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삶과 죽음 전쟁에 관해서 말해보기로 하겠다.첫 장면에 사교계의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나타샤, 안드레이, 그리고 그의 친구 피에르가 이 책의 내용을 이끌어 나간다. 나타샤는 열렬한 나폴레옹의 팬이지만 전쟁에 나가서 안드레이를 간호해 주다가 안드레이를 사랑하지만 또 다시 전쟁터에 나간 안드레이는 사망하게 된다. 안드레이는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주의적이며 자부심이 강한 완벽주의자, 또 '피에르'는 모스크바 굴지의 자산가 베즈호프 백작의 사생아였지만, 백작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전 재산을 상속받고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순박한 공상가이며 인생의 목적과 삶의 철학을 탐구하는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이들이 이끌어 나가는 내용은 그야말로 우리가 느끼는 삶에서의 느낌과 거의 같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이 삶에 대한 관조가 다르다. 안드레이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나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만삭이 다 된 부인을 아버지와 누이 마리아에게 맡기고 전쟁에 나간다. 그러나 아우스테리츠 결전에 패배하고 중상을 입게된다. 그가 전쟁을 나가고 싶어했던 이유가 전쟁이라는 것은 무한한 미래와 희망 그리고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패배로 그것은 절망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은 안드레이가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두 세력이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전쟁이 났을 경우에 그것을 얻지 못한 쪽은 비참한 패배와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안드레이는 그것을 본 것이다. 이 것을 경험하고 난 후에 러시아로 돌아온 안드레이는 아이의 탄생과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심각한 고뇌에 빠진다. 탄생이란 것은 무엇이며, 죽음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보이는 봄의 생명력이란 모두 거짓이며 허상이라고 말하며 전투에서 악인을 죽이는 것은 마땅하고 생각한다. 또 다시 전쟁에 나간 안드레이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안드레이는 죽음을 앞두고 전에는 죽음이 두려웠으나, 이젠 더 이상 불안과 초조함이 없고 모든 게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홀가분한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드레이의 친구 피에르는 안드레이와는 다른 삶에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에르는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하며 숭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지자 이것은 사라진다. 안드레이와는 다르게 피에르는 인생의 허무함과 절망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사는 것이 그 목적이다라는 것을 배웠다. 즉 안드레이는 삶의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피에르는 그렇지 않다. 사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나타샤는 어쩌면 비 인간적이며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전쟁소설에서 생명력을 불어녜어주며 이것을 활동적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안드레이를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피에르와 결혼하기 때문에 지조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나타샤는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사냥을 하며 춤을 출 줄도 아는 낭만적인 여인이였다. 그러나 안드레이를 간호하는 면에서는 모성을 보이기도 했다. 나타샤는 여성성과 모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보통 여성은 한 가지 면에만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나타샤의 경우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책의 한 장면에서 찾아보자 무도회의 기쁨, 크리스마스날 밤에 눈 덮인 숲을 썰매로 달리는 정경, 오페라 극장에서의 매혹적인 미소에서 연인 같은 그녀의 모습과 포근함을 느끼며 빈사의 연인을 간호하면서 느끼는 사랑과 괴로움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나타샤의 모습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현재의 여성들은 그냥 단지 남성 우월주의를 반대하며 여성성만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