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공과대학 卒(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svp 교육 레포트 )이재훈서론1.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이름이었다. “비통의 강”을 건널 때 만나는 늙은 뱃사공 카론. 그의 이름이 왜 이 책의 제목으로 쓰였을까 하는 의구심에 책장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였던 내 어린 날이 생각 나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지만 비통의 강을 건널 때 혼령의 운반비로 동전 한 잎을 받는 다는 욕심 많은 늙은이라는 점과 배 삯이 없으면 지옥으로도 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제목인 신국부론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어렴풋한 생각이 들고 있었다.비슷한 사고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입관(入棺) 할 때 시신의 몸 위에 꽤나 많은 돈을 올려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돈이 장의사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쯤은 우리네 범인(凡人) 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죽은 사람에 대한 애석함과 자신의 미안함이 결부되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것일 것이다. 또한 미신이지만 저승 갈 때 노잣돈이 필요하다는 카론의 신화와 일맥상통한 우리의 미신을 상기하여 볼 때 어딜 가나 망자에 대한 생각은 비슷함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돈으로 상징 되는 시장의 원리는 저승에서도 적용이 될 만큼 익숙하고 우리가 발전을 위해서 지켜 나아가야만 하는 기본적인 원리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다.또한 이런 기본적인 시장의 원리를 토대로 저자는 한 나라의 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살펴보고, 이 두 가지의 경제 주체가 힘을 받고 상생하려면 국민의 정서와 의식이 발전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과거 자유방임주의가 지배하던 시절 가진 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인권을 무시하자 정부는 다양한 규제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의 조율을 시작 하였다. 오로지 성장만을 위한 시장이 아닌 적절한 분배를 추구함으로써 약자에겐 큰 보호막이 생성 되었고 그들은 정부의 정책에 쉽게 동의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을 받은 정부는 “경제는 시장의 흐름에 따른다” 라는 진리를 무시하고 “시장보다 강한 정부” 라는 믿음으로 터무니 없는 규제를 실시하여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이 책은 국가의 발전을 결정하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정부 등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요소들이 시장의 원리에 기본적으로 충실함으로써 국가의 발전과 평등 역시 가능하다는 “신국부론” 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본론2. 중학교 때 읽었던 김승옥 님의 “서울 1964년 겨울” 가 생각이 났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우리나라의 암울했던 과거를 알 게 해준 소설이라는 점과 그 속에서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알 수 있었던 작품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의 엄청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점과 다신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 게 해주었다. 또한 우리의 발전은 결코 운으로만 이룬 것은 아니며 뛰어난 적응력과 상황 판단을 통한 과감함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찬 가지로 잘못된 판단이 이어지게 되면 국가는 한 순간에 경제적인 파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국부론” 에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 과는 반대의 의미인 “보이는 손” 은 시장을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볼 때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으며 규제의 효율성과 한계성이 명확해야 한다.21세기의 부국들의 규제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첫 번째 시장친화적인 정책, 두 번째 정부 정책의 일관성, 세 번째 개방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생산성의 증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시장친화적이지 않는 정책들, 예를 들어 영국의 붉은 깃발법 이나 미국의 가격 통제법 등은 실패하였고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결국 선진화된 경제를 토대로 부강한 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시장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유태인이 어느 마을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어떤 나라의 사람이 와도 걱정을 하지 않지만 한국인 1명이 장사를 하러 오면 망했다고 탄식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인 2명이 장사를 하러 오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고 한다. 유럽 배낭 여행 때 비행기 옆에 앉았던 분께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다른 외국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자체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국인 서로 경쟁이 붙어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싸워서 결국은 둘 다 망한다는 것을 한국인인 내가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을 리가 있었겠는가? 나도 이런 한국인 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남이 잘되면 축하부터 먼저 해주는 것 보단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게 대부분의 한국인 인 듯 하였다. 흔히 “영웅을 못 만드는 나라” 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들의 시선에선 기업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약 삼성이라는 회사가 대한민국보다 뛰어난 의식이 갖춰진 선진국에서 경영을 하게 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비난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다. 뛰어난 기업이건 사람이건 나보다 뛰어나고 발전 가능성이 있으면 비난하기에 앞서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국민, 정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도요타 자동차의 과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기업의 경영체제에서 가족경영이냐 전문경영이냐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사람에게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줘서 주주와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인 제도 마련과 국민의 전체적인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여야만 한다.3. 세계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치들이 개발 되었고 10년 동안 변하던 강산과는 달리 이제 하루면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역동적이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직면했음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성장보다는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였던 정권으로 인해 경제는 힘들어 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3류 정치는 아직도 기업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또한 최근 유가는 폭등하고 선진국의 뛰어난 기술과 신흥 개발도상국의 저임금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포함 할 수 없는 샌드위치 형태로 위험한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위험을 슬기롭게 넘어가는 방법은 시장 경제에 힘을 실어주어 스스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게 하여 최고의 이익을 남기게 하는 방법을 펼치는 것이다. 불합리한 국가의 규제를 없애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스스로 경쟁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우게 하자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님의 메기론과 같은 의미로 항상 경계 하고 누군과의 치열한 경쟁을 토대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때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결론사촌이 땅을 사명 배가 아파야만 하는 것인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균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정서는 경제 주체에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 역시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 기업과 정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시장보다 강한 정부” 는 있을 수 없다. 자동차를 처음 개발하고도 귀족의 예법과 과거에 얽매인 사상을 중시하는 것이 바탕이 된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압박으로 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긴 영국처럼 현재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목적의식을 바로잡고 깊게 생각해볼 일이다.우파, 좌파 등 원론적인 정치이야기를 떠나서 쉽게 말하면 나누어 먹을 큰 빵이 있어야 많은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다. 물론 골고루 나누어 먹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빵을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빵을 만들 때는 오븐도 필요하고, 각종재료도 필요하고, 숙련된 요리사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빵을 잘 반죽하는 방법과 그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이처럼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이 있고 이들의 노력이 잘 결합될 때만 가장 크고 맛있는 빵이 만들어 지지 않겠는가?마찬 가지로 오늘날의 정부정책은 시장 친화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기업도 국민도 국가라큰 덩어리가 잘 굴러가려면 자신이 속한 곳에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러한것들에 적당한 규제와 필요한 서비스 그리고 향상된 성과에 대해 격려와 같은 지원해 주는자세가 바로 정부의 역할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국가를 더욱 발전시켜 부강한 나라가 되는 길을 열어야 함은 우리 모두의 맡은 과제임은 당연한 것이다.
제목 : “ 운명의 손 “ 에 대한 나의 고찰영화에 있어서 전쟁직후라는 시기는 많은 것을 대변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이 시작된 시대 ,즉 1940년 말이 나타내는 웃음이 없어져 버린 광기의 역사성를 버티고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의 끝으로 가지게된 기쁨도 잠시 또다시 민족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맞이해야 했던 50년대를 지나는 사람들에겐 “운명의 손“이라는 영화는 과연 어떠한 시각으로 비추어 졌을까하는 궁금증으로 이 영화를 접근 했다. 만약 첩보영화 라는 단어의 의미가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며 스릴있는 반전의 결말을 갖춘 영화라면 이 영화는 첩보영화라고 할 수 없다. 차라리 타고난 가족(민족)의 대립으로 인해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리는 비극적 멜로물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민감했을 반공의 사상을 대한민국 육군 대위와 남파공작원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게다가 술집여자와 고학생이라는 신분의 사랑아야기라는 관점은 서민들의 말초적인 자극을 이끌기에 충분했으리라 생각된다.정애라는 여주인공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경계선으로 하여 술집여자와 간첩이라는 신분을 넘나든다. 이 문은 정상적인 문의 잠금 구조가 아닌 양쪽에서 열쇠로 열어야 열리는 구조로 이것은 두가지의 삶을 사는 정애의 대립되는 인생의 힘든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정애의 방 그 안의 어색한 분위기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조성하고 있다. 벽에 성모마리아 인형과 괘종시계 등 그 시대의 낮선 물건들로 관객의 시선을 어색하게 하며 결국 술집여자라는 단어에 일반적으로 느끼는 천박해 보이는 이미지를 연상케 유도하지만 사실은 그 어색함이 간첩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을 관객은 알 게 된다. 이러한 장치들로 인해 관객은 정적인 긴장감의 고조를 느끼며 자신의 방안에서도 심하게 주위를 살핀다던지 문이 잘 감겨있는지 확인하는 것 등의 어색한 정애의 행동은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또한 영철이라는 남자주인공의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만남과 서로 어색하게 시작되는 그들의 사랑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어가기 때문에 영철의 존재 또한 무엇일까 하고 궁금하게 만들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은 영철의 힘든 고학생 시기에 정애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받아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로 발전할 것 같은 생각을 관객에게 요구하지만 그 내면에는 영철이 받는 양복이나 구두 등 물질주의를 대변하는 물품을 받음으로서 정애는 영철의 미래를 믿고 투자하는 듯한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기 보단 물질적인 면이 다분한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주인공 2명 이외의 인물은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손, 다리 등 신체의 일부만 나타냄으로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이러한 모습은 시대상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남과 북, 사랑하지만 적의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은 얼굴도 알 수 없는 어떠한 사람(이데올로기)를 따라야만 하는 운명을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시대의 딜레마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결국 영철은 정애가 간첩인것을 알게 되고 그 모습은 서로를 알게되면 공존할 수 없는 당시의 사고를 극명하게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시 즉 이성을 어기면서 감정을 택하는 정애의 모습은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 첫장면은 어떤 사람의 담배를 쥐고 먼가를 고뇌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손이며. 마지막 장면은 동굴에서 카메라가 고정되어 총을 쥐고 선택의 순간에 서있는 손을 보여준다. 이러한 손의 모습은 영화의 제목 처럼 운명을 결정하는 손이다.
“인간이 아니라면 정의로울 수 없다?”-클로드 샤브롤 의 “의식(La Ceremonie)”을 중심으로 하여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은 “의식(La Ceremonie)”이라는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총구를 들이댄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존재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감독의 서늘한 총구를 느끼며 내가 긴장한 이유는 그의 사회적 구조에 대한 시선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그 사회를 반영하며 주관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관적인 비전은 감독의 것일 수도 있고 제작자, 편집자, 시나리오작가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비전의 소유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영화는 수 많은 기준으로 나뉘어 해부 된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자신의 주관이 결여된 영화를 만든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는 영화라는 예술의 틀 안에서 클로드 샤브롤이란 감독은 어떠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또한 부르주아로 대변되는 사회의 지배계층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도 같은 (진실성이 결여된)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도록하자.작품을 통해서 자신만의 개성(일관된 스타일)을 드러내는 것, 즉 감독이라는 한 인물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자신만의 특징으로 표현하는것은 감독이란 타이틀을 작가(auteur)와 단순한 연출가(metteur-en-scene)로 구분하는데 필요한 차이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클로드 샤브롤”이라는 감독에게 작가라는 칭호를 쓰는것에는 주저함이 필요없다. 그는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타내고자 했고 급진적인 방법보다 냉소적으로 시대를 비판하는 방식을 즐겼다. 또한 누벨바그를 이끌고 “까이에 뒤 시네마”라는 문단으로 한 시대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그는 1959년 로 데뷔하게 된다. 이 영화로 그가 존경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특징을 자신만의 색깔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샤브롤식 스릴러”를 창조하게 되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 을 통해서 그의 영화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 냈고 (2000) , (2003)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부르주아속의 세포구성단위인 그들의 가족들 사이에서 조차 사악한 욕망과 위선적인 모습이 나타남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기조를 완성한 “작가”로 재평가 되었다.프랑스의 실제 살인사건인 “파팽자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의식(La Ceremonie)”이라는 영화는 단적으로 말해 사회적인 계급구조와 부르주아로 일컬어지는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나타내고 있는 모든 부르주아는 겉으로는 우아하고 화목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어딘가 어색하고 비정상적인 가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대의 전반적인 지배층의 삶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허세가 가득하고 진실성이 결여된 삶을 사는 그들은 결국 비극적 파국을 맞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넌지시 내러티브로 표현한다. 또한 부르주아란 계급 역시 군림세력이 만드는 것이고 부르주아 가족의일상적인 상황 즉 대화 없이 설치한 TV만 보는 것 역시 무비판적이며 사회의 흐름에 전혀주체적이지 않은 그들의 수동적인 자세를 각성시키고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상기시키려는 감독의 의도이다. 즉 이들 부르주아 역시 조종세력에 굴복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이것은 마치 영화제작에 있어서 감독의 생각이 잘 펼쳐지지 않는 무의미한(감독의 입장에서) 현실적 창작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영화의 첫 장면부터 그는 “프랑스의 히치콕” 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히치콕의 수작 “샤이닝”과 흡사한 초기장면을 구사한다. 히치콕의 작품처럼 장면을 압도하는 미장센은 없었지만 소피가 하녀로 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동차를 따라 오는 카메라의 앵글이나 기차가 오면서 시작되는 음침한 노래의 시작은 소피를 통한 비극적인 종말을 암시하기 위해 그려낸 감독의 작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소피의 방에 생색을 내며 장식한 TV라는 들어가는 첫 날 처음 TV화면에서는 “인간이 아니라면 정의로울 수 없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정의로워야 인간이다” 라는 같은 의미로의 수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자유주의 속의 부르주아인 그들의 권위를 대변하는 계급은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정의”롭지 않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 감독은 “조금이라도 정의로워야 인간구실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기 보다 우회하여 현실에 대해 정치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그의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하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자리가 잡힌듯 하지만 내적인 그들의 실상은 실패와 도피의 연속임이 드러난다. 가장의 모습은 왠지 성적으로 억압을 받은 환자 처럼 느껴졌다. 애인을 애무하듯 딸을 대하는 애정표현은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더욱더 그들의 분위기를 불균형적인 삶으로 암시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아내는 큰 화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우체국직원의 입을 통하여 그것은 허세임이 나타나며 딸은 소피를 가장 많이 이해해주려는 위치로 그려지고 대학교를 다니는 엘리트로 그려지지만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처신을 못하며 아직 철없는 공주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가족적 특징속에서 소피는 의식과도 같은 식사와 집안일을 잘해나가지만 가족과 소피 사이에는 조화적으로 융합되지 않는 모습을 이 작품에선 그리고 있다. 그런 조직적 부조화는 소피가 잔느라는 우체국 직원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고 즉 소피보다는 좀 더 계급적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며 그로인해 열등감을 많이 가진 우체국 직원(잔느)와 친해지면서 결국 파국적 사건의 도화선을 제공하는 꼴이 되고말았다.소피는 자신의 방에서 주인이 나가자 마자 커튼을 치고 문을 닫는 모습을 보이는 데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이다. 이 모습은 사회적인 불만으로서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자신의 치부를 나타냄을 꺼려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치부가 드러날까 걱정하는 소피는 피지배자의 패배의같은 핸디캡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 처해도 사회적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소피는 딸의 생일에 파티를 열게 되고 어느정도 준비를 한 후 집에서 도망쳐 나온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말들을 주고받는 지인들 그리고 딸과 남자친구의 단순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그 곳, 어쩌면 의미 없는 의식과 같은 부르주아의 허식이 만연한 그곳을 소피는 빠져나와 잔느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잔느가 준비한 버섯을 먹는다. 이 버섯을 먹고 난 다음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의 자식을 죽인 살인자라는 자신의 숨기고픈 사실을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버섯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 환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특징을 이용하여 그들이 대립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벽을 넘고 자신의 상황을 도피하려는 일종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즉 감독은 지배계층의 허위의식과 무분별한 삶으로 인해 피지배계층이 현실과 부딫히게 될 경우 에는 마약이나 알코올 등의 수단을 통해 탈출하고 싶어함을 말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소피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릴리브르씨 가족은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항상 부르주아에게서 무시를 받았다고 여기는 소피와 그녀에게 촉매제가 되어주는 잔느라는 인물로 인해 분노는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서서히 인식하고 채념한 듯 자신의 짐을 가지러 릴리브르씨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우연히 발견한 릴리브르씨의 엽총 한자루로 인해 그들의 선택은 광기에 휩싸인다. 그 총은 계급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며 살인의 도구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 총을 발견했어도 그녀가 살인을 할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마냥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독의 뛰어난 장치이겠지만 막상 기폭제가 된것은 눈앞에 나타난 부르주아의 대변인인 릴리브르씨의 등장이었고 그로인해 파국적 결말은 시작된다. 릴리브르씨에 대한 거침없는 확인 사살장면 에서 나타나는 神) 장면과 매치 되지 않을까?. 결국 피지배층으로 나타나는 소피와 잔느는 부르주아로 대변되는 모든 가족을 사살하고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서 잔느가 범행을 뒤집어쓰고 탈주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고 우연한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중의 대화와 상황전체가 녹음된 완벽한 범행증거를 제공함으로써 조그만 사회의 변혁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처럼 변용시키는 능력을 가진 히치콕처럼 카메라의 의도적인 위치변화는 주지않지만 수직적인 변화를 통해 계급을 나타내고 은연중에 비판한다. “돈 지오반니” 라는 오페라를 릴리브르씨 가족이 TV로 보고 있을때 소피와 잔느는 2층에서 그들을 내려다 본다. 그 이후 소피와 잔느는 가족을 모두 총으로 살인하게 된다. 언급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살인의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처럼 계급에 대한 반박는 그들이 넘지말아야 할 선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으며 그 선을 넘어버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는 극단적인 살인 뿐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감독의 계급적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역설적으로 나타나있는다. 즉 사회의 계급은 괴리되어 있고 이러한 괴리감을 넘기 위해선 어떠한 댓가(죽음) 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댓가가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계급상승) 조차도 수용할 수 없다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인간이 아니라면 정의로울 수 없다” . 이 작품을 만들 때 클로드 샤브롤이라는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정의로워야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비판의 대상은 지배층이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상황이 부르주아든 프롤레타리아든 간에 계급의 허영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고 그 이전에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이 사회속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어야 할 노병의 훈계가 아닐까 싶다.Reference프랑스 영화(2000) , 창해ABC잔혹성의 미학(L’Esthetique de la 이용관
제목 : 광기의 시대 그 속의 웃음 문화포스트 모던 시대의 영화와 웃음 문화-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중심으로의공학부 0289291 이재훈1.머리말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은 그의 영화 에서 당시 인류에게 현실에 대한 인식이 하루 빨리 바로서기를 촉구 하고 있다. 그가 경험했던 공포의 시기, 즉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30년대 말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발전하여 태동한 20세기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다기 보단 이기적인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이라는 모습으로 인간의 폭력성과 배타성, 잔인성과 같은 광기를 드러내게 된다. 채플린은 현실의 역사의 성격을 정면으로 의심하고 지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조되어 있는, 또한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시대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당대 역사의 주체가 되어 견인하였던 이른바 모더니티 이성에 반박하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시점에도 그는 이 공간 이 시간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고 넌지시 물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채플린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사람이 바로 수작 “인생은 아름다워”를 만든 로베르토 베니니인 것이다. 채플린이 춤을 추며 저항하는 적극적인 고발자였다면 그는 “침묵이 가장 큰 저항“이라는 말로서 소극적이지만 웃음과 은유라는 무기로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즉 과거와 달리 다양한 문화의 발전과 전 세계의 모든 나라 더 나아가 개개인의 모든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는 현시점 에서 과거를 통한반성과 발전방향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2.몸말1)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에선 동화 같은 이야기와 공포의 역사가 공존한다. 오직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스 ,흔히 홀로 코스트라 일컬어 지는 그 사건이 배경이 되는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스카 쉰들러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도 유태인 수용소가 배경이지만 사실적인 표현과 다큐멘터리적인 영화라는 점이 특징인 반면에 는 웃음이 존재하며 픽션이 중심이 된 영상미를 갖춘 드라마 영화이다. 이러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대학살이라는 슬프며 민감한 과거의 사건을 웃음으로 담아 낸다는것은 약간의 실수로 내용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건데, 오히려 교묘하게 경쾌한 웃음으로 이념적인 배경을 중시하기보단 인물들의 사랑과 가족애등 중시하여 이야기가 전개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히틀러의 민족 우월주의나 전체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주인공의 유머스런 행위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믹한 말로서 은유적으로 묘사하여 비판한다. 이 영화에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하는 그의 대사는 아들과 장난 치는 아버지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웃기지 않고 슬프게 들리는 대사들은 너무나 슬픈 노랫말 가사 같았다.2)발표내용의 전반적인 형태는 영화의 내용을 바탕으로한 연극에 효과적인 해설이었다. 전반적인 영화의 줄거리는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라는 주인공이 시골에서 토스카나라는 이탈리아의 소도시로 상경하게 되면서 아름다운 아가씨(도라)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도라는 그지방의 유력가인 약혼자가 있었지만 항상 밝은 웃음을 주는 귀도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마침내 둘은 결혼하게 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며 그둘 사이에 조슈아라는 비만아(?)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잠시 유력가를 버리고 귀도와 결혼한 도라 점점 그녀의 어머니도 마음이 풀려 그들을 용서하려고 할때 쯤 독일이 이탈리아 점령을 시작하게 되면서 유태인 수용소에 귀도와 조슈아는 끌려가게 된다.비록 자신은 유태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따라 도라는 수용소로 가기로 결심한다.수용소에 가게된 귀도는 조슈아에게 그 공포스러운 상황을 게임이라고 설명하면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며 보호해 준다.그러던 중 귀도는 미군이 진주하는 중이라는 소식에 조슈아를 숨겨 놓고 도라를 찾다가 죽게 된다.낡이 밝고 조슈아를 발견한 미군은 유태인들 사이에서 행진을 하게 되고 그사이에서 도라와 도슈아는 만남을 가지게 된다.이러한 발표 내용을 가지고 발표조는 두가지의 결말을 구성하는 시도를 하였다. 즉 만약 귀도와 ,도라, 조슈아가 한꺼번에 다 죽게 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웃음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세상을 밝게 보게 가르쳐준 귀도, 그의 개인적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매체가 있었기에 이 영화는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것이 전개되지만 만약 그러한 비극적 결말이라면 인생의 아름다운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던 모든 장치가 사라지는 생각이 들고 홀로 코스트 영화임에도 밝게 나타난 주인공이 아무런 역할을 안한것이되어버리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큰 탱크를 만들어 나타내고있는데 전쟁의 도구이자 조슈아가 살아남는데 바탕이 되는 도구이지만 더 많은 가치를 나타내고 있는 기차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표현해 봄이 어떠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3)베니니의 영화를 보면 그가 찰리 채플린을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채플린의 영화에선 근대적인 물질 문명을 상징하는 비행기가 뒤집혀서 날아가다가 시계를 보면서 관객에게 묻는다. ‘지금 몇시지?’ 과연 ‘우리는 몇시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은 하고 살아가는 생각은 하고 살아 가는 것일까?’ .즉 홀로 코스트라는 만행이 일어난 비이성적인 시대의 흐름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은 흔히 ‘모더니티 이성’ 들에게 이건 아니라고 다시 방향을 고찰해 보자고 주장하고 있는 그를 알 수 있듯이 베니니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로 근대의 문명을 나타내고 있다. 계몽적이고 근대적인 발전을 나타내고 있는 자동차가 달리는 곳은 정상적인 도로가 아닌 산길 그것도 산언덕의 내리막길이며 그가 고장난 브레이크의 자동차로 결국 도달한 곳은 파시즘 히틀러 무솔리니를 연상케하는 마을이다.이장면에서 베니니가 하고 싶은 말은 채플린이 한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상징공간으로 대변되는 토스카나에 도달한 귀도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고 결국 도시의 빈민자로서 살 수 밖에 없다.즉 토스카나는 사회적으로 비극적인 공간을 나타내며 , 오페라 하우스라는 건물에서 1층에는 서민이 2층에는 귀족이 사용하게 함으로서 자본주의라는 틀에서도 역시 계급질서가 드러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하지만 이영화는 이러한 상황까지도 사랑이라는 전반적인 영화의 모티브로 높다란 계급 구조를 극복하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귀도의 도라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도전적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베니니는 피그 말리온 이라는 강한 바램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뜻을 가진 장치를 사용하는데 주인공의 긍적적인 인생관이 엿보이고 영화에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유태인 수용소로 갈 때 나타나는 근대혁명을 상징하는 기차, 근대적 문명의 대상으로 시민의 시대를 개시하는 물질로 표현되는 이 기차가 달려가는 곳은 유태인 수용소 즉 죽음의 공간이다.결국 목적과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베니니는 말하고 있으며 기차역에서 귀도가 독일 군에게 하는 ‘ 지금 몇시죠?‘라는 말은 아주 극명하게 베니니의 사고를 나타낸다.수용소에서 귀도는 도라와 조슈아에 대한 끝없는 가족애로 이 영화를 지탱해 나간다 .바하의 뱃노래라는 노래는 아내 도라에 대한 사랑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여 자신과 도라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의미를 부여하기도하며 수용소 전체를 사랑의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도 하게 된다. 더 깊게 생각하면 몸은 수용소에 있지만 문화는 지지 않으며 오히려 문화적 저항성을 나타내는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3.맺음말이 영화에서는 가장 큰 무기를 웃음으로 삼고 있다. 웃음이란 사람의 생물학적인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칼보다 날카로울수도 있고 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단적이고 역설적인 생각이지만 웃음으로 상대를 공포의 상태로 몰아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웃음의 다양한 해석을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고 웃음의 이러한 의미는 과거의 문화적인 코드를 재인식하고 문화적인 감수성을 느끼는데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웃음은 사회적인 웃음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위에서 살펴본 웃음들이 다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성의 역사’에서 ‘감성의 역사‘ 로의 탈바꿈 .즉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의 변화를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웃음이라는 것이다. 이 웃음이라는 모티브로 사람을 이해하려면 이성과 감성, 영성 이라는 세가지 인성이 혼합된 다성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고로 등장인물을 이해해 보면 귀도는 피그말리온 효과나 아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아 미토스적이고 파토스적인 인물이며 도라는 죽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가족을 위해 사랑을 택하는 모습에서 파토스 적인 인물로 독일군은 에토스 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어 진다. 이러한 귀도의 파토스적이면서 미토스 적인 모습은 역설적인 경쾌한 웃음 뒤에 진한 슬픔의 메시지를 담아 관객에게 어필하여 동정과 연민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다루는 비극의 흥겨운 전달이자 동시에 문화적인 상징성을 내포함을 나타낸다.또한 웃음은 문화적으로 공존 할때 그 의미가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으며, 특히 웃음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을 때는 상징의 문화적인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앞서 언급 했듯이 ‘기차’, ‘안개’,‘탱크’,‘고장난 자동차‘. 등 많은 요소들이 상징성을 띄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잘 해석 될 경우 그 문화적인 가치는 더욱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마지막으로 귀도는 ‘침묵은 가장 큰 저항 ’ 이라는 말을 하지만 조슈아에겐 이런말을 하지 않았을까?“ 현실은 힘들지만 그 고통을 이기는 것은 웃음이기에 침묵으로 저항하지 말고 웃음으로 저항하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