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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및 학업계획서 평가C아쉬워요
    {1. 자기소개 및 학업계획서는 평가요소로서 중요한 자료이므로 반드시 본인이 작성하여야 하며,사실에 입각하여 정직하게 자신의 능력이나 특성, 경험 등을 기술하십시오.2. 청색, 흑색 필기구(연필 제외)를 사용하여 자필로 작성하거나,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십시오.3. 자기소개 및 학업계획서는 반드시 본 서식에 작성하십시오(서식은 본교 홈페이지에서 내려받거나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4. 자기소개 및 학업계획서는 본 서식 범위 내에서 작성해야 하며, 3번 문항과 4번 문항의 경우한 가지 주제 만을 선택하여 기술하십시오.5. ※ 표가 있는 난은 기재하지 마십시오.6. 자기소개 및 학업계획서는 입학원서와 함께 일괄 제출하십시오.7. 표지와 본문이 분리되지 않도록 스테이플러로 묶어주십시오.8. 자기소개 및 학업계획서는 입학전형 및 입학 후 학생지도 자료로 활용되며, 비공개 문서로 관리될 것입니다.{1.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특성 혹은 능력)과 보완·발전시켜야 할 단점(특성 혹은 능력)에 대하여 기술하십시오(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례와, 단점을 극복하기 위 해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하십시오).나는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뛰어나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항상 나에게 자신의 일은 자신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신 덕택이 크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성 당에 다니게 되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복사단에 속하게 되었다. 복사란 성당에서 미사 중에 신부님 곁에서 신부님을 도와드리며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하는 것이다. 복사단원들은 일주일에 꼭 두 번은 미사에 참여해서 복사를 맡아 봐야 했다. 평일 저녁미사나 주일미사를 맡은 경우에는 힘들지 않게 복사를 설 수 있었다. 그러 나 평일 새벽미사의 경우에는 빼먹지 않고 복사를 서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평일 새 벽미사는 자주 빠뜨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3년 동안 복사를 서면서 한번도 내가 맡은 날의 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좀 힘들긴 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나에게 단점이 하나 있다면 좀 소 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내 성격 을 좀더 적극적이고 활달하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나의 주장 발표대회 라는 행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옳지 잘됐구나! 생각하고 이 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를 위해 스스로 원고도 쓰고 내 나름대로 연습도 많이 했다. 연습은 주로 혼자 거울 앞에서 많이 했고 또 학교에서 반 친구들 앞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떨리고 때론 두렵기 까지도 했는데 이렇게 많은 연습을 하고 나니 그런 감정을 많이 극복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대회 날 나는 500명 가까이 되는 많은 친구들 앞에서 지금까지 연습한걸 바탕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말 긴장 된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발표를 마치고 나서 인사를 하고 많은 박수를 받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고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2.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학업 이외의 활동영역(사회봉사활동, 교내·외 클럽활동, 단체활동, 취미활 동, 문학활동)에서 가장 소중했던 경험을 소개하고, 이러한 경험이 자신의 성장에 어떤 도움을 주었 는지 기술하십시오.나는 고등학교 때 INTERACT라는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우리 동아리에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가곤 했다. 그런데 그 중 지금도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영신원 이라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영신원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아이들 방 청소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옷 빨래하기, 영신원내 청소하기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무 척 힘든 일들이었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 원장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고 하시면서 목욕탕으로 들 어가셨다. 나는 원장선생님께 나도 같이 하면 안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러라고 하시었다. 다른 친구 들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해서 나 혼자 원장선생님과 함께 아이들을 씻겼다. 아이들 머리를 감기고 세수를 시키고 손발도 깨끗이 씻겨 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씻겨 주니 처음에는 좀 어색해 하는 눈치였으나 시 간이 지나자 나에게 장난도 치고 말도 걸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원장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아이들이 어 려서부터 정에 많이 굶주려 사람들이 귀여워 해주는 걸 아주 좋아한다고 하시었다. 이 말을 들으니 아이들이 참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보였다. 또 이런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원장선생님의 모습도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날 아침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용돈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다투었던 일이 생각났다.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추고 생활하면서도 항상 불만족스럽게 생활하며 나 자신 밖에 몰랐던 이기적인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나는 영신원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내게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 며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또한 원장선생님처럼은 못 하겠지만 나도 나 자신만을 생각하 지 않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3.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여 □ 안에 ∨표를 한 후, 그 주제에 맞게 자유롭게 기술하십시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이나 경험을 설명하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기술하십시오.□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겪었던 가장 큰 위기 혹은 좌절 상황을 설명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의 자신의 감정과 노력을 기술하십시오.□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회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 문제의 해결 위해 자신이 앞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십시오.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 폭력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 년 때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1학년 후배가 올려놓은 글을 보게 된 뒤부터였다. 그 글은 우리학 교 2학년 선배들이 무서워요 라는 제목으로 1학년 후배가 몇몇의 2학년 선배들이 자신의 친구를 자주 폭행하 고 협박해 돈을 빼앗았다고 신고하는 글이었다. 나는 딴 세상일처럼 여기고 있었던 문제가 실제로 내 주위에 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도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 니 마치 내 일처럼 여겨졌다. 그 후로 나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학교폭력에 관한 기사나 보도를 관심을 가지 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학교폭력문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꾸준한 교육활동 에도 불구하고 학교폭력은 오히려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학교폭력에 의해 많은 학생들이 피 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학교폭력에 의해 뇌가 손상되어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며 어떤 학생은 상급생들의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급기야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어떤 학생은 상급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후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간이 붓고 쓸개가 터져 사망했다고 했다. 이 런 기사를 보고 나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학교폭력에 대한 처벌법을 더욱 강화하 도록 국회에 건의하겠다. 어떤 시사잡지를 보니까 현재 우리 나라의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법이 너무 약해 폭 력을 가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매우 미약하거나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는 행정기관에 폭력의 사각지대로 불리 우는 학교주변, 주택가, 골목길, 놀이터, 오락실, 노래방, 당구장 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도록 건의하겠다. 학교 폭력이 가장 성행하는 곳의 감시가 미약하다면 학교폭력을 줄이는 일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으로 YMCA나 청소년 폭력예방단체와 같이 학교폭력문제를 예방 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 가입하여 교육활동이나 상담활동을 하겠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나 가해자를 직접 대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교화시키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다.
    학교| 2002.10.07| 3페이지| 3,000원| 조회(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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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금남 최부
    금남 최부금남 최부(1454∼1504)는 1454년 나주군 동강면 성지촌에서 진사 최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금남은 그의 호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자는 연연(淵硏), 본관은 나주이다.금남이 나주에서 어느때 해남으로 왔고 무엇 때문에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금남의 처가가 이곳 해남이어서 어렸을때 왔을 것으로 보고있다.금남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최부의 제자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호남 3절의 하나인 유성춘을 비롯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등이 있으며 석천 임억령과 귤정 윤구도 그의 문하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금남이 얼마동안 해남에 거주 하였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그가 자리잡고 살았던 곳은 해남읍 해리였다.그리고 그가 참수형을 받았을때 그의 가족은 마산면 버드나무골(현 상등리)에서 살았으며 최부의 무덤도 그곳에 있다가 30여년전에 나주로 옮겨졌다.관직과 행적금남은 문장 경술(經術)로 영남학파의 사종(師宗)인 김종직의 문하생이었으며 김굉필,정여창,조위,김일손등 당대 쟁쟁한 신진사류와 같은 동문이었다.그는 1482년(성종13)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어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및 박사(博士)를 거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傅)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였다.그는 1486년 문과중시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는등 홍문관 교리등을 역임했으며 장차 대제학감으로 지목받는등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았다.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의 대표적인 서적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은 금남의 손을 거쳐 편찬된 것이다.표해록과 실학사상금남은 1487년 9월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나 그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오던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다행히 파선은 면하고 강풍에 밀려 망망대해를 두달남짓 표류한 끝에 중국 절강성 임해현 우두앞에 도착한다.표해록은 금남이 폭풍을 만나 바다에 표류 하면서부터 중국의 곳곳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착하기까지 겪은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이 책에는 중국의 해로, 기후, 조류등 지리와 연로(沿路), 풍토(風土), 산천(山川),관아(官衙),민속, 의식, 제도등 당시 명나라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표해록을 보면 금남은 중국에 표착한 후 왜구로 오인되어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금남의 위엄과 비범함,뛰어난 문장과 글솜씨에 감복하여 극진히 공대하고 귀빈으로 최상의 대접까지 받았다.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접견하는데 황제는 금남의 특출한 인품과 시문에 탄복하여 의관을 하사하였으며 본국 귀환의 편의까지 제공받게 되었다.고국에 돌아오자 성종은 그에게 곧 표해록을 저술하도록 명했다.그는 이 책에서 중국의 수차(水車)제작과 이용법을 기술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제작하여 사용할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후에 충청도 지방에 한발이 계속되자 나라에서는 금남이 이용을 주장한 수차를 제작 사용케 하여 한해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금남이 쓴 표해록에는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 그 한가지 예예가 바로 이 수차제도이며 그래서 한켠에서는 금남을 우리나라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꼽기도 한다.당쟁으로 못다핀 경륜1497년(연산군3) 금남은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를 다녀온후 예빈시정(禮賓侍正)에 승진되었을때 선조때부터 시작된 지배계급간의 대립과 반목이 이때에는 극에 달해 처참한 사화가 잇따라 일어났다.당시 금남은 사림파로 불리운 혁신적인 신진사류와 뜻을 같이 하였으며 그의 스승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여 훈구파로 불리우는 기성 구세력과의 사이에는 정권을 잡기위해 심각하게 대립해 있었다.이러한때 1498년(연산군4)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던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의 글이 말썽이 되어 김일손등 사림파의 거의 전부가 죽거나 귀양을 가는 무오사화가 훈구파에 의해 일어났다.이 무오사화에 금남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 당했다.그러나 금남의 수난은 이에 그치지 않고 1504년(연산군10) 4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의 명으로 다시 투옥되고 끝내 참수되고 말았다. 이때 금남의 나이는 그의 경륜과 학문이 무르익을 51세였다.그는 형장에서도 예나 다름없이 태연하였다고 하며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세상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금남은 1506년(병인)에 통정대부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그의 못다이룬 학통은 외손자 유성춘과 유희춘 형제에 계승되어 열매를 맺었으며 해남에 심은 그의 뜻은 꽃피어 해남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모받고 있다.저서로는 금남집이 있고 해남육현의 한 사람으로 해남읍 구교리 해촌사에 배향되어 있다.
    인문/어학| 2002.10.08| 4페이지| 1,000원| 조회(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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