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향악단 제 558회 정기연주회11월 28일 금요일,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버스를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비가 한두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막히지 않았다. 공연 시작 30여분 전에 도착해서 같이 ‘음악의 이해’ 수업을 듣는 친구를 만나 예매해 두었던 티켓을 받고 프로그램을 사서 훑어 보며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KBS 교향악단 제 558회 정기 연주회... 558회라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얼마의 간격을 두고 연주회를 여는지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이어온 연주회라는걸 알수 있었다.드디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오고 지휘자도 무대에 올라왔다. 현재 KBS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눈처럼 하얀 머리의 지휘자의 이름은 드미트리 키타옌코, 모스크바필하모닉을 세계 4대 오케스트라로 올려놓은 정상의 지휘자라고 프로그램책자에서는 말하고 있었다.연주곡목으로는 네 곡이 준비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M. Ravel의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였다. 이 곡은 라벨의 피아노 곡 가운데 제 4 곡으로 들어가 있으며, 라벨 자신이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작품이다. 라벨 특유의 관현악적 감각으로 다양한 악기 조합과 사용으로 다채로운 색감과 음향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빠름-느림-빠름의 3부구성으로 처음에는 빠른 판당고풍 리듬으로 스페인 무곡의 정서를 직접 전해준다. 느린 분분은 애틋한 사랑의 감정과 아침에 헤어지는 연인들의 아쉬움을 그린 듯 애수가 묻어 나오고 때로 강렬한 음향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연주시간은 약 9분정도로 짧았지만 관현악의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곡이었다.두 번째 곡은 I. Stravinsky의 C장조 교향곡이었다. 이 교향곡은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악장은 베토벤의 다이내미즘을 빌린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스트라빈스키의 단절과 확 바뀌는 듯한 흐름으로 패러디와 같은 인상을 준다. 제 2악장은 바이올린과 오보에의 솔로 처리와 현 위주의 오블리가토로 바로크와 초기 고전파의 콘체르탄테 형식을 재해석하고 있다. 서정적인 첫 부분에 이어 강렬하고 긴장이 고조되는 중간부로 바뀌며, 다시 주부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재즈 적인 음형 처리를 잠깐씩 덧칠하여 색다른 맛을 내고 있다. 제 3악장은 팀파니의 타격과 관악의 호응으로 처음부터 강렬하게 출발하는데, 분명 스케르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 4악장은 관의 저음으로 느리고 약하게 시작하여 점차 고조되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하는데 주요 주제를 악기와 성부를 바꿔가며 모방하고 변형하는 식으로 대위법적 전개를 시도하며 음향과 짜임새를 고도로 복잡화한다.세 번째 곡은 M. Bruch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작품26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연주회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한다. 이 곡은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화음 선도에 이은 독주 바이올린의 상행 아르페지오의 느리고 정감어린 카덴차 풍 짧은 서중에 이어 빠른 주부에서 강렬한 열정을 지닌 독주 바이올린의 주제 선율이 등장한다. 제 2악장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전형적인 칸타빌레 악장으로 바이올린 특유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린 주제 선율 속에는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망과 같은 정서가 흐르고 있다. 제 3악장에서는 역시 서주가 여리게 시작하여 점차 강해지면서 절묘하게 독주 바이올린이 빠른 주제를 연주하는데 강력한 맛이나 춤곡과 같은 흥겨움은 덜하지만 독주 바이올린의 자연스러운 선율과 기교적 흐름 속에서 부르흐 음악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이 협주곡의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제니퍼 고라는 28살의 여자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그녀의 연주는 마치 악기가 자신의 몸의 한부분인듯했고 악기로 말하는듯했고 음악에 대해 무지한 나조차도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1994년 그녀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부상한 연주자로서 이어 1995년에는 에버리 피셔 그란트상을 수상하면서 명실상부한 국제적 스타연주자로서 등극하게 된다. 이 전까지의 연주도 물론 좋았지만 그녀의 솔로 연주는 정말 ‘와’하고 입이 벌어지고 몰입하게 되는 그런 감동적인 연주였다. 그전까지 박수가 어느정도는 형식적인 박수였다면 그녀를 향한 나의 박수는 나의 마음 그 자체였다. 다른 관객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박수소리는 끊길줄을 몰랐고 그녀는 한번 다시 나와서 인사하고 그래도 박수가 끊기지 않자 다시 나와서 짧은 바이올린 독주곡을 연주했다. 이 독주곡에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는데 활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현을 손으로 뜯는 피치카토 기법을 섞어 연주하는 모습은 ‘신기’ 그 자체였다. 나는 또다시 손이 아픈것도 모르고 계속 박수를 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입속으로는 ‘브라보!’라고 수없이 외쳤다.
프랑스 미술관중의 하나를 택하여 레포트를 쓰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느 미술관을 택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결국 그 많은 프랑스의 미술관들 중에 내가 그나마 제일 잘 아는 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루브르 미술관을 더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내가 한번 가본 경험이 있는 미술관이어서 택하게 되었다. 루브르 미술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들리는 명소로서 나 역시도 예전에 프랑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을 때 다녀왔던 곳이다. 그럼 루브르 미술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1. 루브르 미술관의 역사1190년경 필립 오귀스트 왕 통치시기에 파리를 수호하는 성곽 요새로 지어졌다. 이때부터 요새 내부의 특별한 장소에 왕실 보물과 고문서를 보관했다. 14세기 영국과의 백년전쟁 기간 중 통치한 샤를르 5세가 루브르를 왕궁으로 개조하여 이용하며 궁 안에 도서관을 만들고 장서를 보관한다. 16세기 프랑스와 1세는 파리 남동부에 퐁텐느블로 성을 건축하고 성의 내부에 그랑 갤러리를 만든다. 루브르궁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된다. 프랑스와 1세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문화를 꽃피운 왕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프랑스와 1세의 아들, 앙리1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의 문화를 다양하게 이식한다. 마리 드 메디치와 결혼한 앙리 4세는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파리 동부의 마레(marais)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들을 건축한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루브르궁을 떠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이주한다. 루브르는 왕궁으로서의 위상이 축소된다. 수많은 왕실소장예술품들이 쌓인 루브르는 왕립예술아카데미의 예술활동 장소로 자주 이용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1793년 혁명정부는 루브르 궁전을 ‘중앙미술관’으로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기 시작한다. 절대 왕정의 상징인 루브르 궁전은 민중을 위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제1제정, 나폴레옹 황제 집권기인 1803년 실행한다. 5년간 공사 후 루브르 미술관은 주중에도 일반시민에게 개방된다. 사회당 출신 대통령, 프랑스와 미테랑은 ‘궁전 전체를 미술관으로’의 캐치 프레이즈 아래에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완성한다(1983-1989) - 3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수납하고 전시하기 위한 공간의 확보와 편리하고 쾌적한 미술관을 만들자는 취지 아래에 재무청사 이관시키고 전관을 미술관화하며 중앙정원인 나폴레옹 광장에 유리피라미드를 건축한다. 현재 루브르 미술관의 출입구로 사용되는 이 유리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가 설계한 걸작으로 1988년 완공된 이후 루브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기존의 루브르와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루브르는 이 유리피라미드와 리슐리외관, 쉴리관, 드농관으로 구성된다.2. 루브르 미술관의 특징루브르 궁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 미술관이다. 예술의 도시 파리를 연상할 때면 언제나 그 기본적 상징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창작활동을 업으로 삼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곳이다. 그러나 이같은 루브르의 명성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왕정과 공화정의 변화무쌍한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지속된 프랑스의 미술정책이 오늘의 루브르를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그 정책의 바탕에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해 왔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일주일 내내 관람한다 해도 전시된 모든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 엄청난 규모의 미술관에는 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30만점이 넘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수집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 전시된 작품수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전시공간을 찾지 못해 창고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제국주의시대에 약탈했던 문화재가 대부분이지만 정치적 권력에는 도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파악한 나폴레옹이 수많은 원정전쟁중에 챙겨온 작품들을 프랑스의 공공재산으로 간주하여 오늘날과 부지런히 구입한 성의를 보인 덕에 대영박물관이 받는 심한 비난을 살짝 모면하고 있기도 하다.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된 프랑스 회화작품들의 수는 전체 회화작품 수의 반을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작품은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래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예술, 르네상스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 지역 미술품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대 문명 작품이 대부분 건축물이나 조각작품인데 비해 르네상스를 전후한 서양미술작품은 단연 회화가 압도적이다. 루브르 미술관은 오래전부터 전세계 예술가들의 메카, 예술학교의 기능을 해왔다. 젊은 예술가들은 루브르가 모작, 습작, 감상, 관찰, 성찰의 장소이자 학습의 장소였다.3. 루브르 미술관의 구성루브르 미술관은 특이하게도 유리 피라미드 밑에 출입구가 있다. 피라미드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강당, 시청각실, 레스토랑, 그리고 미로와 같은 방대한 박물관을 안내해 주는 안내소가 있는 나폴레옹홀과 주차장, 상점이 있는 새로운 지하공간 'Carrousel du Louvre'를 만날수 있으며, 북 동 남 방향의 다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들어가게 되는 세 개의 전시관 'Sully', 'Denon', 'Richelieu' 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각각의 입구는 다르지만 미술관 내에서는 서로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회화를 위주로 관람하려면 드농관 1층을 먼저 관람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가 쉴리관과 리슐리외 관을 둘러보면 된다. 고대 유적을 중심으로 관람하려면 드농관 1층 전시실과 쉴리 관 1층 전시실을 둘러보고, 리슐리외관의 일부를 차지하는 메소포타미아 유적을 관람한 후 1층으로 올라와 쉴리 관의 남쪽 전시실을 관람한다. 조각작품은 드농관과 리슐리외관에 많이 있는데 드농관에는 이탈리아의 조작작품이 리슐리외관에는 프랑스 작품이 있다. 앞장의 에서 볼수 있듯이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에서 볼 때 왼쪽은 리슐리외 관, 오른쪽은 드농관, 정면으로는 쉴리 관으로 나누어져 있다.1) 리슐리외(Richelieu) 관입구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볼 때 포타미아와 고대 이란 이슬람 미술과 중세 르네상스 19세기 장식미술,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 중세 르네상스 17 ~ 19세기의 프랑스 조각, 네덜란드 플랑드르 독일의 회화 및 14 ~ 17세기 프랑스 회화, 북유럽 드로잉 등이 소장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시실에 우리가 중고등학교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석판이 있다. 중세실, 르네상스실, 17세기실, 나폴레옹 3세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는 장식미술의 세계를 보여준다. 회화 전시실은 플랑드르 화파와 네델란드 화파, 독일, 프랑스 회화를 전시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실은 18전시실로서 메디치 갤러리이다. 루벤스(1577~1640)가 마리 드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24점의 대형 연작들은 야심찬 권력가였던 마리 드 메디치의 일대기를 표현한 작품들로서 각 작품은 연대순으로 되어 있다. 연작의 주제는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으로 권력을 향한 한 여걸의 불타는 집념이 화려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24점은 리슐리외관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근 2백년간 한자리에 선보여 본적이 없었던만큼 뜻깊은 갤러리라 할수 있다. 한편 건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메디치 갤러리는 자연광이 밝게 떨어지는 곡면 천정이 무엇보다 보는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기둥과 들보 자체가 액자 외곽이 되고 벽감이 매트가 되는 벽면 구성 또한 매우 이채로운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바로크 회화 특유의 ‘넘침’과 ‘풍성함’을 반듯한 직선과 곡선의 ‘규율’로 조화시킨 건축가 I. M. 페이의 대담함과 센스가 돋보인다.2) 쉴리(Sully) 관입구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볼 때 정면에 있는 것으로 근동 미술과 파라오 시대 및 기독교 시대의 이집트 미술, 로마 고미술과 도자기 테라코타, 17 ~ 18세기 장식미술, 17 ~ 19세기 프랑스 회화, 프랑스 드로잉과 판화, 중세 시대 루브르의 건축 기초와 루브르의 역사 등이 전시 되어있다. 지상층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지중해 및 페르시아의 유물을 전시했는데 그것으로 유명하다. 1층에 그리스의 토기작품과 테라코타, 이집트 유물이 있고, 북쪽으로는 리슐리외관에 이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오브제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회화 전시관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프랑스 회화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32전시실에는 르 브룅이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를 주제로 하여 그린 대작이 있으며, C전시실에는 모네, 르느와르, 시슬레 등 인상파 화가들의 소품이 있다.3) 드농(Denon) 관입구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볼 때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 에트루리아 고미술, 왕관 보석, 이탈리아 북유럽 조각, 19세기 프랑스 회화(대형), 이탈리아 스페인 회화, 이탈리아 드로잉과 판화가 자리잡고 있다. 지상층에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고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계단 2층쪽 계단마루 중앙에 날개를 뒤로 젖힌 채 비상을 준비하는 듯한 머리 없는 여신인 사모토라케의 ‘승리의 날개’가 계단을 오르는 관객들에게 옛 승리의 함성을 지금까지도 강렬히 전해주며 당당하게 서 있다. 이탈리아 회화 전시실 중 6전시실은 루브르를 대표하는 ‘모나리자’가 신비한 미소를 띤 채 방탄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드농관 1층의 이탈리아 회화 전시실은 루브르 미술관의 백미로 르네상스 예술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걸작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77전시실의 1830년 7월 혁명을 소재로 한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75전시실의 다비드의 가로 10m의 대작인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황제비의 대관식’이 대표적인 대작들이다. 특히 이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황제비의 대관식’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실제로 그 대관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그린것인데 그림 왼쪽편에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5명의 여자들 중에 한명의 옷이 분홍색이냐 흰색이냐를 놓고 다비드의 제자들의 의견이 반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비드는 가로 10m나 되는 이 그림을 한 장에는 흰옷으로 한 장에는 분홍색 옷으로 하한다.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 작품 5개와 각각의 스토리1. 리골렛또 (Rigoletto)프랑스가 낳은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일락의 왕’ (Le Roi s'amuse)을 대본으로 삼은 작품이다. 리골렛또는 만토바공작의 궁정에서 빌붙어 사는 꼽추 어릿광대의 이름이다.제 1 막무대는 16세기 이탈리의 소도시 만토바와 그 근교.제 1 장 : 만토바 공작의 호화로운 살롱에서 열리는 무도회로 막이 오른다.호색한인 공작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미인이 수두룩하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손님으로 초대된 체프라노 백작부인을 체프라노 백작 앞에서 보란듯이 가로채어 무도장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때, 공작에게 딸을 농락당한 적이 있는 몬테로네 백작이 공작에게 덤벼든다. 리골렛또는 백작에게 심하게 빈정댄다. 그러자 백작은 경호원에게 끌려가면서 리골렛토에게 말하길 딸을 농락당한 아버지의 원한을 너도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저주한다.리골렛토는 그 말 한마디에 움찔한다.제 2 장 : 리골렛또가 그의 딸 질다를 숨겨놓은 교외의 한적한 집.남몰래 망토를 걸치고 주위를 살피며 집에 들어가려는 리골렛또를 낯선 사람이 부른다. 그 수상한 사나이는 자신의 직업은 자객이라고 하면서 필요하면 찾아달라고 이름을 가르쳐준뒤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고독한 부녀의 해후 질다와 리골렛또 사이에 아낌없는 애정이 흐른다. 행복한 순간은 잠시뿐, 리골렛또는 어쩐지 불안하다. 밖에서 낯선 남자가 기웃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밖을 살피는 동안, 만토바 공작은 학생으로 변장해서는 담을 넘어 들어와 풀 숲에 숨는다. 그리고는 평소 노렸던 질다가 리골렛또의 딸인 것을 알고 놀란다. 리골렛또는 문단속을 잘하라고 유모에게 일러두고 나간다. 한편, 질다는 성당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청년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 청년이 돌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실은 그 청년이 변장한 색마, 만토바 공작이다. 사람이 오는 기척에 두 남녀는 사랑을 맹세하고 공작은 돌아간다. 세계의 소프라노들팔에 안겨 힘없이 머리를 떨군다.3.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가면무도회’ 는 베르디의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오페라다운 짜임새로 되어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 오페라에서는 음모, 살인, 질투, 운명, 저주의 어두운 그림자가 긴박감을 고조시켜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 쾌락, 희생, 용서, 화려함과 밝음도 찬연히 빛나고 잇다.제 1 막리카르도백작의 응접실가면무도회가 있는날이다. 백작은 무도회 참석자 명단에서 아멜리아의 이름을 보고 기뻐한다. 백작의 가슴은 아멜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다. 이 때 측근이 들어와 마을에 마법의 주술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여인네가 있다고 하면서 잡아들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작의 시종인 오스카르는 그 점장이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나서 처벌해도 좋을 것이라고 진언한다.제 2 막점장이 여인 울리카의 집백작은 오스카르의 제안에 따라 점장이 여인의 진실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뱃사람으로 변장한 후 그의 집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틈에 아멜리아도 섞여 있다. 아멜리아는 백작과의 죄스러운 사랑을 떨쳐버리기 위해 점장이 여인에게 방법을 묻기 위해 왔던 것이다. 점장이 여인은 캄캄한 밤중에 교수대가 있는 곳에서 약초를 캐어 먹으면 사악한 사랑을 잊게 된다고 말해준다. 백작의 차례가 됐다. 점장이 여인은 뱃사람으로 변장한 백작의 손을 보고 오늘밤 첫 번째로 만나 악수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할 운명이라며 놀란 듯이 말한다.캄캄한 밤중, 백작의 저택에서 멀지 않은 들판.얼굴을 베일로 가린 아멜리아가 약초를 캐기 위해 나타난다. 백작 역시 아멜리아를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이 들판에 나타난다. 백작과 아멜리아가 마주치고 아멜리아는 자기도 백작을 사모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때 아멜리아의 남편 레나토가 나타난다. 백작이 걱정되어서 이곳까지 온 그는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 여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충성된 비서인 레나토는 백작에게 암살 음모가 있다고 경고한다. 백작은 문득 친구의 한없는 우정을 느끼며다. 한편 카를로는 어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편지 상자를 열어본다. 누이동생 레오노라의 초상화가 한 장 나왔다. 다행하게도 알바로의 상처는 회복되어갔다. 막사를 찾아온 카를로는 알바로에게 언제쯤 결투할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린 두 사람은 어쩔수 없이 숙명적인 결투를 펼치지만 다른 병사들이 들어와 막는 바람에 두 사람들은 칼을 집어넣어야만 한다.제 3 막제 1 장 : 수도원의 정원5년이 흘렀다. 어떤 청년 한사람이 수도승이 되고자 찾아왔다. 알바로였다. 알바로를 끝까지 추적하여 수도원까지 찾아온 카를로가 다시금 결투를 요청한다. 알바로는 이제 자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파묻혀 살기로 했으니 제발 마음을 돌려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카를로는 알바로에게 참을수 없는 모욕을 주어 결국 결투를 하게 만든다.제 2 장 : 레오노라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동굴의 밖레오노라가 자기는 아직도 알바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괴로운 마음에 죽음으로서 평온을 찾고자 하는 독백을 한다. 무대 뒤에서는 두 사람의 결투소리가 처절하게 들리고 마침내 알바로가 피묻은 칼을 잡은채 뛰쳐 들어온다. 카를로를 찌른 후 당황하여 그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사람의 기척이 있는 동굴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곳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 레오노라와 알바로...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뿐. 알바로는 자기가 카를를 결투 끝에 찔렀음을 설명해준다. 바위 뒤에 쓰러져 있는 카를로에게 달려간 레오노라... 하지만 카를로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증오의 심정에서 레오노라를 칼로 찌른다. 마침내 레오노라는 알바로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수도원의 신부가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바그너(Richard Wagner, 1813~1983)의 오페라 작품 5개와 각각의 스토리1. 지크프리트(Siegfried)제 1 막미메의 집발퀴레에서 신의 비극이 있은 후 지상에서도 그 인습이 생겼다. 니벨룽겐의 난쟁이인 미메는 그의 집안과 같이 가르쳐 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감사하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미메는 겁을 먹고 죽은 파프너에게 가까이 온다. 동시에 알베리히는 그것을 엿보고 있다. 미메는 마침내 지크프리트를 쫓아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본 알베리히도 뛰어 나와 두 사람은 반지와 요술 투구 때문에 싸운다. 이때 지크프리트는 작은 새가 가르쳐 준대로 반지와 요술 투구를 갖고 동굴속에서 나온다. 이것을 본 두 사람은 지크프리트에게 분해하지만 위험을 느끼고 자취를 감춘다. 새는 다시금 미메에게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한편 미메는 지크프리트에게 가서 그를 꾀어 반지를 뺏으려고 한다. 그에게 피곤할 터이니 이 약을 먹으라면서 수면제를 먹이려 한다. 미메가 억지로 약을 먹이려고 하자, 그는 칼을 뽑아 그녀의 목을 짤라 버린다. 지크프리트는 미메의 시체를 동굴속에 던져 버리고, 구렁이의 시체로 동굴의 입구를 막아 버린다. 지친 몸으로 나무그늘에서 쉬는 지크프리트는 고독해져서 새에게 아내를 갖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새들은 다시 행운을 가르쳐 주는데 높은 산 위에 불로 둘러싸인 브륀힐데를 깨우기만 하면 그녀는 그의 신부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젊은 지크프리트는 그것을 알고 기뻐하면서 새들을 따라 그녀가 잠자는 바위산으로 향한다.제 3 막황폐한 바위산 기슭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이다. 보탄은 바위산의 한쪽에 나타나 지혜의 여신 에르다를 부른다. 차츰 동굴속이 밝아지며 푸른빛이 나는 안개에 감싸인 에르다의 모습이 나타난다. 보탄은 에르다에게 신들의 장래를 행복스럽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지만 에르다는 대답을 못한다. 거기서 보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보탄과 에르다와의 사이에 태어난 브륀힐데의 일이 화제가 되고, 지크프리트에게 그녀를 깨우게 하여 신들의 유산을 이어 받도록 하자고 보탄은 말한다. 그러나 에르다는 이 두사람이 니벨룽겐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반지를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러자 보탄은 불쾌해져 다시 에르다를 잠들게 한다. 다시 동굴속은 어두워져 폭풍이 멎고있어서도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상한 모습이다. 칼을 빼는 대신에 그는 트리스탄을 책망하는 길다란 베이스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한다. 트리스탄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아리아를 듣고 있다. 그는 이졸데에게 왕을 떠나서 자신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겠노라고 대답한다. 질투심이 많은 멜로트가 이 말을 듣더니 그의 칼을 뺀다. 그는 왕의 명예를 위해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트리스탄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멜로트는 그에게 속죄의 표시라며 상처를 입히고, 마르크왕은 싸움을 중단시킨다. 이졸데는 부상당한 그의 품에 와락 달려든다.제 3 막브리타니에 소재하고 있는 트리스탄의 성이다. 트리스탄은 바위에 앉아 멍청히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충실한 쿠르베날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는데, 양치기의 구슬픈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상처의 악화로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서도 트리스탄이 그리는 사람은 바로 이졸데였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는 쿠르베날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그녀에 관한 긴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피리의 선율이 바뀌고 마침내 이졸데의 배가 보인다. 쿠르베날은 해변가로 급히 서둘러 가고, 홀로 남은 트리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친다. 그는 격앙하여 붕대로 감은 상처 부위에 눈물을 떨어뜨린다.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울부짖으면서 달려오고, 트리스탄도 "이졸데"를 소리쳐 부르면서 그녀의 품으로 비틀비틀 다가간다. 그는 연인을 힘껏 포옹하고는 숨을 거둔다. 그때 한 척의 배가 도착한 것을 알리는 목동의 피리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흥분이 무대를 휘감는다. 브란게 네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마르코 왕이 그들 두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쿠르베날이 그들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한다. 그는 멜로트를 죽이고 자기 자신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자기의 주인인 트리스탄 곁에서 죽어간다. 그 유명한 "사랑의 죽음 (Liebes tod)"이 울려퍼진다. 이졸데는 마치 트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미(美)이론 비교1. 고대의 예술에 대한 개념【테크네】 - 첫째, 인간이 하는활동 - 둘째,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 - 셋째,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여 학습과 교육이 가능한것 - 넷째, 테크네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2. 플라톤의 입장테크네를 두가지로 분류 ► 획득적인 테크네 – 자연에 이미 주어져 있는것을 이용 ex) 장사꾼의 돈벌이 활동 ► 생산적인 테크네 – 자연에 없는 것을 새로이 만들어 냄 ex) 목수의 기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술 ☆ 모방적 테크네 – 이미지 혹은 모방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원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 ► 진정한 유사성의 모방 ► 외형적 유사성의 모방3.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존재론적 이원론을 주장 – 현실계와 이상계로 세상을 이분 이데아의 세계가 보다 진정한 세계라고 보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상계에 대해서는 큰 가치를 두지 않음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내에서 회화는 모방의 모방,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며, 형상을 결여4. 플라톤의 미의 대이론관념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 - 수많은 아름다운 사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미, 즉 아름다움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봄 아름다운 사물들이 지닌 속성 “적당한 척도와 비례를 유지하는 대상은 항상 아름답다” “적당한 척도가 결여되면 추하다” → 수학적인 개념으로 취급5. 고대 말기 플로티노스의 등장플로티누스 : 고대 철학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룬 사람 - 실재에 대한 사색과 종교적 구원에 관심이 많았음 -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Neo-Platonist)라고 불림 미가 부분들의 비례와 배열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미가 존재하는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 - 비례의 미는 비례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비례를 통하여 스스로 표현하는 영혼, 즉 비례를 '조명해주는' 영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6. 플로티누스의 유출설플로티누스는 가시적 세계의 배후에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일자(一者)가 있다고 주장 빛이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듯 일자에게서 흘러나온 것도 일자와 멀어질수록 불완전하다 : 유출은 본질의 위계에 따라 단계로 이루어진다 제 1 실체 – 일자 : 가장 높은 단계 존재근원 제 2 실체 – 정신 : 신적인 이성의 세계에 있으며, 신과 동일하다고 할수 있는 순수사유인 정신 제 3 실체 – 영혼 : 순수영혼 혹은 창조성과 생화의 원리인 영혼의 단계 제 4 실체 – 질료 : 육체적인 단계와 마지막 단계로는 규정되지 않은 질료들 균제와 통일은 미의 외형적 요소에 불과, 미의 근원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주장7. 플로티노스 미 이론의 의의회화가 플라톤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 중세 교부철학자들은 플로티누스의 일자를 신(神)으로 대체하여 기독교의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사용 플로티누스 이후의 중세 미학에서 비례와 함께 그것을 보충해주는 요소로서 “밝음” 혹은 “광휘성”이 추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의 세가지 조건 ① 완전성 ② 적합한 비례와 조화 ③ 밝음(clarity)8.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핵심정리- 공통점 - 플라톤이 세계를 관념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세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과 플로티누스가 세계를 빛이라는 관념을 도입해서 그것의 유출단계설로서 세계를 설명한 것이 유사한 점이라 할수 있다. 그들 모두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관념적인 이데아와 빛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 - 차이점 – 플라톤은 현상계와 이상계를 나누어서 설명했고,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의 원형은 이상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플로티누스는 일자의 빛, 또는 속성이 만물에 긷들여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 일원론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The End{nameOfApplication=Show}
모방,변용그리고...김중업모방, 변용 그리고../김중업/ page/ 건축년도: 1961 / 위치: 서울 서대문구 합동 30/ 연면적: 1,600M²/ 규모: 지상 4층/ 구조: 철근콘크리트구조1.건축가 김중업1900년대 식민지와 6.25전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세계 건축의 흐름에 '소외'정도를 너머, '고집'으로 일관된 우리나라의 건축적 상황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한국 건축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건축가이며, 자기만의 독특한 건축적 경지인 서양건축의 한국화 혹은 한국건축의 현대화를 이룬,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건축가가 바로 김중업이다.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시와 그림에 탐닉하던 그는 그림교사의 권유로 요코하마고등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의 나까무라 준뻬이 교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일본의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힌 뒤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2년 베니스국제예술가 대회에 참가, 여기서 근대건축의 건축가 거장, 르 꼬르뷔제를 만나 파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들이 설계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였다.1956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자신의 창조성을 보다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거대한 세계를 펼치는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꼿꼿한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성격, 비타협적인 작가의식 때문에 군사정권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오다 1971년 11월 거의 반강제적으로 출국, 프랑스로 추방되어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78년 11월 영구 귀국. 1988년 5월 1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서울대 교수, 홍익대 교수, 프랑스 공인건축가, 하버드 객원교수 등을 거치면서 필그림 홀 계획안(56년), 부산대학교 본관 및 유수 대학의 건물들, 주한 프랑스 대사관(59년), 부산 충혼탑(80년), 서울올림픽 기념비(85년) 등 국내외에 대략 200여개의 프로 먼저 부산대학교 인문관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느낌도 그렇지만 특히 기하학적인 외벽은 마치 르 꼬르뷔제의 롱샹을 연상시킨다. 건물의 전체적인 느낌도 샹디갈의 행정 청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지만, 부산대 건물은 곡선으로 돌아가는 부분의 전체를 유리로 처리하여 상당히 가벼워 보인다. 또한 르 꼬르뷔제의 경우 보통 계단실이나 렘프가 공간 연출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형태와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김중업의 경우 큼직큼직하고 단순하게 처리가 되었다.건국대 도서관의 기본 형태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거 같다. 건물의 입면을 마르세이유의 유니떼 다비다시옹의 느낌을 받을수 있으며 기둥과 벽체의 분리와 램프의 사용, 외부 계단에서 르꼬르뷔제의 건축 언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내부를 보면 중앙의 램프가 1/3의 레벨차를 두고 세방향의 연람실을 접근할수 있도록 했다.또한 조형적인 작품 중에서도 특히 서산부인과 병원의 발코니와 제주 대학의 본관의 곡선 램프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가우디의 건축과 매우 유사하다.삼일 빌딩에서도 미스 반데로에의 시그램 빌딩을 모방한 것이지만 베이 간격이나 코아 부분을 유리와 철로 처리한 미스와는 달리 콘크리트 월로 처리를 했다.위에서 보듯 자신의 건축에서 성취해야 할 좌표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르 꼬르뷔제의 롱샹성당을 꼽았듯이 김중업은 자신의 작품에 그러한 요소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부분은 르 꼬르뷔제 같은 건축가들의 언어들을 온통 꼴라주 한 것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김중업의 톡특한 생각이 강하게 반영 된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의 배치 방법이 르 꼬르뷔제 하고는 전혀 달랐다. 르 꼬르뷔제의 경우 다양한 건축 요소를 병치시키기 위해 단일 건물에 여러 요소를 집어 넣고 자신의 고유한 감각으로 이들을 하나로 통합시킨데 반해 김중업은 미묘한 각도로 어긋나게 배치된 건물들에서 상호 어울림이 일어나도록 했다.또한 이 시의미를 주로 한국의 전통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지붕선이라든가,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 옳다. 그리고 김중업 자신도 “한국전통건축의 특색 중 하나는, 무거운 중국의 지붕과는 달리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지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지붕이 사뿐히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라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건물의 본질을 한국 전통의 현대화에만 촞점을 맞출 경우, 이 건물이 가지는 많은 덕목들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건물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으며, 특히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표상적이기 보다는 존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 건물이 그런 것을 뛰어 넘는 본질적인 차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경사진 대지에 세워진 각 건물들은 아무 움직임 없는 대상으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미묘한 울림을 일으키고, 또 그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망과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대지와 건축과의 관계, 건축이 지니는 구축성, 채와 채의 미묘한 충돌, 부분과 전체가 갖는 상관적인 스케일과 같은 건축의 본원적 덕목들이 고스란히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2)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세워지기까지깁중업은 1959년 봄에 당시 프랑스대사였던 로제 샹바르로부터 설계제안을 받았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김중업을 포함하여 7명의 건축가에게 동시에 의뢰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중업은 9월에 설계안을 제출하였고 김중업의 안으로 결정된 것은 3개월후인 12월이었다. 그 다음해 초에 실시설계를 시작하여 1960년 가을부터 공사를 착공하였다. 1961년 5.16때 몸체가 완성되고 1962년 봄에 완공되었다. 처음 설계제안을 받고 꼭 3년만에 완공이 되었으나 공사가 생각처럼 쉽게 진행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프랑스 대사관측은 예산부족으로 공사를 일년 남기고는 거의 돈을 지불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중업은였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사용된 곡선 지붕은 단순히 형태적인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지의 기운을 건물로 끌어들여 밖에로 내뿜는 반향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대사집무실과 대사관저는 마치 자기장을 형성시키는 중심처럼 건물 주위로 하나의 장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각각의 건물에 형성된 장은 마치 여러개의 자기장이 서로 충돌하면서 전혀 다른 모양의 자기장을 만들어내듯이, 건물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거닐다 보면 높이와 스케일이 다른 건물들 사이에서 공명과 간섭, 복합성이 계속해서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도 그 구체적인 매력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미묘한 울림때문이라 여겨진다.(4) 건물배치의 시지각적 체계건물의 대지가 입구부분에서 꼭대기까지 높이차가 12m이상 차이나는 경사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런 대지 조건을 고려하여 김중업은 네 개의 건물을 따로 따로 배치하였다. 이 네건물은 대사관저, 대사집무실, 영사관 건물, 그리고 직원용 주택으로서 이들을 시지각적 측면에서 엄밀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배치계획을 지배하는 몇가지 원칙들을 발견할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시점을 교묘하게 조절하고 유도하는 배치계획을 통해 고도의 질서를 구현한 점이다. 여기서 세가지 시점을 짚어보았을때, 첫 번째 시점은 건물입구에 들어선 순간이며 이시점에서는 각각의 건물들이 일정한 각도들을 유지하면서 서로 비틀어져 있다. 또한 이 시점을 중심으로 대사관저와 대사집무실, 그리고 영사관 사이에는 세 개의 동심원이 그려짐을 알 수 있다. 즉, 김중업이 상상한 배치개념은 개방적이고 서로 엇갈려있지만 입구를 향해 구심적인 질서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점은 영사실의 계단을 오르는 부분으로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사관으로 올라가던지, 대사관저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길지의 선택을 하게되고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되어 있다. 이 곳에서 것이다.(5) 건축의 구축성(tectonic)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중요한 특징이 바로 건축의 구축성이다. 이개념은 김중업이 1950년대 처음 건축활동을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진 이후 1980년대 활동을 마감할때까지 이것은 그의 건축에 계속해서 지배하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김중업이 자신의 건축을 담을 구축체계를 고민하면서 생각하였던 것은 그리스의 신전, 한국의 전통건축, 그리고 서양의 근대건축, 이렇게 세가지였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하면서 이들 각각이 가지는 차이점을 차츰 명확하게 이해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김중업은 지붕과 기둥의 구축관계에 있어서는 서양의 전통적인 구축체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각 부분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구축성과 한국의 지역적인 구축성을 추가한다. 지붕의 형태와 구성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구축체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기능을 부여하는데는 건물의 주요기능들을 구획하는 벽체와 지붕을 구조체와 분리하여 모든 하중을 기둥이 지탱하되 내부의 입면이나 평면은 자유롭게 구성되도록하는 르 꼬르뷔제의 그것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매우 독창적인 형태구성방법으로 그 이후로도 김중업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적 특징을 형성하게 된다.(6) 김중업의 지붕김중업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모티브가 바로 지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한국건축의 지붕을 메타포한 것이라고 보는데, 사실 이것의 원전은 르 꼬르뷔제의 주지사 관저와 행정청사라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르 꼬르뷔제는 아치나 피어, 혹은 피로티로 지지된 지붕을 설치하면서 건물을 태양과 비로부터 보호하고, 또한 시원한 미풍과 시각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파라솔 효과를 거두려는 시도를 했으며 김중업이 자신의 건축에 사용한 지붕의 건축언어도 똑같은 이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김중업은 르 꼬르뷔제의 그러한 지붕을 한국적 정서에 맞게 변형하였다. 이러한 변형은 주로 두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지붕의 형태에 관한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