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세덕은 한국희곡에서 보기 드물게 어촌을 배경으로 한 어민극을 다수 창작하였다. 그가 남긴 어민극을 찾아 그 주제와 드라마트루기를 살펴보자.함세덕의 초기작품은 리얼리즘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것은 유치진의 영향과 일제시대의 어려운 시대 상황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어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시절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그가 유년기를 보낸 목포항과 청소년시절의 인천항 주변은 아름다운 자연조건과 함께 오늘날과 다름없는 거항으로서 식민지적 삶의 치열한 현장이었기에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는 폭넓게 관찰하고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함세덕의 이 같은 성장환경은 뒷날 작품의 소재로서 애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리얼리즘으로 발전) 한다.그렇다면 그의 작품 중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어민극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의 처녀작인 「산허구리」와 「무의도 기행」,「해연」,「동어의 끝」등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해연」과 「동어의 끝」은 본격적인 어민극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이제 「산허구리」와 「무의도 기행」, 두 작품을 중심으로 그 주제와 드라마트루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산허구리」는 단막극으로 서해안의 한촌인 산허구리를 배경으로 삼고, 배를 타거나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 간신히 살아가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상어에 다리를 잃은 아버지, 바다에 큰 아들을 잃고 실성한 어머니, 바다에 남편을 잃고 과부로 살아가는 큰딸,집안일을 하는 복실, 조개를 줍는 막내아들. 이렇게 다섯 식구가 바다에 갔다가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 둘째아들을 기다리는 것에서 시작되어 시신이 되어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다음으로 『무의도 기행』은 떼무리라고도 불리 우는 인천근처의 어촌이 그 배경으로 바다에 두 아들을 잃고 딸은 유곽으로 팔아야했던 궁핍한 어민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극의 주인공은 두형의 목숨을 가져간 바다를 등지기 위해 항구에서 세달 동안 방황하지만 결국 섬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른들의 강요에 의해 결국 바다에 나가게 된다.이 「산허구리」와 「무의도 기행」은 내면화된 현실인식의 약화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로 극도의 궁핍한 어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가족의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다. 「산허구리」에서는 인간과 바다의 갈등이 작품의 주된 갈등으로, 인간과 바다의 대결에서 참담하게 패배한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의도 기행」에서는 주인공인 천명이 어촌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습을 그 당시 일제 식민지하의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다음으로 「산허구리」를 통하여 드라마트루기를 살펴보자.함세덕은 드라마트루기가 뛰어난 작가였다. 그런만큼 그의 드라마트루기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중에서도 「산허구리」는 뛰어난 드라마트루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산허구리」는 ?전진적 모티프에 의한 단일구조?)를 띄고 있다. 이 작품은 중심된 줄거리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나간다. 복조의 죽음이라는 극적사건이 중심축이 되어 전진적 모티프에 의해 전개되면서 강력한 위상을 전달해주는 서정적 비극)의 계열에 속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진적 모티프란 ?극적?이라는 말로 사건이 전개되어 나갈 때마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이 앞을 향해 진전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을 말한다. 플롯에서 이 극적이라는 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극은 탄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줄거리의 층위별로 극적 사건을 보면 ?전사와 비극성의 강화?)를 볼 수 있다.전사라는 것은 이미 극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산허구리」에서의 전사를 찾아보면 큰아들이 풍랑을 만나 죽었다는 것, 아버지가 상어에 다리를 잃은 것, 큰딸의 남편역시 풍랑에 희생되었다는 것, 둘째 아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며칠 째 돌아오지 않음으로 그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다음으로 ?은폐된 사건 진행과 비극적 체험의 전달?)의 방법을 보면 줄거리 전략인 ?담장 너머 보기?와 ?타이코스코피(사자의 보고기법)?이 있다.담장 너머 보기는 극적 사건진행의 중심공간이라 할 수 있는 늙은 어부의 집에서 가까운 선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해줌으로써 무대 외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다음 타이코스코피는 전사에 위치하는 과거의 일들이나 무대 중심 공간에서 멀리 위치하고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등장인물을 통해서 보고해주는 기능을 한다.
◎ 종합예술인 연극의 양식이 하루아침에 새로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창극 역시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무대화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 창극의 성립에 관계된 전통연희의 제반 영향을 찾아보자.우리나라에서 창극은 어떠한 형태로 변화?발전 하였으며 그 첫 시작은 어떠하였을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창극 발전의 그 첫 번째 시작은 경국에서 힌트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882년에 우리나라가 청국과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뒤 청국인들이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청국 연희패들의 공연도 열리게 되었다. 그 중 경극은 그 다채로운 극적 구조와 창 스타일의 표현방식이 우리 명창들에게 공감과 함께 창극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판소리의 분창에 나섰고 최초의 형태는 남녀명창의 대화창 수준이었다.)이렇게 분창 형식으로 발전하여 1902년 협률사란 극장이 생겨나면서 일인십역 형태였던 것이 일인일역의 창극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08년 원각사의 설립과 함께 창극의 형태로 더욱 확립되게 된다.이러한 창극의 발전에 전통연희인 판소리는 어떠한 영향을 가지게 되었을까?창극이 처음부터 창극 자체만의 형식을 갖춘 채 공연되었던 것은 아님을 위에서 알 수 있다. 많은 변화와 발전?쇠퇴를 거듭하면서 그 형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 첫 시작으로 판소리의 창극화를 보자면 그 과정이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판소리 자체가 다역의 극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만 나누어 부르고 무대 뒤에 간단한 배경 그리만 걸어놓으면 그대로 창극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원각사에서 올려졌던 초기 공연들의 수준이 낮았음에도 불과하고 짧은 시간 안에 그 수준을 끌어올려 수류어족 분장까지 하기도 했었던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하지만 판소리의 창극과 과정에도 ?과도기적 양상?)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 과정을 차례로 밟아 진행된 것이 아니라 성급한 마음과 무리한 변화로 인한 것들이었다.그 후 창극은 레퍼토리의 부재와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까닭에 주춤하게 되고 이인직의 「은세계」를 창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하게 된다. 하지만 1910년대에 와서 창극의 발전은 미미할 뿐이고 그 후 신파극의 영향) 을 받게 되면서 변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일본 경찰들에게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창극을 비롯한 전통예술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어 창극이 위축되는 반면에 정통판소리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1920년대까지도 창극의 수준은 높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하지만 1930년대 중반이후가 되면서 창극은 눈에 띄는 진전을 하게 된다. 1934년 전통연희자들은 조선성악원을 조직하게 된다.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의로 바뀌게 되면서 창극의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된다. 1930년대 이후의 창극은 전래의 다섯 바탕 판소리를 창극으로 공연하게 된다. 이 때 공연 되었던 ) 은 그 인기가 굉장하였다. 거기다 60대 명창들이 주고받았던 느린 중모리조는 판소리예술의 극치였다 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