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제 1 장 ASEM 개요 --------------------------------------41. ASEM 의미와 출범 배경 -------------------------------4가. ASEM의 의미 ------------------------------------4나. ASEM의 출범배경 ---------------------------------42. 회원국 현황 ----------------------------------------63. ASEM 운영체제 조직 ---------------------------------6가. 개 관 ------------------------------------------6나. 회 의 ------------------------------------------7다. 의사결정방식 ------------------------------------94. 3대 협력 분야 --------------------------------------9가. 정치대화 ---------------------------------------9나. 경제·재무 협력 -----------------------------------9다. 사회·문화 등 기타 분야에서의 협력 --------------------95. ASEM의 특징 ---------------------------------------10가. 지역간 협력 -------------------------------------10나. 천층통합 이전단계 --------------------------------10다. 협력의제의 포괄성 --------------------------------11라. 비공식성 및 비제도화 ------------------------------12{제 2 장 ASEM 그리고 8년 ----------------------------------121. ASEM 정상회의의 내용과 성과 --------------------------12가것이다. ASEM의 조직구조와 운영체제를 살펴보면 지역별로 별도로 준비회의를 개최하기도 하고 지역적인 입장을 조율하기 위하여 조정국을 지역별로 선정하여 지역별 조정국 회의도 개최하는 등{) 조정국회의의 경우 통상적으로 유럽 측에서는 EU집행위원회와 의장국이 조정국으로 참여하며 아시아 측에서는 ASEAN에서 1개국, 한국·중국·일본과 같은 동북아 국가에서 1개국이 조정국으로 선정된다. 조정국의 선정은 논의 현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부산대, 김종연,「ASEM의 전략적 의의와 한국의 대응방안」, 2001 p.38 인용)지역과 지역간의 협력이라는 성격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의 기본적인 운영체제는 의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각 지역 내의 국가들 간의 협력 및 대화관계를 증진시키는 역할도 해왔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나. 천층통합 이전단계경제의 통합은 천층통합(Shallow Integration)과 심층통합(Deep Integration)의 두 단계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천층통합이란 국가간 상품교역만의 자유화를 의미하며 심층통합이란 상품교역의 자유화뿐 아니라 서비스교역, 투자 그리고 자본 및 노동 등의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지역통합협정은 상품교역의 자유화만을 지향하는 천층통합의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투자의 자유화 문제는 지역통합협정의 주된 목표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지역협정의 경우 심층통합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으며 이러한 협정에서 투자의 자유화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일반적으로 자유무역지대를 천층통합의 단계로 그리고 그 이상의 지역통합협정을 심층통합의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NAFTA의 경우 각 회원국이 제3국에 대해 독자적으로 관세를 설정할 수 있는 자유무역지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비단 상품교역의 자유화뿐만 아니라 서비스, 투자, 자본이동 등의 측면에서 자유화를 지향일환으로 범유라시아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전자상거래 활성화 지원, 정보격차 해소 등 신규사업을 주도함으로써 지식·정보화 분야에서 한국의 역할 및 활동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셋째, 한국은 제3차 정상회의를 통하여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등 지속적인 개혁의지를 천명하고 ASEM을 통한 무역·투자 원활화, 자유화 및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우리의 지지 입장을 확인시킴으로써 우리 경제에 대한 대외신인도를 크게 제고하였다. 특히 국제금융체제 강화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에 합의함으로써 경제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ASEM차원의 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ASEM 논의에 적극적인 참여는 한국 경제외교의 다변화와 대외통상환경을 개선시켜 우리 기업의 대외진출기반을 보다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넷째, ASEM을 통해 EU, ASEAN 등 지역경제협의체와 관계 강화 및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간 경제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장차 나타날 수도 있는 지역경제협의체로부터의 무역장벽을 완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라. 제4차 정상회의 (2002.9.22-24, 덴마크 코펜하겐)1) 주요내용{ ) 「Chairman's Statement of the Fourth Asia·Europe Meeting」, Copenhagen, September 2002 참조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사태 이후의 테러근절을 위한 공동협력 강화와 한반도 평화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는 등 주로 정치분야에서 심층적인 논의가 이울어졌다. 한국으로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코펜하겐 정치선언이 채택되고, 김대중 대통령의 철의 실크로드 구상에 대해 정상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등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정상들은 공정하고 투명한 다자간 무역체제를 유지해 나가고, WTO에서 제시하고 있는 원칙하에 도하에서 논의되었던 무역관련 이슈들을 성실히 이행해 나감으로써 양지역간 경제협력 관계를 확대해 나가자는데 합의하였다. 또한 WTO협상에 대한 상호이해 증진을 위한 협의회대, 보완하여 21세기 ASEM의 비젼, 기본 원칙 및 목표, 협력 분야별 중점 추진 사업, 운영 메카니즘, 신규회원국 가입 지침 등 총 29개항으로 구성되었다.AECF 2000(Asia-EuropeCooperation Framework 2000)은 ASEM이 아시아-유럽간의 연대강화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공동인식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경제·사회 발전의 촉진, 평화와 안정의 증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며,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공동의 이익과 열망을 가진 공동발전과 평화의 지역으로 발전시킨다는 비젼을 갖고 세계화 등 당면한 도전을 대화와 공동의 노력을 통해 기회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면서, 동등한 동반자 관계와 상호 이익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유럽간의 강화된 대화와 협력을 통해 국제협력을 증진시키고 새로운 국제 정치. 경제 질서를 건설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AECF의 기본원칙으로 1) 상호 동등, 상호 존중 및 호혜 2) 개방적, 점진적 process{) 신규회원국 가입은 정상들의 consensus에 의해 결정하기로 하였다.3)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 증진과 협력 4) 정치, 경제, 문화 3분야(3 pillars)의 균등(equal) 발전 추진 5) 비공식 과정으로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지양 6) 정부간 협력을 넘어서 민간분야 협력 및 인적교류 증진을 채택하였다.AECF은 경제협력분야에서의 핵심원칙으로 1) 지속적 경제성장 촉진, 세계화의 영향 대처, 범세계적 경제대화 2) 경제장관회의 및 무역·투자 고위관리회의(SOMTI)는 WTO 체제를 기반으로 한 다자무역체제 강화, 무역원활화 행동계획(TFAP)과 투자촉진 행동계획(IPAP) 이행, 강화를 통한 무역·투자 확대, 아시아-유럽 비즈니스 포럼(AEBF)의 중심적 역할 등과 관련한 대화를 강화 3) 재무장관회의와 재무차관회의(FDM)에서 국제금융체제를 포함한 범세계적인 금융문제 등에 관한 대화 촉진, 금융 감독과 규제협력 강화, 돈세탁 근절을 위제의 지역적 환경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EU는 아시아와의 정치적 협력을 증대시켜야 하며, 국제적인 사안의 운영에 있어서도 아시아와 더욱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세계무대에서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동반자적 파트너쉽을 이끄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EU가 이런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지역안보대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여야 하며, 특히 분쟁지역인 한국 등의 국가와의 발전을 이끌어 내야 함을 서술하였다. 아시아와의 사업기회에서 이익을 얻는 측면에서 유럽의 성공은 민간부문에서 취해진 결정, 민간부문에 의해서 취해지지 않은 결정에 달려있음을 지적하고, EU의 역할은 아시아에서의 우호적인 규제환경을 이끌어냄으로써 유럽의 무역과 투자에 대한 장벽을 극복하고,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시장개방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EU는 더욱 적극적인 전략을 채택할 필요가 있으며. 유럽의 무역과 투자를 증진시키기 위한 경제적 협력의 강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재정적인 리소스내에서 충분히 달성되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보고서는 EU·아시아간의 경제관계의 확대에 가장 커다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EU가 아시아와 협력기반 확충에 있어서 외교·안보, 지구촌 문제해결, 인권보호, 환경협력 등의 여타 과제보다는 경제협력에 보다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EU는 아시아와의 경제협력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첫째, 다자주의의 강화 및 상호주의 원칙의 적용. EU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대아시아 경제협력확대 전략에 있어서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 협상 기구에서의 협의기반 구축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있어서는 양 지역 간의 교역증대, 투자확대 및 기업부문 특히 중소기업간의 협력관계 개선을 위해 기본적으로 개방하고 투명한 다자간 교역규범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함이 지적되고 있다. 이에 있어서 E이다.
Ⅰ. MELO할리우드에서 영화의 장르가 확립된 1930년대부터 멜로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는 서로 다른 모체를 가졌다. 다시 말해 멜로드라마가 드라마의 서브 장르라면, 로맨틱 코디는 코미디의 서브 장르가 되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감정에 호소하며,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가족의 병 혹은 재난으로 인한 비극적 결말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준다. 즉, 마음이 아파 울지 않을 수 없을 만한 장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것이 멜로드라마이다. 반면 로맨틱 코미디는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여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가볍고 유머러스한 터치로 그려내며, 해피엔딩으로 마감한다. 여기에는 눈물 대신 결코 웃음을 참지 못할 요소들이 포진하게 된다. 따라서 는 멜로드라마가 되고, 는 로맨틱 코미가 되는 것이다.'멜로드라마'라는 용어는 가장 널리 쓰이면서도 그 정의가 정확치 않을 용어이다. 토마스 샤츠는 「헐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멜로드라마를 음악 melo와 드라마 drama가 결합된 내러티브 형식이라고 정의했다. 멜로드라마는 대부분 개인이나 커플이 결혼, 이별, 가족 문제들과 관련된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환경에 희생되는 대중 연애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관객으로부터 감정의 과잉이나 쾌락을 이끌어내면서 체제 밖에서 위치하기보다는 체제 내에서 순응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몇 몇 이론가들로부터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고 비판받아 오기도 했다.Ⅱ. 『약속』『약속』(1998) - 조직의 보스와 경제적 지적능력을 모두 소유한 여의사의 이루지못한 사랑이야기1. formula○ 이룰 수 없는 사랑여의사와 깡패 두목의 흔치않은 설정은 기존의 남성 우월주의 영화에서벗어나려는, 즉 멜로의 상식을 엎어보려는 의도적 차별화라고 보여지지만여의사라는 설정은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절정을 극대화시킨 연장선○ 동화적 사랑성당에서의 결혼식은 사랑하는 이들이 가족을 이루고, 남자를 자신에게머물도록 함으로써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멜로의 한 양상○ 남자 중심의 스토리 전개극한사랑이야기1. formula○ 이룰 수 없는 사랑운명적 만남을 통해 결혼까지 하게 되어 행복한 신혼을 보내던 중 남편의죽음. 남편의 부재라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토대로 함○ 순응적 여성상남편의 죽음으로 정인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편지 몇통으로 다시 용기를 회복하고 가정을 지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공간에 채워진 여성의 환상, 절대적 사랑으로 가정은 붕괴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 관계남성은 언제나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여성은 스스로 수동적인위치로 전락하고 만다2. convention○ 사랑앞에 무엇이든 하는 남자자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아내가 걱정이 되어 편지를 남길 만큼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 눈물정통멜로물답게 정인은 남편의 죽음에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 흘리고 자살까지 생각함. 또한 남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 한 남자에게 얽매이게 되는 환상속의 사랑○ 모순전통 멜로 안으로의 회귀는 변해 가는 이데올로기와 사상에도 불구하고스타일과 내러티브, 그리고 착한 주인공들과 어울려 하나의 진실이 되어버리고, 그 공식에서 벗어나는 여자들은 나쁜 여자로 몰아버린다. 이러한영화 속 시각은 시대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용되고 흡수된다3. iconography○ 기차역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 우연함을 더욱 강조하여 사랑의 아픔을강조함○ 수목원세속적 사랑이 아닌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하여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 비디오로 녹화된 '편지'멜로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편지는 사랑을 이루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편지가 죽은 남편의 부활을 의미하며 이로 인하여남편의 부재를 힘겨워하던 정인이 다시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된다○ 뇌종양뇌종양의 고통속에서도 남겨질 아내를 걱정하며 편지를 남기는 남자의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 아들남편의 분신으로서 정인의 현실적 욕망에 대한 포기와 남편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암시함4.제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 객석에서눈을 감으며 흘린 한방울의 눈물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의미○ 모순전통 멜로 안으로의 회귀는 변해 가는 이데올로기와 사상에도 불구하고스타일과 내러티브, 그리고 착한 주인공들과 어울려 하나의 진실이 되어버리고, 그 공식에서 벗어나는 여자들은 나쁜 여자로 몰아버린다. 이러한영화 속 시각은 시대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용되고 흡수된다3. iconography○ 정연의 가게무능력하고 사고만 치고다니는 삼류 코미디언 남편으로 인해 힘든 삶을살아왔음을 은연중에 암시, 사기꾼에 속아 자신이 유명해지겠다고 가게를팔라고 강요하는 남편의 모습은 힘들게 살아온 정연의 모습을 암시○ 죽은 아이아이를 잃은 엄마와 아빠라는 설정은 애틋한 감정을 심어주기에 적당함○ 삼류 코미디언자신의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운데도 남을 웃기기 위해서 무대 위에 오르는, 우스꽝스러운 광대 분장속에 슬픈 표정은 극적 대비를 통해 더욱슬픔을 강조함○ 첫사랑아내를 위해 찾던 첫사랑이 결국 남편 용기임이 아내의 남겨진 편지를통해 밝혀지는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암시Ⅴ. 『파이란』『파이란』(2001) - 삼류 양아치 이강재와불법체류자 파이란의 사랑이야기1. formula○ 이룰 수 없는 사랑파이란은 사랑하는 이강재를 끝내 만나보지 못하고 처철한 고독 속에서생을 마감한다.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들은 슬픈 죽음을 맞이한다2. convention○ 無3. iconography○ 하얀 포말을 날리며 부서지는 파도바닷가에 앉아서 파이란이 죽기 전에 남긴 편지를 보면서 오열을 하는강재의 심정이 파란 바다와 함께 솟구치는 파도의 이미지와 겹친다○ 빨간 머플러강재가 무심코 던지 빨간 머플러를 두른 파이란은 만나지 못한 사랑에대한 애절함을 더한다○ 삼류 양아치와 불법 체류자고달픈 삶을 사는 이 두사람의 실낱같은 사랑은 간절하고 마냥 슬프게한다4. 기타이 영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삼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달 이강재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중국 여인 파이란의 가슴 아아내가 안정적인 중산층에 속해 있음을 지시해준다.그러나 90년대 멜로드라마에서는 남녀 사이의 사회경제적 상하관계가 철폐돼 있고, 직업의 신분지시적 성격이 거의 없으며, 직업이 라이프 스타일을 지시하는 기호로 사용되는 트렌디화 경향이 나타난다.예컨대 '파이란'의 남자 주인공은 삼류 양아치, 여자는 불법체류자인데, 이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또 '편지'의 남자 주인공은 임업연구원, 여자는 국문과 대학원생인데 이들은 수목원 사택에 있는 신혼부부로 설정된다.2. 가족관계를 차단한 사랑의 공간멜로드라마의 전형은 가정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게 일반적이다. 또 가족관계가 내러티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워도 다시한번' 이나 '자유부인' 같은 한국 멜로드라마의 원형으로 꼽히는 작품들에서는 이같은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하지만 90년대 멜로드라마에서는 가족관계가 차단돼 있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남녀 주인공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파이란'의 주인공은 대단원까지 만날 뻔한 것이 전부이고, '편지'의 주인공은 외부와 동떨어진 수목원 사택의 신혼부부로 설정된다.3. 헌신적인 남성상의 부각멜로드라마 내러티브 공식에서 남녀 관계는 '남성-가학, 여성-피학' 으로 고통받는 여인상을 부각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90년대 멜로드라마에는 고통받는 여인상이 사라지고, 대신 헌신하는 남성상이 부각된다.'편지'의 남자 주인공 환유는 첫눈에 반한 여성 정인과의 사랑을 위해 해외유학을 포기하고 결혼한다. 반면 정인은 결혼으로 자신의 일인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인은 불치병에 걸린 환유의 간호를 위해서 국문과 강사직 요청을 거절하려 하지만 환유의 만류로 그일을 맡고, 결국은 교수직을 얻는다. 심지어 환유는 일하고 돌아온 정인의 발을 씻겨주기까지 한다.4. 감정의 절제멜로드라마 양식의 일반적 특징은 '과잉'으로, 특히 비극적 정서를 과장해서 관객의 눈물을 유도하기 위한 연기나 대사의 과장과 음악의 과도한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멜로드라마는 이에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없다. 그리고 순응적 여성상을 담고 있지도 않다. 완벽한 남자를 그리지도 않는다.이러한 공통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벗어난 『파이란』은 그래서 우리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기존의 고답적인 멜로드라마가 우리에게 절대적 사랑, 남자중심, 순응적 여성 등을 강조하는 통속적, 가식적 멜로드라마였다면 『파이란』은 새로운 변형인 것이다.한국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인식은 과히 좋지 않은 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멜로드라마들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기존의 통속성과 가식성, 체제 순응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멜로드라마들은 사람들에게 뻔한 이야기, 극장에서 보기 돈 아까운 영화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공식과 관습에 얽매여 정통멜로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진부한 멜로드라마들은 사람들을 식상하게 하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파이란』은 그러한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멜로드라마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기존의 공식과 관습을 깨고 신선하고 파격적인 멜로드라마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절반이 멜로드라마이다. 많은 멜로드라마들이 아직 공식과 관습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깊은 장르 연구를 통해 머지 않아 멜로드라마라는 장르가 한국장르영화의 주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본다.Ⅷ. 자 료1. 멜로드라마의 가능성과 한계--, , 를 중심으로장르로서의 멜로드라마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장윤현 감독의 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부각된 현상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넓은 의미에서 멜로드라마는 늘 우리 곁에 소리소문 없이 존재해 온 일상의 장르였다. 한해에 생산되는 영화 중에서 절반이상이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대부분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삭으러 들지라도 말이다.
1991 & 2003목 차----------Ⅰ. 서 론Ⅱ. 걸프전에 대한 조명1. 걸프전의 지정학적 배경2.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입과 그 배경3. 걸프전의 전개과정Ⅲ. 걸프전 이후1. 미국의 對 이라크 입장2. 미국의 군수산업과 걸프전Ⅳ. 신국제질서1. 2차 대전 이후2. 걸프전의 영향Ⅴ. 미국 중심적 세계 체제Ⅵ. 2003 이라크 전쟁1. 미국의 의도2. 중동지역 영향력 강화3. 유라시아Ⅶ. 결 론Ⅰ. 서 론국제관계가 크게 변하고 있다. 과학기술, 정보·통신의 발달이 변화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1989년 동구의 해체, 1990년 독일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국제세계에 있어서 그 어느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역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냉전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대결시대를 마감하고 세계의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야기하였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극으로 미국에 대항하면서 버텨오던 공산대국 소련의 해체와 1992년 1월의 독립국가연합 출현, 1991년 6월 유고슬라비아 해체, 1993년 EU의 출현, 1994년 1월 NAFTA 출범, 1995년 WTO체제 출범이 새로운 국제정치·경제 질서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 우리는 국제세계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수정에 직면하여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냉전이후에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는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걸프전'이다. 1991년에 일어났던 이 걸프전은 현대 국제세계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UN이라는 국제조직에 의해 국제 공권력 사용이 정당화된 사건이었다. UN은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무력사용에 대해 법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전쟁에 깊이 관여하였다. 걸프전은 또한 탈냉전이후 군사력에 있어서 최강을 이루는 미국의 국력과 경제부국인 일본, 독일 등의 원조 등에 힘입어 치러진 전쟁이었다.Ⅱ. 걸프전에 대한 조명1. 걸프전의 지정학적 배경미국의 이중적 대중동정책은 걸프만을 국제분쟁지역 환경을 만들도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셋째, 국경분쟁, 즉 영토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입은 "윈스턴의 팔꿈치"라는 말로 잘 이해될 수 있다. 이 말은 윈스턴 처칠이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을 책정할 때 팔꿈치가 흔들리는 바람에 본래의도와는 달리 각도가 모나게 그려져 국경선에 엄청난 오차가 나게 됐다는 말이다. 이런식으로 중동지역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국경선을 책정하게 됨으로써 걸프전의 원인인 이라크, 쿠웨이트 분쟁사태가 발생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의 4개 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2차 대전후 영국이 보호령으로 삼음으로써 이라크에서 분리되고, 왕정국가로서 하나의 독립된 나라가 되었다.마지막으로, 이런 사태의 원인으로 세력균형의 부재 상태를 들 수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른바 Pax Americana 즉, 미국에 의한 세력균형 유지가 가능했으나 그 후 중동에서의 미국 세력이 상당히 위축됨에 다라 불안정성이 증대되었고 이란의 팔레비 왕정) 레자 샤(1878∼1944)가 세운 이란의 왕조(1925∼1979). 레자 샤는 처음 前왕조 카자르왕조를 섬긴 군인(뒤에 총리)이며, 영국·러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이 된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前왕조의 폐지를 결의한 뒤, 국민의회에 의하여 국왕에 추대되어 新왕조를 수립하였다. 완전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모든 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 추축국에 가담한 이유로 영국·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고,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에게 양위하였다. 2대 왕 팔레비는 농지개혁과 종교개혁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79년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혁명이 일어나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이 왕조도 무너졌다.이 몰락한 후에는 힘의 진공상태가 초래되었다. 이같은 미국세력의 위축과 중동지역의 힘의 공백이 사담 후세인으로 하여금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모험을 하게 만든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 대해서는 여전히 군사적 위협이 상종하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급속한 군수산업의 몰락을 방지하는 한편, 제3세계 국가에 대해서는 무기판매 시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미국의 기본전략과 군사정책의 변화 속에서 미국의 군수산업은 무기수출의 시장확보를 위하여 더욱 제3세계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미국은 예산삭감에 따른 내부 군비수용의 위축에 대비하여 이미 방위비 분담이라는 명목으로 제3세계에 무기구매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는데, 이것이 걸프전의 한 당사자인 이라크의 군사 체제의 강화에도 기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중동은 미국의 제3세계 군수시장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 6개국이 제3세계 무기수입 총량의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진출 내지는 개입을 시작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 저지, 석유의 확보,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을 중심목표로 한 미국의 중동정책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이러한 중동의 전략적 위치를 생각할 때,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미국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미, 반이스라엘 강경파 국가인 이라크가 세계 석유매장량 3위인 쿠웨이트를 점령하여 중동지역에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패권을 장악하는 것은 당시까지 중동에서 독점적으로 패권적 지위를 누려온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걸프만 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이 대규모의 군사력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2) 미국 군사경제체제가 걸프전에서 노리는 이익미국은 걸프 위기에 대해 공격적이고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전개했는데 이는 단순히 쿠웨이트의 왕정복구나 사우디의 방위를 위한 차원이 아니라, 군사화된 경제로 뒷받침되고 있는 미국의 중동전략을 실현키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걸프전쟁에서 노리는 것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는 이라어서 미국의 고마움이 엷어졌다. 달러 과잉의 발생에는 전후의 국제금융제도 자체에 모순이 있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즉, 달러는 미국의 통화임과 동시에 세계의 통화였다. 그리하여 세계경제가 확대하여 달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그에 적합한 달러의 공급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국제수지가 적자로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달러의 신용을 손상시키게 되었다.미국의 위신이 크게 흔들린 것은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는 대실패의 사건이다. 아이젠하워의 적극적 월남정권 지원에 이어, 1961년 케네디는 미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다. 1965년 2월 7일 존슨은 북폭을 개시하였다. 폭격과 군대의 투입에 의한 지원효과도 없이 베트남 정세는 미국에 있어서 점차 절망적으로 되었다. 1973년 3월 29일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정식 철수하고 75년 월맹군의 공격에 의해 월남정부는 붕괴되었다. 결국 베트남전은 미국의 완패였다. 경제적 부담, 사회간접자본의 황폐화, 인적손해, 사회적 황폐화, 사회적 균열, 미국의 국제적 신용하락 등 베트남전 실패의 타격은 컸다.존슨은 1964년 연두교서에서 "정부는 빈곤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초등교육, 중등교육, 노인의료, 빈곤대책의 확대를 실행하게 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재정상황을 무시한 과대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베트남전쟁을 위한 막대한 지출이 더해졌다. 정부의 적자는 증대하였고 인플레가 발생하여 미국경제는 현저하게 허약해졌다.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는 급속히 커져 1971년에는 298억 달러라고 하는 거액이 되었다. 이미 달러를 지탱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드디어 닉슨은 1971년 8월에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하고, 12월에는 8.57%의 달러의 절하를 실시하였다. 1973년 세계는 변동환율제로 바뀌었다.카터 시절 국내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레이건은 '과감한 세율인하와 정부규제의 철폐에 의한 기업가적 본능과 창조성의 회복'이라는 목표의 레이거노믹스를 주장하 미국 쇠퇴론은 1990년대 들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1992년부터 미국경제가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생산성 증가율에서부터 산업생산과 선도산업의 시장점유율, 심지어는 재정적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지표들이 미국경제의 부활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Ⅴ. 미국 중심적 세계 체제미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세계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경제력은 다른 모든 국가의 경제력을 압도했으며, 혼자서 세계 총생산의 50퍼센트 이상을 담당했다.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 회복, 그에 뒤이은 아시아의 폭 넓은 경제 성장으로 인해 세계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몫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비해 크게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종식되는 시점에서 세계총생산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 좀더 구체적으로 세계 총제조품 중 미국이 차지하는 몫은 대략 30퍼센트 정도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수준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예외적 수준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20세기를 통해 미국이 견지했던 평균 수준이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적 목적을 지닌 과학 기술의 혁신에서 미국이 계속 주도권을 쥐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주도권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기술적으로 경쟁 상대 없는 군사 체제를 창출해냈고, 이 군사 체제는 전세계에 효력이 미치는 유일한 군사 체제이다. 더욱이 미국은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정보기술에서 강력한 비교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래의 경제를 좌우할 수 있는 영역에서 미국이 구가하고 있는 주도권은 미국의 기술적 지배가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아울러, 미국이 유럽 국가나 일본에 대한 생산성의 우위를 고수 내지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또한 미국은 더욱 선진적인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메카가 되고 있다. 약 50만명의 외국 학생들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의 상당수가 모국으로 돌아가것이다.
한국신문산업의 문제점Ⅰ. 서 론Ⅱ. 한국신문산업의 역사적 변천Ⅲ. 과당경쟁1. 경영 위기 자초하는 과당경쟁2. 과당 경쟁의 원인Ⅳ. 비용과 수익1. 고비용 체제2. 수익성3. 보급망의 집중Ⅴ. 신문과 광고1. 광고수입의 확대가 신문제도에 끼친 영향2. 광고와 신문경영Ⅵ. 소유의 집중1. 족벌경영2. 소유구조3. 경영권과 편집권의 관계4. 미디어 권력화Ⅶ. 시장의 집중Ⅷ. 결론Ⅰ. 서 론한국은 세계적인 대형신문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신문대국이다. 적어도 발행부수 면에서는 그렇다. 미국의 신문관련 전문잡지인 Editor & Publisher가 발표한 발행부수 기준 세계 20대 신문에는 한국의 신문이 4개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대형신문이 많은 나라는 일본뿐이다. 반면 미국과 독일은 각각 한 개의 신문만이 20위권에 포함되었고, 프랑스 신문은 단 하나도 20위안에 들지 못했다. 세계의 20대 신문의 발행부수1Yumiuri Shimbun, 일본10,223,9232Asahi Shimbun, 일본8,321,1383Sichuan Ribao, 중국8,000,0004Bild, 독일5,674,4005Mainichi Shimbun, 일본3,978,6176Sun, 영국3,687,3707Chunichi Shimbun, 일본3,075,3208Nihon Keizai Shimbun, 일본2,827,6629Gongren Ribao, 중국2,500,00010Daily Mail, 영국2,364,31511Daily Mirror, 영국2,350,73712동아일보, 한국2,150,00013Renmin Ribao, 중국2,150,00014중앙일보, 한국2,020,00015한국일보, 한국2,000,00016Sankei Shimbun, 일본1,977,12217조선일보, 한국1,960,00018Eleftherotypia, 그리스1,858,31619Xin Min Wan Bao, 중국1,800,00020Wall Street Journal, 미국1,752,693(자료 : Editor & Publis권력과 유착된 자들만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시대는 신문 용지 구입은 신문 발행인 협회가 담당하였으며, 외국산 신문용지를 구입하는 시기로 생산비는 운영비의 70%정도의 수준이었으며, 인쇄 시설의 설비투자도 원조 자금에 의존하는 시기였다. 50년대 중앙 일간지는 자본규모와 종업원 수에서 중소기업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열악한 형편이었다. 이 시대의 광고 수입은 20∼30%로 미미하였고, 신문 판매에 의존한 시기였다. 1960년 7월 1일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의 공포를 통해 등록제가 실시되어 언론기관들의 증가가 이루어졌으며 이권으로 여러 집단들이 출연된 시기였다. 1961년 5·16 이후 군정 기간은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통제와 함께 경제적 지원을 통해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상호 호혜적으로 정립해 가는 과정으로 정부의 정책 실천에 협조하면서 비판적인 언론 활동이 약화되는 시기였다. 일간 신문들의 신규 발행 시설 기준은 1962년 7월의 "언론 정책 시행 기준"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이 기준에 미달한 신문사는 자진 폐간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에 통과한 언론은 정부의 지원과 경제 개발에 힘입어 기업적 성장을 해 나갔다. 이 시기의 일간 신문사는 39개로 중앙지와 지방지로 자리잡게 되었다.1972년 유신 체제 이후는 정치 통제와 언론 조작으로 통신사와 지방지의 통폐합이 이루어졌으며, 신문 기업은 대형화, 대기업화로 치닫고 있었고, 전파 매체와 결합되는 다각적인 구조적 특성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신문 기업은 다각 경영으로 잡지, 출판업을 중심으로 방송, 광고, 제지, 호텔업 등 신문 이외의 사업 부분과 연계되어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는 양상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부는 1980년 한국 언론 사상 대규모의 언론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언론통폐합의 특징은 지방지의 1도 1사 원칙, 통신사의 통합·단일화, 신문과 방송의 경영 분리 및 방송의 공영화, 중앙 일간지의 정비 및 재편 등 맞게되자 무한경쟁은 결정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각 신문사는 감면을 서둘렀고 확장지를 상당부분 거두어 들였다. 광고시장이 무너짐에 따라 무한경쟁을 감당 할 수 없게된 때문이었다. 많은 신문사들이 경영위기를 맞아 우선 살아남기에 바빴다. 신문기업에 뛰어 들었던 여러 재벌들이 신문기업에서 발을 뺐고 일부 신문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아직까지 경영난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그런데 2001년에 접어들어 뒤늦게 경품과 무가신문을 뿌려 자원을 낭비한다는 등 “신문공해"라는 이유로 신문사들이 뭇매를 맞았고 정부에서는 신문고시를 서둘러 제정했다. 신문고시는 무가지와 경품류 제공 제한 등 여러 가지 판매경쟁을 규제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과당경쟁이 살아나 경영위기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2. 과당 경쟁의 원인신문과당경쟁 원인은 우선 신문기업 수입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사는 신문판매수입과 광고수입, 그리고 기타사업 수입 등으로 운영된다. 대체로 광고수입이 70-80%를 차지하고 신문판매수입은 20%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문기업의 수입구조가 이렇게 구분되는 것은 신문이 가지는 이원적 기능 때문이다. 우선 신문기업은 독자 대중에게 소식과 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제공하는 정보전달매체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그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전달 내용이 신문기업 스스로 취재 보도하는 기사 정보와 광고주 의뢰에 따라 상업적 목적으로 제공되는 광고정보로 분리되므로 그 수입이 이분화된다고 볼 수 있다.광고수입이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에 따라 신문경영이 좌우된다. 따라서 판매비용이 얼마가 들든 신문 부수를 늘려 광고수입을 더 많이 올려야 된다는 생각이 과당경쟁을 촉발시켰다. 그래서 6.29 선언 이후 시설경쟁 및 증면, 확장지 살포 등 과당 경쟁으로 우위를 확보하려는 경쟁을 불러 왔고 컬러화 경쟁, CTS 경쟁, 지역 분 공장 설치 경쟁으로 치달았다. 결국 이런 경쟁이 이제는 신문경영에 큰 부담으로 안겨졌을 뿐 아니라 광고수입 비9.3-169.8-36.6세계일보328.6389.962.5-33.2조선일보4,164.54,753.6-67.7428.3중앙일보3,464.53,852.2-816.066.6한겨레신문837.1942.3-39.77.4한국일보2,302.42,652.4332.0-445.6연합뉴스544.6549.7-60.9-64.9계16,452.919,604.1-1,843.8-424.3(자료 : 2002 / 2003 한국신문방송연감, 한국언론재단, 2002) 중앙 종합 일간신문·통신 수익성 지표신문명매출액순이익률(%)총자산순이익률(%)자기자본순이익률(%)2001년2000년2001년2000년2001년2000년국민일보-14.44-61.47-29.09-86.04--대한매일-50.0510.01-19.093.52-56.90-10.59동아일보적자전환2.95적자전환1.58적자전환3.30문화일보-36-6.11-34.33-6.25-48.40-8.01세계일보19.03-8.512.84-5.60자본잠식자본잠식조선일보-1.639.01-1.5811.34-2.7918.09중앙일보-23.551.73-15.941.14-65.712.83한국일보14.42-8.43---연합뉴스순손실순손실순손실순손실순손실순손실(자료 : 2002 / 2003 한국신문방송연감, 한국언론재단, 2002) 중앙 종합 일간신문·통신 재무구조(단위 : 억원)신문명자산부채자본2001년2000년2001년2000년2001년2000년경향신문1,311.31,446.4-131.5국민일보149.5163.5203.8172.1-54.3-8.6대한매일2,256.22,670.11,630.21,643.0626.01,027.1동아일보5,718.65,740.03,864.03,405.01,854.52,335.0문화일보428.6561.3164.1123.5264.0437.8세계일보55.8555.21,132.11,203.5-586.3-648.3조선일보4,625.23,955.92.327.71,396.22,297.42,559.8중앙일보5,307.84,927.54,437.43,314.287N)Ⅵ. 소유의 집중1. 족벌경영1987년 이후 정기간행물의 증가는 이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무한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무한경쟁은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지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증면 경쟁이고 둘째는, 분공장 설치와 같은 무리한 투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공정 경쟁이다. 이것들은 갑작스럽게 카르텔 체제가 풀린 이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신문사들의 방만한 경영의 한 모습이며, IMF 체제가 진행되면서 신문산업이 위기의 국면에 들어서게 만든 주요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중앙일간지의 매출액이 증가하는 것 못지 않게 부채도 증가하였다. 중앙일간지의 부채가 1991년에서 1996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하였다.) (한국언론연구원, 1998a, 19쪽)문제는 은행 차입금은 이자부담을 높여 수익률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1998년의 경우 9개 중앙 일간지의 평균 부채비율은 868%로 국내 상장회사의 평균치인 340%보다 두 배 이상 높으며, 가장 높았던 한국일보는 10,246%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동황, 1998, 20쪽)불공정 시장 행위는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문사의 재무구조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재벌 신문 또는 신문 재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불공정 시장행위는 대기업의 신문 소유 또는 신문 소유 집중에 의한 신문재벌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2. 소유구조 종합일간지 주식소유현황일간지명자본금주식소유현황(%)총주주수주요주주친인척지분단체,기업지분경향신문133억우리사주조합 100국민일보320억국민일보판매(주) 1001명동아일보150억인촌기념회 24김병관일가 34.75일민문화재단 5.23김병관 0.87재호(자) 15.61재열(자) 9.37병건(제) 6.79명초(제) 2.11계 34.75인촌기념회 24일민문화재단 5.23100명문화일보538.7억우리사주 38.46문우언론재단 30.63동양문화재단 30.63남시욱 0.19이인원 0.095명대한매일544억재경부 49.98포철 36.73KB다.
Ⅰ. 서론올해 1월 20일 부시 미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으로 지칭했고, 이로 인해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경색된 북미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북·미 기본 합의의 돌파구가 됐던 경수로의 완공시한은 2003년이지만 그 시한을 지키기란 이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저런 사정으로 북·미 기본합의의 핵심사항은 계획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또한 미사일 시험 유예기간이 내년으로 다가옴에 따라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방한한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으며,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세간의 한반도 전쟁발발 우려를 덜어냈다.그런 한편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정권은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독재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도라산 역 및 오산기지 연설 중에서 부시는 북한 김정일 정권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 갖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하여 한반도 위기설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지난 10월 17일 미 국무부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시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흐르고 있다. 미국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현실화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Ⅱ. 일련의 사태부시는 9월말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대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북한에 보낸다고 알려왔다.) 『한겨레21』 2002. 10. 31당시 전문가들은 남북, 북일 관계 진전 등을 감안한 부시 대통령의 용단으로 풀이했다.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것은 10월 3일에서 5일까지 사흘 간이다. 이틀째인 10월 4일,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핵 개발을 시인했다고 한다.) 『뉴스메이커』 2002. 10. 315일 평양에서 서울에 도착한 켈리 차관보는 북한의 핵 개발 시인을 한국정부에 통보했다. 하지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핵 개발 시인사실이 전다.백악관의 스콧 맥클레렌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핵 개발 시인 문제를 이라크의 위협과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맥클레렌 대변인은 "지역이 다르면 상황도 다르다"며 "이라크는 주변국에 위험을 가하고 살인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독재자가 정권을 쥐고 있다"고 밝혔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미국은 현재로는 북한을 상대로 군사행동에 나설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다. 강경파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이라크가 중동평화를 위협하는 정도는 북한과 비교할 수 없으며 미국은 이들 국가가 저지르고 있는 일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고"고 지적했다.) 『뉴스메이커』 2002. 10. 31'북한과 이라크는 다르다'는 미국의 입장을 말해주고 있다.이에 반하여 북한은 핵 개발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DC (neither confirming nor deny)로 일관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담화문 앞머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농축 우라늄 계획을 추진해 조미 기본 협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들면서"라고 핵 개발 계획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담화문 뒷부분에서는 "우리는 미국의 핵 압살 위협에 대처해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가지게 돼 있다"고 밝혀 핵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현재는 북한이 먼저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미국과 핵 개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인 만큼 미국이 먼저 북한 체제 보장 및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북한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Ⅲ. 북한의 대미외교6·25전쟁을 통해서 김일성은 미군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남한 지도자들이 북한군의 남침을 염려하듯이 김일성,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 역시 한미연합군의 북침을 두려워한다. 그 근거로 1994년 중지된 팀스피리트 훈련을 들 수 있다. 진주북한과 함께 테이블에 앉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적화통일이라는 방안을 마련했다.) 『신동아』 2002년 12월 p.286∼p.288이러한 결정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나 경제 협력 같은 민족내부문제는 남한과 협상하나, 군사문제와 한반도 통일방안 같은 안보문제는 미국과 협상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974년 북한은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이러한 북한의 공세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한반도 안보문제를 놓고 미국이 북한과 바로 대화하는 것을 결산 반대하였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지나면서도 북·미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위의 책, p.2881990년 동유럽이 연쇄적으로 붕괴와 1991년 걸프전에서의 미국의 승리에 북한은 큰 두려움을 느낀 듯, 안보문제를 남한과 논의했다. 그 결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고(1991년), 남북한 불가침합의가 이루어졌다.(1992년) 그런데 김영삼 정권 때인 1993년 북 핵 위기가 터져 나오면서 북한은 불리하게 진행돼 온 남북관계를 역전시키고 20여 년 간 고대해온 미·북 회담을 여는데 성공했다. 미 고위급 회담의 결과물이 1994년 10월에 나온 제네바 합의다. 안보문제의 비중을 줄인 가운데 줄기차게 남북대화를 요구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미국이 마주 앉을 수 있게 허용했다. 6.15 공동선언으로 민족문제를 일단락 시킨 북한은 미국과 안보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 9일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미국에 보냈고, 그에 대한 답례로 클린턴 정부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냈다. 클린턴의 임기가 조금 더 길었다면 북·미 정상회담도 열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고 보수적인 부시 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 고위급 회담은 끊겼다.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달리 북한과 대화를 거부했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다음에는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북한으로 향하던외교부시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묶어 악의 축으로 규정한 사흘 뒤, 두가지 전제조건이 붙은 북한과의 대화에 용의가 있음을 표시했다. 하나는 북한이 재래식 무기를 뒤로 물려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사일 및 미사일 기술수출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이미 20년 전에 한국의 단독 군사력이 북한의 군사력을 앞질렀다. 한국 혼자서도 북한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미국까지 합세한다면 압도적 군사력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탱크, 비행기, 장갑차 등은 서울을 침공할 수 있는 모든 전력에서 떨어지고 전진 배치된 야전포대로 서울을 사정권에 둠으로써 남한과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상호병력감축이 아닌 일방적 병력감축은 북한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은 서울이나 워싱턴은 물론 도쿄와도 정치적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미국은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 북미공동성명을 무시하고 부시대통령의 선동적인 발언으로 적대감에 불을 끼얹고 말았다. 또 1994년 10월에 체결한 핵 기본 합의의 이행을 강요하면서도 북한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부시 행정부는 군사력이 열세한 북한에 대하여 군사력 균형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재래병력 감축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미사일 협상에 대한 의지가 있는 북한을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의 근거로 삼고 있을뿐더러 미사일 유예에 대한 대가인 '적성국 교역법에 따른 경제제재(Trade with Enemy Act)' 또한 미국은 풀지 않았다. 경제제재라는 것이 굶겨 죽이겠다는 정도의 제재임을 감안하고 위의 일방적인 미국의 행동들을 볼 때 공갈 협박을 해 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 볼 수 있다.미국 행정부는 북한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개선보다는 그냥 붕괴하게 내버려두자는 것이 미국의 입장으로 보여진다.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3또한 부시행정부의 강경몰이는 지난 9월 공개된 '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다시한번 확인됐다. 보고서는 테러리즘과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군사행동의 최우선대상으로 삼고 필요할 경우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한겨레21』 2002. 10. 31 남북한 군사비 비교(단위 : 1990년 불변 억 달러) (1992∼96은 경상)구분*************98419881990199219941996북한28.833.240.445.546.949.655.456.063.0남한24.838.458.163.886.393.3111.9135.0145.0자료 : 『국방백서』1998. p.158Ⅴ. 1994년지난 94년 협정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1000메가와트급 경수로를 2003년까지 건설·제공하기로 했으나 계획은 꼬일대로 꼬여 연기되면서 올 여름 들어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50만톤 중유지원계획은 경수로가 기능을 발휘할 때까지 북한의 열악한 에너지 난을 돕기 위해 해마다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북한은 제대로 지원 받은 적이 없었다. 미국 쪽 중유 지원국은 이미 의회 승인을 받았으나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94년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면서 지원을 거부했다.여기에서 94년 북한 핵 위기 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과연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또는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플루토늄을 대량 추출하여 은닉해왔는가. 이것은 북한 핵에 대한 모든 논란이 출발하는 지점이며 최종적으로 수령되는 핵심질문이다.이 질문에 대해 북한 핵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해 온 미국정부의 인식은 분열되어 있었다. 국무부는 온건론을 대변했고, 국방부와 CIA는 강경론을 대변했다. 그러나 CIA도 정황증거만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증거는 내세우지 못했다.) 1993년 7월 CIA는 한완상장관에게 북한 핵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1994년 9월 14일 한림과학원 세미나에서 한완상 장관의 발언.그리고 강경론의 본거지인 국방부 안의 정보실무자들은 미국이 반드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