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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 가문의 영광 평가B괜찮아요
    영화 가문의 영광을 통해 우리나라의 신세대 구세대의 잘못된 결혼가치관에 대해서 알아 보겠다.영화가 막 시작됨에 있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둘은 전혀 알지 못한 사이이고, 여자는 혼전 성 관계를 자신이 알지 못한 남자와 가졌다 라는 오해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그 후 여자의 오빠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남자에게 동생을 책임지라는 내용이 전개된다. 영화 전반부에는 아무것도 내새울 것이 없는 깡패아버지와 오빠들이 그저 집안 좋은 사위를 보겠다고 강제로 결혼을 시키는 내용이 나오지만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의 두 주인공은 연애 아닌 연애를 하며 결혼까지 성공한다는 이야기 이다. 정말로 황당한 이야기 이지만, 아니 현실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사회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준 로맨틱코미디였다. 정말로 우리나라의 결혼관은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 그리고 성실성과 근면성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부모님 세대는 사자가 들어가는 사위 이른바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예 그리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 물론 돈, 사회적 지위, 돈은 있으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결혼의 필수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도 처음에 부모님의 강제로 둘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에 대해 구체적인 말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사회이 병폐를 고발하는 한 장면이자 한국사회의 사자사위 선호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생각이 든다.그러나 현대여성 즉, 신세대들은 조금은 다른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제도 결혼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을 결과할지라도, 결혼 전의 여성들은 물론 기혼 여성들도 남성과의 대등한 만남과 결혼생활을 추구하며, 결혼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결혼은 중요한 것이지만 부모가 억지로 강요하는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신세대에 있어서는 결혼적령기란 물리적인 나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결혼을 삶의 한 과정으로 선택하며 걸혼 조건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망설이지 않고 결혼을 포기한다. 기혼여성 또한 결혼생활에서 불만이 누적되면 어렵지 않게 이혼을 결정한다. 또한 이들은 결혼해서 가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사회참여를 통한 자아실현을 중요시 하며 독신생활을 선호하기도 한다.결혼에 있어서도, 특히 한국의 신세대 여성들은 중매결혼을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남녀의 자유로운 만남과 결혼을 당연한 권리행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혼전 성관계와 미혼모 문제 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조사결과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전망을 하고 있다. 10년 후, 결혼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변화될 것이며, 개인주의에 입각한 계약식 이성교제 관과 결혼행태가 등장할 것이고, 배타적인 일대일의 남녀관계에 대한 가치관을 지지하지 않고 일회 적인 만남 내지 가벼운 만남이 남녀관계의 주요 특성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여성의 배우자 조건은 매우 현실적이다. 한국여성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남성의 직업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다음으로 성격, 학력, 경제력을 갖춘 건강한 남자이며, 미혼여성들의 최고 결혼 상대자는 우자 조건은 매우 현실적이다. 한국 여성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남성의 직업을 가장 먼저 고려하며 다음으로 성격, 학력, 경제력, 나이 등을 고려한다.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신랑감의 조건은 경제력을 갖춘 건강한 남자이며, 미혼여성들의 최고 결혼 상대자는 전문직업을 갖고 있는 남자, 즉 "경제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일에만 쫓기기 보다는 레저 등 부부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남자"이다. 또한 이들은 장남보다 차남과 막내를 선호하며, 배우자의 성격 내지 가치관 등 내면적인 것보다는 경제력 등 외양적인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신세대 여성들은 과거 부모 세대가 원하던 이른바 '사'자 들어가는 신랑감이 아닌 3F를 갖춘 남자, 즉 돈과 시간, 그리고 일로부터 자유로운 남자,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일을 떠나 둘만의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남자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40대 이상 나이든 세대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상의 내용과 다른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다. 나이든 세대의 여성들은 훌륭한 내조자로서의 역할에 결혼의 의의를 두고 있으며, 연애결혼은 지향 하되 부모의 의견을 중요시하고, 배우자의 성격 내지 가치관 등 내면적인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신, 구 의 구도로 결혼관이 조금씩 달라져 왔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세대나 구세대나 허영을 가지고 가문을 중시하고 개인의 명예와 돈을 중시하는 것 즉, 조건부 결혼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결혼관 정말로 현실적인 것에만 취우 쳐야만 하는가를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현실적인 것이 최상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최소한의 경제력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사랑을 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독후감/창작| 2002.10.20| 3페이지| 1,0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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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답사기] 고려.조선의 대외교류 평가D별로예요
    고려.조선의 대외교류경복궁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조금은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에게는 가까우면서 먼 곳이 되어버린곳…….수업의 연장이기 때문에 갔었지만 그날은 박물관이 하지 않아서 다음날 다시 찾았다. 어릴 적 사생대회, 글짓기 대회 장소로만 여겨졌던 곳이 나이가 든 다음에 와서 보니 경복궁의 웅장함과 멋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로만 들어왔던 선조들의 문화유산, 정말 실제로 본 이후에 다시금 우월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우리의 뛰어난 문화를 주변국에 전파했으며 또한 영향을 받아서 더 뛰어난 작품으로 승화시켰는데, 그러한 증거가 박물관에 여실히 증명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고려, 조선시대의 대외교류는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그 증거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려시대..우리나라의 영어이름인 korea가 곧 고려에서 유래했듯이, 고려는 당시에 벌써 서역을 비롯한 주변각지에 알려질만틈 매우 개방적인 나라였다. 고려 전기에는 고려의 적극적인 선진문물 수입정책과, 고려를 매개로 한 송의 요, 금 견제책등 이해관계가 부합되어 송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후기에는 오랜 전쟁 끝에 고려와 특수한 관계를 맺은 원나라가 대외 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고려는 또한 일본을 비록 멀리 아라비아 등과도 비교적 활발히 교류하여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송과의 교류)위에서 말한 것 같이 고려는 송, 요, 금 사이의 역학관계를 활용하면서 송과의 교류에 힘썼다. 양국은 활발한 사신왕래를 통해 사행무역을 통하는 한편 상인들을 통해서 많은 교역을 했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송에서 수입한 것은 도자기, 약재, 비단, 차, 서적, 악기 등이었고, 송으로 수출한 것은 인삼, 동물가죽, 금, 은 세공품, 나전 등이 있었다.그 증거로 황비창천 명동경과 명문동경, 백자 주전자등을 보았다. 황비창천은 화려한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백자 주전자는 연꽃모양의 세밀한 세공으로 되어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고려청자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원과의 교류)세계제국 원에 맞서 오랫동안 항전하던 고려는 13세기 후반에 원과 강화하였다. 이후 약 80년간 두 나라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많은 인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유년시절을 원에서 보냈으며, 이에 따라서 고려관료들이 원에 왕래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러한 인적 교류는 인삼, 도자기, 불경 등의 교역과 양국 간의 문화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 졌었다. 그 증거로 김훤의 모지석과 허공 모지석등에 잘 나타나 있다.여기서 내가 느낀 점은 우리 선조들의 세공술은 과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지석에 쓰여 있는 역사적 사실이 여기서는 더없이 중요하겠지만 비전문가적인 나의 입장에서는 붓으로 쓴 것도 아닌데 붓으로 쓴 것 같은 세공은 과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매우 자랑스러웠다.조선시대(조선전기)조선은 건국이후 명 중심의 조공체제에 편입되면서 사대교린에 입각한 대외교류를 진행시켰다. 중국과의 사대정책은 조공제도라는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왕권의 대내적 지배력과 정통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을 제외한 일본, 여진, 유구 등의 주변국가와는 교린정책을 기조로 교류가 이루어 졌다. 때로는 군사적 행동을 동반한 강경책을 그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의 통로를 마련해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대외적인 안정을 확보하였고, 일본으로 대표되는 주변국은 경제적 실리와 문화적 수혜를 얻을 수 있었다.위사실의 증거로서 통문관지를 볼 수 있었는데 통문관지라 함은 일본과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들이 무엇을 하고, 그 교역의 내용 등이 담겨있는 책이다. 이 글을 볼 때 그 당시 사신들의 왕래는 활발했음을 나타내고 있다.(조선후기)조선후기에는 한동안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강조 되었다. 그 후 조선은 점차 청나라를 중국의 지배자이자 중국 문화계승자로 인정 하였고 조선의 지식인층도 청나라의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후반 중국연경에 사절로 갔던 북학파 학자들은 발달된 문화와 서학 등을 신 문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조선의 변화와 발전도모에 이바지 하게 되었다. 황해 조총도는 명나라로 가던 사신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그 당시 조선후기에의 왕래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문헌으로는 설정선생의 조선일기를 들 수 있다. 설정선생의 일기로 그 당시의 명나라와의 관계와 어떤 식으로 왕래를 했으며가 잘 나타나 있다. 청으로 마음을 돌리기 시작한 증거로는 호병도와 표문 등으로 알 수 있다. 호병도는 청나라 병사의 모습을 잘 표현했고 표문은 조선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 초창기 명과의 의리를 중시했으나 점차 청을 중국의 지배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일본과의 교류)조선은 1607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후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통신사는 일본과의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외교사절로서 정사를 비롯한 400-500여명의 규모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체재기간동안 각지의 일본인들과 주자학, 문학, 의술, 미술 등을 비롯한 활발한 교류를 이루었다.
    인문/어학| 2002.10.20| 4페이지| 1,000원| 조회(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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