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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와 민족주의
    1.고려의 통일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민족분단 어언 반세기, 오늘도 우리는 민족의 최대 염원이자 숙제로 대두되어 있는 통일에의 여망에 대한 길을 돌아 몸부림 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다시 하나로 이어주고 모아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여기 후삼국 시대의 분열되고 흩어졌던 민심을 모아 민족 천 년의 정기와 자존을 세움은 물론 오늘날의 코리아로 불리우는 대 고려제국을 건설한 태조 왕건을 통해 그 해답의 일말을 찾고자 한다. 역사는 이긴 자의 몫이 아니라 남은 자의 몫이다. 이제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아 천 년전, 고려제국이 우리에게 일깨우고 남겨준 민족의 얼과 통일정신을 되살려 어려움 속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사의 오늘에 보다 크고 분명한 주제와 덕목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제시하려 한다.고려는 외세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룬 국가이다. 그리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그 스스로 황제라 칭하여 나라를 제국화 하였으며 자신을 짐이라 불렀다. 일찍이 우리 역사에 이처럼 호쾌한 시대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자만하거나 오만하였고 대부분의 나라를 건국하는 인물들처럼 독재적이거나 포악하지도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을 굽혔으며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으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늘 승리했다. 백성과 함께 했고 신의와 진리를 앞세워 인심을 얻은 결과였던 것이다.태조 왕건은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있어서 몇 가지 결정적인 그만의 훌륭한 방법론을 후세인들에게 제시 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화합론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한 핏줄인 발해의 망국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천 년의 명맥을 유지해 온 신라를 평화 적으로 이양 받았다. 뿐만 아니라 수 십 년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후백제의 시조 견훤을 제 발로 걸어와 스스로 투항하게 했다. 그것은 끝없이 전쟁으로 일관한 그 시대의 상호 관계를 감안 한다면 가히 기적적인 일제적 부담을 줄여 주었다. 결국 군사력에서 열세였던 고려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농민과 호족들의 지지였으며 그 지지는 고려조의 왕권이 유지되는 토대가 되었다.이러한 고려의 후3국 통일은 통치권 차원에서 지방에 대한 차별을 지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가 후3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효율적인 지방제도의 운영과 숭불정책을 통해 확고한 통일국가를 이루고 민족융화와 통일성을 강화한 것은 우리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고려가 후3국을 통일한데 따른 잠재적인 적대의식, 지방호족세력의 중앙관료 등용과 무장력 인정, 훈요십조(訓要十條) 1) 신서 10조(信書十條) ·십훈(十訓)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총애하던 중신(重臣)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주었다고 하며,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한다.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 ·남조(濫造)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車峴) 이남 금강(錦江) 이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에 의한 특정적인 인사 배제 등으로 인해 몇 가지 갈등요인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요인을 토대로 다양한 지방 유파(流派)가 형성되어 향토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신라하대의 사회정세①농민들의 끊임없는 봉기진골귀족의 전횡에서 바탕된 것으로 889년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일어나는하기에 이르고, 이들은 당시의 지방의 지배자이던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신라의 멸망과 후삼국 건설, 고려의 재통일 까지의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은 최치원, 최승우, 최응 등으로 주로 최씨였던 점이 특이 하다고 할 수가 있다.③새로운 사상들의 도입 - 풍수지리설과 선종9산ㄱ. 풍수지리설 - 약칭 풍수설 지리설이라고도 한다. 도성(都城) 사찰(寺刹) 주거 (住居) 분묘(墳墓) 등을 축조(築造)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려는 이론이다. 그리고 땅 속에 흐르고 있는 정기(正氣)가 물에 의하여 방해되거나 바람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산천의 형세에 따라 선택하여 주거(住居)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이와 같이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되어,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 2) 참위설의 연원은 미래예언서로 알려진 하도낙서(河圖洛書)에 두고 있다. 이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을 두고 일식·월식·지진 등의 천지이변(天地異變)이나 은어(隱語)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이다. 중국 한대에 성행한 참위설의 참은 하늘에서 내려졌다고 하는 예언이며, 위는 경서(經書)에 대비되는 위서(緯書)를 말한다.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 사람이 많다.ㄴ. 선종의 대두 -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 등 교학(敎學)을 중시하는 교종(敎宗)에 대하여,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禪)을 중시한다. 원래 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 3) 문자로써 교(敎)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입장을 표명한 표어.를 종지(宗旨)로 삼는다. 종파로 성립된 것은 개조(開祖)로 전해지는 달마(達磨)가 650년경 중국에 입국하면서 비롯되는데, 혜가(慧可) 홍인(弘忍) 혜능(慧能) 등으로 계승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784년(선덕왕 5) 중국 당(唐)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받아온 도의(道義)가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것을 비롯, 이후 선종 9산문이 성립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화엄종 법상종 등의 교종이 번성하면서 쇠퇴하였다가,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하면서 다시 번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의해 점차 쇠퇴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당시 불교 7종파를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폐합하면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의 세 종파가 선종으로 단일화되었다가, 1565년(명종 20) 양종제도가 폐지되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종파가 폐지되었다. 불교 암흑기로 불리는 산중 불교시대를 거쳐 휴정(休靜)과 선수(善修)에 의해 중흥되어 이후 활발하게 선법의 계통을 이어가다가, 포교활동이 자유로워진 한말 이후 원종(圓宗) 임제종(臨濟宗) 등으로 불리다가, 1941년에는 조계종이라는 종파의 명칭을 확정하였다.④ 지방 세력의 대두 - 호족호족이란 촌주 등과 같은 토착적인 세력과 중앙에서 내려온 귀족 출신이 지방 세력 형성한 것을 의미하며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불리는 호족이 큰 세력을 이루었다. 견훤의에 대해서는 평화주의적 외교 정책을 펴서 후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독자적으로 물리칠 힘이 부족한 신라로서는 원조를 얻기 위해서도 자연히 고려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이러한 친신라 정책으로 후백제의 고립 정책은 완성되고 후삼국의 외교전은 결말이 나게 된다.4. 통일이후 태조의 정책(1) 와 통일 후 태조는 호족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취약한 나라의 권력체계를 바로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대표적인 제도가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이다. 일단 지방을 다스릴 호족을 임명한 다음 그 자제들은 송악에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로 하여금 지방을 존중하되 그들의 권력 남용은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2) 와 삼한을 평정한 태조는 신하들에게 절의를 권장하고자 1권과 8편을 지어서 조정과 민간에 반포하였다. 이는 신하들이 지켜야할 도리와 백성들에게 행해야 할 정치의 요체를 적은 글이다. 19년 동안 왕 노릇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글로 남겼다.(3) 취민유도정책백성들이 잘 살수 있게 세금을 감면하고 사형자를 줄이는 등의 많은 일들을 한다. 나라의 정비는 백성부터라는 그의 정치철학이 잘 드러나는 정책이었다.(4) 북진정책평양의 서경이라고 중시하면서, 중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구려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려인 것이다. 북을 생각하며 만주를 꿈꾸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이런 바람이 맞았는지, 고려는 한반도 영토 대부분을 국가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5) 발해의 유민을 포섭하였다당시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대부분 고구려계인 발해의 왕족들인데, 태조는 이들의 융숭히 모시고, 자신의 성씨인 왕(王)씨를 내려준다. 당시에 태조의 민족주의적 측면을 잘 엿볼수 있는 예이다.(6) 통일 사업의 마무리940년에 이르러 태조는 통일 사업을 차근차근 매듭지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국적인 군현제 정비에 들어갔다. 경주를 대 도독부로 삼고 전국의 주요한 곳에 주를 설치해서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때 제정된 주는 상주, 양주, 충주, 청붙였다.
    사회과학| 2003.04.07| 10페이지| 1,000원| 조회(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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