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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트
    1. 칸트의 생애와 저술1724년4월 22일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다. 아버지는 마구 제조업자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안나 레기나(처녀 때의 이름은 로이터)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로 지어졌다.1730년(6세)쾨니히스베르크 시 변두리에 있는 병원학교에 입학하다.1731년(7세)어머니 레기나와 함께 신앙 의례와 성경 강독에 꼬박꼬박 참여하다. 엄마를 쫓아 강독을 따라온 꼬마의 재능을 알아본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 박사가 이끈 결과였다.1737년(13세)12월 18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1739년(15세)데이비드 흄의 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1740년(16세)9월 24일에 알베르투스 대학에 등록했으며, 같은 해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했다(1786까지 재위). 뚜렷한 직업적 목표 없이 자연과학, 철학, 수학, 신학, 문학, 언어학 등을 공부했으며, 슐츠와 요한 고트프리트 테스케 그리고 프리드리히 암몬 교수 밑에서 강의를 들었다. 특히 논리학 및 형이상학의 원외 교수인 마르틴 크누첸 교수에게서 배웠는데, 크누첸 교수는 칸트에게 스스로 공부하도록 아이작 뉴턴의 (1687)를 빌려 주었다.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 및 크리스토프 하일스베르크와 우정을 맺었다.1744년(20세)쾨니히스베르크에 혜성이 나타났고, 크누첸은 를 출간했다. 부활절에 스베덴보리가 런던에서 그리스도의 영상을 체험했으며, 1년 뒤에는 스베덴보리 앞에 하나님이 나타났다.1746년(22세)완전히 쇠약해진 칸트의 아버지가 3월 24일에 돌아가셨다. 칸트는 대학을 마치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이때 집필한 첫 번째 철학적인 저서 은 1749년에 출간되었다.1747년(23세)런던에서 스베덴보리의 제 1권이 출간되었다. (1758년까지 다섯 권이 나옴).1748년(24세)국가로부터 빚을 지기 싫어 장학금 받는 것도 거부했던 칸트가 재정적 자립을 위하여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하다. 처음 가정교사직을 맡은 곳은 굼비넨의 유드첸에 있는 다니엘 안더슈 목사의 집이었다. 흄의 가 취득 논문인 을 내놓았다. 흄의 이 독일어 번역본으로 나왔다. 알베르투스 대학에서 강사 자격을 얻고, 동양학 교수인 게오르크 다비드 키프케의 거처에서 첫 강의를 했다.1756년(32세)리사본의 지진과 관련해 세 편의 논문을 썼다. 4월 8일에 칸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편지를 써서 크누첸이 맡았던 원외 교수직에 응모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4월 10일에 자신의 세 번째 박사학위논문인 을 발표했다. 4월 25일에는 여름 학기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을 내놓았다.1757년(33세)여름 학기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를 내놓았다.1758년(34세)1월 22일에 러시아가 쾨니히스베르크를 차지했다. 여름 학기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을 내놓았다.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이 칸트의 지도로 두 학기를 공부했다. 12월 14일에 칸트는 요한 다비드 키프케가 맡고 있던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직을 얻기 위해 엘리자베스 황후에게 요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많은 러시아 장교들이 칸트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1759년(35세)하만과 공동으로 칸트는 을 계획했다. 이때부터 하만과 칸트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겨울 학기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을 내놓았다. 프로이센은 쿠너스도르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투에 패했다.1760년(36세)6월 6일에 칸트는 슬퍼하는 어머니에 대한 글을 썼다.1762년(38세)1월에 엘리자베스 황후가 서거했다. 페터 3세가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7월에 페터 3세가 살해되었고, 카타리나 2세가 즉위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점령이 막을 내렸다. 칸트는 을 발표했다.1763년(39세)를 발표했다. 이 즈음부터 스베덴보리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1764년(40세)1월에 사람들은 “염소 예언자” 얀 코르마니키와 그의 8살된 “야생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월 28일에 칸트는 의 첫 판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하만이 이 신문의 초대 책임자가 되고, 헤르더와 셰프너가 함께 일했다. 호레이스 월폴이 첫 고딕 소설인 을 썼다. 모디텐으로 취임했다. 8월 21일에 라틴어로 쓴 교수 취임 논문 를 발표했다. 토론자는 그의 애제자인 마르쿠스 헤르츠였다.1771년(47세)7월 5일과 12일에 에 하만이 번역한 흄의 이 실렸다.1772년(48세)2월 21일에 칸트는 헤르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 담아야 할 근본적인 생각을 전개했다. 궁정도서관의 부사서직을 사임했다. 폴란드가 일차로 분할되고, 프로이센은 서프로이센을 얻었다.1775년(51세)여름 학기 프로그램으로 를 내놓았다. 미국에서 자유를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칸트는 이를 환영했다.1776년(52세)박애와 관련된 글을 몇 편 썼으며, 칸트는 철학부 학장이 되었다. 이 해에 흄이 죽었다. 7월 4일에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다.1777년(53세)하만이 항구의 세관 창고 관리가 되었다.1778년(54세)카를 아브라함 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 장관이 칸트를 할레 대학의 교수로 초빙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고 싶지 않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칸트는 이 해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평의원회의 원로가 되었다. 루소와 볼테르가 사망했으며, 익살스러운 제1권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마지막인 제4권은 1782년에 출간되었다(칸트는 히펠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1796년에야 비로소 그가 의 저자임을 밝혀냈다).1779년(55세)프리드리히 빅토르 레베레흐트 플레싱이 칸트 밑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칸트는 두 번째로 학장이 되었다. 히펠의 제2권이 출간되었다. 1961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출간되어 공개된 칸트의 (1777~·1778년에 행한 겨울 학기의 강의록)에는 에 등장하는 철학부의 학장(익살스러운 “교수 할아버지”)에 대해 자세하게 인용되어 있다.1781년(57세)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 장관에게 헌정한 이 5월에 출간되었다.1783년(59세)베를린에서 계몽을 위한 투쟁 단체인, 은밀한 “수요 모임”이 결성되었다. 요한 에리히 비스터와 프리드리히 게디케가 를 창간했으며, 여기에 칸트는 1796년까지 총 15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 해에 이 출간되었다. 히펠세)의 제2판이 출간되었다.1788년(64세)1월에 를 썼다. 이 해 여름에 칸트는 두 번째로 대학 총장이 되었으며, 이 출간되었다. 6월 21일에 하만이 뮌스터에서 죽었다. 7월 3일에는 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가 법무장관 및 “종교 담당부서의 책임자”가 되었고, 7월 9일에는 뵐너의 종교 훈령이 선포되었다. 12월 19일에 프로이센의 새로운 “검열 훈령”이 발효되었다.1789년(65세)7월 14일에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에서 폭동이 일어나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8월 4일에 국민의회는 프랑스에서 봉건 제도의 폐지를 결정했으며, 8월 26일에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선포되었다.1790년(66세)이 출간되고, 의 제3판이 나왔다. 칸트는 요한아우구스트 에버하르트의 비판적인 이의 제기를 통해 도전을 받았으나, 이성 비판을 옹호했다. 를 썼다.1791년(67세)5월에 뵐너는 베를린의 고등종교국에 “직접조사위원회”를 마련했다. 8월에 피히테가 칸트를 만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로 왔다. 9월에 는 칸트의 를 개제했다.1792년(68세)4월에 를 썼다. 7월 14일부로 에서 시작된 종교 문제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이 연재 금지를 당했다. 9월 21일에 프랑스 국민의회는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1793년(69세)1월 21일에 루이 14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부활절에 를, 9월에는 를 출간했다.1794년(70세)5월에 를, 6월에 를 썼다. 7월 28일에 칸트는 페테르스부르크 학술원의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7월 29일에 거의 모든 코뮌의 일원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 10월 1일에 종교 비판에 대해 왕이 칸트에게 칙령을 내렸다. 10월 12일에 칸트는 공공연하게 “종교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내각의 명령을 받았다.1795년(71세)4월 5일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바젤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혁명전쟁에서 퇴각시켰다. 이 해에 이 출간되었다.1796년(72세다. 테오도르 프리드리히 링크가 칸트의 을 편집했다.1803년(79세)랑크가 칸트의 를 편집했다. 4월 9일에 칸트는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10월 8일에는 뇌졸중 발작을 앓았으며, 처음으로 심하게 앓아눕게 되었다. 12월 15일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썼다.1804년(80세)2월 12일 아침 11시 무렵,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숨을 거두었고, 2월 18일에 묻혔다. 4월 23일에 대학의 추모 집회가 거행되었다. 5월에 가 링크의 편집으로 출간되었다. 루트비히 에른스트 보로프스키, 라인홀트 베른하르트 야흐만, 에레고트 안드레아스 크리스토프 바지안스키 등에 의해 칸트의 전기들이 출간되었다.2. 주요 철학사상칸트는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 모두에서 절대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이 갖고 있는 경험론의 회의적인 면이나 이성론의 독단적인 면을 벗어나기 위해 일대 혁명을 시도한 철학이다. 그는 대상 중심의 인식을 주체 중심의 인식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학으로서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그는 당대의 제반 과학이 필연성과 보편성을 가진 학문이라는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처럼 사실로서 확립되어 있는 학적 인식의 권리 근거를 밝힘으로써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기초 놓고, 나아가 자연과학처럼 안전한 학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기초 놓으려고 하였다. 그는 사고방식의 혁명으로서 방법적 혁신에 근거하여 대상을 닦달하고 문초하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선험적 형식을 확립하고자 하였다.(1) 순수이성비판칸트의 관점에서 지성은 경험을 수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지성이 마치 월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칸트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지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성의 한계가 분명히 설정되면서 지성은 오직 우리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현상만을 자신의 인식 대상
    인문/어학| 2007.09.15| 10페이지| 1,500원| 조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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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소리 관람 후기
    2005 국립극장 판소리 축제 中 ‘꿈나무명창’ 관람우연치 않게 이번 판소리 축제의 초대권이 생겨 친구와 함께 5월 8일 꿈나무 명창들의 무대를 관람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TV무대나 라디오를 통해 판소리를 청취한 적은 많았지만 아직까지 공연장에 직접 가서 판소리를 관람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기 전부터 많이 설레었고 공연을 보고 난 후에도 기억에 많이 남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내린 후 걸어서 국립극장까지 갔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몇 년 만에 간 것이었는데 날씨도 좋아서 가는 길이 꽤 멀었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공연장소인 달오름 극장에 도착하여 표를 받고 팜플렛을 훑어보았다. 판소리축제는 국립극장에서 매년 이루어지는 축제로, 일주일간 진행된다. 부끄럽게도 이런 축제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내년에도 기회가 되면 꼭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명인들의 프로필 못지않게 그날 관람했던 꿈나무들의 이력도 심상치 않았다.입장시간이 다되어 공연장에 들어섰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 관객이었고 그날이 꿈나무 명창들의 무대라 그런지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 아이들도 꽤 많았다. 우리 또래의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우리의 소리를 듣는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고 아쉬웠다. 그리고 우선 나와 내 주위부터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드디어 사회자의 소개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중간에 나와 어린이들을 소개하고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정희나 어린이가 제일 먼저 나와 춘향가 중 ‘적성가’를 불러주었는데 고수와 함께 단정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무대배경과 한복색깔이 정말 곱게 느껴졌다. 공연 중간 중간 관객들의 추임새에 처음에는 적응을 못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없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로 정겹고 신이 났다. 무대에 선 창자들이 이것으로 힘을 얻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정희나 어린이는 초등학교 4학년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정말 대단하였다. 무형문화재 안숙선 선생에게서 사사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날 나온 다섯 명의 꿈나무들의 공연 중 가장 마음에 든 무대였다.다음으로 나온 윤제원 어린이는 이날 유일한 청일점이었는데 어린 남자아이의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흥보가 중 ‘흥보 놀부에게 매맞는 대목’을 들려주었는데 발음이 또박또박하여 내용을 좀더 자세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중간에 이곳저곳에서 관객들의 웃음보가 터지기도 하였다.세 번째로 나온 김해람 어린이는 춘향가 중 ‘신연맞이~기생점고’를 불렀다. 고수도 바뀌었다. 처음 나왔을 때 물병을 가지고 나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감기에 걸렸던 모양이다. 중간에 기침이 나와 공연이 잠깐 끊어지는 실수가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앳된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관객들의 박수로 끝까지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몸이 아픈데도 춘향의 시련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을 매우 잘 소화해 낸 것 같다.
    인문/어학| 2007.03.24| 2페이지| 1,000원| 조회(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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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로 왕비의 혼인길을 읽고
    『김수로왕비의 혼인길』을 읽고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만그 비밀을 들려주는 법이다.이 문구는 책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되뇌어 보면 이 책의 성격을 매우 잘 표현하는 글인 것 같다. 어떤 고고학자의 연구 일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나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감명 깊게 다가왔다.사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수강한 과목의 과제를 하기 위해서이다. 워낙 한 글자 한 글자 빠뜨리지 않고 정독을 하는 성격이라 책 한권을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인데 이 책은 분량이 적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읽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이렇게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을 읽어본지가 꽤 오래된 듯 하다.수로왕릉 대문의 물고기 한 쌍에 담긴 의미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호기심은 주인공의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결국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게 된다. 근원설화에 담긴 내용으로부터 당시의 역사적 배경, 지리적 위치, 현재 남아있는 유물, 관련 인물들에 관한 것에 이르기까지 직접 발로 뛰고 조사하여 얻어낸 성과이다.우선 사소한 궁금증에서 그러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새삼 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느꼈다.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을 끈질기게 탐구하고, 조사하고, 심하게 고생하면서도 연구대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학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중에서도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정말 고되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밝혀지지 않은 옛 일을 일일이 추적하여 알아낸다는 게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밝혀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장기간에 걸친 이 허황옥에 대한 연구는 그의 일생을 거의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연구 결과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김수로 왕비에 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많이 접해본 내용이고 많이 알려진 신화 정도로만 알고 있던 그 이야기가 실제 있었다고 하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보통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거의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신화에는 신성함 뿐 아니라 진실성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저자는 인도의 ‘아유타국’이라는 곳을 찾다가 ‘아요디아’라는 도시를 알아내고, 비석에 적혀 있는 내용과 이동경로를 추리하여 보주 땅이 그녀의 근원지임을 알아낸다. 이 보주 땅을 답사하는 과정은 정말 눈물겹다. 보주 뿐 아니라 쌍어문에 대한 비밀을 밝히기 위한 그의 모든 연구 과정이 그러하다. 쌍어문에 대한 진실은 그의 열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허씨의 후손들은 후미진 곳에서 적막하게 살고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사당을 숨기다시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소중한 역사를 보존할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났다. 몇 년이 지난 저자의 연구를 계기로 이곳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진다.
    독후감/창작| 2007.03.24| 2페이지| 1,000원| 조회(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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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활자
    금속활자고려 중엽 인종 4년(1126년)의 이자겸의 난과 명종 1년(1171년)의 궁궐화재로 인한 두 차례의 재난으로 왕실에서 간직하고 있던 수만 권의 서적이 불타버렸다. 그 후 없어진 책들을 다시 목판본으로 그 후 없어진 책들을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배어, 찌고, 판을 짜고, 새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경비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였으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 기술이 고안되었다.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고종 21년경에 50권을 찍어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불법(佛法)찬양을 위하여 처음에는 금속활자로 찍었던 것을 고종 26년(1239년)에 다시 목판본으로 옮겨 간행한 로서 금속활자본의 실체를 유추할 수 있다.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백운화상(白雲和尙)이 불법을 간추려서 정리한 의 금속 활자본은 우왕 3년에 간행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지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에는 지방사찰까지도 활자 인쇄가 실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는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활자의 주조와 서적의 출판을 전담하도록 하였다.조선시대에는 활자 인쇄기술이 더욱 발전되어 조정에서는 30여 회나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 특히 조선초기인 태종(太宗)에서 세종(世宗)대까지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등의 주조를 거치면서 완벽한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세종25 년,1443년) 이후에는 한글 활자도 활발히 주조되어 , , 불경과 시문(詩文)의 번역에 사용되었다. 또 관상감(觀象監), 사역원(司譯院), 지방관청, 사찰 및 서원 등에서도 나무, 옹기, 놋쇠, 철 등을 재료로 하여 활자를 제작하여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고, 수요가 많은 서적들을 다시 목판본으로 발간하는 등 조선시대의 인쇄술은 당대의 학술분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새로운 인쇄기술의 창안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고려시대 백운 경한화상(景閑和尙, 1299∼1375년)이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여 요약한 책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그의 제자 석찬(釋璨) 등에 의해 청주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다. 이 절은 위치가 불명확했으나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자리가 확인되었다. 또한 이곳에 인접한 운천동(雲泉洞) 절터에서 쇳물을 붓는 도구인 도가니가 출토되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이 책의 활자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로 된 중국 송나라 판본을 글씨본으로 하고 2개의 조 판 틀을 번갈아 이용하였는데, 행(行)의 배열과 글자 모양 및 자획(字劃)이 일정치 않아 금속활자 인쇄술의 초보적인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후기에 개성은 물론 이곳 지방사찰에까지 금속활자주조가 번창하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1392 년에 다양한 서적을 발간하기 위하여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했던 기록까지 뒷받침해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는 선광(宣光) 7년 (고려 우왕 3년, 1377) 7월 청주부근(淸州牧外)의 흥덕사(興德寺)에서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찍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불조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1) ‘직지심체’의 뜻‘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였다.2) 주된 내용'경덕전등록' '선문염송집' 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다.3) 서지적 특징첫째, 본문의 활자는 중간자와 작은 자의 2종이 만들어졌는데, 크기와 글자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동일한 활자에 같은 모양의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활자를 만든 솜씨에 차이가 있으며 그중에는 글자 획에 칼자국의 흔적이 예리하게 나타난 글자도 있다. 이는 부족한 활자를 손쉽게 나무로 만들어 보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둘째, 행렬이 곧바르지 않고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도 빈번히 나타난다. 또한 글자의 먹색에 진하고 희미한 차이가 심하게 나타난다.셋째, 인판(印版)의 네 모퉁이와 계선(界線)을 고착시킨 고정 틀을 두 개 마련하여 번갈아 사용했다. 판의 반쪽은 11줄이지만 각 줄의 글자 수는 18?20자로 1, 2자의 드나듦이 생긴다. 따라서 옆줄이 맞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위아래 글자가 서로 엇물린 것도 있다.학자들은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글자의 모양이 같은 판편에서는 다른 반면에 다른 판면에서는 같은 모양의 글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밀랍주조법의 서지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보아 밀랍주조법으로 주조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흥덕사자는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조잡한데 이것은 사찰 재래의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4) 조판방법금속활자로 판을 짜서 책을 찍는 방법에는 고착식과 조립식이 있다. 초기에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거칠어, 밀랍과 같은 점착성 물질에 활자를 붙게 하여 인쇄하는 고착식을 사용했다. 이 경우는 네 모퉁이가 고정된 틀의 위ㆍ아래 변에 계선까지 붙인 인판틀을 마련하고 바닥에 밀랍을 깐 다음 그 위에 활자를 배열했다. 그 후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위에서 판판한 철판으로 균등하게 눌러 활자 면을 평평하게 하여 식힌 다음 인쇄했다. 계미자는 끝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개량하여 밀랍 속에 박아 움직이지 않게 했다. 갑인자는 활자 네 면을 판판하고 바르게 만들고, 인판틀도 판판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었기 때문에 판이 큰데도 불구하고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빈틈을 대나무나 파지 등으로 메우면서 조립식으로 판을 짜는데 성공했다.물론 고착식과 조립식이 병용되어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밀랍은 참기름과 같은 반건성유와 피마자 기름과 같은 불건성유를 배합, 굳지 않게 하여 열을 전혀 가하지 않고 활자를 밀착시크는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천혜봉 교수는 설명한다.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작업 능률도 크게 올랐다. 계미자는 하루 인출능력이 여러 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자자는 이십여 장으로 늘어났다. 이후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를 개발하기도 했다.5) 유네스코 등재1998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신청을 했다. 그러나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9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제4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한국에서 간행되기는 했지만, 보관은 프랑스에서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원산지와 소유국이 다르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 프랑스와 공동신청을 권유했는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외규장각도서 반환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청주시에서는 다행하게도 2001년 ‘제5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회의’를 유치했고 불조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6월 청주에서 열린 제5차 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불조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인쇄문화의 전파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현재 프랑스에 단 한 권만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희귀성 또한 크게 고려되었다.
    인문/어학| 2007.03.24| 5페이지| 1,000원| 조회(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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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를 읽고
    『삼국유사』를 읽고읽을 때마다 출판사를 바꾸어 읽게 되는 이 책을 올해 또다시 읽고 감상문을 쓰자니 감회가 새롭다. 이번에는 태을 출판사에서 나온 삼국유사를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이 추구하는 데로 나는 최대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려고 노력하였다. 확실히 예전에 읽던 책보다는 좀더 쉬운 문장과 소설적인 허구가 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각 권을 신이의 장, 건국의 장, 사련의 장, 충효의 장, 호접의 장, 불사의 장, 애린의 장, 신묘의 장, 천도의 장, 접목의 장, 돌이켜보는 장으로 구분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흔히들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런 민족적, 불교적 의미 뿐 아니라 문학적인 가치로 따졌을 때 우리나라 고대 문학 연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자료라고 생각한다.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향토적이고 일상적인 면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책을 읽고 난 후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책에는 마한, 부여, 가야 등의 고대의 여러 나라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의 여러 가지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각 시대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신화적인 내용이 많이 보인다. 그런 점이 이 책이 역사서로 활용할 수 없게 하는 것 일수도 있지만, 이 책에 재미를 부여하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신화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신비감이 들고,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인지 신화가 다른 내용들 보다 흥미로웠고 그만큼 그 두꺼운 책의 많은 내용 중에서도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요소이기도 하다.또 이 책은 향가집이 아니지만 향가가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서동요,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등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 때 많이 보던 향가가 많이 나온다. 향가 중 하나를 살펴보자면, 찬기파랑가는 화랑이었던 기파랑의 드높은 인격과 이상?지조를 찬미한 찬가로서 현존 향가 25수중에서 빼어난 작품이다. 찬기파랑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기법은 기파랑의 원만한 성품이나 고매한 인품, 청정한 성품을 달?시냇물?조약돌?잣가지 등에 비유하여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에도 그런 표현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도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풍습의 유래도 나와 있다. 보름 약밥의 유래가 그 한 예이다. 신라21대 왕 비처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왕은 천천정에 거둥했다. 그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왕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기사를 시켜 따라가 보게 했더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타나 편지 한 통을 주어 편지를 보니 겉봉에 이렇게 써 있었다. '이 편지를 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에 비처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일관이 열지 않아 죽는 한 사람이 왕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편지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써있었다. 그래서 화살로 거문고 갑을 쏘게 했더니 그 안에서 온갖 불사를 맡아 하는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 때부터 매년 정월달의 첫 해일, 첫 자일, 첫 오일에는 백가지 일을 삼가 함부로 행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이라 해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풍속이 생겨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07.03.24| 2페이지| 1,000원| 조회(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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