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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학번 이름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포스트'란 '근대 이후'라는 시간 개념과 더불어 '근대에 대한 반대' 또는 '근대로부터의 탈피'라는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내포한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논의는 '이후'보다는 '탈' 또는 '반대'의 의미가 중심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 기간에 누적된 병적 요소들이 초래한 문제와 위기에 대한 반발과 대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전근대의 특징전근대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믿는다 세계에는 법, 원리, 이성, 로고스, 자연법 등으로 부르는 초인간적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바른 삶이란 이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었다 진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진리의 객관성에 대해 동의가 있었다'신은 죽었다' –니체-신의 죽음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선언은 지금까지 서구가 모든 의미와 기치의 근원으로 여겨 온 절대적 존재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사실상 그는 인간의 자유롭고 본능적인 삶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이 죽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니체의 의도는 절대를 배격해서 인간의 자율적 삶을 보장하려는 것 “우리에게 자신에 맞추어서 세상을 뒤집는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예술가가 되라”고 부추긴다. 니체는 신과 이상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사랑하는 정신을 주장한다. 이는 신 없는 시대의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알되 이것을 저주하지 않고 이 운명을 감수하며 사랑하는 강자로서의 운명애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신이 주시는 초월적 기쁨이나 형이상학이 제공하는 위로보다는 처절한 삶의 심연에서 경험하는 내재적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이다.근대의 특징근대는 전근대의 근본적 세계 이해에 혁신적 변화가 생기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고 한다. 근대는 더 이상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적인 것과 이 세상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관찰과 반성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는 정신의힘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 과거보다 미래가 마음을 사로잡고 용기와 지적 노력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들어왔다. 좀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끈질긴 실험적 연구가 진보를 이루는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통해 삶의 기초를 마련하는 이성주의적 토대주의문화였다.근대의 위기근대의 위기는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찾아왔다. 철학이 이성의 자율신화에 빠지고, 과학과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토대인 기독교 정신에서 유리된 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기독교적 의미에서 분리되어 자율화된 이성은 결국 뿌리를 상실하고 소외되어 정신적 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과거에 대한 비판과 변화의 추구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예술은 미학적 기준도 상실한체 상업화 되는등 쾌락만이 추구할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소비주의 문화가 맹위를 떨치게 된다. 극단적인 합리주의와 허무주의는 이성이 가치를 상실한 근대 문화를 잘보여준다. 근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포스트 모던 시대가 시작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인 연장이며 계승인 동시에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다.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배경(배경) - 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유태인 대량학살, 히로시마 원폭투하, 생태계파괴, 핵전쟁위협) - 고도산업사회 - 인간적 가치 + 예술적 가치 - 대중문화가 지배문화가 됨(포스트 모더니즘의 등장) -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계승, 논리 적 발전과 비판적 반작용 -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 아방가르드적인 전통 - 예술의 사회화→예술의 상품화→모더니즘 경향 - '재현'의 개념 배척 ⇒ 이미 있는 것(이미지)의 구성포스트모더니즘의 형상들세계화 : 다중 문화(문화의 복잡화) - 문화와 가치의 혼합 결과로 인한 긴장과 갈등은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연출하는 첫째 조건이 된다 정보화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 - 근대의 핵심적 특징인 지식 체계를 깨뜨려 삶을 다원화하는 데 근본적으로 기여(지식의 주관적 활용) 자연환경 의식의 변화 -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물질주의에 빠져, 자연을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던 세계관이 퇴조 포스트모던 과학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막스 플랑크의 양자역학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 등은 원자 이하의 영영에서는 기존의 물리학이 제공하는 확실성뿐 아니라 객관성이라 중립성도 통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실재가 어떤 고정 불변의 구조라는 인식을 배격하고 그것은 이질적이고 다원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다 동성애, 대중문화, 감성광고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건축만큼 문화의 변화를 잘 반영하는 것도 드물다 포스트모던 스타일은 근대의 기능 위주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다양성과 장식적 요소가 기본 특징이다 지역적 전통 또는 건물이 위치한 주변 맥락과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그림)포스트모니즘의 예술포스트모던 예술은 미의 절대적 이상을 포기하고 개인적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진지하지 않다 혼합적이다. 서로 연관되지 않는 이미지와 모순된 의미들을 뒤썩어 놓아 모호하고 불안정한 의미를 창조한다. 가장 좋은 예는 뮤직 비디오와 MTV의 멀티 미디어 음악의 혼성 장르 현상이다 시와 건축, 회화와 조각이 주도했던 근대와 달리 포스트모던 문화는 영상이 주도한다포스트모니즘의 작품(1)포스트모니즘의 작품(3)다원주의와 상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 특징은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들수 있으며 그 뿌리는 구성주의다. 포스트 모던 사상가들은 언어와 사회적 담론의 역할을 궁극적으로 여기는 구성주의 또는 비본질주의를 신봉한다. 다원주의는 실제가 어떤 고정 불변의 구조라는 인식을 배격하고 그것은 이질적이고 다원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생김에 따라 대두되었다. 사회를 통일하는 거대 담론이 불신되고 적극적으로 해체되는 세계가 다원주의 사회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지식의 위상이 흔들리고 정보화로 상품화 된 세상에서 보편적 진리체계가 흔들린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독단적 다원주의이다. 현상적 다원성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나 다원성을 전체의 궁극적 원리와 삶의 규범으로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다원성과 더불어 통일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실재, 객관성, 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무너지고 공통적 가치와 기준이 없어지면 상대주의가 지배하게 되고 완전히 규제가 풀린 세계가 된다.포스트모더니즘의 위기포스트모더니즘의 위기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에서 찾을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다원주의는 이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원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이고 가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과연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가 없이 시대가 흘러왔을까?포스트모더니즘의 위기에 대한 대안과거에 역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해서 보다, 도덕적 윤리에 근거하여 현재의 사회 통념에서 과거의 일을 판단하고 재해석해야 하겠다. 혹 도덕적 윤리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은 바람직한 행위인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심지어 전쟁 또한 대량살인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물론 아마존일대에 아직도 식인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살인이라고 할 수 없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고해서 살인했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올바른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이며, 목적성이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어떠한 목적을 상대방을 헤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재판과정에서 살인동기가 형량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서나 통용되는 도덕적 윤리는 존재한다. 포스트모던적 사고가 절대적 대답이 없는 일관성의 결여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과 가능성을 유추해봄으로써 현재의 눈을 더 넓혀주는 사고방법이다라고 인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인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수용하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정체성 확립, 진리와 규범 회복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참다운 신뢰와 사랑으로 건강한 공동체의 회복이다.'예술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21세기를 대표할 화두~~ 여기서의 예술이란? - 진정한 진리와 가치를 만드는 행위 -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 - 자신만의 예술이 아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윤리에 맞는 일 - 생각하는것 만으로는 존재의 의미가 충분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예술을 하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수 있다. 자신이 가치있는 자신만의 예술을 할때 사람은 행복하고 그때 자신의 존재가치를 더욱 느낄수 있다.{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09.04.06| 17페이지| 1,000원| 조회(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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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 타락, 구속 평가A+최고예요
    1. 이 책을 선택한 동기와 책이 저술된 상황에 대해 쓰세요⇒ 이 책은 1학년 때 기독교 세계관 관련 수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었으므로, 이 책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기억이 남아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 후 하나님을 다시 믿게 되었고, 이번 기회에 다시 기독교 복음의 핵심 맥락인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이 책의 저술된 상황은 저자가 밝히고 있었다.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기독교문학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s)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옮겼다고 하며, 그 강의에 참석한 연구원들과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입었다고 한다.2.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쓰고 어떤 면이 인상적이었는지 쓰세요⇒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구조’와 ‘방향’에 관한것이다. 저자는 ‘구조’란 피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적 법에 의해 피조된 대로의 사물로 정의하고, ‘방향’이란 그와 대조적으로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사물이나 실체, 나아가 가치관이나 진리를 바라볼 때에 쓰일 수있는 아주 명쾌하고 탁월한 통찰이라고 생각되어 가장 인상 깊었다. 특히 이와 같은 관점은 흔히 말하는 죄악 되고 더럽고 나쁜 것들을 바라볼 때에, 그 사물의 악한 면만을 바라보지 않게 해주어 편협한 시각을 가지지 않게 해줄 것이다. 이는 자칫, 선과 악으로 나누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편협하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소멸되지 않는 창조 본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뜻 깊게 생각된다.3. 책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생각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평하세요(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구체적 이유를 들어 쓰세요)⇒ 전체 개괄은 이러하다.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설명하고, 창조ㆍ타락ㆍ구속을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틀로 압축 정리한 후, 세계의 모든 실재를 바라보는 '구조' 와 '방향'이란 교정 렌즈를 제시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저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첫 장에서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설명한 다음, 우리 삶의 인도자 역할과 모든 결정과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를 종교적인 영역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문화 전체와 연관시켜야 하며, 철학과 신학과도 연결된다고 한다. 이어서 저자는 창조의 두 가지 의미, 즉 하나님의 질서와 창조 질서가 있음을 역설한다. 타락에 관하여서는 타락이 피조계 전체, 즉 사회, 문화, 개인의 삶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났음을 범위 짓고,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질서는 그대로 유지됨을 역설한다. 그리고 구속 장에서는 구속이 본래의 창조계로 회복하는 것임을 얘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일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었으며, 이미 승리하셨음을 주장한다. 이어서 구조와 방향의 관점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하여 개혁은 성화(sanctification)와 점진적인 갱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 재생의 출발점이 구조와 방향의 식별이 되고, 이 왜곡된 사회의 전체주의를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갱신 측면에서, 먼저 공격성은 구조적 모습이고 이를 억제하여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룩하게 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또 영적인 은사들은 어떤 것이든 성령에 의해 나타날 때 모두 카리스마적이고 영적인것이고, 성(性)에 대해서는 무엇이 구조이고 무엇이 방향인지 먼저 생각하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는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더불어 춤에 관하여는 성(性)의 문제와 관련있다고 하면서, 춤의 왜곡은 성적인 흥분이나 도발에 사용될 때 일어난다고 한다.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의 현상을 구조와 방향, 즉 성경적인 교정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책을 맺는다.전체적인 저자의 생각에는 이의를 달 생각이 없다. 하지만, 두 가지 구체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첫 째는, 타락에 관하여 설명한 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크게 강조되거나 설명하지 않고 구속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자적 성품을 간과하는 것이고, 읽는 독자로 하여금 죄에 대한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고, 은혜의 구속적인 측면으로 치우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 째는, 성에 대하여 내리는 저자의 ‘구조’와 ‘방향’에 대하여 동의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성의 본질적인 모습을 ‘구조’라 하고, 그 왜곡된 성을 ‘방향’의 범주에 넣고 있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방향’의 성, 즉 왜곡된 성에 대하여 격렬하게 투쟁하여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왜곡된 성이라 하여도, 그 안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히 창조된 본래 모습으로서의 성의 일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성에 대하여 격렬한 투쟁보다는 그 왜곡된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그 왜곡됨을 바로잡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09.04.06| 2페이지| 1,000원| 조회(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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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테판 차녹의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을 읽고( 요약 & 서평 )
    이 책을 읽기전에 책 제목을 보며 누군가 나에게 거듭남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때 나는 뭐라고 할것인가 라고 스스로 질문을 해보았다. 모태신앙으로 26년간 신앙생활을 했고 청년전문목회를 꿈꾸며 신대원입학을 앞 둔 상태인 나는 거듭남에 대해서 자신있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기에 이 책은 비록 과제로 접하긴 했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고 기본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책이었다.이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나에게 남는 것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 말씀은 어렸을때 주일학교때부터 암송해오던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물론 지금도 암송할 수 있고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암송하고 있었지만 이 말씀이 거듭남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말씀에서 누구든지란 거듭남의 보편적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것은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고 설명 할 수 있다. 새로운 피조물은 거듭남의 유익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 것은 지나버린 즉 이전 것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도 이 거듭남의 본질을 새로운 피조물, 새마음, 우리 안에 새겨진 율법, 하나님의 형상, 신적인 성품이라는 말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용어들도 설명하기가 쉬운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회심과도 다르며칭의와도 다르며 입양, 성화와도 다르다고 하고 있다.그렇다면 무엇이 거듭남인가? 거듭남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로서, 본성에서 은혜로 실제적으로 전이되는 변화이며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에 주어진 형상은 창조 때에 다른 피조물 속에 주어졌던 형상 만큼이나 실제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거듭남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변화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이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에게 공통된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이전과는 전반대의 모습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전인의 전체적인 변화이다. 새로운 능력이나 새로운 기능적 구조물을 가지게 되는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이해력과 의지, 양심, 정서,등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이 거듭남은 변화는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로 살펴볼수 있는데 먼저 거듭남은 원리적으로 내적인 변화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적인 변화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내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 외적으로 올 곧은 행동의 변화가 있을 수는 없다. 그 내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더욱 성숙되는 변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 창조의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대로 살아가려고 변화되는 것이다.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었을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이전의 본성에 의해서 개진되는 활동은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계속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또 마음속에 있는 다른 것들을 분기시켜서 옛 본성에 속한 것들의 활동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올바른 이성과 하나님에 말씀에 위배되는 것들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대표적인 예로 다윗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 이끌림을 가지게 되었을때 시편 119편에 나오는 것처럼 헛된 생각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했다. 헛된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거듭남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나는 아예 헛된 생각이 들지도 않는 단계가완벽함 거듭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성령의 충만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는 매우 힘든 단계이지만 나는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며 거룩한 욕심이다.사실 거듭남을 내적과 외적으로 나누는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내적으로 온전한 변화가 되었다면 당연히 외적으로 그것들이 표출되어져 나오게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외적인 변화가 내적 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인 변화는 언제나 외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판단의 변화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만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도 새로운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거듭납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새로운 습관을 가져야 한다.
    독후감/창작| 2008.04.20| 3페이지| 1,000원| 조회(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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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보통 ‘이준열사’라고 하면 헤이그에서 순국했다는 큰 사건에 그 전의 다른 많은 활동들이 가려져 있는 형편이다. 많은 전기에서 그러하듯, 이준 의 생애에도 그의 생애 전체를 미화 시키고 있다. 한 사람을 역사에서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그의 전박적인 생애에 대한 이래를 전제로, 그의 활동의 중요한 대목들을 정리하고 그의 생애의 극치를 이루었던 헤이그 밀사사건을 다루고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인(死因)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보겠다.이준은 철종 기미년 음력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에서 부친 이병관과 모친 청주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준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믿기지 않은 전설 같은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그가 7~8세 되던 1865년과 1866년에는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고 프랑스가 함대를 파송하여 개국을 요구 했으며, 미국 또한 제너럴셔먼호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대원군은 쇄국 일변도로 나갔다. 어른들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이준은 이 때 개국의 필요성과 이해득실을 역설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준의 성숙함은 그의 나이 12세 때에 ‘사서에 능통’하게 되었고 북청군에서 전군의 유림재사를 선발하는 향시에 응하여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그리고 그는 12세의 나이에 일찍 결혼을 하여 제대로 부부생활을 갖지 못한 듯, 27세되던 1885년에 장녀 송선을 보게 되었고 30세 되던 해에 장남 종승이 출생하였다. 장남을 보기에 앞서 선생은 29세 되던 정해년에 북청에 내려가 초시에 합격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준은 30세가 되던 시기까지 전통적인 학문을 공부하였고, 척사위정적인 인물과 교유하면서 그 자신 경학원을 설립, 전통적인 유학을 가르쳤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학문과 봉건적인 충군애국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영오하여 세계대세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는 있었으나,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구적인 논리로 대응하려 했다. 그는 당시 드러나고 있던 봉건적 모순과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민족적 모순에 대응하는 근대적 지성을 갖추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당시 그의 입장은, 척사위정론자들이 주장했던 ‘내수외양론’의 내수의 논리에 서서 시무를 논하는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이준이 종래의 척사위정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세계와 한국의 사회변화에 새롭게 대응하는 때는 그의 나이 35세였던 1893년 무렵부터라고 할 것이다. 35세 되던 해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북청의 경학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인재를 양성하다 1888년 가을에 올라온 rrm는 몇 년 동안 시국의 변화를 눈여겨보면서 그동안 자신의 삶이 의지해온 구학과 척사 위정적인 사고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하는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35세 되던 해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이일정을 ‘재취’하였다. 초취부인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취한 그의 이 같은 결단을 단순히 당시의 관습이나 주위의 강권으로만 핑계댈 수 있는 것인지, 문제를 던져본다. 더구나 그는 뒷날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먼저 법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근대 서구 법학의 초기 수용자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행세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의문은 당연하다고 본다. 하여튼 그에 관한 전기들은, 이 결혼을 통하여 ‘국사와 사회운동’등에 좋은 동지요 반려자를 얻었으며 그의 사회개혁, 정의실현에 큰 힘이 되었다고 본다.이준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의도를 분명하게 간파하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 중 중립을 선포한 한국에 대해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할 때라고 생각된다. 이때 그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자신의 항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이때부터 항일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보안회?대한협동회?공진회?헌정연구회?국민교육회?을사조역폐기상소운동? 보광학교 설립? 한북 흥학회?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신민회 등에 차례로 관여하여 지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그는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는 등 국가의 기강확립과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한말의 정치? 경제?교육?사회 등의 항일애국계몽운동에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만큼 그의 생애에서 다양하면서도 집중적인 생활을 영위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철도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준은 1905년 5월 윤효정 ? 양한묵 등과 입헌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헌정연구회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가 헌정연구회에서 활동한 시기는 9월말경 까지로 추정되는데, 이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일본과 중국 상해를 오가며 ‘을사조약을 방지 ’코자 노력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 양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의하기도 했다.1906년에 들어서서 이준의 활동은 한층 활발해진다. 우선 4월 부터는 국민교육회의 회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국민교육회는 1905년 일진회가 ‘합방’을 청원하자 회장 이원긍의 이름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 을사조역의 강제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한 ‘7충신’의 추도회를 개최하였으며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의 양위가 논의되던 1907년 7월 중순에는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과 함께 연설과 시위를 하는 등 교육활동 외에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 했다.이준이 국민교육회의 회장으로 있을 즈음에 그는 검사직에 있었다. 그는 검찰의 위상을 립하고 부정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와 결탁된 이하영 등 상부세력에 의해 좌절된다. 말하자면 내부개혁이 침략세력과 결탁된 관료층에 의해 좌절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준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설태희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설립, 함경도 지방의 교육구국?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교육구국운동을 위해 보광학교를 설립하였다.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그는 국권회복의 방법론상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가 헤이그밀사로 발탁된 것은 그의 식견과 지도력, 상대방을 향한 설득력이 평가를 받아서 이뤄졌겠지만, 그 스스로도 외교권의 회복을 통해 이미 침투해온 일제의 세력을 물리치기 전에는 국권회복은 물론이고 국내적인 반봉건개혁운동도 힘들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서지 않았을까, 그래서 헤이그 밀사를 자원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일제의 침략행위가 국권강탈에 있음이 노골화 되자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의 저항은 점차 가열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이 강화되고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와함께 왕실에서도 일본의 야욕을 세계로 폭로하여 그들의 지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밀사파견으로 나타났다.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전의정부참찬 이상설이 정사로 전평리원검사 이준이 부사로 전 러시아 공사관참서관 이위종이 통역으로 동행하였다. 고종의 위임장을 지닌 그들은 1905년 11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여 만국의 도움을 얻어 외교권을 회복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이준은 거기서 전 주러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전 주한공사였던 웨베르와 바파로프 등을 만나 그들의 알선으로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를 만났다. 그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했다.
    사회과학| 2008.04.20| 4페이지| 1,000원| 조회(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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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의 유아 사망 원인과 근대가족의 환상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의 유아 사망 원인과 근대가족의 환상-역사교육과 2002104011김인수Ⅰ.머리말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에 경계를 긋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르네상스 이후 특히 프랑스 대혁명를 기점으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서양사회에 제기된 질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두 영역 사이의 구분은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단죄의 대상이었던 반면에 공적인 것은 그 자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적인 영역을 자주 침범했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과 그 영역 내에서의 삶이 강조될수록 사람들은 은밀하고 내면적인 공간으로 은둔화 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 공간의 핵심이 바로 가족이고 가정은 사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19세기 프랑스에서는 가족에 대한 국간의 간섭이 증대되었다. 가족은 미래 프랑스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본적 단위였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에서 아동은 가족적 존재에서 벗어나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아동에 대한 투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담론은 의사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결합시키는 배경이 되었고 그 관계를 토대로 가정의료의 개념이 생겼다.하지만 19세기 프랑스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임신과 출산은 성적인 쾌락을 중단시키는 요소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경제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임신을 피할 수 있는 지식보다 낙태나 태어난 아기를 제거하려는 각종지식이 유포되는 배경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여성의 출산율은 낮아졌으며 동시에 유아사망률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어린이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프랑스에서의 사망원인, 낙태와 영아 살해, 유아의 유기 등을 중심으로 근대가족이 지니고 있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Ⅱ.어린이 인구의 감소와 모성애의 모순.19세기 초 이래 파리 인구는 괄목할 만하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아동의 인구가 감소된다는 것은 상호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4세 이하의 어린이의 숫자가 전체 파리인구 속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점차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876년에는 7.1%를 차지한 반면 1886년엔 6.4%, 그리고 점점떨어져 내려오다 1911년엔 5.79%까지 떨어진다.과연 왜 그럴까요? 파리의 이러한 인구구성은 결국 낮은 출생률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 1000명을 기준으로 하여 출생률을 게산 할 경우, 1872년에는 30.7로 나타나는데 이 비율은 1914년까지 계속 감소한다.프랑스 가톨릭교회나 정치가나 의사들은 어린이의 인구감소를 프랑스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그 감소원인을 임신한 여성의 공장 노동과 한 살 미만의 유아의 생활 환경에서 찾으려 하였다. 결론은 이들이 공장 노동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모유수유에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종족의 구제를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는 출생률을 다시 증가시켜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1886년 파리에서 자녀가 전혀 없거나 단 한명의 가족이 있었던 가족은 59.9% 였는데 1911년에는 52.7%였는데 반해 프랑스전체적으로는 1886년에 44.3%, 1911년에 40.15였으므로 파리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확실히 적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성의 공장 노동과 출생률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 이는 결국 파리의 열 가족 당 약 세 가족 정도는 자녀가 전혀 없고, 도 다른 세 가족은 단 한명의 자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초까지 변하지 않았다.결국 파리에서의 생활고는 노동자 가족들 사이에는 많은 수의 자녀들 양육에 요구되는 비용으로 인해 자칫하면 비참한 생활로 전락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파리의 노동자는 두 명 이상의 자녀를 가질 수 없다. 만약 세명의 자녀를 갖게 될 경우 생활은 거의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한 가족의 부유함의 정도와 출생률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가? 파리에는 20개의 구가 있다(1-10구는 경제적으로 11-20구보다 부유함) 부유한 구보다 빈곤한 구에서 출생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빈곤한 지역은 주로 노동자들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생활고 및 주택난으로 인해 인구밀집도가 높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노동자 가족내에서는 어느 정도 자녀수를 제한하였것을 부인할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파리나 혹은 프랑스 다른 지방에서의 출생률 감소가 전적으로 노동자 가족 또는 여성의 노동에만 있다고 주장 하기는 힘들다.실제로 출생률은 단지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19세기 전 기간을 통해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자녀의 수를 제한하려는 프랑스인들의 개인적 의지나 결정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사실상 프랑스는 억제된 혼인률 이나 또는 높은 사망률이 유달리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세기말까지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간과하였던 피임이라는 일반화된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역설일지는 모르지만 노동자 계층을 비롯한 프랑스의 많은 부부들이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피임을 사용한 것은 오히려 낙태 또는 영아유기나 살해를 방지하기위한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으며, 어린이의 생명에 관심을 표출 하였다는 점에서 2천년에 걸친 그리스도의 선교의 결과일것이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적인 이유 또는 다른 심리적인 이유로 자신의 자녀를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것보다는 피임이 차라리 낳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그렇지 않든 간에 모성의 모순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Ⅲ.가족의 어두운 비밀 : 사생아의 탄생1866년부터 1875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의 신생아 100명당 7.4명의 아이가 사생아로 출생하였으며 1896년부터 1905년의 기간동안 에는 8.8명 1926년에서 1935년 사이에는 7.9명의 사생아가 출생하였다. 파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1872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의 사생아 숫자를 파악해보면 100명의 신생아를 기준으로 평균 27명이 합법적 혼인을 하지 않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 이 시기에 파리에서 출생한 신생아들을 보면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부모의 자택에서 태어난 신생아중 단지 22%만이 사생아였던 반면 다른 장소에서 태어난 신생아 중에서는 무려 73%가 사생아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통계를 보며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생아의 운명을 예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버이의 사랑은 사생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상속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880-1890년까지 기간동안 파리 내 여러 병원의 출생 기록을 토대로 66,992명의 산모의 직업과 결혼 여부를 파악해보았다. 산모들중에 68.16%가 미혼자였으며, 29%만이 기혼자였고 나머지는 과부나 이혼녀였다. 여성들이 합법적인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을 할 경우 자의든 타의든 자택이 아닌 다른 장소를 선호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산모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1/3정도가 노동자였으며, 또 다른 1/3은 하녀 혹은 가정부였다. 이 사생아의 출생은 19세기 프랑스 노동 계급에서 경제적 이유로 등으로 확산된 동거뿐만아니라 직장 내에서 더 나은 자리와 임금을 미끼로 여성 노동자를 유혹하였던 공장주나 작업감독과의 성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9세기의 프랑스 사회에서는 하녀를 고용하는 것이 트렌드였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는데 그리하여 대개의 경우 협소한 아파트 내부에 새로운 난잡한 혼숙 상황이 만들어졌다. 집안 유모의 젖을 먹고 보모의 교육을 받고 자란 새로운 세대의 부르주아들은 육체문화와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서민층 여성에게 의지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 만큼 성적으로 성숙한 나이에 이르면 젊은 하녀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녀는 부르주아의 리비도 해결을 위해 동원된 육체들의 연결고리에 속하는 존재였다.하녀나 자신과 동거하는 여자가 임신하였을 경우 남자들의 반응은 사회적 신분의 상관없이보통 유사하였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책임회피는 결국 사생아가 출생한 경우 아이의 아버지가 이를 인정한 경우보다 네 배정도 많았다는 것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19세기 후반 부르주아 계습에서의 사생아의 출산에 대한 규제는 아주 엄격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가족 내에서도 거부당하는 미혼모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구빈원에는 없었다.따라서 사생아를 유기하거나 상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 여성들이 많았다.Ⅳ.의식적 자녀 양육에 거부 : 유아 유기부모가 거부하면 원하지 않는 신생아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발에 고정된 불명예스러운 족쇄가 되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존재인데 이에 여성들은 자녀를 거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비밀스러운 피임 뿐만 아니라 낙태 또는 영아살해 및 유기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즉 임신은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임신은 반드시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버려진 아이, 제거된 아이, 또는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가족 품안에 받아들여진 아이들의 불확실한 운명을 시사해주고 있기도 하다.
    사회과학| 2008.04.20| 4페이지| 1,000원| 조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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