캇시러의 예술론캇시러의 예술론기존의 예술이론에 대한 캇시러의 비판 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 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 캇시러의 예술관의 영향1.기존의 예술이론에 대한 캇시러의 비판예술은 다만 '준비적 단계'이고 보다 높은 목적을 지향하는 '종속적' 및 '보조적'수단에 불과 각 시대의 예술 논의의 한계들을 하나씩 지적1.기존의 예술이론에 대한 캇시러의 비판(1)모방예술과 인간예술은 자연의 모방예술가의 창조성은?1.기존의 예술이론에 대한 캇시러의 비판“캇시러가 고전학파의 모방이론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 외부대상, 즉 객관에 초점이 맞추어진 입장이라고 판단하는 것”1.기존의 예술이론에 대한 캇시러의 비판(2)성격예술과 인간루소괴테크로체콜링우드2.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예술과 과학현실의 강렬화 계속적인 구체화의 과정 예술가는 자연의 형상들에 대한 발견자현실에 대한 간략화 과학자는 사실들, 자연법칙의 발견자예술언어와 과학2.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과학적 · 예술적 이성2.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미적 지각과 살아있는 형식리히터에밀 졸라예술가의 눈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때,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며, 이 영역은 살아있는 사물의 영역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형식의 영역이 된다“”2.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캇시러의 부정적 견해예술가들의 상상은 사물들의 형식을 제멋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형식을 보되 그 참된 형식에서 보도록 해주고,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이 형식들을 우리가 볼 수 있고, 인지 할 수 있게 해준다.2.캇시러의 예술이해와 인간캇시러의 부정적 견해예술가의 상상은 물리적인 표현이 아닌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며, 항상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직관과 감각의 형태를 통해서 상징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1) 상상(력)의 개념고전적 이론 신고전파 이론시인의 상상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통제낭만주의시적 상상이론의 절정사실주의사물들의 질료적인 측면에 집중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독창적인 작가의 펜은 아르미다의 지팡이처럼 거친 들판에서 샘물이 콸콸 솟아나게 한다.”낭만주의Edward Young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예술가 = 사물들의 '속뜻'과 그 정신적 생명을 느낌 + 자기의 감정을 외부화 + 형체 부여캇시러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예술의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평범한 사물들'을 그 진정한 형상에 있어서, 또 그 참된 빛 속에서 보게 하는 것!사실주의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예술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사물들의 존재, 본성, 또 경험적 속성들의 배후에서 갑자기 사물의 '형상ㆍ형식'을 발견하게 됨 → 동적 질서 자연의 새로운 지평캇시러앤드류 와이어즈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크리스티나의 세계 (1948)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랭거Susanne K. Langer『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캇시러의 상징 개념을 보다 구체화시킴. 상징의 원시적 기능 분절화3.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에서의 상징캇시러사물들에 대한 공감적 투시 상모적인 태도 사물을 시각화4.캇시러의 예술관의 영향고흐, 농부의 구두Thank you for your listening^^Don't be late!!{nameOfApplication=Show}
1. 서 론‘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역사 이래로 인간 안에 숨겨진 근원적인 물음이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이 질문은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의 놀라운 창조성과 사유의 능력을 통하여 역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답을 향해 점점 접근해가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된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원시사회를 거쳐 국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고대 철학의 사상가들은 모두 이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쓰며 여러 가지 대답들을 제시한다. 전쟁과 피로 얼룩진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서 그들이 바라봤던 것은 현실 세계에 보이는 것들 안에 있던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기대하며 열망했던 이상향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탐구하며 교육활동을 했다.그 중 한 사람인 플라톤의 가슴 속에도 동일한 마음이 있었다. 플라톤이 살던 시기는 아테네가 전성기를 지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하면서 점차 몰락해가던 시대였다. 엄청난 혼란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플라톤은 새롭게 유입되는 사상들을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것이 그의 사상과 저술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이 짧은 글을 통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그의 교육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교육의 현실에 적용해보고자 한다.2. 동굴의 비유소크라테스: “우리가 본래적인 뜻에서 본 교육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은 상태와 비슷하다고 봐 주게나. 즉, 인간이 땅속 동굴에 구금되어 산다고 가정하세. 깊숙한 동굴은 광명이 있는 쪽을 향해 그 입구가 동굴 넓이 만큼 열려 있다고 하세. 인간은 그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손발과 목을 묶인 채 꼼짝 못하고 있어 앞을 볼 수 있을 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네.”플라톤이 생각하는 세상은 두 가지 세계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현실 세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데아의 세계였다. 전자는 감각적이고 시공간적인 현상의 세계이고 후자는 그것을 초월하는 형상의 세계이다. 또한 플라톤은 전자가 이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세계라면 후자는 감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세계라고 생각하였다. 동굴은 바로 전자에 속하는 공간이다.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인간의 상태를 동굴 속에 구금되어 있는 존재로 보았다. 여기에서 묘사된 인간의 모습은 무척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무언가에 묶여서 자신을 온전히 볼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의 처지를 참된 것(토 알레테스, 비은폐된 것)을 향하여 열려져 있는 존재로 보았다. 즉, 인간은 참된 것 안에, 진리 안에 서 있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그 안에서 무엇이 참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아무런 통찰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뒤에 있는 불빛에 의해서 그들 앞에 있는 벽면에 비쳐진 그림자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그들은 동굴에서 분명 밝음, 즉 “빛”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그것은 뒤에서부터 비쳐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또 다른 빛이 있다.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빛에 대해서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한번 그러한 결박으로부터 풀려나고 무통찰의 상태로부터 구제되는 경우를 눈앞에 그려보게나. … 그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나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 이것(그림자)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정말로 더 명확한(더 잘 보여질)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쇠사슬이 풀린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림자를 보지 않고 목을 돌려 그들 주위의 실재의 사물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똑같은 것이 두 가지로 갈리게 된다. 제일 먼저 본 것(그림자)과 지금 보고 있는 것 가운데 그들은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그림자의 실체를 접하면서 어느 한 쪽이 더 진리에 가깝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결박된 자에게는 그림자가 더 참된 것, 더 비은폐된 것, 더 밝은 것, 더 현존하는 것이다.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누가 이들을 이끌어내어 실재를 접하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동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묶여 있을 텐데 밖에 있는 누군가가 와서 쇠사슬을 풀어준 것인지 의문이 들면서, 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허상에 묶여 있는 자들을 깨우쳐 주며 일으켜 주며 실재를 접하게 하는 것이 교육자의 사명인 것 같다.어쨌든 억견에 묶여있던 이들은 두 가지 진리 앞에 놓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독특한 귀결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더 많이 존재하는 것에로 몸을 돌리는 자가 더 올바르게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올바름”이 등장한다. 두 본질 형태들(진리 개념들) 사이에 연관성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더 참된 것인지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판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박을 풀고 일어서서 몸을 돌리고 빛을 바라보는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야 했기에, 해방은 곧바로 통찰력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것의 파악, 휘둘러봄(고려, 조망)과 들여다봄(통찰), 세계와 자기 자신과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확성과 규정성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혼란만이 생길 뿐이다. 따라서 쇠사슬의 제거만을 진정한 인간의 해방이라고 할 수는 없다.“ …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걸세. 또한 이것들에게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걸세.”진정한 해방은 동굴에서의 인위적인 빛에서부터 멀리 떠나 태양에로 향할 때 이루어진다. 쇠사슬을 풀어버린 것만으로, 동굴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익숙해짐이 필요하다. 급작스럽게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동굴로부터 급작스럽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더딘 익숙해짐이 필요하다. 아주 천천히 어둠의 습관들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영역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진다. 시간이 필요하다. 강압이 동굴 밖으로 나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면, 지속과 끈기 있는 용기는 빛과 친숙해지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동굴에서 나온 자들은 우선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의 반사물(그림자와 비슷한 것) 을 찾으려는 습관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제가 필요할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무작정 진리를 안겨다주며 그들이 받을 충격에 대해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일방적인 교육이 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대상자의 인격과 영혼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목적은 옳을지 몰라도 방법상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체계가 잡혀진 교육과정 속에서는 예외가 성립하기가 힘들다. 성적이 부진한 아이들을 시간을 두고 한 단계씩 밟기에는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방향이다. 아이들을 어둠의 동굴 속에서 이끌어냈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동굴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것 같은 상황이지만, 과연 결박당하던 자들이 자신의 구습을 떨쳐버리고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플라톤 자신도 동굴의 비유에서는 최고의 이데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플라톤 자신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현존하는 존재에 대한 단호함과 확신으로 자신의 이데아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스스로를 어떤 무엇으로 내주고 있는 그것의 보임새(anblick)이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찰과 능력으로 이데아를 볼 수 있는 것이다.‘해’로 비유되는 그 이데아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교육으로 아이들을 일률적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리는 지키되 아이들에게 믿음을 일률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달란트와 주어진 은사를 통해서 절대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률적인 기준으로 한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해로 더욱 나아가면 나갈수록 분명히 인간은 자유해진다. 진리안에서 참으로 자유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플라톤은 이 상태에서 이상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1. 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G.M. 홉킨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받고 1866년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여 뉴먼(J.H. Newman)의 제자가 되었고, 1884년에는 더블린 대학에서 희랍어 교수로 임명되어 목사로서, 교수로서의 일생을 살았다. 그 후 4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블린 빈민촌에서 계속 교역에 종사하였다. 그가 비록 빅토리아조 시인이지만, 그의 시가 현대시로서 주목받는 큰 이유는 그의 시법이 매우 독창적이고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Thomas Hardy와 동시대 시인이면서도 그의 시학과 그의 세계관에 동조되지 않았다. 워즈워스 이래의 전통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틀에 박힌 시형식을 무시하고서 용어를 의미와 직결시켜 시형식을 대담하게 자기 특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고, 문장에서 관사와 접속사를 생략하기도 하고, 운(두운, 자운, 모운)을 특유하게 고쳐쓰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시의 의미에 집중과 긴장을 도모하였다. 그의 시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 대상물에 충만되어 있는 복합적이고 긴장된 감성적 에너지를 통찰하여 그것을 표출하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터질 것 같은 이 에너지제를 “감성 풍경(inscape)"이라고 불렀고, 이 풍경을 지배하는 힘을 ”감성적 긴장(instress)"이라고 불렀다. 홉킨스 시의 매력은 시의 형식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집중과 긴장의 아름다움이다.God's GrandeurGerard Manley HopkinsThe world is charged with the grandeur of God.It will flame out, like shining from shook foil;It gathers to a greatness, like the ooze of oilCrushed. Why do men then now not reck his rod?Generations have trod, have trod, have trod;And all i 그렇다 해도 자연은 결코 바닥나지 않는다.모든 것들의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귀중한 신선함은 살아있다.그리고 암흑의 서방에서 마지막 빛이 꺼진다 하더라도아, 아침도, 갈색 동쪽녘에서 솟아오른다, 봄도--왜냐하면 성령이 굽은 세상을 그 포근한 품으로안으시니, 아, 찬란한 두 날개로.◆ 감상시인의 눈에 펼쳐진 자연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위대하심을 드러낸다. 신의 위엄이 온 땅에 이렇게도 충만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잊은 채 자신들의 일에만 매여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감격과 감동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이 땅위에 불꽃과 같이 뿜어져 나오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할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업과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도 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모든 것들 가운데 신선함은 살아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함없이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Holy Ghost(성령님)이 이 땅을 포근하게 안아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찬란한 두 날개로 온 세상을 끌어안으시는 성령님의 포근함이 지금 이 순간 내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2. Wilfred Owen (1893-1918)영국 슈럽셔주 오스웨스트리 출생으로 런던 대학에서 교육받고 키츠의 시를 애독하여 일찍부터 시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한때 병으로 입원, 퇴원 후에 다시 프랑스 전선에서 싸우다 휴전 1주 전에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사후에 그의 친구 Siegfried Sassoon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오원은 서순, 루퍼트 브룩 등 소위 전쟁 시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고, 그의 시의 주제는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전쟁과 전쟁의 연민이다. 그는 피 흘리는 전투에서 그리는 숨막히는 참호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동료 병사들 틈om none now hear,Now earth has stopped their piteous mouths that coughed.Heart, you were never hotNor large, nor full like hearts made great with shot;And though your hand be pale,Paler are all which trailYour cross through flame and hail:Weep, you may weep, for you may touch them not.더욱 위대한 사랑알프렛 오원붉은 입술이 그렇게 붉진 않다전사한 영국인이 입맞춘 피 묻은 돌만큼.사랑을 주고 받는 이들의 친절함도그들의 순수한 사랑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다.아, 연인이여 그대의 눈이 매력을 잃었구나내 대신 눈 먼 이의 눈을 들여다보니.그대의 날씬한 모습칼로 도려낸 사지만큼 섬세하게 떨리진 못하는구나.뒹굴고 뒹굴다가신도 돌보지 않는 그곳에서죽음의 극단의 노쇠함에서스스로 지닌 치열한 사랑에 떨고마는구나.그대의 목소리도 그리 부드럽지는 않다.다락방 창살틈을 흘러나오는 바람처럼 웅얼거림에도그대의 다정한 음성도 그리 밝고부드럽고 저녁처럼 환하진 못하다,지금은 듣는 이 없는 그들의 음성만큼흙은 쿨룩거리던 그 가엾은 입을 멈춰버렸구나심장이여, 네가 그렇게 뜨겁고,크고, 벅차진 못했다, 총알로 만들어진 그 심장들 만큼은.그리고 그대의 손이 희다 할지라도화염과 총알세례 속으로너의 십자가를 끌고가는 손이 더 희구나.울아라, 울어도 좋다. 그대는 그들을 만질 수 없으니.◆ 감상전쟁의 참혹함이 느껴진다. 연인의 사랑보다도 더욱 위대한 사랑이 바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의 충성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서 부상을 당하였는데 병원에서 부상병으로 치료를 받는 도중에 쓰여진 시라고 한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시인의 묘사는 전쟁의 참혹함을 여과없이 드러내어 준다. 전반적으로 대비를 통해서 죽음을 목전에 둔 군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잘 보상 언어를 개발하여 수사적이고 환상적인 낭만시에서 일변하여 간결한 용어, 구어체적인 표현, 극적인 장면 등으로 이루어진 현대시를 썼다. 1923년에 노벨상을 받은 것과 1922-28년에 상원의원을 지낸 사실 또한 특기할만한 일이다.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W. B. Yeats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 light,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그는 하늘나라의 옷감을 원한다W.B. 예이츠내게 만일 금빛 은빛으로 곱게 짜여진하늘나라의 수놓은 옷감이 있다면,밤과 낮과 황혼의파랗고 어슴프레한 어두운 빛의 옷감이 있다면,나는 그 옷감을 당신의 발 아래 깔아드리리다.그러나,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 뿐이오니,내 꿈을 당신의 발 아래 깔았사오니사뿐이 밟으소서, 당신은 내 꿈을 밟으시기에.◆ 감상이 시는 시인이 34세 때에 쓰여진 것으로 그가 한창 사랑에 불타던, 그리고 꿈같은 막연한 상상력으로 화려하고 신비한 낭만세계를 노래하던 때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이 시를 보면서 낭만적이라고 보여지기 보다는 허무함이 많이 느껴졌다. 하늘을 수놓을 옷감, 찬란한 빛으로 또는 어슴프레한 빛으로 얼룩진 알 수 없는 그것이 마지막에는 짓밟히고 마는 허무한 것으로 종결이 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짧은 시이지만 다양한 색감을 표현하려고 한 점은 높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시는 우리나라의 시 “진달래꽃”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친근인 간결성 그리고 운율의 경쾌함을 보여주며 또한 독창적인 컨시트를 사용함으로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Samuel Taylor Coleridge는 허버트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Nothing can be more pure, manly, or unaffected" 그리고 코울리지는 허버트를 존던과 함께 형이상학 시인의 대표주자라고 높이 칭송하였다.RedemptionGeorge HerbertHaving been tenant long to a rich Lord,Not thriving, I resolved to be bold,And make a suit unto him, to affordA new small-rented lease, and cancel the old.In heaven at his manor I him sought:They told me there, that he was lately goneAbout some land, which he had dearly boughtLong since on earth, to take possession.I straight returned, and knowing his great birth,Sought him accordingly in great resorts;In cities, theatres, gardens, parks, and courts:At length I heard a ragged noise and mirthOf thieves and murderers: there I him espied,Who straight, Your suit is granted, said, & died.오랫동안 부유한 영주의 소작인으로,번성하지 못했기에, 나는 과감히 결심을 하고그에게 청원을 하였다, 새로운 자그마한토지임대를 달라고, 그리고 오래된 것을 취소해 달라고천국에선 그의 장원에서 나는 그를 찾았다.그들은 그곳에서 내게 말했네, 그는 최근에 떠났다고어떤 토지에 관해서, 그는 비싸게 샀다고아주 오래전 이 땅에서
‘천부적인 교사’ 서평1. 정신의 정열먼저 이 책은 헤겔의 말로 천부적인 교사를 향한 긴 여행을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 치고 정열 없이 성취된 것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정열이란 전체적인 정신 활동으로부터 개인에게 분여된 정신의 부분을 뜻하고 있다.사람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바로 이 정신적인 정열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 정신적인 정열에 대해 소원(疎遠)해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고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 정신적인 정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당시의 세태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사람들은 직업을 갖게 되면서 대부분 정신생활과는 이별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요구하는 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직업의 요구사항이나 전망 등에 관심이 더 많다. 정신의 정열이 필요 이상의 사치라고 믿는 것이다.하지만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정신의 정열과 더불어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교육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교사는 바로 이 감격적인 혼의 소유자로서의 교사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저자는 천부적인 교사에 대해 논지를 이끌어간다.타고난 교사가 정말 존재하는가? 천부적인 교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정신을 불어넣는, 영감을 주는 교사가 존재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것을 근거로 대답해야 할까? 교사는 시대의 정신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생명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를 주는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원시림에서 활을 만드는 사람의 예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을 통해서 천부적인 교사는 타인의 자기 형성을 위해 주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2. 타인의 혼을 움직이는 지렛대처음에 다루는 부분은 바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혼에 대한 문제이다. 그 혼을 움직이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렛대. 이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닌 것 같다. 단순하게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고자 질문을 하고 열심히 책을 보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혼을 깨운다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새로운 혼을 조산하는 것과 같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올바른 기준과 균형 잡힌 새로운 눈을 갖도록 학생들을 돕는 일이 지렛대의 핵심인 것 같다.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춰 볼 때, 이 지렛대의 문제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혼’에 대한 관심이 과연 우리나라 교육자들과 교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지 궁금하다. 교육의 중요성과 고귀함이 아직 올바르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교육의 지렛대를 놓을 장소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천부적인 교육자가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육자의 바람직한 정신자세 뿐 만 아니라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3. Midas의 손을 가진 교사의 도야재 환원능력교육의 지렛대를 놓으려면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 어떻게 혼을 교육적으로 파악하며 그것을 위한 정신재(精神財)를 발견할 것인가? 교사는 미다스왕처럼 되어야 한다고 한 학자는 주장한다. 손에 닿는 것은 다 황금으로 변하는 것처럼 교육자에게 닿는 모든 자료가 학생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도야의 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화재 가운데서 잠자고 있는 도야 가치를 찾아내어 그것을 도야 목적에 비추어서 조사하고, 구체적인 수담으로 끌어내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명 지워진 교육자 본래의 임무인 것이다.얼마나 환상적인 이야기인가! 교사의 손을 거치는 모든 것들이 교육적인 자료가 되며 학생들에게 깨달음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교육과정이나 교과교재에 대한 미흡한 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는 창조적인 장인(匠人)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과목이든지 그 안에 있는 본질을 교사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재(財)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전가 어떤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던지 교사가 창조적으로 교재를 환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저자가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있는 것은, 교사는 타인을 교육하는 과정에 힘쓰기에 앞서 먼저 자기 안에서 풍요한 도야의 방법 가운데서 ‘골라잡는 일’에 의해서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단순한 사례들을 통해서 어떤 형태 또는 어떤 현상의 구성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물고기가 냇물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 본질적인 구조와 사고 안에서 마음껏 호흡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구조 안에서 그와 유사한 수많은 대상에 대한 동일한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교사가 이 자유함을 경험해보지 못하는데 어찌 학생들에게 진리의 자유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이처럼 천부적인 교사는 학생들에게 정신의 본질적인 영역으로 인도하여 물고기를 냇물로 돌려보내는 것처럼 그 본래의 내용으로써 학생들의 정서의 메마름을 적셔주고 만족시켜 주고자 하는 사랑의 정열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4. 공동체의 조직 안에서교육적인 가치나 도야재에 관한 고찰이 아무리 중요해도 결국 교육의 현장은 사회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의식하고 의사소통을 이루며 그 안에서 지식을 형성한다. 또 그 안에서 도덕적인 영향이 다른 사람과의 교섭에 의해서 생겨난다. 슈프랑거는 교육이 발생되는 현장은 바로 사람의 집합,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고 용기(容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동체의 도덕적인 내용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교육의 교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천부적인 교사는 도덕적인 교육은 단순히 교수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의 역사가들이 말하는 도덕적인 힘은 의식적인 순화의 노력에 의해서, 수 세대에 걸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즉, 도덕교육과 같은 인간교육은 학교의 교수활동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예컨대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인격이 형성되는 것처면 그 안에 형성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는 법이나 도덕의 존재를 알며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오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집단정신은 한 개개인의 양심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집단에 존재하는 도덕이나 정신이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그 반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또는 타인의 도움과 지도에 따라 그 공동체의 본질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양심적인 교육자가 있는 것이다.이처럼 가족이나 학교와 같이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는 장소에서 이러한 진정한 정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어패가 있긴 하지만 진정한 정신을 가르치는 곳은 학교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양에 있어서도 학교는 본시 사원 학교로 출발했고 그 당시 교회는 그 본질적인 요구를 이행하고 있었다. 가정, 직장, 교회, 클럽, 집회, 노동조합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육이 발생될 수 있는 것이다.그 중에서 교육 정신이 그 본질에 응해서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는 단체인 학교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학교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건물, 교실, 선생님일 것이다. 이 밖에도 국가로부터 임명된 교장, 교칙이나 시간표 등이 있는데 이러한 형식들만 가지고 교육의 참다운 정신을 실현할 수가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학교는 단순히 교육시설일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생활 공동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고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대하기도 한다. 이처럼 학교는 학생들의 생활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선생님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사는 단지 국가로부터 인가된 직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특성은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 아닌, 이성과 감정을 모두 다 초월한 예술의지탄을 받고 있다. 교사는 자신이 도덕의 파수꾼임을 인식해야 하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5. 교육목표와 도야이상지금까지 살펴본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닦는 도야의 이상을 설정하는 것은 위험한 모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육목표와 도야이상은 반드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야이상은 그 이상은 겉으로 보이는 외부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그런데 과연 교육 목표로서의 이상적인 인간의 정신상을 설정해야 하는가? 오늘날 그렇게 모범이 될만한 인간상이 있는가? 라는 상투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면 많은 허점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 목표에 관해는 절대적인 의무나 규범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만 가지고는 이 규범적인 인간상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이상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다.중요한 것은 그 인간성의 기초와 그의 근본적인 정의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문화에서 생겨난 인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형성된 고상화된 인간성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나 로마 문화는 그 자신이 결코 교육의 이상이 아니라, 도야재인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인간성이란 아직 확실하게 형태가 드러나지 아니했거나, 또는 희미한 윤곽에 그쳤음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아주 판이한 구체적인 도야 이상들이 모두 그들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이 인정 되어야 하고, 동시에 도야의 이상은 절대로 의무적이며 그 때문에 제멋대로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도 필요하다. 이 애매한 입장에 대해서 어떻게 교육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까?진정한 교육자가 목표를 결정할 때 고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혼이 우선하며, 개별적으로 사랑하는 모든 것, 성취하는 모든 것보다도 혼 그 자체가 우선한다고 하는 신념이다. 즉, .
21세기 교사의 역할(생태학적인 관점)“It's not your fault." 이 한마디에 윌은 그 동안 자신을 가로 막고 있던 모든 분노와 아픔을 숀 선생님 앞에 내어 놓으며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많고 많은 선생님을 다룬 영화 중에서도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아직도 나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한 청년이 자아를 찾기 위해 애쓰며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뒤에서 윌을 도왔던 숀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가운데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진실하게 이해하게 되며 깊은 마음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선생님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나에게 끊임없는 물음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영화 덕분이었다. 물론 영화에서와 같은 역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 사이트에서 실시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에 대한 답변을 보면 좋은 기억보다는 좋지 않은 기억의 선생님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마다 경험했던 선생님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알게 모르게 모든 학생들에게 잔잔하게 혹은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님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어떤 역할로서 아이들에게 다가서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볼 수 있는 책이 바로 『21세기 교사의 역할』이다.그냥 교사의 역할이 아닌 21세기를 붙인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사의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교사상을 과거의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례와 연구를 통해서 기술하고 있다. 총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각기 다른 역할로서의 교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11가지의 역할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분화해서 정리함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부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점에서는 효과적인 것 인간적이라는 것은 단지 따뜻하고 정답게 학생들을 대하는 뜻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오히려 진실성에 가깝다. 즉, 교사는 진실한 감정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학생들을 대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서 교육을 이루는 것이다. 때로는 학문의 깊이를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약점, 관심, 신념, 유머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 그대로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창하고 가치 있게 보이는 교사의 역할이 과연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잘 적용될지 의문이다. 아무리 교육정책이 바뀌고 다양화되어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는 않는 듯하다.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얼마나 성적을 올려줘서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는지가 교사를 평가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어 버렸다. 형태가 바뀌지만 본질은 바뀌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학교라는 곳은 지식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고 발전시키는 결과론적 입장을 중요시 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 국가 경쟁력을 키우고 나라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후손에게 잘 전달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교육이 된다. 하지만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 보면 좀 더 다른 시각이 요구된다. 사회와 교육은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성장해가지 않으면 양쪽 모두 성장할 수가 없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교육이 건강하지 않는데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관심은 사회와의 관계보다는 교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쪽에 가깝다. 그것은 사회에 아예 관심이 없다고 보기 보다는 교사의 내면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과론적인 것보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가 말하는 인간적인 특성이란 비록 사회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교사는 양심을 지키고 내면의 성장을 통해 자유인이 되는 것을 꿈꾸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의 창을 열어준다. 교사의 역할을 다루는 책에서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동기를 제공하는 측면에서 상당히 좋은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마인드는 곧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데, 교사로서의 고민과 성장을 함께 나눌 동료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삽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처럼, 교사는 홀로 자유인이 되어 현실에 등을 돌리며 사는 존재로 살아가기 보다는, 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사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그다지 활발하게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자신의 교육철학을 마음껏 발휘하며 교류를 시도하는 교사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열린 마음으로 교류를 잘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전공에는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며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독불장군형의 교사가 있기도 하였고, 교류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가진 지식만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하는 현실만족형의 교사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유형들은 모두 성장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기 위해 교류를 하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학문세계, 가치체계 안에서 호위호식하려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게으름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더 이상 고압적인 자세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필자도 이점을 주목하여 교사의 개인적인 전문성을 더욱 증진시켜주는 내적인, 외적인 시너지 효과를 위하여 동료교사와의 교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이러한 소통은 곧 인간으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더욱 지속시키며 학문과 함께 인격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의미 있는 연합은 곧 학생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교사는 슈퍼맨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격과 실력을 겸비하여도 여러 가지 문제전공, 또는 특수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사들의 모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교사의 동역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교장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전공, 같은 지역, 같은 지위의 교사와의 관계만 다루지 않고 학교의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교장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책의 뒷부분에서도 나오지만 연구자로서 프로그램 개발자로서의 교사에게 교장의 원조는 더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어준다.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때, 창조적인 일을 할 때에 교장의 원조는 교사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교장과 교사의 대화를 보면 매우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교사는 자신의 의견을 교장에게 찾아가 이야기한다. 교장은 교사의 창조적이고 의욕저인 것들을 다 들어주고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흘리지 않고 세심하게 받아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상호존중이 가장 필요한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지위에 의해 위축당하지 않고, 다른 어떤 선입견에 의해 축소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존중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어떤 시도도 이러한 분위기가 없다면 감히 시도해 볼 수 없을 것이다.교사가 교육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교사는 다른 교사와의 교류도 필요하고, 같은 교육 공동체의 사람들과의 신뢰와 소통도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건강한 교육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사 홀로 분투하기 보다는 함께할 동역자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3장에서는 학부모와의 연합을 제시하고 있다. 학교를 거치기 이전에 가정은 먼저 기본적인 소양을 기르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단위이다. 특히 인지적, 정서적인 면에서의 성장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기에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학교에게 교육의 역할을 모두 떠넘기려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책에 나오는 접근은 아주 조심스럽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하든 실현하기 어렵든 좋은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가정의 회복이 곧 사회의 회복이며 교육의 회복이다. 이러한 논지의 흐름속에서 필자는 자연스럽게 학습의 주체자에게 눈을 돌린다.교사는 학습자의 이해를 통해서만이 진실한 교육을 이룰 수 있다. 4장부터는 교사 자체의 존재규명보다는 학습자의 관계 혹은 환경과 사회와의 관계와 같은 교사의 외부세계를 통해 교사의 역할을 규명하고 있다. 학습자를 이해하는 교사의 역할, 학습자에게 효과적으로 학습을 가능케 하고자 하는 학습의 촉진자로서의 교사의 역할, 다각적인 접근과 관찰을 통해 학습자를 파악하려는 연구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되고 창조적인 일들을 꿈꾸며 그것을 구체화 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자로서의 교사의 역할과 학습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그것을 도와주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먼저 교육의 참여자들은 학습자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말하는 학습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아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외모, 환경, 출생, 가치, 태도, 그리고 느낌과 같은 요인을 포함한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행동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진리는 단순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그렇게도 어려울 수가 없다. 복합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교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교사는 학습자의 단편적인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쉽다는 얘기다. 교사가 전체적인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학생들은 의사소통의 통로를 열어준다. 이해한다는 것은 존중한다는 것이다. 인정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의 다름으로 인해 미워하며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필자의 나라는 다인종이 있는 나라인지라 학생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면 학생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