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주제◎〓≫인간의 시련은 신들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1.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성격(생성적 본질)주제를 생각해 보기 전에 우리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인간들과의 밀접한 연관성(또는 유대감)을 띠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호메로스 원작의 “오디세이아”, “일리아드”이다. 작품에서 신들은 한낮 자신의 미적 자존심 때문에 인간들에게 ‘트로이전쟁‘이라는 10년에 걸친 전쟁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극도의 대립은 어디서 근원하는가?희랍신화에서의 창세기를 살펴보자. 위는 희랍신들의 계보 중 일부이다. 여기서 신족의 주신인 제우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형제들과 함께 자신들의 아버지인 거인족신 크로노스(크로노스 자신도 아버지 우라누스를 거세하고 왕좌에 올랐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자신도 자식에게 쫓겨날 운명을 선천적으로 타고나게 된다.(이 이야기는 제우스에 의한 ‘프로메테우스의 시련’부분에 잘 나와 있다.) 즉, 계속적인 도전과 그에 따른 혼돈, 그리고 다시 질서라는 되풀이현상을 겪으면서 신들은 스스로 절대적이지 않음을 내보이게 된다. 이런 고유의 사상은 그대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타나게 되며 이는 그대로 인간에게 전해지고 그 결과 인간들도 극한의 대립과 진정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리라.2.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사상적 특색에 따른 희랍신들의 불완전성신화의 내용에서 신들은 인간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사랑하며 또한 질투한다.이는 자신들과 너무도 닮은 인간족에 대한 근원적 경각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이런 희랍신들의 정신세계는 어디에서 기초한 것인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예로부터 서구의 문학과 예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수많은 예증과 상징, 영감을 빌어 왔다.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심리학, 교육학 같은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심심찮게 신화 속의 사건이나 인물을 원용하였다. 이러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는 그리스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이다.흔히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신으로 세 가지를 든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주의’, 이성과 절제, 중용을 높이 산 ‘합리주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이룩한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 인간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으로서 말할 수 있는 바는 이렇다.인간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늘 모순과 갈등, 탐욕과 다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를 더러운 곳으로 부정하고 저 먼 어딘가에 있는 이상향이나 아니면 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비록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지만 현실의 세계를 기꺼이 긍정하였다. 또한 그 속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귀중히 여겨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았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꿈의 나라로 도망가지 않았고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영원하고 장엄한 것보다 유한하고 자연적인 것을 사랑하였다. 즉, 자기 자신들의 불완전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신화야말로 이러나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의 신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그들의 신은 인간을 확대시킨 존재에 불과했다. 인간이 그렇듯 그들의 신도 결점 많고 연약한, 선악의 이름 아래 인간을 경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문화는 낙천적이고 명랑하여 생동하는 개성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 문화를 서구 문명의 뿌리로서 뿐만 아니라 전체의 빛나는 유산으로 스스럼없이 인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산물의 대표적이며 시초가 되는 것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3. 오디세우스와 포세이돈, 그리고 신들의 질투앞서 말했듯이 그리스인들에게 결코 신들은 전능하다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그들의 신은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질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으리라.작품의 주인공격인 오디세우스는 인간들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인간이었다. 10여년의 기나긴 트로이전쟁을 ‘트로이의 목마’ 라고 불리는 기만전술 한번으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트로이전쟁은 모든 인간영웅과 신들의 각축전이었던 만큼 그 승리의 영향은 매우 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잊고 오히려 그 신전을 모독하고 만다. 바로 승리에의 도취감이 그와 그리스 군대를 교만으로 이끈 것이다. 이런 위태한 인간의 불완전성(이 불완전성이라 함은 그리스인들의 그것이 투영된 그들의 신들의 속성이고 또한 그 신화의 바탕이므로 신화속의 인물은 당연히 지니는 것이라고 본다.)은 오디세우스의 귀환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우리가 본 영화 곳곳에는 단지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한 불행이 여러 번 눈에 띄는데, 이것을 신들은 놓치지 않고 간섭하게 되면서 그의 시련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와 근대화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심각한 취업난과 경제발전 둔화, 또한 기업과 정치계의 타락 등으로 많은 몸살을 앓고 있음이 사실이다.그래서인지 지난해 12월 27일 국정 홍보처가 전국의 성인 남녀 4,5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의식과 가치관’을 조사, 발표했을 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1위 박정희 전대통령(21.1%), 2위 세종대왕(19.8%),3위 이순신 장군(12.7%), 4위 김구 주석(10.5%)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요즘 들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 박물관을 서울 상암동에 건립한다고 한다.아마도 그가 우리 나라가 전란과 부패로 황폐해진 민심을 엄청난 고도성장을 통해 위로해 주었음을 기리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히 큰 반발이 따르게 되었는데, 여러 시민단체에서 건립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그에 대한 이때까지의 관점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책도 나오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최상천(전 효성가톨릭대 교수·역사교육과)의 ‘알몸 박정희’, 신용구(안양중앙병원 정신과 과장)의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전재호의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가 있다. 이 책들을 자세히 접해 보진 않았지만 아주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상반된 주장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했다.박정희의 이중적 평가에 대하여일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전과 중일 때의 경제현황을 알아보자. 두 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그 첫 단계는「정체기」라고 말할 수 있는 1948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80달러 안팎을 맴돌았을 뿐 아니라 수출은 3~4천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4% (54~61)에 지나지 않았던 지극히 가난했던 시기였다.다음 단계는「개발기」라고 불리우는 60년대로서 5.16군사쿠데타를 기점으로 하는 이 60년대에 정부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장기 국가 계발계획에 착수할 수 있었다. 즉 1969년도에는 18.1%를 달성, 개발도상국의 평균성장률인 4.8%를 훨씬 능가하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분명히 눈으로 보이는 경이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를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고 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대단히 큰 실효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상당한 견해차를 보이며, “새마을운동은 체제위기를 미봉 하려는 비상대책으로, 정신계몽을 중시하고 ‘새마을지도자’ 같은 끄나풀을 활용했다는 점 등 에서 일제 하 농촌진흥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면서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이 운동은 결국노동력 강제동원으로 인한 영세소농의 이농과 농촌의 정부 의존성 심화에 따른 전통적 농촌공동체의 붕괴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우리는 여기서 왜 이런 극단적 견해차를 보이게 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 논해 보기로 한다.박정희를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인가?박정희가 민족주의자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지금의 우리가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행한 행적으로 미루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현재 상대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박정희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고 그들의 주장이 여론에도 크게 반영되고 있는 실정이다.박정희가 미국을 싫어하고 일본의 대중문화와 같은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보면 그가 민족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충효 사상과 같은 중세 가부장제의 봉건윤리를 전통문화의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지배윤리로 강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민족성을 지키려한 듯 하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해석하기 나름인데 현재 밝혀진 사실로는 박정희는 절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독립 이전부터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반역자 대열에 속해 있었다. 독립군과 대치하는 일본군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 때의 박정희는 직접 전선에 나간 적이 없으므로 민족을 배반한 정도가 미미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자기 스스않은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한다. 박정희가 미국을 싫어한 이유는 유신체제가 되었을 때 미국의 간섭이 거세어 졌다는 것 때문이고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간혹 자신은 일본 노래도 흥얼거리고 했지만 과거 지나간 노래들이지 그 당시의 최신 일본 대중 가요는 아니었다고 한다.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정희 옹호자들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선 큰 소리를 치지 못 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건 민족주의일지 몰라도 속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만든 각종 유신체제의 보조 기구는 박정희가 사라진 지금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아 일상 속의 파시즘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아직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어쩌면 크게 틀리지 않단 생각을 해 보게 된다.지금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았을 때 박정희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 박정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그를 연구하는 학자도 많아지는 추세에 있기에 박정희에 대한 지금까지의 판단을 뒤엎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될 지도 모르겠다.박정희와 근대화원래 근대화라는 말은 주로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구체화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아서 상당히 다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근대화 개념은 근대화를 단순히 서유럽화로 보지 않는다. 이는 세계 모든 사회의 사회적 변동의 보편적인 지향목표이자, 사회적 변화의 요구이며, 보편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규범적 가치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세계의 지역적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회가 그의 사회적 변화에 있어서 도달해야 할 보편적인 사회과정이라고 보는 견해다. 흔히 말하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근대화의 정의(定義)는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이다.그러나 넓조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전근대적 ·후진적이 하는 것을 전통적이라고 보고, 선진적 또는 향상된 것을 근대적이라고 본다면,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라고 귀결된다. 이렇듯 근대화라는 말은 근대라는 상대적으로 분명한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처음 이 말을 쓴 것은 서양이다. 서양의 근대는 철학적으로 따지면 종교개혁, 르네상스로 상징되는 15-16세기로 소급되며 사회학적으로 따지면 자본주의 형성이나 시민 사회 성립이 이루어지는 17-18세기로 간주되고 있다. 서구 근대는 두 개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데, 쉽게 얘기해서 하나는 민주주의하자는 것이고 하나는 기술적 발전 즉, 자연에 대한 합리적 지배를 의미한다. 근대가 태어난 서구에서도 결국엔 근대에 실패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의 지향점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어떻게 근대화를 성공하였다는 말일까?박정희 옹호자들이 가장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박정희 때문에 우리 나라가 이 만큼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근대화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김대중 대통령도 박정희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인정해 마지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공로를 치하한다는 구실로 박정희 기념관까지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근대화는 의식적인 근대화는 깡그리 무시하고 물질적 근대화만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그러한 물질적 근대화로 인한 부정적인 유산을 너무 많이 남겼다는 지적도 있다.그 예로 한일 협정을 들 수 있는데 이 협정을 체결한 때는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기였다. 근대화를 위해 일본의 경제협력기금을 받아들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졸속적인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일본은 이 돈으로 36년 지배기간 동안의 모든 피해 보상을 매듭지어 버렸다. 그에 박정희 정권이 수락을 한 꼴이다. 팔면서 남의 나라 독립운동을 진압하러 간 것은 합리화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다만, 이 피의 대가가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에게 원래는 미국 직업 군인에 준하는 월급이 나왔지만 실제로 참전 군인들에게 훨씬 못 미치는 수당을 지급했다고 한다. 정부가 그들의 돈까지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것이다.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에는 일본의 냄새가 짙게 베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유신이란 말도 일제의 메이지유신, 쇼와 유신에서 나왔던 말들이고 새마을 운동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신촌(新村) 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새마을 지도자 양성 교육, 반상회, 국기에 대한 맹세 등등 여러 가지 정책이 모두 일본에서 따오거나 일제 시대에 있었던 것을 박정희 식으로 약간 변모 시켜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다.박정희 식 근대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권 유린이다. 근대화를 위해서라면 인권도 무시할 수 있다는 주의다. 정치도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때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희생만을 요구했다. 이에 거역하게 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 만큼 박정희 정권에겐 경제 발전이 최우선이었다. 현재 우리 나라 경제구조를 형성하는데는 박정희 정권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 재벌의 정경유착, 부실경영, 한국 경제의 미일 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만성적인 외채경제는 박정희가 주조한 경제구조의 핵심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이처럼 대부분의 학자들은 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에 대해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들도 약간은 있지만 정당화하는데는 거의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박정희 향수병이라는 말처럼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박정희의 본 모습을 모를 수도 있고 그 당시의 박정희를 이해하고 동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님 교육의 효과로 그 당시의 현실을 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