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인가?러셀, 『행복론』목차1. 서론2. 본론1) 불행의 원인2)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3) 진정한 행복이란3. 결론1. 서론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의 흔히 ‘행복하다’라는 것은 특별히 어떠한 요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가까운 것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내 마음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라고 말할 때의 ‘행복’이라는 것을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사전적으로 쉽게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굳이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은 그 첫 번째가 복된 운수라는 뜻이요, 두 번째가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한 상태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기는 욕구가 충족되어 있는 상태나 만족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행복해 하는 정도와 행복을 느끼는 대상이나 내용은 매우 다르고 무수히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또한 매우 많을 것이다. 버드란트 러셀은 『행복론』이라는 책 속에서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인 행복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현대인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가,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현대인이 현대인으로서 최대의 행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러셀 특유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시사하고 있다. 물론 러셀의 『행복론』이라는 저서가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행복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저서가 행복하기 위한 완벽한 지침서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행복하기 위한 다양한 요인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것들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인을 현대 사회라는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찾고자 하였다.동물은, 건강하고 먹을 것이 충분히 있는 한 행복하다. 인간도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대다수의 겨우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경우, 우리 스스로도 건강과 충분한 음식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마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도 모두 다에게서는 행복한 표정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이렇듯 불행은 그것이 인간의 것이건 동물의 것이건 모든 행복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욕구를 망가뜨려 버린다. 불행한 인간은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언제나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꼬리를 잃은 여우’의 자랑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 여우와 같은 경우라면 꼬리가 없는 편이 낫다고 자랑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새로운 꼬리를 낳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 불행을 고치는 길일 것이다. 이렇듯, 만일 행복해지는 방법을 안다면 일부러 불행 쪽을 고를 사람은 없을 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행복해 지는 방법을 알기 전에 불행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고 피해간다면, 행복해 지는 방법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우리에게 불행을 주는 요인 중 그 첫 번째가 바로, ‘경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생존경쟁’은 인생의 행복을 저해시키는 요인 중 하나임을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데 지금보다 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성공을 꿈꾼다. 사람들은 성공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는 삶에서의 경쟁을 해야만 한다.경쟁하여 성공하는 것을 행복의 주된 원천으로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성공했다는 실감, 그 자체가 인생을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주된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신경의 피로를 들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신경의 피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볼 수 있다.현대 생활에서 느끼는 피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정적인 면에서의 피로인데, 단순히 지적인 피로는 충분한 수면을 통해서 풀리지만, 감정적인 면에서의 피로는 근심이나 걱정에서 오는 것으로 휴식을 방해하여, 사람이 피로하면 할수록 그것을 풀기가 어려워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피로는 자기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될 때 소멸되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다음의 불행의 요인으로 질투를 들 수 있는데, 질투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에서도 가장 보편적이고 뿌리깊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성의 모든 특질 가운데에서 질투는 가장 불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샘이 많은 인간은 남의 불행을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처벌을 안 받는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투 그 자체에 의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질투는 부모가 자신보다 형이나 누나를 더 귀여워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같은 것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기 눈앞에 있는 즐거움을 즐기고,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일이다. 질투는 나와 다른 누군가를 비교하는 데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사람과의 쓸데없는 비교를 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의 질투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면, 질투의 감정을 고치기 위한 긴 과정에 첫걸음을 이미 내디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죄의식으로 인해서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낀다. 이러한 죄의식을 우리가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죄의식은 생활의 불행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심리적 원인의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신교도들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행위가 죄가 많은 것일 때, 어떤 인간에게선 거의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거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성격이나 행동이 우리 동네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다른 동네에서는 그러한 성격이나 행동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내가 우리 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나의 주변 환경 속에서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위해서 호의적인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지금까지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서 알아본 불행의 원인들은 우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아닌,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의 요인을 알고, 그것을 해결해감으로써 행복해지는 길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2)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러셀은 “행복은 오직 쟁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저서에서 행복의 실제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스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열의를 갖고 따뜻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원만한 가정과 헌신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삶에서의 열의(熱意)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열의라는 말은 식탁에 앉았을 때 취하는 행동방식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건전한 식욕을 가지고 식사를 시작하며, 음식을 즐기고 적당히 먹고 나면 식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열의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굶주림과 음식의 관계를 열의와 인생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열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예는 내가 어떤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는 딸기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인끼리에서 가장 많이 느끼게 되지만, 우리의 가족관계에서 가족끼리의 사랑에서도 그 행복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사람들은 원만한 가족관계 내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가족제도가 해체되고 가족의 중요성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갖는 가치는 주로 이 사랑이 어떤 다른 사랑보다도 믿음직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보다는 부모와 같이 있을 때에 더욱 안심하는 것이다. 성공했을 때에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실패했을 때에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것이 바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다. 이렇게 우리는 원만한 가족 관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느끼고 행복을 찾는 것이다.사람들은 열의와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며 가족과 함께 할 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일’을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일을 행복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 또는 불행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다. 지나치고 따분한 일은 불행의 원인이 되겠지만, 일의 양이 과도하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일의 성질과 일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단지 권태를 덜어주는 것으로부터 가장 시원한 기쁨을 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에는 온갖 단계가 있다.) 이러한 일은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메워주므로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없애준다. 즉, 권태의 예방책으로 가장 우선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이 있음으로 해서 휴일이 오면 더 즐겁다. 또한 일은 성공과 야심을 달성시킬 기회를 준다. 대부분의 일로 시간을 보내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일을 흥미롭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 교육철학 및 교육사 >페스탈로찌[Johann Heinrich Pestalozzi]Ⅰ. 서론우리는 흔히 페스탈로찌를 위대한 교육사상가이자 교육실천가로 칭한다. 그는 그 귀족중심의 교육을 민중중심의 교육으로, 교사중심의 교육을 학생중심의 교육으로, 지식중심의 교육을 생활중심으로, 암기중심의 교육을 개발중심으로 교육의 방향을 180°바꾼 교육가이다. 근?현대 교육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 페스탈로찌의 교육적 이념은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예로부터 ‘백년지 대사’라고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관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통용된다. 물론 고등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제대로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의미는 지금 현재에 통용되고 있는 단순히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쌓아 가는 내 인성, 기본 예의 등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 또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체계적으로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러한 교육이 아닌 사람으로써 배워야 할 인성적, 도덕적인 배움 들의 교육에 중점을 두고 싶다. 지금 현재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인성적, 도덕적인 교육은 많이 배제되고 단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아니면 취업을 하기 위한 교육으로만 전락해 버린 것을 보게 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여기서 다룰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이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교육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오로지 인간의 인성적, 도덕적인 교육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페스탈로찌는 교육의 목적을 인간개혁을 통한 사회의 개혁으로 보았다. 그는 교육을 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자아를 실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출발점이 된 것이다. 후에 『은자의 황혼』을 부연한 『리하르트와 게르트루트』, 특히 제 1권은 소설로써 인정을 받게 된다. 1793년 피히데가 시인 바게젠, 그리고 저작자 펠노우과 함께 페스탈로찌를 방문한다. 후일 이 만남은 피히데에 의하여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로써 표현되었으며, 페스탈로찌는 피히데에게 자극 받은 것을 1797년의 『탐구』로서 나타내었다.1798년에 정부는 집이 없거나, 가난으로 집이 없는 것과 거의 같은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슈탄쓰에 고아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페스탈로찌를 그 고아원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 곳의 환경은 열악하였으며 그를 도와줄 사람은 오직 식모 한 사람 뿐 이였다. 이러한 외적인 어려움 외에도 어린이들의 건강상태, 심적인 불안상태는 페스탈로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교육의 참 사상을 바탕으로 진행하여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그의 교육사상에 따라 어린이들은 점차로 안정과 정상을 되찾아 갔다.그러나 179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슈탄쓰 고아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며, 대신 병자들은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어 진다. 이 같은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은 전 세계에 인정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교육사업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27년 2월17일 81세의 나이로 노이호오프 근교 부르크에서 생애를 마감했다.그는 지배계급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고 인류애를 기본정신으로 삼아 실제의 체험을 통해 교육사상을 이룸.2. 교육이론 : 빈민구원, 민중교육 통한 새 나라 건설을 추구, 교육 통한 인간과 인류의 구 원을 목표로 하였다.1) 노이호프시대(Neuhof) - 루소 영향. 관찰일기, 빈민/노작교육실시2) 집필시대 : 인간교육 근본원리가 양친의 따뜻한 사랑 속에 움트는 것으로 봄.3) 슈탄츠시대 - 고아들을 돌보며 교육이론 실천.4) 부르크도르프(Burgdorf)시대 : 초등 학교 교육에 종사5) 아페르텐(Iferten)시대 - 새로운 교수법을 계발3. 교육 타율적인 훈련은 자율적 훈련으로의 변화 도모하였다.2) 직관의 원리 : 직관에 의한 교육 주장직관은 지식의 기본, 사물을 정확히 인식하는 수단과 과정을 수(數), 형(形), 어(語) 사물을 직관함으로써 감각적인 인상에서 추상적 사고력의 개발에까지 다다르며, 아동이 구체적인 경험이 있을 때, 보다 명백한 직관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구체적 사물을 접하고 실제 일을 행함으로써 효과 거둘 수 있다고 보고 솔선수범과 작업, 노동 등을 중시하였다.(직관교수, 노작교육)3) 조화?균형의 원리인간이 가진 선천적인 지적, 도덕적, 기능적 중에서 도덕적 기능 중심으로 제 능력(3H- head, heart, hand)의 조화적 발전을 이상으로 한다. 즉, 완전한 인간성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 지적, 기능적 능력이 조화롭게 발전해야 한다.4) 방법의 원리인간성의 전개, 자기 발전은 질서 있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므로 교육은 단계를 거쳐 이루어져야 하며, 기초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종합?발전된다고 주장한다.ex) 도덕교육 : 무율 단계(자연적 욕구)→ 타율단계(사회적 법률) → 자율단계(도덕적 단 계)로 이동 추구5) 사회의 원리(생활공동체의 원리)"환경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 즉, 개인의 도야는 사회에서 이뤄지고, 또한 사회개선은 개인의 향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가족집단 특히 어머니와 자녀의 인격관계를 중시하고, 어머니와 자녀의 애정과 신뢰감을 도덕교육, 종교교육의 기저로 생각함으로써 이것이 확대되면 자연히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높아지고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강화되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정신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페스탈로찌의 생각은 제자였던 프뢰벨과 오웬에 의하여 계승되어, 유치원과 유아학교의 창설로 발전되었다.6. 페스탈로찌 교육방법의 8대 원리1) 자기창조의 원리 - 교육이란 인간의 내재적 소질을 스스로가 발전시키도록 돕는 일로 써 자율성, 자발성, 흥미, 욕구의 충족이 따라야 한다 올바르게 표현하는 언어의 교수, 이렇게 셋으로 보고 이 셋을 고루 배워야 한다는 논리다.③ 직관?언어?사고의 삼위일체 : 이것은 우리의 인식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도입한 교수의 방법이다. 우선 직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다음에는 이렇게 파악된 사물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끝으로 이 다듬어진 언어적 표현을 통해서 사고력을 함양시켜야 한다는 논리다."생활이 도야한다"(Das Leben bildet)는 원리, 즉 교육은 어린이의 생활 안에서 생활문제를 소재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제창2) 가정교육론 (유아교육론)페스탈로찌는 아동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고 성인의 세계가 있듯이 아동도 자기 고유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아동의 내면에 인간성의 전 능력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 형성의 기초가 가정교육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가정 생활에 있어서 양친과 아동들의 애정이 넘치는 생활이야말로 인간교육의 가장 탁월한 자연의 교육이라고 하였다.이런 가정교육론이 오늘날 표현으로는 유아교육론이 되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유아교육은 전문적인 교사에 의해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어머니에 의해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유아교육론은 그의 저작 곳곳에 다루어지고 있지만 이것을 가장 조직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영국인 제자 그리브스(J. P. Greaves, 1778~1842)에게 보낸 34통의 유아교사서한(Letetrs on Early Education, 1818~1819)이다.유아교육은 모성애를 매개로 하여 달성되므로 유아교육은 양친이 맡아야 하며 어머니의 모성애야말로 교육자의 제 1 조건이며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어머니와 자녀 사이의 사랑의 대화를 통한 교육을 교육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의 교육으로 보았다. 즉, 유아교육론은 어머니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머니야말로 천성적인 교사이며, 이 어머니를 통한 교육이 인격형성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① 개념 : 모성중심 가정, 생활권 교육을 통해 유아의 내재된 소질과 능력을 다는 도덕과 정신적 가치를 실현케 하는데 목적을 둔다.⑦ 가정은 모든 교육의 자기 활동성을 터전으로 하여 전개되는 실질적 교육의 장이다.언어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실물로 가르쳐야 한다.⑧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이 인간 형성의 기초, 종교, 도덕 교육이 싹트며, 이 모든 힘의원천은 어머니의 사랑, 즉 모성애로부터 온다.3) 인간성 삼단층론(人間性 三斷層論)- 페스탈로찌는 인간성은 동물적, 사회적, 도덕적인 3유형의 상태가 있다고 설명하였다.① 자연적 상태(동물적 상태) : 인간성의 가장 낮은 단계로 거칠긴 하나 선한 충동 내포 하고 있다. 자연상태로의 인간은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기적인 면과 이타 적 면을 둘 다 지니고 있다.② 사회적 상태 : 이기심으로 자극된 폭력적 행위를 법으로 규제하는 상태이다. 즉, 자연 적 욕구를 멋대로 충족시키려는데서 오는 무질서를 막기 위해 협약으로 법을 만들어, 이를 모든 성원에게 준수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협약(協約, Konvention), 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행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것일지라도 그것 만으론 인간내면의 욕구까지 충족시켜 주는 도덕적인 것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적 상 태의 '협약'은 강자에게 유리하게 법으로 허울좋게 체계화되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 는 수단인 국가 체제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③ 도덕적 상태 : 독자적 결단에 의한 개인적 행위를 결행/책임지는 상태로 페스탈로찌는 인간은 내면적인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되며 교육은 인간을 이런 도덕인 이 되게 하는 일이며, 인간교육이란 동물적, 사회적 상태를 거쳐 자신의 내면적 순화 를 기하게 하는 인간의 선천적, 내면적 소질의 조화적인 발달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이나 사회적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적 순화를 갈구하는 힘이 개인적인 행위를 결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4) 사회교육론페스탈로찌의 교육학 체제는 사회 교육적 지향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
▷▶ 수업문항 만들기 ◀◁소영역성취기준평가기준친족간의 왕래?교류현대 사회에서 친족의 소중함을 알고, 이를 확대시켜 자기 중심주의, 가족 중심주의를 벗어나 올바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다.상중하조사 자료, 실제 경험, 그리고 토의를 통하여, 친족들 간의 올바른 놀이 문화를 새롭게 잘 제시하였다.조사 자료, 실제 경험, 그리고 토의를 통하여, 친족들간의 놀이 문화를 제시하였으나, 구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조사 자료, 실제 경험, 그리고 토의가 없었으며, 친족들간의 올바른 놀이 문화를 제시하지 못하였다.연구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놀이 문화를 만들고, 이를 학급에서 훌륭하게 발표하였다.연구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놀이 문화를 만들었으나, 발표할 때 내용 전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현장 연구 조사의 미비, 토의 부족 등의 이유로 발표가 나빴다.< 단답형? 객관식 >>1) 다음의 학생들은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 친척들과 모여서 한 일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친족간의 올바른 놀이 문화를 즐긴 학생은 누구인가?① 민호 : 우리는 친척들간에 모이면 어른들은 서로 자신들의 얘기를 해. 서로 오랜만에 모 여서 그런지 자기들의 자랑만을 서로 하더라고.② 영재 : 우리는 친척들이 서로 연락을 잘 안 해서 만나는 적이 별로 없어. 지금과 같이 바쁜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는데 바쁘니 어쩌겠어. 이해해야지..③ 혜미 : 우리는 친척들이 모이면 서로 안부를 묻고, 그 동안 못했던 얘기도 나눠. 그리고 윷놀이나 제기차기와 같은 전통놀이를 하면서 서로 즐기면서 지내.④ 영희 : 어른들은 화투를 치시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어.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 재미있어 보이더라. 나도 어른이 돼서 친척들과 모이면 화투랑 카드놀이 하면서 지내야겠어.⑤ 가람 : 우리는 친척들이 모이면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끼리 술을 드시고, 우리는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봐. 집이 아니라서 컴퓨터를 못할 줄 알았는데, 컴퓨터 를 할 수 있어서 무지 좋았어.@ 정답?해설③, 친족간의 건전하고 올바른 놀이 문화를 제대로 말한 학생은 ‘혜미’이다. 다른 학생들 은 지금 현재 우리의 올바르지 않은 친족간의 놀이 문화 모습을 얘기하고 있다. 친족 간의 올바른 놀이 문화는 친척들간의 서로 안부를 묻고, 건전한 전통놀이를 즐기면서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2) 아래의 칸에서 말하고 있는 설명과 사례는 무엇의 필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친족간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왕래와 교류의 확대를 위해○ 상호 이해 및 친목 도모를 위해사례) 혜미네 가족들은 오랜만에 친척들끼리 모여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띄어주기 위해서 카드놀이나 화투와 같은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윷놀이나 바둑 등과 같은 놀이를 하면서 명절을 보냈다. 그로 인해서 서로가 이 놀이를 즐기는 가운데에 친목도모를 할 수 있었다.@ 정답?해설친족간에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놀이 문화의 필요성 - 위의 사례와 설명을 통해서 단순히 놀이 문화가 아닌, 가족들이 전체가 다 참여할 수 있고, 서로의 친목도모를 위한 건전한 놀이 문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서술형 >>1) 아래의 두 가지의 사례를 통해서 친족간의 올바른 놀이 문화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 그에 따라 올바른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서술하시오. (100자 내외)A) 영희네 가족은 명절이 되면 멀리 부산에 사시는 친할머니 댁에 놀러간다. 영희네 가족이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다른 많은 친척 분들이 할머니 댁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그동안 주고받지 못한 안부와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답게 인사한다. 또한 서로 명절음식을 만들면서 즐겁게 준비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가족이 다함께 모여서 윷놀이도 하고 오목이나 바둑을 두는 등 다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B) 철수네 가족은 명절이 되면 교통체증 때문에 할머니 댁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생해서 겨우 도착한 할머니 댁에는 다른 친척들도 힘에 겨워하고 있다. 서로 오래간만에 만났지만 그동안의 연락들이 없었던 터라 만나도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저녁에는 부모님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며 화투나 카드놀이를 하였고, 아이들은 따로 방에 들어가서 각자가 컴퓨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답?해설친족끼리의 제대로 된 놀이 문화와 그렇지 않은 놀이 문화를 통해서 바른 놀이 문화를 말 하고, 가족의 중요성과 그것을 통해서 올바른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채점기준상) 위의 두 사례를 제대로 비교하여 거기에서 올바른 친족 놀이 문화에 대해서 이끌어 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정확한 올바른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기술하였다.중) 위의 두 사례를 비교하여 올바른 친족 놀이 문화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올바른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였다.하) 위의 두 사례의 비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올바른 친족 놀이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 하고, 또한 올바른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못하였다.2) 아래의 ‘고리 떼는 목사’)의 이야기를 읽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서 서술하시오.야! 똥 먹어. 어, 똥쌌다 쌌어! 빨리 피 먹어! 피박 이야. 양 피박!!!듣기에 혐오감을 주는 이런 말들은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 말들입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세 명만 모이면 판이 벌어진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고스톱과 친합니다. 더구나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 분주하게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친족들이 모여 앉으면 "광박 피박"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건전한 놀이를 해보려고 족구도 하고 볼링도 쳐보고 합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춥기도 하고 뭐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판을 벌립니다.그렇게 되면 난감해 지는 것은 저와 같은 목사입니다. 그냥 모른 체 하고 들어가 자기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두면 밤이 새도록 "쌌어! 피박이야!"를 부르짖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택하는 방법이 옆에 앉아서 고리를 떼는 것입니다. 고리 떼는 목사! 많이 이긴 사람에게는 십일조를 떼라고 부르짖습니다. 열심히 고리를 떼서 주방에 필요한 것을 사주기도 하고 간식을 사다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면 12시가 넘기 전에 끝내도록 압력을 넣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만 끝내야지. 어허 벌써 시간이 11시가 넘었네....." 항상 악역은 힘든 것입니다. 주변에서 보는 인상이 험악해 집니다. 궁시렁 거리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동생은 노골적으로 불평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결국 성화에 못 이겨 판을 접습니다. 고리를 떼는 것도 미운데 거기다 한 수 더 떠서 판까지 깨는 것입니다.그러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놀이문화는 없는 것일까? 왜 항상 끝날 때는 좋지 않은 기분으로 끝내는 이런 오락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의 죄성이 남의 것을 따먹는 투기성 오락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입니다. 그냥 모여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하고 정담을 나누는 것은 왠지 맹숭맹숭하고 재미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사실 명절의 참된 의미는 바로 그런 것에 있음에도 말입니다.@ 정답?해설위의 사례를 통해서 올바르지 못한 우리의 친족 놀이 문화를 알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 올바른 새로운 놀이 문화를 생각할 수 있다.@ 채점기준상) 위의 사례를 통해서 올바르지 못한 우리의 친족 문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였던 새로운 친족간의 놀이 문화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스피노자의 철학제 6장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의 환경 속에 있는 우리“스피노자와 우리”는 스피노자의 환경 속에 있는 우리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를 그 환경을 통해서 지각하고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 철학자의 제1원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제3, 제4, 제5의 원리, 즉 유일한 자연과 모든 신체들, 유일한 자연과 모든 개체들,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인 자연이라는 원리 또한 알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유일 실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모든 신체들, 모든 영혼들, 모든 개체들이 존재하는 내재성의 공통 평면의 펼침이다. 이 내재성의 평면 혹은 결합성의 평면은 정신 속에서의 구상의 의미로서의 평면, 즉 계획, 프로그램의 평면이 아니라, 기하학적 의미의 평면, 즉 단면, 교차점, 도표의 평면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은 이 양태적 평면 위에 존재한다는 것, 혹은 이 평면 위에 정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의 삶의 양태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 내재성의 평면은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스피노자주의적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또한 건설되어야 하는 것이다.1. 스피노자의 신체스피노자는 어떤 한 신체를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그 첫 번째가 신체는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무한히 많은 분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이라고 정의하며, 두 번째는 신체는 다른 신체들을 변용시키고 다른 신체들에 의해서 변용된다는 것이다. 한 신체를 그 개체성 속에서 규정하는 것은 또한 이 변용시키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는 동역학적이고 후자는 역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동력학적 명제는 우리에게 한 신체는 분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것은 형식이나 기능들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것으로 전체적인 형식이나 특수한 형식, 유기적 기능들은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에 의존한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삶의 개별성을, 하나의 형식이나 형식의 발전으로가 아니라 차별적 빠름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 분자들의 감속과 가속 사이의 복잡한 관계로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의 빠르과 느임의 결합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형식 또한 소리 분자들의 빠름과 느림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음악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도 관계가 된다. 우리가 다른 사물들에로 빠져들어가고 다른 사물과 결합하는 것은 바로 빠름과 느림을 통해서 인 것이다. 즉, 우리는 환경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그곳으로 진입하며, 리듬들을 따르기도 하고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신체에 대한 두 번째 명제는, 변용시키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개념이다. 한 신체(혹은 한 영혼)를 그것의 형식, 그것의 기관들이나 기능들에 의해서 정의해서는 안되며, 무엇보다 신체를 실체 혹은 주체로 정의해서도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신체와 영혼은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양태이다. 이러한 양태는 바로 빠름과 느림의 복잡한 관계이며, 신체와 사유 속에서 신체나 사유가 갖는 변용시키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이므로 이것을 이론적으로 사유하는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내재성의 평면, 즉 변용들을 배분하는 자연이라는 평면이 자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물들 및 인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물들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위적인 것은 완전히 자연의 일부를 형성한다.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내재성의 평면에서는 모든 사물은 운동들과 변용들의 배치에 의해서 정의되는데, 이 배치가 인위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은 이 배치 아래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2. 변용들과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의 연구로써의 행동학스피노자 이후 아주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서야, 생물학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은 변용들과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동물들의 세계를 기술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신체들, 즉 동물들이나 인간들을 그것들이 가질 수 있는 병용들에 의해서 정의하는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가 오늘날 행동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초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동물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도 타당한 것으로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변용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실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며, 내재성 혹은 결합성의 평면의 건설을 함축하는, 스피노자주의적인 호흡이 긴 신중함과 지혜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하나의 행동학으로서 이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의 빠름과 느림의 결합으로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들의 결합으로서 사유한다. “당신들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당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혹은 영혼이 이러저러한 만남, 배치, 결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앞서 알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진정한 외침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행동학은 무엇보다도 각 사물을 특징짓는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과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들에 대한 연구이다. 각 사물에 대해서 이 관계들과 이 능력들은 범위, 문턱들, 고유한 변이들 혹은 전화들을 갖는다. 그것들은 세계 혹은 자연 속에서 그 사물에 상응하는 것, 그 사물을 죽게 하거나 그 사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선택한다. 신진 대사의 빠름과 느림, 지각, 작용과 반작용의 느림과 빠름은 서로 연결되어 세계 속에서 이러저러한 개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빠름과 느림의 이러한 관계들이 상황이나 변용 능력들에 따라 실행된다. 끝으로 행동학은 상이한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들과 능력들(pouvoirs)의 결합을 연구한다. 이것은 앞의 것들과 구별되는 측면으로, 앞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단지 문제의 사물이 자신의 관계들 중의 하나에 적합한 관계를 다른 사물들에 부여하면서 어떻게 그 다른 사물들을 해체하는가, 혹은 반대로 어떻게 그것은 다른 사물들에 의해 해체될 위험을 갖게 되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관계들이(그리고 어떤 관계들이) 직접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보다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지, 혹은 능력들이 서로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능력, 즉 보다 역능(puissance)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관계와 공동체면에서 어떻게 개체들은 서로 결합하여 보다 우월한 개체를 형성하는가? 그리고 이 과정은 어떻게 고유한 관계와 그것의 고유한 세계를 보존하면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 등과 같이 자연의 교향곡, 즉 점점 더 폭넓어지고 강력해지는 세계의 구성의 문제이다. 역능들을, 빠름과 느림을 어떤 질서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음악의 구성이라는 평면, 이것은 자연이 그것의 부분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풍부한 개체인 한에서, 자연의 평면이다. 『윤리학』 전체에 바로 이 음악적 구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윤리학』을 그 빠름과 느임의 관계들이 연속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로 구성한다. 변화해 가는 상대적인 빠름들로 변용되는, 심지어는 제3종의 인식 솟ㄱ에서의 사유의 절대적인 빠름으로까지 변용되는 『윤리학』의 상이한 부분들에서 우리는 연속적인 변화를 확인한다. 그리고, 명제들과 주석들이 동이한 걸음거리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횡간하는 두 운동을 결합시키고 있는 한, 『윤리학』은 동시적으로 변화한다. 구성으로서의 『윤리학』은 그 모든 부분들이 가장 큰 빠름에 의해서, 가장 풍부한 운동 속에서 펼쳐지는 그러한 구성이다.3. 스피노자의 철학 요약우리가 스피노자주의라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그것의 형식에 의해서, 그것의 기관들이나 그것의 기능들에 의해서 정의하지도 않고, 그것을 실체 혹은 주체로서도 정의하지 않을 것이다. 신체는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그것은 동물일 수 있고, 소리 신체일 수도 있으며, 영혼 혹은 관념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한 신체를 관계의 관점에서 구성하는 분자들, 즉 형식을 갖지 않는 요소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전체를 어떤 한 신체의 경도라고 부른다. 또한 우리는 매순간 한 신체를 실행시키는 변용들, 즉 익명의 어떤 한 힘(존재의 힘, 변용 능력)의 내포적 상태들의 전체를 위도라고 할 수 있다, 경도와 위도의 전체가 자연 즉 내재성 혹은 결합성의 평면을 구성한다, 이 자연은 언제나 가변적이며, 개체들과 집단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절대적 타자로서의 ‘죽음’1. 들어가는 말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관해 두려움을 느끼고 죽음을 거부한다. 이렇듯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죽음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된다. 이에 반해, 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그 정체성을 해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레비나스는 바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을 거부하고 전통적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서 '죽음'을 사유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하였고, 그의 이러한 윤리적 접근은 전통 윤리학과는 다른 ‘철학의 가능 조건’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초 하려는 ‘윤리적 형이상학’에 가깝다.) 레비나스는 ‘존재와는 다른, 또는 존재(본질)를 넘어서’ 있는 ‘타자’를 철학의 제일원리로 제시하고, ’타자‘를 ’정언명령‘으로 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죽음’의 철학은 경험적으로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충격적인 실존적, 심리적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에게 있어 ‘타자’와 ‘죽음’의 문제는 절박한 삶의 현실의 문제였다.그의 철학적 사유가 처음부터 ‘타자’와 ‘죽음’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 이전에 훗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오랜 시간 하이데거의 철학에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타자’와 ‘죽음’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언급함이 없이는 죽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 및 ‘죽음을-향한-존재’에 기대어 그것과 대결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타자’의 철학레비나스의 ‘죽음’에 관한 사유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형이상적 사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의 제일원리이자 출발점인 ‘타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다.1) ‘동일자’ 우의의 철학 비판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은 ‘존재’의 철학을 근원적으자’ 우의의 철학이 지배해왔다. ‘동일자’)란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아’ 이며, ‘타자’란 ‘자아’로의 환원이 불가능한 ‘절대적 타자성’을 지닌, ‘자아’에 외재적인 어떤 것이다. 이러한 ‘동일자’ 우의의 철학은 ‘자아’에서 출발하여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지식의 확실성을 정립하려는 모든 사유를 포괄한다.)레비나스는 이러한 ‘동일자’ 우위의 철학은 ‘타자’에게 가하는 ‘존재론적 폭력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레비나스가 ‘동일자’ 우위의 철학이 수반하는 ‘폭력’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까닭은, 바로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대학살과 숙청을 자행한 히틀러 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근저에 바로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사유방식이 내재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2) ‘타자’의 ‘타자성’레비나스의 타자의 ‘타자성’은 자아의 ‘자기동일성’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가 말하는 ‘타자’는 ‘인식’과 ‘지식’의 영역은 물론 ‘존재’의 영역까지도 넘어서 있는 ‘절대적 타자성’을 지닌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것이다. 이러한 타자의 ‘타자성’은 유한적 존재와 관계하는 ‘자기동일성’에 앞서는 ‘무한’과 관계하는 것이다.이러한 레비나스는 ‘타자’에 접근하기 위한 방식으로 ‘윤리적 접근’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타자와의 만남’, 즉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은 “타자가 나의 면전에 느닷없이 다가옴으로써 나의 자발성에 문제를 유발하는 상황”(Tel,13)으로 이것을 곧 윤리적 상황이자 윤리적 사유의 출발점이라 하였다.이렇게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내부적으로 동요를 일으키며. ‘타자의 얼굴’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자아’, 즉 윤리적 ‘자아’로 정립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윤리적 자아’는 나에게 다가오는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요구하는 바에 무조건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자아’이다. 이렇듯 레비나스에 있어 ‘자아’는 타자에 대한 의 문제로 사유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죽음’의 철학은 곧 ‘타자’의 철학이기도 하다.3. ‘죽음’의 철학1) ‘무화'로서의 ’죽음‘ 비판철학적, 종교적 전통에서의 ‘죽음’은 ‘무로 나아가는 과정’이나 ‘없어짐(무화)’, ‘떠남’등으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해석은, ‘죽음’을 ‘타자와의 관계’와 분리하여 사유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더-이상-존재하지-않음’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위험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 ‘타자’에 대한 ‘윤리적 고려’가 결여되면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존재론적 폭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2) ‘나의 죽음’의 우의 비판레비나스는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죽음이 언제나 ‘나’의 죽음을 앞선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견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죽음’의 해석과는 차이를 갖는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나’의 죽음, 즉 현존재의 죽음이며, ‘타자’의 죽음은 단지 나에게 부차적인 죽음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것으로 현존재의 ‘죽음’은 “더 이상 현존할 수 없음의 가능성”(SZ,250)이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곧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그러나 레비나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은 현존재가 ‘절대적 타자’인 ‘죽음’에 대해 가하는 폭력이며, ‘현재’가 ‘미래’에 가하는 폭력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을 “가능성의 불가능성”)(SZ,250)이라고 주장한다. 즉,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란 한 마디로 ‘지배의 종말’이자 ‘완전한 수동성’이다.3) 죽음의 ‘절대적 타자성’레비나스에 있어 ‘죽음’은 그 자체가 딜레마이다. ‘죽음’이란 느닷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으로 어떠한 기투나 예지가 가능한 다른 모든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이다. 이러나 ‘죽음’은 ‘현재’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해 있는 것으로같은 ‘타자’임을 알 수 있다.‘미래’가 그러하듯 ‘죽음’ 또한 언제 어디서 다가오는지 알 수 없다. ‘죽음’이란 경험도, 지식도, 앞질러서 취함도 불가능한 ‘미스터리’이자 ‘스캔들’이다. 이러한 ‘죽음’의 ‘절대적 타자성’을 가리켜 ‘수수께끼’이자 ‘순수의 의문부호’라고 말한다.이처럼 ‘죽음’은 ‘지식’과 ‘존재’의 외부에 (비)존재한다. 죽음은 지식에 순응하지도, 길들여지지도 않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미지의 것’이다.4)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레비나스의 ‘타자’와 ‘죽음’에 대한 사유는 유대인 대학살의 경험에서 비롯된 실존적, 심리적 상처에서 기인한다. ‘죽음’의 문제는 ‘죽음’의 폭력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과 ‘절박성’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곳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의 위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 속에서 나는 절대적 폭력에 노출되며 야밤의 살해에 노출된다.”(TeI,259)는 문장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 ‘타자의 죽음’레비나스에 있어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앞서는 철학의 시원이자 철학의 가능조건이며,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자각, 즉 ‘존재론적 겸손’)이라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이다.레비나스에 있어서 ‘타자의 죽음’과의 진정한 관계는 이성적 관계가 아닌, ‘정서적 관계’이다. 즉 타자의 죽음과의 관계에서 이성과 경험에 앞서는 것이 타자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정서적 동요’이다. 이러한 ‘정서적 동요’는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타자와의 이러한 관계는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서 우리가 받는 정서적 영향은 “비현재에 의한 현재에의 영향이며, 어떤 친밀한 것보다 더 친밀한 것이며, 어떤 선험적인 것보다 더 오래된 후험적인 것이다.”(DMT,25)우리는 이러한 타자의 죽음 앞에서 정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산 자에게는 고인의 사라짐, 떠남만이 남겨져 있으며, 나의 인간성의 개시는 ‘타자의 죽음’에 ‘나’ 자신을 여는 것, 즉 타자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감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이웃의 죽음을 통해 나의 ‘인간적 자아’가 처음으로 드러난다.우리는 존재의 세계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망각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이웃인 ‘타자’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타자’에 대해 결코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들며, 나를 ‘타자’로 이끈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나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게 되며 ‘타자의 휴머니즘’을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타자의 죽음에 대한 응답’이 없이는 결코 ‘죽음’의 전체적 의미를 가늠할 수 없다. 현실에서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에 대한 응답(책임)’에 의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는 ‘타자의 인질’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앞서는 가장 근원적인 ‘첫 번째 죽음’이 된다.6) 죽음의 철학 요약레비나스의 ‘죽음’의 철학을 요약해보면, ‘죽음’은 존재의 외부에 (비)존재하는 ‘절대적 타자’이며, 결코 경험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미지의 것’이며, ‘미스터리’이자, ‘스캔들’이다. 또한 ‘죽음’은 외부에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것’이고, 다가오는 미래 즉 ‘도래’를 뜻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완전한 수동성으로서의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며, ‘타자’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더 근원적이다. 또한 타자의 죽음과의 관계에서 받는 정서적 영향은 ‘죽음의 폭력과 위협’에 직면한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 응답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인간적, 윤리적 자아가 되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본성을 ‘타자의 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나를 ‘대타적 존재’로 정립하며, ‘타자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