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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지리]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전근대시대에 살고 있는 EU 가입국 -◆ 과 목 : 유럽지리교육론◇ 담당교수 : 권 영락 교수님◆ 학 과 : 지 리 교 육 과◇ 학 번 : 2 0 2 1 3 8 5 8◆ 이 름 : 김 연 숙◇ 제 출 일 : 2005.12.16. (금)0. 들어가며어린 시절,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선율의 고전음악의 대부분이 탄생한 고향이 오스트리아라는 사실을 알고는 막연하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을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다. 지금도 유럽지역을 답사한다면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는 이러한 연유에서 ‘오스트리아’이다.“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베토벤의 활동지역이자 소년합창단으로 유명한 비엔나,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 앙트와네트 등 왕족의 나라,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오스트리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이미지는 ‘전근대시대의 귀족적인 문화경관’이라 통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오스트리아의 이미지 -전근대시대의 귀족적인 문화경관- 는 과거 중세부터 지금까지 오스트리아에 영향을 주고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만든 가장 큰 지리적 요소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국가는 아니었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추세에 따라 1995년 EU에 가입하고, 동서유럽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경관에서 이번 조사의 주제를 ‘전근대시대에 살고 있는 EU 가입국’이라고 정해보았다.[그림1] 오스트리아의 이미지사진 속 남자의 복장은 오스트리아의 전통의상이고, 낱말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출처 : 이원복, 1998, ‘이원복 교수의 진짜 유럽이야기’, 두산동아.》Ⅰ. 지역 개관◎ 국 명 :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Austria)?수 도 : Wien (약 165만명)?면 적 : 83,857 km2 (한반도의 약 2/5, 남한의 약 9/10)?인 구 : 약 810 만명 ('2003년)?민 족 : 독일계(97.1%), 슬라브계(2.7%), 아시아계(0.2%~400m의 낮은 구릉지는 카르파티아산맥의 전연지이다.Ⅱ. 역사1. 국가형성기BC 800-400년경 인도·유럽계 IIIyrian족이 오스트리아 지역에 Hallstatt라고 불리는 문명을 최초로 건설하였으며 이후 Celt족이 동 문명을 계승하였다. 기원원년 경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알프스 및 다뉴브 연안 지역의 전략적 요충성이 인정되어, Salzburg 등을 중심으로 경제·문화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서기 2세기경 기독교가 전파되었다.5c 게르만족의 서진 이후, 오스트리아는 Hun, Avar, Slav 및 Magyar족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으며, 500-700년경에는 게르만계 Bavaria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 말엽에는 Karl 대제의 프랑크 제국으로 편입되었으며, 880년 Magyar 족이 침략하여 약 70년간 지배했으나, 955년 Otto대제가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게르만족이 항구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2. 중 세중세의 오스트리아는 976년부터 270년간 통치한 Babenberg왕조와 1273년부터 640년간 통치한 Habsburg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976년 신성로마제국의 Babenberg가는 오스트리아 후작가가 되었으며, 이후 270년 동안 승계된 Babenberg왕조 하에서 오스트리아는 평화 속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996년에 간행된 문서에서 오스트리아 지역을 가리며 "Ostarrichi"라고 부른 기록이 있으며 이 명칭은 후에 독일어로 "Oesterreich"로 개칭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국명이 되었다.1273년 Habsburg家의 Rudolf가 신성로마제국 내 왕으로 임명됨으로써 Habsburg왕조가 시작되었으며 640년 동안 20명의 황제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특히 Karl 6세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Maria Theresa(1740-80년간 통치) 시대에는 행정제도, 교육, 문화면에 있어서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중흥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3. 근 세나폴레옹전쟁의 뒤처리를 위한 1815년 철수 시까지 구소련군 4만 미, 영, 프랑스군 2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1945년 4월 27일 사회민주당 출신 Karl Renner를 대통령으로 하여 사민당, 기사당 및 공산당 연정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제1공화국이 패전 후 외부의 압력에 의해 성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제2공화국은 독립국가 설립을 위한 국민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성립되었다. 제2공화국의 영토는 1938년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방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었으며, 헌법도 1920년 제1공화국의 헌법으로 복귀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미, 소, 영, 불의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소련에 의한 동구권의 위성국가화에 반대하여 서유럽에 대한 경제의존, 특히 미국의 마샬계획 등으로 친서방 경향을 취하게 된다.1954년 1월 베를린 4대 열강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의 강화조약 체결이 정식 논의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처음으로 동등한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하였으나, 독일문제를 둘러싼 강대국의 이해 대립으로 동 회의에서는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954년 4월 소련과 오스트리아 양국은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을 전제로 점령군 철수와 오스트리아의 완전 주권회복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교환하였다. 1955년 5월 15일 4대국과 오스트리아 간에 주권회복을 위한 국가 조약이 서명되고, 동년 7월 27일 동 조약이 발효함으로써 동년 10월 29일부로 모든 점령군이 철수하였다. 10월 26일에는 영구 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며, 12월 14일 오스트리아는 유엔에 가입하였다.Ⅲ. 본론[그림 4] 오스트리아의 민족구성《출처 : 이원복, 1998, ‘이원복 교수의 진짜 유럽이야기’, 두산동아.》1. 서부유럽과 동부유럽의 중간적 위치유럽대륙 중앙에 자리 잡은 내륙국가 오스트리아([그림 3]). 오스트리아는 유럽과 동방이 마주치는 문화의 충돌지대이자 인종의 용광로이다([그림 4]). 이러한 지리적 이점에서 그들의 대외교역은 동-서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오스트리아 대외교역의 대부분은 서유럽친서방적인 중립국임을 표방하면서도, 구 소련권과도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등 자국의 안전보장과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여 왔다.1) 중립주의오스트리아는 1955년 국가조약 및 헌법을 통해 향후 군사동맹 가입 및 외국군의 자국내 영토주둔금지를 규정한 중립정책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기의 자국 영공통과를 허용하는 등 냉전 후 안보환경의 변화, 그리고 1995년 EU 가입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의 중립주의는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유지 활동 참가, NATO의 PfP (Partnership for Peace)참가 등을 통해 유럽의 공동 안보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2001년 1월 주재국 정부는 중립정책의 수정 의사를 표명하고, 외국군 임시체류법 및 외국군 무기의 오스트리아 통과법을 제정 (7월 1일 발효) 하는 등 중립정책 변경을 추진한 바 있다. 특히 EU 헌법 제정 논의를 계기로 구체화되고 있는 공동외교안보정책(CFSP) 참여문제를 둘러싸고 주재국 '중립주의' 수정 논의가 재연된 바 있으나, 국민 대다수가 현 중립주의 유지를 선호하고 있어 당분간은 '사실상의 중립주의 수정, 헌법상의 중립주의 유지'라는 형태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2) 새로운 대외정책 방향 모색NATO와 EU 확대 등으로 유럽의 신질서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중립정책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확대되고 있다. 분쟁방지 및 위기 관리능력 제고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CEI (Central European Initiative) 상설사무국 비엔나 유치 (93.3.23)) 등 중부유럽권내 중추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발칸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서는 동 지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필수적이라는 입장 하에 EU가 추진 중인 "발칸안정화협약"실행 등에 적극 참여 및 유엔 평화유지 활동 적극 참여- 현 코소보 평화유지군 (KFOR)에 525명 파견, KFOR 지원위해 약 3천만불 기여-사이프러스, 골란고원 등에출하여 세계문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현대 심리학, 언어, 철학의 문을 연 대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카를 포퍼, 콘라트 로렌츠에서부터 오늘날 세계 스타로 각광받는 아르놀트 슈바르첸네거(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이다.오스트리아는 하이든, 모짜르트, 베에토벤, 슈베르트, 브라암스, 부루크너, 리스트 등 유수한 세계적 음악가들의 출생지 및 활동 무대로 유명하며, 음악에 있어서는 세계적 메카라 불리는 만큼 찬란한 유산 및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음악에 대한 이해 및 사랑은 생활 속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매년 6월의 비인 음악제, 7-8월의 잘츠부르크 및 브레겐츠 음악제, 9월의 린츠, 부루크너 음악제 등 전국 각지에서 연중 음악제가 개최된다. 오페라는 Staatsoper, Volksoper, Burgtheater를 중심으로 한 비인 음악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Saatsoper는 Franz Josef 1세에 의해 1869년 개관된 유럽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좌석 2,500여개, 연중 300여 작품이 공연되며 (9월 1일 - 다음해 6월 30일 까지), 종사 인원도 5천여 명에 이른다.1) Wiener Philhamoniker Orchester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카라얀의 지휘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비인 콘서트의 상징이다. 1842년 Otto Nicolai에 의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연주되었고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허버트 폰 카라얀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자리 잡았다.2) Wiener Saengerknaben (비인소년합창단)세계 제일의 미성을 자랑하는 합창단으로 1498년 Maximilian 1세에 의해 조직된 이래 St. Stephan 성가대와 함께 지금까지 비인 음악의 산 역사이다. 4개 코러스로 구성되어 매년 1개 코러스는 해외 공연을 통해 음악을 전파하며, 16세기 교회음악과 하이든, 모짜르트, 슈베르트 작품 및 왈츠 음악이 주요 곡목
    자연과학| 2005.12.15| 14페이지| 1,500원| 조회(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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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지리학]산업구조조정과 지역불균등발전
    제 4장 산업구조조정과 지역불균등 발전 : 1980년대1. 산업구조조정과 지역불균등발전 이론1) 정치경제학적 관점?산업구조조정 :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진행(성장-위기-새로운 체제로 전환-안정). 즉, 축적체제의 전환과정을 ‘산업구조조정’이라고 지칭한다. 투자확대 및 조정, 부실기업의 정리와 성장산업의육성 등을 통한 산업구성의 외형적 변화뿐만 아니라 기존의 생산기술과 조직방식, 생산 및 노동과정, 기업 내/외부 관계 등을 질적으로 개선시킴으로써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자본축적과정을 지속?고도화시키기 위한 자본과 국가의 전략이다.?산업구조조정은 공간을 매개로 전개되면서 ‘공간을 재구조화’시킨다.예) 과잉개발로 인한 건조환경(공단 등)의 유휴화, 지나친 공간적 팽창에 따른 시공간비용의 급증, 공간적 분업의 부접합과 이로 인한 지역간 갈등의 심화 등.?사회공간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자본은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을 추구한다.예) 기존 건조환경의 재정비, 공장폐쇄와 저비용 지역으로의 이전, 생산/노동과정의 사회공간적 재편, 기업간 사회공간적 관계의 개선, 지역연계망의 확충에 의한 시?공간적 압축 등.?산업구조조정과 공간재구조화 고정은 자본축적의 고도화를 위해 전략적으로 추진되는 산업간, 지역간 선별적 자본투자와 차별적 활성화라는 점에서 산업 및 지역불균등발전을 배경으로 한다.?개별산업의 입지와 변화는 산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와 공간의 사회경제적 분화에 의해 규정된다. 왜냐하면 개별 산업의 발달은 새로운 기술이나 생산조직, 나아가 축적체제의 전반적 변화에 좌우되면, 그 입지지향도 독립적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상대적이며 상화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별지역은 지연지리적 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자본투자에 의해 누적?형성된 ‘투자의 층’으로 이루어지며, 그 특성은 지속적으로 재구조화된다. 따라서 지역격차는 산업구조의 변화과정 및 공간의 사회경제적 분화과정이 가시적으로 표출된 것이다.?산업간 및 지역간 불균등발전은 개별 자본이 초과이윤을 얻기 위해 산업 이전과 집중을 강화시키고, 이에 따라 자본축적의 고도화와 지역구조의 위계화를 촉진시키는 지역불균등발전을 심화시키게 된다.2) 조절이론?자본주의 발전과정의 단계별 특성① 19C 후반~ 20C 초, 생산요소의 투입에 따라 생산규모를 확대시키고 새로운 산업과 지역으로 외연적 팽창을 추구함으로써 급성장.② 자본주의 경제가 침투한 산업 및 지역과 그렇지 않은 산업 및 지역 간에 불균등성 발생.③ 1930년대 생산재산업의 과잉과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구조적 위기.④ 외연적 팽창보다는 내포적 발전, 대량생산과 이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증대 및 임금상승에 의해 가능해진 대량소비시장의 형성을 통해 해소.?포드주의(Fordism), 내포적 축적체제 : 생산과정은 반자동화된 조립라인에 의한 규격제품의 대량생산과 생산공정의 표준화에 따른 비용절감으로 특징됨. ‘실행기능’과 ‘구상기능’으로 사회공간적 분리. 대/중소기업간 하청계열화 또는 분공장체제가 일반화되면서 불균등발전을 심화시켰다.?주변부 포드주의적 축적체제 : 1970년대 초, 포드주의에 입각한 서구자본주의 경제가 한계에 달해 생산성이 둔화되면서 이윤율이 저하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당면한 위기를 회피하는 공간적 조정을 위해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사양화된 산업들을 저비용지역인 후진국으로 이전시킴으로서, ‘신국제분업’을 형성하게 되었다. 제 3세계 주변부의 일부 국가들은 선진국으로부터 이식되어오는 사양산업을 기반으로 수출지향적 산업을 육성하는 ‘주변부’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를 발달시켰다.?포스트포드주의(post-Fordism) ‘유연적 축적체제’ : 포드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축적체제로 전환을 시도. ‘경직성’ 대신에 ‘유연성’이 강조.유연적 축적체제하에서의 생산과정은 극소전자(ME)기술의 발달에 따른 CAD-CAM생산체제와 작업의 자동화 및 적기(just-in-time)생산공정에 바탕을 두고 다양화된 소비유형에 대응하고자 한다. 다품종소량생산을 위한 ‘범위의 경제’에 기반을 둔 전문기술적 소기업체적(질적)발전과정과 더불어 외연적(양적)성장과정이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분석될 것이다.2, 1980년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조정1) 1980년대 경제성장과정 개관?한국 경제성장과정① 1960년대 :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기초, 저렴한 노동력이 집중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시발.② 1970년대 :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 변화, 동남임해지역에 대규모 공단도시들을 조성하고 수도권과 동남권을 잇는 축을 재편?강화.③ 1980년대 : 기존 중화학공업의 투자조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구조조정은 노동집약적 전통산업을 퇴출 또는 합리화시키면서 새로운 주력산업의 수도권 재집중과 기존 산업들의 지방분산을 촉진.④ 1990년대 : 80년대 말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첨단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수도권의 산업 재집중이 가속화.?1970년대 ‘주변성을 전제로 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시발단계’ :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사양산업들을 받아들이면서, 경공업중심 산업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원료 수입 및 제품수출이 용이한 동남임해지역에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한국경제는 저렴한 노동력으로 수입된 원료나 부품을 가공?조립하여 수출함으로써 성장하고자 했다.그러나 70년대 말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국내 산업간 유기적 관련성을 결여하며 국제경쟁력이 약화됨에 따라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게 되었다.?1980년대 산업구조조정과 지역불균등발전①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및 공간적 발전과정은 구조적 위기를 주기적으로 드러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산업구조조정과 공간재구조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경제는 산업 및 공간구조의 외연적 팽창과 내포적 발전을 동시에 복합적으로 추진했다.② 80년대 말 유연성의 징후가 나타나지만, 세계경제분업구조의 영향과 이에 의한 질적고도화의 한계로 인해 80년대 산업구조조정은 새로운 축적체제, 즉 유연적 축적체제로의 전환과정이라기보다는 기존 산업구조를 고도화시키기 위한 과정, 즉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성숙화로 퇴출시키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지만, 이러한 산업들은 완전 도태된 것이 아니라 생산 및 노동과정을 합리화(반자동화, 소사장제 등)시킴으로서 상당한 고용효과와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하면서 유지?성장하였다.?80년대 산업구조조정은 이러한 불황?사양산업의 합리화보다는 중화학부문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중화학부분의 투자조정은 개별 대기업의 주력 업종선정을 통한 경영세계화와 ‘규모의 경제’ 실현에 초점을 두었다. 산업구조조정은 상응하는 국토개발정책과 병행되었다. 정부는 제 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서울 및 부산의 산업집중을 억제하고 산업기반시설의 확충으로 개발가능성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자했다. 그리고 80년대 산업구조조정과 더불어 지역재구조화 과정은 기존 공단의 합리화와 동시에 새로운 공단의 공간적 확대를 추진했으며, 제조업을 크게 팽창시켰다.?제조업의 양적 성장과 업종간 투자 차별화를 추구한 산업구조조정 과정에 상응하여, 80년대 지역구조는 1960~70년대 이미 형성된 수도권?동남권의 양극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전반적으로 양적팽창을 보이지만, 지역별 차별투자에 따라 업종별 지역입지에 있어 상당한 변화를 수반했다. 제조업은 서울의 비중이 줄어들고 인천?경기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 수도권의 제조업 집중이 가속화된 반면,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의 비중이 줄어들어 동남권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80년대 산업구조조정을 통한 산업공간의 외연적 팽창은 구체적으로 여러 특징들을 가지지만 특히 강조될 수 있는 점은 우리나라의 자본이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80년대 중반이후 제조업의 해외직접투자가 시도되어 동남아지역에는 섬유, 의복, 봉제, 신발 등 국내 사양화된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류를 이루며 그 외 생산 공정이 표준화된 일부 전기전자산업들이 저임금노동력을 찾아 이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미나 유럽의 선진국지역으로 진출한 업종은 선진국의 수입규제회피나 선진기술습득을 위하여 자동차, 철강, 전기전자와 같은 자본(기술)집약적 산업들세계경제의 분업구조에서 주변성을 탈각하고, 부품 생산 중소기업들의 하청계열화를 통해 생산의 집적과 분업의 사회화를 심화시킴으로서 국내 독점자본의 지배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② 기술개발의 확대와 생산공정의 자동화 : 기술혁신을 통한 산업구조의 질적 고도화와 국제 경쟁력의 강화가 주요과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80년대 초 기술개발 지원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연구개발비의 투자에 있어 정부부담률은 감소하고 민간자본의 연구개발비투자는 확대되었다. 이러한 민간기업의 연구개발투자확충은 70%이상이 서울과 인천?경기의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할당되고, 연구소 및 연구원들도 이 지역에 집중 배치됨에 따라 지역불균등발전을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공장 자동화률도 점점 증가하였지만 자동화의 수준은 유연적 생산공정을 위한 자동화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인 단위기계의 부분 자동화단계를 겨우 벗어나서 NC공작기계, 자동포장기, 부품삽입기 등의 도입에 해당하는 단위기계의 완전자동화로의 이행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본격적인 자동화 단계로 접어들기 위한 전자적 혹은 컴퓨터에 의한 방식의 채택은 매우 낮았다. 도입의 효과 측면으로 볼 경우, 자동화의 도입은 다품종소량생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대량생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질적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적 측면에서의 효과]ㄱ.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이 향상됨에따라 공업용지의 단위당 수용능력이 증가.ㄴ. 자동화의 진전에 의해 성숙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구상기능을 담당하는 독점 대기업의 본사와 실행기능을 담당하는 분공장간 사회공간정 분화를 촉진.ㄷ. 구상기능과 실행기능 간의 사회공간적 분화의 심화는 사무직종사자의 비중을 증대시키면서, 지역별 직능구성과 임금수준에 일정하게 반영됨.③ 제조업 외에서 이를 지원?보완하는 건설업 및 금융, 유통, 판매서비스업의 확대 : 산업 및 지역구조의 내포적 발전은 생산자서비스업의 급속한 성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사회공간적 분업의 심화와 더불어 급성장한 서비스업은 공간적 팽창에 따
    사회과학| 2005.11.29| 5페이지| 1,000원| 조회(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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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학]도시기후.
    세계의 인구는 1993년 55억에서 2025년에는 82억으로 증가할 것이며, 동일한 시기 동안 도시 거주자도 40%에서 60%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대부분은 도시의 기후적 영향과 관련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가옥이나 도로, 공장의 건설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미기후를 파괴하며 또한 건물의 기능, 밀도, 디자인에 따라 매우 복잡한 새로운 미기후를 만들어 낸다. 도시의 기후적 영향은 변수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주로 3개의 주요 주제를 가지고 도시구조의 효과에 관한 일반화가 가능하다.1. 대기조성의 변형2. 열수지의 변형3. 표면 거칠기와 대기조성의 변형의 효과1. 대기조성의 변형도시오염은 대기의 열적 특성에 변화를 가하고, 태양빛을 감소시키며, 풍부한 응결핵을 제공해준다. 최근 도시들의 대기는 오존이나 이산화황, 질소 산화물, 광물먼지, 탄소, 탄화수소 화합물을 포함하는 기체와 입자들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이들의 근원은 다음과 같다.① 에어로졸부유입자들은 주로 탄소, 알루미늄 화합물, 규소로 만들어져 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탄소 에어로졸은 전체 미세 입자들의 40%를 차지하며, 가시거리를 떨어뜨리는 주요한 요인이다. 그 절반은 자동차 배기가스로부터 나오며, 나머지는 공장이나 다른 내연기관에서 나온다.② 기체과거에는 가정과 공장의 석탄사용에 의해서 이산화황과 같은 기체(단위 ppm)를 생성한다고 하였지만, 오늘날은 가솔린과 석유의 연소에 의해서 일산화탄소(CO), 탄화수소류(Hc), 산화질소(NOx), 오존(O₃)이 생성된다고 본다. 미국의 39개 도시지역에서 3년간 측정한 결과, 48개의 탄화수소 화합물이 발견되었다는데, 이들은 25개의 파라핀(paraffin, 전체의 60%, 226ppb 탄소)과 15개의 방향족(aromatic, 26%, 116ppb), 7개의 유기질 올레핀(biogenic olefins, 11%, 47ppb 탄소)이다. 식생에서 방출되는 유기질 탄화수소(olefins)는 활성도가 매우 높아류현상에 의한 수직혼합이 중단되면, 지표면까지 내려오게 된다.미립자 오염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태양광선과 입사되는 복사에너지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오염이 안개와 결합된 것을 스모그(smog)라고 하며, 이는 태양복사에너지를 감소시킨다. 스모그가 나타난 일부 영국 도시에서는 11~3월 동안 입사되는 태양복사에너지의 양이 25~55%정도 감소되었다. 이러한 손실은 태양광선이 스모그층을 낮은 각도로 입사할 때 가장 크게 일어난다. 농촌지역에서 입사되는 태양복사에너지와 비교하여, 태양고도가 30˚일 때 비엔나는 약 15~21% 정도가 감소되었지만, 태양고도가 10˚일 때는 29~36%로 증가하였다. 또한, 밤 시간 동안에 형성되어 있는 스모그 층은 지표의 재복사를 방해하여, 도시의 밤 기온을 높이게 된다.커다란 하천을 끼고 있는 도시 대기에 응결핵이 많다면, 안개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때로는 과도하게 안정적인 대기조건은 과도한 오염물질과 결합하여 치명적인 스모그를 만들어 낸다. 1952년 12월 5~9일 동안, 런던에서 나타난 기온역전은 밀도 높은 스모그를 형성하여 48시간 동안 10m 이하의 가시거리를 나타냈다. 이 스모그로 인하여 1952년 12월~1953년 2월 사이 12,000명 이상이 사망(주로 폐병)하였다. 안개 발생과 산업화?도시화 간의 밀접한 관련성은 프라하에서 잘 나타난다. 1860~1880년 동안 프라하에서 연평균 안개가 발생한 횟수는 79회에서, 산업화?도시화가 이루어진 1900~1920년에는 217회로 증가하였다.(2) 기체연기나 다른 미립물질(석탄과 코크스를 사용하는 전통적 도시와 산업 활동에 의해 형성된)에 의한 오염과 오염기체의 발생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대기청정법 시행 이전, 런던에 발생하는 연기의 80~90%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연료에서 나오지만,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이산화황은 오직 30%만이 가정에서 나오며, 나머지는 발전소(41%)와 공장(29%)에서 나온다고 추정된다. 1960년대 초반 이후, 기술향상과 석탄사용 중단, 오O)를 형성하며, 이들은 O₃-NO의 반응을 통해 형성된 물질과 반응하여 산소와 광화학적 스모그를 형성한다. 로스엔젤레스 분지에서는 이러한 스모그가 시간대별로 또는 계절에 따라 잘 발달한다. 로스엔젤레스의 광화학스모그는 맑은 하늘, 약한 풍속, 기온역전이 잘 나타나며 태양복사에너지량이 많은 늦은 여름과 가을에 가장 심하다. 교란된 광 분해순환의 개별 요소들 값의 일변화는 NO₂의 농도(이른 아침, 교통체증에 의한)나 O₃의 최대 농도(입사되는 태양에너지가 높을 때)와 복잡하게 반응한 결과이다. 이러한 스모그는 도시의 열수지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건강에도 해롭다. 예를 들어, 도쿄의 시민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에서 호흡기를 착용하기도 한다.[그림 ] 도시의 오염 상황A : 도시 오염 돔(Urban pollution dome)B : 대기가 안정되어 있는 상황(예를 들면, 맑은 밤 다음의 이른 아침)에서 나타나는 도시 오염 기둥. 솔솔부는 바람은 대기가 수직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C : 북동 방향으로 펼쳐져 있는 오염 기둥(1975년 7월 18일, 세인트 루이스, 미주리)(3) 오염분포일반적으로 대기 오염은 도시주변의 자연적 환경을 잘 반영하며, 특히 기온역전이나 풍속과 같은 요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오염물질이 기온역전 층 아래에 집적됨에 따라 나타나는 오염 돔은 도시의 경계층을 형성한다. 풍속이 2ms?1정도만 되어도, 신시내티의 오염 돔을 이동시키는 데는 충분하며, 3.5ms?1 정도만 되면 오염 돔을 흩트릴 수 있다. 는 도시의 대기 뚜껑(canopy) 위로 부유성 오염물질로 이루어진 오염 기둥(pollution plume)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의 기온역전은 상승기류를 막지만 아침에 햇빛이 비춰 지표면이 가열되면, 오염 돔 내에서는 대류현상이 발생하여 중심에서는 상승기류가, 주변부에는 하강기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연기낙하(fumigation)라고 한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는 농촌 경계층 협곡의 기하학적 형태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들은 ‘천공비(sky view, 하늘이 개방된 정도)’의 감소뿐만 아니라 단파복사에 대한 벽면의 재반사, 표면적의 증가-이들은 적외선 손실을 감소시킨다-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오케(Oke)의 연구에 의하면, 맑고 조용한 여름날 밤, 도시-농촌간 최대 기온차와 천공비(0~1.0)간에는 반비례 관계가 나타난다. 천공비가 0.3 정도면 도시-농촌간 기온차는 10~12℃이지만, 천공비가 0.8~0.9면, 기온차는 단지 3℃정도만 나게 된다.(3) 인간에 의한 열 발생커다란 광역도시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겨울에 입사되는 태양복사에너지량과 비슷하다. 유럽의 겨울, 태양에너지 입사량은 평균 25Wm?2인데, 이는 커다란 도시에서 발생되는 에너지와 비슷한 양이다. 심지어 여름일지라도, 신시내티에서는 인간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에너지가 발생되고 있다. 인간에 의해 발생되는 열은 평균 26Wm?2이상인데, 이들 중 2/3는 공업, 상업, 가정에 의한 것이며 나머지 1/3은 자동차에 의한 것이다. 서기 2000년의 보스턴-워싱턴 메가로폴리스의 인구는 5억 6,000만에 이르며, 도시의 면적도 3만km2에 달한다. 이와 같은 인구의 집중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에너지는 겨울철 지표면에 도달하는 총 태양복사에너지의 50%에 달하며, 여름철 태양복사에너지의 15%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요한 혹야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북극에서의 에너지 균형은 오직 순 장파복사와 인간에 의해 형성된 열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도 한다.(4) 열섬도시에서 발생되는 열로 인하여 도시의 기온은 주변의 농촌지역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농촌지역의 냉각율이 도시지역을 초과하는 일몰 때(조용하고 맑은 날씨를 보이는 중위도 도시)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러한 효과를 야기시키는 에너지 균형에 있어서의 차이는 표면의 열적 특성과 복사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도시 대기뚜껑층(canopy layer)에서는 도시계곡의 형상(canyon geometry effect)이 이러한 e zone)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특히, 열섬 효과가 최저 기온에 미치는 효과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쾰른은 주변 농촌지역보다 0℃ 이하인 날이 34%, Basle은 25% 적게 나타난다. 런던에서, Kew는 인근 농촌인 Wisley보다 동결이 일어나지 않는 날 수가 약 72일이나 더 많다. 열섬효과는 강수 특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17년 이전의 베를린에서, 농촌지역의 강설량은 도시 중심지역에 비하여 21%나 적게 내렸다.여러 가지 영향을 발생시키는 도시의 조건 때문에 기온변화만 고려하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도시의 성장과 연 평균기온의 상승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 오사카의 경우, 최근 100년 동안 2.6℃나 상승하였다. 통계적으로도 도시-농촌간 최대 기온 차이는 인구 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미에서, 도시-농촌간 최대 기온차는 인구 1,000명인 읍에서는 2.5℃인 반면, 10만명인 도시에서는 8℃, 100만명인 곳에서는 12℃에 이른다. 유럽의 도시들은 동일한 인구에 대하여 약간 적은 기온차를 보이는데, 이는 도시의 건물 높이가 낮고 도시 협곡이 얕기 때문이다.도시성장과 기후와의 관계는 도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도쿄는 1880년 이후 크게 성장하였고 특히, 1946년 이후 1953년에는 738만 명에서 1975년에는 1,167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1880~1975년 동안에는 1월 평균 최저기온이 증가하였으며 0℃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감소하였다. 도쿄의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감소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1942~5)와는 반대의 경향이 나타났던 것인데, 도시 기호와 인구와의 상관성 관계는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도시의 밀도나 산업활동, 인간에 의한 열 발생 모두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인구가 27만인 레스터에서도 부분적으로는 런던의 중심부보다 더 따뜻한 곳도 존재한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도시의 크기가 기온에 미치는 영향은 도시의 밀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섬다.
    자연과학| 2005.11.29| 10페이지| 1,000원| 조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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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대선 이후, 한국의 정당분석
    2004 대선 이후, 한국의 정당분석 Ⅰ한나라당 - 수구가 아닌 보수야당으로< 정치 내면의 모습 >- 정치의 모습을 살펴보면 국민이 정치할 권리인 참정권을 정치인에게 이양하고 그들이 정치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이는 곧 간접민주주의를 뜻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직접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아는 정치인들이 정치하는 간접민주주의는 실제로 민주주의가 아닌 가짜 민주주의이다.권리의 이전은 그로 인해 엄청난 변화와 영향, 재앙 등을 가져오는데 이에 따라 누가 더 많이 가지나 쟁탈전을 불러 모은다. 이것이 바로 정치판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보수나 진보는 바로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싸움질 전략으로 내가 몰아내야 할 세력을 기존의 옛것을 보존하려하는 혹은 예전부터 권력을 가진 자였던 한나라당을 수구세력이라 칭하고 자신은 이 세력을 몰아낼 진보라 혹은 개혁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보와 보수란 개념은 난 선 넌 악이라 칭하고 싸움질하는 이분법과 아주 똑같은 전략이다. 즉, 난 개혁세력 넌 수구세력이라고 말만 선악에서 이것으로 바꾼 뒤 몰아내야 할 구시대적인 부패세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말만 정하는 것이고 그런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불합리한 것을 기존에 정치세력에 뒤집어씌운 후 이에 책임을 지우고 몰아내야 할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정치를 잡으면 개혁이 된다고 말하지만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거의 이러한 정치인이 정치한다는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특색 >- 한나라당은 1997년 11월, 민자당의 김영삼 대통령 퇴진 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통합해 창립한 정당으로 2004년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야당이다. 분열 부패의 구정치 구도와 행태를 청산하는 정치혁신을 통해 국민 대통합의 선진 민주정치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 인류의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는 21세기 위대한 선진 한국을 창조한로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정부를 독려하고 정부의 건전한 대외정책이라면 야당외교에도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평가1. "한미관계 변함없다."한나라당 역시 미국대선의 결과가 업치락 뒷치락 하는 초접전 양상을 보이자 온종일 대선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한나라당은 어느 후보가 당선이 되더라도 한미관계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며, 앞으로도 한미관계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미국 대선 결과가 확정되면, 한나라당은 당 대표단을 미국에 보내는 등 한미우호 협력관계 강화를 위한 당 차원의 노력을 계속 추진하기로 했습니다.박 진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은 새로 구성될 미국 행정부와 함께 한반도 정책방향을 신속히 파악해서 어떻게 한미관계 협력을 도모해 나갈지 당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매일경제TV) 2004-11-03→ 한나라당은 국익증진을 위하여 우호적인 한미관계를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어느 후보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른 세계질서의 변화나 방향보다는 한미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임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외교문제에 있어서 국익을 중시하여 국가의 안정을 위하는 것은 이점이 된다. 그러나 분명히 미 대선의 결과는 세계의 정치?경제?문화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라크전쟁과 같은 대테러전쟁이 또다시 일어날 수 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나 지구적 평화 등의 다른 가치들을 배제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우호적인 외교정책을 펼치는 한나라당은 마치 ‘딴나라당’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책2. 국가관과 통일관에 대한 올바른 기준 제시반공을 국시로 삼아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던 시대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로 바뀌는 과정에 자칫 잘못하면 국가관과 통일관에 대한 많은 혼란과 갈등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변화하는 남북관계에 맞는 올바른 기준을 제시해 나가겠습니다.북한 경비정 3척이 동시 다발적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다가 우리 해군의 경고사격을 받고 퇴각했다. 분단된 한반도이 없었다는 점을 비판하는 위의 논평은 한나라당의 국가안보를 내세운 보수적 성향을 여실히 나타낸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과제에 대한 고민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북을 주적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은 보수를 떠나 지나친 수구파적인 논리로 비춰진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꾸준히 남과 북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적’논리는 억지로 보수를 지키고자 우기는 것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결론 >- 여기서 우리는 한나라당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지금은 한나라당이지만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이 나라를 지배해온 정당이다. 이 나라의 모든 정치병폐는 한나라당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금권정치, 부패정치, 지역주의를 소생시킨 당이고, 지금은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한나라당은 변화된 현재 구도 속에서 개혁적 보수 세력의 대표라고 쭉 주창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방향을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개혁적 보수로 거듭나는 것이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스스로를 ‘개혁적 보수당’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개혁’에 있어서도 ‘보수’에 있어서도 전혀 해당되지 않는 집단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기득권의 유지’ 이다.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수구적인 성격을 버리고 올바른 개혁적 보수 야당의 역할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2004 대선 이후, 한국의 정당분석 Ⅱ열린우리당 - 간판만 개혁정치?2004년 4월 19일에서 제 1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시민, 특히 젊은 층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창당되었고, 많은 기대를 받아왔다. 지금 열린우리당의 개혁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여당로서의 위치이다. 이와 관련해서 언론, 정치, 사법 등 분야에서는 정부여당의 위치가 개혁 추진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정치개혁과 부패 척결에는 상당한 의지를 가진 참여정부가 최근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를 들고 나오면서, 정치개혁 등 여당의 반부패 정책을 추동하고 1월 전당대회 직후 수준(27.9%)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최근 27.1%의 지지율을 얻어, 29.5%의 한나라당에게 정당 지지도 1위를 내주기도 하였다. (2004, 한길리서치)열린 우리당의 지지율 하락 요인을 살펴보면, 경기회복에 대한 비관론이 가장 크며, 한국사회 기득권층에 도전하는 개혁정치를 펼쳐가기 바라는 국민적 염원에 충실하기보다는 힘이 센 기득권층에 편승하는 안이한 현실안주적 정치를 펴나갔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정치적 이슈인 지역주의나 부패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 개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개혁주의에서는 취약성이 드러나 개혁정당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꺼리면서 슬며시 실용주의라는 좌표를 새로이 내걸고 개혁정체성에 대한 비난을 정책현실성의 방패로 막아내려 하고 있다. 지난 7개월 동안의 열린 우리당의 ‘간판만의’ 개혁 정치의 대표적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라크 파병문제 관련 외교적 보수주의실제로 이라크 파병문제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함께 친파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2003년 3월부터 불거진 ‘파병 논란’의 핵심에는 이른바 ‘국익론’이 있다. 파병론자들은 명분이 없더라도 ‘국익’ 특히 ‘안보’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며, 두 차례에 걸친 파병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했다. 이러한 파병론의 근저에는 한국이 파병을 하지 않으면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이것이 안보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특히 ‘북핵’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한미공조가 대단히 중요하고, 부시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파병이라는 선물을 미국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 파병론의 근간을 이뤄왔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전략적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자기 최면, 즉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한미 동맹 약화로 이어져 한반도 안보가 위험해진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이라크 파병을 철회한다고 해서 미군이 철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은 실제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대안이 아니냐는 비난과 함께 정치적, 정책적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지난 10월 26일, 열린우리당 천정배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재정의 확대와 연기금을 부양책으로 활용한다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날 제시된 정책에 대해 경기부양의 실효성도 없고 부유층만을 위한 감세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감세와 재정확대로 늘어난 빚을 결국 국민에게 전가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애초 정부여당은 넓은 세원, 낮은 세율 정책을 제시한 바 있으나 낮은 세율만 강조하고 넓은 세원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열린우리당이 “개혁정책 없는 개혁정부, 사회복지 없는 분배정부”라는 비난을 면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아랫목 덥히면 저절로 윗목까지 따뜻해 질 것이라는 논리로 대기업 중심의 성장주의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민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을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살펴본 바와 같이 열린우리당의 지난 7개월 동안의 사회?경제적 개혁정책은 말만 어지럽게 춤추고 있을 뿐 열린우리당 스스로를 간판만의 개혁정당으로의 이미지로 각인 시키고 말았다. 열린우리당이 개혁적 정책 정당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유예기간이 없다. 앞으로 열린우리당이 새 시대의 첫 차가 될 것인가, 구시대의 막차가 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새로운 정치, 잘 사는 나라, 따뜻한 나라’를 외치며 정통 민주개혁세력임을 자처한 열린우리당 스스로가 우선 새로운 시대를 맞아 개혁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개혁은 곧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개혁을 말하면서도 온갖 특권의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개혁 간판 만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민주노동당의 17대 총선공2004 대선 이후, 한국의 정당분석 Ⅲ민주노동당- 완벽한 그들에게 딱 한가지 없는것? 원내교섭단체없이는 국회왕따!약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비롯한 국민 모두를 보호하기위한 약속으로 “조세혁명-복지혁명-완전고용 실현”, “자주화-반전평화-한반도 평화실현”.
    사회과학| 2005.09.11| 8페이지| 1,000원| 조회(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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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지역 문화경관의 지리적해석
    Ⅰ. 서론11. 연구배경 및 목적12. 연구 방법2Ⅱ. 정동지역의 역사적 경관31. 연구 지역 범위32. 정동의 역사적 흐름4(1)한말 풍운의 현장6(2)문호개방에 이은 열강들의 손길81)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선 거리8① 구러시아공사관9② 프랑스공사관터10③ 정동구락부10④ 손탁호텔터11(3) 근대교육기관의 산실121) 반일구국운동의 본산, 사립학교12① 배재학당터13② 이화학당14(4) 난세 속에 빛나는 민족의 저항지141) 독립을 위한 끊임없는 행로와 유적지14① 독립신문 발행터14② 대법원15(5) 개신교와 구교의 터전151)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15① 정동교회15② 서울성공회성당16Ⅲ. 정동지역경관의 지리적 해석171. 문화경관172. 도시경관18(1)도시경관의 분류181) 가로경관(街路景觀)182) 공공경관193) 역사경관203. 정동지역경관의 고찰20(1) 중심업무지구의 일부로서 정동지역20(2) 정동지역의 가로?공공?역사 경관 특징21(3) 정동지역의 도시마케팅과 문화 공간251) 도시마케팅262) 도시축제273) 정동지역의 ‘지구지정’을 통한 ‘도시재생’27Ⅳ. 결론29[표 1 . 우리나라 지구제의 구분]28그림 1. 연구지역인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그림 2. 미대사관 담장 안쪽으로 드러난 고목. 7그림 3. 이화여고 입구 앞에 있는 고목. 7그림 4. 덕수궁과 관청을 잇던 구름다리의 흔적. 7그림 5. 대한제국시대의 경운궁. 8그림 6. 현재의 덕수궁. 8그림 7. 구러시아공사관의 현재모습9그림 8. 당시 러시아공사관의 모습. 9그림 9. 러시아 공사관 내에 있었던 고종황제의 거실. 9그림 10. 우체국 공사현장 뒤로 보이는 10그림 11. 당시 손탁호텔의 모습. 12그림 12. 당시 서울의 외국인집단. 12그림 13. 이화여고 입구 14그림 14. 구 대법원. 현재는 서울 시립15그림 15. 한국의 최초 개신교 교회인 정동교회의 팻말 16그림 16. 정동교회 16그림 17. 걷고싶은 길, 정동. 21그림 18. 정동의 미니로터리와정능이 들어서면서 이 동네는 정능동(후에 정동)으로 불리고 정숙한 동네라는 뜻을 갖게 된다. 더불어 태조는 왕후의 영혼을 위해 흥천사(지금은 종만 남아 덕수궁에 보관돼 있다)라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신덕왕후를 좋지 않게 생각했던 태종은 1409년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지금의 정릉)으로 옮기고 능에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 대광교 기초석으로 쓴다.정동을 대표하는 궁인 덕수궁(본이름 경운궁)은 본래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세조의 큰 아들인 도원군은 세자로 책봉됐다가 18세에 죽어 둘째아들이 왕위(예종)를 잇게 된다. 출궁할 수밖에 없었던 세자빈 한씨를 위해 나라에서 지금의 덕수궁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했다. 후에 예종이 죽고 도원군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성종)이 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자 여기에는 월산대군만 거처하게 됐다. 지금의 덕수궁이 월산대군 사저였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1592년 임진왜란으로 피난갔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월산대군 집을 행궁으로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협소해 인근의 왕족이나 정승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면서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궁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광해군이 여기서 즉위하고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정사를 보기도 한다. 이 덕수궁에 경복궁-경희궁을 이어놓으면 정동은 명실상부한 왕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왕의 터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883년. 1880년 초까지는 4대문 안에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8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선과 접촉하기를 원하는 외국 사절단이 늘어나자 정동 지역을 이들에게 개방했다.이때부터 각국의 공사관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883년 미국이 명성황후 일가인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사들여 1884년부터 공사관으로 사용하면서, 1888년 경희궁에 소속된 언덕 '상림원'에 러시아공사관, 1889년 옛 서울지방법원 언덕 자리에(2) 문호개방에 이은 열강들의 손길1)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선 거리1880년대 조선이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국의 공사관이 차례로 서울에 설치되었다. 용산과 남산 일대는 일본이, 소공동?청계천 일대는 중국이, 정동 일대는 서양 여러 나라가 혼재되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① 구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은 ‘아관파천’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장소이다.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은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경복궁에 유폐된 고종은 1896년 2월 9일 세자와 더불어 대기 중이던 러시아인을 따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이러한 아관파천은 고종의 불안과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요구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고종은 1년 동안이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면서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갑오개혁’을 추진한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대신 친러세력인 박정양 등이 집권하였다. 결국 러?일의 관계는 1905년 러일전쟁으로 완전하게 일본이 우위를 확보하기 전까지 타협과 대결이라는 이중정책의 반복이었다.그림 . 구러시아공사관의 현재모습러시아공사관은 1890년(고종 27)에 건축된 르네상스풍의 건물로서 설계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이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일부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구조는 벽돌조 2층 건물로서 한쪽에는 탑을 세웠다.특히 이곳은 1896년(고종 건양 원년)2월 고종황제가 세자(순종)와 함께 경복궁에서 나와 다음해까지 기거했던 곳으로, 사진자료에 의하면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도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이 경운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그림 . 당시 러시아공사관의 모습.현재는 오른쪽의 탑만 남아있다.그림 . 러시아 공사관 내에 있었던 고종황 제의 거실.광복 후 러시아공사관은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폐쇄되었으나, 1990년 러시아와 국교를 재개하면서 그 부지의 소유문제가 아펜젤러에게 전달하였다. 초기에는 중등과정의 특별과와 대학과정의 본과를 두고 한문, 영어, 만국지지 등을 가르쳤다. 188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교사를 신축하여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수업연한도 보통과 4년, 본과 5년으로 정하였다. 입학자격은 17세 이상의 남자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을 줄 알고 한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배재학당은 1925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고, 1937년에 배재고등보통학교는 6년제 배재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51년에는 학제의 변경으로 3년제 배재중학교와 분리되어 배재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배재학당은 1896년 학생회인 협성회를 조직하여 기관지『협성회보』를 발간하고 조국의 독립과 교육구국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펜젤러의 교장사택과 학당기숙사는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주역들의 집회소가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목사 이필주를 중심으로 기숙사에 모여 거사를 계획하여 전교생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아펜젤러가 해임당하기도 하였다.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기독교정신과 개화사상의 바탕 아래 근대교육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육을 통해 기독교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그대교육을 통한 신문화의 요람지로서 실험실습교육과 직업교육을 실시하였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고적답사와 수학여행 등을 실시하였다.배재학당터는 덕수궁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왼쪽에 정동제일교회가 나오고 교회별관을 따라 게속 걸으면 ‘chase plaza'가 나타나는데 그 건물 뒤쪽 이대가 모두 배재학당터였다고 한다. 현재 건물 뒤쪽 일대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배재 고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원이라고 불기보다는 건물의 작은 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 만큼 협소하다. 건물 뒤로 보이는 공간 안쪽의 시원한 나무 그늘과 물줄기가 공원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한편, 이곳에서는 최근 러시아대사관 신축공사를 준비하다가 땅속에서 서소문과 서 바탕으로 충분히 그 모습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문화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인지경관으로서 정동은 그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정동지역경관을 연구하기 위해 먼저 지리적 이론들을 정리해보기로 한다.1. 문화경관)문화지역을 인식하는 지표로 가장 사용하기 편리한 것이 다름 아닌 문화 경관이다. 문화경관은 문화를 가진 인간 집단이 어떤 장소에 거주하면서 창조해 놓은 인공경관(artificial landscape)이다. 문화지리학에서 문화 경관의 연구는 가장 기초적인 분야이다. 특히 문화경관은 가시적인 물질문화이기 때문에, 문화를 연구할 때 접근하기 편리한 연구 대상이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인 비달 드 라 블라슈(V. de la Blache)는 “우리들이 책을 읽는 것처럼 인공 경관의 문화적 의미를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화경관에는 인간 집단의 태도, 가치관, 열망과 기대, 공포 등도 내재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 경관을 해독하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 된다.문화 경관은 때때로 특정한 문화 집단의 이상과 현실을 담고 있는 ‘텍스트(text)’가 되고, 문화지리학자들은 이런 텍스트를 해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취락의 공간조직, 건물, 다른 구조물의 건축형태에는 그것들을 지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표현되어 있다. 즉 문화경관은 문화지역구분의 가시적 지표나 문화전파의 물적 증가가 되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문화를 탐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장소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하여 문화경관의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경향이 인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지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최근 들어 부쩍 유행이다. 이들은 인공 환경의 구성, 색깔, 형태에 의해 전달되는 주관적이고도 개인적인 메시지를 통하여 문화경관의 미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문화 경관의 사실적?구체적?물리적?기능적인 측면보다는 경험적?인지적?상징적?미학적인 측면이 더 중요한 것.
    교육학| 2005.09.11| 34페이지| 5,000원| 조회(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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