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카톨릭의 칭의론 TOC o "2-4" h z u HYPERLINK l "_Toc136708616" I.서론 PAGEREF _Toc136708616 h 1 HYPERLINK l "_Toc136708617" II.본론 PAGEREF _Toc136708617 h 2 HYPERLINK l "_Toc136708618" 1.칭의에 대한 개념 PAGEREF _Toc136708618 h 2 HYPERLINK l "_Toc136708619" 2.트렌트 공의회 PAGEREF _Toc136708619 h 2 HYPERLINK l "_Toc136708620" 3.카톨릭이 주장하는 이신칭의의 오류 PAGEREF _Toc136708620 h 3 HYPERLINK l "_Toc136708621" 3.1)구원에 대한 신자의 공로 문제 PAGEREF _Toc136708621 h 3 HYPERLINK l "_Toc136708622" 3.2)칭의의 방편 PAGEREF _Toc136708622 h 4 HYPERLINK l "_Toc136708623" 3.3)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교리 PAGEREF _Toc136708623 h 5 HYPERLINK l "_Toc136708624" 3.4)칭의를 받을 수 있는 신앙 PAGEREF _Toc136708624 h 6 HYPERLINK l "_Toc136708625" 3.5)성례와 칭의의 관계 문제 PAGEREF _Toc136708625 h 7 HYPERLINK l "_Toc136708626" 3.6)칭의와 성화의 관계 PAGEREF _Toc136708626 h 8 HYPERLINK l "_Toc136708627" III.결론 PAGEREF _Toc136708627 h 9로마카톨릭의 칭의론서론‘칭의’는 개신교 신학에서 핵심 교리라 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지고 성장하였다. 루터의 말처럼 교회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근간이 바로 ‘이신칭의’ 교리인 만큼 ‘이신칭의’에 대하여 정확하고혀 없어도 성립되는 것이다. ‘칭의’는 외부적인 선언으로 내면적인 삶은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 말은 중생이나 회심 같은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트렌트 공의회트렌트 공의회(1545~1563년)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반작용으로 소집된 카톨릭을 중심으로 열린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에서 많은 내용들을 정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제 3회기에서 결정된 신학적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니케아 신조를 신앙의 토대로 확정하였고, 정경을 확정하고 불가타역을 신앙의 문제에 권위 있는 성경으로 공포하였다. 원죄에 대한 펠라기우스주의와 프로테스탄트 견해를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신칭의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첫째, 구원의 근거로 인간의 공로도 인정한다.둘째, 신앙이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셋째, 신자의 믿음, 소망, 사랑이 생전에 온전해 지는데 그것이 의로 여겨진다고 하였다.넷째, 칭의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을 지식적 승인이라고 하였다.다섯째, 성례에서 모든 의가 시작되며 증가되며 회복된다고 까지 말했으며, 그것을 받을 소원이 없이는 칭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카톨릭이 주장하는 이신칭의의 오류트렌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이신칭의’의 정의에 대하여 잘못된 개혁주의와 비교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본다.구원에 대한 신자의 공로 문제로마 카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결정은 구원의 근거로 인간의 공로도 말하고 있으며, ‘칭의’의 근거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직접적인 근거로 보지 않고 간접적인 근거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가 칭의의 근거가 된다.’ 라는 정의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로마 카톨릭이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근거는 그들이 주장하는 아주 잘못된 ‘공적(공로) 교리’(Doctrine of Merit)와 관계되어 있다. 공로 개념에 대하여 카톨릭 신학자 바르트만의 주장에 의하면 ‘공로는 신자의 행위와 응답통로와 수단이다.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3:25, 28, 30; 5:1; 갈 2:16; 빌 3:9). 이 말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정리해야 할 것은 ‘칭의’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믿음의 칭의의 방편이라는 의미이다.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교리로마 카톨릭은 신자의 믿음, 소망, 사랑이 생전에 온전에 지는데 그것이 의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카톨릭이 인간 본성의 변화를 칭의의 근거로 간주하려는 오해는 어거스틴에서 출발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칭의의 근원은 하나님이지만 칭의에 영향을 주는 인간의 의로움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고, 인간 존재의 일부가 되고, 인격에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 문을 여는 성경의 구절을 칼빈은 고린도후서 5장 12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니라” 라는 말씀으로 본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책을 떠맡고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칭의’의 근본적인 진리이다.이에 대하여 칼빈은 더욱 명백히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 심판의 덕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9절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우리가 의로 간주된다고 말한다.칭의를 받을 수 있는 신앙로마 카톨릭은 지식적 승인을 신앙이라 하였다. 이는 맹목적인 동의에서의 지식이며, 이해를 추구하는 개념에서의 지식이다.칼빈도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인식하는 성경을 따르는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 지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칼빈이 말하는 지적인 요소는 단순히 이해를 추구하는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상위의 개념이다. 이 말은 믿음의 지식은 이해라기 보다는 확신이다. 확신에 찬 지식은 신뢰로서 어떤지식일 뿐이다.성례와 칭의의 관계 문제로마 카톨릭은 성례를 중요시 하다가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례가 모든 의의 시작이며, 성례를 받을 소원이 없이는 칭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칭의’의 적극적 요소로써 성도들은 ‘양자 됨과 영생의 권리’를 받는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칭의’는 세례의 사건과 함께 시작되는 과정이다.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신학은 세례란 신자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며 새로운 삶을 이루어 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세례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골 2:11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세례’를 의미한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혹은 계약)을 맺을 때 언약의 표징으로 준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는 의미이다(골 2:11). 셋째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의미(골 2:12)이다.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신학자와 박윤선 박사는 세례를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은혜의 방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세례는 구원론이 아닌 교회론에서 다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세례를 통하여 ‘칭의’를 받는다는 로마카톨릭의 주장은 자신들의 특히 성직자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칭의와 성화의 관계로마 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트렌트 공의회 제 10 장에서 ‘칭의’는 의로워지는 과정이며 따라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칭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혼동은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에 있어서도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다.아래의 내용은 ‘칭의’와 ‘성화’의 다른 점을 벌코프 조직신학의 내용이다.칭의는 죄책이 제거되고, 영원한 기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내포 된 모든 권리를 조인에게 회복 시킨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의 판결이 납될 수 없는 주장이다. ‘칭의’가 변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언제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에서 떠나 구원 받지 못한 백성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생의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칼빈은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종말론적 입장에서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그리스도인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소유함으로 즉시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완전해졌지만 한편 우리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다.결론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칭의’ 개념이 잘못 되었음을 정확하게 알았다. 특히 그들은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칭의 교리를 주장한다. 성경은 칭의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믿음으로’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트렌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칭의 교리를 통하여 알 수 있다.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외적인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카톨릭은 세례를 통하여 칭의 시작된다는 잘못 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더욱이 칭의는 반복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 자신들이 세운 고해성사 교리를 정당화 하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 칭의는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일회적인 하나님의 선언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러한 선언이 없다면 과연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단 일회적 선언으로 종결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이다.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칭의 교리를 확고히 해 준 사건이 바로 트렌트 공의회이다. 로마카톨릭은 아직도 트렌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대하거나 폐기처분 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 로마 카톨릭이 개신교와 화합을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이 변하였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요리문답을 발간하였다 할지라도 그 기본 근거가 트렌트 공의회 내용을 답습
TOC o "1-4" h z u HYPERLINK l "_Toc119170865"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한 하나님의 계획 PAGEREF _Toc119170865 h 1 HYPERLINK l "_Toc119170866" I서론 PAGEREF _Toc119170866 h 1 HYPERLINK l "_Toc119170867" 1.본문 선택의 목적 PAGEREF _Toc119170867 h 1 HYPERLINK l "_Toc119170868" 2.전개 방법 PAGEREF _Toc119170868 h 1 HYPERLINK l "_Toc119170869" II본문 PAGEREF _Toc119170869 h 1 HYPERLINK l "_Toc119170870" 1.성경 문학적 배경 PAGEREF _Toc119170870 h 1 HYPERLINK l "_Toc119170871" 1.1)출애굽기에서 본문의 위치 PAGEREF _Toc119170871 h 1 HYPERLINK l "_Toc119170872" 1.2)육경 내에서 본문의 위치 PAGEREF _Toc119170872 h 2 HYPERLINK l "_Toc119170873" 2.역사적 배경 PAGEREF _Toc119170873 h 4 HYPERLINK l "_Toc119170874" 3.문맥적 배경 PAGEREF _Toc119170874 h 4 HYPERLINK l "_Toc119170875" 4.성경 본문 주해 PAGEREF _Toc119170875 h 5 HYPERLINK l "_Toc119170876" 4.1)서론 PAGEREF _Toc119170876 h 5 HYPERLINK l "_Toc119170877" 4.2)시내산 언약 PAGEREF _Toc119170877 h 5 HYPERLINK l "_Toc119170878" 4.3)본문 주해 PAGEREF _Toc119170878 h 6 HYPERLINK l "_Toc119170879" 5.설교요약 P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1계명부터 4계명까지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십계명의 1, 2계명을 어기는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로 말미암아 새롭게 성막을 건축해야만 하였다.오경 내에서 본문의 위치육경 내에서 본문의 위치모세 오경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오경은 전통적으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모두 동의 하는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서를 포함한 육경, 사무엘서나 열왕기서까지(룻기제외) 포함한 8경이나 9경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주장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결말을 맺고 있는 곳까지 찾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 육경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율법서를 육경으로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하여 잘 나타내고 있다.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까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a 창 1:1~출 19:2언약에 대한 역사적 서문b 출 19:3~민 10:10언약문c 민 10:11~수 24장언약에 대한 역사적 결말이 구조를 보다 세부적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율법서(창 1-수 24)의 전체구조a 원시역사: 각 민족은 영토를 분배 받음(창 1-11장)각 민족은 가족대로() 영토()를 분배 받음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이스라엘 선조들(데라, 나홀,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b 아브라함(창 12:1-21:7)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아브라함이 세겜에 단을 쌓고 벧엘과 아이 사이 헤브론에서 삶북쪽의 대적에게 군사적 승리를 거둠: 기습 공격으로 단까지 쫓음c 이삭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죽음(창 21:8-28:4)주제: 죽음(사라,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축복(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야곱, 에서)d 야곱: 사회악과 가정불화에 관한 이야기를 열거(창 28:5-37:1)가족간의 갈등, 살인, 거짓말, 도적질, 외국인에 대한 박해 등사랑 받지 못한 아내의 에 응답하여, 모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켜 현재 시내산 앞에서 시내산 언약을 준비하고 있다.이러한 출애굽기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기초는 족장들의 언약, 특별히 아브라함의 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의 배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언약이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 혹은 명확하게 되는 언약의 점진성을 보여주고 있다.본문 중에서 6절의 “거룩한 백성”은 출애굽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서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고센 땅에 거주할 때부터이다. 이러한 사실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4번째 재앙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 재앙이 임하지 않은 것은 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5절의 “내 소유”는 “내 백성”(출 3:7; 6:7), “이스라엘은 내 장자”(출 4:22)이며, 더 앞으로 나가면 아브라함의 자녀 중에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1:1 “그리고 이름들은 이러하니라”() 라는 기록에서 “이름들”()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들로부터 창대케 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성경 본문 주해서론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한 준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출 19:3-6은 시내산 언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기억하게 하시고, 구원의 방법을 독수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곧이어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말씀하여 주신다.출 19:1~민 10:10까지 시내산 언약 체결을 위한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해야 할 일과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언약의 내용(출 19:1-24:11)이 주어지고, 성막과 관련하여 실패(금 송아지 숭배 사건)와 완성을 통하여 선민으로서 지켜야 할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다.하나님의 이름 중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본 문에서 계시하신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이 산에서 경배 받으시겠다는 언약’(출 3:4-12)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심을 강조하고 있다.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여기서 ‘이르고’()와 ‘고하라’()라는 말은 ‘너는 말해야 한다’와 ‘너는 알려야 한다’ 라는 뜻의 강한 명령형 동사이다.본 단락에서 ‘야곱의 족속’과 ‘이스라엘 자손’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처음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가족이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 이는 언약의 신실성과 연관되어 출애굽 이전의 족장들과 세운 언약에 대하여 재 확인하고 있다.4절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경험하였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출애굽 시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홍해의 사건을 통하여, 반석의 물을 통하여 구원의 실제적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즉, 자신들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외와 감사를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리게 될 하나님의 은총이 현재보다 못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의미가 있다.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라는 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행하여 하신 구원 역사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독수리의 말개는 주변을 압도하는 권위와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사 40:31). 또 독수리의 날개에 대한 비유는 신 32:11, 12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에서 더욱 완벽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암‘순수하다’, ‘깨끗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하지만 이 의미보다는 ‘구별’, ‘차단’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거룩한 산, 거룩한 구역, 거룩한 자, 거룩한 성, 거룩한 안식일 등). 이 말이 구약에서 쓰일 때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거룩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로서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다. 다른 이방 민족과 구별이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으로서 자격이 없다. 실제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이 거룩함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로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 이스라엘을 형성하여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 역할을 담당한 현세의 영적 기관은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라는 신약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설교요약본문은 오경 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세워주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주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성막을 요구하시고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낮과 밤을 금식하고 있을 때 산 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서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하여 출애굽기에는 성막 건축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성막이 완전히 폐기되고 새로이 새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본문에서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의 나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이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그 과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첫째 부분은 언약의 기초와 배경이 되는 내용으로 시간, 장소, 모세를 통한 언약1
아모스에게 보이신 것-아모스서 7장에서 9장을 중심으로-0. 아모스에게 보이신 것-아모스서 7장에서 9장을 중심으로-들어가는 말본 강의 초기에 최만수 형제는 강의 목적이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마음과 예언자들의 가슴을 알기 위함이라고 밝힌바 있다. 이러한 목적은 강의시간 중간 중간에 여러 차례 강조된바 있다. 이런 취지에서 7조의 경우 과연 아모스서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아모스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아울러서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장시간에 걸쳐 거론 되었었다. 조원 대다수의 의견은 너무 폭 넓게 다루지 말자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논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때문에 초기엔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것을 가지고 발제도 자체적으로 했었다. 그렇지만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며, 또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뜨거운 열정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7조는 그것을 찾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본 글은 어디까지나 7조가 발견한 열정이고 마음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 결코 아모스서 전체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7조는 아모스의 열정과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발견한 데로 기록했다는 것을 염두하고 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서론(0) 논지7조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걸쳐 본 논문의 연구 범위를 7장에서 9장으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7장 서두의 아모스의 말 곧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 하니라? 는 말에서 아모스에게 보이신 것 이라는 주제를 정하였다. 이 주제를 정한 이유는 아모스가 자신의 환상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조의 연구 목적은 아모스서 7장에서 9장을 중심으로 아모스서를 이해하는 데 있으며, 그것은 7장에서 9장에 나오는 환상 곧 아모스에게 보이신 것이 심판인가 회복인가를 밝히는 것이다.아모스의 메시지 가운데 7장에서 9장은 환상의 책이다. 그짧은 대답에서 거론 된다. 이 부분에서 아모스는 자신을 선지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또한 직업적인 설교자도 아니었으나 그가 농부요 목동으로서 일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해서 예언케 하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예언한다고 하였다.“나는 선지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예언하라 하셨도다(7:14-15)여기서 아모스는 꾸밈없는 자기소개를 보여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에서 그가 이스라엘 사회가 인정해 준 사회신분으로 높이 숭앙을 받는 선지자가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선지자가 되었다는 자신의 소명을 밝히고 있다.짐멀리는 이사야의 소명 기사에서 이사야가 본 ‘이상’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열왕기상 22:19에 “내가보니 여호와께서”(NIV, I saw the LORD)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구가 나온다. 그리고 이사야 6장에서 이 말은 “내가 본즉”(NIV, I saw the Lord)으로 시작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회의 가운데 인도되어 하늘의 영광을 목격한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정한 전달자로 인증된다.) 그런데 아모스의 환상은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NIV, LORD showed me)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환상은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증거하고 있다.(나) 소명 이전의 직업과 메시지 관련그의 소명 이전의 직업은 7장14-15절에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그의 직업과 관련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여러 말에서 볼 수 있다.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림(2:13),수풀과 굴에서 부르짖는 사자(3:4,8), 그물(창애)에 걸린 새(3:5),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3:특정 부분(7장에서 9장)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을 논하는 데는 문학 구조라는 방법이 설득력이 있다. 아모스서 전체 내용은 5장 1-17절을 중심으로 대칭되고 있는 문학 구조를 발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7조는 문학 구조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 구조는 아래와 같다.A 암 1:1-2:16 이스라엘과 주변국에 임박한 심판B 암 3:1-15 선지자의 사명: 이스라엘과 벧엘의 단을 벌하실 것임C 암 4:1-13 이스라엘의 부유한 여인들에 대한 책망: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여호와의 심판D 암 5:1-17 핵심부분: 회개에 대한 호소 및 애가C′ 암 5:18-6:14 이스라엘의 부유한 남자들에 대한 책망: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여호와의 심판B′ 암 7:1-8:3 선지자의 사명: 다가올 심판의 이상; 아모스가 장차 벧엘의 제단이 무너질 것을 예언함A′ 암 8:4-9:15 이스라엘에 다가올 심판과 미래의 회복위의 구조를 보면 ‘D’ 단락을 중심으로 서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그 핵심 내용이 정 가운데인 ‘D’ 단락 부분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서의 주제는 5장의 내용인 회개에 있다.또 위의 구조를 통하여 본 환상 부분을 중심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3장에서 6장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되었던 메시지들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3장에서 4장은 선지자 사명(암 3:8)으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암 5:4, 15)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곧 바로 이어지는 단락에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였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이 선포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백성은 6장까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 심판을 피할 수 없다.아모스의 문학적 구조에서 환상부분으로 구분하고 있는 단락(B′ 암 7:1-8:3)은 선지자 사명심판만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문학 구조로 보면 아래와 같다.구조)암 7:7-9 다림줄 환상a 도입절: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b 시각적 내용: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c 대화: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d 설명: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e 결정적 선언: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f 심판의 선언: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암 8:1-3 여름 실과 광주리 환상a 도입절:주 여호와께서 또 네게 보이시며b 시각적 내용: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c 대화: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d 설명: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e 결정적 선언: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f 심판의 선언: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세 번째 다림줄 환상다림줄 환상은 이스라엘의 위치(하나님의 심판)가 보다 더 위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환상은 아모스의 기도(암 7:2, 5)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응답(암 7:3, 6)하여 유예 되었다. 하지만 세 번째(다림줄 환상) 환상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림줄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하나는 건축 때에 사용되는 측정도구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측정하신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다림줄이라는 단어 자체의 언어유희적 해석이다.먼저 건축 도구로서의 해석을 하고자 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담(Wall)은 도시 자체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세 번에서 주된 논지는 회복과 관련되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 연구된 부분에서 심판의 메시지가 회복으로 향하고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앞서 환상의 구조부분에 B′(암 7:1-8:3)에서 환상을 통하여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심판임을 논의했다. 아모스의 메시지는 심판의 확정을 첫째부터 네 번째 환상을 통하여 선포하고, 마지막 환상(암 9:1-4)은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지 못하는 성전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전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성전을 새롭게 건축한다는 내용이 회복의 메시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이 5장과 6장의 뒤를 이어 7장에서 9장이 회개치 않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심판을 선포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모스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문학 구조)(7페이지)에서 암 8:4-14의 내용을 B′의 단락에 놓지 않고 마지막 A′ 단락에 놓은 이유는 회복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A′ 암 8:4-9:15 이스라엘에 다가올 심판과 미래의 회복 - 다윗의 무너진 장막a 8:4-8 다가올 땅의 황폐: 여호와께서 부유한 거민들의 죄로 인하여 그 땅을 뒤엎을 것임b 8:9-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임c 9:1-4 여호와의 심판: 피할 수 없음d 9:5-7 핵심부분: 찬양시; 7개의 시적 구절c′ 9:8-10 여호와의 심판: 남은 의로운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임b′ 9:11-12 여호와께서 황폐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임a′ 9:13-15 미래의 회복: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 땅의 비옥함을 주실 것임.위 구조에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땅의 황폐화를 선포하고, 남은 자(암 9:8-9)들을 통하여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는 데(암 9:11) 그 주된 내용은 땅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아모스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한 최초의 사람’ 이었다. 그는 또 피조물에 대다.
1.들어가는말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계의 언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세계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말할 때 루터의 종교개혁만을 이야기한다면 종교개혁의 참된 이해를 할 수는 없다. 물론 16세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외에도 우리가 주목할만한 종교개혁이 있으니, 그것은 칼빈의 종교개혁이요,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지양하고 스위스에서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나 루터나 칼빈 보다는 소외되어온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연구함으로 종교개혁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한다. 특히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살펴보고,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을, 그리고 그의 신학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기로 한다. 특히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또는 신학을 공부하는 예비목회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기로 한다.2.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2.1. 쯔빙글리의 생애쯔빙글리의 삶과 사역에 대한 소개에 있어서의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 제1세기를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남부 및 서부 독일의 개혁자들에게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쯔빙글리와 그의 생도들의 영향은 네덜란드 신학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 조직 속에서도 엿볼 수 가 있다. 그의 활동은 독일 및 그 시대의 국제정치에 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리히 이전 그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원생들은 누구인지, 그가 쓴 몇 안되는 자료들을 가지고는 쯔빙글리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루터나 칼빈처럼 대작을 남기지 못했고 많은 문서를 남겼으나 그의 글은 시적 영감들이 흐르고 있지만 학문적 깊이가 결여되어있다는 평을 받는다.2.2. 쯔빙글리의 성장성장은 주로 취리히 이전시대에 속해 있으나 이 시대의 쯔빙글리를 다루는 자료는 극히 빈약하민사제직에 선택되었다. 그의 신학적 능력과 인문주의자이며, 에라스무스적인 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 되었다. 1591년 1월 1일부터 쯔빙글리는 마태복음 강해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특정 주일의 복음서 일과표에 기초하여 설교하던 당시의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등을 강해했다.)2.3. 쯔빙글리의 특성쯔빙글리를 루터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는 루터가 겪었던 영적 시련을 겪지않았다. 그들은 기질과 정신적 유형과 수련이 전혀 다른 대조적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의 특성을 간략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첫째,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다.둘째, 쯔빙글리의 개혁범위는 루터보다 광범위했다.셋째,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영도적 위치에 있지 못했다.3. 쯔빙글리의 신학3.1. 중심신학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의 토대가 된 신학체계의 중심은 기독론이나 인간론, 구원론이 그의 신학의 중심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교리였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전적 의존성의 감정에 의해 거의 대부분 형성된 것이다.)쯔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하여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제일 동인(動因)이요, 영혼이 몸을 지배하는 것처럼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심지어 악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해서 가능하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렸고 인간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인간 쪽의 노력의 결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이 신앙을 갖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 적으로 택한 자에게 주시므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의 선한 행위까지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행하게 하신다고 주장한다.)성경은 쯔빙글리 종교개혁의국가였다. 자치공화국인 스위스의 연방 안에는 13개 주가 가입되어 있 었는데 각 주의 정부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또 스위스의 도시들은 문화의 도시였고 인문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특히 바젤(Basel)은 인문주의 운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 출판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 자신의 개혁목표들 역시 지속적으로 이러한 인문주의적 이상들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인문주의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4.2. 종교개혁의 과정4.2.1. 용병제도의 비판 및 반대운동 주도(1515, 1521년)쯔빙글리는 로마, 프랑스의 용병으로 인하여 많은 수입이 있는 반면에 생명의 파괴, 적대적 싸움, 약탈, 성병의 만연, 제도의 오용등의 폐해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으며 용병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 하였는데 이때 교황청의 권력남용을 실감하였다.4.2.2. 사순절 금식사건 (1522년) - 본격적 개혁시작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은 일로 인한 콘스탄츠 주교의 처벌요구에 대하여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음식을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고 설교하고, 이를 금지하는 교황의 법령은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글을 최초로 발표하였다.4.2.3. 제1차 공개토론 (1523. 1. 29)첫 15개 조항은 성경적인 교리들이며, 나머지 52개 조항은 로마카톨릭의 교리들을 비판하였는데, 쯔빙글리는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이요,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주장하고 카톨릭교회의 미사제도, 교황제, 금식제도, 연옥설 등은 비 성경적임을 지적하고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대제사장적 직분, 기념이 아니라 희생으로서의 미사, 성자들의 중보를 요청즉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시의회는 성상을 더 이상 교회 안에 가져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4.2.5. 제 3차토론 (1524. 1.19~20)토론의 결과 미사제도는 여전히 인정되었으나, 성상은 폐지되었다. 5개월 후 시의회는 교회당에서 모든 성상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4월 16일 개혁교회 역사상 최초로 복음적인 성찬예식이 거행되었다.4.2.6. 미사철폐 (1525년)천주교 미사가 폐지되고 사제, 수도사들, 수녀들의 결혼이 허용되었다.4.2.7. 종교회의 (1526년)종교적 차이로 인한 연방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덴(Baden)에서 종교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성찬예식, 원죄, 연옥교리, 성상, 성자숭배 등을 토론하였는데 로마카톨릭의 승리로 인하여 그 압력이 가중되고 쯔빙글리를 축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527년의 신학논쟁에서는 복음주의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이 크게 승리하여 베른에서의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4.2.8. 마르부르크 논쟁 (1529년)개신교 세력의 연합전선 구축을 위하여 독일과 스위스 복음주의 세력의 공수동맹을 시도하였는데,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는 거의 모든 교의에 견해를 같이 했으나 성찬에 관한 교리에서는 견해차를 달리하였다.4.2.9. 종교전쟁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과의 첫 종교전쟁으로서 제1차 카펠 평화조약(1529. 6. 26)으로 복음주의 교회들의 존립이 허용되었으나 1531년 카톨릭교회의 공격으로 인하여 쯔빙글리도 사망하고 전쟁에서 패함으로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취리히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예배가 허용되었으나 종교개혁의 확장은 중지 시킨 결과를 가져옴 )4.3. 쯔빙글리의 성찬론 논쟁4.3.1. 쯔빙글리의 성찬관쯔빙글리는 카돌릭의 화체설에 대하여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는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초대교회에서도 없었던 로마카톨릭의 창작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그리고 루터의 공재설을 비판하고 상징설을 주장하였다.)쯔빙글리는?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corpus m적 임재를 배격하였다.)따라서 쯔빙글리는 성만찬에 영적으로 임재 하시는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만 성찬의 유익을 주시기에 떡과 포도주는 이미 임재 해 있는 내적인 영적 은총의 외적, 가시적 표현이다 라고 주장하였다.4.3.2.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차이는 1519년 루터가 호니우스가 말한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의 ?est?를 ‘의미’로 보는 견해를 검토했으나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쯔빙글리의 반박과 루터의 반박으로 성만찬의 논쟁은 본격화 되었고 1525년 쯔빙글리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강해’에서 카톨릭과 루터의 성찬론을 비판함으로 루터측과의 토론과 문서의 교환이 시작되어 1528년 루터는 ‘주의 만찬에 대한 고백’을 써서 쯔빙글리를 반박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이단이란 용어까지 사용하였다.이와 같이 성만찬 문제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 심각한 견해차를 보였고 개혁운동의 과정에 있어서 최대의 신학논쟁이었다.) 성만찬 양자의 교리적 입장을 중재하여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 개혁파간의 연합을 통하여 당시 종교 개혁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루터를 지지하는 필립 헷세는 쯔빙글리를 마부르그에 초청하여 루터와 회담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마부르그 논쟁이다.마부르그 회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믿음에 의한 칭의, 세례에 관한 문제 등 14개 조항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15조항의 초기 부분인 화체설과 미사를 배척하였고, 빵과 포도주 두 가지 요소를 신자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까지는 동의하였다.)마부르그 회의에서 루터가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고 발표함으로 논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루터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대속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 드려지는 몸과 피의 표징이며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우리에게 구속사역을하였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인간 지혜의 한계서론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역사가 짧은 백성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낳은 지혜문학 역시 고대 근동의 것과 비교한다면 훨씬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볼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나라의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의 독특성-형식을 빌려 왔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지혜의 한계를 알아 보기로 한다.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의 특징에서 논하는 것처럼 지혜문학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극복하고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지적인 탐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 능력이나 지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지혜의 정의일반적으로 지혜를 사물의 도리나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라 정의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인간의 일반적인 지적 활동에서, 지식이 인간적인 사상까지도 포함한 대상에 관하여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성경에서의 지혜성경은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신앙이 없다면 그 지혜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것일지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지혜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단 2:20이하), 완전한 지식(잠 15:3)과 자연적이며(사 28:23) 역사적인(사 31:2) 과정의 통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로 세계를 창조하셨고(시 104:24) 또 백성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신다(시 73편).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지혜는 하나님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그 예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특별히 지혜를 필요로 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기도 하였다(예. 여호수아, 신 34:9; 다윗, 삼하 14:20; 솔로몬, 왕상 3:9이하).이스라엘의 지혜문학구약 성경에서 지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욥기, 잠언, 전도서 이다. 이외 정경 밖에 있는 지혜문학으로는 집회서(E 생각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 능력이나 지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구약성경에 나타난 고대 근동의 지혜성경에 나타난 고대 근동의 지혜를 살펴 보려면 ‘지혜자’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루어 져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는 이방 나라의 지혜자를 지혜자로 기록하지 않고 ‘박수’, ‘박사’, ‘술객’ 등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2: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모든 박사(NIV. Wise men)의 어른을 삼았으며”라는 기록에서 당시 바벨론에서는 ‘박사’를 ‘지혜자’로 부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41:8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라는 기록에서 애굽의 궁정에서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경우 ‘술객과 박사’에게 왕은 자문을 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고대 근동의 나라들은 ‘박사와 술객’이 ‘지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 같다.잠언 30장과 31장 에서는 맛사지역의 지혜를 직접 소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지혜(왕상 4:30; 렘 10:7)를 소개하고 있고, 두로(겔 28:2-7), 애굽(왕상 4:30; 사 19:11-3), 앗수르(사 10:12-13), 바벨론(렘50:35) 등이 성경에 나타난 고대 근동의 지혜에 관한 내용이다.왕상 4: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렘 10:7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자 없음이니이다겔 28:2-7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 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하고 네 지혜와 총가지고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구약성경은 전반적으로 고대 근동의 지혜를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이러한 점은 요셉, 모세, 다니엘의 활동에서 더욱 두드러지제 나타난다. 요셉의 경우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가두었을 때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준 계기로 인하여 창 41장에서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준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지혜를 제공하던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지 못한다(창 41:8).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창 41:16)하여 능히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 대책까지 제시한다. 그 결과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이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된다(창 41:39-41). 모세의 경우는 모세가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할 때, 바로도 애굽의 박사와 술객을 불러 모세와 같은 이적을 행하게 한다(출 7:11, 22; 8:7). 그러나 애굽의 박사나 술객은 그 한계가 있었다(출 8:18). 그리고 출 9:11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 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애굽의 박사와 술객의 패배였다. 다니엘의 결과도 다니엘의 승리였다. 단 1: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라고 느부갓네살은 고백하였다.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지혜자들이 이방 나라들의 지혜자들과 대결에서 승리 하였다는 데 있다.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도우심 이었다(단 1:17). 하나님께서 이들을 도우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함’ 이었다(출 9:14-16; 사 9:11-12).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지혜의 사용 목적도 분명히 알 수가 있다.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출 9:14-16 내가 이번에는 9-15)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 지혜는 어느 특정 시대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구분이 없이 늘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특히 이스라엘의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에 인간들에게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3:6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라는 기록에서 지혜가 인간 창조 때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 4:6에서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지혜의 범위를 하나님의 모든 말씀(토라)으로까지 확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태초부터 지혜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지혜의 한계이스라엘 주변국의 지혜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약성경의 내용들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주변국과의 지혜의 대결의 요소를 띠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승리보다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지혜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우상 혹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그렇다면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혜는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지혜문학-욥기, 잠언, 전도서-의 여러가지 특징 중에서 나타나 있는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한다.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이라 하였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경외(욥 1:1,8; 2:3; 28:28) 하였지만 욥 자신 스스로 고백하기를 사람이 지혜를 땅에서 찾을 수 없으며, 사람은 지혜의 가치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으면서 지혜가 있는 곳과 지혜의 길을 아시한다. 즉 인간의 인지들과 가치평가들에 대한 것에서 인간의 생각을 끌어 내린다.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여기서는 마음과 혀가 현저히 댓귀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곧 무엇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마음의 계획, 준비들의 결심은 인간의 영역인 것이나 그것들을 말로 타당하게 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이다.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예레미야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이 네개의 구절들도 인간의 계획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구절은 보다 인간의 생활 영역에서 인간들이 언제나 의식해야 하는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계획으로부터 그 실현에 이르는 길은 직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실현의 길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한계를 보다 정확히 설명하는 구절은 잠언 21:30-31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서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 같다. 이 구절에서 인간이 싸움에 나갈 마병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본래의 의도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마병을 준비하는데 이미 어떤 결과의 보장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막으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이외에도 잠언에서는 지혜의 한계성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몇 구절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잠언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