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these are not the best of times for smokers. As the global trend of quitting smoking, non smokers insisted their right to breathe clean air and be protected from smoking-related diseases. In our country, smokers banned to light up in some special place like hotel or airplane. And the battle against smoking at workplace is fierce. Many companies offer special rewards to employees who successfully kick the habit, designating their buildings as no-smoking zones. Although many smokers don't consent to this restriction and insist that smoking is regarded as a right, smoking should be banned surely in any public place.
♠ 중국의 음식문화 ♠아직도 중국 음식 하면 가장 먼저 짜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알다시피 짜장면은 중국 음식이 아니다. 짜장면의 출생지는 인천이다. 1883년에 개항한 인천에는 청인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1920년부터 항구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중국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대중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우리 서민들은 신기한 맛과 싼 가격에 놀랐고, 청인들은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짜장면이다.중국은 그들의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요리를 개발, 발전시켜 오늘날 세계적인 요리로 명성을 쌓고 있다. 일반적인 특징은 재료의 선택이 광범위하고 자유로우며, 맛이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조리기구가 간단하고 조리법이 다양하다. 기름을 많이 사용하지만 음식을 불에 볶을 때에는 센 불로 최단시간에 볶아 영양파괴를 줄이는 등 합리적이어서 쉽게 물리지 않는다. 음식의 수분과 기름기가 분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녹말을 많이 사용한다. 또한 조미료와 향신료의 종류가 풍부하다. 풍요롭게 외양이 화려하다.중국의 요리는 셀 수 없이 많아서 보통 몇 가지 계통으로 나눈다. 넓은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 각 지역 요리의 개성은 뚜렷하며, 사람에 따라서 분류되는 계통이 조금씩 다르다. 대표적으로 산동(山東)요리, 사천(四川)요리, 광동(廣東)요리, 양주(楊洲)요리를 꼽으며, 크게 분류할 때는 북경(北京)요리, 상해(上海) 요리, 광동(廣東)요리, 사천(四川) 요리로 나눈다.< 북경요리 >북경요리는 북경이 元·明·淸 3대의 수도였기에 바로 중국의 국가요리라 불리고 있다. 현재 북경요리는 수도인 북경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산동성, 서쪽으로는 태원까지의 요리를 포함한다. 한랭한 기후로 인해 추위에 견디기 위해 기름기를 많이 사용한 고 칼로리 음식이 발달되어 있는데, 강한 화력을 이용한 튀김과 볶음요리가 일품이다. 지리적으로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궁중요리 등 고급요리가 발달했다. 면, 만두와 육류요리가 대표적이며, 궁정요리인 滿漢全度 (만주, 중국, 몽고요리 총집결의 의미)은 적어도 30가지, 많으면 160가지 요리가 나오는 중국요리의 정수이다. 유명 요리로는 북경오리구이, 케찹대하, 해삼조림, 쇠고기 숙주곁들임, 돼지고기 짜장볶음 등이 있다.< 상해요리 >상해요리는 중국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요리로써 남경(南京), 상해(上海), 양주(揚州), 소주(蘇州) 등지의 요리를 총칭한다. 양자강 유역에서 나오는 풍부한 해산물과 미곡, 따뜻한 기후를 바탕으로 이 지방의 특산물인 장유(醬油)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맛이 비교적 담백하고 기름기가 많으며 진하다. 새우, 게 등의 해산물요리와 쌀밥, 소흥주가 유명하며 유명 요리로는 진주완자, 게볶음, 생선찜, 사자두, 삼선볶음국수 등이 있다.< 광동요리 >광동요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중국요리로 광주(廣州), 조주(潮州), 동강(東江) 지방의 요리를 말한다. 16세기이래 외국 선교사와 상인들이 왕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전통요리에 서양 요리법이 결합,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광주요리는 조미료를 중시하며 향기롭고, 개운하고, 부드럽고, 미끈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조주(潮州)요리는 해산물요리에 능하며, 맛이 담백하다.광동요리는 기름을 많이 사용하며 맛이 진하고, 소박한 향토색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전세계 차이나타운에서 먹을 수 있는 요리이며 약간 달짝지근하면서 깔끔한 맛을 내며, 탕수육, 팔보채 등 친숙한 요리가 많다. 또한 중국에서 식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모든 생물을 요리의 원료로 사용한다. 혐오요리(고양이, 파충류 등)의 고향이며, 상어지느러미, 비둘기, 광동집오리 요리 등이 대표적이다. 유명 요리로는 레몬닭고기조림, 새우속 찐만두, 동강두부, 돼지갈비케찹조림, 닭살모듬볶음 등이 있으며 차, 죽, 디엔신(얌차)이라 부르는 스낵 등도 추천할 만 하다.< 사천요리 >사천요리는 내륙요리의 진수로 중국 서부지역의 요리를 대표하며 양자강 상류의 산악지대인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지방의 요리를 말한다.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향신료, 소금절이, 건조시킨 저장식품 발달했다. 조리방법에서는 살짝 볶거나 부치고, 간소(千燒-단술로 맛을 내고 그 국물이 없어질 때까지 약한 불로 조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미료의 사용에서 고춧가루, 후춧가루, 생강 등을 애용하기에 요리 맛은 얼얼하고, 맵고 강한 향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추 등 향신료를 사용해 고온에 익히고 맵고 강한 맛을 내 한국사람이 가장 선호한다. 두부와 돼지고기요리가 유명하며 유명 요리로 삼겹살야채볶음, 마파두부, 두반어, 삼선누릉지탕, 닭고기조림 등이 있다.♠ 식사와 관련된 풍속 ♠우리 나라에서의 반찬을 제외한 국과 밥은 개인별로 나누어 상을 차리는 것과는 달리 중국은 일반적으로 회전이 가능한 원탁에 한가지 요리를 한 접시에 모두 담아 판을 돌려 가며 나누어 먹는 것이 외관상 눈에 띄는 습관의 차이 중의 하나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경우 대개 채소와 육류, 해산물 요리를 조합을 하고 냉채와 더운 음식을 적절히 조정하고 간단히 밥이나 면을 곁들여 주문하면 무난한 편이다.대개의 경우 기호에 따라 백주나 황주 혹은 콜라 등을 시켜 음료에 대신하거나 그냥 차를 요구할 수도 있다. 중국인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술을 주문하여 마시는 (혹 여자의 경우는 야자액이나 기타 음료를 마신다) 모습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일반 가정에서 자기들끼리 식사할 때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단지 외부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체면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중국요리의 대단한 명성과 화려한 외양과는 대조적으로 실제 중국인민들의 식생활은 그리 화려하지도 대단하지도 못하다. 아침에는 대개 만두 (일반적으로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찐빵)나 죽을 먹고, 점심때는 직장 주변 혹은 구내의 식당에서 한끼를 해결하게 되는데, 양철 밥그릇과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길게 줄지어 늘어섰다가 밥 한 그릇씩 받아들고 삼삼오오 길을 걸어가면서 밥을 떠먹는다. 저녁은 대개 각자의 가정에서 요리하여 먹게 되는데 맞벌이가 대부분인 중국 가정에서는 먼저 귀가한 쪽이 식사 준비를 한다.중국인들은 아침, 점심을 간단한 면이나 빵으로 먹는 반면, 저녁은 가족이나 친지들과 어울려 잘 먹는 경향이 있다. 여럿이 모여 식사할 때는 8, 12가지나 16가지 요리가 상에 오르기 마련인데, 찬요리가 먼저 나오며 저렴한 요리부터 시작해 고급요리가 나오므로 먼저 몇 가지 코스인지 알아두고 코스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먹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요리를 내다보니 먹는 것보다 남기는 것이 많고, 또 남는 음식을 가져가는 습관이 있다. 주요리로는 생선찜이나 튀김이 많이 나오는데, 생선이 나오면 끝나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식사를 오랜 시간에 걸쳐 하다보니 여러 가지 놀이가 생겨났는데 「魚頭酒·魚尾酒」 라는 것도 그러하다. 종업원이 주빈에게 생선 머리가 돌아가게 놓으면, 주빈은 생선 머리 주로 생선의 눈을 안주로 술을 한 잔 할 수 있고, 생선의 꼬리가 향한 손님은 꼬리를 맛보며 반잔을 마실 수 있다. 이를 魚頭酒와 魚尾酒라 하는데, 주빈이 생선의 눈을 다른 사람에게 집어주면 그 사람이 魚頭酒를 마실 수 있고, 魚尾酒를 마실 사람이 생선의 꼬리를 접어서 권하고 싶은 사람을 향하게 하면 그 쪽에 앉은 사람이 魚尾酒를 마시게 된다.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식탁에서 지켜야 할 고유의 예절이 있는 법이다. 중국에서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것은 전혀 흉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쌀 자체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찰기가 없을수록 상등품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음식을 덜어 먹을 때는 꼭 공용스푼이나, 젓가락을 사용해서 먼저 개인 접시에 들어놓고 자기 것으로 먹어야 한다. 식당에서는 잊어버리지 않는 한 음식은 차례대로 나오니 독촉하지 말아야 한다.
Ⅰ. 들어가며지금 이순간에도 우리 주위에는 물건들이 넘쳐 난다. 사회 속에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람에 의해 둘러싸여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삶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량 생산으로 풍족을 지나쳐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자, 우리는 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에 힘겨워하고 있다. 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과 차를 소유하기 위해 애쓰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기를 즐긴다.애초에 ' 더 좋은' 이란 비교 우위는 어떻게 설정된 것일까. 상품에 매겨지는 가격이 그 상품의 질을 대변하는가.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노동량에 근거하는 객관적인 상품 가치는 현대에서 이미 설 자리를 잃은 듯이 보인다. 보다 '더 좋은' 것을 향유함으로써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에 의해서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상품들은 대부분 '브랜드'라는 이미지로 무장하고 있다. '브랜드'의 인지도와 그것이 가지는 이미지는 매스미디어에 의존한 광고에 의해 결정되고 대중들은 그것이 지니는 허상을 쫓기에 바쁘다.보드리야르는 에서 현대의 우리들이 무엇을 착각하고 살아가고있는지, 무엇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으며, 어떤 구조로 인해 그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설명하고 있다. 철저하게 기호화된 허상을 쫓는, 소비라는 개념에 기대서.Ⅱ. 소비의 사회1.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누구인가.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이론가. 혹은 본격 하이테크 사회이론가라 불리우는데. 서구에서는 70년대 중반 이후 그 급진적인 주장과 전통적인 사회이론을 거부하는 그 독특한 스타일로 주목을 받아왔다. 프랑스의 저명한 막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제자로서, 그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68년도 저작 를 비롯한 초기 저작들은 네오막스주의의 문제틀 속에서 기호학을 원용하여 현대 소비사회의 일상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① 출생과 성장보드리야르는 1929년 프랑스의 작은 도시 렝스에서 태어났다.집안에서 유일하게물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최초의 저술 에서 근래의 에 이르기까지 그는 30여 년에 걸쳐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의 이론적 작업을 줄곧 꿰고 있는 것은 초기의 문제의식이다.그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되풀이되는 주제는 이미지와 기호에 관한 것이다.그 역시 이미지의 망령에 시달리며 그 망령을 깨뜨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 한다는 뜻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자기를 찾는 사상가’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각도에서 그의 이론적 작업 내용을 조망해야 할 것이다.△1968년 ‘사물의 체계’(배영달 옮김, 백의, 1999)△1970년 ‘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2)△1972년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규헌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3)△1973년 ‘생산의 거울’(배영달 옮김, 백의, 1994)△1976년 ‘상징적 교환과 죽음’(불어본)△1979년 ‘유혹에 대하여’(배영달 옮김, 백의, 1996)△1986년 ‘아메리카’(주은우 옮김, 문예마당, 1995)△1992년 ‘종말의 환영’(1992 불어본)△1994년 ‘완전 범죄’(1994 불어본)△1997년 ‘이타성의 형태들’(1997 불어본)2. 소비의 사회①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보드리야르는 소비개념의 혁신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며, '사물의 소비'를 사용가치와 공존하는 행복, 안락함, 풍부함, 성공, 권위, 현대성 등의 소비로 규정한다. 이러한 착상은 그로 하여금 사물을 '성공의 기호', '행복의 기호' 등과 같이 '기호'로 파악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를 그러한 기호가 난무하는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게 한다. 또한 그는 인간의 욕구를 특정한 사물에 대한 욕구로 해석하지 않고, 차이에 대한 욕구(사회적 의미에 대한 욕망)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방식을 기초로 '사회적 차이화의 논리'가 등장한다. 사회적 차이화의 논리란 '사람들은 사물(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소는 교환 가치에 의해 도전을 받았고 이제 그런 종류의 근대성에의 신앙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믿음과 환상을 공격하려는 총알의 첫 발사가 바로 물신으로 가득 찬 세계의 분석, 인 것이다.새로운 사회적 위계질서의 형성으로 또 다른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대사회를 분석한 보드리야르의 정교한 시각은 이 책을 통해 '사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인간이 자연 생태학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환 가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스스로를 구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각인시킨다.이러한 기호화와 교환 가치에 대한 것에 대한 접근은 마르크스도 일찍이 시도하고 있다."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에는 상점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그 시선을 잃어버린 의안의 뒤에는 세계의 모든 귀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인도의 숄, 미국의 권총, 중국의 자기, 파리의 코르셋, 러시아의 모피, 열대지방의 향료; 그러나 많은 나라들을 거쳐온 이들 물품 모두에는 언제나 빠짐없이 희끄무레한 가격표가 붙어 있으며, 이 가격표에는 영국 파운드, 실링, 펜스와 같은 간단명료한 기호로 표현되는 아라비아숫자가 새겨져 있다. 유통과정에 등장하는 상품의 모습은 그러한 것이다."이렇게 단순한 숫자로 표시되는 교환 가치는 애초의 그 상품이 지닌 특색이나 사용 가치를 압도한다. 상품의 교환가치가 그것을 포장하고 있는 이미지와, 인위적으로 내포된 지능성에 의해 극대화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물품을 파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품에 약간의 회백질(두뇌, 지능)을 첨가하여 팔고자 합니다. 바, 댄스 홀, 그리고 몇 개의 매장, 잡화류, 레코드, 지적인 책. 모든 것들을 조금씩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손님에게 아첨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손님에게 진실로 를 제공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학실은 3층에 있으며, 빠짐없이 모은 레코드와 책에서는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위대한 사조를 찾아 볼 수 있고 전위음악 그리고 현대라는 시대를 해설하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이 물품에 첨가된 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고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평가,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 것인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래서 문학, 사회학, 정치학 등 제반 인문 사회과학 영역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역사학 진영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1996년도 역사학 대회가 한국사의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문제를 다룬 것은 바로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그 뒤로도 일련의 학술 대회에서 지속적으로 토론되었고, 그리고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먼저 여기서 사용되는 "모던(Modern)"이라는 개념 규정에 대해 같이 보기로 하겠다. "모던"이라는 용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일찍이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에 의해 연구된바 있다. 원래 "모던"이라는 단어는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라틴어의 형태로 5세기 말엽 로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당시 이 단어는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당시와 그 이전 이교도였던 로마의 과거를 구분 짓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 후 내용 면에서 여러 가지 변천을 겪어 온 "모던"이라는 용어는 오래된 과거와 결부되는 한 시대의 의식을 거듭 표현해 왔으며, 그것은 바로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의 이행의 결과로서 파악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리처드 월린(Richard Wolin)에 따르면, 이러한 "모던"의 개념이 15-17세기 사이에 "합리화"개념(막스 베버가 설정한 범주)과 결부되어, 오늘날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합리화"는 과학 실험의 표준적 방법, 합리적 화성의 음악, 조직 체계의 관료적 운영, 그리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경제 업무의 수행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그리고 "모던"의 개념은 17-18세기를 풍미했던 계몽 사상의 전통과 밀접라리우스의 이러한 시기 구분은 그후로 점차 확산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중세와 근대의 기점이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항로의 개척(1492)이나 종교개혁(1517)을 전후로 하여 주로 설정되었다.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사학계 내부에서 근대와 현대(Zeitgeschichte, contemporary history)를 구별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근대와 현대 사이의 기점으로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세기말 20세기초의 유럽의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 중에서 19세기말 20세기초의 유럽의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이 주로 근대와 현대사이의 분기점으로 주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다른 한편으로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같은 역사 학자는 근대와 현대라는 표현 대신에, 1870-80년을 기점으로 하여 모던과 포스트 모던(post-modern period)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토인비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주요한 특징으로 사회적 불안, 전쟁과 혁명 등을 들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던이라는 용어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새 시대의 고양된 시간"을 맞이한다는 낙관적이며 계시론 적인 의미를 지녔다가, 건축 분야에서 이론적으로 정립되면서 국제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인문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된 것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모더니티(modernity)와 포스트 모더니티(post-modernity) 사이의 철학적 논의가 활성화된 것 1980년 9월 하버마스(Habermas)가 "아도르노상" 수상 연설에서 료타르 등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부터였다.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연설에서, 모더니티라는 담화(談話)가 결코 낡은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즉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계몽 사상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는 합리성, 유토피아성, 그리고 낙관성 등이 계속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료타르는 하버마스의 이다.
Anybody cannot imagine how horrible my experiences in the rain were. I had never seen to fall so much rain and I had never felt so horrible because of rain at other times. I spent 4 hours to get a bus or train to go home in the rain. An umbrella is no use before a destructive typhoon , there is no way to get away from that. This was happened when I made a trip to Gangrung last August. I went there with one of my friends to see the blue sea. We knew that at that time of years a typhoon struck our land, but the track of typhoon predicted by weather forecast was far from Gangrung.
1. 연암(燕岩) 박지원(樸趾源)연암 박지원은 1737년 2월 5일 한양의 반송방 야동에서 반남 박씨의 사유의 2남 2녀 중에서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자는 중미(仲美)요, 호는 연암이고 또 별호를 미재(美齋)니 총계(叢桂)니 계산(桂山)으로도 썼다. 연암의 집은 대대로 벼슬이 높던 명문대가로 선조들이 대대로 대사헌, 판서, 참판 등의 관직을 지냈다 한다. 박지원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 형 내외 밑에서 자랐으며 5세부터는 할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해 가자 따라 다니면서 엄한 훈도와 초학 공부를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1805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박지원의 작가적 생애를 살펴보면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년의 연암은 진,한, 당,송의 고문을 익히다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던 중 연행을 다녀온 중년에 이르러서는 우언(寓言)과 해소(諧笑)로 된 유의적인 작품들을 창작했으며, 관직에 있던 만년에는 다시금 작풍(作風)을 달리 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는 연암의 중기 문학에 속하는 작품으로. 초기 문학의 성과들이 에 합류하는 한편, 로부터 만년의 문학적 성과들이 파생되어 나간 과정이 곧 연암의 작가적 생애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박지원의 사상1) 실학 사상실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분명 근대지향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의 개혁론으로서 기존의 주자학적 사상경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학파에 따라 그 경향을 조금씩 달리하였는데, 대표적인 두 학파는 남인 계열의 성호학파(星湖學派 : 경제치용학파)와 노론 계열의 북학파(北學派 : 이용후생학파)였다. 성호학파는 이익으로부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데 경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주자학을 비판하는 등 비교적 경학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물이 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가 만물을 관통하는 원리적인 존재라는 사실 또한 강조한다. 박지원의 성리학에 관한 연구는 많은 내용이 전하고 있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눈여겨볼 만한 특징적인 면이 나타난다. 이기 심성의 개념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가 단순화하되었고, 문제의식과 논의의 내용에서도 종래의 것과 조금은 차이가 있었다. 이는 그가 주자학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지는 못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인식체계를 밑받침하는 논리 자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새로운 사상이 아직 성리학으로 무장한 주자학을 완전히 대체할 만큼 체계화되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학문풍토에 대해 비판하며 위치를 정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3) 문학사상박지원은 그 어느 분야보다도 문학에서 두드러진 면모를 보였다. 그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도 주로 문학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는 당시 문학가들의 창작경향을 벗어나 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마침내 문체반정이라는 파동을 야기하기도 하였다.그는 매우 적극적인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 전체를 이기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할 때, 언어란 바로 그 이기의 모습과 소리라고 보았다. 그는 언어가 대상들 상호간을 매개하여 그것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도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이야말로 그의 문학중시 태도, 나아가 그의 문학관 전체를 결정하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고, 언어로 구성된 문학은 세계인식이라는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이럴 경우 문학은 세계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중요한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을 쓰는 이는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그려내야만 참다운 글을 쓸 수 있다 일이 막다른 데에 이르면 통하게 된다고 하면서, 어떤 제도를 고집하거나 경장하는 것은 오직 그때에 맞기만 하면 그 뜻은 한 가지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충분할 정도로 적극적인 표현은 아닐지라도, 일단 사회제도의 개혁가능성을 인정하고 문맥상에서 수구보다는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사회개혁론은 신분제와 산업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먼저 신분제와 관련한 견해를 살펴보자면, 그의 저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보다도 양반에 관한 언급들이다. 그는 남긴 글의 곳곳에서 양반의 부당한 신분적 지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모순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그의 풍자와 비판은 당시 사회발전과 함께 드러나고 있던 신분제의 문제점을 철저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용적인 학문, 즉 실학이란 농사의 이치를 밝히고 상업을 일으키며 수공업을 장려하는 것이며, 후대에 이르러 농 공 상인의 생업을 잃게 된 것은 바로 선비들이 실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새로운 방법과 우수한 기술의 습득을 위해서라면 비록 그것들이 오랑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동료들과 공유한 '북학론'이다. 그가 양반 무제 못지 않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서얼차별 문제였다. 그가 절친하게 교유하던 사람들 중에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서얼출신의 인재가 많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서얼차별 폐지의 논거를 사민 중에서 사와 농공상 사이의 신분적 구별을 전제한 상태에서 양반 내부의 차별만을 부정하여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서얼차별제도가 실제로 문제된 것은 양반사회 내부에서였기 때문이겠지만, 일단 그의 논의가 양반의 특수한 신분적 지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그에게서 신분제에 대한 비판은 신분제 자체의 부정이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의 학문은 실로 농 공 상의 이치를 겸하고, 그 세가지 는다.3. (熱河日記)1) 개관는 박지원이 44세 된던 1780년에 청 황제의 칠순 잔치에 가는 길에 동행하여 중원에 들어가던 도중 열하와 북경에 이르러 문인들과 사귀고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거기서 듣고 본 문물, 제도를 본국에 돌아와 그대로 엮은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는 약 5개월 동안의 체험을 적은 일기 형식의 견문기와, 중국 지식인들과의 필담 등으로 엮어진 방대한 분량의 여행기라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이를 통해 그가 직접 목도한 사실들을 진실되게 나타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국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하는 실생활, 즉 벽돌, 수레 등의 편리한 제도에서부터 정치, 경제, 병사,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새로운 문물을 서술하여 그곳의 실학 사상을 일깨우고 있다.2) 저술과정는 그 방대한 분량이 말해 주듯이 단시일에 저술된 것이 아님은 물론, 일단 탈고된 이후에도 작자에 의해 여러차례 수정,보완 되었을 것이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저술에 착수한 연암이 이를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일부가 유출되어 전사될 만큼 당시 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지대했다고 한다. 그 중 보수적인 문인들은 의 내용적, 사상적 측면을 거세게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반응과 추세에 직면하여 박지원은 수차례 수정을 가하였고, 정본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의 저술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은 1780년 중국 여행 당시 현지에서의 저술이다. 이 시기에는 우선 여행의 경위를 시간에 다라 적은 비망록이나, 중국 문인들이나 지식인들과 나눈 필담의 초고, 각종 문건이나 서적류로부터의 발췌, 그때그때의 견문을 적은 단편적인 기록들과 한시 등의 창작들이 이에 포함된다. 귀국한 이후 박지원은 중국 현지에서 기록하고 창작한 많은 자료와 작품들을 토대로 정리, 편집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이 저술로 인해 연암의 작가적 명성이 알려질 때쯤, 서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중국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이들 이야기와 골동품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 중에서 머물 곳을 마련해 주거나 음식을 대접해 주면서 필담을 나눈 사람들과의 대화를 그대로 담고 있다. 여러 가지 골동품과 문방사우를 고르는 데 있어 진품을 알아보는 것에 대한 문답도 있고, 박지원의 글과 그림을 보고 그곳 사람들이 감탄하여 서로 청하는 모습도 보인다. 사람을 사귀는 과정에서 박지원이 청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청나라 사람들이 사신으로 갔던 조선의 문인들과 , 그들이 지녔던 문화적 소양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 신광녕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병참지(兵站地)를 달리며 겪은 9일간의 기록이다. 수레와 누각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용후생적인 시각들이 돋보인다. 여기서 박지원은 성인이 를 지을 때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혔던 것을 분하게 여겨 본받을 만한 오랑캐의 좋은 점마저 물리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에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풍속부터 개혁시켜야 한다. 라고 하는 등 매우 진보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또 "기왓 조각이나 똥무더기가 모두 장관이지, 꼭 성지, 궁실, 누대, 광막한 들판이라든지 변환하는 연수라든지, 그런 것들만 장관이 아니다" 라며 청나라 문물의 사소한 것까지도 의미를 부여하여 주의 깊게 관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수레에 대한 관심인 것 같다. 박지원은 수레의 모양새를 잘 관찰하고, 우리나라에서 수레가 이용되고 있지 못한 이유와 그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5) 문학적 특징① 문체의 다양성박지원은 에서 자신의 여행 체험과 청조 중국의 실정을 보다 생생히 전달하고자, 정통 고문체와 패관 소설체를 망라한 다채로운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대화 장면에서의 백화체는 소설에서 익히 볼 수 있는 표현들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어 문인으로서의 박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