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CI OOO 팀 직무 소개서 2018.03 OOO 실 OOO 팀Content Vision Keyword 중장기 계획 및 전략 조직 현황 직무 소개 직무 분장표 2Ⅰ. Vision Keyword OOOOO 팀 ■ OOO 팀 Vision ■ 2018 년 Keyword 변화에 열정을 더해 THE 좋은 회사를 만든다 Smart 깔끔하게 , 맵시 좋게 , 고급스럽게 , 똑똑하게 , 활기차 게 작성 Tip! 팀의 Vision 과 Keyword 를 작성해주세요 . 팀명 기재 작성 예시 작성 예시 3Ⅱ. 중장기 계획 및 전략 OOOO : OOOO : ■ OOO 팀 3 년 계획 OOOO : OOOO : 주요 이슈 - 주요 이슈 - OOOOO 팀 작성 Tip! 팀의 3 년 중장기 계획을 간략히 작성해주세요 . 4Ⅲ . 조직 현황 OOOOO 팀 ■ 팀 소개 팀 소개를 10 줄 내외로 작성 부탁 드립니다 . ( 팀의 목표 , 하고 있는 일 , 팀의 특징 및 성향 등 ) 5작성 Tip! Ⅲ . 조직 현황 Team leader OOO OO 파트 OOO OO 파트 OOO OO 파트 OOO OO 파트 OOO OO 파트 /HR OOO 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 ___________________ OOOOO Team ■ OOOOO 팀 조직도 OOOOO 팀 팀원의 사진과 대표 직무 / 직급 / 이름을 기재 ( 사진 Size : 가로 5.5 × 세로 4.4) 팀 영문명 기재 팀장 밑에 팀원이 5 명씩 정렬되도록 하되 , 인원이 많을 경우 다음장으로 이어서 나열해주세요 . 팀원 사진 직무 조직도 ( 간단히 ) 팀 조직도 작성 팀원 사진 팀원 사진 팀원 사진 팀원 사진 팀원 사진 6Ⅳ. 직무 소개 ■ OO 담당자의 역할 예산 관리 예산 편성 / 집행 월별 실적 관리 사규 관리 규정 재 / 개정 개선 개선 제안 유지 관리 OOOOO 팀 작성 Tip! 팀의 대표 직무를 분류 (1 직무당 1page) 하여 , 한 장에 보기 쉽도록 , 직무 분장표를 요약하여 기재 해주세요 . 작성 예시 7Ⅴ. 직무 분장표 ■ 직무 분장표 직무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Level 적정직급 업무주기 비고 OOOOO 팀 작성 Tip! 팀원들의 개인별 직무 ( 파트 ) 를 취합하여 대 / 중 / 소 분류 및 업무 레벨 및 주기 등 표기 8{nameOfApplication=Show}
달천댐 건설, 그 이후 나타난 주민간의 갈등구조1. 개괄정리사회자 : 임성재찬 성 : 유성열 (달천댐 수몰주민대책위원장)이상영 (수몰예정지 주민이 대표)반 대 : 김길수 (달천댐 반대대책위원)박일선 (충주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일 시 : 2004년 10월 28일 오후 3시장 소 : 서원대학교 미래창조관 5층 세미나실주 제 : 달천댐 건설, 그 이후 나타난 주민간의 갈등구조1) 달천댐에 대한 정부정책과 태도 : 정부의 약속번복행위, 주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2) 달천댐 반대대책 위원회의 주장 : 달천댐 건설은 충청북도민에게 백해무익하다.3) 수몰주민 대책위원들의 주장 :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산업의 발달4) 지역 주민간의 갈등구조 : 적이 된 이웃사촌5)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2. 각 사안별 쟁점1) 달천댐에 대한 정부정책과 태도① 달천댐 안 짓겠다고 약속하더니…2002년 9월24일 건설교통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정부안으로 확정 발표한 ‘국회제출 2003년도 건교부 소관예산(안)’에 충주 달천댐 기본설계비 27억원이 포함됐다. 이는 건교부가 불과 1년 만에 충북 도는 물론 관련단체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달천댐을 재추진한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지역주민을 무시한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건교부는 이에 앞서 1999년 11월10일자로 충주환경운동연합에 ‘달천댐건설 질의에 대한 회신’에서 ‘현재 댐 건설에 관한 구체적 계획이 없으며 댐 건설 계획단계부터 지역주민과 해당 지자체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댐 건설 여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다.또 2001년 8월13일자로 보낸 건교부 장관 명의의 ‘연풍 및 달천댐에 대한 질의 회신’에서도 ‘댐 건설 장기계획 수립을 위해 현재 12개의 댐 후보지를 선정해 해당 지자체와 협의 중에 있으나 달천댐은 협의 대상 댐 후보지에서 제외됐으며, 이번 댐 건설 장기계획에도 포함시키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오장섭 건교부 장관은 환경운동연합과 주민대표들 앞에서 이와 유사한 약속을 한 적도 있다.사실 충북은 도 불구하고 수도권이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충주댐과 소양강댐 때문이었다. 두 댐이 없었다면 수도권은상당한 수해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수자원공사는 이들 댐으로 인해 막대한 수익금을 얻고 있지만 댐 피해지역에 돌아오는 돈은 턱없이 적다. 지난해 충주댐 수익금 807억원 중 댐 피해지역(충주 제천 단양)에 환원된 돈은 불과 18억원에 불과하다.강 하류에 형성된 거대 도시의 유지를 위해 상류지역에 댐을 건설해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가령 수해방지로 인한 이익을 계량화해 ‘수해 방지세’를 신설하고 다목적댐의 전기·물 판매 수익금 일체를 피해지역으로 환수해야 한다고 본다.정부는 댐 건설을 말하기 전 현실과 동떨어진 관련법을 대폭 개정하고 댐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댐 건설 추진은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살 게 분명하다.충북은 충주댐과 대청댐으로 북부와 남부지역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만약 달천댐 건설이 예정대로 추진된다면 중부지역의 아름다운 산천마저 수몰될 것이 자명하다. 건교부는 지역주민들에게 ‘댐 건설 장기계획’에서 밝힌 달천댐 제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② 정부의 약속번복행위, 주민 우롱처사정부는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계속 번복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우롱했다. 2001년 8월 달에 달천댐이 댐건설 사업에서 제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년 뒤, 국회제출 2003년도 건교부 소관예산에 충주 달천댐 기본설계비 27억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건설교통부가 충북 충주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철회했던 달천댐 건설계획을 재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민들과 환경연합운동 등 시민단체들은 크게 반발하였다.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건설교통부는 또다시, 당초 2003년 예산안에서 달천댐 기본 설계비를 완전 삭제하고 그 돈을 댐 기초조사비로 항복 변경하였다. 2001년 8월 충주시민들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여 달천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뒤 정부의 정책이 언제 또다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의 땅값은 계속하락하고, 삶의 궁지로 몰린 지역주민들은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지역 주민들 간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박일선 충주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2) 달천댐 반대대책 위원회의 주장① '달천댐건설반대충북도민회의' 및 '공동의견서'발표-. 달천댐 건설은 충청북도민에게 백해무익하다.달천은 현재 괴산군민, 충주시민들은 양질의 상수원을 잃게 되며, 자연경관이 수몰되고 생태계(천연기념물 330호 수달이 서식지)가 파괴될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충주댐과 괴산댐이 인접하므로서 안개일수 증가 및 일조시간 감소 등 심각한 기후변화가 초래되어 주변생태계 및 농경피해는 가중될 것이다. 반면 지역사회에 돌아오는 이익은 전무할 것이다.-. 용수공급, 홍수조절 등 하류지역에 대한 기여도 미흡하다.달천이 건설될 경우 부영양화 및 녹조현상이 발생할 것이며 현재에 비해 현저히 수질이 악화된 용수를 공급하게 될 것이며, 오히려 기상이변으로 강우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수위조절 실패로 인한 하류지역의 홍수발생 우려가 커질수 있다.-. 댐건설 주장에 앞서 달천에 대한 종합적 가치조사 및 관리전략 수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회는 2003년 정부예산(안) 중 달천댐 관련예산을 전액 삭제하고, 정부는 관련 부처 및 담 당자에 대한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댐개발에 의한 공급위주 물관리정책을 전환하고, 댐건설장기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② 달천댐 건설, 백지화 요구달래강은 충북의 대표적인 강이다. 달래강이 수몰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류에 예정되었던 달천댐 관련예산이 지난해 말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으나 도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힘입어 국회 심의과정에서 삭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교통부 관계자들 재추진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중류의 괴산댐 재개발 역시 도민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역의 이익과 의사와는 무관하게 '댐건설장기계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강행할 경우 강력 대응할 것임을 밝힌다. 더불어 우리고장의 환경과 지역발전전략에 치명적인 장애로 작용할 이 문제에 대하여 충청북도와 해당 지방자치단체들이 주도적으로 대응 할 것을 촉구한다.첫째, 도민 의사와 이익과 무관하게 추진되고 있는 달천댐 개발 및 괴산댐 재개발은 전면 백지화 되어야 한다.둘째, 충청북도와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댐 개발로부터 달래강을 지켜내기 위하여, 달래강 가치조사 및 보전대책' 마련 등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 할 것을 촉구한다.3) 수몰주민 대책위원들의 주장① 우리는 달천댐 건설을 꼭 실현시킬 것이다!2003년 달천댐 예산이 통과되자, 건설교통부는 주민들과의 협상에 나섰다. 많은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주민들로 하여금 그 지역을 순순히 떠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그것에 찬성했고, 달천댐 건설에도 찬성의 의사를 보였다. 정부는 달천댐의 효율성에대해 지역주민들에게 홍보를 했고,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의 민심이 홍보에 동요되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터진 예산삭제 소식! 그것은 지역주민들에게 충격이었다. 땅값은 계속 떨어지고, 조용하던 농촌마을은 찬성과 반대파로 나뉘어져 지역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그래서 불정면 주민들로 구성된 달천댐 수몰 예정지 주민협의회는 ‘달천댐 건설 추진위원회(회장 박용한)’를 구성 하여 댐 조기 건설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불정ㆍ감물ㆍ장연면 등 수몰 예정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댐 조기 건설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아 이를 건교부에 전달하고 지방자치단체,정당 등을 방문하는 등 댐 건설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불정면 등이 댐건설 수몰지로 알려진 뒤 지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어 주민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며 ‘달천댐 건설이 백지화 될 수 없다면 국가시책에 따라 조속히 댐을 건설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2004년 현재, 달천댐 기초공사 예산금은 완전 삭제되었고 ‘달천댐 건설 추진위원회’는 정부의 입장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이 하고 있는 노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언제 또다시 정이버 블로그에서...위에 사진은 어느 네티즌이 올려놓은 충주댐의 항공사진이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댐의 모습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에 아주 충분하다. 충주댐과 달천댐이 만들어 진다면 암수노니는 쌍용의 모습이 될 것이란 기대감과 함께 달천댐 건설을 소망하고 있다. ‘달천댐 건설 추진위원회’의 계획도 관광산업 개발이란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침체되어있는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고,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충주댐의 관광자원으로 인해 충주 시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수익금은 엄청난 것이다. 이것이 지역사회로 다시 환원되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있지만, 댐을 이용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댐 활성화로 인해서 얻어지는 수익금이 지역사회에 다시 전달만 된다면 달천댐은 지역도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달천댐 건설 추진위원회’에서는 “괴산군이 타 시군에 비해 경제적으로 추락하고 있고, 산업체 유치 등 국책 사업하나 유치 못하고 있으며,단체장의 그릇된 편견과 아집으로 독선적 군정을 해 총체적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3. 양측주장의 문제점 정리1) 반대 의견 쪽의 문제점‘사회적 합의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대쪽 의견 에서는 합의 보다는 무조건 안 된다는 생각만을 고집하고 있어서 많은 아쉬움이 생긴다. 달천댐이 빨리 들어서기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고뇌와 심정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들을 매국노 취급하는 태도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갈등의 실마리는 대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의 입장만 옳다고 주장하면 합의는 절대로 이루어 질수가 없다.2) 찬성 의견 쪽의 문제점지역의 경제발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결론이 나온다. 자신들의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고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공익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기는 것은 좋지 않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좀더 한다.
1) 초기 영화 활동: 1896~1921▷1896: 중국 최초 영화 상영: 갈렌 보까 (스페인인)-초기에 영화는 이국적인 주제와 대중 오락물로 취급됨-중국 영화 발전 초기에 외국인 역할이 컸음을 보여줌▷1905: 중국 최초의 영화 제작- Ren Fengtai : 중국 최초의 영화 배급자, 제작자, 감독-서구 매체와 전통 중국 연극을 접목하려는 초기 영화의 시도2) 1920년대 영화에 대한 열광-유럽에서 발생한 1차 대전의 파괴적 결과는 상대적으로 1920년대 중국 국가경제에 숨돌릴 여유를 제공, 서구 열강의 중국에 대한 고삐가 느슨해지고 중국 내 유럽영화 수입 감소.▷검열의 시작 - 소규모 스튜디오와의 전면전을 벌이는 한편, 메이저사들은 ‘중국에서의 외국영화와의 싸움을 위해’ 라는 명분아래 국민당 정권에게 영화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 요구.3) 난징의 10년: 1927~ 1937▷1930년대영화산업의상황-영화매체를 새로운 중국건설의 도구로 간주하고,국가개입본격화 - 일본 침략에 의한 국민적 위기의식 고조가 영화 산업을 형성시킴▷당시 대표적인 3개 스튜디오①1922(명성영화사) 설립: 중국영화의 아버지인 ‘정정추’ 의 노선은 좌파영화인들의 입지를 제공②1930(연화영화사)설립: 국민당 난징 정부와의 유착. 예술을 고양하고 문화를 진흥하며 대중을 계몽하여 중국영화산업을 타락과 쇠퇴로부터 건져올리자는 취지는 난징정부의 문화정책과 거의 일치.③1925(티아니) : ‘진짜’ 중국영화를 만든다는 명분아래 고전문학, 신화나 민담 등에서 얻은 소재로 영화 제작.-대중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다루는 영화를 요구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제작된 많은 심각한 영화들은 대중의 바뀐 기호에 부합하려는 스튜디오들의 노력으로 좌파영화가 출현함.▶좌파영화-30년대 KMT에 비판적인 진영의 영화를 통칭①토착 영화인의 휴머니즘 영화(1920년대 배테랑 영화인, 정경추 등....)②정치 강령 지닌 지하공산당원의 영화, 국민당 정권을 깎아 내리는 파괴적 성격의 영화③좌파이념에 고무되어 좌파와 연합한 세력의영화(채초생...).좌파영화에 진정 의미있는공헌▶연성영화- 영화의 주된 기능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지 관객에게 설교하고 사상을 강 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의 영화.- 좌파영화의 과잉에 따른 반동으로 1920년대 오락영화 유산의 부활을 주장.예술적 정체성과 높은 숙련도 강조하여 중국영화의 질적 수준 향상에 대해 관심▶유성영화 - 중국영화계는 할리우드 영화에 지배되어 온 국내 시장에서 시장 점유를 높일 수 있는 황금같은 기회라고 파악. 유성영화의 언어장벽은 할리우드 영화에게는 중대한 걸림돌일 것이기 때문. 그럼에도 영화관 대부분은 기술적으로 유성영화 상영 역량 부족.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무성영화 대량 생산→무성영화는 30년대 후반 이후 점점 퇴조4) 전쟁중의 영화: 1937~1945-8년간의 전쟁기 영화제작 흐름은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으로 양분.▷비점령지역 - 전시의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홍콩에서 주로 이뤄짐- 홍콩영화인들은 1941년 홍콩이 일본에 점령되기 전까지 많은 애국영화 제작▷점령지역 - 상해와 Changchun 두 곳을 중심으로 이뤄짐5) 전후의 부흥 : 1945~1949- 국민당의 패배로 끝난 4년 간의 전쟁기간 동안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은 영화라는 근대적매체에 대한 통제권 싸움으로 이어짐.- 이 시기 정치불안은 영화산업의 성장잠재력을 제한했지만 중국영화는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이전 시대를 뛰어넘는 역량을 축적.6) 중국 인민 공화국(PRC) 의 영화: 1949~1966-1950년경: 할리우드 영화 소멸→그 공백은 동구와 소비에트 영화(20‘S)로 채움▷백화시대 :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모택동이 자신의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허용한 시기. 사건 이후 경색된 영화계는 백화시대에 당노선에서 벗어난 영화 제작을 할 수 있게 됨7) 문화 대혁명: 1966~1976-1966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서곡은 1963년 12월 모택동의 연설에서 시작-모택동의 죽음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10년간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을 할퀴고 다님
이순신, 그분과의 만남.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몰려왔다. 책의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한참동안이나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나의 모든 감정을 고요한 바다로 인도하듯 온화하고 선한 빛을 띄고있었다. 그것이 바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장군의 본모습이었다.에서 이순신은 더 이상 전기문에서나 볼 수 있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웅의 모습 대신 혼란한 세상과 전쟁, 그리고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보통사람과 다를 것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순신이 사람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순신의 껍데기만을 보아왔고 실질적으로 그를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그런 낡은 관념들을 모조리 깨어 부쉈다. 단순히 이순신의 업적만을 언급해왔던 그 동안의 위인전과는 달리 역사 속의 한 개인으로서 이순신의 내면적 모습과 고뇌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다.장군 이순신은 눈앞에 있는 적만을 향해 칼을 겨누지 않았다. 이 세상 전체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의 의지가 컸던 만큼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에 항상 지쳐있었다. 그는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런 이순신의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인간’ 이순신. 오로지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칼 하나만 있으면 뒤엉킨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칼로써도 어찌할 수 없는 희망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칼의 노래’라는 이 책의 제목이 진짜로 뜻하는 것은 ‘칼의 울음’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현실에서 빠져 나오고자 발버둥치는 한 인간으로서 그는 눈물을 흘린 것일지도 모른다.이 책을 읽는 동안 이순신이 어느 전투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고, 어떤 전투법을 사용하였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죽은 자들에게서 풍기는 날 비린내와는 다른, 그가 느끼는 삶에 대한 날 비린내만이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이순신은 항시 죽음을 원했다. 용맹한 장수를 원하는 임금, 하지만 모순되게도 용맹한 장수를 죽이고자 했던 무의미한 임금의 칼 대신에 적의 칼을 원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순신은 전쟁에서 패해도 죽을 것이고 전쟁에서 이겨도 죽을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부분에서 용맹스러움으로 치장한 이순신의 모습이 아닌 이런 나약하고 고뇌에 찬 모습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긴장, 두려움의 감정이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로서 이순신을 대했던 동안에 멀어졌던 거리감을 좁혀주는 듯 했다.또한, 전쟁의 상황을 지배자의 눈을 통해서가 아닌, 백성들의 눈으로 보여주는 것도 거리감을 좁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비록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바라보는 백성들의 삶이지만 이순신 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의 한 사람이고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그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순신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과 같은 절박한 상황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사망자는 더욱 늘어가고... 이런 표현들이 어쩌면 피바다 속을 돌파해 가는 이순신의 무인으로써의 고독함을 서러움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것 같다.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 속의 영웅적인 이순신의 모습보다는 고독함과 두려움을 참아내며 울음을 삼키는 외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과 함께 하게 된다. 나라를 구해내는 용감한 무인으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만날 기회가 흔치 않을 것이다. 영웅으로서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동료로서 눈 높이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뜻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을 단 한순간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소설 속에서 이순신이 어머니의 냄새를 느꼈듯이 나도 이순신의 어머니의 냄새를 느꼈고 그의 아들의 입에서 나는 쌀 냄새도, 보리차 냄새도 맡았다. 이렇게 소설 속 인물과 같은 느낌을 느끼고, 같은 냄새를 맡는 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가슴 설레는 일인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칼의 노래’의 오묘한 마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만영화사* 대만 영화 약사- 대만 영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극단적인 자기모순’으로 정의 가능하다.대만 뉴웨이브를 통해 세계영화계가 주목하는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영화계의 저변확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6년만에 막을 내렸고, 한때 아시아 대표 영화강국이 되는 듯 했으나 현재는 가장 낙후한 영화산업을 보유한 채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 그럼에도 영화미학적 측면에서 ‘허우샤오시엔’으로 대표되는 뉴웨이브 감독들은 짧은 기간동안 비교적 완결된 동양적 영화문법을 창조했다는 찬사를 받음.- 대만 영화의 역사 -1) 초창기 : 1091- 1945-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와 언어, 기타 요소들이 복잡하게 섞인 양상을 보임.초기의 대만 영화들은 모든 영화에 일본어 자막이 더빙되어 상영되었고, 대만에 일본 문화를 전파할 목적으로 문화성 산하에 순회영화팀이 구성되었다. 영화를 제작해도, 주요한 기술적 측면은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2) 파괴와 부활 : 1945~1959- 1945~1949 : 4년간은 대만 역사상 가장 참담한 기간. 이 기간에는 몇 개의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편의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음.- 1950~1958 : 1950년대 들어서 국민당 소속의 중앙전영공사 CMPC의 영화 제작 시작. 1955년부터 대만어로 제작된 영화가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 56~58년까지 총 141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57년에는 첫 대만어 영화제가 타이페이에서 개최됨.3) 소생과 쇠퇴 : 1960~1970년대- 1960년대는 대만 영화사의 황금기이다.- 1966~1977년 : 아시아 3위의 영화 제작국가가 되고, 연가 110편이 넘는 제작편수. 아시아 해외시장을 석권하기 시작. 1967년 전국 극장 수 734개.- “건설적 사실주의” : 정부가 후원하는 CMPC가 1963년에 부활한 후 새로운 운영자인 kung hung은 영화제작의 기준으로 건설적 사실주의 제시.- 근로자의 삶에 대해 숙고하고 동시에 대만의 경저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사회적 문제들에 주로 관심을 가진 이대리 네오리얼리즘과 달리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이들을 영화 속에서 추앙함.- 1970년대 :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로 인해 대만의 중요한 시기창 카이섹이 사망하고, 대만의 일본과 외교관계가 단절된다. 미국과의 수교도 단절됨.- 급속한 경제성장 : 급속한 경제 성장에 동반한 영화산업의 팽창 & 정부의 지원, 70년대의 상황은 독립적, 개인적인 영화사에 존립 기회를 제공함. TV의 잠식에도 불구하고 전체 관객수는 증가함.4) 뉴웨이브 : 1980년대- 대만 영화산업은 80년대 가장 정신분열증적인 기간을 맞이하게 되고, 고질적인 문제들이 악화되지만, 대만뉴웨이브(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는 국제적인 찬사를 얻음. 그러나 단기적으로 영화 산업의 성장을 도운 대만 근대화는 이제 그것의 죽음을 재촉하게 됨.- 홍콩영화의 유입 : 대만에 대한 홍콩여화의 영향력은 즉각적이었고 81년 시작된 금마장 영화상의 대부분을 휩쓸고 흥행 순위까지 지배함. 위기를 감지한 당국이 대만 영화 시스템의 변화를 요청한다. “대만영화는 전문적, 국제적, 예술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