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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광복군의 활동과 평가(이청천의 생애) 평가A좋아요
    한국민족운동사 11월 19일한국광복군의 활동과 평가# 별첨 : 이청천 장군의 생애와 업적경제학부 2001280029 김희성목 차1. 머리말2.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창설과 임무3. 군사활동① 초모활동(招募活動)②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조선의용대의 편입③ 교육과 훈련, 선전활동④ 연합군과의 공동작전4. 해방 후 활동5. 요약 및 평가# 별첨. 이청천 장군의 생애와 업적① 해방 전 무장투쟁② 해방 후 대동청년단에서의 활동# 참고문헌1. 머리말중일전쟁(中日戰爭)이 점차 격화되어 가고 있을 때인 1939년 전후의 국제정세는 독?이 군사동맹에 이어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도 쌍방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등 날로 그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와 주변정세의 변화는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하는 군사조직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였기 때문에 김구를 창설위원장,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조직되었다. 해방을 위해서는 일본과 결전을 벌이는 길이 최선이며, 국제 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광복군의 창설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광복군의 창설과정과 그 임무, 군사활동, 해방 후 활동과 귀국 등에 대해 시대 순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고자 한다.2.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임무무장부대의 창립은 1936년 한국광복군 창설계획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36년 11월의 정무보고서에는 “우리의 광복을 완성하는 데는 적과 더불어 최후의 일전을 결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며 또 현재 국제정세는 일본과 더불어 전쟁을 개시할 시기가 임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군사에 대한 시설을 급절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임시정부는 구체적인 군사계획 수립을 위해 군무부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을 비롯하여 중국 측 인사와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곧 한국광복군창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이 수행할 임무를 광복군 대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광복군의 임무를 교육하고 선전하기 위해 광복군내에 한국독립당의 특별당부(特別黨部)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특별당부는 광복군 안에 설치된 한국독립당의 조직이었고, 그 책임자는 각 부대 지휘관이 겸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광복군 대원들에게 한국독립당의 당책과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교육 선전하면서, 광복군의 임무를 주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광복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중 하나가 파괴활동이었다. 다시 파괴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고, 그 중 하나가 일제의 모든 침략기구를 박멸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이는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고, 광복군에게 이를 수행할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내부의 봉건세력·반혁명세력·봉건유습 등을 타파하는 것이 광복군의 임무였다. 전자는 일제를 상대로 한 민족혁명인 것이고, 후자는 민족내부를 대상으로 한 사회혁명이었다. 광복군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혁명군(革命軍)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광복군이 수행해야 할 두 번째 임무는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목표는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방안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에 의해 마련되고 있었다.한독당의 민족국가 건설 방안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방안은 1941년 11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의 건국강령(建國綱領)으로 공포되었다. 광복군은 이러한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민족국가 건설 방안을 추진해나갈 임무를 부여받대)(이하 전지공작대로 약칭)가 먼저 광복군에 편입되었다.전지공작대가 결성 후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여 태향산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할 무렵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군하였고, 전지공작대에 대해 교섭공작을 전개하였다. 임정은 대장 나월환을 중경으로 불러 전지공작대의 포섭을 진행하였고, 전지공작대는 혁명 역량결집을 이유로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였다.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그 배경의 하나는 대원들의 화북진출 사건이었다. 대원들 사이에서 조선의용대의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상당수가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조선의용대를 지원하고 있던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해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이를 계기로 중국 측에서는 한국독립운동 무장 세력들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하였다. 1941년 10월 장개석이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케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영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로써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었고, 이들 사이에서는 군사통일이 추진되었다.조선의용대 측에서는 두 무장조직을 합병하여 조선민족혁명군을 편성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1942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선임하였다. 이렇게 군사통일문제가 양측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하자 중국 군사위원회가 직접 명령을 내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처음에 한국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지대로 편제되었다. 이청천 총사령, 이범석 참모장 휘하 총사령부를 설립하고 이후 부대편제를 갖추었다. 제1, 제2, 제3지대는 총사령부 요인과 군사특파단 인원을 중심으로 편성하였고 제5지대는 전지공작대가 편입하여 성립되었다. 무정부주의 계열의 전지공작대에 이어 좌파 계열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일 기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기념 선언문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방송을 통하여 전선하였다.④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일제는 1941년 12월에 미군의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광복군은 영국군과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연계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하였다.1. 영국군과의 공동작전가장 먼저 인도 미얀마전선에 광복군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면서 연합국이 중국으로 전쟁물자를 수송하던 주요 통로인 미얀마공로가 차단되었다. 이 수송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군과 중국군이 인도 미얀마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인도 미얀마전선에서 광복군이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한 것이다.광복군이 인도 미얀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한 것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군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를 민혁당 측에 요청한 것이다. 민혁당은 1942년 겨울에 2명을 파견하였고, 이에 크게 만족한 영국군의 재차 파견요청에 의해 1, 2지대원 9명으로 구성된 광복군 공작대가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1944년 1월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과 만달레이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대적선전공작을 맡았으며, 만달레이 전투에서는 포로 심문을 통해 아군을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1945년 7월까지 전개된 이 전투에서 일본은 결국 패퇴하였고 광복군 파견대원들은 9월 10일 중경으로 복귀한다.2. 미군 OSS와의 공동작전미군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도 군사합작을 이루어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광복군과 OSS와의 군사합작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려는 광복군측의 의도와 한국인들을 대일전쟁의 첩보활동에 이용하려는 미군측의 의도와 결합되어 이루어졌고, 그 형태는 독수리작전으로 추진되었다. 독수리작전은 광복군 2, 3지대 대원들 중 선발된 인원들에게 미군의 OSS훈련을 실시하고, 이들병으로 끌려나온 한인청년들이 투입되었고, 이외에 일본군을 상대로 상업 활동을 하거나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이주한 한인청년들이 많았다. 이들을 광복군에 흡수 편입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확군에 대한 방침은 해방 직후 결정되었다. 한국독립당이나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의 확군을 당면과제의 하나로 결정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중국에 있는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들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둘째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향후 건국군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당시 임시정부 내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과 같은 좌파 계열 정당들과 노선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김구가 장개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는 임시정부를 조선 전국민이 옹호하는 유일한 민족기구로서 이를 연합국과 함께 승인해 달라고 한 반면, 민혁당과 같은 좌파 계열 정당은 국민에 의해 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확군은 한독당에 지휘 아래 이루어졌으며, 김구, 김학규, 이청천 등은 소련의 위협과 장차 국내에서 일어날 반공 투쟁에서의 군사력 필요성을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미국에 호소함으로서 원조를 받았다.광복군의 확군 활동은 중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대체로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있는 일본군 소속의 한적장병들을 접수, 광복군으로 편입시켜 이들을 중심으로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1945년 10월말까지 7개 도시에 잠편지대가 편성되었다고 한다.이들의 초기 성과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임정의 선전부장 엄창섭이 귀국 직후 기자회견에서 광복군의 군세가 1만이라고 말한 반면,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20만명으로, 임정 조직부장이었던 조경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사』(1991)에서 9만명으로, 1946년 4월 13일 조선인민보에서는 4만명 가량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중국 관내 지방의 한적 장병은 약 2800받았다.
    인문/어학| 2007.12.02| 6페이지| 1,000원| 조회(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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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의 진화와 각 시기의 문화
    2007년 1학기 고고학 개설인류(人類)의 진화(進化)와각 시기(時期)의 문화(文化)경제학부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진화론 (1) 진화론의 형성과정(2) 진화의 메카니즘2. 인류의 기원과 진화 (1) 인류 진화의 시간적 배경(2) 호모속의 진화와 그들의 문화3. 한반도의 화석인류 (1) 한반도 인류의 흔적(2) 한반도의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Ⅲ. 결론Ⅰ. 서론(序論)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存在)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특히 인류(人類)의 기원(起源)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인류의 기원문제(起源問題)를 다룬 많은 학설(學說)들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설(學說)들은 아직까지 명쾌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사실을 설명하여 주지 못했다. 이렇게 인류의 기원에 관한 연구(硏究)가 부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측정(測定)이 가능한 유물(遺物)이 적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進化論)이 등장하여 지금과 같이 인류(人類)의 기원문제(起源問題)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진화(進化)란 무엇인지, 인류(人類)가 현재까지 어떻게 진화(進化)해 왔는지를 살펴보고, 아울러 그런 인간(人間)의 진화(進化)에 맞춰 문화(文化)는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本論)1. 진화론(進化論)(1) 진화론(進化論)의 형성과정(形成過程)진화론(進化論)이란 모든 생물(生物)들을 공동조상(共同祖上)에서 유래(由來)되었지만 생물들의 계보(系譜)가 세대(世代)에 따라 변하면서 계속 분화(分化)하기 때문에 생물계(生物界)에 다양성(多樣性)이 생긴다는 이론이다.진화에 관한 초기견해(初期見解)는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간다. 그리스 자연철학자(自然哲學者)들은 생물이 변화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긴 하였으나, 중세에 들어오면서 신학적 이론(神學的 論理)이 지배적이어서 진화사상(進化思想)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린네다윈라마르크진화에 관한 혁신적(革新的)인 생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분류학(分類學), 고생에서 새로운 유전 물질을 만들며 진화의 진행방향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이주(移住)란 생물학적 모집단에 새로운 개체가 외부로부터 들어오거나 혹은 구성원의 일부가 외부로 나가며 발생하는 유전물질의 도입과 제거를 의미하며 대게 선택이나 표이와 더불어 발생한다.표이(表異)란 상기한 세 이유의 어느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작위적이며 불규칙한 모든 변화를 지칭한다. 표이는 특정 유전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종내 집단의 성격에 차이를 점점 부각시켜 새로운 종의 등장을 가속화시킨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여러 집단에 분포하는 고립된 종내 집단들이 자체 내의 성원사이에는 매우 유사한 얼굴 모습을 지니지만 다른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유전자표이 때문이라고 설명된다.진화란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서 유전자급원(遺傳子給源)의 구성 성격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종의 영속적 번영 혹은 소멸을 가져오며 또한 모든 새로운 종은 반드시 어떤 다른 종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말한다. 새 종의 등장은 계보 내에서의 진화 혹은 계보의 분화라는 두 종류의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단계통(單系統) 진화와 분지적(分地的) 진화로 구분된다. 단계통 진화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이해 가는 것을 말하며, 인류의 진화는 기본적으로 이 단계통 진화의 과정이 된다.2. 인류(人類)의 기원(起源)과 진화(進化)(1) 인류(人類) 진화(進化)의 시간적(時間的) 배경(背景)약 45억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 변형된 지구의 역사는 여러 지질시기로 나뉜다. 그중 인류는 유인원(類人猿)과 사람의 중간 단계인 원인(猿人:선행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이에 속함)을 거쳐 사람에게 더 가까운 원인(原因:초기인류, 구석기인)을 지나 현생인류(現生人類: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했다.최초(最初)의 영장류(靈長類)는 대략 9,000만년 전에 등장했고, 마이오세(miocene 약 2300 ~ 500만년 전)에 들어와 급속한 고등 영장류의 종적 다양화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인류(사람과 : Ho호모속의 진화(進化)와 그들의 문화(文化)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류의 진화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하여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현대 인류까지 이어진다. 이들 인류 진화의 방향의 가장 큰 특징은 크게 직립보행(直立步行)과 두뇌(頭腦)발달(發達)에 따른 석기(石器) 사용, 뇌용량의 증가와 두개골(頭蓋骨) 두께의 감소, 치아(齒牙)와 턱의 크기 감소 등이다.인류의 진화①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남방의 원숭이란 뜻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등장은 언제, 어떤 종에서 분화된영장류와 호모속의 관계와 진화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발자국 화석지구상에 인류(Hominid)라는 새로운 종(種)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4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처음 발견된 이후 그것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19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체계화(體系化)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에 의해 올두바이 협곡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頭蓋骨)과 약 350만년 전 인류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은 그 두개골을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명명하였고, 절대연대측정에 의해 약 180만년 전 화석(化石)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루시(Lucy)그 후 15년 뒤 데이비드 요한슨에 의해 에티오피아 하다르 지방의 타카나호에서 약 320만년 전 고인류(古人類)의 두개골 화석편(頭蓋骨 化石片, 턱뼈부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주위를 조사하여 전체 골격(全體 骨格)의 40%에 해당하는 화석을 수습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발견된 화석 인골은 대부분 두개골편(頭蓋骨片)이었으나, 이 자료는 신체의 거의 모든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고, 초기 인류의 두발 걷기를 위시한 행동양식(行動樣式)과 신체구조(身體構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한 자료였다. 현재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약 350만년 ~ ?, 일명 루년에 리차드 리키는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의 동쪽지역인 쿠비포라에서 중요한 화석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올두바이 협곡에서 출토된 그 어떤 이른 시기의 호모 화석보다 완전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年代測定)에 의해 이 화석은 180만년 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연대는 올두바이와 쿠비포라에서 나온 호모 하빌리스 화석들의 연대와 일치한다. 이런 화석들은 적어도 이른 시기의 동아프리카에 적어도 두 종의 호모가 같은 시기에 살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인류의 진화가 호모 하빌리스에서 에렉투스, 사피엔스로 진행되었다는 당시의 일반적 생각을 재검토하게 하였다.이곳에선 호모 하빌리스가 사용한 투박한 석기들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이 중 올두바이 협곡의 제1층(약 240만년 전 ~ 180만년 전)에서 나온 석기의 공작단계를 올두바이 공작(Oldowan Industry)이라고 부르며 제2층(180만년 전 ~ 160만년 전)에서 발견된 석기의 단계를 발달된 올두바이 공작이라 부른다.③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중간인 호모 에렉투스는 150만년 전부터 30만년 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의 구대륙에서 살던 「곧선 사람」들을 일컫는다. 호모 에렉투스의 공식명칭은 자바원인의 발견 이후 만들어 졌는데, 이들의 화석과 유물이 아프리카, 유럽일대와 중국까지 구대륙의 열대, 아열대 지방 모두를 포함함으로서 그 활동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알 수 있다.중국 주구점(周口店)의 동굴에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일부의 호모 에렉투스가 동굴에서도 생활하였음을 입증한다. 이외에 같이 발견된 돌과 뼈(호모 에렉투스가 모아둔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그슬린 동물의 뼈, 씨앗들, 원시적인 화로와 숯 등)를 통해서 호모 에렉투스가 상당 기간 동안 이 지역의 동굴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올두바이 협곡에서는 동굴이나 바위그늘 같은 자연 그대로의 주거지가 아닌 한데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집터는 일단 물 다양화, 정제화, 그리고 석기제작기술의 발달 양상(직접떼기 뿐만 아니라 간접떼기도 쓰여짐)이 돋보인다.이와 더불어 인간이 자연계에서 보다 능동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집단적, 반복적 사냥이라는 새로운 생계기술로서 가능해진 것이다. 야생동물의 사냥이 새로운 생계수단으로 중요하게 되었음은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는 집단적(集團的) 수렵(狩獵)행위(行爲)와 관계되는 증거(證據)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냥이 가능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뇌용량의 증가 때문일 것이며, 또한 신체적인 변화, 예를 들면 뼈와 근육의 발달에서 이뤄진 직립보행(直立步行)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도구의 발달과 더불어 불의 사용은 집단사냥을 더욱 보편화 시켰으며, 결국 이로 인해 식량 조달에 있어서 암수의 성에 따른 노동의 분담을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부 후기의 호모 에렉투스의 뇌용량이 현생 인류에 버금가는 900cc까지 커진 것으로 보아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④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플라이스토세 말엽이 되면, 세계각지에서는 아직 호모 에렉투스와 유사한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몇몇 형질적(形質的) 특징(特徵)에서 현대인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한 집단이 등장한다. 이러한 화석은 바로 우리 현대인이 속한 인류의 모종(母種)인 호모 사피엔스(슬기인)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종은 인도네시아, 중국, 아프리카, 유럽 등 구대륙 각지의 여러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였다.이들은 대략 40 ~ 25만년 전 사이에 등장하였다고 생각되는데, 후기 호모 에렉투스와 상당한 시간 동안 공존했다고 생각된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과 치아의 특징은 두뇌 각부 크기의 차별적 증가(1300cc ~ 1700cc), 앞니 부분의 집중적 사용의 계속 및 어금니와 작은 어금니 부위의 중요성의 계속적 감소라는 세 가지이다. 동시에 이러한 형질적 변화는 그 동안 계속 진행된 생활의 변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
    인문/어학| 2007.06.02| 6페이지| 1,000원| 조회(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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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아큐정전 서평
    2007년 중국의 역사와 문화 Report아Q정전(阿Q正傳) 서평(書評)경제학부나의 전공은 경제학(經濟學)이다. 현재 세계에서 정치(政治), 경제(經濟), 외교(外交)에 있어서 중국(中國)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세계는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같이 경제학을 배우는 이들 또한 중국에 대해 보다 많이 알고, 깊게 이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동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제학자나 학생들은 피상적인 경제통계에만 의존하여 중국을 이해하려 했지, 정작 중국의 인종(人種)과 문화(文化), 역사(歷史)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현재의 중국을 있게 한, 격동하는 중국(中國) 근대(近代) 사회(社會)에서의 인물상과 사회상의 변화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중국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보다 현대 중국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이 책의 저자인 노신(魯迅)은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으로 청(淸) 말기인 1881년에 당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양자강(揚子江)의 저장성(浙江省)의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시절을 학교제도를 통해 신학문(新學文)을 익힌 사람으로서, 이후의 신해혁명(辛亥革命)과 항일투쟁(抗日鬪爭), 공산화(共産化) 등 중국(中國) 근대(近代) 사회(社會)의 격동하는 변화를 몸소 경험하였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그는 문학가이자 사상가로서 중국 민중들을 계몽(啓蒙)하고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정점에 섰던 잡지인 신청년(新靑年)에 연재된 중편소설 아Q정전(阿Q正傳)과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는 그의 대표작이다. 특히 이 아Q정전은 중국현대문학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문학작품으로서, 노신은 신해혁명 당시 일반 중국인들의 의식을 주인공 아Q에 투영하고, 또 아Q와 반대되는 구시대적 권력가로서 지주인 조씨를 대비시켜 중국사회의 전근대적(前近代的) 사회상(社會相)과 낮은 민도(民度)를 비판하였다.이 아Q정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주인공 아Q의 인물상(人物象)이다. 우리는 지난 수업시간에 송가황조(宋家皇朝)라는 영화를 시청하였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부귀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나라와 국민의 발전을 위해 혁명(革命)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아Q정전의 주인공들은 영화에서의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그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Q는 미장이라는 마을에서 집도 없이 날품팔이꾼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이다. 주위 한인들로부터 조롱당하기 일쑤이다. 그의 경제적 상황 또한 굶는 날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놀림을 받아도 이를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그만의 자존심을 통해 자신의 승리를 이를 승화시킨다. 작가가 아Q의 인물상을 상정함에 있어 정신적인 면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아Q를 만들었는가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그는 마을 지주인 조대인과는 있지도 않은 친척 관계를 내세우기도 하여 매를 벌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도박을 하며, 마을의 여자들에 대해 감히 음심을 품기도 하고, 변발을 자른, 당대의 지식인인 전나으리의 장남을 변발을 잘랐다 하여 가짜 양놈으로 치부, 뒤에서 욕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사회적인 약자인 여성 비구니를 희롱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가 현실감각 또한 매우 부족하며, 그러면서도 강자에겐 비굴하며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그러한 인물이란 것도 알 수 있다.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현실과 괴리된 생활을 할 수 없다. 자신을 둘러싼 주위 현실을 인지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보다 나은 삶을 하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Q라는 인물은 철저하게 현실(現實) 인식(認識)이 결여된 인물로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회변화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이 미장이란 마을에도 혁명의 여파가 밀어닥쳤을 때, 아Q는 조씨와 가짜 양놈보다 자신이 혁명에 먼저 가담하여 신분을 상승시키는 자신만의 상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혁명에 가담도 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조씨의 집을 약탈한 패거리의 일원으로 몰려 조리돌림을 당하고 죽게 되기까지 한다.여기서 우리는 중국 근대 사회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청나라가 망조(亡朝)로 접어들고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과 과분(瓜分)의 시대 상황은 이 미장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청나라는 이미 그 통제력을 잃었고,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도전들에 잇따라 무릎을 꿇게 된다. 아편전쟁(阿片戰爭)은 바로 그 시작이었으며, 청일전쟁(淸日戰爭)의 패배는 그래도 중화(中華)라는 이름 앞에서 아시아에서는 최강이라 자부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청조를 무너뜨리게 된 신해혁명 또한 취지는 좋았으나, 당시의 낮은 민도(民度)에 의해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다. 노신은 이러한 당대 중국과 중국인들의 모습을, 소설에서 현실적인 자신의 위치를 알지도 못하고 자기만족에 취해 있는 주인공, 아Q에 대비시킴으로서 낡은 중국인들의 사고(思考)를 비판한 것이다.과연 이 소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황(時代狀況)과 사회(社會)의 변화상(變化象)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인공 아Q와 그를 비롯한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중국인들의 사회상 또는 특징뿐만 아니라 현대(現代) 중국인(中國人)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7.05.27| 2페이지| 1,000원| 조회(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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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대경제와 일본제국주의
    안병태 “한국근대경제와 일본 제국주의”경제학부 2001280029 김희성목 차옮긴이의 말1. 오류의 비판적 검토2. 조선후기의 토지소유3. 상품화폐경제의 구조와 발전4. 중간 계층의 존재 형태5. 1884년 갑신정변의 사회경제적 기초6. 조선의 경제적 개화운동과 일본 제국주의 형성의 특질7. 조선인 지주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경영방식의 차이옮긴이의 말 요약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스쳐간 이후 조선사의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악영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한국 내에서 상당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조선사 왜곡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부분적 사실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정한 식민사관의 극복이 쟁점이 되어야만 하는 현상황에서 더욱더 깊은 연구를 해야만 한다.재일교포 사학자인 저자 안병태 씨는 조선사의 올바른 정립과 식민사관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그 왜곡의 중추인 조선사회정체론, 봉건제도 결여론, 갑신정변의 평가 등에 대하여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탈에 관하여 서술하였다.이 책은 조선사회의 자주적, 내재적 발전을 이론적, 실증적으로 규명하여 올바른 조선사회상을 제시한다. 안병태씨는 조선근대 사회경제적 구조분석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소산으로 돌려버리는 안이한 태도를 거부하고, 민족사를 올바로 응시함으로서 민족사의 진정한 주체를 파악하고자 내재적 발전의 시각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끼친 왜곡의 실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비판과 수정을 통하여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에 대한 연구의 기초를 닦고자 함이다.제1장. 오류의 비판적 검토1. 서 론2. 조선사회 정체론에 대하여3. 봉건제도 결여론에 대하여4. 이행을 둘러싼 문제에 대하여5. 결 론1. 서 론일본제국주의는 세계사에서 일찍이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조선사를 왜곡시켰다. 그것은 1910년 이장한다. 일본은 양국에 비해 매뉴팩쳐단계에 앞서 들어섰기 때문에 개국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후에 발전되어 소경영단계설, 부르주아적 발전평가론으로 정정되는데 이것은 각국의 경제사연구의 발전에 의하여 완전한 오류였음이 명백하게 되었다.예를 들면 개국에 대하여, 일본은 비교적 온건하게 그리고 조선은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이 때 일본의 경우를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상인층이 존재하였다든가, 그와 같은 경제상황, 발전단계에 있었다는 이유로는 변동의 일면밖에 설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변동의 다른 측면들, 유교적 의식, 개화 사상의 수용, 발전과 전개, 양이 운동의 급격한 정지 등을 본다면 보부의 발상과 문제제기는 부적당하다.일반적으로 아시아의 자본주의로의 단계에서는 경제의 상대적 완만성이 공통적 현상이었고 그 토지소유방식에 제한되어 경제발전을 통한 자본주의 이행은 불가능하였다. 봉건사회 내부의 경제발전을 비교의 척도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이미지(경제적 토대가 자립적 재생산이라고 하는 기반 위에 있고 자립적 발전이 가능하며 부르주아 국가로 총괄되고 있는)를 봉건제에 대입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3. 봉건제도 결여론에 대하여조선사회정체론과 더불어 실제로 정체론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이 봉건제도결여론이 있다. 이는 일본의 대조선관이 변하는 전환기인 제국주의 형성기, 즉 1900년 이후에 출현하였는데 일본사회의 발전을 평가의 척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정체론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이는 조선의 토지소유가 순봉건전 조직 = 위계적 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과 행정제도가 군현제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 귀착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일본이 토지소유의 순봉건적인 조직과 발달된 소농민경영을 가졌었기에 확실히 중세유럽에 충실한 형태를 보인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토지소유와 보유관계(장군 - 다이묘, 급인 - 농민, 지주 - 소작)는 조선의 토지소유, 보유관계(국왕 - 궁방, 양반지주 - 소작농민)와 기본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갖는 학설이 비교론적 연장으로 나아가 아시아 근대사에 대한 척도로서 활용되어 부정적 평가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사왜곡은 하나의 대세를 형성하여 이 역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는 영향을 받았고, 정체론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선사 연구 속에서 구체화되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사왜곡을 보강했다고 보았다.미촌은 C설을 검토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옥균 등의 개화파는 일본과의 접촉을 통하여 관념적으로 개화론을 수용하고 명치유신을 모범으로 하여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선구였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해도 그것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노력에 대해서도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그리고 김옥균에 대한 과대평가를 비판하고 개화파들의 약간의 조직적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1881년 이전으로 거슬로 올라갔다는 것도 무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라고 할 만한 의문점, 비판점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었다. 일본의 군사력 의존(일본에 대한 경계심 부족), 사회개혁의 국내적 기반구성의 비현실성, 개화파의 노력 : 충의계 조직 시기, 개화정강의 준비 시기 등을 들고 있다.위와 같이 미촌의 B설은 산변의 A설에 비해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본과의 접촉을 통하여 개화론을 관념적으로 수용”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조선사회 봉건사회 모순의 사적 전개, 양반, 중인의 현실인식, 개혁논의의 사적 전개 등을 내재적 발전으로 보지 않아 일본의 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의 개화사상과 개화파의 계승성, 내재적 발전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였다.5. 결 론이상에서 우리는 조선사회 정체론, 봉건제도결여론, 이행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했다. 하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해명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해명은 조선봉건사회의 구조분석에 기초한 파악을 전제로 1868 ~ 1910년에 이르는 에는 이들이 세곡 운송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구성부분이 된다.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전세수취과정에서 지방관, 아전 등의 중간횡령에, 전세사운과정에서 상인, 선(船)인 들에 의한 중간횡령이 더해져 무려 10%에 가까운 세금 결축분이 생성되었고, 이로 인해 심각한 재정위기가 발생되었다.지방관을 필두로 하는 중간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다양한 명목하에 백성들로부터 재징수 혹인 인징과 족징,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방식으로 결축분을 보충했는데, 이와 같은 부패의 축적이 민란의 불씨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총괄하면, 최하층의 농민이 중간자의 횡령, 사기 등에 의해 추가지불을 강요당했고, 이로 인해 봉건적 위기가 심화되었던 것에 위기의 특질이 있다고 하겠다. 유민과 유래진잡탈전답의 증가 등은 바로 이로 인해 생긴 것이다.3. 봉건경제와 해체의 특질(1) 봉건적 토지소유의 특질조선의 봉건적 토지소유는 극히 중층적 내지 중첩적이고 역사적으로 복잡한 형태를 띄고 전개되었다.한편으로는 국왕에 혈연적으로 가까울수록, 신분이 높을수록, 권력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대토지를 소유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에 반하여 전답매매를 통한 토지소유, 권리소유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하였다.18 ~ 19세기에는 농민중의 대다수(7 ~ 8할)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들은 조세납부분과 지주분을 빼고 남은 생산물은 고작 20 ~ 35% 정도였다. 소작농이 아닌 자작농의 경우에도 조세납부분 이외에 인징, 족징 등의 가렴주구에 의해 몰락 직전에 처해 있었다.당시에 최하층 농민이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 관계에 기생하는 중간계층(아전, 공인, 중인) 등으로 출세하여야만 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재산이나 학문을 필요로 하였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빈곤이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관료, 감사, 수령 - 아전 - 집강(면, 동 등의 행정책임자) ―――― 농민에 이르는 봉건통치, 토지소유의 중층적 구조로 인한 생산관계의 구조는 자체가 지니는 성격 . 국내에서만 소비되던 곡물, 해산물 등이 무역품이 되던가, 금이 주요한 무역품으로 되던가 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봉건적 위기에 민족적 모순을 첨가시키는 것이었다.(2) 조선상인의 동향개항 전 조선의 상인과 상조직의 제반 구조에 대해 살펴보면 상인유형과 상조직 분류란 점에서 국가?지주적 상품화폐경제와 소농민적 상품화폐경제의 2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는 궁정, 관아 등의 어용상인인 전인, 궁정, 관아 등의 물품조달업자인 공인, 국가로부터 통제를 받고 시장세 등의 상납을 하여 영업을 보장받은 보부상 등이며 후자는 18세기 중엽부터 대두한 사상과 도고, 그리고 이들과 손을 잡은 일군의 상인 등 즉 사상체계에 조직된 자들이라 할 수 있다.개국전의 재정위기가 개국 후 외교비, 민씨 일파의 사적소비에 의해 심화되고, 일?청 상인들의 상권침탈이 가속화되자 전자의 경우 국가에 대한 종속은 점점 심해졌으며, 새로운 사태에 대한 주체적 반응도 힘들어졌다. 반면 후자는 발빠르게 상회, 상회사 등의 합작회사를 조직하였다(1883 ~ 1893년 26개사 설립).하지만 당시 발족한 이들 회사에 대해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수구정권은 적극적인 보호육성정책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이는 일본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며 국회로 진출하였다는 점에 비해 큰 결점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89년 방곡령 사건에서 보여진 조선민중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격분 등은 정세의 급격한 전개 속에서 부차적 모순이 일시적, 부분적으로 주요한 모순으로 전화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개국으로부터 청일전쟁 전까지는 주요한 모순이 봉건대중과 민중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5. 봉건적 위기와 민족적 모순에 대한 각파의 인식과 정책(1) 대원군파의 인식과 정책19세기 이래 점차 심화되었던 봉건적 위기는 60년대가 되면서 미증유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30년대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양이선은 국내의 긴장을 불러일으켰으며 60년대에 이르러 침략행동을 개시하게 되는.
    경영/경제| 2006.11.01| 15페이지| 1,000원| 조회(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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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한국의 지석묘
    한국(韓國)의 지석묘(支石墓)이름목 차Ⅰ. 머리말 - 거석문화와 지석묘Ⅱ. 한국 지석묘의 기원과 전파- 입지와 방향, 형식분류,세부구조, 축조과정,기원과 편년, 분포부장품과 기능, 성혈Ⅲ. 맺음말 - 지석묘의 연구 방향Ⅰ. 머리말 - 거석문화와 지석묘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평등사회가 계층사회로 넘어가는 시기는 지역적 환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략 신석기 중기 또는 후기이다. 이 시기(우리나라의 경우 BC 2000 ~ BC 800년경)를 전후하여 전세계적인 문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는 거대한 건축물이나 기념물의 축조이다.이를 거석문화라 하는데, 이는 인간이 어떤 목적의식(특정한 타계관(他界觀) 또는 풍양관념(豊穰觀念))을 가지고,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로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물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한다. 거석이란 하나의 구조물이나 기념물 또는 그 일부로 사용된 돌을 말하며, 거석물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직접적인 대상물 즉, 돌로 만든 구조물을 뜻한다. 거석문화가 돌을 이용한 구조물을 총칭한다고 할 때, 큰 돌을 이용한 지석묘나 선돌 그리고 작은 돌을 이용한 돌널무덤이나 돌무지무덤도 이에 포함된다.우리나라의 경우 선돌과 지석묘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의 경우 우리나라에 전체 개수(약 5만여 기)의 반 이상(약 2만9천여 기)이 밀집되어 있다.영국 갤런디시 스톤 유적용인 남사면 창리 선돌먼저 선돌이란 켈트어로 멘히르(menhir), 돌(石)이란 뜻의 men과 길다라는 뜻의 hir의 합성어로 장대한 입석으로서 사건이나 인물의 기념비였을 뿐만 아니라 주술적 또는 종교적 의의를 가져 흔히 매장지점의 위 혹은 그 근처에 거석을 세운 것을 말한다.강화 지석묘지석묘는 켈트어의 책상(dol)과 돌(men)의 합성어(dolmen)로서 거대한 돌기둥 위에 거대한 돌을 얹은 무덤을 말한다. 순한국어로는 말 그대로 돌을 고여 놓았다는 의미로 ‘고인돌’ 또는 ‘굄돌’이라 부르며 이것이 한자 석실의 수 또는 학자들의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별첨1 참조)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용하는 분류기준에 따라 우리나라 지석묘는 크게 세 가지 형식, 즉 북방(北方式), 남방식(南方式), 그리고 개석식(蓋石式)으로 나뉜다.먼저 북방식 지석묘는 네 개의 판석을 세워서 장방형의 돌방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것으로,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돌방의 긴 변에 세운 두 개의 받침돌은 거대한 뚜껑돌의 무게를 직접 받치고 있으므로 두꺼운 판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부는 땅속에 깊이 묻혀 있다. 이러한 외형 때문에 탁자식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또한 밑뿌리의 형태는 되도록 지하에 깊이 박히도록 삼각형이나 반달형을 이루고 있다. 돌방 내부에는 자갈이나 판석을 까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맨땅인 것이 보통이다. 뚜껑돌의 크기는 대개 2 ~ 4m 정도가 보통이며, 돌방은 하나로 구성된 경우가 많으나, 여러 개인 경우도 존재한다. 이 북방식 지석묘는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의 대동강, 재령강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나, 평안북도와 함경도에는 지석묘의 분포가 드물다. 종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북방식 지석묘가 개석식으로 오인되었으나 현재 이러한 북방식 지석묘는 전국에서 발견되고 있다. 부장품은 대개 화살촉과 돌검이 주가 되고, 옥류나 청동검이 나오나, 이 북방식 지석묘에서는 부장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일찍이 도굴당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남방식 지석묘는 소위‘바둑판식’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판석, 냇돌 등을 사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 4매,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으로, 주로 전라도, 경상도 등 한강이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지하 널방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나 반드시 그 윗면을 덮는 뚜껑이 있는데 이 뚜껑으로는 판석 또는 나무가 이용되었다. 이 남방식 지석묘는 주로 평지나 으로 세분할 수 있다.ㆍ받침돌: 덮개돌을 받치고 있거나 고이고 있는 돌이다. 탁자식 지석묘에서는 넓은 판석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기지석묘의 구조와 명칭때문에 무덤방을 이룬 판석 자체를 말하고, 기반식 지석묘에서는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기둥모양의 돌, 둥근 돌, 각진 돌을 칭한다. 덮개돌을 직접 받치고 있으면서 하부구조인 무덤방의 파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지석, 고임돌, 굄돌, 족석(足石)이라고도 한다.ㆍ뚜껑돌: 무덤방을 덮고 있는 돌로, 주검을 보호하면서 무덤방의 파괴를 막는다. 개석(蓋石)이라고도 한다. 뚜껑돌은 판석 1매 또는 여러 매로 덮은 것이 있으며, 보통 한겹으로 덮지만 여러 겹으로 포개 쌓는 경우도 있다.ㆍ무덤방: 하부구조 중 매장주체부를 이루는 부분으로 묘실(墓室), 널방, 돌방이라고도 한다.지석묘의 축조과정(축조과정) 자연암석을 그대로, 또는 큰 바위에서 일부를 떼어내 뚜껑돌을 삼았는데, 실제로 여러 채석장이 지석묘 주위에서 발견되고 있다. 돌을 떼네는 방법으로는 일반적으로, 바위틈 또는 인공적으로 뚫은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로 불리어 떼네는 방법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운반은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하거나 수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워낙 운반이 어렵기 때문에 돌을 채취하는 곳과 지석묘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또한 마찬가지로 쓰이는 돌의 재질 또한 구하기 쉬운 돌은 아무것이나 사용하여, 화강암, 편마암, 사암 등 매우 다양하다. 받침돌은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미리 구덩이 속에 넣은 다음 이 받침돌이 흔들리지 않게 작은 돌로 옆을 가득 채워 튼튼히 다진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받침돌 2개 또는 4개를 똑같은 높이로 세우고 나서 받침돌이 파묻힐 만큼 흙으로 덮어서 작은 언덕을 만든다. 이 언덕의 경사를 따라 둥근 나무를 밑에 깔고 뚜껑돌을 끌어올린다. 밀고 끌어서 올린 뚜껑돌이 받침돌위에 놓인 다음 받침돌까지 파묻었던 흙을 치우면 지석묘가 완성된다.(기원과 편년) 거석문화는 오래된 하나의 큰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에는 틀림도 황주군 침촌리에서 따옴. 변형 지석묘)과 오덕형(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에서 따옴. 전형 지석묘)으로 나누고 변형 지석묘(남방식/개석식)에서 전형 지석묘(북방식)로 발전해 나갔다고 보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지석묘의 절대연대나 상대연대 또한 아직 체계적으로 수립되지 않은 실정이다. 지석묘의 축조 상한은 BC 2000년에서부터 BC 80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차가 크다. 지석묘 축조의 하한도 BC 300년 정도까지가 일반적이나, 지역에 따라서 기원전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기까지도 하는 증 하한 문제 역시 아직 의문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지석묘의 소멸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과 선진문명의 수용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기인한 것은 틀림없다.전남 화순 고인돌군지석묘에 대한 연대문제는 주로 출토유물 중 돌검을 통해 연구되어 오고 있다. 종래 일본학자들은 돌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하였다고 하여 소위 금속병용기 시대를 설정하고, 지석묘가 이 시기에 속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현재 고고학의 성과로 보아 돌검이 세형동검보다 앞선다는 것이 밝혀져, 이러한 주장은 입론의 근거를 잃었다. 즉,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옥석리 지석묘 밑에서 발견된 움집에서 나온 이단자루식 돌검이 기원전 640년경에 제작되었고, 또 황석리 지석묘 출토 돌검의 연대가 BC 410년경으로 밝혀져, 돌검의 연대가 세형동검보다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결과 지석묘는 금속병용기의 묘제가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묘제로 밝혀졌다. 이는 최근 지석묘에서 비파형 동검이 자주 출토되는 것으로 입증된다.(분포) 지석묘는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주로 서해안 유역(황해도, 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는 보통 무리를 지어 분포하는 것이 보통인데, 황해남도 개천군 묵방리, 은율군 관산리와 같은 서북지방에서는 1 ~ 2기가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전라남도에 위치한 지석묘들 같이 한 곳에 수백 기의 지석묘가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동해지역파형동검, 청동활촉, 청동도끼 등 출토되는 청동유물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화살촉의 경우 ‘마름모꼴 슴베형’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마름모 납작 슴베형’과 긴 마름모형은 중부이남, 버들잎형은 황해도와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방, 슴베 없는 세모꼴촉은 중부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돌검은 자루달린 식과 슴베달린 식의 두 종류가 모두 나오고 있으며, 이들은 주거지에서도 차츰 발견되고 있다. 반달돌칼은 주로 개석식 지석묘에서, 양면날 돌도끼는 북방식에서, 대팻날 도끼는 남방식에서, 또 둥근 도끼는 북방식에서 주로 나온다. 그밖에 별도끼, 홈자귀, 석창, 숫돌, 가락바퀴 등의 석기류도 나온다. 적갈색 민무늬토기의 조각들이 지석묘 주위에서 자주 발견되나 지석묘 내부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토기의 종류로는 팽이토기, 적갈색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가 있다. 장식품으로는 대롱구슬이 있는데 대부분 개석식에서 나오고 있다.(#별첨3 참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지역에 따른 청동기와 석기 형태의 차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지석묘들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지석묘가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 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황해남도 관산리 지석묘 복원형이러한 형태와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의 지석묘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주로 청동기 시대) 주로 분묘나 제단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며, 숭배 대상이나 수호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해발 80미터의 고지 위에 홀로 서있는, 가름돌 무게만도 50톤(운반에 4백명 인력이 필요)이 넘는 황해남도 관산리 지석묘 같은 거석은 어떤 권력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무덤으로 쓰였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었던 것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을 가진 지석묘는 고대국가의 발생 이전의 계급사회인 혈연, 조상숭배, 그리고 재분배 경제있다.
    인문/어학| 2006.11.01| 6페이지| 1,000원| 조회(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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