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교육과정 변화와 운영1. 교육과정 변화사회, 인간, 학문의 변화에 따라 개정된 교육과정은 효과적인 운영이 필요함.변화의 폭과 심도에 의하여 구별되며, 개발에서 정착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변화하고 효과적인 전략 등을 필요로 함.1) 교육과정 변화의 개념의의: 보통 교육과정 문서의 변화를 뜻함.종류: ①개발과정을 통한 변화: 현재 운영 중인 교육과정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과정 ②운영과정을 통한 변화: 개발된 교육과정이 운영 중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교육과정 개발 면: 국가, 지역, 학교 차원의 교육과정 변화.- 중앙집권적 교육과정체제 국가: 국가차원 변화 예>우리나라의 제?차 교육과정- 지방분권적 교육과정체제 국가: 지역 교육청과 학교차원 변화*교육과정 운영 면: 이미 만들어진 교육과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함.-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와 지역 수준의 교육과정이 학교에 주어지고, 학교는 이를 원형, 수정, 재구조화 등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운영함.*변화의 폭과 심도 면:종류전면개정부분개정일부수정내용-전체교육과정을 바꿈.-우리나라는 이미 7차례 전면 개정한 바 있다.-교육과정 일부 바꿈.-개정의 주기가 지나치게 짧을 때.-일부교과의 교육과정 바꿈.-우리나라는 2차와 3차 교육과정 사이 일부교과개정.-사회적, 학문적으로 부적합 또는 학습자의 발달수준과 상이 할 때.-교육과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교과서와 지도서의 일부내용수정+개정이란? 한번 정한 것을 고쳐서 또는 예전 것이 상황이 달라져 효과 없을 때 다시 정하는 것. +수정이란? 잘못된 점을 정리하고 고치는 것.*개정의 간격 면:종류주기적 개정수시 개정내용2,3,4년 등의 단위로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개정아무 때나 개정 단,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처럼 적용범위가 넓고 적용기간이 길 때는 불가함.2) 교육과정 변화의 단계①문제제기: 교육과정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고 표현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단계.→②착수와 채택: 착수는 교육과정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적절한 대비책의 마련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채택은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아내어 대비책으로 삼는 단계.→③운영: 채택된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학교에서 실행에 옮기는 단계.→④정착: 새 교육과정이 제대로 운영되어 지속되는 단계.3) 교육과정 변화의 전략Bennis 등(1976)의 전략①강제-위압적 전략: 학교나 교사로 하여금 새 교육과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②규범적-재교육적 전략: 학교나 교사가 자발적으로 새 교육과정을 받아들이고 운영하도록 그들의 가치관과 태도를 바꾸고자 하는 것.③합리적-경험적 전략: 학교와 교사들에게 새 교육과정이 유익하다는 점을 설득함으로써 교육과정 운영을 돕고자 하는 것.4) 교육과정 변화 모형Marsh & Willis, 2003의 개발과정①연구-개발-확산 모형기초 연구→연구 적용→교육과정 원안 개발과 시험 적용→대량 생산과 포장→대량 보급 활동→사용자②중심-주변 전달 모형중앙에서 교육과정을 개발→지역(2차 센터)에서 그 적용법을 적절히 변형 후 실행기관에 전달장점: 교육과정의 변화에서 확산의 중요성을 일깨움. 단점: 학교와 교사가 새 교육과정을 어떻게 채택하고 실행하는 지를 설명하지 못함.③협상 모형새로운 교육과정이 교육과정 개발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이유를 설명함.-개발자는 학문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산출물을 제공하려 하고, 실행자는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실행하려 하기 때문에 계획된 교육과정과 실행되는 교육과정이 차이가 남.-결국, 개발자와 실행자의 교육과정에 대한 생각과 역할 차이로 변화가 일어남.2. 교육과정 운영1) 교육과정 운영의 개념개발된 교육과정을 학교와 교실에서 실천에 옮기는 과정을 의미함.*교육과정 운영의 두 가지 의미:①이행(履行, implementation): 법으로 정한 의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처럼 개발자의 요구에 맞추어 성과를 내기 위하여 행동하는 것. 교사는 수동적, 소극적임.②창조적 실행(創造的 實行, enactment): 자발적인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만들어가는 과정. 교사는 주체적, 능동적임.*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관점:①충실도적 관점: 교사들이 교육과정을 개발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운영하는 역할을 맡아야 함. 교사들의 이해 수준이 낮으므로 교육과정을 구조화하고 교수방법에 대한 지침도 명확하게 제공.②적용적 관점: 교사들이 학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학교와 교실의 복잡하고 특수한 환경에 맞추어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역할을 맡아야 함. 교사들이 교육과정의 조정과 변화를 당연히 여김.2) 교육과정 운영의 기본 원리타당성의 원리: 학교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 작업은 궁극적으로 학교의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므로 학교가 설정한 교육목표가 타당한가 살펴야 함.적법성의 원리: 학교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은 국가가 정한 법령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므로 관련법의 개정과 함께 현행법의 일관성 있는 해석과 적용이 요구됨.전체성의 원리: 학교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은 학교전체 교육과정을 대상으로 함으로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할 때는 교육과정의 핵심 요소를 확인 후 각 요소간의 연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함.민주성의 원리: 학교 교육과정의 편성은 학교교육에 관여하는 제 집단의 폭넓은 참여를 보장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의사가 공정하게 처리되도록 특히, 교장은 교직원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체제를 구축하고, 교직원들의 책무와 권한을 명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함.전문성의 원리: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합리적으로 편성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를 전담하는 연구조직과 실행조직이 구성되어야 함으로 학교조직을 교육과정 운영중심의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함.현실성의 원리: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은 주어진 현실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므로 각종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한다. 즉, 교사 조직의 특성, 학교의 물리적 환경, 외부 기관의 지원과 통제 등의 수준을 알아야 함.3) 교육과정 운영의 영향 요인1. 학교 외부 요인-개정 교육과정-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청의 지원-평가제도2. 학교 내부 요인-인적 요인● 교장: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한 저항 수준을 낮추기 위한 교장의 역할①교사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②교사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갖도록 돕는다.③새로운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료와 비품을 마련해 준다.④학교의 조직 구조를 새로운 교육과정의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바꾼다.⑤교사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제공한다.● 비공식적인 지도자: 교사들의 존경을 받는 부장교사나 평교사● 교사: 교사의 관심과 참여, 교사에 대한 지원● 학생: 연령, 성별, 지능, 적성, 성장과 발달의 특징, 선행경험, 경제적 배경 등● 변화 촉진자: Rogers(1962) "변화 촉진자란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사람“변화 촉진자의 과업①새로운 교육과정이 기존 교육과정보다 우수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②교사의 과거 경험을 고려한다.③교사 스스로 교육과정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④실질적인 학내 지도자의 영향력을 고려한다.⑤개정 교육과정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려한다.-물적 요인● 시간: 연수시간 확보, 잡무시간 줄임, 교육과정 수정, 재구조화 시간 확보 등.● 공간: 교과별, 학년별 특별실 확충, 실험실, 특별실, 도서실, 교실, 운동장 등 재배치 및 활용.● 재정: 교사 연수, 개정 교육과정의 수정이나 재구조화 활동비, 교수-학습 자료의 구입, 공간의 배치, 교사에 대한 보상 등.4) 교육과정 운영의 지원 모형1. 조직개발 모형긍정적인 조직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강점: 행동과학 적용 조직개선 및 사회심리학 이용 개방적인 의사소통 만듦. 외부 전문가 지원 통해 문제를 협동적으로 해결.
Byron, George Gordon Noel, 6th Baron Byron (1788-1824)1. 바이런의 생애폭풍과 비운의 가계조지 고든 바이런은 1788년 1월 런던에서 태어났다. 바이런의 집안은 영국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하나로서 11세기경「브룬」이라고 불리던 고대 노르만의 호족의 한 사람이 정복왕 윌리엄 1세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 오면서 시작되었다. 에드워드3세때 존 바이런이 카레의 포위전에서 세운 공훈에 의해서 서어(준 남자)의 칭호가 수여 되었으며 그 자손의 한 사람인「큰수염의 작은 서 존」이 1540년에 헨리 8세로부터 뉴스테드 수도원(애비)과 그에따른 땅을하사받은뒤로 그 자손은 그곳에 꼭 붙어 살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다시 그 자손의 하나인 서 존 바이런은 찰스 1세의 충성스런지지자로서 기병연대를 지휘하여 태생의 성격인 만용을 부려 저돌적인 전투를 감행하였는데 그 전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 롯치데일의 바이런 남작으로 서위되어 영국의 귀족의 열에 오르게 되었다.제3대 바이런 경은 17세기말경까지 살았는데 이 무렵부터 예전의 수도원이었던 뉴스테드의 관저에 얽힌 불길한 예언이 차츰 현실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5대 바이런 경인 윌리엄 바이런은 사촌형인 초워스를 죽여 귀족원의 사문을 받았으나 귀족에게만 적용되는특별법에 의해서 무죄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되어 뉴스테드 애비로 돌아온 제5대 바이런 경은 더욱 광기어린 악행만 저지르기 때문에 이 고장 사람들이「포악영주」라고 부르며 몸서리를 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 동생 존 바이런은 어엿한 해군 제독으로서 대담무쌍한 지휘자였으나 역시 악운의 별을 타고 났는지 그가 바다에 나서기만 하면 금방 폭풍우가 몰아 닥치기 때문에「폭풍의 재크」라고 불리고 있었다. 일생을 거의 바다에서 지낸 이 용맹스런 제독이 즉, 시인 바이런의 조부였다.바이런 해군준장은 두 아들이 있었다. 시인의 아버지인 장남 존은 육군으로 들어갔고 차남 조지앤슨은 해군에 몸을 던졌다. 존은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공부한 뒤 프랑.이렇게 분방하고 정열적인 일면이 있는가 하면 바이런은 피곤해지기 쉽고 공상에 젖는 고독한 습관이 있었다. 소년은 친구를 피하여 혼자 해로우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교회의 묘지를 찾아가 느름나무 그늘에 있는 묘석에 걸터앉아 죽음에 대해서 명상하곤 했다.1803년 여름방학 때 바이런은 뉴스테드 애비를 찾아갔다. 조용한 호수와 고성과 같은 건물과 검푸르게 이어지는 숲을 다시 본 바이런 소년은 황홀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뉴스테드의 장원으로「신부의 길」로 이어져있는 앤즈리 장원의 소유자 초워스 집안의 17세의 영애 메아리앤. 초워스였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이미 이 지방의 부유한 청년 신사와 약혼한 사이었으나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바이런은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바이런자신의 말을 빈다면 이 메아리 초워스야말로「제2의 사람」이었으며 그가「진정으로 아내가 되어 주었으면 싶었던 유일한 부인」이었다. 물론 소년은 실연의 쓴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져 버린 그는 1학기 동안 학교를 공쳐버렸고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겨우 해로우스쿨로 돌아갔다. 해로우 스쿨로 돌아온 바이런은 다시 협기있는 소년으로 돌아갔고 또 미소년들을 상대로 열애와 질투가 뒤섞인 그나이 특유의 우정을 맺었으며 그것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썼다. 1804년에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던 이복누나 오거스타를 만났으며 우아하고 따사로운 그녀를 사모하였다. 당시의 바이런은 학과공부에도 힘을 써서 전교에서 3등의 성적을 올렸다. 졸업을 앞두고 도르리 박사가 은퇴하고 젊은 버틀러 박사가 후임으로 왔을때 전 교장을 따르며 새 교장에 대한 배척운동을 일으키던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교실을 부수고 새교장의 숙사의 쇠창살을 망가뜨리고 했다. 젊은 바이런은 자유를 찾아 순수무구한 열정의 불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캠브리지 시대 - 무위의 때1805년 10월 바이런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 기숙하게 되었다. 그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법무청는 양대륙을 가르는 다다넬즈 해협의 거센 조류가 보였다. 그리스 신화의 레안드로스가 건너 기슭에 사는 연인을 만나기 위하여 헤엄 쳐서 건넜다는 해협이었다. 바이런도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두 번 시험하여 첫 번째는 실패하였으나 5월 3일 마침내 성공 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헤엄쳐 건넌 것을 바이런은 일생을 두고 자랑으로 삼았다.테네도스 섬에 묵으면서 트로이의 유적을 더듬었다. 5월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호브하우스와 헤어졌고 6월 말에 자기만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에서 모레아로 몇 번의 여행을 시험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몸이 회복하자 이집트로 건너갈 작정이었으나 재산을 위탁 맡고 있던 변화사 한슨으로부터 바이런의 귀국을 재촉하는 편지가 날아 왔다. 즉시 파발선을 타고 말타 섬으로 향했다. 말타섬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34일이나 걸렸다. 바이런은 만 2년의 외유가 결코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되다.바이런이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 어머니 캐더린과 친우 데이비드 및 메슈즈가 잇따라 죽어갔다. 「겨우 1개월 동안에 모두 가 버렸다. 내가 귀국한 뒤의 일이었으나 누구의 얼굴도 못본 사이에 -」(호브하우스 앞 1811년 8월 10일 서한)라고 쓴 바이런은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혀 폐허와도 같은 뉴스테드의 저택에서 끝없는 우울과 회의에 빠져서 고독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다시 런던으로 나왔다.전부터 친구 댈라스가 격찬해 주었고 그 출판을 존 마레에게 부탁하고 있던〈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바이런은 소탈한 평민 시인 토머스 모어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귀족원에서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는 노동자에 대한 특별 형벌의 법안을 만들자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처녀연설을 하여 민권파의 주목을 받기도 하며 날을 보냈다. 같은 1812년 6월에 마침내〈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의 첫 두 권이 출판되었으며 겨우 4주 동안에 7판을 거듭하여 바이런은 사교계의 갈다.1819년 4월 바이런은 베니스 사교계의 여왕인 벤초니 백작 부인의 객실에서 테레사 구잇 초리 백작 부인을 소개받았다. 작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한 흰 얼굴의 아름다운 정열적인 테레사는 그 소녀시절을 수도원에서 교육받고 1년 가량 전인 16세에 60세가 넘은 노백작과 결혼하였다. 테레사와 바이런 사이에는 금방 사랑이 진전되어 가장 진실한 것이었으며 끝까지 계속되었다. 이윽고 노백작은 테레사를 데리고 라벤나로 떠났는데 부인은 바로 바이런을 불러들였다. 중병으로 누워 있는 테레사를 간호하는 동안 그느 더욱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8월에 노백작은 다시 부인을 동반하영 보로냐로 떠났기 때문에「유부녀의 공인된 애인」인 바이런도 역시 동행했다.그런 일을 되풀이 하는 동안에도 바이런은 마음속으로「행동이다. 행동을 해야 해」하고 외치면서 남아메리카에나 이주할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자유주의적인 이탈리아 인의 정치단체에 가입도 했다. 그리하여 사실 무기도 사들여 구잇초리 백작 저택을 신성 동맹에반항하는 음모단의 본부로 삼고 하는 바람에 마침내 노백작은 분노를 터뜨려 테레사에게 바이런과 손을 끊도록 명령했다. 그녀도 크게 분노하여 별거 신청을 법정에서 인정 받고 아버지 감바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라벤나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갔다. 바이런은 말을 타고 자주 그녀를 찾아 갔다.바이런은 라벤나에 묵고 있던 1820년에서 21년에 걸친 짧은 동안에 사랑이나 정치욵동에 열중 하는 것 말고도〈돈 주안〉의 집필을 진행했고 비극〈사르다나파라스〉,〈마리노 패리에로〉,〈2인의 포스타리〉등을 써서 희곡에도 빛나는 재능을 꽃피웠다.감바 백작 집안이 추방 당하는 바람에 그것을 뒤쫓아 라벤나에서 피사로 다시 제노바로 옮겨가 여기에서〈돈 주안〉16권을 완성했다. 이 웅대한 시편은 괴테의〈파우스트〉에 비교되는 걸작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주인공은 14세기의 스페인에 살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시편을 통해서 그려진 성격은 사실은 바이런 자신의 자화상이었으며 그의 환락과가 이것을 증보하여 6월에 (무위의 때)로서 간행하고 7월 하순,트리니티 기숙사로 돌아가 메슈즈,호브하즈,데이비드 등의 뛰어난 학생들과 어울려 영향을 받게 된다.1808년 20세6월 문학사의 칭호를 받으며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뉴스테드 애비로 돌아간다.1809년 21세1월 성년에 으르러 정식으로 바이런 남작가를 상속받는다. 3월 귀족원 의원이되고 4월 풍자시집 (영국의 시인들 및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을 간행한다. 6월 친구 호브하우스와 함께 외유의 길에 오르고 파마스에서 뱃길로 리스본에 이르러 거기에서 기마로 세비리아,카디스를 거쳐 지브랄타에 이르러 거기에서 뱃길로 말타섬으로 건너간다. 다시 프레뷔사에 상륙하여 알바니아 지방을 말로 여행하여 10월에 야니나에 이르고 야니나에서 (차일드해럴드의 편력)을 쓰기 시작한다. 터키의 태수 아리파샤의 후대를 받고 11월 그리스의 미스롱기에 이르고 12월말에 아테네에 도착했다.1810년 22세3월 스미르나로 향하여 이곳에서 (차일드해럴드)의 제2권을 완성. 5월3일 양대륙을 가르는 다다넬스 해협을 헤엄쳐 건너고 6월 콘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호브하우스와 헤어져 아테네로 돌아갔는데 파트라스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다.1811년 23세겨울동안(호라티우스로부터의 암시), (미네르바의 저주)를 쓰고 6월 귀국길에 올라 7월에 런던에 도착하고 8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뉴스테드애비로 돌아간다. 같은 무렵 친구 매슈즈가 익사하고 다시 런던에 나와 토마스 모어등과 어울리게 된다.1812년 24세2월 귀족원에서 공장지대에서 기계류를 파괴하는 노동자를 엄벌에 처하는 특별법안에 반대하는 처녀연설을 행하고 같은 달 (차일드해럴드의 편력)제1권, 제2권을 출판하여 일약 런던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후 3월 캐롤라인 램 부인과 연애를 하게되었다.1813년 25세4월에 (왈츠)를, 5월에 (이단자)를, 12월에 (아비도스의 신부)를 출판했다. 6월하순 이복누이 오거스타를 맞이하여 벤네트거리에 살게 되었다.1814년 26세1월에 (해적)을 간행하여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