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청시대의 국가권력과 신사(紳士)Ⅰ. 머리말근대 이전의 중국역사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기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이면(裏面)에는 각 시대마다 이를 가능케 한 윤활유적인 역할을 한 계층이 있었으니, 송대에는 사대부가, 그리고 명대 이후부터 청말에 이르는 시기에는 신사(紳士)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형식적이고 공식적인 특권을 부여받고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바, 때로는 협조적이고 때로는 반관(反官)적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 청시대의 통치형태와 사회구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선 신사의 다양한 역할과 존재형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따라서 본고에서는 명 청대 국가권력과 신사와의 관계를, 그들이 수행했던 정치 사회 경제적 역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에 앞서 신사의 구성과 동류의식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신사의 개념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신사를 현임관 퇴임관 등의 관직경력자와, 거인 감생 생감 등 관위(官位)와 근접해 있는 미입사학위소지자를 포함하는, 과거제와 학교제, 연납제 등을 매개로 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어떤 자격을 받아 정치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지배층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겠다.{ 장중례의『중국의 신사』에서 신사의 구분은 상층신사(관료, 진사, 거인, 공생)와 하층신사(생원, 감생)로 구분하고 있다. 중국사연구실의『중국역사(하)』에서는 신(紳)이란 관직자 내지 관직을 보유할 수 있는 잠재적 학위의 소지층(진사, 전직관료, 거인)이고, 사(士)는 관료가 될 가능성이 없는 계층(생원, 감생, 거인)으로 구분하고 있다.Ⅱ. 신사층의 형성1. 학위소지자 - 사(士) 의 출현과 계층적 고정화. 생원(生員) : 동시(童試)에 합격한 학생으로 성적에 따라 국자감에 진학할 수도 있고, 향시(鄕試)에 응시할 수도 있다. 특히 생원만이 향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명대 에 처음 생긴 제도로써, 이는 학교-양사기관(養士機關)제도 공생 경쟁률은 높아져, 진사(進士)는 고사하고 거인이나 감생까지도 계층상승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절대다수의 생원은 국가가 보장해 준 특권을 향유하면서 보신가 적 존재로 향촌에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 감생도 15세기 중기부터는 예감생(例監生)이 생기면서 감생의 수가 2배로 증가하였지만, 매년 선발되는 관료의 수는 국초보다도 오히려 감소되었다. 그 때문에 이들 또한 입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에 정착하게 된다. 거인도 감생층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문제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의 생활양식이나 세계관은 서로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미입사학위층 사이에 광범한 동류의식을 만들어 주어, 보신가 적 존재로 향촌에 정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상과 같이 명 중기 이후 생원 감생 거인 등 미입사학위층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사회에 옹체(壅滯)되어 가던 15세기 중엽을 고비로 하여 관인을 배출한 가문이 계속해서 관인을 배출하는 경향이 점차 굳어져갔다. 명초부터 과거제와 학교제가 결합되어 제도적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학위소지자들은 동류의 계층의식, 행동양식으로 하여 중기 이후에 점차로 수 양적으로 옹체되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계층으로 고정되어 갔던 것이다.{ 명중기 이래, 개인의 이해관계 혹은 공통의 이해관계 때문에 생원뿐 아니라 광범한 학위소지자들이 집단행동을 일으킨 예는 수없이 많다. 그것을 유형화해 볼 때, 반제학관운동(反提學官運動), 향시부정항의(鄕試不正抗議), 지방관의 탐학(貪虐)에 대한 항의 배척운동, 반환관운동(反宦官運動)은 반관적 성격을 띠고, 세 역 감면운동, 수리시설 교량 등의 수축(修築)은 그 지방의 민중여론을 대변하는 성격을 띠고, 관인층의 횡포에 대한 항의 공격은 관직경력자와 학위층간의 갈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명말에 이르면 이러한 집단행동이 향신공의(鄕紳公議) , 사인공의(士人公議) 로 지칭되기도 한다.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면 국가권력측에서나 사회에서도 동류의식에 기초를 두고 활동하는 학위층을 사(士) 라고 하는 과거제가 결합되었으며, 이갑제(里甲制)질서가 점차 해체되어가자 미입사학위층이 관직경력자층과 함께 향촌질서 유지에 점차 지도적 역할을 증진시켜 갔으며, 국가권력과 일반 평민, 양측 모두로부터 이들 두 계층이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전의 다른 시대에는 없었던 여건들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Ⅲ. 명대의 국가권력과 신사1. 원말 명초 동란기(動亂期)의 지배층과 주원장(朱元璋) 집단1330년대 말부터 중국의 각 지역에서 농민의 봉기가 접종(接踵)하였으며, 1350년대부터는 경제적 기반ㅌ을 가진 세력도 반란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대집단의 봉기로 나타났다. 이 때 원의 군사력은 이미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있어, 향촌사회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토호나 지주는 의병(義兵) 민병(民兵)을 조직하여 자위(自衛)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위세력에 대한 원조의 대응은 화북의 자위세력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농민반란군 내지 반원집단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지주(地主) 자위세력들은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자위를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갈구하고 있었다.주원장 집단은 바로 이러한 때에 그들 앞에 나타나 먼전 봉기한 대집단들의 폐쇄성과 농민착취를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사대부나 지주세력을 포섭하고, 유교주의를 표방하며, 국가건설을 지향하는 제도를 정비하고, 권농정책(勸農政策)을 펴서 농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원장 집단과 결합한 사대부나 지주세력은 그들이 이상을 펼 수 있는 강남으로 발전방향을 잡도록 주원장을 유도하였다. 특히 강남의 사대부들이 명조의 통치조직 정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는 원의 사회적 지배층이 원말 동란기 원조(元朝)에 등을 돌리고, 주원장 집단에 가담함으로써 이민족 치하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교주의 국가인 명을 건국시킨 것이다.주원장은 이들 향촌지배층을 체제내로 흡수함으로써, 기존의 강대한 군웅세력과 원조(元朝)를 물리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수 으로는 경제력이 있는 지주층 중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을 체제내로 유인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새로 학위를 얻은 사람은 전대부터의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 외에 국가로부터 특권적인 신분을 획득함으로써, 향촌에서 지배력이 더욱 굳건해지게 되었다. 특히, 명 중기 이후부터는 이들 미입사 학위층과 종래부터 사회의 지배층으로 관력경력자를 합하여 통칭 신사 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2) 중기 이후의 사회변화와 신사명초에는 이갑제 질서를 통하여 향촌질서가 유지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미입사 학위소지자나 기존의 관직경력자는 모두 이갑제 질서 내에 별다른 문제없이 융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 되면서 정치 사회적인 변화가 현저해졌고, 명초의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는 향촌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신사는 이갑제 기능의 일부를 대행함으로써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순기능을 하였지만, 소수의 신사나 세호가(勢豪家)는 광대한 토지를 집적하면서도, 요역우면특권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 역을 탈면하였다. 그렇게 탈면된 부분은 다른 이갑호(중소지주나 자작농)에게 전가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더하여 각종 재해, 질병, 가내대사(家內大事) 등이 빈발하였으므로, 이갑호 뿐만 아니고 이장 양장호(糧長戶) 등 대지주마저 몰락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그 결과 향촌의 질서와 재생산유지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상의 모든 변화가 연쇄 반응하여 농촌의 계층분해가 가속화 되어, 거의 전국적으로 황책(黃冊)에 등재된 호구수가 격감되고, 이제는 호수편성에 의한 이갑제와 그것을 기초로 한 향촌질서의 유지 및 세역의 징수는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었다.명 중기 이후 농민의 세 역 부담이 가중되고 요역의 과파(科派)와 우면의 기준이 호칙(戶則)보다 전토(田土)를 중시하게 되자 이갑정역(里甲正役)의 일부마저 우면대상이 되었으므로, 신사와 비특권 이갑호간의 부담의 격차는 더욱 커져 신사의 사호적 지위는 한층 돋보이게 되었다. 더구나간접으로 적지않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경제적 역할, 신사는 특권을 이용하여 대토지를 집적하거나 요역을 남면(濫免)받았다. 개인의 영향력 혹은 관과 연결하여 수리용익(水利用益)을 장악하였다. 도로 교량 도장(渡場) 등을 사점(私占)하거나, 시장을 개설하고, 아행(牙行)에 간여하며, 고리대를 경영하고 객상에게 자본을 공급하며, 염밀매(鹽密賣)나 해상밀무역에 참여하고, 수공업 경영에 간여하는 등 시장이나 상품유통 구조를 지배하였다. 셋째, 문화적 역할, 신사는 향촌에서 개인의 영향력 외에도 향약 서원 등의 강학(講學) 혹은 일용유서(日用類書) 선서류(善書類)의 간행을 통하여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였고, 그들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신사는 또 향론(鄕論)을 주도하였는데 이것은 곧 신사의 향촌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 신사는 또 지방관의 유임 혹은 방축운동(放逐運動), 증현(增縣)운동, 세 역 감면운동, 각종 수리시설의 수축 혹은 수리관행의 개혁운동, 진(津) 양(梁) 혹은 도로의 수축, 각종 구제 등 광범한 문제에 대하여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였다.이상 신사가 향촌사회에서 연출한 사회경제적 역할과 존재형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제발전의 선후차(先後次), 사회발전의 질적 차이를 불문하고, 신사는 존재하는 중국의 전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신사의 역할은 대개는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하게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었으며, 신사는 이러한 (공적인)역할을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지방관 혹은 향촌민의 요청에 응해서 수행하였다. 환언하면 향촌의 이해가 신사의 공의식 혹은 사적인 이해와 합치되는 경우에는, 신사는 평민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여론을 지배하였다.명 중기 이후 이갑제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에 신사는 이갑제 기능의 일부를 대행함으로써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순기능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입사학위층의 수가 급증하였고 그들이 또한 사리추구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증가된 수의 학위층이 향유하는 특권과 영향력만다.
송대의 사대부(士大夫)들어가며근대 이전의 중국은 강력한 군주를 정점에 둔 국가구조를 대체적으로 유지하여 왔고, 이러한 집권적 체제에 참여하는 관료가 지배역할의 분담과 특권의 향유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지배층을 구성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들을 범주화하고자 할 때, 주로 관료를 가리키면서도 토지소유라는 경제적 우월성에 기초하여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지식인 교양인이라는 의미 역시 포괄하는 사대부(士大夫) 란 말이 유용한 개념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정착으로 과거는 관료의 자격요건을 지식과 교양에서 찾았고 이후 국가권력의 후원아래에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많은 관료와 또 훨씬 더 많은 관료 지원자들이 생겨나 당시 지배층의 중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광의(廣義)의 사대부라는 개념 속에는 송대의 지배층을 특별히 사대부라 칭하면서 그 이전의 경우와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물론, 사대부가 단지 과거를 통한 관료는 아니지만) 이는 당송변혁기 이후 관료를 선발하는데 있어서 서민들에게까지도 보다 철저한 제도적 보장을 받게 하는 과거제도의 정착에 중요한 의마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을 논리화시키는 데는 송 이후 근세론(近世論) 에 입각한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은 송대에서 군주독제제체의 확립과 서민의 성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져 사대부들이 군주에게 예속되는 피동성을 지님과 동시에 지식과 교양을 지닌 서민에게까지 개방되어 독특한 생기와 활력을 띄게 되는, 서로 모순 되는 듯한 양면성이 사대부를 특징짓는 성격이라 이해해도 좋겠으나, 이러한 모순성을 최고 지배자와 피지배층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중간계층에게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할 것이므로 근세적 사대부 의 특징만으로 제한하거나 근세론적 관점에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겠다. 물론 송대 사대부의 양면성이 모든 시대의 중간계층으로까지 일반화되어 버리면 당송변혁기 가 가지는 의미가 의문시되고 이 새로운 시대의 지배층의 존재형태를 합의된 역사상으로 제시함에 있어서 많시 제를 만들어 이것을 통하여 뽑혀진 과거합격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지님으로써 과거와 과거합격자들의 지위가 군주 곧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한층 더 높아졌을 것이다.2 과거제의 공정성 확보봉미법(封彌法) - 답안지에 수험자의 이름을 봉하는 법.등록법(謄錄法) - 답안의 내용을 일괄적으로 필사하는 것.별두시(別頭試) - 시험관의 친척이 시험 응시시 따로 모아 시험을 치르는 것.이는 송대에 신분지위에 관계없이 공정한 과거를 통하여 관료로 될 수 있는 길이 광 범위하게 열려져 있었고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3 과거응시자의 증가학교제도의 개편- 국자감 태학 : 정원의 확대, 일반민들에게까지 개방.- 관학설립 : 지방에 설립 지식인의 존재가 지방으로까지 확대.지식인의 증가는 과거를 통하여 관료가 되고자 했던 지식인이 증가했음을 의미하며 학교제도의 개편으로 수혜자가 되기 어려웠던 이들에게까지 지식과 교양이 보급되었 다.2) 국가권력의 특권 부흥지식인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과거응시자의 증가율만큼 합격자의 증가율이 따르지 못하였 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탈락자들은 소요와 저항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국가 권력의 대응-특주명(特奏名)의 확대와 그 대상에 대한 경제적 특권의 부여-은 송대 지배층 의 확대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특주명의 확대특주명은 여러 차례 해시에 합격하고서도 성시에는 합격하지 못한 거인들의 경우 연령 조건을 갖추었을 때 성시를 면제시키고 하급관료로 등용하는 것이다. 점차 그 조건이 완 화되어 그 해당자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고 성시보다는 특주명에 의해 관료가 되고자 하였다. 이는 국가권력이라는 배경 위에서 지식과 교양을 곧 사회적 특권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경제적 특권의 부여거인들 역시 차역(差役)이 면제 혹은 경감되고 일시적인 잡세가 부과되지 않는 종신적 인 면역의 특권이 주어졌다. 심지어는 태학(太學)의 학생들도 이러한 특권을 누렸으며 주학(州學)과 현학(縣學)의 학생들조차도 형벌적용상의 특권과층의 성장송대 지주의 성격으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균전제(均田制)와 같은 국가적인 토지제도의 붕괴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토지소유층 즉 신흥지주층(新興地主層)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 개입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으며 이들의 관계가 사대부 의 확산과 서로 모순 되지 않으니 사대부와 지주는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송대의 사대부가 지식과 교양을 주체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기반은 그들이 지 주일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통해 관호(官戶)화 형세호(形勢戶)를 지주로서의 사대부가 가지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보는 일반적인 이해가 있다. 이는 지주로서의 사대부가 자 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특권적인 지배층으로서 활동하였을 테니, 그릇된 견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특권을 지닌 지주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기초형태인 촌 (村)안에서의 그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행정권만이 아니라 수리권(水利權), 통상권(通商 權) 등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2. 지역사회에서의 활동촌(村)과 같은 지역사회에서 농업생산이 직접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지주로서의 사대부와 지역사회의 관계에는 농업생산이라는 공통의 과제가 중요하였을 것이다. 이는 많은 농서(農書)가 출판 유표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지주로서의 농업생산에 대한 관심과 사대부가 가진 지식, 교양능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지역사회의 개별화된 상황과 농업생산의 지방적 편차로 인해 일반화된 고려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지방사 연구를 참고로 당송변혁기 이후 크게 개발된 강남(江南)지방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실제적인 활동을 알아보고자 한다.수리사업에의 참여수리사업은 원래 국가권력의 큰 과제로서 그 기본책임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게 있 었으나 그 부담은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했다. 따라서 송대의 지역사회 유력 자들인 사대부들이 수리개발에 필요한 경비를 감당할 능력을 갖추면서 중요한 역할을 행하게 되고, 여기에서 지주로서을 살펴보면서 특히 그 결과 과거의 응시자들이 점차 지방의 지식인들까지 포함하여 그 수가 크게 늘어나는 현상을 다루어보겠다.1) 당대(當代)의 과거제도- 1단계 : 학관(學官)과 주현(州縣)에서 치러진 첫 번째 시험. (송대의 해시)2단계 : 생도(生道)와 향공(鄕貢)을 대상으로 중앙에서 다시 합격자를 고르는 시험. (송 대의 성시)3단계 : 이(吏)부의 전선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면접. (송대의 전시)2) 송대 과거제도와의 차이점- 2차 시험이 예부의 관할이 아니었다.진사과 이외에도 수재과(秀才科) 명경과(明經科) 등을 중요시하였다.송대에서처럼 예부에서도 성시를 주관하고 진사과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당 중엽 이후 제도적 정비의 결과이니 송대로 이어지는 과거제의 모습은 당 후반기에 가면 더 분명해 진다.3) 과거 응시자의 증가- 과거제도가 당대에 관료선발제도로서 자리잡아갔다.- 근거 : 과거합격자의 감소.행권(行卷) 혹은 공권(公權)의 성행.과거합격자에 대한 우대와 음(陰)을 비롯한 다른 방법에 의한 입사자들이 그다 지 출세하지 못했다는 점.의관호(衣冠戶)의 등장. (송대의 관호와 유사한 경제적 특권이 주어졌으며, 그 특권이 진사과의 합격자에게까지 주어진 것처럼 보여 진다. 이는 과거나 그 합 격자가 국가권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인 중요성을 더해갔다는 증거일 것이다.)4) 송대 과거와의 차이- 합격여부가 응시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 좌우되기 쉬웠다. (면접에 의한 결 정) 과거제도의 사회적 영향력 반감.5) 당대 과거제도의 의의- 능력에 따른 개방성을 기본적인 성격으로 하였다.- 광범위한 사회계층으로부터 관료를 뽑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식인들 스스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하면서 자기 확대를 해나갔다. (私學의 발전)- 그 응시자는 주로 지방출신으로 이는 과거의 개방성을 이용하여 관료가 되고자 한 것이 니 이들이 사회적 지위나 신분으로 보아 이전까지는 관료가 되기 어려웠던 세력이었을 것 이다. 따라서 당대 지배층의 성격변화를 예상할 수기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중소지주들을 신흥지주층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물론 소규모의 토지조차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으니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교양까지 가진 이들이 지역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그렇다면 이러한 신흥지주층이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었던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그들은 지역사회에서의 자율성을 높여나갔다. 이는 균전제의 붕괴로 토지만이 아니라 농업용수 역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주원이겠으나, 농서의 출판과 보급에서 잘 드러나듯이 신흥지주층의 수리, 관개에 대한 관심 역시 그 원인의 하나였다. 신흥지주층의 활동은 지역사회 자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다대의 지역사회가 율령제의 해체와 함께 실제적인 의미를 잃은 향리제(鄕里制)를 대신하여 촌(村)이 그 기초단위로 되었는데 후당, 후주시기에 좌사(佐史)나 이정(里正)대신에 지역사회의 유력지주였던 촌장이 세역(稅役) 징수의 공식적인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이는 당 후반기의 신흥지주층이 자신들의 능역과 함께 세역 징수의 임무처럼 국가권력과의 직접적인 연계라는 배경을 가지고 새롭게 지역사회의 지배층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학의 쇠퇴와 더불어 주현(州縣)에서 시험응시자가 늘었다는 점과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한 강남으로부터 과거합격자들이 늘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사회적 신분이 낮은, 그러나 경제적 능력과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던 신흥지주층이 과거를 통하여 보다 확실한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려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송대와 같은 사대부의 확산이 잇을 수 없었다. 당대에는 과거 합격자의 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 최종합격 이전 단계의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제도적 특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제도적으로 특권을 보장받은 지식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한된 범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중앙정부의 위축으로 세력이 커진 절도사(節것이다.
로마 공화정과 신분투쟁들어가며로마 공화정기에 로마인들은 무력에 의해 지중해 세계와 그 광대한 후배지(後背地)를 정복하여 통일적으로 통치했다. 아프리카 북부해안의 동쪽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지중해와 바닷물이 스치는 거의 모든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만들어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를 수 있는 제국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배영수 편,『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p. 19로마인들은 또한 정복지의 평화를 유지하고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함으로써 법률과 행정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했다.로마사는 헌정(憲政)상으로 왕정, 공화정, 제정(帝政)이라는 서로 다른 통치형태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상이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세 정체(政體)의 변천은 로마인들이 역사를 형성해간 진보의 과정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김진경 외,『서양고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6, p. 252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공화정의 정착과 공화정기에 지배귀족들과 평민계급사이의 2세기 가량 진행된 신분투쟁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의 전개 양상과 그것이 로마 국제(國制)에 끼친 영향이다. 이에 앞서서 로마 왕정기의 사회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통해 중심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1. 왕정기 로마사회의 구조와 공화정으로의 이행(移行)왕정기 로마 사회구조의 실상은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체제였다. 왕권은 단지 외부 지배세력의 상징일 뿐이고, 로마사회는 사실 소수의 혈통 귀족들(patricii)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왕(rex)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대외적 업무에 대한 책임을 졌다. 이는 전쟁에서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군사적 분야에서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나, 내정면에서 왕은 귀족들의 권한을 인정해주었다. 그들의 지배력의 기반은 귀족정 시대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두 가지였다. 우선 그들은 소가족 단위의 평민-이들은 귀족과는 달리 단지 무리 를 이룬 자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플레브스(plebs)라 불렸다-과는스의 고결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이유로 타르퀴니우스를 타도했다고 한다. 루크레티아가 몸을 더럽힌데 따른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으로 촉발된 폭력 혁명이 타르퀴니우스 왕가 축출, 왕정철폐, 충분히 발달한 정부 기관들을 갖춘 공화정 수립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프리스 하이켈하임 저, 위의 책, p. 1082. 공화정(res publica)의 구조참주처럼 군림하던 에트루리아인 왕을 추방한 로마의 귀족들이 왕정을 폐지하고 수립해간 정체(政體)가 공화정이었다. 공화정 혹은 공화국이라는 말은 원래 공공의 재산 과 공공의 일 을 의미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반드시 민주적인 통치형태를 의미하지는 않았고, 왕이나 황제가 존재하는 통치형태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체를 의미하였다. 즉 res publica'는 본질적으로 기원전 5~4세기에 발달한 로마의 공화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때의 공화정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으며,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억제한 법과 제도를 통해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균등하게 부담한 정체였다. 그리스 역사가로서 기원전 2세기에 로마사를 저술한 폴리비우스가 로마 공화정을 극찬하였을 때, 그도 로마 공화정이 왕정과 귀족정 및 민주정이 혼합된 혼합청체 임을 주목하였다. 즉 왕정은 콘술, 귀족정은 원로원, 민주정은 민회로 구현되는데 이 삼자가 균형을 이루면서 상호견제하는 공화정은 안정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로마인들의 성공비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리비우스가 바라본 로마 공화정의 세 가지 요소가 실제적으로 완전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며, 당시 공화정은 사실 과두정적이었다.{ 김진경 외, 위의 책, p. 2611) 콘 술(consul)왕정의 몰락은 소수 혈통 귀족에게 권력이 이양됨을 의미하였다. 왕이 지녔던 군대지휘권은 두 명의 콘술의 수중에 넘어갔다. 콘술들은 혈통귀족 중에서 민회(켄투리아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콘술들은 임페리움을 보유하였고, 한 사람에 의한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각자는 상호간에 비토(veto)권을 행사할 수씨족과 부족의 중간단위인 쿠리아가 30개로 이루어진 쿠리아회 , 최소의 군대단위인 백인대, 193개로 구성된 켄투리아회 , 지역구 35개로 구성된 트리수스 인민회 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투쟁의 결과 기원전 471년에 평민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트라부스 평민회 가 생겨 한 가지가 더 늘어났다. 그러니까 로마시민들은 쿠리아회, 켄투리아회, 트리부스 인민회, 트리부스 평민회 중 어떤 것이 소집되느냐에 따라 각자 자신이 소속한 쿠리아, 켄투리아, 트리부스 별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쿠리아회는 만장일치 원칙이 사용되었고 그 밖의 민회들은 각자 투표를 하되 과반수 원칙에 따라 과반수가 넘는 것이 그 소속집단의 결정표가 되었다. 따라서 1표로 계산되는 투표단위는 트리부스회에서는 트리부스, 켄투리아회에서는 켄투리아였다.{ 현대처럼 1인 1표제나 대의제가 아니라, 단위투표제(the unit voting system)' 또는 집단투표제(the group voting system)'이었다. 허승일 저,『로마공화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pp. 11~12트리부스회나 켄투리아회에서는 투표를 할 때, 제일 먼저 추첨을 통해 최우선 투표권을 행사할 트리부스와 켄투리아를 선정한다.{ 추첨은 하늘의 의사가 반영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어, 시민들은 이들의 개표결과가 공표되면 그대로 따랐다. 트리부스의 최우선 투표권을 principium, 켄투리아회의 최우선 투표권을 praerogative라 한다.1 쿠리아회 : 로물루스 왕때 로마의 3부족에서 각 10개씩 30개의 쿠리아로 구성되었다. 왕정시대 왕위는 세습되지 않고 쿠리아회에서 왕을 모셔다가 군대명령권, 민간인 통치 권을 높이 들고 포괄하는 임페리움을 부여하였다. 투표는 없었고 완전무장한 쿠리아원 (員)들이 창과 방패를 높이 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고 한다. 공화 정시대에는 콘술, 프라이토르, 독재관 주재하에 매년 초에 정무관들에게 임페리움을 부 여하였다. 대사제가 소집하는 경우에 사제 취임식을 거행하토를 획득하게 되면 그것을 기존의 농촌 트리부스에 편입시킨 것은 전쟁세 징수와 켄투리아회의 개편 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허승일 저, 위의 책, p. 16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10개의 트리부스가 증가, 총 35개로 확정되었다. 이 민회의 주기능은 재판과 재무를 담당하는 콰이스토르(quaestor), 로마의 경기를 개최하 고 치안이나 위생 등을 감독하는 아이딜리스(aedilis){ 평민의 보호자인 호민관들의 보조자(평민출신). 원래 아벤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케레스 신전의 관리인들이었다. 평민들의 기금과 문서보관소의 관리인들이었고, 리비우스에 따라면 기원전 449년부터는 원로원의 결의를 관리했다. 훗날에는 경찰로서 활동했고, 시장터, 계량(計量), 공공사업, 음식과 물 공급, 공공오락을 관장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위의 책, p. 120를 비롯한 소정무관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법과 벌금형의 부과 같은 재판도 여기서 행해졌고 대체로 한 트리부 스 당 2,000명씩 전체 70,000여 명의 시민이 투표했다고 한다.3. 신분투쟁(The Struggle of the Orders : 기원전 494~287)귀족층은 혈통에 의해서 그들이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담당한 기능과 특권에 의해 폐쇄적인 신분을 이루게 되었다. 귀족들은 새로이 창설된 공화정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귀족들은 신관직을 포함한 모든 정무관직과 원로원을 독점하고 평민출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양 신분간에는 통혼(通婚)이 금지되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공직이나 군 지휘관직에서 몰아내는 데 사용했음 직한 한 가지 방법은 켄투리아회에서 이미 선출된 후보들일지라도 쿠리아회에서 정식으로 명령권을 수여받지 못하도록 거부하는 것이었다. 명령권이 없으면 아무리 콘술로 선출되었을지라도 취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6~5세기의 전환기부터 귀족기사들보다 중무장 보병들이 전투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들의 군사적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던 평민들은 종종 로마로부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평민은 법적으로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당시의 법은 성문법이 아니라 귀족 신관들이 귀족들의 구전전승(口傳傳乘)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민은 귀족의 편견에 좌우되지 않는 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기원전 452년경 호민관들은 정의롭고 공평한 법을 제정하기 위해 귀족과 평민을 대표하는 법제정위원회, 10인의 입법 위원회를 결성하자고 원로원에 제의하였다. 원로원은 평민의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기존의 법률의 성문화를 위해 귀족 출신의 법률제정10대관(法律制定10大官) 을 임명하는데 동의하였다. 기원전 451년에 콘술들과 호민관들의 임명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고 법률제정10대관에게 통치권과 법제정권이 위임되었다. 이들의 작업결과는 켄투리아회에서 국법으로 인정되었고 그 내용은 12개의 표에 새겨져 광장에 세워졌다. 이것이 바로 로마법의 모체(母體)가된 12표법{ 12표법은 갈리아인의 침입에 의해 파손되었으나 원문 내용이 약 1/3은 후대 저술가들의 인용에 의해 알려져 있다. 귀족과 평민간의 통혼금지-신분간의 법적 차별 규정(제11표), 채권자가 정해진 기간내에 부채를 변제하지 못하는 채무자를 나포, 포박하거나 혹은 살해하거나 티베르 강 너머 외국에 노예로 매각하는 것(제3표)-부채 노예제를 인정하고 채권자들의 권리를 엄격히 규정, 서민에 대한 극형은 켄투리아회에서 결정-일반 시민의 기본권리를 보호한 조문으로 지적될 수 있다.(제9표) 김진경 외, 위의 책, pp. 267~268이었다. 12표법은 원칙상 귀족과 평민간의 법적 공평성과 다소나마 법 앞에 모든 시민의 평등성을 수립한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주로 기존의 관행을 성문화했기 때문에 평민들의 불만의 뿌리는 사실상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법률제정10대관 들은 평민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하였고, 기원전 449년에 평민들은 제 2차 분리운동을 전개하여 법률제정10대관 을 몰아내고 콘술과 호민관들이 다시 선출되었다.5) 칸슐러 트리뷴(c 127
陽明學의 성립과 전개들어가기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호한 이래 중국사회에서 유교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지배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대의 유교는 원시 유가 본연의 것이라기보다는 법가 사상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송대의 학자들은 공맹시대 유가의 부활을 꿈꾸며 신유교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후 중국사회에서 체제 교학화한 신유교는 송대를 시발점으로 하여 중국공산혁명이 이루어진 지금까지도 도덕 그 자체로서도 계승되어 재생되고 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송대에 성립된 신유교가 사회변혁이 급격했던 명대에 어떻게 양명학으로 변화되어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해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1. 양명학 이전의 주자학과 육학(陸學)1) 송대 주자학의 성립데니스 트위쳇이『케임브리지 중국사』 제 3권에서 지적한 것처럼 송대는 중국이 점차적으로 강력한 정통(正統)의식을 지닌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개인이나 집단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특정한 목표를 성취할 목적으로 행동하거나 행위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련의 정치적 가치, 감정, 지식의 체계이다. 중국에서 순수 이데올로기는 이론이나 주의(主義)로 불리며,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사상(思想)이라고 불린다.사회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존 킹 페어뱅크 저, 중국사 연구회 편,『신중국사』, 까치, 1994, pp. 137~138이러한 송대에서의 유학의 부흥은 한편으로는 중국의 정치 및 사상에서 수세기에 걸친 외국의 영향력에 대한 국수적인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학문적 훈련의 자연적 증가와 점차적으로 지배적이 된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의 관심에 따른 당연한 소산이었다. 관료들은 송왕조에서 그들이 고대경전으로부터 배운 원칙을 실제 통치에 적용하고자 노력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Chales Hucker 저, 박지훈 외 역,『중국 문화사』, 한길사, 1985, p. 355, 지배자들은 불교의 내세나 도교의 속세를 떠난 반체제 운동의 전통과 같은 독단적 개인주의와는 달리학의 이론적 체계화와 현실적 실천과정을 통하여 이(理)와 성(性)은 객관 타당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객관 타당성의 추구 속에서 예학의 발달과 사회적 규범의 확립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이 확립된 예와 규범이 이(理)에 대신하여 유일성과 절대성을 지니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우려한 육구연은 성즉리에 대해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여 주자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주자학의 성(性)의 개념에 대신하는 육학의 중심개념은 심(心)이다. 물론 이전에도 심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송학의 한 흐름이 그에 이르러 심즉리를 성립케 한 것이다.{ 이범학, 앞의 책, p. 232이후에 왕양명은 송대 육구연의 문집을 간행할 때, 그 서문에서 성인의 학은 심학(心學)이다. 하여 육구연의 심학을 추존하였다. 심학은 이학(理學)의 대칭으로서 주자학에 대한 육구연의 학문을 일컫는 것이다.{ 조영록, 앞의 책, p. 53이러한 송대 육구연의 심학은 명대 주자학과 대항하여 독자적인 심학의 사상체제를 수립한 양명학의 효시가 되었다.{ 이범학, 앞의 책, p. 2312. 양명학의 성립과 배경1) 명(明)왕조의 성립과 체제교학이 된 주자학명(明)조는 거의 1세기에 가까운 이민족 정권인 원(元)조를 멸망시키고 한족(漢族)에 의해서 세워진 왕조이다. 특히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화북지방에서 보면 250년 만에 이적(夷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면모를 일신한 왕조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새로운 발전이 이룩될 것으로 보여 졌고, 특히 사상학술 방면의 융성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사실 명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원대에나 별로 다름없는 사상학술의 침체가 계속되었다. 오히려 학풍에서 본다면 원대보다 못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원대의 학자들은 송학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천적인 방면에 힘을 쓰면서도 오징(吳澄, 1249~1333)과 같은 경전학자에서 보는 것처럼 지적인 탐구심은 잃지 않았다. 그런데 명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전통을 지키는데 집착대 사회체제의 근간인 이갑제(里甲制){ 주원장이 창설한 것으로 11호(戶)를 1갑(甲), 10갑을 1리(里)로 편성한 행정제도이다. 목적은 조세를 거둘때 갑 및 리 단위의 공동책임으로서 부과하는데 있었고, 윤번제로 책임자를 정하였으므로 원칙적으로는 모든 호가 황제의 민으로서 동등하였다. 일군만민체제를 향촌 구석구석까지 그물망처럼 뒤덮고 있었던 일종의 체제 하청기관이었다. 후에는 각 호간의 경제적 불균형이 생산력의 상승, 상공업의 발전, 화폐경제의 농촌침투 등에 의해 명대 중엽 이래로 이갑제는 사실상 해체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戶川芳郞, 앞의 책, p. 359)의 동요 해체로 이어졌다.{ 배영동, 앞의 책, pp. 27~293) 명대 심학(心學)의 대두역사적인 새로운 여러 모순이 표출되고 있을 때, 그것이 아직 초기적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추세를 예지하고 위정자의 수양을 기초로 한 위로부터의 교화는 더 이상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戶川芳郞, 앞의 책, p. 317즉 주자학이 명대에 와서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되어 군주권과 밀착되면서부터 그 사상 내용은 점차 희박해지고 형식적인 허구성만이 남게 되었으므로,{ 조영록, 앞의 논문, p. 54당면한 현실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한 것이다.그런데 양명에 한발 앞서 심학을 제창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명 전반기에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명성을 얻은 진헌창(白沙, 1428~1500)이었다.{ Chales Hucker, 앞의 책, p. 365그는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많이 읽고 도덕적 실천을 행하도록 교육받았으나 끝내 심(心)과 이(理)가 하나 되지 못해 스승을 떠났다. 독서를 떠나 정좌(靜坐)에 힘쓴 결과 곳에 따라 천리를 몸소 겪어 알 수 있다 는 새로운 심학을 열게 되었다. 이런 연후로 황종희가 후에 《명유학》에서 명대의 심학은 백사에서 시작하여 양명에 이르러 대성하였다 고 서술하였던 것이다.{ 조영록, 앞의 논문, p. 54간이 타고난 재능에서 결과한 상하의 분이나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분이 서로 모순하지 않는 기능적 분업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민평등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사민평등은 이업동도(異業同道)로 이야기되는데 사민의 구분은 자질 과 능력 에 따라 정해지나 그 분 은 생인을 위하여 각각 분업에 의한 일체적 대동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에 그것은 상하계층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道)가 같으니 학(學)도 사민의 공유일 수밖에 없다. 종래 과거이 학과 밀착된 주자학이 사의 전유물로 해온 유교를 양명은 사민에게 공개함으로써 사민동도(四民同道), 사민공학(四民共學)에 의한 대동사회의 건설, 즉 이상사회의 건설을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대동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방법은 인간 각자의 도덕적 자각에 호소할 뿐이었다.이러한 양명의 사민평등관-도덕적인 점에서 사민은 평등하다-은 분명히 주자학에서 사대부관료를 실천주체로 하여 민을 위에서부터 덕화(德化)한다는 방식을 그 실천을 위한 독서, 궁리 등의 방법론이 도학군자(道學君子)적인 방법과의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2) 양명의 격물치지의 새 해석양명의 심즉리는 격물에 《대학(大學)》의 격물치지에 대한 주자와의 해석상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주자는 격물의 격(格)을 지(至), 물을 사물이라 하여 격물치지를 사물에 지(至)하여 지(知)를 이룬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양명은 격(格)을 정(正), 물은 사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뜻이 있는 심중(心中)의 물(物)이라고 보아 격물을 심(心)의 부정(不正)을 바로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치지(致知)의 지(知)는 양지(良知)이며 치는 완성인, 말하자면 사람이 타고난 본연의 지, 즉 양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내가 말하는 치지격물은 내 마음의 양지를 사사물물에 치(致)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이다. 내 마음의 양지의 천리를 사사물물에 치(致)하면 사사물물이 모두 그 이(理)를 얻게 된다. 내 마힌 것에 대해 양명은 천민을 신(新)민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측 친(親)민은 위에서 아래로 교화한다는 것에 치우치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양명의 유명한 일화{ 어떤 제자들이 길에서 양명학을 강의하였던바 믿는 사람이 절반이었다고 보고한 데 대해, 너희들은 성인의 간판을 걸고 강의하였을 것이다. 성인이 온다고 하면 누구나 도망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입장에 섯지 않는다면 강의할 수 없다.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지평에 선시점을 두는 입장을 취하려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자학 자체가 원래 사대부 관료를 대상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신민설에도 단적으로 이러한 입장이 드러난다. 양명은 자신도 사대부 관료이기는 하나 주자학과는 달리 서민을 도덕 실천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실천 주체로 간주하여 그들에게도 다같이 도덕 실천의 책임을 지우려하였다. 즉 주자가 사대부 관료를 실천 주체로 하여 오로지 그들에게만 도덕의 실천을 기대하여 그것에 의해 민을 위로부터 덕화하려 하는 것과 그 방법론 또한 독서, 궁리 등 초일상적이며 엄격한 도덕 엘리트적인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양명학의 발흥이라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는 주자학의 수정으로서 주자학의 보다 넓은 확산, 보다 하층에의 침투 및 대중화라는데 기인하여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양명학의 새로운 심즉리 및 양지론 등의 새로운 사상들은 군-관에 의한 위로부터의 정치라는 구도를 배격하고, 당면한 향촌질서의 재편이라는 과제를 광범위한 하층의 실력자들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어울리는 것이다. 또 그만큼 사람들의 진심에서 나오는 양지에 기초해 현실에 바로 응하는 이에 의한 여러 모순들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이 군, 관에 대한 언급이 많은 데 비해 양명학은 효, 제에 대해 언급이 보다 많은 것은 향촌 질서를 혈연 의제적인 종법 질서를 주축으로 하여 장유(長幼)의 서(序) 상하적 질서의 주축다.
포에니 전쟁과 그라쿠스 시대1. 제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33년 사이에 로마 공화정은 여러 면에서 전성기였다. 신분투쟁이 종결된 후인 이 시기의 정치체제는 귀족과 평민출신의 원로원내 신귀족에 의해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의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내부의 외부민족들인 에트루리아인이나 삼니움인들을 제압하고 이탈리아 반도내의 통일을 이룩해 놓고 있었다.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라는 도시국가에 의해 시작된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이러한 로마에게 지중해 제패라는 터전을 마련해 준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발부리에 금방이라고 탁 부딪칠 거 같은 위치의 시칠리아 섬은 로마의 입장에서나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이라 할 수 있다. 메시나는 최강국인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 연합 의 가맹국이었던 레기움(오늘날의 레조)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농업국이었던 로마는 군단이 바다를 건넌 적이 없었다. 원로원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로마의 최고 결정기관인 민회에 결의 자체를 요구하게 하여, 시민권 소유자 즉 병역 의무자들로 구성된 민회가 내린 결의는 메시나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시작된 제 1차 포에니 전쟁-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라는 뜻이다-이 23년간 지속되게 된다. 당시 최고의 해군국인 카르타고를 상대로 까마귀 라는 발명품을 통해 해전을 육지전으로 바꿈으로써 로마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전에서의 승리 후에 지중해사상 최대의 해난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병력을 잃게 된다.로마군단의 힘이라 함은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인 중무장 보병 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로마는 적에게 져서 돌아온 패장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전통이 있다. 반면에 카르타고의 주력군은 돈을 주고 사는 용병들의 모임이다. 그들의 출신지가 갈리아이냐 에스파냐이냐 아프리카이냐에 따라서 끼리끼리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로마인에 비해서 전쟁참여러져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알프스를 넘게 된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입성하게 된 한니발은 당시 로마와 동맹관계가 아닌 갈리아인들을 포섭해 가면서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게 된다. 당시의 전투라 하면 머릿수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병사의 수가 많은 쪽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 거의 정석이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서 기병과 보병들의 유기적인 활용을 통한 전술 전략들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한니발에게는 희대의 전략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칸나에 평원에서의 회전에 이르기까지 카르타고군은 연승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지방을 차지하게 된 한니발은 로마의 지구전법과 카르타고의 보급로 등을 차단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한 로마 구국의 영웅이었던 스키피오의 등장 또한 한니발에게는 불운이라고 할 수 있다.한니발의 실질적인 배후지역이라 할 수 있는 에스파냐에 대한 공격성공과 이탈리아 남부지방에 있는 한니발을 지구전법에 의해 전력이 소모되기를 기다는 것은 점점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에스파냐 제압에 성공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에 나서게 된다. 당시 집정관으로서는 부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는 로마시민의 지지와 동맹도시 시민들의 지원에 의해서 시칠리아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아프리카에 입성하게 된 스키피오는 누미디아기병대와 함께 카르타고 공략에 성공하게 되고,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있던 한니발을 카르타고로 불러들이게 된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이로써 강화를 맺고 전쟁을 종결짓는 시점에 있었으나, 우연치 않은 기회에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대전을 벌이게 된다. 그 유명한 자마회전 에서는 결국 한니발의 제자-전술을 응용함에 있어서-라 할 수 있는 스키피오의 승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지중해 최고의 해상국이었던 카르타고는 그 자리를 로마에 넘겨 줄 수밖에 없게 된다.3. 로마의 제국 형성 과정정치에 있어서 탁월한 민족이라 하면 우리는 로마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있다. 네 번째 부류는 역사학에 동맹시나 동맹국으로 총칭하는 도시국가다. 로마인은 이들을 소키 라고 불렀다. 현대어는 공동경영자 라고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로마인에게 포에니 전쟁이후의 도시국가들-시칠리아 섬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프로빈키아(속주) 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키게 된다. 이들은 속주법에 의해서 로마에 토지를 몰수당하고 로마에 토지 임차료를 내게 된다.로마의 제국경영을 용이하게 한 역할을 로마인이 곳곳에 건설한 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인은 로마식민지 나 라틴식민지 , 소키 등의 차별 없이 가도를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가도는 현대에서 말하면 사회간접자본 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뜬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군대의 이동을 용이하게 되고, 물자수송이 원활하게 됨에 따라 생산성의 향상 등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지게 된다.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46년 지중해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서지중해의 카르타고와 동지중해의 마케도니아가 멸망한 뒤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면서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로마는 두 가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하나는 내부적인 것으로 공화정 수립과 때를 같이하여 시작된 평민들의 참정권 확대의 방향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것으로 146년에 지중해 세계를 통합함으로써 일단락된 영토확장의 방향을 들 수 있다. 즉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쓰러뜨리고 아카이아연맹을 해체시키는 마지막 작업을 끝으로 로마의 안위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은 비로소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지중해 세계제국으로의 성장은 로마에게 엄청난 번영을 안겨다 준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 싹을 틔워왔던 내부의 문제가 서서히 비집고 나올 배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카르타고를 공격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을 때, 로마 외부의 적국이 모두 소멸되어 버리면 국내의 곪은 문제가 터져 공화국은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하였던 한 정치가의 우려가 적중한 것이다.{ 허승일,「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 신고」,『증보 공더러는 오지로 쫓겨나든가 대지주의 소작인이 되어 농촌에 잔류하였으나, 대부분은 전시의 호경기를 구가하는 이탈리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로마의 풍요와 발전의 주체였던 중소자영농민이 이러하였다면 귀족들은 어떠하였을까?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의 유력자들은 장기간의 팽창주의 속에서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농현상이 심한 지역의 공유지를 장기간 무단 점유하여 사실상 사유화하거나 채권이나 폭력으로 소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대토지를 형성해나갔고 일련의 정복전쟁으로 얻은 수익성 있는 풍부한 노예노동을 이들 농장에 이용하였다. 노예제 라티푼디움 경영이 발달하였고, 노예는 유력자들의 잉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그라쿠스 시대의 심각했던 곡물위기는 농지위기와는 무관한 도시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앞에 로마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설명하였는데 이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티푼디움-이탈리아 내부-경작은 곡물경작이 아니라 수익이 큰 가축사육과 포도 및 올리브 재배{ 당시 로마지배층의 이러한 경향은 카토의『농업론』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만약 나에게 있어 가장 좋은 토지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100유게라의 토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첫째, 만약 질 좋고 많은 포도주를 생산한다면 포도밭이며, 둘째, 관개된 채원, 셋째, 버드나무밭, 넷째, 올리브밭, 다섯째, 목초지, 여섯째, 곡물재배지, 일곱째, 삼림, 여덟째, 나무재배지, 아홉째, 너도밤나무숲이다.’(허승일, 앞의 책,「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로마시 곡물수급계획」, p. 162, 주 63) 또한 키케로와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카토의 언급속에서도 가축사육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이익이 많은 것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카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공적으로 가축을 사육하는 일이겠지요.”, “그 다음은?”, “웬만큼 가축을 치는 것이겠지요.”, “그 다음은요?”, “이득이 별로 없다 해도 역시 가축사육농의 경제적 몰락, 그리고 이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 불안과 불평불만의 목소리는 로마공화정이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당대의 귀족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해결책이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특히 토지문제에 달려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승일,「그라쿠스 형제의 경제개혁」,『로마사 입문-공화정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p. 119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의 어느 시대든지 토지를 어떻게 분배해야하는지 더 갖고 있는 사람은 빼앗기지 않고 더 늘리려는,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갖고 싶어 하여 서로 투쟁하게 되는 토지문제는 영원한 화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로마의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산화한 농민들을 유산화하는 방향, 즉 그들에게 다시 절대적 생활 기반의 토지를 마련해주는데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드디어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과거 민중투쟁의 전위이던 호민관의 직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 해결책으로 토지법안을 발의한다. 토지법안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1 어떤 시민이든지 공유지 500유게라 이상을 점유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영구소유 권을 부여하여 사유지로 인정한다.2 법정선을 넘어 몰수될 농지에 대해서는 금전상의 보상이 있으며, 또 농작물 건물 및 시 설물과 농지개량에 소요한 경비에 대해서도 점유자에게 보상조치 한다.3 대지주로부터 몰수된 농지는 로마의 무토지 시민이나 이탈리아 동맹자에게 매 1인당 30유게라라씩 분배해 주되, 이것은 국유지임으로 점유자는 소정의 지대를 국가에 납부 해야 함은 물론 타인에게 이것을 매각할 수 없다.4 본법을 시행하기 위해 1년을 임기로 하는 3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위원을 민회에서 선출한다.{ 허승일,「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정책」,『서양사론』, 1967, p.106사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는 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부 학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