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의 문화Ⅰ. 진한시대의 문화진한시기는 중국 봉건문화가 크게 발전한 시기로 전국시대 이래의 학술 문화의 업적을 종합하여 이후 2천여년간의 봉건문화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진한 학술문화는 봉건 지주제의 확립과 발전에 따라 정치사상이 법가통치에서 유가통치로 바뀌어졌고, 그 사이에서 금?고 경학(今?古經學)의 투쟁과 융합이 있었다. 또한 진한 예술문화는 통일국가의 장기적 안정과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진 시황 묘의 거대하고 훌륭한 구조와 [사기(史記)]?[한서(漢書)]라는 일대의 거작의 역사서는 이 시기의 정신 면모를 대표하고 있다. 기타 수학, 천문, 역법, 의학 등도 큰 발전을 이루어 사회?문화적 발전을 알 수 있다.1. 경학과 종교전한 중기 이후 유학이 독존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후한에 이르러서는 유학은 유례없이 발전을 하였다. 한나라 이전에 진 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법치를 행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사학금절(私學禁絶)을 행했었기에 학자들은 선진 유가경전을 해석하는 경학이 발전하였다. 경학이란 유학의 경전과 전적에 대한 학문이다. 경서의 수집과정에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금문학파란 한초까지 살아남은 일부 유생의 구술에 의거해 당시의 문자인 예서체로 정리된 경전을 기반으로 해석 및 연구를 하던 학파를 말하고, 고문학파란 경제때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춘추전국시대의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기반으로 하던 학파를 가리킨다.)금문학파는 동중서(董仲舒)의 제안으로 과학화된 [춘추공양전]을 근거로 하여 주로 지구의 해석이나 천일상관설에 바탕한 정치론으로서 군주권의 정당화나 참위설을 내세우는 등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고문학파는 [춘추좌씨전]을 근거로 하는데 전한까지 위서라 여겨져 인정받지 못하다가 전한 말 유흠(劉歆)에 의해 정리되면서 다시 각광받게 되었다. 후한에 들어서 경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논쟁이 벌어졌다. 금문학파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이 시대의 경학에는 도참이나 참위같은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이사의 기본형식인 본기와 열전 위주의 기전체 사서가 등장했다. 전한의 전성기를 이룬 무제시대는 학문 분야에서 동중서와 같은 지식인의 활동도 있었지만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에 의한 [사기(史記)]의 편찬이었다. [사기]이전의 역사 기록은 끊임없는 전쟁과 진 시황의 분서갱유 등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기에, 고대 중국 문화 연구는 대부분 사마천의 [사기]를 바탕으로 삼았다.) 사마천의 사기 이외에도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획기적인 저작들로, [사기]는 역사상 위대한 명저로서 상고시대부터 한 무제시대까지 2천여년간의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한 것이다. 사기의 구성은 크게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와 개인의 활동상인 열전 및 분야에 따른 기록이 서로 이루어져 이후 중국 정사의 틀을 제시했다. 후한의 반고는 한 왕조 일대의 기전체 사서인 [한서]를 저술했다. [한서]는 [사기]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사학 명저로 중국 첫 번째의 완전한 단대사 저작이다. 후한 말에는 순열이 [한서]의 내용을 [춘추좌씨전]의 편년체 형식으로 재편성해 [한기(漢紀)]를 저술했고 후한대에 [동관한기(東觀漢紀)]의 사료집을 편찬하기도 했다.3. 과학기술한대에서도 특히 후한대에는 과학기술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먼저 제철기술에서의 진보를 들 수 있는데, 철기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주철을 정련해 강철을 만들기 시작한것은 한대였다. 무기만이 아니라 수리사업, 화상석등의 석각 예술등 여러방면에 적극 활용되었다.천문학은 이전부터 정확한 농시를 측정하려는 목적으로 연구 발전되었는데 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면서 천인상관설등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명운과 사시의 운행을 점치려는 목적에서 관측기술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무제시기에 태초력), 전한 말에 삼통력)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장형)은 관측을 거듭해 월식의 원리와 달빛이 태양의 반사광임을 밝혀냈고 지동의(地動儀)라는 지진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지동의는 나무통 모양을 한기구의 8면에 용머리를 매달아시기에는 많은 명의들이 출현하였는데 그중 후한 말기의 장중경과 화타가 가장 유명하다. 장중경은 열병학설을 발전시켜 [상한론(傷寒論)]을 지었다. 이와 함께 전한시기 정교한 금침과 은침이 발견된 바 있어서 침을 사용한 의료행위가 발달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방의학의 기초는 후한대에 이미 확립 되어 있었다.4. 회화?서법한대의 회화로는 돌에 새겨진 화상석이 많았다. 화상석은 돌로 만든 묘실의 벽면이나 측면에 새겨진 화상으로 전한 중기부터 제작되어 후한대에 성행했다. 한대인은 생전에 관이나 묘를 만드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죽은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려 했다. 내용은 주로 천문신화, 귀신 신앙, 역사적 고사, 오락, 건축, 산천의 풍경, 생산 활동, 일상생활의 정경등인데 당시 풍속과 사회생활을 오늘날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성석보다 늦게 후한 중엽부터 성행하기 시작한것이 비문의 건립이다. 비문에는 예서가 주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서예의 선구를 이루어 당시 상용문자에 독특한 장식적인 필체를 가미해 풍부한 예술적 필치를 뽐내는 것이 많아 서예의 진흥과 문장 발달에 공헌한 바 크다.Ⅱ. 위진남북조시대의 문화중국이 남북으로 크게 분열해 있던 이 시대는 학술을 비롯한 문화도 남북이 서로 양상을 달리했다. 북조의 문화는 질박하고 고풍스런 자태를 풍겼던 반면 남조에서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전개되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학술과 문화는 국내 각 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혼합함과 동시에 서방에서 전래된 문화?예술을 흡수하여 이 시기의 독특한 이채를 띄게 되었다.1. 종교?철학과 역사학?지리학(1). 종교이 시대 사상, 종교상의 중심은 불교였다. 불교의 동향에 자극 받아 중국의 토착 종교인 도교도 함께 대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종래의 유교를 더해 유,도,불의 삼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병존하고 있었다. 불교)는 후한 명제 때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왔지만 당시는 유학의 전성기였고 유학의 중화의식 때문에 불교가 널리 전파되지는 못했다. 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사학 발전에 공헌한 사서와 함께 지리서로서는 [수경주(水經住)]가 있다. 삼국시대에 지어진 지리서로서 중국 137개 강과 하천 및 그것이 경유하는 군현과 도시를 기재하여 [수경]에 주(住)를 붙여 [수경주(水經住)] 40권을 편찬했다.2. 문학과 예술(1). 조각남북조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부단히 진한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고 서역과 인도 예술의 장점을 흡수하였다. 조각가들은 불상과 불경에 나오는 고사를 조각하였고 동양과 서양의 장점을 취함으로써 이른바 회화와 조각을 융합시킨 석굴 예술이 탄생하였다.그 가운데 돈황의 막고굴이 있다. 동서교통의 요충으로서 번영했던 돈황)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학도 매우 성행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하서지역에 성행했던 석굴 사원의 조영은 중국 영내에서 대규모로 행해지게 되었다. 산서성 대동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이 가장 유명하다. 북위는 한화정책을 취하고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낙양 교외의 용문에 새로운 석굴사원을 조영하였다. 이후 당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석굴로 용문을 개착된 것이다. 용문석굴과 운강석굴의 광채는 아름다움을 뽐내며 중국 고대 조각예술의 양대 보고를 이루고 있다.)(2). 회화남북조 시대 이후 미술에 큰 특징은 불교적인 것이다. 석굴 사원으로 대표되는 불교조각은 이 시대 미술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중국 미술 전체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중국 미술 특히 회화가 독특한 길을 걷기 시작한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불교 미술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돈황, 그리고 하서지역을 지나 중원지대에 이르는 당시의 교역 루트를 따라 점점 남아있는 석굴사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동진시대에는, 문벌귀족화된 사인들이 정치의 실권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고 개인의 내면 생활에 흠취해 현실에서 실용과 실익을 담당하는 것은 천하게 여기고 오로지 세련되고 귀족 다운 교양을학 분야에서는 황보밀의 침구학(針灸學)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대 침구요법을 결산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은 오늘날까지 침구술에 종사하는 한의학자가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Ⅲ. 수당시대의 문화수당시대는 강역이 광대하고 민족이 융합하여 사회?경제는 번성하고 국가는 장기간 통일되어 중국 봉건 사회의 전성시기를 이루었다. 또한 당 태종의 적극적인 대외정복을 기반으로 방대한 제국이 건설되자 동서 교통로의 장애가 해소되고 비단길이 다시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세계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와 서방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의 개방 정책은 외국인의 내왕을 가능하게 하여 외국 사절을 비롯한 학자와 승려, 예술가와 상인들은 빈번한 경제?문화의 교류를 하였다. 이에 수당 문화는 전통 문화의 기초 위에 동서방 각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융합?교차시켜 특유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 따라서 당대의 문화는 국제성과 개방성을 띠고 있다.1. 종교? 유학? 철학당제국의 세계성과 개방성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바로 당대 유행한 종교를 들 수 있다. 중국 전래의 유교나 불교, 도교 이외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기독교 일파인 경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이 전파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상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하며 이란계 소구드인인 조로아스터가 창시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성행했다. 측천무후때 전래된 ‘마니교’는 후대에까지 강남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슬람교’는 바닷길과 육로를 통해 전파되었고 당시 ‘청진교’라 불렀다.불교)의 경우 수왕조가 건국되면서 불교를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남북조의 불교를 통합한 불교의 교단이 형성되었다. 융합한 교단으로는 남방의 천태종, 북방의 화엄종, 법상종을 들수있다. 당시 이 세 종파는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서 후세까지 영향을 준 선종은 안사의 난 이후 지방 정권에 의해 크게 환영 받아 번성하였다.한편 수당시대 유학은 지주계급의 통치사상이었다. 수당 통치자는 유? 한다.
Ⅰ. 머리말빼앗긴 들에도 봄날은 온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이내 한반도의 밝은 미래에는 먹구름이 다가왔다. 봄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한반도는 다시 분단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한 것이다. 남과 북은 자신들의 사상과 입장을 굽히지 않은 결과로 분단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남과 북이 분단된 지도 어느덧 반세기를 지난 이 시점에서 조심스럽게 통일을 대비하는 우리는 상호이해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분단의 극복을 위해 우리 민족이 노력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먼저, 문화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 할 것이다. 또한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서로의 체제와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서독과 동독이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이룩하였지만 사상적 차이로 화합과 공존이 어려웠던 모습을 볼 때 그 모범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이제껏 나는 북한에 대해서 고작 김일성을 권력의 중점으로 두고 있는 폐쇄적인 공산주의 국가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불신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북한을 불신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은 대적해야할 상대가 아닌 우리의 한 핏줄인 동포이자, 21세기 동아시아를 함께 이끌어 나갈 공존 대상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서로 화합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남과 북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서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제는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수립을 위하여 남과 북이 평화체제를 구축시켜 무엇보다 평화 통일을 이룩하여 공존의 길을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최선의 노력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북한을 이끌고 있는 그 힘이 무엇인지, 북한의 통치 이념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북한의 통치이념은 주체사상이며 김일성 주의이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북한 정치체제의 규범적 구성원리이며 북한의 지도이념이다. 지금 북한이 세계를 상대로 전파하고 있는 것이체사상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만 한다.그럼 이제부터 주체사상이 형성된 과정과 주체사상의 내용, 한게점등을 살펴보도록 하자.Ⅱ. 주체사상의 형성과정북한사회에서 주체사상은 자연적인 현상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출연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 통치 엘리트들이 국내 정치 및 대외관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 ‘주체’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의 체계화 과정은 김정일의『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비교적 잘 제시되어 있다.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처음 언급한 것은 1955년 12월 28일이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없애고 주체를 세우자고 말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련과 중국에 대해 자주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1955년 말이라는 시기는 소련의 심한 내정 간섭과 거기에 편승한 당내 파벌투쟁, 전쟁으로 인한 국내 경제 문제등 북한 정권이 대내적으로 총체적 위기에 처해있던 시기라고 불 수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후르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심화된 중소 이념분쟁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라는 위기에 처해있었다.북한은 본래 자처해서 지금과 같은 고립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였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최대한 친선 교류를 원하였고 공산권이 단결하여 자본주의나 제국주의와 맞서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소련과 중국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중소분쟁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1960년 대 내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 어느쪽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의 대가정으로 굳게 단합하기를 원하였다.그렇지만 중소대립은 날로 심해졌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논쟁속에서 점차 주체사상의 내용을 채워나가게 되었다. 1955년 12월 당 차원에서의 ‘사상에서의 주체’를 주창한 이후 1960년대의 복잡한 대외환경에 대응해 나가면서 점차 주체사상이라는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1962년부터 북한은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밖으로는 자주외교를 펴야하고 안으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고 강연하였다. 1955년 주체의 개념이 등장한 이후 10년만에 주체사상이 대외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북한은 주체를 강조하면서 소련이나 중국보다는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 외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등 비동맹 세력가 힘을 합쳐 반미?반제 투쟁 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였다.1970년대에 들어서서 주체사상의 체계화 작업은 더욱 본격화 되는데, 1972년부터 주체사상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 혹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으로 정의함으로써 주체사상에 자주성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사람 중심의 철학 원리’를 도입하면서 이론적 체계화 작업을 본격화 하게 된다.또한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 라고 당 규약을 규정하여 ‘맑스 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오직 김일성의 주체사상만을 공식 이데올로기 자리에 위치시켰다. 이후 1982년 김정일에 의해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 원리, 지도적 원칙이 다듬어지면서 주체의 사상?이론?방법인 이른바 ‘주체사상의 체계’가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이렇게 체계화 되어 온 주체사상은 부자 권력 계승과 수령중심의 통치체계 수립에 기여하게 된다. 이렇게 주체사상은 1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한 사상이다. 북한에 있어서 주체사상은 소련과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북한의 자주적인 입장을 전세계에 선포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사상인 것이다.Ⅲ. 주체사상의 내용주체사상이란 사상적으로 주체성을 확립해서 정치에서는 자주성을 견지하고 경제에서는 자립적 민족 경제를 수립하고 국방에서는 자위하자는 것이다. 또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으로 인민 대중이 사회?역사의 주체가등장할 당시 북한 내부 사정은 전쟁과 당내 파벌투쟁등으로 김일성을 지원하던 세력이 약화되고, 국외적으로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김일성 통치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어온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주의가 후르시초프에 의해 비판당하는 상황 속에서,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국을 배경삼아 자신을 권력에서 축출하려는 세력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주체사상을 탄생시켜 자주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2) 경제에서의 자립김일성은 자립적 경제에 관해서 ‘자립적이며 자주적인 경제를 건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체로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면서 경제의 자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그 후 ‘7개년 인민 경제계획’를 채택하여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과 함께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을 문화혁명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였다.사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소련의 많은 원조를 받고 있었으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 소련의 불응적 태도에 김일성은 대소감정에 불신감과 소외감이 싹트기 시작하여 결국 1961년 북한이 반소노선으로 전환됨에 따라 북한은 자립경제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즉 소련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써 ‘경제에서의 자립’을 통하여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려는 북한의 새로운 주체노선이 정립된 것이다.(3) 정치에서의 자주김일성이 내세운 ‘정치에서의 자주’의 원칙은 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당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자기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정치의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정치에서 확고한 자주성을 확보하자는 주장은 중소분쟁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대외관계의 자주의 의미로도 제창된 것이다. 결국 김일성이 중소 두 대국 사이에서 대국주의를 회피하고 독자노선을 취할 수 있엇던 것은 당내에서 독재 권력이 확립되었고 공산권 내부에서의 다원화현상이 나타났으며 중소 분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4) 국방에서의 자위김일성이 군사노선에 있어서의 자위노선은 그의 주체사상을 군사면에 적용한 경우이다. 196한 미군의 철수’를 실현시킨 다음에 평화적으로 그것이 가능치 않다면 무력을 통해서라도 공산화의 통일을 꾀하는 것이었다.Ⅳ. 주체사상의 한계김일성의 항일운동이 조선 독립에 공헌했듯이 그의 주체사상이 북한의 자주성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맹목으로 소련을 추종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민족의 자긍심이나 혁명 역사를 정립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체사상을 이론적, 논리적으로 설명해 볼때 많은 문제가 있다.첫째, 주체사상에 대한 과대 평가이다. 지나치게 주체사상을 날조하고 의미를 더하여 오히려 주체가 결여된 것처럼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둘째, 주체사상은 그 내용상에도 한계가 드러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북한의 특수한 실정에 맞도록 주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근래에 들어서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시공을 추월하는 보편적 철학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체를 세웠다는 사람들이 할말이 못된다. 또한 제3세계의 발전 도상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이식하려는 것은 주체의 본질에 어긋나는 행위인 것 이다. 주체사상의 발전 과정은 주체사상이 북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북한에 유용한 정책이기에 이를 보편적 정치 철학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내용상 무리가 있다.마지막으로, 김일성이 주체를 세우고 체계화하면서 자주 노선을 확립한 다음에 자신을 수령이라고 부르게 하기 시작하여 주체사상에 ‘수령론’의 개념을 삽입한데서 그 한계점이 드러난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 이후 김일성 우상화라는 왜곡된 목적에 동원되면서 논리적 취약성이 구조화된 것이다. 이 수령론은 새로운 이론이라기 보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제정치를 실시하는 독재자와 그들의 지도권을 정당화하는 방책이라고 보는 것이 옯다.)1980년대 들어 북한은 유일 주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권력의 세습화를 정당화 시켰다. 이와 같이 주체사상은 김일성 수령체제를 강화하여 주민동원은 물론 주민의식을 통제하는 작용에서 끝나지 않고 급기야 권력 세습을 합리화 이다.
Ⅰ. 머리말바다와 대기는 열을 주고받아 대기와 해양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대규모로 일어난 현상은 엘니뇨와 라니냐가 있다. 최근의 세계적인 기상재해는 해수온도의 비정상적인 분포에 기인하며, 대표적인 현상은 바로 이 엘니뇨(El NIno)와 라니냐(La Nina)이다. 이제부터 기상재해의 대표적인 엘니뇨와 라니냐의 정의와 발생원인, 영향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Ⅱ. 엘니뇨와 라니냐1. 엘니뇨란 무엇인가?(1) 엘니뇨의 정의엘니뇨는 스페인어로 ‘남자아이’라는 뜻이고, 아기 예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엘니뇨란 용어는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으며 2~7년마다 한번씩 12월 말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중남미 페류의 과야킬만에 북쪽으로부터 난류가 내려와 평소에 없었던 어종을 잡을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한류성 어류인 안쵸비(멸치일종)가 잡히기 시작하는 다음 해 3월까지 지속되다가 사라진다. 페루의 어민들은 이 현상이 불규칙적이지만 경제적 유익을 가져왔으며 그 시점도 크리스마스와 유사하여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여 ‘엘니뇨’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남미 일부에서 진행되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날짜 변경선이 있는 태평양 중앙부까지 연결되는 대규모현상이다. 이렇게 엘니뇨는 열대 태평양의 광범위한 구역에서 2~7년의 주기로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것으로, 해수면의 온도가 평년치보다 높은 상태로 일정한 기간동안 지속되는 극단적 수온상승현상을 일컬어 ‘엘니뇨’라고 한다.(2) 엘니뇨의 발생원인열대 태평양의 해수면의 온도분포는 보통 서태평양이 고온이고, 동태평양 남미연안에서는 남쪽으로부터 페루 한류가 흘러들어서 저온이 된다. 또한 남미연안에서는 용승현상으로 차가운 하층해수가 해수면으로 용출함에 따라 동태평양 페루연안에서 차가운 해수가 늘 유지된다. 대기의 순환은 이러한 해수면 온도분포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적도지역에서 서쪽으로 부는 무역풍은 서태평양의 더운 해수와 동태평양의 차가운 해수분포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무역풍이 해수면이 따뜻한 물을 태평양 서쪽으로 운반하기 때문에 난수층의 두께는 서쪽에서 두껍고 동쪽에서 얇아지고 해면수위는 동쪽보다 서쪽이 높아진다. 이 무역풍이 약해지면 서쪽의 난수층은 보통 때보다 얇아지고 동쪽의 난수층은 두꺼워진다. 이 때문에 용승 효과가 약화되고 더운 해수가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중부와 동부 적도 태평양의 해수면온도는 점차 상승하게 된다.태평양 양 옆의 기압 반전과 해수 온도 상승은 대략 동시적으로 발생하는데 이것이 엘니뇨의 발생원인이 되는 것이다. 엘니뇨의 발생은 이와 같이 적도 무역풍의 약화 때문이다. 그밖에도 동쪽으로 이동하는 해양파에 의한 에너지 전달 등도 중요한 발생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동부적도 태평양의 해면수온이 높은 상태는 무역풍을 더욱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여 같은 상태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양과 대기의 상호작용 과정이 1년~1년 반쯤 지속되는 엘니뇨 현상의 라이프사이클에 대한 그 상세한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3) 엘니뇨의 영향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엘니뇨의 발생 간격은 불규칙적으로 2~7년의 주기를 가진다. 적도쪽으로부터 북풍과 함께 이상난수가 침입해오므로 오징어는 떼죽음을 하고, 정어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또 해조(海鳥)들도 굶어죽고, 육상에서는 큰 홍수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는다. 즉, 먹이사슬의 혼란으로 육상생태계의 변화가 생기게 되고, 수산물과 수질피해와 함께 농작물의 피해도 속출하게 된다.엘니뇨 현상이 나타날 때 일반적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동북부 등지에서는 강수량이 평년보다 적으며, 반면에 화남 및 일본 남부 등 아열대 지역과 적도 태평양 중부, 멕시코 북부와 미국 남부, 남미대륙 중부에서는 홍수가 나는 등 예년보다 많은 강수량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알라스카와 캐나다 서부에 걸쳐 고온 경향이, 미국 남동부는 저온이 되기 쉽다. 즉, 엘니뇨현상이 발생하면 태평양상의 에너지 분포가 바뀌고 대기의 흐름을 변화시켜 페루 등 남미지역과 태평양을 둘러싼 열대, 아열대지역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호주 등지에 이상 기상을 일으키는 경향이 뚜렷하다.이와 같이 동태평양에서 발달하는 엘니뇨 영향이 멀리 떨어진 서태평양 연안 지역에 뚜렷이 나타나는 이유는 동태평양 열대지역의 대류활동의 분포가 변하여 전지구적으로 많은 대기흐름의 변화를 초래한다. 특히, 엘니뇨가 가장 강했던 82~83년에는 타히티로부터 인도에 걸쳐 가뭄과 산불, 홍수 및 허리케인으로 2천여명이 숨지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전세계적인 피해를 입혔다.우리나라도 엘니뇨의 영향으로 이른 무더위가 이어지면서 생태계 교란의 조짐이 일고 있으며, 콩, 옥수수 등 주요작물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들 작물의 생산국인 미국, 호주 등 세계 곡창지대에서 엘니뇨의 영향으로 수확이 줄어 곡물가격이 오르면 수입가격 부담이 커진다. 또한, 커피와 코코아 가격 등 수입 농산물 가격이상은 수입농산물을 원료로 제조하는 사료 등 농산물의 가격 인상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도 피해를 받게된다.2. 라니냐란 무엇인가?(1) 라니냐의 정의라니냐는, 엘니뇨 현상과 반대되는 현상으로 적도 무역풍이 강해지면서 서태평양의 해수온도 상승으로 동태평양에서 저수온 현상이 일어나는 이변현상이다. 에스파냐어로 ‘여자아이’라는 뜻이다. 열대 태평양의 해수면 온도는 보통 서태평양이 평소보다 고온이 나타나고, 동태평양 남미연안은 평소보다 저온이 나타난다. 이 온도차 때문에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쪽으로 흐르는 대류현상이 발생해 태평양 상공의 대기는 서태평양 지역에서는 저기압,동태평양 지역에서는 고기압 상태를 유지한다.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등의 서태평양 지역은 저기압상태에서 강한 상승 기류가 형성되기에 평소 비가 많이 오고, 페루 등의 동태평양 지역은 날씨가 맑고 건조하다. 동태평양 쪽의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면 공기가 동태평양에서 서태평양으로 흐른다.기상학자들은 열대 동태평양 적도부근 해수면 온도가 5개월 이상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상태가 지속될 경우를 ‘엘니뇨’로 정의하고 반대로 정상치에 비해 0.5도이상 낮게 유지되면 ‘라니냐’로 정의한다.(2) 라니냐의 발생원인라니냐의 발생원인은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동태평양상의 적도 무역풍이 평소보다 강하기 때문이며, 서태평양의 해수온도를 평소보다 상승시킨다. 또한 이 강한 하층부 동풍은 서태평양지역에 상승기류와 저기압을 형성시키며 대류권 상층부 편서풍을 거쳐 적도태평양의 고기압과 하강기류를 형성시킨다. 이를 적도지역의 워커순환(Walker Circulation)이라 하는데 라니냐는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워커순환이 특징이다. 엘리뇨가 12월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나타난다면 라니냐는 5~6월쯤 발생하여 겨울철 혹한을 동반한다.
영국 혁명의 꿈과 현실Ⅰ. 서 론1603~60년의 영국에서 일어난 격변에 대하여 서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한다. 한 가지는 혁명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한 휘그적 해석으로, 기원적으로 청교도 혁명기와 국왕에 대항한 의회파의 입장을 대변한다. 가드너에 의해 영국혁명은 종교적인 관용의 확대와 입헌군주제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제시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사회경제사적 해석으로서 크리스토퍼 힐이 대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해석에 대하여 해체적이며 부정적인 러셀이 대표하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있다.이 상반된 해석들 사이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는 역사가 진행되는 원동력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는가 혹은 단기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가에 있다. 이에 따라 내전이냐 혁명이냐를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그럼 이 두 가지 해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Ⅱ. 휘그적 해석 (정통주의적 해석)A. ‘장기적’ 원인에서 발생한 ‘혁명’ (휘그-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인류의 역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단기적인 역사적 사실만 보아서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반드시 장기적인 안목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영국혁명은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인 원인에서 발생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영국의 헌법과 보통법, 자유와 권리는 확립되었다. 하지만 17세기에 영국의 실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스튜어트 왕들과 그들의 몇몇 신하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영국의 전통을 파괴하였고 이에 맞선 영국인의 지도자들이 의회를 중심으로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다.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은 장기적 현상을 중요시하는 발전론의 역사관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휘그적 해석과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휘그-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두 해석사이에 상이한점도 많은데 휘그적 해석은 종교와 정치분야을 강조했고 의회가 이 분열을 해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주장하였고 마르크스적 해석은 이보다는 그 당였다. 또한 내전은 사회적인 힘에 의하여 발생하지 않았고 사회, 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았기에 정치적인 원인에서 발생하였다. 정치는 그 성격상 우연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내전은 단기적이고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영국내전은 매우 단기적이고 개인적이고 정치적이고 우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되었다. 따라서 내전의 원인은 이념적인 것에 기인하지 않았으며 왕과 의회와의 그릇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잘못된 인식과 허구에서 나온 위기 의식에 의한 것이었다.B. 무능한 의회에 의해 일어난 ‘내전’17세기의 의회는 국민들의 소망을 구현할 수 있는 유능한 기구가 아니었고, 휘그에서 배제되었던 상원의 존재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휘그 학자들은 하원의 성격을 의회 전체 성격으로 동일시하고 하원만 강조하였다. 의회는 지방의 이익추구에 얽매여 국가적 일에 대한 사명감과 대표성을 가지고 일을 할수 없었기에 자유의 옹호자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의 옹호자였다고 하더라도 자유를 옹호할 능력이 없었다. 의회는 영속적인 기구가 아니었고 왕이 소집할 때에만 개최 되었기 때문에 의회 소집은 단지 특별한 행사였을 뿐이다. 또한 의회는 왕이 어떤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고 왕이 정당한 권한을 사용했음에도 권력 남용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처럼 의회가 전통을 깨고 왕에게 도전하였기 때문에 왕이 의회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것이 영국 내전이었다. 또한 하원이 전통적으로 조세인준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 권한으로 왕권을 압박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잘못 된 것이다. 하원의 위협과는 관계없이 당시 의회 자체가 국민들의 소망을 구현할 수 있는 유능한 기구가 아니었으며 왕이 필요로 하였던 재정을 충당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다. 하원의 조직적 반대세력에 의해서 영국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하원은 무능하였고 상원은 사회의 실제적 기능을 가지고 하원을 조종하여 의회를 주도하였고 그런 상원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혁명의 의의는 계속하여 변화하고 발전되며 재창조될 것이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학파의 해석을 살펴보자.Ⅱ. 정통주의적 해석A. 프랑스 혁명은 ‘이념적이고 사회적인 혁명’프랑스 혁명은 위대한 이념적 배경에 의해서 발생하였다. 사회 계층 보다는 이념에 기반을 두었던 인간적인 요소가 혁명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이었다. 혁명은 근대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이로써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회를 이룩하는데 시발점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계몽 사상에 기반을 둔 한 세기 동안의 꿈이었다.프랑스 혁명은 전통적으로 알려져 왔듯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군주와 지주 귀족들에게 대항해서 구제도를 뒤집 어엎기 위해 부르주아와 농민들이 일으킨 밑에서부터의 필연적인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인 혁명이었고 그 당시의 프랑스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에 의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의 행동에 의해서 역사가 바뀔 수 있는 것을 심어주었고 혁명이 만ㄷ르어 놓은 자유, 평등, 박애는 민주정치와 함께 인민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구호 중 아직까지 가장 강력하게 남아있다.B. 구제도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은 구제도의 모순에 의해 일어났다. 이는 먼저 세금 제도의 모순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세습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인두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낡은 세금체제 속의 특권이 있었고 더욱이 귀족들은 많은 도덕적인 문제점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은 귀족의 특권과 그들의 이기주의에 의해 발생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인 원인으로 혁명이 발생하였다. 민중의 비참한 생활, 기아는 혁명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가뭄, 홍수로 인해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상업경제는 침체되었다. 반면 국가의 재정 지출은 증가하고 있었다. 1789년에 이르러서 국가는 더 이상 정상적인 세금 징수에 재정을 의존할 수 없게 되었고 화폐발행과 같은 비정상적 방이 프랑스 시민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혁명 중에 과오가 있었고 부족한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에 오늘날 우리는 감사한다.Ⅲ. 수정주의적 해석A. 프랑스 혁명은 ‘비이념적인 혁명’혁명에 대한 인식은 지난 20여년 사이에 크게 바뀌었다. 정통주의 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서양사에서 하나의 극점을 형성햇다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위대한 혁명은 고매한 이념에 의해 발생하였다고 착각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만을 추구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부르주아나 이념적인 집단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했던 주된 세력은 이념과는 상관없는 폭도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국민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애국적 이념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주의가 프랑스 혁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 국민주의를 만들었다. 계몽사상도 국민주의도 중앙집권주의도 모두 혁명을 일으킬 만한 이념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에는 그 이념의 노선에 맞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흐름이나 패턴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혁명이 어떤 뚜렷한 혁명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해도 결국 혁명은 그들의 혁명적 이념을 가르켰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혁명 이념을 대신하여 혁명의 방향을 결정한 요소들로는 지방과 외국의 반혁명세력, 그리고 외국과의 전쟁이었다. 이런면에서 볼때 혁명의 이념보다는 변수들, 즉 전쟁, 애국심, 정치 엘리트들의 상황에 대처한 행동이 혁명을 이끌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이 혁명을 주도할 여지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매우 우연하게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또한 소수의 정치 야욕에 찬 엘리트 개인들이 위로부터 일으킨 정치적 쿠데타였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도 아니었고, 밑으로부터의 혁명도 아니었다. 혁명은 당시의 사회?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도 못하였으며, 오히려 물질적 면에서 퇴보만을 가져왔다. 혁명이 하였던 근대성을 부여하지 못했다. 또한 문화 대국 프랑스가 문화 분야에서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은 문화재를 대량으로 파괴하였고 예술가들의 창조정신을 왜곡하였다.시민들은 과거로의 복귀를 원했고 왕정으로의 복고는 혼란스러운 혁명정부가 자취를 감추며 안정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은 이상사회로의 진전이 아닌 종교 분야, 전통적인 축제, 전통적인 금속 화폐 등, 여러 면에서 복고로 마감되었다. 혁명 직 후부터 프랑스를 이끌어 나아갔던 힘은 오로지 테러였고,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허무하게 끝났으며, 프랑스 사회에 부정적인 결과만 남겨 놓고 마감되었다. 혁명은 프랑스 미래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잃은 것만 많았고 실제로 얻은 것은 없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경험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진정한 교훈은 정통주의자 해석의 허구성을 지적한 이후에나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었다. 수정주의 학자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이 남긴 긍정적인 교훈은, 혁명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면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에서 다시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일이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환상적다. 그러나 혁명의 현실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Ⅳ. 결 론프랑스 혁명은 적어도 계몽 사상의 실천적 무대이자 민주적 시민국가를 수립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혁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혁명은 인류가 만들어 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프랑스 혁명이란 타락하고 무능한 왕정을 무너뜨렸으며 새로운 민중이 중심이되는 자유주의 시대를 실현시킨 것으로 보았다. 모든 정치 사상 문화가 혁명 이후 새롭게 피어났으며 그 전통은 프랑스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 오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에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어떠한 유산을 남겼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찌되었든 피를 요구하는 혁명은 과연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제다.
‘일리아드’는 중?고등학교 시절 호메로스가 지은 역사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스 최대 최고의 서사시인 일리아드는 용맹한 그리스 영웅들의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고대 그리스 인들의 인간관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 고전인 일리아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며, 가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비극 주인공의 특징인 하마르티아와 비극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문학이 현재의 문학과 견주어 볼 때 결코 뒤쳐지지 않을 아니 그 이상의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유럽 문학의 케논을 그리스 문학에 두며 그 중에서도 일리아드는 오늘날의 어떠한 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예술적 창조력을 볼 수 있다는 옮긴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일리아드는 ‘트로이의 노래’라는 뜻으로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호메로스의 단독적인 창작이 아니라, 전부터 구전되어 온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고 10년째 되던 해에 아카이아의 명장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언쟁에서부터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아울러 트로이를 방어하는데 요체의 인물이었던 헥토르의 장례식과 더불어 45일 후에 끝을 맺고 있다. 이 절묘한 서사시에는 운명, 신, 죽음, 자유, 인간성 등을 포함하여 나로 하여금 인간의 존재와 인간과 신의 관계 등을 깨닫게 해주었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매우 인간적이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고 속이며 심지어 싸우기도 한다. 다른 어떤 문화권에도 이처럼 인간적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동시에 이상적인 인간형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 그리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인간형을 만들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문학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매우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설들의 갈등과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인간관이 신에 의하여 역사가 결정되는 ‘신 중심적 인간관’ 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의 주체자로서 인간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신들의 결정에 따르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결정에 따라 그대로 주체적 의식 없이 행동하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일리아드의 영웅들은 역사가 신들의 의지로 결정된다는 신화적 역사관에 순응하면서도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는 인물들로 비춰졌다. 예를 들면 아킬레스가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친구에 죽음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전쟁터로 나가는 장면에서 잘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인간적 두려움을 이기고 신에게 대항하는 싸움을 함으로써 용기 있는 영웅이 된다. 이것이 호메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상인 듯 하다. 추상적이고 허영된 인간보다 실질적인 영광을 위하여 실제적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용기’있는 인간상을 말이다.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신의 혈통을 지닌 인간, 영웅적인 기질을 지닌 인간, 가장 인간다운 기질을 지닌 인간, 어리석은 인간 등등 수많은 인간들이 등장한다. 호메로스는 이 작품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를 등장 인물들에게 투영시켰으며, 이러한 인간적 보편적 정서 위에 개성적인 캐릭터를 추가 시켰다. 이로 인해서 인물들이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서 설명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으로 이해되고, 각각의 인물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갖게 한다. 또한, 가장 고귀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죽음에서 신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한 능력을 가진 이들도 결국 죽음으로써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과, 인간의 운명은 신이 결정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인간과 신의 능력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과 신은 비슷한 점이 있음에도 엄연히 다른 존재보인다. 그리스인들이 신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과 같은 모습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 그들도 먹고 마시며, 신들끼리 사랑하기도 하고 인간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감정을 지닌 신이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해 그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게 자신의 분노를 말한다. 그러자 테티스는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에게로 가서 아킬레우스의 일을 눈물로써 호소한다. 그녀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나서기 전까지 그리스군에게 패배나 재해 등의 고통을 준다. 이것은 그리스의 신들은 기독교나 불교 등의 신과는 달리 감정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로써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신이 아니라, 신도 인간들과 비슷한 외모와 감정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 뿐이다.이렇듯 신에 의해서 주도되는 인간사이지만,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사가 신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당시의 ‘신 중심적 인간관’에 순응하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당시에 지배적인 사상과 적절히 융합해서 신이 정하는 운명과 세계질서에 인간이 각각의 개성을 능동적으로 표출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그리스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과 인간이 적절히 융합한 사상은 그리스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상으로 여타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사상인 선과 악의 세계 혹은 신의 세계, 인간이 세계가 철저히 구분되어진 세계로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세계거나 혹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신이 함께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세계관, 역사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일리아드이다. 일리아드가 아주 방대한 서사시이고, 아카이아인들과 트로이아인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소재로 한 만큼 10여 년간에 걸친 각각의 작은 전쟁에 대한 영웅은 전쟁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게 등장하였다.다양한 영웅들 중에서도 주목되는 두 영웅이 있길 때 얻어지는 전리품 같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데에 큰 의미와 명예를 두고 있는 듯하다. 즉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아킬레우스는 늘 전쟁을 즐기며 또한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카이아인들의 영웅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이러한 성질이 바로 그의 신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달라고 간청하는 프리아모스 왕의 모습에 동정을 보이는 행동이나, 친구의 죽음에 전쟁에 나가는 등의 모습은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아킬레우스에 반해 헥토르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그의 적수였던 신의 아들이며 어떤 인간보다 강한 힘을 가진 아킬레우스와 다르게 평범함에서 탄생된 영웅이다. 출생에서부터 그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헤쿠베의 아들로 신과는 직접적인 어떤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즉 신으로부터 부여된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 도중 잠시 궁에 돌아왔을 때 그의 가족을 더 위로하고 그의 아들을 축복해주는 등 그의 가족에게 믿음직한 아들, 아버지, 남편, 형의 모습으로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아킬레우스가 싸움의 승리와 영광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데 반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의 전투에서 두려움을 느껴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솔직한 모습이다. 헥토르의 이러한 모습들은 평범하지만 지혜와 용기를 지닌 고귀한 성품을 지닌 진정한 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인간이 아킬레우스가 있던 아카이아 군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트로이인들을 위한 그의 신념과 용기 때문이었다. 아킬레스의 신적인 능력과 힘 등을 고려해 볼 때 그의 활약상은 거의 신적인 모습으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헥토르는 현실 속의 평범한 한 인간이 가진 대단한 신념과 용기,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 등에서 아킬레스보다 더욱 훌륭한 영웅것은 그리스인들에게 트로이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신들의 예언에 대항하여 주체적 역사 의식으로 운명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록 내가 여자이긴 하지만 ‘헥토르’라는 용감한 장군의 행동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가장 눈에 띄는 두 영웅 말고도 일리아드에는 많은 영웅이 등장한다.아가멤논은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다. 군대의 총사령관인 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딸을 재물로 바치는 냉혹한 면과 여자 포로 때문에 자신의 군대에서 가장 능력 있는 장군인 아킬레우스와 다툼을 하기도 하고, 자신 보다 뛰어난 사람에게는 약간의 질투를 느끼기도 하는 감성을 지는 인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인간이다. 군대의 총사령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경솔하지만, 대담성도 지니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아킬레우스와 같은 용맹함이나 헥토르의 인간적인 따뜻함도 오딧세우스와 같은 지혜를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더욱 친밀감이 느껴졌다.오딧세우스는 그리스 진영의 아킬레우스와 더불어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그려진다. 물론 아킬레우스처럼 용맹한 장군이 아니라 지혜와 뛰어난 화술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런 지혜 덕분에 ‘목마’를 이용해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후에는 신들의 분노 때문에 가족에게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딧세우스는 신들이 정한 운명에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은 그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신들의 신탁에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면 오랫동안 가족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 미친 척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계획은 들통이 나서 결국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인간인 오딧세우스는 운명을 거역하려 하지만,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오랫동안 여행을 하게 된다. 비극적 주인공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