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고기 전문2001-10851경제학부 장 홍너는 사람이야?이 말은 생고기 전문 이라는 공연의 포스터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문구이다. 이것은 공연 중에도 끊임없이 내뱉어지는 대사이기도 하다. 너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이야? 사람이 뭔데??. . . . . .리듬공간이라는 소극장에 앉아 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자니 은색으로 반짝이는 무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씽크대와 식탁, 침대 그리고 환풍기. 돌아가는 환풍기 뒤에 놓여진 조명의 영향으로 마치 무대는 정육점이라도 연상시키듯 계속해서 번쩍이고 있었고 그 외의 모든 무대 세팅은 은색의 금속들로 만들어져 있어 매우 차갑고 약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관객 입장곡은 무대로 인한 관객들의 불안함을 안정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매우 차분하고 서정적인 곡이었다.공연은 시작되었고 첫 장면에서 한 여성(은지)이 마치 무슨 조사원이기라도 한 듯이 방의 구석구석을 체크한다. 그 사이, 저 뒷 편에서 굵고도 거침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다눴어 라는 말과 함께 쏴아아아-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고기를 구워 먹는다. 빨간 피가 묻어있는 고깃덩어리와 파란 불꽃이 대비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주인공은 우악스럽게 고기를 먹는다. 고기를 굽기 위해 준비한 집게와 가위가 불안함을 다시 자극시켰고 그 남자가 계속해서 해대는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철이)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가습기를 항상 돌리며 지하에서만 갇혀서 모든 인간관계를 차단당한 채 살아가는 남자. 스무 살에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자. 벌써 설정 자체가 매우 독특하고 가공적이었다. 여자 주인공 은지는 철이를 돌보라는 지시를 받은 간호사였고 동시에 철이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간호사들은 다들 철이의 건강 뿐 아니라 성욕을 만족시켜주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연 장면 중에서 환자를 안마해주는 장면이나 체온을 재는 장면 등에서 단순히 건강관리를 한다고 보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성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장면들이 많았다. 사회와 차단당한 채 희귀병 환자라는 딱지를 붙인 철이는 배설욕, 수면욕, 식욕, 성욕 이 다섯 가지에만 집착을 한다. 그 외에 아는 것이라고는 간호사와 아버지에 관한 것이 전부이다.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상황이 마치 동물로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인간은 무엇이고 동물은 무엇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배설욕과 수면욕, 식욕,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교육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욕구이다.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도 가질 수 있다. 즉, 이것들은 생리적 욕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이것 외에도 부끄러움이나 양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사랑과 자존심, 자아실현에의 욕구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철이는 생리적 욕구에만이 그의 전부였고,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철이 역시 간호사라는 인간과의 관계 맺음으로 조금씩 다른 생각의 터전을 갖게 된다. 철이는 조금씩 사랑과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의문스럽다. 그것이 과면 사랑일까. 또 결국 부끄러움이었을까. 돼지라는 자가 처음으로 철이로 하여금 지겨워진 지하의 공간에서 다른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 사람이었기에, 기억에 남아 이것에 기대고자 함이었고 미숙이라는 간호사로부터의 다그침은 철이가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는 것이었기에 철이에게는 충격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순한 사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철이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새디즘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새디즘은 가학증, 학대음란증을 가리키는 말인데, 철이의 충동적인 행동은 이 테두리를 계속해서 맴맴 도는 것 같았다.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기에 보고 있기가 힘들기도 하고,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또한 매우 변태적이라는 느낌도 떨칠 수 없었다. 철이는 성적인 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든 사람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데에서 재미를 찾고 아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은지의 울음소리, 밑으로 내던져진 피뭍은 휴지 조각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구워 먹는 철이. 이 장면은 역겨움 그 자체였다. 과연 작가는 이렇게 극단적인 장면을 통해 무엇을 이끌어 내고 싶은 것일까. 동물적 본성에 철저하고 잔인할수록 철이가 언급한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극대화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가. 단순히 그런 것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가공적이었고 또 잔혹했다고 생각한다.또한 철이의 행동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철이는 많은 것들을 성욕으로 풀어내고 또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불만을 갖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욕구는 죽음의 본능과 대비된다고 이야기 했는데 철이 역시 살고 싶음을 느낄수록 자신의 성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철이는 거세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성적 도착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성기에도 많은 집착을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자아 심리학 에서는 초자아라는 것을 들먹이고 있는데, 초자아란 양심이나 도덕이라는 자아의 이상을 뜻한다. 그리고 초자아와 자아가 만들어내는 골이 깊을수록 죄의식과 열등감은 깊어진다고 하였다. 철이가 돼지나 미숙으로부터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죄의식과 열등감이었다고 생각된다. 철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모습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간호사와 갖는 최소한의 인간관계로 조금씩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세상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하실이라는 공간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차이 크다고 느낄수록 철이는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원래 초자아라는 것이 주로 아버지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철이의 아버지는...? 생고기 전문 이라는 이 공연의 설정과 인물의 심리, 상황의 흐름은 프로이트적 해석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했고 프로이트가 기술한 정신 분석학이 인간 의 정신 분석학임을 생각할 때 과연 철이가 인간일까 라는 질문에 약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보편적 지식의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2001-10851경제학부 장 홍BC.5세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자 그리스 철학의 관심은 자연계보다 인간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sophist)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보다는 개인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인민집회나 법정에서 상대방을 설복할 수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어야했으며, 이 교양으로 제자들을 길러낸 교사들이다. 그들은 인식의 상대성을 철학의 가정으로 삼는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는 자연이라고 생각한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명제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있는 것에 관해서는 있다는 것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없다는 것의 척도이다. 라고 풀이해 놓았다. 진리의 기준을 인간 개개인의 감각과 사고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이며,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보편적 객관적인 진실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말하는 인간 은 종의 무리나 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하나하나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무리나 집단적인 의미의 인간 을 말할 경우 이것은 인간 전체가 갖는 종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결론지어지는 것은 인간이 모두를 대표하기 때문은 아니다.우주는 인간을 위해 생성되어진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우연적으로 발생된 것 역시 아니다. 인간은 지성과 의식을 갖춘 세계의 일부분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우리가 알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 대부분이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지고 이해되어진 것들이다. 그렇다면 진리 란 인간이 직접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 많은데 이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반론을 제가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진리라 부르는 것조차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리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경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이 인지하는 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 색깔, 성질, 속성, 집합, 개념, 종류들을 나누고 그러한 언어로 인식하려든다. 꽃이든 나무 등 세상에 자연과 수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인데, 이 사실을 개념화 한 것 역시 인간이다. 그리고 그 개념은 언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 존재하던 한 생물이 멸종하게 되면 그것을 지정하던 이름은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발명품이 만들어질 경우 그것을 의미할 만한 새단어가 생성된다. 결국 모든 개념과 그 내부의 질서는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필요성만이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개념화하고 지식화하는 인간의 모든 작업과 그 형태는 항상 변화할 여지가 있는 것이고 단지 그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만은 그대로라는 것이다.그리고 형이상학적 진실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기능은 어딘가에 절재적으로 존재하는 우주를 기술한다기보다는 인간이 그의 경험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려는 필요성을 충족시켜 줄 개념들의 발판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론들을 진리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듯 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의 새로운 성좌를 발견하고는 그에 맞는 명칭을 붙이며 환호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가 인간에 의해 파악되기를 바라는 유일무이한 무언가로 파악 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그릇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강요하지도 않는 존재이다. 때로는 과학적인 이론과 함께 설명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계는 완전한 혼돈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그릇된 것이다.하지만 과학적 설명과 발전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는 완전히 제거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분류하든 어떻게 정의내리든 자연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 체계 내의 모든 것과 거기서 내린 결론들은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고 본다. 현존하는 지식 중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으로 꼽히는 과학도 실용성으로 정당화 되고 있으나 그것도 따져보면 어디까지나 인간의 과학이다. 이러한 지식 속에는 인간 중심적인 요소가 삽입되어 있는 셈이다. 어떠한 관찰도, 측정도, 사고 과정도 결코 하나의 가정을 완전하게 확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절대적 권위나 절대적 사실은 없으며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만이 그것의 존재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할 수 있다.조별 토론(근대 A조)을 하면서 나누어 본 이야기를 덧붙여 보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인간이 판단내릴 수 없는 어느 먼 곳에 존재하는 하나로 정의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보다 가까이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실 개념들을 지식이라 보았다. 이성만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고 단일한 세계 이데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변천하는 잡다한 감각의 세계와는 구별된다. 플라톤은 이렇게 절대적 진리를 중요시 했던 반면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들을 중요시 한 것 같다. 즉,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하고 저 멀리 존재하는 이데아를 포함한 모든 불변하는 진리를 거부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바탕으로 경험론과 상대성에 주목했다. 지금의 이 시대 이 상황에서라면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지식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 받는 보편거인 지식이 언제까지나 사실이고 진리일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항상 세상은 변해왔고 같은 사물이라 하더라고 개개인에 따라 관찰하고 표현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