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특강민족 개념의 형성과정1. 머릿말2. 고려?조선시대의 민족체 인식3. 독립협회시기의 ‘동포’의 의미4. 신채호의 민족 개념5. 민족주의에 관한 탈근대적 접근6. 맺음말1. 머리말종족 (種族) ① 같은 종류에 딸린 것② 조상이 같고 언어·풍속·습관 따위도 같은 사회 집단.민족 (民族)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나 풍습따위 문화생활을 함 께 하는 인간 집단인종 (人種) 사람의 피부나 머리털의 빛깔, 골격 등 신체적인 여러 형질에 따라 구분되는 사람의 집단한국의 역사학은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발전과정에서 일제 식민사학과 대결해야 했다. 일제시기 식민사학자들은 식민지 지배정책을 뒷받침하고 정체적인 한국사를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민족성 및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부각시켰다. 이에 대하여 민족주의사학자들은 고려왕조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대외항전 및 조선왕조의 조공무역과 대외외교, 자본주의맹아 등을 강조하여 진취적인 시기였음을 드러냈다. 사회경제학자들은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사적 발전법칙이 한국사에 관철되었다고 보았으며, 토지소유와 신분?계급구성 등을 분석하여 사회구조와 모순을 밝히고 그 모순을 극복하는 民의 역동성을 드러내려고 하였다.한편 근래 활발하게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은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절대시하는 거대담론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화두를 제시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서양사학계에 이전 역사학의 지성사적 전통과 객관성이나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던졌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의 역사서술방법론으로 논의되기 보다는 한국의 민족,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의 민족 개념의 형성과정을 고찰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2. 고려?조선시대의 민족체 인식(1) 고려시대의 민족체 인식근래 한국사학계에서는 민족의식이 과잉되어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데 장애가 될 정도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민족적인 것을 강년 이연년 형제가 주동이 되어 후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이연년은 진압군 지휘관인 김경손이 몽고의 침략을 맞아 귀주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낸 인망이 높은 장수이니 꼭 우두머리로 모셔야 한다고 하여 생포작전 위주로 하다가 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려중기까지 삼국유민의식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지속된 반침략투쟁의 경험 속에서 민족체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고 역사의식이 삼국 이전의 고조선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이후 그와 같은 삼국유민의식은 거의 청산되었다.)(2) 조선시대의 민족체 인식각 시기의 국가들은 지배층에 의해 향유되어 왔으며 조선이라는 국가 또한 전지역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함경도와 평안도의 넓은 지역 인민들은 정부구성에서 소외되었다. 이러한 지역차별은 서북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어서 경상도의 경우 17세기 중반 효종대 이후 19세기 철종대에 이르도록 정부 고위직에 참여한 그 지역의 인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국가가 이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국가?민족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오늘날 국가에 대한 관념을 전근대에 투영하는 데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국민국가 이전에는 ‘국경(frontier)'은 없었고 ’경계(boundary)' 만이 있었으며, 그 경계 내의 유일한 주권자인 왕과 나머지 신민의 관계에서 종족?문화 그리고 언어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민족을 단위로 해서 국가의 경계 곧 국경을 정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는 점을 들어 고대사나 중세사를 민족 중심의 역사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 세종대에 4군6진의 개척을 바탕으로 나라의 경계가 확정되었으며, 그것은 오늘날 남북한의 강역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는 변경에 대해 자세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했다. 조선초기에 함길도, 평안도, 양계지방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지대 여연?무창?우예를 담은 양성지적으로 해당 체제 내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즉 ‘왕, 유생, 民’을 모두 포괄하는,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는 개념으로 쓰였다. 동포가 원칙적으로 포괄적 개념으로 쓰이게 된 데는 장재(張載, 북송, 1020-77)의 『서명(西銘)』의 ‘民吾同胞 物吾與也’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서명」은 조선시대 경연의 교재로 쓰였던 주희의『近思錄』에 삽입되어 있고 동포의 사용에 있어 典據로서 활용되었다. 이렇게 ‘동포’의 범위가 원칙적으로 포괄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 경우가 없었다. 동포의 범위가 한정되었던 원인은 ‘동포애’의 실현주체와 실현대상이 엄격히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宗子인 인군이 보살피고 다스려야 할 대상인 ‘동포’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 홍수와 같은 흉년기에 곤경에 처한 백성을 지칭하는 ‘구제대상’의 의미로 주로 쓰였다. 이와 같은 ‘동포애’를 가장 요구받고 실천해 나가야 할 주체는 신분제적 질서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인군이었다. 또한 이러한 ‘동포애’는 조선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동포’로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지, 조선의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동포’로 보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2) 독립협회시기의 ‘동포’독립협회시기에서 ‘동포’는 조선시대와 같이 원칙적으로 체제 내의 모든 구성원을 의미한다. 그러나『독립신문』에서 ‘동포’는 ‘대한 동포 형제’, ‘우리 나라 동포 형제’, ‘이천만 동포 형제’ 등과 같이 국가명과 국가구성원의 합성어로 사용하여 ‘한 나라 인민’임을 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동포’에 ‘형제’라는 용어를 한 번 더 붙여 유대감을 더욱 느끼게 만드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쓰인 동포의 용례와는 상이하다. 더욱이 ‘동포애’의 개념에 관하여도 “동포를 사랑하여 일을 행하”고 “동포를 계몽하”며, 동포의 권리를 지켜 주어 동포가 압제받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요구한다. 이러한 동포애의 구현의 목적은 “同心合力”에 있었다.동포애의 실현주체 역시 조선시대를 통해 회의장 밖의 인민을 직접 상대로 한 연설의 경험과 인민의 참여는 이후 만민공동회에서 지식인들의 연설을 통한 인민 동원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 예로 1898년 3월 7일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Alexei de Speyer)가 외부에 조회를 보내어 24시간 이내에 러시아 탁지부 고문관과 사관의 철퇴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통고를 하자 당황한 정부가 3일간의 기한을 연장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재필 등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는데, 3월 10일 1차 만민공동회의 결의대로 정부가 그 고문과 사관의 해고를 결정함으로써 인민의 동원과 그 효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즉, 만민공동회에서의 인민의 참여와 그에 고무 받은 지식인들에게 있어 ‘동포’는 권면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하는 주체로 변모하였다.4. 신채호의 민족 개념일제에 의한 식민지화 과정과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20세기 전반기의 민족 개념을 살펴봄에 있어, 한국의 역사학이 전근대적 역사학의 잔영을 씻어내고 근대적 민족적 역사학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채호의 민족개념을 탐색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신채호는 20세기 초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군국적인 국제경쟁의 질서로 인식하여 정의나 공법은 아무런 힘이 없고 오직 군사력에 의한 강권만이 힘을 쓰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優勝劣敗 질서 속에서 국가를 보전하기 위하여 국가는 국민의 公産이 되고 국민은 국가의 공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한국 주민집단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하면서 혈연?역사?강토?거주?생활?언어?문자?풍속공동체라고 하여 이것을 민족개념으로서 파악하는 인식이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8월의 한일합병은 신채호에게는 충격이었다. 이 해를 기점으로 그의 역사의식은 國粹的 優勝主義로써 정치주의적 경향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國粹의 의미는 악한 서양문명을 제외한 文明人道를 수입하여 ‘我를 我되게 하는 我의 정신’이었으며, 이는 민족적 identity 즉 민족적인 자기증명이었다. 192 역사론을 통한 민족주의 이해민족주의에 관한 전통적 입장은 한스 콘(Hans Kohn)이 민족주의를 시민혁명을 통해 탄생한 프랑스적 유형과 원초적 민족성을 강조하는 독일적 유형으로 나눈 이후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콘의 입장은 서양 민족주의에 내재하는 반자유주의적인 조류를 과소평가하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지 못하며,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이 동유럽과 동일하지 않음에도 이를 같은 종류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문화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어츠는 근대성/서양적인 것과 원초성/비서양적인 것의 이분법적 구분에는 근대화와 진보에 관한 비역사적인 가정이 놓여있다고 비판했다. 그 가정은 전통세계로부터 근대세계로의 변화가 토마스 쿤(Thomas S. Kuhn)의 과학패러다임 변화처럼 질적으로 완전히 서로 다른 세계간의 변화라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기어츠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것이나 전통적인 것 모두 선택적으로 인식되며 재구성되는 굴절과 변형의 메커니즘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탈근대적 시각에서 민족주의는 문화적인 언어-상징체계로 파악되는데,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민족주의를 문화체계로 이해하기 위하여 언어를 통해 민족의식이 형성되고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므로, 개인적 견해를 공적 형태로 투사시키거나 공적 입장이 개인의 태도로 투영되는, 지식 혹은 담론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문화사적 접근의 주요 분석대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의미의 역사서술은 자연스럽게 담론연구로 이해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탈근대적 역사방법론이 민족의 실체로 여겨지는 여러 원초적인 요소들을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며, 그 방법적 귀결로서 이때의 원초적 요소들은 언어, 상징에 의해 ‘강화된’, ‘만들어진’, ‘창조된’ 발명품으로 재해석된다.언어와 담론을 중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문자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중요한 역사적 행위자로 부각시킨다. 담론으로서 민족주의가 지식었다.
史記의 歷史敍述과 文史一體1. 들어가며司馬遷의『史記』에 대해서는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역사학도로서 나름대로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개는 소설이나 만화 혹은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의 수준에서 접했기 때문에 司馬遷이『史記』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를 놓치고『史記』에 대해 약간 가볍게 생각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역사라는 것은 한 번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싶은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는데 과연 역사는 그런 것일까? 司馬遷의『史記』를 만나게 되면서 이러한 괴테의 말을 지워버릴 정도로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史記』에서 펼쳐지는 그 웅장하고도 時流에 밝은 인간과 시대와 시대정신이 엮어 내는 드라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고 인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사에서 조금씩 깊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활기 있게 움직이고 있어야 할 인간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제도와 사회와 사상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아더 슈레진저 주니어는「예술가로서의 역사가」라는 흥미진진한 논문에서 역사가도 예술가로서의 의욕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바람직한 역사 서술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논증하고 상호 인과관계를 설명하며 시대 전체를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라는 기치 하에 이러한 역할은 역사소설가나 저널리스트적 학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에 대한 처방을 司馬遷의 『史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민두기 교수는 司馬遷의『史記』가 우리에게 어떤 지표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더욱 빛내주면서 일반 지식층들도『史記』를 즐겨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해준 특유의 서술방법은 과연 무엇일까?2. 체제와 구성사마천은『사기』에서 역대 중국 正史의 모범이 된 독특한 紀傳體란 형식을 창안하였다. 기전체란 본래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本紀’와 개인의 활동을 서술한 ‘列傳’이 복합된 형식을 뜻하지만, 실제『사기』공간적인 연관성을 파악하기 편리한 ‘表’, 제왕의 권력을 지역적으로 나눠맡으며, 그 지위를 세습하는 제후왕과 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건을 시대순으로 서술한 ‘世家’ 문물제도의 연혁과 그 원리를 서술한 ‘書’가 추가되어 모두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체제는 성격이 다른 형식을 무리하게 병렬시켜 종합사를 만든 것에 불과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실제로 하나의 주제가 각 부분에 분산될 수밖에 없어 특정한 인물의 활동이나 사건의 개요 및 흐름을 이해하려는 독자에게는 흩어져 있는 관계기사를 스스로 찾아 종합해야 하는 불편을 주지만, 개개 사건과 제도의 변천, 인간의 삶과 의지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사마천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의해서 전체가 유기적으로 整合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사마천은 역사를 통일에서 분열, 그리고 다시 통일로 전개되는 정치과정의 연속으로 보았고, 세계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를 의미하였으며, 그가 모든 권력의 중심인 제왕에 관한 연대기적인 서술을 ‘본기’라고 명명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제왕과 제후의 관계를 수레바퀴의 축과 ?에 각각 비유함으로써, 분권적 정치집단이 제왕을 구심점으로 통합될 때 비로소 세계는 움직인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를 시간적으로 배열한 것이 바로 ‘표’였으며, 그가 생각한 정치는 단순한 권력투쟁과 왕조의 흥망성쇠 과정만은 아니었고, 제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수단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문물제도의 변화를 추적하는 저술이 바로 ‘서’였다. 그러나 그는 넓은 의미의 정치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주체의 문제를 크게 의식하였으며, 그것은 결국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제왕도, 제왕의 권력을 공간적으로 나눠맡는 제후왕도 아니며, 정치 ? 경제 ? 문화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여 생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개개의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열전’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마천의 방법이었다. 전 130권인『사기』중에 70권이 ‘열전’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행적을 역사서술의 중요한 일부로 편입한 사서 가능하였다. 이러한 ‘열전’의 목적은 단순히 개인의 생애를 소개하려는 것보다는 ‘본기’ ? ‘세가’ ? ‘표’에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과 ‘서’에 서술된 문화 전반의 변천을 그 주체를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 속에서의 인간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의지를 통한 역사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설정된 것이었다.더욱이 ‘열전’의 끝에 포함시킨 太史公自序와 각 편마다 삽입되어 있는 太史公曰은『사기』구성상의 또다른 특색이다. ‘자서’에는『사기』전체의 집필 동기, 구성 및 각 편의 서술 이유뿐 아니라 저자 자신의 家系 및 학문적인 배경과 경력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반적인 서문의 성격과 다르다. 이것은 사마천이 과거 사실의 追體驗(nacherleben) 또는 再演(reenactment)의 과정을 거친 역사가라는 것을 증명한다. ‘태사공왈’에는 사마천 자신이 직접 견문하였으나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보충한 것, 서술내용과 관련된 사적을 방문하면서 느낀 저자의 감회, 또는 자료 취사의 이유 등도 포함되었고 특정한 사건의 결과, 개인 또는 정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 분석과 도덕적인 평가가 들어 있다. 그는 이러한 독특한 서술문체를 택함으로써 단순한 기록의 보전과 견문의 전달, 자료의 진위판별을 벗어나 자신의 추체험을 통한 과거의 이해와 통찰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생각하였고,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역사가의 추체험을 거친 과거임을 인식하였던 것이다.3. 문장의 기법역사가의 최종작업은 연구성과를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가능한 한 모든 서술을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참고자료를 그대로 이용한 부분도 그것이 오히려 서술내용을 보다 생동감있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예컨대 한고조의 무장이었던 4인에 대하여 다룬,『樊? ? 여상 ? ?公 ? 관영열전』에서 번쾌는 韓信 ? 彭越과는 달리 강렬한 자아가 없이 단지 본능적인 충근과 흉맹만으로 성공하는 사냥개적인 인간형임을 제 6국合從策의 이로움을 趙소후에게 설득하였다는 변설의 내용 중 반복을 통하여 소진의 생생한 변술을 실감시킨 것,「陣涉世家」중 각 문장 간에 서로 복선을 깔아서 각 편이 이러한 복선 속에서 생동하도록 한 것은 사마천의 문장력과 구성의 치밀함을 느끼게 한다.4. 일화의 이용『사기』의 또 하나의 매력은 대소의 일화들을 하나의 꽁뜨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들은 단순히 재미있는 고사나 민담을 수집, 보전하기 위해 채록된 것은 아니며, 서술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사마천의 또다른 수법이었다. 예컨대 명재상으로서의 晏?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사람을 알아보는 안영의 뛰어난 능력, 현인을 존대하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겸양,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그의 포용성을 선명하게 표출시키면서 명재상의 요건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것, 張儀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세 치도 못되는 혀를 무기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부귀와 공명을 좇는 전국시대 유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점, 그리고 石建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획 하나 빠뜨린 것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석건의 극단적인 소심을 통하여 전제군주의 치하에서 지위를 보존하고 생명을 유지하려 하는 당시 관료의 한 전형을 제시하는 것, 李斯의 일화를 통하여 빈천과 곤궁을 수치나 죄악처럼 여기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 것만을 궁리하고, 학문도 오로지 부귀를 얻는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난세에 영합하지 않고 초연히 자족하는 선비들을 오히려 비웃으며 항상 권력에 밀착하여 부귀를 좇는 당시 士人의 한 전형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 그것이다.사마천이 이러한 일화들을 광범위하게 이용한 의도는 이렇게 이해되지만 문제는 과연 그 일화들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이러한 일화들을 창작한 것이 아니고 전승자료에서 발췌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보다 뚜렷이 묘사할 수 있는 문장으로 다듬은 것이었다면, 비록 사마천이 사료비판을 철저히 하지 못만, 서술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사실을 날조하였다고까지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진시황의 사후 次子인 胡亥가 황제로 즉위한 사정을 전하는「李斯列傳」의 비화는 대제국의 황제가 조작되는 경위답게 그 대화에는 거대한 권력과 일신의 부귀영화를 둘러싼 趙高, 이사, 호해 세 사람의 심적 갈등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마천도 이 이야기를 정말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수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역시 흑막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호해의 즉위 과정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비록 입증할 수 없는 소문이나 허구일지라도 제법 논리적인 가능성도 높을 뿐 아니라 큰 정치변화에 대한 당시인의 태도와 감정이 생생하게 반영된 이 이야기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증거 위주의 한계를 문학적으로 극복한 사마천의 장점으로 평가될 것이다.5. 비판의 방법과거 인물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판단은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가 되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春秋筆法은 사회에서 요청된 역사서술의 한 전형이지만,『春秋』의 계승을 크게 의식한 사마천 또한 역사의 포폄기능을 중시하였다. 그러나『사기』의 포폄은 개인뿐 아니라 사건, 또는 한 시대 전체에 대한 평가도 포함되었고 그것이 전체적인 구성과 문장을 통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이 특색이다. 흔히 사마천이 칭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역설적으로 비난하는 수법에 능하다고 지적된다. 公孫弘에 대한 서술에서 일견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공정하게 서술하는 듯이 보이나, 사실 그의 위선과 아첨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으며, 이는 이러한 한 개인의 도덕적 선악을 지적함으로써 역사적 귀감의 한 전형을 제시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무제 정치 전반에 대한 비판의 일환이었다. 즉 무제시대의 관료계 전체가 아첨꾼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며, 특히「유림열전」에서는 유학을 이용하여 전제권력을 미화시키려는 무제의 입장과 곡학아세로 타락한 유학
1. 纏足이란피륙으로 여자의 발을 감아 작게만들던 중국 풍속의 하나로서 발뒤꿈치에서 발톱 끝까지의 길이가 약 10센티미터 정도로 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접지면이 작아 직립보행이 불안정하여 외출이나 노동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부인의 가정 내의 유폐를 더욱 조장하였다. 또한 부녀자의 고통과 부자유를 강요하는 한편 여성미와 관능미의 조건으로서 가는 허리와 작은 발을 중시하는 중국 봉건사회의 상징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화북 지방의 한민족에게 널리 행해졌고, 최전성기인 청나라 때에는 만주인들에게도 보급되었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면 때문에 여러 학자들 사이에 반대론이 제창되어 서서히 쇠퇴일로를 걷다가 중화민국 성립 이후에 근절되었다.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을 구속하기 위한 극단적인 예가 되는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의 사례는 '아내가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안채 주변에 진흙탕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성 주변에 쌓는 방어용 울타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야만적인 것에 있어서는 중국의 纏足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2. 남성의 지배여러 문화권에서 여성 및 남성의 역할 배치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권력이 더 강한 사회의 경우는 아직 알려진 사례가 없다. 여성은 그 어디서나 일차적으로 자녀 양육과 가정 관리에 관여하는 한편, 정치적 행위나 군사 관련 업무는 단연 남성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남성이 자녀 양육에 일차적 책임을 지는 곳은 없다. 반대로, 여성이 큰 짐승이나 동물을 방목 또는 사육하거나 대규모 야생 동물을 사냥하며 심해의 고기잡이나 농사 경영 등에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문화가 있다면 그러한 경우는 지극히 극소수인 것이다. 산업 사회에서 성에 의한 분업은 비산업 사회보다 덜 엄격한 편이다. 그러나 남성은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 분야에서 여성보다 수적으로 여전히 우세하다.남성 우위는 일반적으로 가부장제(Patriarchy)로 언급된다. 왜 여러 형태의 가부장제는 보편적인 현상인가? 여러 가지 설명타 제도 속에서 일상화되어 연계된다. 가부장제는 기묘할 수 있지만 기묘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삶의 물적 조건과 강력한 사회 통제와 이데올로기 등이 연계된 연결망을 통해서 묻어 나오게 된다.)3. 纏足 한 쌍은 눈물 한 독纏足은 여자아이의 나이가 서너 살이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모두 네 과정을 거치는데 약 삼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건 눈물과 고통으로 얽힌 기나긴 시간이다. 고통이 제일 심한 시기는 발가락을 발바닥에 쭈그려 붙이는 때이다. 이 단계에서 엄지발가락 외의 네 발가락을 굽혀 발바닥 밑에 붙이고 힘주어 동인다. 그러면 염증이 생기고 붇고 화농하여 출혈까지 생기며 티눈이 생긴다. 이때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극심한 통증 때문에 몸부림친다. 만약 조심하지 않아 한 군데 다치기라도 하면 아픔이 온몸에 저려난다.이 단계에서는 식욕이 현저히 떨어지며 밤에는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纏足 한 쌍은 눈물이 한 독"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纏足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들은 딸을 보고 이렇게 타이른다. "얼마나 큰 고통이 있다 해도 꼭 참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커서 시집을 못간다" 이렇게 백당부 천당부한 다음에야 纏足을 시작한다. 여자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그릇에 물을 떠다 두 발을 먼저 깨끗이 씻어 준다. 그런 다음에 아이의 오른 발을 纏足 수술을 하는 사람의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더운 물에 발을 씻을 때의 열기가 다 빠지기 전에 엄지발가락 외에 네 발가락을 발바닥까지 굽힌다. 그런 후에 발가락 사이마다 약을 바른다. 약은 피부를 더욱 수축시키고, 화농하거나 염증이 발생하는 걸 방지한다고 한다. 발가락을 발바닥 밑으로 후려 넣은 다음 천으로 동이고 바느질로 기워 맨다. 그리고는 纏足에 신기는 양말과 끝이 뾰족한 신을 신긴다. 이것이 纏足의 첫 번째 단계이다. 발을 꽉 동이고 공기마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열이 난다. 그래서 纏足 수술은 시원한 가을에 한다.두 번째 단계는 조이는 과정인데, 반년 이상이 걸린다. 평균 사흘에 한번씩 발을 풀어 걸을 수 없게 된다. 하여 벽을 짚고 발뒤축으로 걷는 연습을 한다. 계속 뒤따르는 것은 발을 더욱 수축시키는 제3단계 '긴축'단계이다. 이때 하는 수술 방법은 발 가운데의 뼈를 발바닥 밑에 오그려 넣는 것이다. 힘주어 오그리기 때문에 발의 모든 뼈들이 오그라든다. 이 단계도 약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제3단계에서는 발의 근육들이 수축되며 발등의 굳어졌던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가 흐르고 화농하고 썩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발가락까지 썩어 들 때도 있다. 시간이 흘러 죽은 부위가 떨어져 나가면, 작고 고운 발이 나타난다.마지막 단계는 발을 오그리는 것인데 이때의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다. 역시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때에는 발등을 더욱 동그랗게 올라오게 하며 엄지발가락과 네 발가락을 함께 오목하게 들어간 발바닥 밑에 후려 넣는다. 이렇게 하여 발의 길이가 십 센티미터 정도가 되면 가장 이상적인 발이 된다.아이는 무려 이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고통의 대가로 시집갈 수 있는 자격과 미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준비를 끝낸 셈이다. 이 외에 영원히 뒤따르는 것은 사흘에 한 번씩 발을 동인 천을 풀고 티눈을 빼고 발을 씻고 발톱을 깎고 다시 천으로 동이는 등 귀찮은 일들이다.4. 纏足과 양귀비양귀비는 중국 미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양귀비도 절세미인답게 당 현종과의 러브스토리가 유명하다. 당나라가 망한 원흉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듯 그 최후는 끔찍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가다 화난 군중들에게 몰린 당 현종에게 목졸려 죽는 것이다. 그 뒤 당 현종은 사랑하는 여인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고통과 회환 속에 보내게 된다.그러나 중국 최대 절세미인이라는 양귀비의 초상을 보면, 엉뚱하게도 쭉 찢어진 눈에 작은 입을 가진 뚱뚱하고 푸짐한 아줌마가 그려져 있다. 물론 푸짐한 것이 당시 미인의 기준이었겠지만, 요새 눈으로 보면 그리 아름답다고 할 순 없다. 당시 미인의 기준은 작은 발이었버리던 풍습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발이 1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걸음을 걷는 것을 보면 아슬아슬할 정도이지만, 우아한 그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한다.이 纏足의 시술은 잔인무도한 것으로 남자의 거세와 대응되었다. '시전, 시긴'이라고 하는 시술은 두 번째 발가락부터 나머지 관절을 발바닥에 붙을 때까지 구부려 천으로 죄어서 묶는다. 절세의 미인 비연이나 양귀비는 구두의 크기가 10센티미터도 못되는 纏足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이런 纏足에는 3귀의 미라고 해서 '비', '연', '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비는 지방이 있어서 윤기가 흐를 것, 연은 부드러워서 살집이 좋을 것, 수는 모양이 아름다울 것을 뜻하는 것이다.이런 纏足은 규방에서 여자를 인공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쾌락을 한층 더 즐기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여자의 발이 좁고 작다는 것은 고귀하다는 상징이며, 발이 작다는 것은 성기도 멋지다는 특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보행에 보통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허리 부분이 단련되고 강철 같은 힘을 키워주었다.또 진상을 명확히 추리한다면 발을 기형화한다는 것은 규방에 가두어놓고 외출할 수 없게 하고,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는 질투심에서 나온 계략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플루타르코스가 기술하고 있듯이 처첩에게는 신을 것을 주지 않고 외출을 금하여 하루 종일 집 안에 가두어두었다. 대개의 여자는 금이 장식된 신을 신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았다. 纏足은 남자의 시기심이 낳은 열쇠로 잠겨진 발이었다.6. 素女經과 纏足纏足은 유연 체조와 호흡법에 의한 효과를 노려 어릴 때부터 발가락을 구부려 아장아장 걷게 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한 시술로서, 중국 고대의 도인이나 태식의 법에 바탕을 두고서 개발된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발을 부자유하게 만들어, 도망을 방지하도록 만들어진 시술이라고도 전해발전체를 핥는 것을 지(祇)라고 했다. 치(齒)라고 하는 것은 가볍게 무는 것이며, 교(咬) 는 발의 앞 부분을 세게 깨무는 것을 말한다.금병매에서 서문경이 반금련의 발끝을 세 개의 손가락으로 꼬집어서 의사 표시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염이라고 하는데, 두 손으로 쥐는 것은 악(握), 반죽하듯이 주무르는 것을 날(捏), 엄지손가락으로 여성의 발바닥을 긁는 것을 소(搔) 발바닥의 움푹 들어간 흠 속에 가운데 손가락을 넣고, 꺾어져 있는 여성의 새끼발가락을 꼬집는 것을 공(控) 이라고 했다. 또, 오른손으로 여성의 두 발의 끝을 맞추어 쥐고, 왼손으로 여성의 두 팔꿈치를 맞추어서 쥐면 발바닥의 움푹 꺾인 곳에 작은 공동(空同) 이 생기게 된다. 그 속에 남성을 삽입해서 마찰하는 것을 농(弄) 이라고 했다. 서구에서는 두 유방을 사용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纏足을 사용했던 것이다.이렇게 볼 때 纏足은 중국의 남성들이 여자를 인공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쾌락을 한층 더 즐기기 위한 생각에서 비롯된 악습이자 가장 잔인한 학대의 하나이다. 纏足 한 쌍은 눈물이 한 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纏足을 중국 남성들은 미의 조건으로 삼고 섹스의 한 방편으로 탐닉했다니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러한 纏足이 193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왔다고 하니 중국인들의 변태성과 가학성은 실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이다.이렇듯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여성의 신체 일부를 철저히 유린한 중국인들의 숨겨진 무서운 본능을 감안할 때 중국인들은 일본인 이상으로 경계해야 할 민족 중에 하나이다. 성문화는 단지 섹스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사회 전체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화만으로도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7. 버선과 纏足한국에서는 틀버선이라 하여 계집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발에 맞는 버선이 아니라 한결 작은 버선을 신겨 발의 성장을 억제하였다. 틀버선을 신기 시작하면 반년은 울어야 하.
1. 後宮이란중국 천자의 궁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외조는 천자가 주권자로서 백관(百官)을 접견하고 정치를 주재하며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반면 내정은 천자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황후 이하의 부녀와 미성년의 아이들 및 환관(宦官) 등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보내는 장소이다. 이 내정이 후궁으로, 그 구성인원은 여자가 다수를 점하므로 이 궁중의 여자들도 후궁이라 지칭하게 되었다.중국은 고래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로 내려와, 처첩(妻妾)의 수는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많음은 유교(儒敎)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 주공(周公)이 제정하였다고 전하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女官)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後世)의 천자인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백낙천(白樂天)이 당(唐)나라 현종(玄宗)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後宮佳麗三千人”이라 읊은 바와 같이 많은 여인을 후궁에 두었다. 《진서(陳書)》에 “寵傾後宮”이라 한 것처럼 천자의 총애는 정처(正妻)인 후(后)보다는 첩인 3부인(三夫人:貴妃 ·貴嬪 ·貴人) 이하의 여인들에게 기울어져, 후궁이라는 말은 거처하는 장소나, 후(后)를 포함한 천자가 거느렸던 모든 여인을 뜻하기보다는, 천자 또는 임금의 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천자가 궁중에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은 그 후사(後嗣)를 얻음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천자가 여색에 빠져서 건강을 해쳐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고, 한 왕조의 말기에는 천자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빚기도 하였다. 후궁에서의 연락(宴樂) 때문에 정치를 망친 천자의 예는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漢)의 성제(成帝), 진(陳)의 후주(後主), 수(隋)의 양제(煬帝)가 꼽히는데, 후궁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나라 현종의 예는 특히 유명하다.후궁은 철저히 황제라는 남성 개인을 위한 공간이었고 후궁은 그 자체 황재의 성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므로 후궁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그 많은 여인들의 일상생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이라든가 잡무는 여인들 자신에 의해 처리되거나 혹은 거세된 남성인 환관에게 맡겨졌다.이러한 후궁제도는 이미 商代부터 출현하였다.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대국에서는 수천명의 여인을 두었고 소국도 수백명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것이 이후 기원전 3세기 진대의 황제지배체제 확립과 더불어 체계화되어 전근대 전시기에 미치게 되었다. 중국의 후궁제도는 무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2. 황후의 지위와 그 책립황후는 후궁을 주재하는 인물로서 황후란 호칭은 진시황 시기 ‘황제’란 칭호가 제정되면서 도입되었다. 후궁 내에 거주하는 모든 여성들은 황후에게 통속되어 있었는데 황제가 바깥세상, 즉 조정의 정무를 주관한 반면에 황후는 후궁내의 제반 업무를 통괄하며 황제를 보좌하였다. 따라서 후궁내의 모든 여성들은 황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으며, 황후는 후궁의 주재자로서 법령과 형벌을 집행하며 내부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황후는 후궁내에서만 권력을 지닌 것이 아니었으니, 황제권력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황제의 모친인 황태후가 황제권력을 대체하기도 했다. 이를 臨朝稱制라 하였는데, 황태후가 조정에 나아가 황제의 명령인 ‘制’를 대신 내린다는 의미이다. 전한의 呂太后가 최초로 임조칭제를 한 이후 전한의 竇태후, 부태후, 王태후 등으로 이어졌으며, 위진남북조 시기 西晉의 賈皇后 및 北魏의 馮태후, 胡태후 등 그 사례가 허다하다. 황태후의 섭정은 황제독재체제가 수립되었다고 말해지는 송대 이후에도 빈번히 행해졌다. 이렇게 임조칭제 내지 垂簾聽政하는 황태후의 권력은 공히 황제권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황후의 지위 내지 존엄성이 황제지배체제의 확립과 평행하였다고 칭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 때문이다. 특히 황제가 부재할 때 황태후는 후임 황제의 선임에 결정적인 권위를 행사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황제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황태후가 나서서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인물을 황제로 등극시키기도 하였으니, 전한 시기 昭帝가 사거한 후 昌邑王 劉賀가 그 뒤를 이었지만 황태후가 宣帝를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던 일은 그 유명한 예이다.당대 이후 율령제를 보면 황후가 군신들의 하례를 받고 내외명부의 입조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며, 황후의 생일인 千秋節과 황태후의 생일인 聖壽節은 국경일로서 매우 성대하게 베풀어졌는데, 청대 말기인 광서 20년에 거행된 서태후의 60살 생일 때는 광서제가 바친 60만냥의 白銀을 비롯하여 행사 비용으로 무려 1,000만냥의 은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황후는 천하 인민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母儀天下)’라는 관념을 선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황후와 비빈 사이는 매우 양면적이어서 비빈은 평상시 황후를 대할 때 처첩의 예를 행하였으며 후궁내 조회가 행해질 때에만 군신의 예를 갖추었다. 황후와 비빈들 사이의 신분상 격차는 평상시의 의전, 음식, 의복은 물론 처우와 장례 거주 공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현격한 구별이 있었으며, 황후를 책립하는 의식 즉 大婚또한 국가의 대사로서 매우 성대하게 거행된 것도 바로 봉건왕조 하에서 황후라는 지위의 중요성과 그 배경이 되는 황제 권력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후궁의 인원구성과 황제의 성생활후궁의 여성은 대체로 황후와 비빈, 그리고 궁녀라는 세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황후의 거처인 中宮과 구별하여 비빈궁녀의 거처는 따로 六宮이라 불렸다.『禮記』에서는 이상적인 후궁의 인원구성을 ‘3 夫人, 9 嬪, 27 世婦, 81 御妻’ 라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숫자는 이상형에 불과할 뿐이어서 전통시대를 통해 후궁의 비빈궁녀는 수천명에서 만명을 상회하였다. 예를 들어 진시황의 阿房宮에는 후궁의 숫자가 만여명에 이르렀고, 西晉의 武帝 시기에는 吳 정권을 멸망시키면서 그 후궁 5,000명을 받아들여 원래의 인원에 더하여 도합 10,000명에 달했으며, 당 현종 시기 에는 무려 40,000명이나 되었다. 명대에도 궁녀만 해서 9,000명이었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이렇게 후궁에 수많은 여인들이 살다 보니 그 내부에서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조정의 관료 조직을 본따 女官이라는 관직을 두었는데 이들 직위에도 자치적으로 비빈궁녀들이 임명되었다. 황후는 이러한 여관조직을 통할하는 女主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빈궁녀와의 사이에 군신관계가 파생될 수 있었다.후궁의 여인들은 황제의 잠자리 시중을 위한 존재들이었으므로, 황제의 선택을 받아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그녀들의 지상 최대의 목표였다. 황제의 은총을 받는 것을 召幸, 行幸, 承幸이라 하였는데 후궁의 많은 여인들을 황제가 모두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황제의 선택은 무작위적으로 행해졌다. 무작위 선택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황제가 초상화를 보고 대상을 고르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주사위놀이, 화살쏘기,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가는대로 향하기 등의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남송시대 탁종은 淫心이 일어나면 궁전이든 연못가이든 가리지 않고 승행을 행하였으며 매일 아침마다 환관에게 승행을 확인하러 오는 비빈의 숫자가 통상 세 명에서 다섯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이러한 황제의 소행에는 엄중한 경호가 행해졌으며, 소행의 기록은 후궁내 모든 비빈궁녀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아주 중요하였고 따라서 이미 주대 이래 각 왕조에는 후궁내에 소행과 관련된 기록을 관장하는 기구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는 환관들에 의해 관장되었는데, 명대에는 文書房, 청대에는 敬事放이라 불렸으며 그 문서는 承幸簿라 일컬어졌는바, 이 승행부는 최고의 기밀문서로서 오직 황제와 황태후만이 열람할 수 있었다.
1. 들어가며한국사회는 19세기 중반에 들어 ‘전통’과 ‘근대’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문명의 달성’과 ‘민족정체성의 유지’라는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한국사회와 사상계는 이 같은 전통과 근대의 갈등 상황에 대하여 거부형, 선별적인 수용형(동도서기론), 급진적?전면적인 수용형(개화당)의 세 가지 흐름을 보여주었는데, 개항 이후 개방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개항기 후반기로 볼 수 있는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근대성’의 수용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사회문제와 관련하여 근대 한국 종교계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신흥민족종교인 동학과 대종교의 동향을 고찰해 보겠다.2. 한국 근대시기의 제반 상황한국의 근대시기는 봉건적 모순이 심화, 확대되면서 이를 시민의식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식민지적 모순에 빠졌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볼 때는 서구에서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부르주아혁명을 완수한 후, 해외에서 원료를 획득하고 상품시장을 구하려는 제국주의의 팽창단계이다. 이 서세동점하는 세계사적 조류속에 일본은 1854년 미국?영국에 의해 개항하였고, 1860년 중국은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을 위시하여 서서히 반식민지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있어서 외세의 위협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이를 내부에서 극복할 만한 정치적 역량과 물적 토대가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 무렵 과거제도의 혼란, 매관매직의 만연, 법도와 기강의 문란 등으로 봉건왕조의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삼정문란은 농업경제의 생산력을 극도로 저해함으로써 민족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억제하였다. 특히 삼정 가운데 전정의 문란으로 원래 국가소유의 토지가 점차 사유화되고 심지어 토지수탈이 빈번하였다. 환곡은 지방토호들의 고리대금 착취수단으로 전락하였고, 군사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까지 군포세가 내릴 정도였다. 이러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지방토호들의 착취는 농업재생산의 기반을 쇠잔시키고 나라의 경제 자체를 흔들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은 서학의 출현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 보국안민의 벼릿줄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무시로 강요받은 통상교섭 등은 허약한 왕실의 동요를 가져왔고, 대원군의 왕권회복과 쇄국정책같은 일시적 대응책도 강구되었지만,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점차 외세 침략의 각축장이 되면서 이 나라의 신념체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러한 때에 일반 민중의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면서 봉건왕조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의 횡행횡포에 대한 성토는 물론이요, 깨우친 민중혼은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기에 이르렀다. 1862년 삼남일대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된 임술농민전쟁을 필두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까지 도처에서 일어난 대소 민란의 수는 무려 70여건에 달했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그 이전에 일어났던 어떠한 농민전쟁보다도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와 근대적 지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또는 민족자주와 피지배의 갈림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민중운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었다.이 기간은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민심이 안주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민중의 힘은 쇠진한 가운데 극심한 ‘아노미현상’이 일어났다. 즉 서양의 문물과 학리가 들어오고 전통의 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가치체계를 요구하게 되나, 현실적으로 규제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에 또다시 김일부, 강증산 등이 잠재화된 민중의 대망의지를 담고 일어섰다. 그들은 당시 민중에게 비전을 제시하였던바 전자는 그 당시 전통철학인 역학원리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새시대의 도래를 이론적으로 밝혀보려 하였고, 후자는 보편적 민중의 혼에 강한 민족의식과 미래지향적 정조를 부여하여 민심을 고양시키려 하였다.)한편 1900년대로 넘어 오면서 일본의 참략의도가 공공연해지자 강력한 민족혼으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국권을 되찾고자 국외에서 발흥한 나철의 삼일철학도 새로운 비전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 종교적 각성에도 불구하고 대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경계심과 우려산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이 물질에 지배된 인간소외의 현상이라 보고, 이를 근본적으로 변혁코자 그 변혁의 원동력을 ‘깨우친 민중혼’에 두고, 소외시키는 자(제국주의자)와 직접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소외자(조선민중)를 공히 자각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는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갖는 구국정신이요, 구수운동이었다.)3. 근대 한국 유?불?선, 기독교계의 동향당시 한국의 종교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던 巫敎를 비롯해서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서교 등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이들 종교들이 종교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종교의 생명인 신앙과 수행이 지극히 편협한 부분 신앙이나 부분 수행에 치우쳐 있었고, 종교의 대 사회역할이라는 본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유교는 조선왕조 500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나, 19세기에 와서 실학의 강한 도전을 받았다. 실학자체를 개신유학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역시 소수의 선각자적인 지식인들 층에서 수용되었고, 실제의 경세치용의 학문으로서 발전하지 못했다. 유학의 가장 결정적인 자기모순은 양반사회의 지도이념과 생활규범이 유리됨으로써 마침내 국망의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이다. 원래 유교는 人道之學으로서 修齊治平을 근간으로 삼아 보국안민하는 것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더욱이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양반사회를 지탱하는 지도이념으로서의 유학은 양반계급 자체가 흔들림으로써 많은 반체체적인 지식인들을 양산하게 되고 몰락을 자초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개항기에 유교는 사실상 조선조의 전통적 국제관계를 지키는 보수적인 쇄국정책의 주역을 담당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조직적인 평가절하 정책에 의하여 개화와 근대화의 저해요인으로 매도되어 그 사회적 통합력을 상실하였다.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하층계급으로 취급되었다. 사찰은 망자를 위한 기원이나 질병을 고치는 재나 불공을 드리기 위한 안식처, 현실도피처로 전락하였다. 더욱이 승려들의 동냥행위나 사찰의 미신화는 불교의 위신을 그만큼 의 개신교가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 취약점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4. 동학의 발생과 사회변동에 대한 대응원래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에 의해 창도된 것이었으나, 단순한 종교신앙을 넘어서 불안한 민중들의 대망의지를 실천하려는 사상적 지주가 되고 斥洋斥倭, 濟暴救民, 廣濟蒼生의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해 포교활동을 전개하다 양반지배층의 반발로 체포되어 1864년 참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계속 번져 그 후 30년 동안에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으로 심한 부패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전국에서 농민전쟁이 발생하는 등 민중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고 있었다. 때마침 중앙정부는 200여 년 동안 탄압을 계속하던 서학에 대해서까지 신교자유를 보장하는 등 종교에 대한 완화 정책을 쓰면서도 교조 수운 이래 동학에 대하여는 탄압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 신도들의 원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집결하는데 성공한 동학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 1892년(고종 29) 12월 삼례도회에서, 또 1893년 4월 보은에서 수만 명의 동학신도들이 집결해 일촉즉발의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894년 2월 5일 전봉준을 선두로 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못이겨 관아를 습격, 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의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한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안무사 이용태는 이 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도라며 탄압하자 이에 분격한 수만의 농민들은 4월에 김덕명, 손화중, 김개남 등의 인솔 아래 농민군의 체제를 갖춰 무장, 영광, 장성 등 전남?북 일대를 차례로 점령해 탐관오리를 추방하고 그 해 5월 31일에는 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수포에 그치고 말았으며, 이에 승승장구한 일본으로 하여금 1904년에 러일전쟁, 1905년에는 을사늑약체결, 1910년에는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침략을 하게 했지만, 이 운동의 결과는 짓눌린 민중에게 자각의식의 고양과 새로운 세계사적 안목을 심어주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농민군들이 제시했던 이념과 사상은 근대 민주국가의 이념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이 제시했던 폐정개혁안 12개 조항을 보면 그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탐관오리의 숙정,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정죄, 노비문서의 소각, 인재 중심의 국가요원 선발, 천민의 대우개선, 무명잡세의 폐지, 지벌과 학벌의 타파, 재무구조의 개선, 통일문제 등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일대 혁명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에서 주장했던 구호는 곧 민중의 절실한 외침이며 그것이 근대화운동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동학농민운동이 한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을 정치 사상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첫째, 정치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이 혁명의 결과 민중 대다수가 근대적 의미의 민권이념이 결여된 상태에서 왕권을 부인하고 더 나아가 민중본위의 정부를 수립하도록 주장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민중은 자신의 힘이 강대함을 알게 됨으로써 주권재민의 서구적인 사상을 다소나마 자각할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민중은 모든 일에 자포자기하던 종래의 습성을 버리고 점차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자신들을 주권자와 동일시하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 정치의식에서 위정자들이 반성하고 자각하게 한데서 동학혁명의 정치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둘째,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특히 계급을 타파하려던 의식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동학농민운동이야말로 사회제도의 근대화를 저해하고 있는 계급차별제도를 타파하려고 시도된 운동이었다. 당시 한국민족이 안고 있던 최대의 과제가 계층 구조적 갈등을 극복하는 점이었다고 생각할 때 해월 최시형이 “지금 이후부터 우리의 道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