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음식과 문화Ⅰ. 들어가며보통 인간의 생존에 대한 3요소로 크게 의?식?주를 지적한다.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음식과 물을 먹지 않으면 더 이상 생존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사람이나 동물은 모두 매일같이 음식을 먹지만, 사람의 경우는 단순히 ‘살기위해’ 먹는 것은 아니다. 민츠가 지적하듯이 인간에게 ‘먹는다’는 것은 절대로 순수하게 생물학적 행동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먹어온 음식에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과거와 연결된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식생활은 인간이 영위하는 여러 현상 중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인간의 생리적 요구뿐만 아니라 사회적?심리적 요구까지도 충족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식생활을 바탕으로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식생활 문화는 인간이 계승해 온 문화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긴 역사 속에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먹는다. 이 의미들은 상징적인 것이며, 상징적으로 소통되어 왔다.예를 들면 음식에 따라 그 사람의 계급이나 계층이 나타나고, 그 사람의 지식과 교양이 드러난다. 심지어 포에르바하는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결정한다고 했다. 먹는 것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먹는 대상은 물론 먹는 방법도 제한을 받고, 음식 그 자체 그리고 식사행위는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음식과 음식을 먹는 행위는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음식과 식사행위가 특정 문화의 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개인이 어떤 음식을 먹고 성장하며, 음식과 관련하여 어떤 생활을 영유하는가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선다. 물론 같은 문화권에서 음식을 선택하고 즐기는데는 개인의 취향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적 취향에 의해 모든 것을 먹거나 어떤 방식으로 먹는 것거나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였다.이러한 양상은 4~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변화를 맞게 된다. 서 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게르만족이 유럽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대두된 것이다. 이들은 육류를 위주로 무엇이든 많이 먹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식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겐 많이 먹어서 야성미 넘치는 강인한 전사로 비춰지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게르만족의 식 관습은 차츰 널리 퍼져, 음식을 많이 먹는 것, 특히 육류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부와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식 관습은 로마 사회에 편입되면서 포도주와 빵을 중시하는 교리를 가진 기독교와 대립하게 된다.그러던 와중에 8~9세기에 이르러 유럽 사회에 기록적인 기근이 계속된다. 인구 증가와 연이은 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식량 생산을 고기 보다는 경작으로 인한 곡물 생산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게 된다. 이로 인해 평민들의 먹거리는 차츰 곡물 위주의 단조로운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귀족들이 평민들의 사냥과 방목, 숲에서 과일 등의 채집을 금지시킴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욱 더 심해지게 된다. 육류는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었고, 때문에 육류를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특권과 지위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14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완화된다. 이는 이 시기에 페스트의 창궐로 유럽인구의 1/3~ 1/4 가 사망하고, 식량의 생산이 점차 곡물위주로 변경되면서, 식량 사정이 다소 나아졌기 때문이다. 또 평민들에게 축사를 사용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다시 평민에게도 고기의 섭취가 가능해 졌다.16~18세기는 유럽의 식사예절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 시기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15~16세기 즉, 르네상스시기에 식사예절이 정립되고 요리의 개발이 활발해진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포크, 나이프, 식탁보의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절대왕정기 시기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한다.꼭 빵과 죽이 나온다고 한다. 죽은 최소한의 재료로 배를 최대한 불릴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습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육류에는 소금과 후추 정도만 써서 육류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음식에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한대기후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낙농품과 아이스크림이 발달하였다.Ⅲ. 독일음식문화의 이해1. 음식을 통해 본 독일의 모습독일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가? 예전에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직접 찍어 온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보았던 많은 사진 중에서 친구가 독일의 뮌헨에 갔었다며 보여준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서 거리의 노변에 위치한 카페의 차양 밑에서 찍은 것이었다. 사진 속의 친구 뒤편으로는 체격 좋은 독일 남녀가 두툼한 소시지와,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맥주를 먹는 모습이 배경으로 놓여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독일에서 맥주를 남녀노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상적으로 마시는 줄은 여행을 가서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자신도 그곳에 가서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셔볼 기회가 있었다고도 덧붙여 주었다. 나 역시도 그 사진을 보면서 독일은 맥주의 나라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친구가 보여준 사진에서 보았던 이러한 독일인의 모습이 우리가 독일하면 머리 속에 떠올리는 독일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이들은 독일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휘장 아래에서 행진하는 무서운 얼굴의 독일 군인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이들은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 부흥을 달성한 성실 근면한 독일 노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르게 독일의 음식문화와 그것을 견주어 생각해 보면 덩치 큰 아저씨, 아주머니가 약간 미소지은 듯한 얼굴에 한 손에는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독일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이처럼 독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매일매일의 음식으로 승격되었다. 때문에 독일의 전역에서는 카페나 비어가든과 같은 술집이 매우 많이 있다. 맥주에 관한 독일인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자국의 맥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맥주순수령(1516년 Purity Law)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독일맥주를 마시며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맥주에 대해서 화학주라며 업신여기기도 한다.독일에서 이렇게 맥주문화가 발달된 데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토양이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하수를 마시기가 어려웠다. 물을 받아놓아도 석회암이 물 속에 녹아 침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 대신 맥주를 마시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은 지금과 같은 맥주의 천국이 되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독일인들이 영양섭취의 30% 이상을 이 맥주에서 얻는다고 한다(실제 맥주는 액체 빵이라고 할 만큼 많은 영양분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에겐 단순하게 평범한 술의 하나인 맥주가 독일인들에겐 종교적 수준이상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독일인들은 신체의 70%가 맥주로 되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3) 소시지나 등의 저장 요리 발달 - 겨울나기 음식 소시지맥주와 더불어서 독일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음식이 바로 돼지고기를 갈아서 만든 소시지일 것이다. 독일인들이 맥주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것 중에 하나가 소시지다. 독일의 속담 중에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다. 반드시 소시지와 햄이 있어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이 독일 속담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말만큼 독일의 음식문화를 잘 함축한 것도 없다.독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시지와 햄은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음식이다. 대부분의 독일가정 식탁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그래서 독일에는 소시지와 햄의 종류가 상당히 많다. 우리가 독일 소시지의 대명사쯤으로 알고 있는 순대와 같이 굵고 기다란 모양에서부터 새끼손가락 굵기의 것까지 각양각색이다. 또 케첩과 카레 가루로 구그들의 문화를 전파시킨 이탈리아 등 이러한 요리문화의 메이저와 접해 있으면서도 독일의 음식문화는 유럽 내에서도 마이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은 독일만의 특수한 환경적 영향에 기인한 탓일 것이다.한 사회의 음식문화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그 사회가 속해 있는 자연 환경일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주변의 각국들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은 토질로 인하여 차문화가 발달하였고, 한국은 변화 무쌍한 기후에 의해서 발효음식이 발달하였고, 일본은 섬나라답게 수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였다. 오랜 역사 동안 각국의 환경에 적합한 그들만의 음식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또한 자연환경 이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 요인들이 음식문화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에는 자연환경 이외에도 그들의 유럽 내에서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영향을 계속해서 받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고,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건은 독일로 하여금 수 많은 전쟁과 갈등을 겪게 하였다. 이런 사회적, 역사적 요건은 독일의 음식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독일만의 독특한 음식문화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1) 독일의 자연환경독일은 유럽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북부는 평원, 중부는 고지대, 그리고 남부는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프랑스에 비하여 다소 추운 편이나 남쪽으로 내려가도 산맥에 가까워지므로 고도가 높아져 남북간의 기온차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햇볕이 적은 편이어서 농작물의 성장에 유리한 기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국토는 반정도가 농지이며 그 중에서 1/3이 방목지이다. 독일의 농지 역시 토질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5~6년 주기로 윤작을 하게 된다. 즉 한해는 밀을 심고, 그 다음해에는 보었다.
한국 경제위기에 대한 정치적 접근- 1997년 한국 금융위기 중심으로 정치적 상호관련성 연구-Ⅰ. 들어가며정부 수립 이후 약 반세기 동안 한국의 경제는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묘사될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특히 홍콩, 싱가폴, 대만과 함께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신흥공업국으로써 아시아의 4마리의 용으로 호칭되며 정부주도의 수출 지향적 발전정책 등이 기조가 되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을 제시하였다.그러나 1997년, 태국을 진원지로 하는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한국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9월 29일, 대미 환율이 개장 40분 만에 변동 폭 상한선까지 상승하며 거래가 중단되었고, 11월 20일에는 환율 변동 폭을 2.25%에서 10%로 확대하는 정부의 긴급대응과 함께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됨에도 불구하고 12월 11일 외환시장의 거래가 개장 4분 만에 중단된 것이다. 이것은 주가 대폭락과 원화 가치의 하락 등 외환시장의 불안정으로 인한 자금시장 경색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다시 어음 부도율의 급등, 가동률의 급락, 실업률의 증가로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소위 사상 초유의 “IMF사태”의 발발이다. 개발도상국의 모범국인 한국경제의 급격한 추락은 한국경제의 건전성을 신뢰했던 Sachs(1997)는 물론이요, 이미 동아시아 경제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 생각을 하고 있던 Krugman(1998)같은 경제학자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고, 이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모순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하겠다.금융위기가 발생한지 약 10년이 다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많은 경제학자들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진행시켜왔으며 경제위기를 진단하는 일은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부는 한국의 금융위기를 동남아 외환위기의 ‘전염효과’로 분석하기도 하고(김동원, 1998), 일부는 단기 외화 유동성 부족과 같은 미시적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바트화 방어를 위해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에 개입하였지만 오히려 국제투기자본의 공격이 본격화됨에 따라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외환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인도네시아의 루피화의 급락을 촉발시켰고, 이것은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까지 확산되었다.) 게다가 1996년 말까지 엔화 강세 하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이, 1995년 후반 엔화하락을 통해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한국 경제구조 역시 단기 외채에 지나치게 의존한 상태로 외환 보유고가 충분하지 않은 시점에서 금융개방과 자유화는 취약성을 띨 수밖에 없었고, 정부의 환율방어과정에서 가용외환보유고를 무리하게 소진함에 따라 원화가치 하락과 함께 국가 파산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2. 한국 금융위기의 전개과정1997년 닥친 한국 외환위기는 매우 급작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국은 1980년 석유파동에 따른 외환위기에 직면한 바 있으며 1986년까지 IMF 프로그램의 적용을 받았을 뿐 아니라 1980년대 말 호황에 따른 외채상환 이전까지 만성적 채무국가로서 외환부족상태에 있었다. 이 때 한 국가의 외환 보유고가 급속도로 고갈되는 현상으로 정의되는 외환위기는 자본자유화 하에서 외국자본이 개발도상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면서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이것은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 그리고 국가신인도의 하락과 동시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외환위기의 1차적 지표는 외국인투자의 유출입 상태, 해외부채의 만기(만기연장)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단위: 억달러, n.a: not available)연도19931994199519961997총외채*43956878410471208총외환보유액**202.6256.7327.1332.3n.a무역수지**18.6-31.45-47.46-153.06-28.01***장기자본수지**88.9958.6178.27117.97n.a단기자본수지**-20.2131.6355.9152.29n.a주: 외환보유고는 금, SDR, IMF 포지션, 외철수하여 초과 외환수요까지 발생하여 외환시세가 폭등하였고, 이런 폭등으로 원화가 폭락하는 등 외환시장 마비현상이 나타나 금융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요컨대 1990년 초반 진행된 금융개방으로 가속화된 한국 내부의 모순은 은행위기로 나타났고, 이것은 국제적 여건의 변화로 인해 외환위기로 번지게 되었다.경제적 요인정책적 요인국제적 요인동남아 외환위기의 확산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미국?일본의 소극적 대응IMF 정책 효과의 불확실성국내적 요인대기업 연쇄부도금융기관의 부실화상황판단 및 대응의 안일함정책의 비일관성?불투명성Ⅲ. 한국의 금융위기 원인분석: 정치적 요인을 중심으로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은 1997년 심각한 금융위기 및 외환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다양한 원인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본 페이퍼에서 한국 경제위기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Krugman이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도덕적해이 모델 (Moral Hazard Model)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모델은 관치금융 하에서 정부의 묵시적 지급보증이 이루어지고 도덕적 해이에 따른 금융기관의 과대한 대출과 이에 따른 자산가격의 과도한 상승이 외환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현성은 금융기관의 자금 원천인 예금을 정부가 전액 보증하면서도 금융 감독 기능이 미흡하였음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과다한 대출공급은 부동산 가격과 주가 등 자산 가격을 상승시키고, 이는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을 호전시켜 보다 높은 수익을 목표로 위험이 큰 부분에 대출공급을 늘리지만, 경기 침체로 자산 가격이 하락하면 부실채권의 증가로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신규대출 기피는 물론, 기존 대출을 회수하면서 자산 가격이 다시 하락하는 악순환에 돌입한다. 특히 외국자본가의 투자회수는 외환위기를 초래하며, 이러한 상황은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Krugman의 모델을 근거하였을 때 결국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이해관계 변화, 그리고 자본의 과잉 유입은 한국의 금융개방이 부작용을 낳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대외적 의존의 심화에 기인한 종금사의 단기자본의 급증 같은 취약한 자금구조로 대표된다. 이것은 신용도가 떨어질 경우 자금의 경색 뿐 아니라 금융기관과 대기업까지 위험에 노출시키고 더 나아가 심각한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국내외적 압력을 받기 쉽게 만들 위험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잉투자의 심화는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의 증가로 기업재무구조를 악화시켰고, 이는 대기업의 부도사태와 은행위기를 낳았다.이런 일련의 문제들은 효율적 경제구조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관리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 발생하는 혼란으로 볼 수 있다. 즉, 국내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못한 시기에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금융 개방으로 인한 부작용은 결국 “정치적인 측면” 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금융개방의 발단 단계부터 국제적으로 금융시장이 통합, 팽창되면서 경쟁력을 갖춘 선진국의 금융기관들이 수입 증대를 위해 자국 정부를 통해 발전도상국에 개방 압력을 가했다는 점과, 한국의 경우, 국내 금융기관의 경쟁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개방을 결정했다는 점은 부정적인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의한 점진적 금융개방의 과정에서 국가단독의 국제자본 통제를 추구하는 정부와 금융기관에 의한 자본조달 활성화를 원하는 대기업의 연합관계에 분열을 초래했고, 이런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가 자본의 과잉 유입과 과인투자의 문제를 발생시켜 금융체제와 산업 전반에 있어 국제구조의 압력에 취약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정리하면, 금융개방이라는 대외적 압력에 대해 정치적 의사결정의 실패가 국제구조의 편입 순서와 절차의 오류로 인해 경제구조의 모순을 더욱 더 심화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 대내적 변수: 민주화를 전후로 한 국가주도적 발전모델의 변화(1) 1987년 민주화 이전시기한국의 금융부분의 취약성은 토착기업인을 억압했던 일제 식민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적 금융기관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 승리와 공화당의 총선 승리 등에 기인한 국가의 압도적 우위의 지속에 안심하고 국제자본은 1970년대 초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973년 중화학공업화 실시에 따른 1979-1980년의 과잉생산위기는 국가주도형 관치금융으로 고도화된 경제 및 산업구조에 상응하는 효율적 자본수요 충족을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이며 금융체제의 개혁의 필요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수지적자와 석유파동 등은 80년대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물리적 노동의 통제와 특혜대출에 의한 자본 집중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또한 강력한 독재정권의 힘으로 재벌간 중화학공업 중복 투자의 조정에 대한 신속한 정리,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정을 통한 노동부문에 대한 억압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위기 타개책으로써 국제자본에 유리한 투자환경을 조성해줌으로써 경제위기가 대외신인도 하락에 따른 심각한 외환위기로 확산되는것을 정치적 측면에서 조정했다는 데서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결단과 유사한 면이 있다.(2) 1987년 민주화 이후 시기1980년대 중반, 3低 호황으로 인해 경상수지 흑자 및 정부 통화 공급에 의한 성장정책이 거품경제를 형성함으로써 기득권의 이해를 강화되고, 정부는 금융부문을 통제하고 직접 관리하여 사실상의 투자까지 관장하였으나,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정부의 주도권이 약해지고 급속한 성장을 이룬 재벌의 영향력은 강화되었으며,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성장한 노동자에 대해 일방적 억압방식의 경제발전이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금융시장의 정상화나 재벌 개혁 등을 수행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개혁안 후퇴를 통해 재벌과 금융부문의 구조적 문제점을 심화시키고, 정부와 재벌, 금융기관의 유착에 근거없었다.
The Patriot; 미국 발견하기죽은 가브리엘이 가슴에 품었었던, 여기저기 찢긴 부분들이 기워진 피묻은 성조기가 대영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휘날린다. 감성을 자극하는 사운드가 점점 고조되면서 서서히 스크린 속 인물들에게 내가 투영되려는 순간, 9.11과 국제테러리즘, 전쟁을 선동하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오늘날의 미국이 머릿속에 오버랩된다. 미국, 미국은 도대체 어떤나라인가!1776년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맬 깁슨 주연의 영화 패트리어트는 미국 독립혁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당시 미국대륙은 영국과 프랑스간의 식민지경쟁이 치열했던 때였다. 7년전쟁이 끝나고 결국 아팔래치아산맥에서 미시시피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국의 통치권에 합의하고 그 곳 미국대륙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꿈꿨고, 독자적으로 13개주를 형성하여 처음 얼마간은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영국식민정부가 개척자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을 동원하면서부터 이들은 ‘주님 아래 평등한’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 스스로가 독립할 것을 요구, 영국정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한 남자, 벤자민 마틴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프랑스군와 인디언간의 끔찍했던 살육전에 참가해서 복수를 했던 벤자민 마틴은 그 후 전쟁에 대한 회의와 죄책감으로 인해 다시는 전쟁에 나서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아이들을 돌본다. King George의 폭정에 불만을 가진 찰스타운의 식민지 개척민들은 의회에서 State가 아니라, 한 국가로서의 “America"의 독립을 결의한다. 벤자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통한 독립의 추구는 의회를 통과했고 곧 사람들은 정규군에 편입하여 영국군과의 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영국의 명장 콘월리스 장군은 찰스타운을 함락시켰고, 이 과정에서 벤자민의 둘째아들 토마스가 죽음을 당한다. 아들의 죽음에 격분한 벤자민은 다시는 살육하지 않으리라는 신념까지 뿌리뽑은 채 영국군에 대항하여 복수를 시작하고 첫째아들 가브리엘과 함께 미국의 독립을 이끄는 혁명적 영웅이자 가족의 수호자로써 재등장한다. 미국 개척민들을 설득하여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한 벤자민은 영국군과의 몇차례 커다란 전쟁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아군과 적군을 합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양적 질적 수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을 써서 마침내 미국 정규군과 함께 영국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고 그는 다시 남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게된다.일단 영화를 보는 내내 참으로 ‘미국적이다’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무엇이 미국적인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하기가 쉬운일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대해 느낌점들을 평가하면서 영화 The Patriot가 보여주는 미국적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시도해보겠다.먼저, 벤자민 마틴은 사실 역사 속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생성된 캐릭터이다. 용맹스럽고 뛰어난 전술을 구비했던 프랜시스 매리언이 바로 그 모델이었지만, 벤자민 마틴은 미국독립혁명 당시 커다란 공을 세웠던 프랜시스 매리언과 같은 인물들의 캐릭터를 종합해놓은 인물로 설정이 되어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조국이기도 했던 낡고 부패한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여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신념을 보여준다. 그의 아들 가브리엘 역시 “독립과 자유를 위해” 입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주장하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찢겨진 성조기를 꿰메고 죽음의 문턱 앞에 설때까지 지니면서 반영국 독립전쟁이 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기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국의 총탄에 맞아 결국 죽고마는 가브리엘의 성조기는 아버지 벤자민 마틴의 손에 쥐어진다. 자유와 평등 뿐만이 아니라 가족애라는 뜨거운 피에 의해 다시 전쟁에 나선 벤자민은 말을 타고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군의 사기를 돋운다. 이 부분을 통해 영화 The Patriot가 미국의 건국정신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The Patriot는 투모로우나 인디펜던스데이와 같은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 탄탄한 플롯이나 개연성 보다는 미국제국주의, 영웅주의, 스케일이라는 3요소에 더 비중을 두는 애머리히 감독의 작품답게 할리웃 영화의 흥행성공요건인 스팩터클과 휴머니즘 양쪽 다 충족시키는 작품인데, 유난히 이 영화는 과장된 액션이나 잔혹성을 강조하면서 선-악 대립구도를 극대화시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영웅주의적 요소이다. 식민지 미국대륙에서 살아가는 개척민이라는 특수한 배경과 신분이 요구하는 것이 분명 혼란을 타개해줄 ‘영웅’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주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쟁탈을 위해 싸우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그들의 불안함을 해소할 구심점이 필요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영웅주의적 요소를 가족애로 교묘히 포장하고 있는 듯하다. 벤자민을 맹목적인 영웅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신념을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나서 바꾸어 혁명군에 가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즉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전장에 나갔고, 이어 그것은 patriot, 즉 애국심으로 치환이 된다. 극한적 상황에서 벤자민이 무수히 날아오는 총알을 모두 피해가며 영국군을 향해 잔혹하리만치 총과 칼, 토마호크등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며 보는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영국적 폭력은 악이요, 미국의 폭력은 선이라는 세뇌작용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 결국 이 모든 것은 미국적 이상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영화적 장치이며, 결국 어찌되었든간에 미국이, 미국인이 문제 해결의 중심에 올라서는 형태로 드러난다고 본다.간과하지 말아야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중간중간에 묘사되고 있는 흑인들이다. 영화는 흑인들을 완전히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인간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묵묵하게 수발을 들고있는 흑인 유모는 가벼운 정도이고, 민병대에 지원하는 흑인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그들의 신분이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묘사 보다는 그들 스스로 그런 상태에 만족하고 주인을 모시면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점을 사실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자유국가를 위한 흑인과 백인의 지원병들이 나란히 영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총을 겨누고 전우애를 발휘하는 장면도 연출하지만 이 조차도 흑인은 백인보다 둔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고, 영화의 이런 인종차별적 요소는 문제를 야기할만한 것으로써 결국 미국 독립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 내에는 백인위주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노자의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의 조국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을 인식해서일까? 박노자는 한국으로의 귀화를 택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을 비판만 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외국인의 입장에 서서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한국인의 입장이 되어서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귀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을 읽고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조금은 특별한 정체성과 이중적인 관점을 지닌 박노자, 그가 아니였다면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미시적인 구조를 쓴소리로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소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조차 우리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자각했더라도 침묵으로 일관한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을 읽고, 아니 읽는 도중에도 '어떻게 이런 글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속시원했다. 겉모습으로는 세계 최고, 선진국과 같은 모습으로 비춰질지라도 내면적으로는 모래위의 성과 같은 한국사회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주었기 때문이다.나는 지난 6월의 광기를 기억한다. 대한민국 전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뜨겁고 붉은 물결. 레드 컴플렉스의 극복이니,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느니 연일 매스컴은 떠들어대기 바빴고, 나 역시 월드컵 축구의 4강 신화 못지 않게 다이내믹한 한민족의 모습을 세계 곳곳에 자랑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모두가 붉은 옷을 맞춰 입고,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꺼내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그 때, 역사상 유래 없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파티와 환호를 즐길 때, 모두가 느낀 것은 애국심 그것이었을 것이다.예전에 한겨레21에서 박노자 교수는 월드컵 열기를 집단 광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대회를 연상했다'며, '집단적인 열기에 무섬증을 느꼈다'고 토로했던 박노자의 말을 처음 듣고서 나는 상당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한국학을 공부했고, 사회를 보는 통찰력이 뛰어나다지만, 자발적인 참여와 질서정연한 축제를 즐기는 스스로를 보면서 시민의식이 높아졌다고 느꼈던 참이었는데, 나치대회를 연상시켰다는 그의 말에 기분이 상했었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곧 그의 지적이 상당히 날카로운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축구 열기 속에 숨은 파시즘적인 요소들, 즉 ’집단과 자신의 동일시'와 잠재적 욕망과 울분의 집단적 표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전국민적 열기에 반대되는 의견이나 개인이나 집단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역시 박노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그 때에도, 그냥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일단 대중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지난 겨울 읽었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까 한다.사실 책을 처음 샀을 때에는 박노자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어째 책의 제목부터 도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 일단 높임말일 듯 하면서도 역으로 낮춰보는 것 같은 ‘당신’이란 용어가 거슬렸고,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란 마치 ‘니네 만의 대한민국, 잘 포장 되서 그럴듯하게 내놓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너희만의 대한민국이다'라는 늬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은 물론이고 내용 마저 매우 도발적이다. 우리나라의 평범한 지식인이 쓴 책이라면 또 그런가보다 했을텐데, 이 책의 저자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라는 사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박노자 교수의 원래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로, 현재 노르웨이의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한국 사학자이다. 지난 5년간 한국에 살면서 학생의 신분으로 수업을 듣다가, 대학 강단에서 교편을 잡는 교수를 지낸 적이 있고, 한국 사회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심도있는 비판과 아울러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그가 출판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그가 한국사회에 대해 느낀 점들을 비교적 심도있는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배타적 의미의)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으며, 그 시각은 어떻게 보면 냉소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은 러시아인 박노자가 국외자의 신분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것으로 또는 한국인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각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저자의 정체성 때문일까, 이 책은 한국사회의 미시적 기초에 대한 섬세한 비판에서부터 국제적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한국인의 이중성에 대한 거시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며,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생체기의 고름을 짜내는 고통과 시원함이 동시에 스며있다. 따라서 그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초상, 「서로 잡아먹기를 탐하는 사회. 전근대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책 표지의 모토는 그의 사상적 세계를 간단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과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해악을 입히는 비도덕적인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전근대의 유물인 '비민주적 사회형태'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 권리를 업신여기는 현 한국사회의 부당성에 비판을 제기한다.한국사회의 초상과, 그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논의와,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인종주의에 대해 잠시도 긴장을 풀 틈 없이 긴박하게 짜임새있는 논리로 풀어나가고 있는 그의 책은, 과연 귀화한 외국인이 썼나 싶을 정도로 대한민국 한가운데 서서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 낯선 이방인의 대책 없는 비판이 아닌, 한국인보다도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더 잘 파악하고 짚어내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상당부분 동의하기도 했고, 조금은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이 책은 사회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우리가 잘 알고있고 민감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끌어나간다.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우상 숭배에서부터, 영어공용화론의 망상, 인간성을 파괴하는 군대, 양심적 병역 거부자, 대학 사회의 문제점, 강요된 민족주의, 혈통주의를 부정한 재외동포법, 개항과 인종주의의 수용등에 대한 내용들이 바로 그것이며 이를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현실감을 부여하고, 귀화한 외국인 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묘사를 통해 새로운 의식과 시각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박노자가 한국의 종교를 정치와 빗대어 종교패거리주의라고 비판하고, 상아탑에 드리워진 망령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대학사회에 내재하는 교수와 학생의 기묘한 공생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 대단한 모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 자신이 귀화 한국인이지만 국외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교수라는 신분에서 이런 글을 자유롭게 쓸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박노자가 한국사회가 강한 민족주의와 혈통주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조선족 등을 포함한 재외동포에 대해 차별적이라는 것,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해 한국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교묘한 인종주의적 편견 등을 비판할 때는 한국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국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시각에 대해 비판적인 식자들은 박노자가 우리사회가 겪어온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국외자의 잣대를 들이댄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진행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지위의 변화Ⅰ. 들어가며일반적으로 프랑스혁명은 구체제의 모순에 대항하는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이해된다. 정치적으로는 전제적 절대왕정을 타도하여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으로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을 일구는 기반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앙시앵레짐의 신분제적이고 법적인 불평등과 특권을 타파, 귀족계급에 대해 시민계급이 승리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이 가능했고, 사상적으로는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전시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를 뜻하였기에 프랑스 혁명의 의의는 혁명이념 속에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이러한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평등한 사회건설을 위한 민중들의 노력이 돋보이는데, 여기서 18세기라는 역사적 상황과 연관시켜볼 때 여성의 지위와 그 역할이 프랑스 혁명과 어떠한 상호연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0월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의 행렬과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여성참여는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한 여성의 역할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한가지 예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업적은 봉건제적 잔재를 청산하고 절대왕정과 귀족층을 소멸시키는 한편, 영주제와 봉건적 특권신분을 타도함으로써 자유, 평등, 우애의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근대 시만사회 성립의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은 당시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혁명의 진행과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지금부터는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고, 구체제에서 설명되어진 여성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또한 프랑스 혁명에 기여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고찰함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과 여성의 지위, 역할 변화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해보자.Ⅱ. 전통적인 구체제하의 여성관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차별의 뿌리는 깊다.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쇼펜하우어 등 수많은 학자들이 여성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설명하려 애썼고, 동양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간과되어왔다. 하지만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구체제 하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은 신체적, 지능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백과전서파는 여성의 열등한 상태를 설명하였고, 나름의 방식과 용어를 통해 여성의 열등화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여성은 남성의 계집’이며 ‘출산을 위해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18세기 말의 시대를 관통하던 이런 생각은 여성지위를 평가절하시키려는 남성들의 편견의 반영으로 성적 차별주의가 횡행하였다. 실제로 루소는 이런 성적 차별주의의 대표자로서 여성이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남성의 권위에 복종해야하고, 볼테르는 여성이 남성보다 연약하다고 단언하고 가사에 전념하게끔 만들었다.Ⅲ. 프랑스혁명의 진행과 정치적 역할의 변화1. 10월혁명의 개입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여성들은 구체제하에서 신체적, 지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여성을 비하하는 한편 남성위주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편견의 반영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의 담론은 주로 상류층 여성에 집중되었고 민중계층 여성의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외면하는 등 여성의 일상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혁명 초부터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바라고 있었다. 동등한 지위를 주장했던 몇몇 사람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론을 관철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혁명의 지도자들은 국가 일이나 정치문제에 개입하려는 여성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여성의 역할은 가정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여성의 현실참여에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이러한 편견과 제약의 상황에서 여성들은 1789년 10월 초에 베르사유로의 행진을 통해 대혁명에 개입하였다. 이것은 바로 여성들이 정치무대에 참여하게 된 사건이며, 일종의 혁명적 여성영웅의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여성들은 자녀양육의 의무로까지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의 정치적 의식이 보다 발전되고 적극적이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발발하게 된 이 혁명적 동원은 국민방위대의 합류에 영향을 미쳤고, 혁명의 주요 동기가 생존문제(빵)였지만, 그 요구사항은 정치적 성격을 함께 지녔다. ‘빵의 행진’ 또는 ‘여성들의 행진’이라고 불려진 이 사건은 매우 자발적이며 특히 여성과 관련된 혁명적 사건의 시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베르사유로의 행진은 대혁명 초의 몇 달동안 이루어진 여성들의 발전된 행동양식의 결과이며 정치적 자각을 위한 첫 걸음으로 볼 수 있다.2. 여성협회의 결성1971년 9월에 발표된 구즈의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은 1789년 8월 26일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 1791년의 새로운 헌법이 남성만의 권리를 언급한데 대항하는 여성권리에 관한 생생한 역사적 자료이다. 구즈는 여성의 권리가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천명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발언할 권리를 지녀야한다고 요구하였다. 이에 여성들은 1791년 7월 17일의 집단청원서에 서명하였으며 샹 드 마르스 학살사건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여성들은 모임과 클럽의 회의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길거리나 클럽의 입구 등에서 대혁명이 표방하는 동기를 옹호하였다. 대부분의 협회들에서 여성들은 회의에 참관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일부 몇몇 협회에서는 완전한 회원으로 받아들여져서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성협회들은 주요도시에서 수가 증가되었는데, 그 수는 50여개를 넘어섰으며, 교육활동이나 자선행위 등 전통적 역할은 물론 선서사제의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몇몇은 정치적, 급진적 활동에 개입하였다.3. 무장투쟁운동 및 민중운동한편 애국파 여성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려는 의지와 시위 및 무장행렬을 벌이기도 하였다. 1792년 3월 6일 여성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기 위한 315명의 그것은 바로 무기를 들고 조국을 수호하려는 시민적 의무와 여성 고유의 권리와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1792년 8월 10일에는 조국이 위기에 처해다는 지상명령에 따라 여성들이 가담하여 튀르리 궁을 공격하였고, 1973년에는 여성들이 소외당한데 대한 자각이 발전되어 혁명운동 내에서 여성들의 정치적 지위 평등화를 위한 다방면의 행동을 고무시켰다 이때의 권리요구 운동과 관련된 여성들은 노동자, 소상인, 하녀 등 주로 민중계층의 여성이었으며, 매점자 및 공화국의 적들에 맞서 싸우려는 강력한 의지를 수반하였다. 여성들의 정치적 실천에서의 독자성은 1793년 5월 10일 ‘혁명적 공화주의 여성시민 협회’의 출범과 함께 명백해지는데, 자신의 가정을 공화국의 적들로부터 지키려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이 협회는 혁명운동의 주요 세력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코르들리에 클러과 더불어 지롱드파의 몰락과 공포정치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여성들은 프랑스혁명의 민중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바, 그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특히 1789년 10월의 날과 1795년 봄의 봉기들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여성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혁명의 정치적 영역에까지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성투사들이 1791년 7월 17일, 1792년 6월 20일과 8월 10일. 1793년 5월 31일 - 6월 2일 그리고 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 등 정치적 부류의 중대한 사건들에 참여한 사실은 혁명의 전개에 따라 여성의 정치적 의식이 보다 발전되고 적극적이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혁명적 사건이나 봉기의 날들에서 여성의 선동적 역할이었다. 여성들은 봉기에 가담하지 않는 남성을 겁쟁이로 취급하여 비웃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조롱하고 창피를 주었다.4. 시민으로서의 여성지위획득위의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 혁명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고 행사할 수 있는, 즉 완전한 의미에서의 시민적 인격을 부여했다. 1789년 제헌의회는 인권 선의 법적 권리와 관련해서 가장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던 법은 1792년 9월 법이었다. 시민자격과 부부의 이혼 문제를 주요 사안으로 다룬 이 법은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해 양자의 동등한 권리를 엄밀하게 규정했고, 각종 민사상의 소송 절차도 남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1792년 법에 의하면 결혼 당사자간의 불화 또는 부부 쌍방의 동의만 있으면 이혼이 가능했다. 그러면 이러한 법적 규정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우선 여성들이 진정한 시민 자격을 획득함으로써 적어도 시민의 수준에는 이르렀던 셈이다. 하지만 시민적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이것이 바로 공민적 자유, 즉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성들 입장에서 볼 때 시민적 자유는 장차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 조건, 따라서 시민적 자유룰 획득한 이상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여성들은 시민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되자 정치기구 내에서도 일정한 위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기에 여성 투사들이 끊임없이 공적인 토론장에 참여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의원들마저도 시간에 지나면서 반동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Ⅳ. 한계점반혁명주의자들은 혁명으로 인한 여성의 해방에 대해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여성에게 여태까지 인정되지 않았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곧 약자 전체의 지위를 끌어올려 주는 것과 마친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사회질서가 뒤집혀질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명한 사실은 여성차별주의에 균열을 낸 사건이 바로 프랑스혁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헌법의 기초자인 콩도르세는 1793년 흑백평등만이 아니라 남녀평등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점은 끈질긴 가부장제 전통 때문에 프랑스혁명도 여성해방의 진척에 그리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프랑스혁명은 결과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나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