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대곡리 울주 반구대 암각화세계 곳곳에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굴 벽화인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비롯하여 원시 예술 형태의 많은 자료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많은 암각화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 규모가 큰 것은 바로 울산 대곡리의 울주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국보 285호-1996년 지정)]이다. 반구대란 이름은 절벽이 있는 산등성의 암반모습이 마치 앉아있는 거북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구대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져 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이다. 대체로 상고대의 벽화나 암각화들은 감상적 기능보다는 생활과 연결된 주술적인 기능을 지닌 경우가 많다. 반구대의 암각화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 뭍에 사는 동물과 고래 따위의 물에 사는 물고기들이 새겨져 있다. 이들 그림은 서로 겹쳐지고 반복되며 서로간의 비례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감상용이라기보다는 의식이나 기원, 주술적, 종교적 목적으로 새겨졌다고 볼 수 있다.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약 3미터 길이 약 10미터 정도의 수직 암면으로 비교적 새기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바위 또한 매우 단단하여 쪼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실제로 우리나라 암각화 유적으로서는 매우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암각화들은 그리 높지 않은 수직의 바위 면을 골라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대체로 사람의 팔이 닿는 곳을 골랐다고 보여 지며 새기는데 유리한 조건을 생각하여 바위 면을 골랐다고 보여 진다. 또한 그림이 새겨진 바위 면은 대부분 남향을 하고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을 받는다. 그림이 있는 바위면의 바로 밑에는 약간의 편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이는 이 그림을 에 그려진 그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구체적인 물체의 모습으로 누구든지 보면 바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주로 사슴이나 고래, 호랑이 등의 동물과 사람 그림이다. 이들 그림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은 성기를 크게 과장해 노출시키고 있다거나, 배를 불룩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시베리아나 몽골 또는 북부중국의 암각화에는 대부분의 동물과 사람이 성기를 길게 앞으로 내밀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사람의 성기를 길게, 동물의 배를 불룩하게 묘사한 것이 많다. 이 불룩한 배는 새끼를 밴 모습이며 성기를 크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역시 자손을 많이 낳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동물 그림 중 고래그림이 많이 있는데 돌고래, 향유고래, 솔피, 큰고래, 혹등고래, 흰 긴수염 고래 등 6종이 있다. 이것은 그 옛날 이곳 가까이가 모두 바다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현재의 태화강 하구에서 10km위쪽에 해당하는 학성 근처까지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도 암각화에서 20km떨어진 울산만에는 고래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동안 한반도 정착 집단들이 농경과 기마민족의 특성을 지녔다는 설과 함께 배와 고래작살 등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로기술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다른 하나는 추상적인 도형들이다. 이것은 때로는 원이나 동심원 또는 삼각형이나 물결무늬 등 기하학적인 특징을 가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체적인 물체의 모습을 극도로 생략하여 묘사한 듯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모습의 그림들은 상징성이 강하며 특정한 집단만이 알아볼 수 있는 부호적 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그림들은 구체적 물체를 묘사하는 방법보다 훨씬 뒷시대에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의 울산시 천전동 암각화 유적에는 이 두 가지 형태의 그림들이 서로 중복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먼저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도형들도 앞의 동물이나 사람그림에의 번식을 기원하기 위해 동물의 새끼 밴 모습이나 교미 장면, 또는 성기를 과장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또 사냥 시 야생동물로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했다. 이 때문에 사냥의 대상이기도 한 동물에게 자신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 이런 동물들은 그대로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물은 사냥의 대상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그래서 암각화 유적은 바로 신앙의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였다는 추측이 제기된다. 이를 증명하듯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면의 앞에는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이 확보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그림을 수평 바위 면에 새긴 경북 안동 수곡리 암각화 유적은 물을 저장하기 위한 바위구덩이가 깊이 파여 있고 높은 장대를 세우기 위한 바위구멍들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 둘레에 있어서 당시 의식이 어떻게 치러졌는지를 추측하게 해준다.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그림들을 바위에 새겼는가? 그것은 장식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종교적 목적이 있었을까? 물론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유럽의 동굴벽화들은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깊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이런 깊은 굴은 물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즉 이 그림이 그려진 동굴 속은 특별한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곳이며 그림들은 그러한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그려졌던 것이다.우리나라의 암각화가 있는 곳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강가의 바위절벽이거나 또는 바로 강에 붙어있지 않더라도 강과 인접된 곳이다. 또 그림이 새겨진 절벽의 바로 밑에는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암각화가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장소에 제사의 대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안동의 수곡리 암각화 유적은 강과 인접된 남향한 산봉 편평한 바위 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 바위 면을 돌아가며 긴 장대를 꽂았던 구 이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의 목적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자신을 보존하는 것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종족을 번성케 하려면 성행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원은 대부분 종교의식을 통해서 신에게 전달되었는데 암각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된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여러 가지 기본적인 작업을 통해 얻어진 암각화의 정보는 고고학이나 인류학은 물론 역사학, 미술사학, 미학,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이뤄진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암각화에 새겨진 다양한 내용은 이를 새긴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심지어는 그들의 정신세계까지도 추적할 수 있다.또 동일한 성격을 가진 암각화의 분포를 조사하면 암각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해왔는가 또는 그 문화가 어디로부터 들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바로 민족문화의 형성문제나 민족의 이동문제 등을 푸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또한 하나의 미술작품으로서 미술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으며 특정 민족 집단의 미의식 세계를 추적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글자기록이 없는 시대의 문화 복원은 현재 남아 있는 극소수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서 실제와는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 일반인에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암각화는 당시의 생활이나 문화현상을 그림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복원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암각화 연구는 한국 암각화가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연해주에 이르는 암각화 분포권에 속하고, 한국 암각화에서 나타나는 그림이 시베리아나 몽골 그리고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는 것과 공통점이 있음을 보여준다.최근 전호태교수는 동물그림의 대표적 유적인 대곡리 암각화에 나타나는 맹수 방어용 또는 다축용 나무울타리나 사람의 성기표현 등은 청동기시대의 정착사냥하는 장면들이 많이 담겨져 있지만 그림 중 청동기 유물과 관련되거나 생활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현재 이 대부분은 청동기시대의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수렵이나 어로가 주로 그려졌다고 바로 신석기 수렵미술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암각화에 새겨진 배가 신석기 문화 단계에의 뗏목이나 통나무배가 아닌 승선 인원 20여명의 표경선이라는 점과, 포경에 사용된 작살과 작살을 쏘는 노의 그림이 금속문화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점에서 금속문화 단계에 진입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암각화들은 어느 한 곳에서 시작하여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암각화가 각각 현재 있는 장소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암각화는 암각화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암각화는 암각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의 한 요소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암각화가 이 땅에 어떻게 등장했는가? 또는 어디에서 들어왔는가? 저절로 생겨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암각화가 만들어진 시기에 있던 문화가 이 땅에 어디에서 어떻게 들어왔는가 하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다.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은 대체로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암각화들은 청동기문화와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어디에서 들어온 것인가? 대체로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을 들어보면 바이칼 호수 근처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북부를 거쳐 남하하여 한반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암각화도 이러한 청동기문화의 전파된 경로를 따라서 들어온 것은 아닐까?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암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베리아나 몽골 또는 중국 북부의 암각화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베리아 지역과 몽골 북부중국의 암각화들은 대체로 같은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큰 줄기를 보면 시베리아 서쪽의 알타이공화국과 몽골의 접경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길게 내
단군신화의 역사적 내용과 신화적 맥락우리가 가진 단군(檀君)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나오는 신화(神話)인데, 이는 먼저 우리가 신화를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들부터 안겨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신화적 신념의 구조와 역사적 기능에 관한 것들, 곧 종교학(宗敎學)의 핵심 문제들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단군신화를 ‘신화자체’로 이해하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화가 현재성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역사적으로 어떤 기능(機能)을 갖느냐 하는 것은 그 신화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메시지(message)가 주는 상징적 의미에 있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적(科學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인 인식(認識)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적(告白的)이고 상징적(象徵的)인 논리와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 속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더듬어 보고, 그 역사적 정황에 맞게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신화의 사실관계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신화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야기(narrative)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오랜 기간 동안 구비전승으로 내려오다가 후에 문자(文字 : text)로 적혀 기록(記錄)으로 남게 된 것이다. 신화는 현존(現存)하는 사실이나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신화적 논리로 설명하는 성명체계이다. 시대의 요청은 영웅(英雄)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상징되고, 또 영웅을 숭배(崇拜)하는 대중(大衆)들의 마음속에, 시대정신(ethos)이 살아 숨쉬는 생명력(生命力)을 갖게 된다. 이것이 역사 안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ideology)와 세계관이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고, 한 민족의 역사가 생명력을 지니고 진행되는 모습이다. 신화 없는 시대는 생명을 잃었으며, 신화 없는 민족은 존재할 수 없다. 신화는 역사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동성(逆動性 : dynamic power)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단군신화와 같이 민족사(民族史)의 시원(始原)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신화의 경우에는 그 신화적 표현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상징적 논리에 담아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신화의 상징논리의 원형(原形)이라 부른다. 그리고 상징적 논리와 상징적 표현은 상징의 준거(reference) 또는 대상이 실재(實在)하기 때문에 기능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상징은 언제나 실재(reality)를 표상한다. 예컨대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국가 시원이라는 과거의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상(表象)하는 것이다.단군신화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한반도(韓半島)와 북방(北方) 지역에 일어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동을 그 상징적 이야기 안에 담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한문(漢文)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에 스키타이(Scythia)와 북방문화(北方文化)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었다. 한반도에 구석기(舊石器)와 신석기(新石器)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강한 무기, 즉 청동(靑銅)으로 만든 청동 검과 화살촉 등으로 활발한 정복(征服) 활동이 시작되었다. 정복의 주체 부족(部族)은 그 지역의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위대한 영웅을 탄생 시킨다. 영웅은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왕(王)에 등극하고 제왕(帝王)은 하늘(天)의 뜻을 대신한다. 정복의 주체자로서의 영웅의 왕권(王權)을 신성화(神聖化)하고 그럼으로써 정복의 정당성(正當性)과 피정복민의 합리화(合理化)를 이끌어 내게 된다. 이처럼 단군 신화 역시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던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부족들 간의 정복(征服), 융합(融合), 통합(統合)의 과정에 영웅적 제왕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상징화 하고 있는 것이다.‘곰’과 ‘호랑이’의 토템(totem)으로 상징되는 부족들이 선주(先住)하고 있던 천하계인 한반도, 또는 요동지방에 환웅(桓雄)이 이끄는 정비된 문화와 강력한 세력은 지닌 ‘천계무리’가 들어왔다. 이 천계무리는 풍백, 우사, 운사와 같이 천문기상(天文氣象)을 다스리는 도사들을 갖고 있을 만큼 문화가 발달하고 힘이 있어서 삼백예순 가지 즉 인간 세상의 만사(萬事)를 통괄할 수 있을 만큼의 지혜(智慧)를 갖고 있었다. 선주부족인 곰무리와 범무리들은 이 강력한 천계무리에 융합하여 통합되기를 원하였으나, 범무리는 이에 실패하였다. 천계무리와 곰무리와의 순화과정에서 이른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단군왕검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였고, 단군 조선 왕조가 출발되었다. 이 왕족의 주 세력은 큰 힘과 신통력을 갖고 있는 천계족, 곧 유입민족(流入民族)이 차지하고 있었다.신화적 모티브들은 이상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단군의 원형신화는 고대 한국인들이 동방(東方)으로 이주하면서 선주민들과의 마찰을 경험하고, 이 마찰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단군 조선을 창건한 역사적 경험을 신화적 상징논리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한국의 국조신화로서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천손(天孫)이라는 민족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으면, 천계무리와 곰무리 등의 부족간의 성공적 융합으로 한반도와 북방 대륙을 잇는 큰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고려 종교문화의 특성나말여초(羅襪麗初) 시기의 급격한 사회 전환기(轉換期)로서 골품제(骨品制)라고 하는 고대적인 신분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호족(豪族)들의 등장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이행하는 전환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륵신앙, 미타신앙, 선종, 풍수도참 신앙 등의 사상과 최치원 등 도당 유학생들의 새로운 이념으로써의 유교사상 도입으로 불교는 민중불교의 성격으로 그리고 유교는 지도층(指導層)의 이념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종교는 나말여초의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유교, 불교, 도교 등의 동양 고전종교가 정립한 가운데 풍수도참신앙과 토착신앙이 저변을 형성하게 된다.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와 성종 때의 는 고려전기 종교와 사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인데 먼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는 태조 왕건(王建)의 국가 경영정책을 천명함과 동시에 불교와 풍수도참 신앙 및 토착신앙 등을 아우르는 종교정책을 나타내고 있다. 주요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고려문화의 주체성(主體性)이 나타나고 있다. 제 4조에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주체적(主體的) 자세로 선별(選別)해서 수용할 것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제 1, 6조에서 불교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적절한 균형과 경계를 하라는 내용이 주목된다. 셋째로 제 2, 5, 8조에서는 풍수 도참사상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사회의 토착신앙의 저변을 이루는 도참신앙의 틀 속에서 바라보려는 사유체계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제 4, 6조는 토착신앙에 관련되는 내용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마지막으로는 제 3, 7, 9, 10조에 유교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국정운영방향을 제시하는 등 유교적 사유체계를 보여준다.종합해 보면 고려 건국초기의 종교는 전래의 토착신앙, 풍수도참 신앙, 불교, 유교 및 도교 등 다양한 전통이 중층적으로 수용되어 각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게 되면 최승로의 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 고려 불교계의 현실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이로 인하여 국력(國力)의 낭비(浪費)와 함께 백성들로부터 원망(怨望)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유교로의 일대전환(一大轉換)을 시도하게 된다.고려중기로 오면서 종교사상계의 변동(變動)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우선 몽골의 간섭으로 인한 사회변동은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키게 된다. 무신정권의 성립과 함께 고려조의 암울한 시기가 시작되면서 13세기 중엽 신앙결사 운동 등의 혁신운동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흐름은 좌절되고 이에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라는 계층의 등장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적 이념으로의 무장과 유교의 국교화라는 현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주력 종교 세력의 교체와 함께 한국 종교사에서 큰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고려의 유교는 정치, 교육제도를 중심으로 국가제도 정비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갔다. 과거제도(科擧制度)의 도입으로 인하여 점차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교의 종교적 위상은 각종 군사, 조세제도의 정비와 함께 문묘(文廟)의 배향으로 이어지고 이는 한국 유학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고려 후기로 접어들면서 몽골의 지배와 더불어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지방 호족들은 이에 성리학으로부터 새 시대의 변혁에너지를 발견하게 되고 신진 사대부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 불교의 위상은 건국 초기 태조의 불교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호국신앙(護國信仰)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선종과 교종의 세력변화와 후기로 갈수록 부패(腐敗)하게 되면서 신앙결사운동의 실패와 함께 성리학을 정착시켜준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고려 유학의 후기, 즉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불리 우는 성리학(性理學)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격(攻擊)하기 시작한다.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당(唐)대에 꽃을 피우면서, 중국에는 없던 불교의 세련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논리에 중국 지성계가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송(宋)대 유학자들이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정신(精神)을 그들이 익힌 새로운 논리로 재정비한 것이 성리학이다. 따라서 성리학은 종전의 훈고학(訓?學)이 할 수 없었던, 불교에 대한 비판적 공격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 유학의 경우도 송대의 성리학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이색을 비롯한 정몽주, 정도전 등의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논리로 불교를 비판하였고, 후에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과 같은 체계적인 불교비판서와 조선조 사회의 기틀을 이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저술한다.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은 유학 중에서도 새로운 학파로서 소수의 위치에 있었고, 그리하여 유학으로서 고려를 개혁(改革)하려는 움직임은 그 힘이 미비(未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 말기의 성리학은 다음 왕조로 전환하는 과도기적(過渡期的) 특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의 잠재된 힘은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역사에 유래 없는 새로운 고전왕조(古典王祖 : Classic Kingdom)를 탄생시키는 저력(底力)과, 구체적 사회계획(社會計劃 : Social Plan)을 준비하였다.
정진홍의 《종교문화의 논리》- 우리는 왜 종교에 대해 묻는가 -처음 이 책을 읽고 든 느낌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예전에 정진홍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없었다면, 이 책을 짧은 시간에 소화한다는 것은 내게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책 제목 만큼이나 종교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저자 나름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인문학적 언어들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다소 현학적으로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여기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발제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고 충분히 다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내용을 발제한다는 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으며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함께 고민해보고, 또 내 스스로 질문을 던져서 나름의 답을 찾고 싶다.정진홍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 2002년 1학기. [종교학 개론] 첫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여기 [종교학 개론] 수업을 가르치러 온 저나, 수업을 듣겠다고 온 여러분들은 다 조금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믿는 것이지,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면 말입니다.” 흔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교는 믿는 것이지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를 묻는 일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종교를 묻는 상황을 묘사할 수 있다. 누군가가 어느 종교인에게 ‘왜 그 종교를 믿느냐?’라고 묻는 다면 ‘믿으면 그만이지 뭐 알려고 그래.’ 정도의 답변을 한다.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자연스럽지 못한 이상한 반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 묻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위적인 것이다. 종교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로서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현상에 대한 물음을 묻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기보다 아예 반드시 물어야 하는 규범적인 것일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동물적’이지 못하다. 이 말은 인간이 어떤 사물, 어떤 생각을 접함에 있어 ‘맹목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와 ‘사물’과의 거리 만들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사소하지만 무언가 현상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예컨대 매일 같이 하는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다. 왜 우리가 점심을 먹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자세, 왜 제사를 드리고, 수업을 듣고, 학교에 다니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자세.. 바로 이런 것이 일상과의 거리 만들기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물과 생각과의 ‘거리 만들기’를 통해 인식지평을 확장하고 ‘객관화’에 이를 수 있다.저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종교’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종교학도이든 일반 대중이든 상관없이 모두 ‘종교관’이라 표현해도 될만한 나름의 생각들이 있다. Bacon의 지적처럼 우리는 이미 하얀 백지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전이해’는 우리의 학습과 학문함을 방해할 수도 있다. 우리의 종교에 대핸 전이해가 인식의 지평에서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자세를 지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물을 수 없다. 다만 조금 아는 부분을 물을 뿐이다. 하지만 종교를 학문으로 다룸에 있어 방법론적으로라도 개인의 종교에 대한 전이해를 가로()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물과의 거리두기와도 같은 맥락이다.종교는 뚜렷한 문화현상이다. 문화라는 것은 우리 삶의 총체적 서술이 가능하도록 사실과 사건을 통합하는 의식의 움직임이며, 그렇게 통합된 사실을 지칭하는 언어이다. ‘문화’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수용하려는 방법론적 전제를 개념화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문화’는 삶의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조망하려는 의도적인 태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구체적인 내용들, 곧 우리가 겪는 개개 일상계, 존재의미 등을 소통 가능한 것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문화로 울 처질 때 비로소 그것에 대한 인식을 펼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다시 종교를 문화로서 기술하는 자리로부터 논의를 펼 수 있다고 한다. 단순히 종교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문화’ 또는 ‘문화로서의 종교’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화로서의 종교를 논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이, 또는 구체적인 개개 종교가, 어떤 자신의 논리를 지니고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디에 마련하고 있고, 어떤 몫을 지니고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요한 산사에 앉아 불경을 읽고, 면벽수행을 하는 것도 불교의 모습이지만, 몽둥이질 하는 승가들의 권력다툼도, ‘불심으로 대동단결’이라 외치며 대선에 입후보하는 승려의 모습도 분명 불교라는 한 종교의 문화 속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고 문화로서의 종교현상들을 보아야 한다. 종교는 문화를 초월한다 하여도 좋고, 문화의 핵이라 하여도 좋다. 자명한 것은 종교도 문화현상이라는 것이다.종교에 대한 문화적 담론의 가능성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담론이 함축하고 있는 ‘개념적 실재’와 ‘경험적 실재’간의 괴리와 갈등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사물의 묘사를 위해 불가피하게 이를 추상화하게 된다. 그렇게 추상화된 개념을 언어이지 사실은 아니다. 사실과 직면하여 경험하지 않은 채 어떤 사실을 진술한 언어, 곧 개념화된 언어는 그저 ‘언어적 사실’과의 만남이지 그 사실과의 ‘직접적인 만남(경험)’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제로 겪는 ‘경험적 실재’가 그것을 담아 이야기하는 ‘개념적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꼭 염두 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경험 그 자체와 경험의 표현 사이에는 괴리가 생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야,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도 언어 속에 들어가야 실재가 된한 듯 하나, 학문하는 자세로 볼 때, 언어라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삶을 전부 묘사할 수는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다.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대상이 없는 발언이 있다. 이는 자기 독백적인 언어로서 ‘고백’이라 표현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독백은 바로 자기 내면과의 대화이다. 예컨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언어를 통해 고백 했을 때, 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발언을 통해 자신에게 새로운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인들의 발언을 생각해 보자. “불교에 귀의했더니 고통이 없어졌다”,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변했다”, “굿을 했더니 조상님들이 노여움을 푸셨다” 이러한 일련의 종교적인 고백들은 인식의 지평에서 모두 진실 되지 않은 거짓말이다. 자기 스스로를 ‘순수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속 모습은 많은 인식의 오류 속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니? - 믿으면 알아. - 어떻게 알아? - 성격에 나와 있어.”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이게 뭐야? - 책상이야. - 왜 책상이야? - 책상이니까 책상이야.”라는 논리와 별 다름 없는 자기 순환적 오류이다. 동어반복을 논리로 하는 특정 종교들의 모습은 인식의 지평에서는 여타 삶과 연계 된 것이 아닌 것으로 구획하는 일들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저자의 경험 이야기를 통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교회 수련회에 가서 한참 통성기도를 하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시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보니 통성기도 하는 모습이 꼭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나도 방금 전까지 거기 함께 있었는데...” 고백의 언어는 인식의 언어와 같지 않다. 종교의 언어는 대체로 고백의 언어이다. 우리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종교현상들에 대해 고백의 언어로 진술된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할 수는 있지만, 신이 있다고 고백하고 믿는 사람에게는다. 우리는 여기서 고백의 불가피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고백의 언어이다.우리 종교문화의 특성은 여러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 지적할 수 있다. ‘다종교현상’이라든지 ‘종교다원현사’이라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종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간의 대화’이다. 종교 간의 대화란 다종교현상 속에서 각기 종교가 서로 어떻게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한 각 종교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늘 우리의 종교문화에서 ‘종교 간의 공존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을 ‘종교 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근원적인 자리’나 ‘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를 의도하는 종교들이 이러한 다종교현상을 이해하는 전제는 그것을 모든 종교가 뒤얽혀 이루어진 문화라고 여기기보다 여러 종교들이 지극히 단순한 일 대 일의 대칭병렬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 종교가 만남의 상황에서 가지는 지분이 균등하게 1이라고 할 수 없기에 이는 주의 할 필요가 있다. 각 종교마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의 장단이 다르고, 그 역사의 과정 속에서 축적한 경험의 에토스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 문화 안에서 개개 종교들이 현실적으로 가지는 ‘힘’, ‘영향력’이 다르다. 이렇게 볼 때 저자의 통찰은 매우 적절하다. 우리 사회를 볼 때, 분명 그리스도교는 거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점에 위치한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문화와의 거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변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수평적 구조로 볼 때는 오히려 불교 같은 전통적 종교가 중심에 와있다. 어느 문화권이든지 이렇게 중심종교 그리고 주변종교가 있을 수 있고, 수직적으로 볼 때 정점과 저변을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어느 사회에 중심과 정점다.
남북한 군사 연구 및 통합에 관한여0. 들어가며I. 북한의 군사에 대한 연구1. 북한군의 창군 이후 주요 변천사1945. 10. 소련 진주군(치스챠코프 대장), 보안대 조직1946. 2. 소련 스탈린, 김일성에게 무장력 건설 각서 전달, 평양 학원, 보안 간부학교 건설1947. 5. 보안대 정규군대로 개편, 인민집단군 총사령부 설치1948. 2. 8. 조선인민군 창설1948. 9. 9.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민보성 설치1950. 6. 25. 남침,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등 16개 부대 20만명 규모1959. 1. 14. 노동적위대 창설1969. 특수 8군단, 경보병 여단, 프로그 대대 신편1970. 평방사, 유도탄사 창설1972. 12. 27.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1982. 2. 기계화군단 창설1990 ~ 1992. 9지구사를 9군단으로 개편1992. 1. 스커드(SCUD) 연대 창설1993. 스커드(SCUD) 연단으로 증편1993 ~ 1994. 1, 2, 3지구사를 10, 11, 12군단으로 개편1994. 9군단 120전차연대 여단으로 증편1994. 공군 저격여단 창설1997. 국가안전보위부 경비총국 인민무력부로 예속 전환1998. 9. 헌법 개정에 따라 인민무력부를 인민무력성으로 개성북한군은 군의 기본적 특성은 변경시키지 않고, 군의 확장 및 군장비의 현대화 계획을 꾸준히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주적인 능력이 뛰어난 포병, 강력한 기갑 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 위주의 군대로 존재하고 있다. 소련군 교리 또는 중공군 교리를 무조건 복제했던 시기가 지난 후, 북한은 주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교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 교리를 이행하기 위한 부대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또한, 한국전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공군과 해군에 약점이 있다고 보고, 공군과 해군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기갑 및 기계화 부대들을 융통성 있게 운영할 수 있게 전과를 확대했으며, 제 8특수군단과 같은 특수작전부대들을 발전시켰다. 잠시 표를 통해 북한군의최소화하면서 전투인력을 최대한으로 늘려 운용하는 등 조직을 전시체제 상태로 운용하고 있다.3. 군 징병제도사병은 통상 고등중학교 졸업생을 주 대상으로 하며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시, 공장 기업소 취업자는 근무한지 3년이 경과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징집하고 있다. 군관은 현역사병 중에서 선발하는데 일반 장교는 강건종합군관 학교 김정숙 해군대학 김책 공군대학 등에서 군 지휘관으로 양성하며 정치장교는 당에서 선발하여 김일성 정치대학에서 교육 후 임명토록 되어 있다. 1995년까지는 고등중학교 졸업시기인 8~9월에 75~80%, 3~4월에 20~25%를 징집하였으나 1996년부터 고등중학교 졸업시기를 3월로 변경하면서 3~4월에 주로 징집하고 있으며 병력충원 필요시에는 부정기적으로 수시로 징집하고 있다. 징병절차는 시 군 군사동원부에서 연간 초모계획에 의해 대상인원을 선발하여 기초 신체검사를 실시하면 도 군사동원부가 시 군 군사동원부의 검사내용을 기초로 정밀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기초 체력검사를 하여 각 군별로 필요인원을 할당하고 있다.복무연한은 1993년 4월부터 김정일 지시에 의해 만 10년을 복무해야 제대할 수 있는 「10년복무연한제」를 실시하였으나 1996년10월 군복무 조례를 변경하여 사병들의 복무연령을 남자는 30세, 여자는 26세, 여자 군관은 28세로 연장하는 한편 중대장급 이하 군관들은 30세까지 영내에 거주토록 하고 결혼도 금지시켰다. 한편 최근 자유 배금주의사조 만연 등으로 청소년층간에 중노동 직장 희망자가 감소하자 96년부터 군사복무 대상을 6-7년간 탄광에서 근무토록 조치하고 이들의 탄광복무 기간을 군사복무로 인정해주는 「탄광 복무제」를 운영하고 있다.4. 군 병력 및 장비북한은 연합군의 증원 이전에 한반도를 석권한다는 단기결전의 전략아래 이미 80년대에 군사력의 전진배치와 기계화군단의 편성, 그리고 대규모 특수전 부대의 보유 등을 통해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또한 전군사력의 65%이상을 평양-원산선 이남에 전진배치 시켜놓고 있어 부대의 조정원기 840여대를 포함하여 총 1,71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약 300대의 AN-2기는 비행속도 시속 160km로 레이더에 의한 포착을 피하면서 저공비행을 할 수 있어 우리지역의 깊숙한 배후까지 특수전 부대를 공수하는데 적합한 항공기이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www.nis.go.kr), 「군 병력 및 장비」(2001. 5. 9.)구 분한 국북 한병 력총병력지상군해 군공 군69만명56만명6만 7천명6만 3천명117만명100만명6만명11만명부 대군 단사여단116820175장 비육 군전 차장갑포야 포헬 기2,350대2,420대5,200문210대3,800대2,300대12,500문해 군전 투 함지원함정잠 수 함170척10척20척430척50여척340척총 함 정200척820척항 공 기70대공 군전 투 기지 원 기헬 기560대230대30대870대520대320대총항공기820대1,710대(* 북한 해군 연안경비정 130여척은 제외)5. 예비전력북한의 예비전력은「교도대」,「노농적위대」,「붉은청년근위대」등 약 7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예비전력의 지휘체계는 인민무력부와 당민방위부 계통의 2원화 체계로 되어 있어 평시에는 민방위부에서 인적 자원관리 위주로 유지되다가, 전시에는 후방군단이 인민무력부의 지휘아래 해당 지역 예비전력을 운용하도록 되어있다.예비전력의 핵심세력인 교도대는 전 평시 모두 인민무력부 예하 후방군단의 통제 하에 있으며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는 평시 당 민방위부 관할 하에 있으며 전시에는 인민무력부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다. 즉 북한은 유사시 이들 예비전력을 전시 동원계획에 따라 교도대는 전방에 전개시키거나 향토 및 국지방어에 투입하고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는 지역 및 주요 시설 경계, 대공방어, 취약지역 수색, 연안경계등의 임무를 수행토록 하고 있다.북한의 예비 병력은 14세부터 60세 까지 인구의 약 30%를 동원대상으로 하고 있다.(1) 교도대는 현역군인과 후방 필수요원을 제외한 만17세~45세의 남자와 17~3 것이다. 군사통합은 다른 분야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전 조치와 제반 준비사항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탈냉전 후 국가안보에 대한 인식이 국가번영 차원으로 확대되어, ‘포괄적 안보(comprehensive security)’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군사 통합, 그리고 군사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할 때에도 철저한 군사중심이 아닌,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2. 군사통합의 범위와 요소군사통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역할 범위를 가진다 할 수 있다. 첫째로, 국가통합의 목표인 평화의 달성과 유지를 위한 조건을 제공해 준다. 둘째로, 국가 사회적으로 변화된 환경에 걸맞는 군대의 능력을 구비한다. 셋째로, 국가 통합과정에서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안보상황에 대한 문제해결의 임무를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통합되는 군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이다.군사통합은 결국, 군대가 큰 규모로서의 사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국가 체제의 통합의 마지막 단계에 위치하므로 사회 통합의 성공을 보장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통합이 달성되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로서, 공동체 성원들의 생존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군사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군사통합은 크게 두 부문의 요소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요한 갈퉁(Johan Galtung) 박사 세계적인 평화학자이자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 설립자인 요한칼퉁 교수는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는 직접적인 폭력의 효과를 자연, 인간, 사회, 세계, 시간, 그리고 문화 등의 여섯 가지의 변수에 따라 설명하면서, 그 분류 기준을 비물질적. 비가시적 효과, 물질적, 가시적 효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군사의 통합 역시도 이러한 내/외적 요소의 기준으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겠다.외적 군사통합은 군대자산의 유형적, 구조적, 경성적인 자산의 통)모델이다.이다. 이렇듯 내적 군사통합은 내면적인 문제에 대한 군대의 통합을 의미하며, 외적 군사통합이 어느 정도 완료되어갈 때부터 구성원간의 내면적인 가치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완전한 군사통합은 내, 외면적 요소가 함께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EU)에서는 공동군을 창설한다고 한다. 그들의 무기체제, 군제, 계급체계 등등 외적인 요소는 많은 차이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군가, 행진방법, 예식 등에 있어서도 사소한 면 하나하나까지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는 독일군은 근무 중 절대 금주인데 비해 프랑스군은 배식에 포도주가 지급된다 하지 않는가. 이렇듯, 물리적인 면에서의 외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문화적, 정신적 차이를 극복할 내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합 조직이 안정될 수 없을 것이다. 남북의 군사통합 역시도 내외를 통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3. 남북 군사통합의 방향(1) 군사통합의 기본방향기존의 연구들은 통일이 아무리 민족의 지상과제이긴 하나, 이를 추구함에 있어 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제도를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하며,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들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이창욱 연구논문(1998) 참조.또한, 한국군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북한군을 노동당 체제수호의 첨병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수적으로 열세한 한국군이 전력이 우세한 북한군을 포용하고 흡수하는 것은 너무 벅찬 과제인 것은 사실이며, 한국군은 반드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본 연구자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기존의 입장에서 언급하는 통합은 남북 간의 기본적 통일 방향이 흡수통일이 아닌 1:1 평등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물론, 북한군이 우리의 남한군보다 우세한 것은 사실이며 한국전쟁(6. 25) 등 계속된 분쟁상황에 따른 단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