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점에서 내가 이해한 한국전쟁'"개전 초기부터 전쟁은 미궁이었고 연원과 도발자에 대한 의혹으로 가득했다"1945년 광복과 동시에 시작된 분단체제는 5년이 지난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전쟁은 내적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미?소 중심의 냉전체제를 고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전쟁으로 고착화 된 당시의 구조와 그로 인한 긴장관계는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개방경제를 도입하는 등의 큰 변화가 있었음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민족간의 비극에 한정시키는 감상주의적 시각을 탈피하여 냉철하고도 차갑게 분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한국전쟁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한국전쟁 이후의 구조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역사학계의 정병준 교수는 "개전 초기부터 전쟁은 미궁이었고 연원과 도발자에 대한 의혹으로 가득했다")고 한국전쟁을 설명한다. 실제로 한국전쟁의 원인을 둘러싸고 전통주의와 수정주의가 대립하고 있으며, 전쟁의 발발 주체를 놓고 남침설과 북침설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쟁의 주체를 놓고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그만큼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전통주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을 세계 공산화의 목적 아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에 의해 계획되고 지령되어 김일성이 일으킨 불법적인 기습남침으로 해석한다.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毛澤東),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진영의 팽창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수정주의 사관에서는 미국의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전쟁이 발생했다고 간주하며 전쟁도발의 책임자로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이승만을 지목한다. 브루스 커밍스린을 중심으로 전쟁까지의 경로를 그려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1949년 6월의 주한미군 철수,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 10월의 중국 공산화 등의 연이은 사건은 스탈린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으며 또한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도 분명 호재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스탈린의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이는 모택동과의 협상과정에서 드러나는 스탈린의 입장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949년 중국 공산화에 성공한 모택동은 소련과 새로운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스탈린을 찾아간다. 1949년 12월에 있었던 1차 협상에서는 얄타체제를 이유로 거부했던 스탈린은 전쟁을 결심하면서 50년 1월 중국과 동맹관계를 체결하고 얄타체제를 탈퇴했다고 판단된다. 이는 김일성의 끈질긴 전쟁요청을 거부하던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하는 과정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49년 3월, 소련과 북한간의 조약 체결 과정 중에 무력통일을 주장한 김일성은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하자 8,9월 두 번에 걸쳐 재요청하지만 스탈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1950년 1월 17일, 대사관 만찬장에서 김일성은 또다시 한반도의 공산화를 주장하고 그 후 스탈린과의 면담 끝에 승인을 얻어낸 것이다.이처럼 스탈린의 전쟁 결정은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과 국제정세의 변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국제정세의 변화가 공산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점에서 스탈린과 김일성, 그리고 모택동의 합작품으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신전통주의적 입장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또한 50년 8월 27일, 소련이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데 대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고트발트 대통령(Klement Gottwald)의 문제제기에 대한 스탈린의 답변이 최근 베이징대 김동길 교수에 의해 공개됨으로써 전쟁의 모든 시나리오가 스탈린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 이승만이 자기 고문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에게 보내는 1949년 9월 30일자 편지)에서 북진통일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이러한 편지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북한을 도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실제로 1950년 5월 6일의 회견에서 이승만은 북진통일이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피를 흘리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맹목적인 진격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실제로 북진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했던 당시의 상황을 타개할 만한 언술로 사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점과 당시의 남한의 군사력과 군사장비, 그리고 군사배치를 감안한다면 이승만의 북진통일 의지는 전쟁원인의 분석에 있어서 무의미한 변수로 취급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학계에서 주장되었던 북침설 역시 전쟁 전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신빙성을 잃는다. 실제로 소련문서들이 공개되는 90년대 이후 북침설은 학계에서 힘을 잃게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주의 이론이 오늘날 용도폐기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수정주의는 반공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기에 미국과 서방세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 당시 전쟁의 원인이 오히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고 있던 전통주의 학설에 제동을 가함과 동시에 미국 제국주의의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시대적인" 의의는 가진다고 생각한다.왜 6?25가 아닌 한국전쟁인가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남북한 간의 전쟁은 국가마다 다르게 명명되고 있다. 미국을 위주로 한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Korean War, 우리나라에서는 6?25 사변 혹은 6?25 동란, 북한에서는 통일전쟁, 일본에서는 조선전쟁을 부르는 등 각 국가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쟁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다. 대립는 것이 필요하다. 명명행위를 통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적 삶이 평가되기에 무겁고도 어려운 주제라는 인식 또한 요구된다고 하겠다. 평가의 무게가 긍정과 부정, 정당과 부당을 가를 수 있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주요 사건들은 발생한 날짜를 기준으로 명명되고 있다. 4?19 혁명에서부터 5?16 군사정변,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날짜를 중심으로 명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6?25로 명명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우리를 '먼저' 침공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다. 물론 사실에 입각한 명칭임은 틀림없으나 북한의 선제공격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전쟁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단순화 시키고 있으며, 왜 1950년 그것도 6월 25일에 전쟁이 발생했는지, 왜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고 중공군이 개입하여 국제전의 성격으로 확대되었는지, 왜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로 휴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선제공격은 분명 중요한 문제이나 이를 명칭을 통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6?25는 남침전쟁이라는 단순화는 위험하다는 것이다.수정주의 학설의 대표격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아무도 누가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현실적인 분석에 있어서 누가 시작했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시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건의 바람직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의 발생이 구조적인 필연성 때문이었다고 해도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 하는 것은 밝혀져야 하며, 분명 전쟁의 책임은 일정부분 시작의 주체에게 전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커밍스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 내에서의 위기임과 동시에 유럽에 일대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애치슨은 중국의 행동에서 "유례없는 위험"을 보고, 그것을 6월의 첫 침공보다 더 부도덕한, 새롭고 정당한 이유가 없는 침략행위"라고 비난했다. 다음날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원자폭탄을 들먹이면서, 미국은 병기고에 있는 어떤 무기든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영국의 애틀리 총리(Clement Attlee)는 워싱턴을 방문하여 트루만 대통령(Harry Shippe Truman)을 방문하여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문서를 요구했지만 트루먼은 구두로만 다짐했다. 중국의 개입과 미국의 원자폭탄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한국전쟁에 집중시켜 놓았으며, 이는 전쟁을 끝내라는 여론을 확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단독전쟁에 의지를 밝히며 휴전을 반대했지만 미국과 스탈린은 휴전회담을 시작하게 된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소련은 권력 투쟁에 돌입하게 되고 더 이상의 전쟁지원이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휴전협정은 가속화의 단계를 밟게 된다.결국,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전쟁 당사자인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계여론의 반대와 미국과 소련의 상황변화는 전쟁을 휴전으로 끌고 갔으며 이는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닌 시작부터 끝까지 국제전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이승만은 친미주의자인가이승만은 친미주의자이기 것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서평1941년에 설립된 미국의 보수성향의 민간단체 중 하나인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에서는 매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각국의 Political Rights와 Civil Liberties의 항목을 수치화해서 발표해오고 있다. 한국은 2007년에 Political Rights score 1, Civil Liberties score 2를 얻은 바 있다. 정치적 권리, 즉 절차적 민주주의에서는 이미 완성된 단계에 들어섰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시민적 자유의 영역에서는 다소 미흡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는 단순히 1과 2로 표현되는 이상의 심연의 갭이 존재한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는 냉철하고도 차가운 분석을 통해 소위 386이라고 하는 민주화 세대를 매섭게 몰아붙이지만, 그 이면에는 안타까움과 아울러 기대감과 희망이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1부 : 문제와 관점이 책은 저자의 발표원고 혹은 논문을 편집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1장(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과 2장(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민주화 세대의 과제)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해 본다면 2005년 4월 21일에 2장을 강연한 후, 2006년 1월 12일에 1장을 발표했음을 알 수 있다. 386 세대들이 2002년 노무현 당선을 통해 청와대에 입성했으며, 2004년 총선을 통해 의회 권력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그 시점)에서, 저자는 386세대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절박한 심정으로 분발을 촉구했으나, 약 8개월이 지난 2006년 1월의 세미나에서 오히려 민주화 세력 내부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국 민주주의 기반이 허약해졌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시간적 배열을 거스르면서, 비판?과제 제시의 인과적 순서로 배민주정치의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저자는 운동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2장에서는 민주정부들의 경제정책을 시장근본주의, 시장만능주의적 처방이었다고 진단하며, 그 결과 민주정부는 노동운동을 소외시키고 보통사람들의 희망과 요구를 좌절시키면서 보수화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동안 민주정부는 방향성과 문제의식을 상실하며 보통사람들의 삶과 유리되었다고 원인을 제시하며, NL-PD의 이론을 현실의 제약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대안으로 연계해서 변화를 이어가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2부 : 민주주의와 헤게모니저자는 3장(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헤게모니 사이에서)에서 신자유주의와 도덕주의 담론에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에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이 아닌 부유층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국가의 역할이 전환된다고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한편 성장과 효율성의 원리가 기술관료적 경영주의 가치의 강화를 수반해왔으며 이는 민중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민주정부의 정책 내용과 결정방식이 실제 사회현실 및 사회갈등의 중심내용과 괴리되는 원인이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또한, 정치와 도덕은 다른 수준, 다른 영역에 위치함을 강조하며, 현실을 현실자체로서 접근하기보다는 규범적으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도덕주의는 민주적 과정의 실패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4장(노무현 정부와 한국 민주주의)에서는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헤게모니의 대면과 타협, 한국판 분할정부의 출현이 '열망-실망의 사이클'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국가기구 내의 검찰이나 사적영역에서의 언론이 정치의 중심행위자로 등장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로 정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고 오늘의 상황을 파악한다.갈등이나 분열을 부정적으로 전제하는 통합이데올로기, 도덕적 가치의 잣대로 정치에 접근하는 도덕주의 담론, 민주주의의 중우적 성격을 부정적으로 강조하는 전문가주의, 어떤 지배담론보다 강력한 는가 하는 이성적 논의의 기반을 확대하면서 제도개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3부 :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위기저자는 6장(민주주의와 노동의 문제)에서 노동의 배제와 억압은 단순한 노동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3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는데,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반비례하여 발전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퇴보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위임-책임의 연계고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편, PD적 문제의식은 현실에서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PD적 문제의식을 현실적으로 정리?실현하는 과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국가-정부 없는 시장사회를 강조하는 시장의 신화에 반론을 제기하며, 사적영역을 극대화 하는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민주화 세력은 민주정부 수립 후 비전과 대안적 정책, 그리고 인적 자원의 문제 직면, 헤게모니와의 대면,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사회경제적 문제 그리고 리더십의 약화와 정부수행/ 업적의 하락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이러한 변신을 거쳐 민주정부가 탈정치화와 정치의 다운사이징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오늘의 현실을 설명한다.부도덕과 폭력의 상징처럼 묘사되고 있는 노동운동이 시장지상주의의 최대 장애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 민주적 정치 환경에서 노동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지속되는 현실은 실질적 수준의 민주화를 요원하게 만들고 있으며, 따라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에 다름 아니라고 진단한다. 한편, 노동유연화 정책은 그릇된 현실진단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실제 의도한 결과도 낳지 못할 것이라고 강하게 몰아붙인다.저자는 정규직은 노동귀족이라는 인식, 이들의 혜택을 비정규직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노동문제의 해결방안을 시카고에서의 경험담을 들어 비판한다. 한편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끄집어낸다. ‘집합행위의 문제’, 조직기반과 조직 형태의 문제, 국가/정부의 역할 생산체제로의 전환가 공급측면에서의 교육제도의 개편, 즉 복지제도와 연계하여 산업/기업 특수적 기술교육을 제공할 기술전문학교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이는 곧 대학교육의 개혁과도 직결됨을 언급한다.또한 저자는 민주적 노사관계, 대안적 생산체제 형성을 위한 노조의 역할 및 활성화를 강조한다. 이는 곧 노사정 3자 협의의 틀로서 제도화되는 코포라티즘의 발전을 의미하지만, 현재와 같은 노사관계의 구조나 기반을 그대로 둔 채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만 불러들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저자는 미국 일변도의 신자유주의 모델이 고착화되는 것을 억제하고 사회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생산체제를 향한 적절한 중간모델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안적 발전경로를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문제와 정치적 리더십의 진취적 계기의 역할에 달려있음을 강조한다.4부 : 공존과 평화의 공동체저자는 8장(한반도 평화의 조건과 구조)에서 북한/북핵 문제의 위기는 북한의 전략적 선택과 미국의 강경책이라는 타협이 어려운 적대적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적인 평화 구축을 위해 미국의 정책방향, 남한정부의 역할, 지역국가들의 노력이라는 수준에서의 논의와 대안모색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저자는 북한문제를 통해 동아시아의 냉전이 복원되고 있다고 간주하며, 미일동맹의 재강화는 동아시아 국가간 관계에 불안정과 긴장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기 쉽다고 이를 경계한다. 미일동맹의 강화는, 냉전시기의 대립구도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북한문제를 북한 봉쇄 내지는 고립화로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현실적인 대안은 포용정책임을 강조하며, 북한을 정치적으로 인정하고 경제적 생존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정책은 힘의 극단적 비대칭성에 기인한다고 보고, 북한 문제는 고립을 풀고, 존립을 인정하고, 체제 내로 통합하는 것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문제를 합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저자는 동아시아의 구조적 비대칭성과 민족주의 때문에 유럽의 EU와 다른 경로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민족주의가 아닌 냉전의 구조를 더욱 큰 문제로 삼으며 논의를 전개한다. 냉전 시기의 구조가 온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동체 형성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요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통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위험과 이해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 기초를 두는 공통의 의미지평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안보와 평화가 기능주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공통의 의미지평을 통한 정치적 결정으로 평화를 위한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저자는 한국의 민주화와 미국 부시 공화당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인한 상황의 변화를 통해 한미관계는 중시되어야 하지만, 미국의 정책 역시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선택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형성의 핵심에 위치시키며, 일본은 냉전구조의 재현을 통해 기존의 기득구조를 최소한으로 변화시키는 쉬운 선택과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담론은 일본이 쉬운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하며, 공통의 의미지평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평화공동체는 현실의 폭력성과 지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이 정의롭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헌신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설명한다.5부 : 결론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이념, 과제저자는 10장(한국 현대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의 서두에서 해방 60년사를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의 결핍을 나타내는 '성찰없는 현대사 이해'로 규정하고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는 당대의 역사"라는 정의를 빌려, 현대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일본은 종전을 패전으로 인식하는 체제의 연속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고-경제원론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유명세를 치루기 몇 달 전, 작년 1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갓 수경 계급장을 달고 군생활의 말년을 시작하던 그때, 처음 주어지는 자유에 낯설어하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내려가던 그 즈음에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라이인들'을 접하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라는 것에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만 27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당시 대선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거의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기에, 이명박 후보의 신자유주의에 막연하게나마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논리적 허구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고, 예상대로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광폭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이명박 정부의 최대화두는 공기업의 민영화 바람이다.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민영화라는 칼을 꺼내들고, 시장에서의 정부역할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영화가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해가며 추진해나가고 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진국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의해 전 세계 거의 모든 개발도상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추세다.하지만, 전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갔던 리만브라더스와 메릴린치, AIG의 파산은 민영화가 공기업 비효율성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장하준 교수의 지적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169페이지에서 소개하는 어느 외국 은행가의 기고가 특히나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외국 은행가들은 돈을 벌 것 같을 때는 자유시장을 지지하고, 돈을 잃을 것 같을 때는 국가를 믿는다." 민영화가 언제나 최선일 수는 없으며,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공기업 역시 언제나 비효율의 상징도 아니며, 또한 비효율의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공기업만이 담당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한편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정치학도로서 p263-277의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가 상호보완적이라는 확고한 합의가 존재한다. 마틴 울프라는 영국의 경제 저널리스트는 "시장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대개 시장을 강화한다."라고 견해를 밝히지만, 장하준 교수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기본 가치에서 충돌한다고 생각한다. one man, one vote의 민주주의와 one dollar, one vote의 신자유주의는 기본가치에서부터 상이하다. Schmitter과 Karl은 "What Democracy is...and is not"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가 아닌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일종의 illusion이라고 구분한다. 먼저, 경제적 효율성을 첫 번째로 제시하는데 민주주의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하며 효율성의 추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개방경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개방경제는 민주주의와 관계없는 개념임을 강조한다. 오히려 보호무역이나 관세주의가 민주주의와 더 잘 맞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한다.장하준 교수의 주장도 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경제의 탈정치화를 독촉하는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경제의 효율성 추구는 정책결정에 있어서의 탈정치화를 요구하며, 이는 토론과정을 수반하는 민주주의의 약화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정책 추진 과정과 그로 인한 촛불집회는 이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민족주의 특징과 새로운 모색-『제국 그 사이의 한국』을 읽고-목 차1. 야누스의 얼굴, '민족주의'황우석 교수 논문조작 사건과 2002년 월드컵2. 『제국 그 사이의 한국』3-1. 한국 민족주의 특징①. 위로부터의 민족주의3-2. 한국 민족주의 특징②. 배타적 민족주의3-3. 한국 민족주의 특징③. 하얀가면의 민족주의4. 현재진행형으로서의 민족주의 필요성5. 시민공동체적 민족주의를 향하여1. 야누스의 얼굴, '민족주의'2005년 한국을 강타했던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 담론의 기반이 얼마나 미약하며, 그와 반대로 얼마나 막강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의 마비, 반대세력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 언어폭력과 비정상적 단죄 등 이 모든 것들이 민족의 이익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졌으며 빗나간 민족의 자부심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집단적 광기의 모습이었다. 황우석 교수에 최초로 의혹을 제기했던 MBC를 향해 가해졌던 비난은 민족을 위해서라면 진실의 왜곡쯤은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는 우리네 민족주의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톰 네언(Tom Nairn)은 "민족주의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때로는 황우석 교수 파동처럼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로 때로는 2002년 월드컵에서 세계가 놀랄 정도의 단결된 형태로 발현되기도 했다. 민족주의의 가장 큰 민족이 먼저인가, 민족주의가 먼저인가 혹은 민족주의는 허구인가 실재인가의 문제를 뛰어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생활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극단적으로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속에서도 우리 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민족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며 계기를 통해서 집단적인 광기, 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집단적 흥분 상태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2. 『제국 그 사이의 한국』사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억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빼앗기 위추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생성되었다고 본다. 학술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침략적 민족주의가 아닌 저항적 민족주의로서 생성된 것이다. 앙드레 슈미드는 『제국 그 사이의 한국』에서 한국의 민족주의 생성을 풍부한 사료-대부분 신문-에 의존하여 사실적으로 고찰하는 한편, 오늘까지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가를 조망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중화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해 생성되었으며, 일본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우리네 민족주의는 중화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를 지배해왔지만 열강에 의해 몰락해 가던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로의 성공적인 진입을 통해 새로운 열강으로 떠오르던 일본 사이에서 독립의 길을 걷고자 했던 당시의 몸부림처럼, 중화주의와 식민주의 사이에서 민족주의를 생성해나가던 당시의 몸부림은 그 안타까운 처지만큼이나 서로 닮아있다. 앙드레 슈미드의 저서의 제목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은 지리적인 특징과 역사적인 맥락을 넘어서 '중화주의와 식민주의 그 사이의 한국'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제국 그 사이의 한국』은 탄탄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 그 당시 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했던 신문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내려간다. 1장에서는 문명의 강풍과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다양한 대응 그리고 비판을 소개한다. 그리고 문명개화를 위한 첫 번째 과제로서 중화주의의 해체가 대두되었다고 2장에서 소개하며 중화주의의 해체과정을 설명한다. 그러나 탈중화를 위한 노력가운데서 제기되었던 동양의 연대가 어떻게 깨어지는지를 묘사해주고 있다. 3장에서는 문명국으로서의 일본의 오늘날의 위치와 그리고 문명개화를 담지하고 있던 민족주의가 식민주의와 논리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4장부터 7장까지는 일본 식민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을 조명한다. 4장에서는 민족의 정신을 강 등장시키면서, 6장에서는 한반도를 넘어선 만주 등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의 발견을 통해서, 7장에서는 해외의 이주동포들을 통해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공통의 담론이었던 '문명개화'를 탈피하고자 했던 고뇌와 몸부림을 보여준다.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논리가 식민주의에 이용되는 것을 보면서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재형성하게 된 것이다. 신채호는 혈통으로서의 민족개념을 만들어 국가의 존재여부와는 무관하게 명맥을 유지시킬 수 있는 민족을 창조했으며, 영토의 개념을 재창조하여 일본에 빼앗긴 국가의 영토가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포함해서 민족의 영토를 만들어냈다. 국가를 상실한 상황에서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앙드레 슈미드는 주장한다.이방인의 눈으로서 타국의 역사를, 그것도 민족주의의 생성과정을 톱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앙드레 슈미드의 세밀한 분석력과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더욱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빠질 수 있는 주관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객관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거기에다 풍부한 자료와 논리 정연한 구조를 통해 더욱 강하고 설득력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특히, 민족주의가 담지하고 있던 문명개화의 담론이 의도하지 않게 일본 식민화의 논리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탈피하기 위한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탄생했다는 주장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강풍과 만나면서 문명국으로 거듭나고자 탈중화 움직임, 일본 식민주의와 공통분모 발견, 민족의 재규정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민족주의의 생성 배경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3-1. 한국 민족주의 특징①. 위로부터의 민족주의이 책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민족주의를 돌아본다면,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용되어 온 측면이 강해 보인다. 앙드레 슈미드의 주장처럼 우리의 민족주의는 원래부터 있어온 것도 아니며 밑에서부터 우러나온 것도 아니다. '위에서부터' 교육제도와 매체를 통해서 주입 강요해 온 것이다매체를 통해서 주도되어 왔으며 해방 후 박정희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는 자생적으로 생성해서 발전해오기 보다는 위에서부터의 주입과 강요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민족의 원초적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그 계급적 배타성과 이념적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특징을 갖추었으며 프랑스 극우파의 공격적 ‘통합 민족주의’,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파웰 목사로 대변되는 영국의 신인종주의적 민족주의가 그런 예이다. 신채호와 박은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에서 강조한 몽고 침략에 대항한 애국적 민족 항쟁은 남에서는 국난 극복을 위한 총력안보의 귀감이 되는 등 민족주의는 위기를 먹고 자라왔다. 위기라는 것이 때로는 인위적으로 조성되었을지라도 위기의 담론은 민족주의를 지속적으로 재생산시키는 기제를 해왔으며 이는 위로부터의 주입?강요된 우리 민족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3-2. 한국 민족주의 특징②. 배타적 민족주의또한, 중화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민족주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역으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라는 초대형담론의 강조는 우리와 우리가 아닌 자들을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구분해버린다. 우리가 아닌 남은 적대자이며, 우리가 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이며,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라는 담론 아래 허용된다. 우리가 늘 타당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자세가 우리 민족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고 있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중국을 배제시킬 수 없음은 자명함에도 중국적인 것을 우리가 아닌 남의 것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주의가 싹텄으며 이는 우리 민족주의가 저항과 동시에 배타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인간의 소속감을 이데올로기화함으로서 세상을 우리와 남의 것으로 철저하게 구분하는 방향으로 시작했으며 발전해온 것이다. 임지현 작가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에서 ‘반만년 동안 유지되어의식에 대한 신화가 우리의 민족 담론을 마땅히 그래야 했다'는 규범적 인식의 틀에 가두었다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근대적 민족 국가건설에서 실패한 나라이고, 한국의 근 현대사에서 민족은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기준이다. 민족은 현실적 힘을 갖지는 못했지만, 관념 속에서는 강한 실체였다는 것이다. 식민지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식민지 국가는 '적'이고 민족은 '우리'라는 개념의 쌍이 탄생한다. 해방 후 분단 상황은 민족의 신화적 마력은 더욱 강화되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국민들에게 부과된 무조건적 명령이자 사회적 규범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야만에 맞서고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민중들을 동원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인민주권론에 기초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로서 민족을 상정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무시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3-3. 한국 민족주의 특징③. 하얀가면의 민족주의우리 민족주의의 또다른 특징은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 했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무성한 세계화 담론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적 세계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앙드레 슈미드는 저서의 7장에서 국가의 위치는 식민지 권력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반도의 외부로 옮겨갔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그 중에서도 문명개화에 가장 가까이 가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라는 당시의 인식을 언급해주고 있다. 중화주의 해체, 식민주의와의 유사성, 식민주의 탈피 등의 민족주의 생성과정에는 문명개화라는 서구중심적 담론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냉소, 그리고 무관심은 서구인들을 향한 맹목적인 호의와 반비례하고 있으며 이는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들에 대한 친절도 조사의 통계적인 방법으로도 입증되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문명국을 찾아 떠나던 지식인들의 모습과 동남아시아나 몽골에서 건너오는 그들의 모습은 유사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는다.
한국 노동운동과 코포라티즘-코포라티즘의 한계와 극복방안-1. 노사정위는 이제 빠져라?"노사정위는 이제 빠져라?"), 한 주간지에서 다소 과격한 주장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왜?라는 의문이었다. 노사정위원회)가 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지, 배제한다면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서구 유럽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받는 조합주의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는데 큰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지금까지의 실패와 착오를 바탕으로 본 궤도에 오를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해 왔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지난 5월 19일, 노동부는 노동규제개혁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는 사회적 협약을 추구하는 노사정위원회와는 달리 노동규제 개혁을 목적으로 구성된 위원회라는 것이다. 사실상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대부분의 규제는 곧 '노동보호'를 뜻하고, 이런 규제는 수십 년간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싸워서 쟁취한 제도들임을 감안한다면, 처음부터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했던 이명박 정부의 원칙에는 부합할 수 있으나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노동관련 법령의 수요자인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제약하는 쪽으로 진행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노동규제개혁위원회가 지난 5월 15일 지식경제부가 경제5단체)의 요구를 담은 '노동규제완화(안)'을 노동부에 제시한 직후에 구성되었으며, 이는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회적 협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이런 인식하에 민주노총은 5월 23일, "노동규제개혁위원회의 출범은 '노동판 광우병 사태'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전면대응을 선포했다.2. 계급갈등의 제도화1987년 민주화 대투쟁의 결과, 15년간 지속되어온 독점적 권력체제는 종말을 고했으며, 그 이후 적어도 정치인은 인민의 대리인이라는 원칙이 적어도 국민의 대표를 뽑는 과정에력혁명 노선을 추구하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는 불법집단'으로 규정하는 한편 '한자릿수 임금인상','총액임금제'등 임금억제 정책을 추진하는 등 본격적인 노동탄압에 착수했다. 거기다가 199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민주노조진영은 1993년 2월의 김영삼 정부 출범을 지켜봐야 했다. 1993년과 94년에는 '노총?경총 임금합의'라는 사회적 합의 방식을 채택하고 '노사자율'과 '합리적 노사관계'라는 다소 완화된 노동통제 방식을 시도했으나 노동계의 반발을 야기하였으며 이로 인해 김영삼 정부는 출범 초기의 개혁조치들의 시행을 중단하고 기존의 노동배제?억압적 노동관계로 회귀하였다. 정부와 자본의 탄압 하에서도 노동운동은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출범)이라는 성과를 거둔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분출했던 노동자들의 새로운 노동운동에 대한 염원이 일단계 결실을 거둔 것이다. 50년대 이래 유지되어 왔던 대한노총 또는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어용노조 중심의 전일적인 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1996년 '참여와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을 목표로 설정하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발족시켰지만 노동법 개정을 기대하던 노동자들의 바램과는 무관하게 '경제위기설'을 확산시킨 재계의 논리에 따라 12월 26일 새벽, 노동법이 날치기 처리되었다. 그날 민주노총은 곧바로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으며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한국노총 역시 12월 27일부터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87년 노동자 대파업에 이은 대규모 파업의 시작이었다. 양대 노조의 합동 파업은 결국 김영삼 정부를 굴복시키고 1997년 3월 11일, 날치기 통과시킨 4개의 법안을 폐지하고 4개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킴으로서 막을 내렸다. 총파업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와 함께 해결 과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기업별노조의 극복과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추진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총은 '민주와 진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조합주의와 유사한 일종의 결사체주의(associationinme)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Durkheim, Emile)은 corporate association을 제시하며 계급갈등의 아노미, 시장의 무정부성과 불규칙성에 대한 대안으로써 유기체적 연대와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루마니아 학자인 마노이레스큐(Manoilescu)는 1934년 state corporatism을 주장함으로써 코포라티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시켰다. 계급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민적 유대감을 제시했으나 이는 파시즘의 논리로 사용되고 말았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는 코포라티스틱 state라고 주장하며 직능대표에 의해 운영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70년대까지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중단되었다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계급타협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코포라티즘적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이는 마노이레스큐가 주장했던 state corporatism이 아닌 자발적,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Societal corporatism에 기반하고 있으며 서구 복지국가의 코포라티즘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7. 극단적 다원주의 산업관계의 문제최장집 교수는 다원주의와 대비되는 이익대표의 체계로 코포라티즘을 정의한다.) 필립 슈미터는 "코포라티즘의 이론은 모든 이익집단에 적용될 수 있지만, 특히 사용자 단체나 노동조합과 같이 생산자 집단에 적용될 때 커다란 유용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슈미터의 이론이 적실성을 갖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산업관계는 극단적인 다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87년의 노동자대파업과 이로 인한 노동법의 개정은 기대수준에 한참 못 미치지만 기본적인 노조조직의 자유와 단체교섭의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87년 이래 노동자들의 '조직의 폭발'이 일어났다. 노조 가입 노동자들의 수는 1986녀의 104만 명에서 1989년의 198만 명으로, 노조조문제로 노조들의 전투성은 최대화되며, 자본가들의 직장폐쇄와 투자철수의 위협이라는 극단적 맞대응을 야기한다. 이런 산업관계하에서는 타협보다는 대결이 빈번하며, 계급갈등의 증폭과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한국에서의 코포라티즘 실험이 실패에 그친 첫 번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조합원과 비정규직, 실업자 등의 이익을 포괄하지 못했던 문제(encompassing), 단위노조 혹은 개별 기업노조를 제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사분란하고 위계적인 그리고 중앙집권적인 상급노조의 문제(centralized), 상급노조의 독점적 대표성의 문제(monopoly)는 다원주의적 산업관계 하에서 피치 못할 구조적 문제라고 볼 수 있다.8.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문제그러나 또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노사정 위원회의 실패를 분석해보면 위원회에서 합의된 사항을 이행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합의사항의 불이행은 노조와 노동자의 신뢰를 잃게 되고 합의를 통한 해결보다는 다시 체제 밖에서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산업관계하의 구조적인 문제가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는 부분에 있어 영향을 미쳤다면, 어렵사리 구성된 노사정위원회의 실패는 합의사항의 불이행으로 말미암은 노사정위원회의 신뢰상실에 기인한다. 노사정위원회의 코포라티스틱한 협약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정치적 힘이 부재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다원주의 하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노사간의 협상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중립적인 심판관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금전 등록기 국가(cash legistrator state)라고 지칭한다. 노사간의 협상 내용에 변화를 가하는 것이 아닌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합주의 하에서는 국가는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계급갈등을 계급타협으로 이끌어내는 보장자 역할을 해야한다. 이를 두고 compensator guarantor 국가라고 지칭한다. 예를 들어 자본의 고용증진과 국가의 물가인상 억제 조건 하에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자제치체제 내에서 대변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불완전한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정당체제의 공고화를 언급하면서,"시민 개개인은 그들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조직될 수 있어야 하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정치행위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들 가운데서도 노동자들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가장 소외되고 배제된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민주주의 정치과정의 중요한 참여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계급갈등의 제도화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통해서 가능해지기에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내로의 편입은 한국 정치사에서나 노동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거대 양당 체제하에서 민주노동당은 중요한 정책행위자가 될 수 없었고 따라서 코포라티즘의 성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다.9. 코포라티즘-비민주적 방식에 의한 민주주의 실현위의 두 가지 문제는 코포라티즘이 한국에서 정착되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이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코포라티즘이 정착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다원주의적 산업관계와 영향력 있는 좌파정당의 부재는 코포라티즘의 성공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다. 그와 동시에 다원주의적 산업관계 하에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반영해줄 수 있는 정치통로가 막혀있는 상황에서 구조적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노동자들의 단합된 조직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대표의 구성이다. 독점적 노동공급자로서 중앙집권적이고 집중적인 노동자 조직이 구성되어 있다면 앞의 다른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이다. 다원주의 노조가 조합주의 노조보다 왜 더 전투적인가, 왜 스웨덴보다 한국에서의 파업이 더 빈번하고 격렬하게 일어나는가의 문제는 독점적 노동공급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대표조직의 유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파업을 하지 않아도, 파업의 위협만으로도 전국 노동시장을 통제하고 있기에 원하는 바를 이끌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개별노조에 대한 통제를 통한 노동자의 이익실현은 비민주적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