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지유신 근대화와 일본사회 형성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우리나라의 양무운동과 비슷한 것으로 일본의 근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유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에도막부에서 번(藩)단위로 행하던 정치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중앙집권에 의한 자본주의제도를 육성 발전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이지천황을 구심점으로 그들이 행한 정치는 정부의 힘과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역점을 두어 해외제국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메이지유신의 정치적배경과 메이지유신속의 정치적 세력의 변화, 근대화를 향한 일본의 개혁정책에 대해 알아보겠다.일본의 개국 전야로 페리제독의 강력한 요구에 확실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무렵의 일본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일찍부터 외국세력이 일본에 밀어닥칠 것에 대비하여 쇄국을 계속하느냐, 개항을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막부에서는 가능하다면 쇄국을 계속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으로 개항을 요구해 올때 쇄국을 고수할 만한 힘이 이제 막부에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1854년 1월 16일 앞서의 약속대로 페리제독은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에도만 깊숙이 들어와 고시마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막부와 에도 시민들을 당황케 하였다. 페리제독은 요코하마를 회담장소로 결정하였다. 막부는 페리제독이 다녀간 후 반년이 지났는데도 확실한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직면하자 막부는 완전히 그에게 압도되어 개항을 인정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2월 10일부터 담판이 계속되어 1854년 3월 31일 마침내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인장소의 이름을 따라 가나가와 조약이라고 칭한다. 이 조약에서 페리제독은 만약 일본이 다른 외국에 대하여 미국에 부여하지 않았던 권익을 수여했을 때에는 이와 동일한 권익을 미국에도 보장한다는 최혜국조항을 두었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은 영국, 적 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은 부르주아혁명도 농민혁명도 아니었다. 변혁의 주도력은 주로 다른 곳, 바로 무사계급 그 안에 있었다. 유신의 전 시기를 통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나라 안을 휘몰고 있었던 압도적인 대외 위기의식과 무사계급 안에서 새로운 지도력이 전면으로 나서는 과정에 있었다.일본의 경우 1850년대부터 188년대에 걸친 시기만큼 우수한 지도자를 수없이 배출한 적은 드물다. 바로 이들이 유신운동과 그에 잇따른 모든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무엇이며 왜 하필 이시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은 유신시대에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리라. 그들은 천화에 대한 열광적인 충성심에 사로 잡혀 있었을 뿐이라든가 , 또는 그들의 주된 희망이 서양을 모방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분명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다. 유신의 지도자들은 무사계급의 여러 층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의 행동은 계급으로서의 또는 집단으로서의 동기설정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혁명적인 목적을 의해 이용될 수 있는 무사계급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유신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각기 전통적으로 토쿠가와가에 대해 적대의식을 품고 있던 서일본의 4대 토자마번 출신이다. 그들은 1868년에 평균 서른을 막 넘긴 나이로 집단으로 보더라도 두드러지게 젊은 층이었다. 개중에는 키도처럼 높은 신분도 끼어 있었지만 거의가 하층 무사의 가정에서 자랐다. 이들은 젊은 만큼 정력적이고 또 야심적이었고, 대부분 각자의 번 내에서 지위 상승길을 특히 군복무에서 택하는 전통적 방법으로 그 경력을 시작하였다. 토지에 바탕을 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야심은 정치나 관료적 성공으로 충족될 수밖에 없었다. 막번 체제의 지방분권 덕분으로 이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정치활동의 무대가 많이 주어졌다. 독립혁명 전의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대 일본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출신지역 안에서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유)였던 이들은 모두가 구국(救國)과 다이묘오에 대한 봉사심의 열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적 견해에 사로잡혀 옹졸하거나 맹목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1868년 이전에 외국에 갔었거나 (고다이, 이토오, 이노우에는 영국에, 카츠는 일본 배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었다) 또는 일본에 와 있던 서양인과 교제하기도 했다. (오오쿠보, 사이고오, 오오쿠마는 오랫동안 영국의 통역 EㆍSatow와 식견을 나누는 사이였다) 대부분의 지사들은 1853년에 비록 폭력적인 양이파로서 출발했었으나(이토오는 1863년 영국 공사관 습격에 한몫 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열렬했던 자들은 일찌감치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남은 자들은 1868년이 되기 전에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직 개개인으로서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사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길은 이들이 번의 자산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상사의 권위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막부를 배제하고 자기 번의 다이묘오를 받들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을 좌우해 보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이루어지자 이들의 다음 목표는 나라를 지키는 일과 나아가 서양제국에 맞서 일본을 강화하는 일 두 가지였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으로서의 야심과 정치적 수완이 융합 되어 활동적 분자를 규합하면서 마침내 국가를 근본적 개혁으로 내닫게 하기에 족한 지도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1868년 토쿠가와로부터 몰수한 영토는 현과 부로 재편되어 서 일본 번 출신 지도자들이 지사(知事)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명목상의 우두머리인 공가나 다이묘오들은 지체만 누리던 지위에서 탈락하고 활동적인 지도자들이 대신 승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츠마의 오오쿠보가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1869년 3월, 오오쿠보는중앙집권을 더 강화할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옛 다이묘오들이 천황 앞에 호출되고 그 자리에서 천황은 폐번치현의 법령을 발포하였다. 이 전의 번은 현으로 바뀌며 우두머리인 지사(知事) 가 새로이 임명된다는 수 있도륵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메이지유신의 성립은 무진의 내란과 통일정권의 수립, 구질서의 붕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무진의 내란을 살펴보면 에도와 관동지방에서는 사이고의 지시에 따라 사쓰마의 번사와 낭인들에 의한 강도사건과 습격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도쿠가와측에서도 1867년 11월 말 에도의 사쓰마 번저를 불살랐다, 사쓰마, 죠슈를 혐오하하는 무사와 막부 지지파인 아이즈, 구와나의 번병들은 요시노부를 설득하여 마침내 사쓰마, 죠슈의 세력을 무력으로써 타도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1868년 정월 요시노부를 추대하는 구 막부군은 오사카를 출발하여 교토로 진군하였다. 양군간의 싸움은 도바, 후시미에서 벌어졌으나 도쿠가와측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났다. 요시노부는 은밀히 오사카성을 탈출하여 배를 타고 에도로 도망쳐 돌아왔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친왕을 동정대도둑으로 하는 사쓰마, 죠슈, 도사 등의 번병들을 동해, 동산, 북륙의 세 방면으로부터 에도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리고 3월 15일을 기하여 에도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사이고의 대란을 치루면거 에도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구막부는 그 후 에노모토 등이 북해도의 하고다테에 북해도 정부를 조직하여 정부군에 반항하고 있었으나 1869년(메이지2년) 5월에 항복함으로써 1년 반 동안 이어온 내란은 완전히 종식되었다.통일정권의 수립은 1868년(메이지 원년) 3월 14일 에도성 총공격을 하루 앞두고 메이지 천황은 교토황거의 자신전에 군신들을 모아놓고 신정의 기본 방침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5개조의 서약문이다.1. 널리 회의를 일으키고, 만사를 공론에 의해 결정한다.2. 상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행한다.3. 문무백관이 하나가 되어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뜻을 세워 민심을 흔들리지 않기를 요한다.4. 구례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기초한다.5. 지식을 세계에 구해 크게 황기를 떨친다. 등이다.막부와의 싸움으로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정세에게 금품을 전달하는 등 민심 수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이렇듯 민심을 파악하면서도 연도에 부복하여 배례하는 백성들의 전송을 받은 첨황은 에도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한차례 교토로 돌아왔다가 다음해인 2년 3월 다시 에도로 돌아왔다. 에도의 이름도 서쪽의 교토에 대응하여 도쿄로 고쳤다. 이렇게 해서 신정부의 정치적 중심지는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다. 오우 지방의 반란이 진압된 후 정부에서는 제번의 군사력과 제멋대로의 행동을 염려하여 대명들에게 판적을 천황에게 봉환토록 하여 중앙정부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1869년 2월에는 사쓰마, 죠슈, 도사의 번병을 모두 천황의 친위병으로 편성하기 위해 토쿄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7월 14일 천황은 도쿄에 있는 번지사를 소집하여 번을 폐지하고 현을 둔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폐번치현이라 하는데 이로 인한 행정조직은 부에는 지사를 두고 현에는 현령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사이고, 기도, 이타가키, 오쿠마 등에 의해 차츰 기초가 다져졌다.구질서의 붕괴는 1864년으로부터 4년에 걸쳐 옛 질서가 빠른 템포로 무너져 갔다. 먼저 공경, 대명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화족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무사의 여러가지 신분은 사족과 졸족의 두가지만으로 구분하였다가 메이지 5년에는 졸족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사족이 평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지급까지의 농, 공, 상 계급은 메이지 3년에 평민이라 칭하였다. 메이지 4년에는 화족과 평민간의 결혼이 인정되고 직업의 제한도 완화되었다.' 사민평등'은 신정부의 행동목표로서 메이지 4년에는 예다, 비인의 호칭을 폐지하여 평민으로 하였으며 5년에는 창기 해방령을 내려 인신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호칭만 폐지되었을 뿐 인신매매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국 '사민평등'의 행동목표도 철저히 시행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무사들이 받고 있던 가록은 신정부에서 지불해 오고 있었으나 1867년에는 폐지되고 몇 해분의 봉록을 공채로 지불키로 하였다. 옛 대명은 다액의 금록공채를다.
조선 통신사□ 과목 : 한일관계□ 교수 : 신경식 교수님□ 학과 : 중국학과□ 학번 : 2003107015□ 이름 : 박 화 미1. 조선 통신사-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幕府)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말한다. 1603년(선조36)에 성립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체제하에서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조선왕조 개국 이후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까지 62회에 걸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으며, 이때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 외에 회례사(回禮使)·통신관·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했다. 반면 입국왜사(入國倭使)의 횟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이는 양국간의 사절파견의 근본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무역을 중심으로 한 절박한 경제문제로 조선에 여러 번 입국했고,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차별적인 외교원칙과 '금구'(禁寇)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외교적인 목적 때문에 일본의 사절보다 훨씬 적게 파견되었다.이것은 1404년(태종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國書)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리고 오기 위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는데, 일본의 정세를 직접 견문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어 1617(광해군9), 1624년(인조 2)의 사절도 회답 겸 쇄환사로서,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절파견이 상호간에 호의를 주고받는 의미보다는 몇 차례에 한정하여 정치적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은 도쿠가와 바쿠후를 정식 외교 당사자로 여기지 않았고, 강화를 위한 기반이 조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636년에 임진왜란 이후 양국간의 통교의 계기가 되었던 국서가 개작(改作)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커다란 현안으로 등장했다.그러나 조선은 그해에 청(淸)나라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남쪽의 일본과 관계를 온전히 하려는 입장이 강했고, 몇 차례의 사신을 통해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선 재침입의 의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치른 지 40여 년이 경과했으므로 전쟁포로의 쇄환문제 등이 소멸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의 거듭된 통신사 파견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도 명·청 교체기의 국제 환경에 적극 대응하고, 외교를 통해 정권의 권위를 과시하여 국내 제후지배를 굳게 결손시키기 위해 조·일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로써 조선은 1636년 대등한 외교원칙에 의해 사신을 파견한다는 뜻에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양국간에 사행의 기능, 파견과 접대를 둘러싼 갖가지 절차와 내용을 점차 공식화시켰다. 그리하여 1811년(순조11)까지 9회(회답 겸 쇄환사 포함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에게 보내는 서계는 예조참판·예조참의·좌랑 등 상대의 지위에 상응하는 직명으로 되어있었다. 또한 통신사는 별폭(別幅)을 지녔는데, 여기에는 일본측 관계자에게 예물로 보내는 선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재했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筆談唱和)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즉, 신유한(申維翰)의 에 따르면, 1719년(숙종45)의 경우 통신사 일행의 선도와 경호를 위해 쓰시마 군사 1,300명이 동원되었고, 쓰시마 섬에서 에도 사이에서 직접 접대를 맡았던 다이묘[大名]는 33명이지만 그밖에 통신사행렬이 지나는 해로와 육로에 인접한 수많은 지방의 다이묘들이 예하 민을 국역 부과형식으로 동원했는데 그 수는 하루에 3,000명으로 방대했다. 바쿠후는 통신사의 왕복을 다이묘에 대한 군역과 인민에 대한 국역으로 융숭하게 영송했다. 하지만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이와 함께 통신사 일행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2. 조선 통신사의 규일생의 영광으로 여겨, 사절단의 숙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각지로부터 몰려와, 시문을 구하거나 서화의 휘호를 의뢰하거나 학문상의 질의와 해외정보를 듣고자 희망해 마지않았다. 또한 일행이 지나는 연도에는 사절단의 화려한 복식과 행렬의 장관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곤 했다.통신사의 왕복에는 5~8개월가량이 소요되었다. 일본에서는 對馬藩에서 보낸 出迎船이 조선의 부산에서부터 對馬府中에까지 이들을 인도하고, 이때부터 藩主인 무네가 경호, 수행하여 동경까지 왕래하였다. 도중에 연도의 大名이 자신의 영지를 통과할 때까지 海路에는 배를 보내고, 陸路에는 인부와 마필을 모집하여 送迎하였다. 통신사 일행의 평안 무사한 여로를 보장하는 것은 양국의 관계뿐 아니라, 이처럼 대규모의 행사를 책임진 對馬藩의 존망에도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해 숙식이 가능하고 경관이 좋은 곳에 나름대로 격식에 맞는 건물을 선정하여 준비하였다. 식생활 습관에 맞춘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꽤 큰 문제였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많은 일을, 수년 전부터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수행해야 하는 대 작업이었다. 통신사가 무사히 귀국한 후에는 답례를 위한 사절단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향하였다. 따라서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게 되면 對馬藩에서는 적어도 전후 3년 동안은 행사에만 매달려야 했다. 일행에 대한 접대, 경비 등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막대한 것으로 백만냥(약 558억엔)정도가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朝日무역으로 벌어들이는 宗家의 이득이 컸었다는 말이기도 하다.3. 조선 통신사의 역할-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국빈으로 대우받았다.-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몰려들어, 학문과 문학, 기술 등 조선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일본사람들은 통신사 일행이 건네 준 한시, 그림, 글씨, 책, 도자기 등을 가보로 삼기도 했다.- 문화사절로서의 역할 : 통신사의 파견은 주로 관백의 승습축하사절이란 공식적인 명목 이 있었지만, 사실은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와 양국의 국내사정에 특이한 기록이 나온다. ‘남자 악공(樂工)?말치 는 사람?여러 가지 기예나 기능이 있는 자?글씨 잘 쓰는 사람?이름난 명의(名醫)?마재(馬才) 에 능한 사람 등을 데리고 올 것’이다. 대개의 조항이 국가간 외교적인 것에 비하여 이 같은 기록이 있음은 당시에 통신사가 일종의 문화사절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4. 조선 통신사의 특징-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에게 파견되어야 한다- 일본 장군 대한 길흉조사,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해결의 목적을 갖지만 회례·보빙의 의미 는 없어야한다-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 앞으로 서계(書契) 및 예단을 가지고 간다- 사절단은 중앙관리 3명 이하로 한다- 통신사, 그에 준하는 국왕사의 호칭을 써야한다4. 조선 통신사의 파견 영향- 외교 사절의 왕래로 양국 간에 정치적 관계가 밀접해 졌다.- 조선 통신사 일행들과 일본의 학자, 문인들 간에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선진문화 전파 : 조선의 선진 학문이나 기술을 일본에 전해 주게 되었다.- 조선의 유학은 일본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5. 통신사의 사행로- 조선초기(1617년 사행 포함) : 부산~교토(京都)수로 : 부산 영가대~대마도 사스나(佐須奈)~대마도 이즈하라(嚴原)~이키(壹岐)~아니 노시마(相島)~지시마(地島)~시모노세키(下關)~세토나이가이(瀨戶內海)~나가시 마(長島)~가미노세키(上關)~가마가리(浦刈)~히비(日比)~우시마(牛窓)~무로쯔 (室津)~오사카(大阪)~요도우라(淀浦)육로 : 요도우라(淀浦)~교토(京都)- 조선후기(1617년 사행 제외) : 부산~에도(江戶)수로 : 전기와 같음육로 : 요도우라(淀浦)~교토(京都)~오츠(大津)~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히코네(言根)~나 고야(名古)~오카사기(岡崎)~도모하시(豊橋)~아라리세키쇼(新屋關所)~시즈오카 (靜岡)~시미주(淸水)~미시마(三島)~하코네세키쇼(箱根關所)~오다와라(小田 原)~후지사와(藤澤)~에도(江戶)- 닛코 방문(1636년, 1643년, 1655년 사행) : 부산~닛코(京都)
일본의 전쟁체험일본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 러일준쟁, 중일전쟁 등 일본의 과거사를 논하자면 전쟁의 역사를 논해야 할 것이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마지막 전쟁이 됐다는 점과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이 민주정치의 길을 가게 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이 태평양 전쟁을 하게 된 것은 중일전쟁이 시초인데 중일전쟁은 중국에서의 배일·항일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선전포고 없이 곧바로 만주에 둔해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전토에 대하여 침략을 감행하였다.일본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1개월 뒤인 8월까지 북경과 천진 이북을 점령하였고 9월 들어 일본군을 일제히 남하하면서 공세를 가하여 11월 초에는 상해전선을 무너뜨리고 남경을 위협하였다. 11월 20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천도를 선언하고 정부와 당 기관을 한구로 옮겼다가 다시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일본군은 13일 남경을 함락시키고 13일에서 17일을 고비로 약 2개월 간에 걸쳐 「남경대학살」을 감행하여 약 30만명의 중국국민을 학살하였다.일본군은 계속해서 광대한 지역을 점령해 갔다. 그러나 1939년들어 일본군의 공세가 주춤해지고 각 전선에서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과 영국은 중국 국민정부에 원조물자를 보내는 등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운데 점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점차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것은 37년이후의 중·일전쟁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40년 5월 이후 독일이 네덜란드·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에 상륙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의 제휴 강화와 함께 <호기남진(好機南進)>이라는 방침을 세우고 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을 맺은 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장제스에 대한 원조 루트 차단이라는 의미도 지녔음)하고 다시 네덜6월에 독·소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또다시 북진론이 대두하고 소련과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추진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한편, 7월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어 자국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시키고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했으며, 필리핀에 극동미국육군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으로 D. 맥아더를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조치는 일본 군부를 자극하였고, 9월 6일 이른바 어전회의에서는 10월 말 개전을 목표로 하는 대 미국·영국·네덜란드 전쟁 준비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개전을 둘러싸고 내각 안의 의견이 분열되어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들어섰다. 전쟁을 예측한 미국은 11월 26일 최후통첩과 다름 없는 <헐 노트(C. Hull-Note)>를 일본측에 전하고, 일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12월 1일 또 한 번의 어전회의에서는 <미국·영국·네덜란드에 대하여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의하고 개전 날짜는 12월 8일로 정하였다. 12월 8일(하와이시간으로는 12월 7일) 나구모중장[南雲中將] 휘하의 기동부대에서 발진한 공격대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 태평양함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습은 미국의 뿌리깊은 고립주의를 일소하고 <진주만을 잊지 말자>는 슬로건 아래 미국 국민이 일치단결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이 참전하자 미·영의 승리는 확실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12월 11일, 독일·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전장은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국(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로 명료해졌다. 42년 1월 1일 영·미·중·소 등 26개 국가는 <연합국선언>에 조인하여 대서양헌장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단독으로는 강화(講和)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태평양전쟁의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태평양함대를 궤멸시킴과 동시에 말레이 반도 인근해역에서도 영국의 신예전함 2척을 격침하고 제해권을 원조루트를 차단하고,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하여 버마(지금의 미얀마)에 침입해서 42년 3월에는 랑군(지금의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의 작전계획은 일단락 되었다. 예상을 초월한 성공은 충분한 준비를 거듭한 기습작전의 결과였지만, 미국과 영국이 유럽중시 정책을 취하고 아시아에서는 방위적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개전시에 일본이 예정했던 작전계획은 거의 종료되었는데, 그것은 남방지역을 점령하여 그 자원을 전력화(戰力化)하여 장기전으로 이끌면, 독일이 영국을 굴복시키고, 미국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잃게 됨으로써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과 함께 미국·영국과 싸우게 되었으나 공통적인 세계전략이나 작전협력은 없었다. 42년 1월의 <독일·이탈리아·일본군사협정>은 동경 70°(인더스강에 걸림)에서 작전지역을 분할했으나, 이는 독일·일본의 <광역권>을 확정한 세계재분할안(世界再分割案)에 불과한 것으로, 군사협력에 관해서는 영·미함대의 동향에 따라 일본 해군과 독일·이탈리아 해군이 대서양 또는 태평양에서 협력한다는 원칙에 머물렀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검토할 <독일·이탈리아·일본위원회>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일본이 패전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성공했는데 이는 철저한 계계획과 기습작전이 먹혀 들어갔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기습공격이 성공했을때 일본은 미국이 더 맹렬히 공격해 올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일본은 군을 식민지에 배치시키며 식민지 유지에 나섰다. 일본은 계속되는 승리에 도취되어 미국을 너무 만만히 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미국의 공격에 의해 일본은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 살짝 생각해 볼수 있는건 일본이 계속해서 미국과의 전투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물론 대국 미국과 싸우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많은 전쟁경험과 무기로 승리를 이끌수 있지도 않았나 생각해 볼수 있을것 같다.이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에 대해 알아보면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을 공영권 이라는 이 관점은 일본이 아직도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되고 역사, 사회, 교육과 관련하여 과거사의 왜곡문제를 야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십오년전쟁은 만주사변 발발 시기인 1931년부터 태평양전쟁 종결시기인 1945년까지 15년간을 하나의 전쟁기로 보는 것이다.일본인들의 야욕에 대해 알아보면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하고 확대되는 가운데 일본은 총력전 체제를 세웠으며, 식민지에서도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이 강행되어 점령정책은 한층 가혹해졌다. 한국·타이완에서는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명분 아래 인민통제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노동력과 병력으로 징용하였다. <만주국> 경제도 일본 전시 경제체제에 강하게 종속되어 붕괴의 위기에 빠졌다. 일본군은 진공작전(進攻作戰)보다도 점령지역의 치안유지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남방점령지는 당분간 군정하에 두었다. 42년 1월, 도조 총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 구상을 제시하고 유럽 및 미국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아시아가 해방되어야 한다고 외쳤으나, 대동아공영권이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또다른 식민지지배 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대동아공영권의 실태는 43년 11월 도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밝혀졌는데 참가국은 미얀마·인도·필리핀·만주국·왕자오밍 정권에 불과하였고, 단 하나의 독립국 타이는 총리 대리가 출석했을 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군정은 그 뒤 반일 저항운동을 일으켰으며, 이 저항을 통해서 아시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일본이 항복을 하게 된 건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일본은 게속해서 피해를 입고 사망자가 속출 했지만 미국의 항복요구를 묵살해왔는데 결국 원폭이 투하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사망자를 낸 후 항복을 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였고, 11월 이후부터 B-29폭격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였다. 45년 도 비밀리에 소련에게 화평중재를 요청하는 교섭을 시작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으로 대일 처리방침을 공포함과 동시에 일본에게는 무조건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수는 약 34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소련도 8월 8일 마침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8월 9일 만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일본의 최고지도층은 항복을 결심하고, 14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였으며 15일 일왕은 항복조서를 발표했다.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일본 점령 연합국 군최고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45년 8월 15일 점령지역을 할당하였는데, 소련에게는 만주, 내몽골,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남사할린을 맡겼다. 이는 소련을 일본본토 점령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뜻하였다. 스탈린이 홋카이도[北海道] 북반부 점령을 고집했으나 H.S. 트루먼 미국대통령이 이를 거절함으로써 미군만으로 일본본토를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항복조서에 대해 알아보면 천황이 발표한 종전조서에서는 일본이 세계에다 항복선언을 한것은 1945년 8월 10일 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청황 히로히토는 자신의 육성으로 종전조서를 낭독했다. 종전조서는 맨 뒷장에 있으니까 읽어보시구요 내용을 살짝 살펴보면 우리가 항복조서로 알고있는 이 종전조서에는 항복이라든가 전쟁에 패했다.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일본 민족이 연합국의 막대한 무력에 의해 더이상 피해를 입고 괴멸되는 사태를 막기위해 천황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패배에 의한 전쟁의 종식 즉 패전을 있는그대로 인정하는 대신 청황의 주도로 종전이 이루어 졌음을 주장하는 전도된 역사의식을 보여준다.이 종전조서에선 미국 영국 중구과 소련이 합의해 정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형태로 종전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전쟁 조차도 미국과 영국이 다.
◎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일제하 사회상을 구성하는데서 두개의 상반된 이미지, 즉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전시체제 성립 이후 일상화되는 ‘전민족적 협력’의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굳이 말하자면 식민지수탈론의 입장에서는 ‘전민족적 협력’의 이미지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지만, 전시체제기에 저항의 분위기가 잦아드는 것을 굳이 부정할 수 있는 근거도 없는 듯 하다. 따라서 민중의 파편적인 저항을 내세워 보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를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저항과 협력의 경계를 어디에서 설정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것이다.이런 이분법적 인식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식민지인식 방식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이기는 하지만 한국사회가 근대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일정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길은 인식론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민족주의와 근대화라는 인식기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식민지 근대화론이 수탈과 저항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볼 근거는 박약하다.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립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에 어떤 방식으로든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 수탈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틀이 가진 단순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제국주의가 부과한 인식론을 식민지민은 어떻게 수용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는 수탈과 저항이하는 단순도식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의 지배와 그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근대화라는 단순도식 속에 감추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는 제국주의 지배자의 일방 통행적 지배가 아니라, 식민지민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한 ‘협력’의서 역사학계의 근대사론을 이른바 ‘식민지수탈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수정을 요구하고, 역사학계는 이들의 수정사론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반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였다.2. 역사학계의 근대사론-‘식민지수탈론’역사학계의 식민지 연구경향은 원시적 수탈론, 근대주의론, 내재적 발전론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외 근대극복론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제식민지지배의 죄악상과 수탈상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원시적 수탈론은 해방직후에 잠시 풍미했던 근대사론으로 지금은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근대극복론은 다양한 견해를 제기하지만, 각각 근대성 비판, 근대극복, 근대초극을 통하여 서구근대성의 극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인식을 보인다.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근대주의론 및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 두 경향사이에는 근대변혁 과제와 민족해방운동 주체의 설정을 둘러싸고 현격한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 근대주의론은 국민국가 수립, 자본주의 공업화, 시민사회 성립이라는 서구의 역사경험으로부터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근대변혁의 과제를 도출한다. 그리고 부르즈와민족주의 세력을 이 과제의 담당 주체로 파악하고 부르즈와민족주의 운동 중심으로 근대변혁운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이 사론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반면 내재적 발전론은 약간에 인식의 편차가 있지만 일국사적 발전의 기본동력을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기에서 발견하고, 그 전개양태를 민족해방운동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역사인식을 보인다. 또한 일제의 지배와 민중의 대항이라는 인식구도는 해방후 외세의존적 군사독재의 지배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저항이라는 대립구조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역사관은 민족해방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로 기능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체제변혁적인 지향을 담고 있다.이처럼 양자의 연구 경향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함에도 민족주의적 지향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발견된다. 이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토대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제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정한다. 두 번째는 식민지 개발자로서의 일제를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일제의 식민지 개발에 한인의 자기개발로 식민지 한국사회는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고도성장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 상태에서도 주체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경제의 예속과 파괴가 심화될 수 밖에 없다는 식민지수탈론의 입장과 배치된다. 세 번째는 식민지기의 개발 경험과 성과는 6,70년대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개발과 해방 후 발전사이에는 연속적 측면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식민지지배가 해방 후 경제적 종속과 저개발의 역사적 원인이 되었다는 식민지수탈론의 역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이 같은 근대사상(近代史上)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통칭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발전의 지표를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서 찾고, 근대로의 발전 기본 동력을 한국사회 내부에서가 아닌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미국의 경제원조라는 외부에서 찾는다.식민지근대화론은 더 나아가 1980년대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로 출현하였다. 그 응답의 하나는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제기되었다. 신흥공업국들의 출현으로, 제3세계가 세계 자본주의경제와의 관계를 깊게 할수록 종속과 저개발의 심화현상이 나타난다는 기존의 제국주의론이나 종속이론은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제3세계도 세계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대결과 단절’이 아니라 ‘협력과 참여’에 의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런 점에서 중진자본주의론은 동아시아의 특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이론, 즉 제3세계의 경제발전론으로 정립된 것 이다.다른 하나의 응답은 동아시아사회 내부에서 발전의 동력을 찾으려는 시각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 전통의 고유한 특수성이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여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사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화론자의 반비판 역시 대단하였지만, 이들 또한 논쟁과정에서 역사관의 분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경제성장론(중진자본주의)이 여전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면, 식민지자본주의 근대화의 전개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근대자본주의 또한 착취와 억압을 내포하는 생산체계라는 점에서 비판을 가하는 근대극복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2) 논쟁의 비판과 반성최근 논쟁이 새로운 역사관을 모색하는 생산적 토론보다는 상대 주장 비판과 자기 주장 정당화로 소모전을 벌이는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결과 새로운 역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의 배경에는 통일문제와 함께 한국민족주의의 양대 축을 구성하는 한일문제, 근 30년간 한국사 학계를 지탱해온 인식틀이 논쟁 대상으로 된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대다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역사학계 내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근대주의론과 비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내재적 발전론이 있고 이들간의 연구방법론과 역사관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 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심지어 이른 애써 무시한다. 그 같은 의식수준에서 70년대 지배적이던 근대주의론적 연구경향이 90년대도 역사학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오인하거나 왜곡하여 학계 전체를 매도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논자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한국사회의 선진화, 현대화라는 현대사의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는 데 반하여, 식민지수탈론에서는 그러한 과제의 제시가 없다는 식으로 비판을 했든데. 식민지수탈론에서는 대체로 민주주의의 실현과 민족통일, 자립적 경제체제의 구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였다.그리고 식민지근대화론을 식민지 미화론 등으로 몰아붙이는 다수의 식민지수탈론자의 비판 또한 적절하지 않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도 일제하에서 국민경제 및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주주의 등 서구 근대성의 핵심이 원천적으로 부정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주장의 요점은 식민지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그 유산이 해방 후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며, 그 결과 경제발전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측면은 철저히 무시된다.즉 동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 미성숙이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확대재생산하는 요인이 되고, 그것이 기업들로 하여금 생산기술 개발과 경영혁신 보다는 저임금 노동력, 시장독점, 특혜대출, 부동산 및 금융투기 등에 의존한 손쉬운 성장전략에 의존하게 하여 대외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든 측면을 주목하지 않는다.세 번째, 식민지근대화론이 출현하게 된 현실진단이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파산하였다는 점이다. 한국경제가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1980년대 중반임에도 해외의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금융불안과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예고한데 반해, 군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1997년 말 국가부도사태가 나기 직전까지도 성장신화에 빠져 있었다. 이처럼 고도성장과 경제위기를 모두 경험하고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을 재확인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근거 없는 성장신화에 입각한 식민지근대화론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네 번째, 식민지근대화론의 현실적 역기능이다. ‘제국주의와 협력을 통한 경제발전’을 강조하고 경제의 ‘선진화’를 시대적 과제로 내세우는 식민지근대화론은 현실의 사회변화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 속에서 진행되는 모순의 실체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 옹호적, 수구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위험성이 크다. 또한, 일본 내 보수주의자 , 군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용당할 위험성이 있고, 실제 이용되고 있어 이들의 검증되지 않은 가정과 주장은 반성과 사죄에 기초한 과거사 청산을 더욱 어렵게 한다.마지막으로 식민지근대화론 내부의 근대극복론자들도 위와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역사인식 방식의 중대한 문제는 부르즈아권의 모순을 단순히 지적하고 극복대상이라고 그저 선언할 뿐이다. 이처럼 실증적 차원의 역사인식 없이 단순히 탈근대론에 편승하여 위기를 모면하려는 태도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식민지수탈론 반성 >>첫 번째, 일제의 지배는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 수준에 의하여 일면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며, 한인도 이다.
제 5장 CPU: CPU는 중앙처리장치로 대수의 사칙연산 및 논리연산을 말하며 그래서 CPU는 대수의 사칙연산 및 논리연산을 수행하는 장치와 이를 보조하는 장치로 구성된다.1. 논리연산과 논리회로1) 논리회로1 0 과 1 의전기적 표현- 컴퓨터에서 논리연산을 다루기 위해 참과 거짓을 0 과 1 에 대응시키고 이에 대한 논리연산을 정의.- 논리회로는 논리연산을 논리적으로 구현한 것.- 논리연산은 3개의 연산자(논리합AND, 논리곱OR, 논리부정AND)로 구성.{{2 논리합 회로 - 논리합을 연산하는 회로로 OR회로라고도 함.{{3 논리곱 회로 - 논리곱을 연산하는 회로로 AND회로라고도 함.{4 논리부정 회로 - 논리부정을 연산하는 회로로 NOT회로라고도 함.{{5 NOR 회로 - 논리합 회로 뒤에 논리부정 회로가 연결된 형태.{{{6 NAND 회로 - 논리곱 회로 뒤에 논리부정회로가 연결된 형태.{7 XOR 회로 - XOR는 배타적 OR를 나타냄.{2) 진리표, 논리식, 조합 논리회로: CPU 연산을 수행하는 장치(레지스터, 멀티플렉서, 연산기, 쉬프터로 구성){{{{{{{장치의 기능 진리표 논리식 논리회로{1 기능분석- 숫자 표시판- 7개의 LED(light emitting diode)로 구성.-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표시할 수 있다.- BCD코드는 4비트를 이용하여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표시하는 방법.- (1010)b 이상의 이진수는 사용하지 않는다.- 7개의 전구로 가는 전원을 끄고( 0 ) 켜고( 1 )하는 출력 7개를 갖는 장치- 4비트의 입력으로 7개의 논리식을 만듬.2 진리표의 작성3 진리표의 생성- 하나의 진리표에 다수개의 논리식 존재- 논리식 중 가장 간단한 형태를 찾는 방법으로 카르노맵이 있다.4 논리회로의 설계{- 논리식들을 이용하여 논리회로 구성.3) 순서 논리회로플립플롭은 1비트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조합 논리회로에는 저장능력이 없다.순서논리회로에는 레지스터, 카운터, 쉬프터 등이 있다.4) 논리회로와 IC컴퓨터 내부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장치는 조합 및 순서 논리회로로 구성.컴퓨터 > IC > 논리회로 > 저항, 캐패시터2. CPU의 구성과 동작1) CPU의 구성1 CPU의 개념적 구성 및 동작- CPU는 프로그램 카운터, 명령 레지스터, 명령 디코더, 메모리 인터페이스 및 연산 부로 구성(연산부는 다시 레지스터 뱅크 및 디코더, 멜티플렉서, 연산장치, 쉬프터)2 레지스터 및 레지스터 뱅크- 레지스터는 순서논리 회로의 한 종류로 CPU에서 N 비트의 데이터를 임시 저장하 는 장치이다.- 일반적으로 CPU내부에는 N비트의 레지스터가 M개 들어있다.3 연산의 분석ㄱ 레지스터 뱅크에 있는 레지스터들 중 R1과 R2를 선택한다.ㄴ 선택된 레지스터에 보관된 값의 덧셈을 수행한다.ㄷ 그 결과를 레지스터 뱅크의 레지스터들 중 R0에 저장한다.4 멀티플렉서 - 레지스터 뱅크에 있는 M개의 레지스터 중 하나의 레지스터를 선택하는 조합 논리회로5 연산장치 - 연산장치(ALU)가 수행해야 할 연산은 대수의 사칙연산과 논리연산이다.6 디코더 - 적절한 입력에 따라 각 레지스터의 load입력 중 하나만 1 로 만들고 나머 지는 0 으로 만들어 주는 역학을 한다.7 쉬프터 - 곱셈 및 나눗셈을 연산장치에서도 수행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쉬프터 를 이용하여 쉽고 간단하게 수행(연산장치의 뒤에 위치)8 카운터 - 카운터는 매 클럭마다 값이 1씩 증가하여 0에서 2c-1 값을 표현하는 논리회로2) CPU 연산부의 동작3) CPU의 동작과 프로그램컴퓨터사용자의 요구사항이 대수 및 논리연산으로 변환되는 과정(알고리즘)프로그래밍 : 연산과정을 컴퓨터가 이해하는 언어로 바꾸는 과정.프로그램 : 컴퓨터가 이해하는 언어의 모음.언어자체를 프로그램 언어(기계어)라 함.기계어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어렵고 실수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작성한 프로 그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 어렵다.어셈블리언어 : 기계어의 단점 보완을 위해 나온 언어.어셈블리어는 기계어로 1:1 변환이 가능, 오류의 가능성이 적고 읽기가 쉬움.3. 명령어의 처리방식1) 메모리와 CPU의 결합1 사람이 요구하는 사항을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연산의 형태로 바꿈.2 컴퓨터 프로그램을 컴퓨터의 내부에 내장시키고 이를 하나씩 차례로 수행.3 폰노이만(Von Neumann)은 1945년 컴퓨터 구조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프로그램 내장방식이란 이름으로 정의 내림.2) 명령어의 처리 단계1 CPU 기능의 확장- 연산될 데이터가 레지스터에 저장되어 있어야 함.- CPU 각 부분에 해당 연산에 필요한 제어신호가 공급되야 함.2 CPU의 동작 : 명령처리의 단계- 페치 : 명령 카운터가 지시하는 어드레스로부터 명령을 명령 레지스터로 이동.- 해석 : 명령으로부터 제어신호 생성, 명령에 포함된 주소의 데이터를 레지스터로 이동.- 실행 및 저장 : 제어신호와 레지스터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연산을 수행하고 결과를 주 메모리에 저장한다. 다음 명령을 위해 명령 카운터의 값이 증가된다.3) CPU와 명령어 세트명령은 연산과, 피연산자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OP코드가 CPU의 설계에 의해 결정되듯이 이를 포함하는 명령 또한 개별적으로 설 계된 CPU마다 다를 수 있다.CPU에서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명령(어)의 집합을 명령어 세트라고 한다.4. CPU의 종류1) CPU의 성능단위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수의 명령을 수행할 있는 가로 평가.MIPS(1초당 수행할 수 있는 명령 집합), FLOPS(초당 수행 할 수 있는 부동소수점 연산의 수)1 파이프라인(pileline)- 페치, 해석, 실행 및 저장의 각 단계가 서로 독립적.- 각 단계의 레지스터 실행속도에 관여.- 명령 실행의 단계만큼 이득을 얻을 수 있다.2 슈퍼스칼라(superscalar)- CPU가 한번에 한 개 이상의 명령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도록 CPU를 설계하는 기법 - 슈퍼스칼라 방식의 CPU는 연산장치가 2개 이상으로 구성(한번에 두 명령어를 수행) 3 캐쉬(cache)메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