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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지리답사 평가A좋아요
    답사보고서(대구의 재발견-대구의 옛 흔적을 찾아서)목차1. 대구의 역사1) 대구의 입지와 영역2) 대구의 장소적 경관2. 답사지 연구1) 400년 영남의 수도 경상감영공원 - ①선화당 ② 징청각2) 대구의 읍성을 찾아서 - ① 토성조영 ② 석성 조영 ③읍성의 파괴3) 약령시4) 대구의 흔적들5) 피로 얼룩진 순교의 현장 관덕정1. 대구의 역사1) 대구의 입지와 영역대구는 신라의 달구화현이며 경덕왕이 대구로 개칭하여 1200년 이상의 유래를 가진 지명이다.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고, 인종 때 현령을 두었다. 조선 세종 때에 승격하여 군이 되고, 세조 때에 진을 두고 승격하여 경산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601년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행정 경제 교통의 요지와 방어상의 요새로 경상도 전체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조선의 학자 김조는 “땅의 형세가 평탄하며 넓다. 겹친 산봉우리는 둘러 있고, 큰 내가 구불구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 라고 표현하여 넓고 평탄한 분지라는 자연 형세와 교통로의 요지임을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가 교통의 요지로서 경제적 중심지, 군사요충으로 중요시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그 영역을 보자면 연구산이 대구의 진산으로 주산인 비슬산에서 수도산을 거쳐 연귀산으로 내맥이 되고 안산은 성불산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귀라.”고 하여 신천이 대구 읍치 중심으로 흘러 지맥을 끊는 것을 비보하려는 풍수적 사고를 보여 주고 있다. 신천 가운데 입암이 있었는데 건들바위 근처인 듯하다.그림 1725년 대구의 읍지도삼국시대 이전부터 대구는 달성을 중심으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달성과 읍성이 병존하며 변화해 왔다.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축성되었으나, 왜란 중에 파괴되었다. 처음에는 성지가 없었으나 감사 민응수가 영남요충지지인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었는데도 방어시설이 없다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구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앙공원'이라 불리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공원 안에는 경상감영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과 경상감영 관찰사 처소로 쓰이던 징청각이 남아 있고,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①선화당선화당은 경상감영의 관청으로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본래 달성에 설치되었다가 안동으로 잠시 이전했던 경삼감영을 선조 34년(1601)관찰사 김신원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 경상감영터에는 선화당과 징청각만 남아있지만, 객사, 군창, 형장 등이 있었다. 그후 선화당은 현종11년(1670) , 영조6년(1730), 순조 6년(1806) 세 차례에 걸쳐 큰 불로 소실되었다. 금의 건물은 순조 7년(1807) 관찰사 겸 부사인 윤광안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후일 경상북도의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대구시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하고 1970년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보수한 것이다. 경상감영의 선화당은 전국에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되어있으며, 단촐하면서도 엄정한 격식이 느껴진다.② 징청각선화당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징청각은 경상감영의 관찰사 처소로 쓰이던 것으로 안동에 있던 감영을 대구로 옮겨올 때 선화당과 함께 지어졌다.. 그후 선화당과 함께 화재로 불탔던 것을 역시 순조 7년(1807)에 중건하였고 중앙공원 조성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규모에 단틍팔작기와집으로 2 고주 7량가의 익공계 건축물로 큼직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2) 대구의 읍성을 찾아서경상감영이 대구부성 안에 설치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구에도 성이 있어서 백성들은 성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가 바로 옛 성터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먼저 과거 대구의 읍성에 관한 기록부터 찾아보았다.① 토성조영(土城造營)에 의하면 보면 "대구는 감사(監司)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아 복판에 큰 들을 감추었으며, 들 중앙에는 금호강이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낙동강과 합친다. 고을 관아는 강 뒤쪽에 있다. 일도(一道)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고 또한 지형이 훌륭한 도회지이다. 대구 동남쪽에서 동래까지 사이에 여덟 고을이 있어 땅은 비록 기름지나 왜국과 가까워서 살 만한 곳이 못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대구는 외침 이외 인간생활에 필요한 제반여건은 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구는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성곽)이 필요한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대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크게 인정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시 명군, 왜군 등이 대구에 주둔하였거나 통과한 사례가 많아 임진왜란 후에 비로소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인정받게 되었다.그림 1903년 읍성의 내부구조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이전에 경상도의 행정기관이었던 경상감영이 상주, 경주, 성주 등 큰 읍에 설치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감영이 대구부로 이치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대구는 경상감영이 이치되면서 명실상부 경상도의 군사, 행정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또한 경상감영과 대구시민을 위한 방어시설물인 성곽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읍성은 영조11년(1735) 3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가 도임함으로써 축성논의가 원숙되어 축성이 실현되었다. 축성공사는 영조12년(1736) 4월 8일에 석성의 돌을 다듬기 시작하여 동년 12월에 성터를 닦고 석축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 6일에 읍성을 완성하였다. 읍성이 완공된 그해 11월 신축일에 준공식을 감영 선화당에서 개최했다. 축성비에는 읍성에 대한 축성경위와 동, 서, 남, 북문을 중심으로 구역별로 분담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는 성역담당 역원 명단을 밝히고 있다. 축성 인부는 대구 부근의 잡색군을 비롯하여 대구, 칠곡의 인군이나 함경도 6진의 속오군 그축했을 당시 동문을 진동문이라 했고, 서문을 달서문, 북문을 공북문,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하였고, 암문은 두 개가 있었는데 동소문, 서소문이라 하였다. 남문은 이층루(二層樓)로 되어 있었고 동, 서, 남, 북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남문이 가장 규모가 컸던 이유는 우리 민족의 남향존중사상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에 부성(府城)을 석축한 이후 수성창을 두고 수시로 행해졌으며 축성 후 134년이 지난 고종7년 (1807)에 성벽의 대수리가 행하여 졌다. 이 공사에서 성벽의 상부에 설치된 치첩은 모두 개축하였으며 성벽의 일면을 더욱 확장하고 성을 높이는 한편 동서남북 네 문의 문루를 개건, 중수하고 성벽 위에 새로 네 개의 누각을 세웠다. 이들 누각명은 동은 정해루, 서는 주승루, 남은 선혜루, 북은 망경루라 하였으며, 또 중간에 4개의 포를 증설하였으며 석돈(石墩)도 증축하였다. 또한 모든 문루는 단청을 칠하고 치첩은 백회로 분장하였다. 영조 때 쌓은 성에는 없었던 포대를 새로 만들어 총포 전래 이후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하도록 하였다. 이 공사는 관찰사 김세호가 부임한 이듬해인 고종 7년(1870) 3, 4월경에 공사를 착공하여 8~9개월간에 걸쳐 행해져 동년 11월에 준공을 보았으며, 수리공사의 총경비는 대체로 70,000전(錢)이었다고 수성비에 기록하고 있다.고지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기준으로 읍성의 동, 서, 남, 북문과 2개의 암문(暗門) 위치를 고증하여 보면,* 동문(진동문:鎭東門):현재의 경상감영공원전면 도로에서 동아백화점 남면 도로와 동성로 와 교차되는 도로상(제일은행 앞).* 서문(달서문:達西門):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전면 도로에서 국채보상공원을 거쳐 서쪽으로 뻗는 도로와 서성로와 교차되는 네거리상(구조흥은행 앞)* 남문(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국채보상공원에서 남족으로 뻗은 종로와 남성로가 교차되는 네거리상에 있었다.* 북문(공북문:拱北門):(주)벽산 좌측 도로와 북성로와 교차하는 도로상.그리고 동장대는 현 중앙파출뿐 아니라 성벽 자체를 민족적 저항의 상징물로 보았기 때문에 성곽을 해체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질서를 허물어뜨리고,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용이하게 하려고 성곽철거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우리 조상들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축성한 읍성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다시 증개축되었으나 결국은 일본 거류민의 청을 받아들여 경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서 우리 정부와 대구시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6-1907년 사이에 완전 철거되었다. 대구 읍성은 대구시가지를 구성한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구조물이었는데, 성곽이 철거됨으로써 가장 대구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지방도시 분위기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읍성에 연유해서 나온 말이나 지명, 도로명, 건물명 등이 현재에도 수없이 많이 남아 불려지고 있는데, 지금의 대구 중심을 이루는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바로 그 것이다.3) 약령시대구 약령시는 한약재를 판매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특수시장의 하나로서 효종(1650~1659) 때 경상감영안 객사 주변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려왔었던 계절시장이다. 약재가 주로 봄과 가을에 채취 수확되었으므로 일년 중 춘령시(음력 이월 초하루부터 그믐까지)와 추령시(음력 동짓달 초하루부터 그믐까지)로 두 번이 열렸었다. 대구약령시의 개설과 관련된 여러 주장 - 법령 또는 관부의 명령에 의해 개설되었다는 주장과 중국에 바칠 공납약재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설되었다는 주장 등 - 들은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정책에 앞장선 식민주의자들과 그들의 농간에 놀아난 일제 앞잡이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이다. 대구에서 약령시가 개설 발전하게 된 것은 경상도 지역이 갖고 있는 태백, 소백산맥의 준령과 구비치는 낙동강 기슭의 천혜의 약재 생산의 보고로서의 지리적 배경 때문에 일찍부터 약재를 유무상통하는 교환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점. 실사구시의 경세가였던 경상감사 임의백공의 알선으로 감영안 객사 주변에서 약재시장이 열렸다는 점. 있다.
    생활/환경| 2007.04.12| 9페이지| 1,500원| 조회(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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